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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후조)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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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徐光
(? ~ 333)

후조의 인물. 자는 계무(季武). 기주(冀州) 돈구군(頓丘郡) 출신. 아버지 서총(徐聰)은 소의 병을 치료하는 것을 업으로 삼던 수의사였다.

2. 생애

어렸을 적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문재가 있었다. 가평 연간에 한나라의 장수이던 석륵의 부하 왕양(王陽)이 둔구군을 공격하자, 당시 13세에 불과하던 서광은 포로로 사로잡혀 한군 진영에서 말을 돌보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서광은 말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채 시와 부만 지었기에, 왕양은 이를 보고 분노하여 서광을 실컷 매질하였다. 왕양에게 흠씬 두들겨맞은 서광은 밤이 지나도록 큰 소리로 울면서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측근으로부터 이 일을 보고받은 왕양은 내심 미안해져 다시 서광을 불러 그에게 시험삼아 붓을 쥐어줘보았더니, 서광은 즉석에서 왕양을 칭송하는 글을 지어 바쳤다. 그제서야 서광의 재능이 예사롭지 않음을 눈치챈 왕양은 그의 옷을 갈아입히고 상관인 석륵에게 그를 천거하였다. 이에 석륵은 서광을 불러 기실참군으로 삼았다.

가평 4년(314년) 정월, 석륵이 유주(幽州)의 군벌 왕준을 정벌하러 출진할 때, 서광도 그를 따라 종군하였다. 석륵은 왕준을 속여 계(薊)에 무혈입성하고, 군사들을 풀어 성을 약탈하는 동시에 서광을 왕준에게로 보내 순순히 잡혀오라는 말을 전하게 하였다. 석륵의 말을 전해들은 왕준이 말했다.
"막되먹은 오랑캐놈이 여공(汝公)을 기만하다니, 어찌 이런 흉역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느냐!"
이에 서광이 답했다.
"그대는 관직이 매우 높고, 작위는 상공(上公)에 이르렀으며, 유주라는 강대한 지역을 거점으로 하여, 그 세력이 돌기병의 고장인 연(燕) 땅 전체에 미쳐 강건한 병사를 수중에 두고 있었다. 하나, 그대는 나라의 경사(京師)가 위태로울 때에도 천자를 구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존호를 올릴 음모를 꾸몄다. 또, 지역을 통치하면서 음란하고 포악한 짓을 마다하지 않아 충량한 이들을 살해하였고, 제멋대로 방자하게 굴었으니, 그 독이 연 땅에 가득 메웠다. 그대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결코 하늘이 꾸며낸 우연이 아니다."
왕준은 당황하여 자리를 빠져나가려 했으나, 당황(堂皇)을 나서던 도중에 석륵을 만나 사로잡히고 말았다. 석륵은 왕낙생으로 하여금 왕준을 양국(襄國)으로 압송케 하고, 시장에서 왕준을 참수하여 공개처형하였다.

광초 3년(320년) 2월, 서진의 장수 소속이 석호에게 사로잡혀 양국으로 끌려오자, 석륵은 서광을 보내 소속에게 자신의 말을 전하게 하였다.
"무릇 황제란 국가를 바로 세우고 마땅히 혼란을 수습함으로써 팔방에서 귀의해 오도록 만들어야한다. 짐의 명성은 이미 널리 퍼졌음에도 그대는 오히려 사마예에게 의지하여, 교만하고 제멋대로 행동하고 짐의 황명을 받들지 않았다. 그대는 짐이 오랑캐라 황제의 자격이 없다 여기는가? 그대는 어찌 이리도 식견이 짧은가? 천하는 덕이 있는 자가 차지한다 하였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이리도 명료하게 차별하는가?"
하지만 소속은 왕준과 달리 그 말을 반박하며 당당하게 죽음을 청하니, 서광은 돌아가 석륵에게 소속의 말을 그대로 전달하였고, 석륵은 오히려 감격하여 소속을 예우하였다.

광초 9년(326년) 3월, 석륵이 야간에 수수한 평민복을 입고 부하들의 근무 태도를 감독하면서 원향(苑鄉)에 이르러 서광을 불렀는데, 이때 서광은 술에 취해있어 석륵의 부름에 응하지 못 하였다. 마침 석륵은 서광이 지금의 대우에 불만을 품고 늘 주위에 원망하는 말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결국 분노를 참지 못 하고 서광을 이참에 아문으로 강등시켰다. 이후 서광이 석륵을 수행해 업(鄴)으로 이동하면서 원망과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숨기지 못 하니, 석륵은 더욱 격노하여
"어찌 경이 감히 원망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느냐!"
라며 크게 호통치고 서광과 그의 처자식을 체포해 투옥하였다.

태화 원년(328년) 11월, 전조의 황제 유요가 고후(高候) 전투에서의 승세를 몰아 낙양을 포위하니, 후조의 수도인 양국이 크게 진동하였다. 석륵은 자신이 직접 출진하여 낙양을 구원하려 했으나, 사마 곽오(郭敖)와 정하(程遐)가 전조군의 기세가 높아 나서면 안 된다며 굳게 간하였다. 이에 석륵은 분노하여 칼을 뽑아 정하와 곽오를 향해 겨누면서 당장 물러나라 소리쳤다. 그리고는 옥에 갇혀있던 서광을 사면해 자신의 앞으로 소환하고 그의 생각을 물으며 말했다.
"유요는 그저 고후에서의 승세를 몰아 낙양을 포위하였을 뿐임에도 범인들은 모두 그 예기를 꺾을 수 없다 말한다. 하나, 유요는 1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100일에 걸쳐 성 하나를 떨어뜨리지 못 하여 그 병사들은 지금쯤 피로에 쩔어있을 것이니, 우리가 정예병을 이끌고 간다면 한 번의 전투로 그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낙양을 지키지 못 한다면 유요는 필시 기주로 뻗어나가 황하 이북을 석권한 뒤, 남쪽으로 고개를 돌려 나의 대업을 멸망시키고 마리라. 정하 등은 나의 친정을 반대하는데, 경의 생각도 이와 같은가?"
서광이 답했다.
"유요는 승세를 타고 있음에도 아직 양국에도 이르지 못 했고 금용성에서 진격이 막혔으니, 이로써 그의 무능함을 알 수 있습니다. 원정군이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공전(攻戰)의 이익을 잃는 것이므로, 만약 천자의 깃발을 내걸고 친히 당도한다면 적들은 분명 그것을 바라만 보아도 무너져 도망칠 것입니다. 천하의 평정은 오늘날의 일거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내린 기회로, 이에 응하지 않을 시 오히려 화만 불러오게 될 것입니다."
석륵이 웃으며 말했다.
"서광의 말이 옳다."
때마침 석륵이 신임하는 승려 불도징(佛圖澄)도
"대군을 이끌고 출정한다면 반드시 유요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라며 거들었다. 석륵은 마침내 친정을 결심하여 경내 안팎으로 계엄하고, 앞으로 이에 대해 간언하는 자는 참수하겠다 엄포를 놓았다. 서광은 금용성을 구원하러 가는 석륵과 종군하였다. 행군 중에 석륵은 뒤돌아 서광을 향해 말했다.
"유요가 군사를 성고관(成皋關)에 많이 배치해두었으면 상책이고, 낙수(洛水)를 지킨다면 차선책이나, 낙양에 눌러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능히 그를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

태화 원년(328년) 12월, 유요는 성고관에 아무런 병력도 배치해두지 않았고, 석륵의 부름을 받은 각지의 후조군이 성고로 집결하였다. 석륵은 성고관에 전조군이 없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낙양으로의 진격을 재개하였고, 말에게 재갈을 물려 밤낮을 쉬지 않고 행군해 낙수의 공현(鞏縣)과 자현(訾縣) 사이로 빠져나왔다. 유요는 황급히 금용성을 포위하던 군사를 거두고 낙수 인근에 진영을 벌렸으나, 전투는 석륵의 예상대로 흘러가 전조군은 궤멸당하고 유요는 사로잡혔다. 석륵의 앞까지 끌려온 유요는 석륵을 바라보고 말했다.
"석왕(石王)이여! 중문(重門)에서의 맹약[1]을 기억하는가?"
석륵은 서광을 통해서 말을 전했다.
"오늘의 일은 하늘이 행한 것일진대, 다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이후 유요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했고, 석륵은 회군하면서 유요도 양국으로 압송하였다. 서광은 양국에 도착한 뒤 참군사에 임명되었다.

태화 3년(330년) 2월, 석륵이 대조천왕(大趙天王)을 칭하자, 서광은 중서령, 비서감으로 승진하였다.

건평 원년(330년) 9월, 명제 석륵이 황제에 올라 석홍을 태자로 삼았는데, 석홍이 글짓기를 좋아하고 유학자들을 가까이 하니, 석륵이 서광에게 말했다.
"대아(大雅: 석홍의 아명)는 장군 가문의 자제답지 않게 성품이 온화하고 조용하오."
이에 서광이 말했다.
"한나라의 고제가 말 위에서 천하를 평정한 후, 성품이 온화한 문제가 즉위하자 한나라는 무위의 치를 이루어냈습니다. 이처럼 평화로운 시기에 난폭한 자는 필요없게 되기 마련이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안배입니다."
서광이 석홍을 칭찬하는 말을 들은 석륵이 크게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자, 서광이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황태자께서는 인의와 효성이 지극하고, 온화하고 선량하며, 겸손함까지 갖추고 계시나, 중산왕 석호가 드세고 포악하여 많은 거짓을 만들어내니, 신은 폐하께서 별세하시게 된 이후의 사직이 위험해질까 우려됩니다. 중산왕의 위세와 권능을 조금씩 빼앗고, 태자께서 조속히 조정의 일에 참여할 수 있게 하십시오. "
명제 석륵은 내심 동의하였으나 서광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건평 2년(331년) 4월, 명제 석륵이 과거 급상과 함께 서진을 공격하면서 업을 침구할 때 불태웠던 업궁을 재건하려 하자, 정위 속함이 상소하여 강력히 간언하였다. 석륵은 분노하여
"저 늙은 신하를 베지 않으면 짐의 궁은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라 하고, 어사대부에게 칙령을 내려 속함을 가두게 하였다. 이에 서광이 나아가 간했다.
"폐하께서는 하늘로부터 총예(聰睿)를 타고 나시어 요, 순이라 할지라도 폐하께 미치지 못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충신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으신다면 하계(夏癸)나 상재(商辛)와 같은 군주가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말은 채택하기에 충분하므로, 부족한 점이 있다 해도 마땅히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어찌 단 한 번의 간언만으로 열경(列卿)을 참하려 하십니까!"
그러자 석륵이 감탄하며 말했다.
"사람을 다스리는 군주가 된 이상 제멋대로 굴어서는 안 된다! 짐이 어찌 그 말에 담긴 충성을 파악하지 못 했겠는가? 지금까지의 일은 장난으로 여겨 주길 바란다. 사람은 자신의 집에 100필의 재산을 모으게 되면 시내의 별장을 탐하게 되는 법이거늘, 하물며 천하의 부를 보유하고 만승에 달하는 존귀함을 누리는 짐이 이와 같은 우를 범할 줄이랴! 일단은 칙령을 중지하고 짐의 직신(直臣)의 마음을 따르도록 하겠다."
이후 석륵은 속함에게 비단 100필과 곡식 100석을 하사하였다.

건평 3년(332년) 정월, 고구려 사신 우문옥고(宇文屋孤)가 이르자, 명제 석륵은 궁중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석륵이 서광에게 말했다.
"과거 왕조의 기틀을 닦은 군주들에 비하면 짐은 어떠한가?"
서광이 답했다.
"폐하의 신묘한 무력과 모략은 한나라의 고제를 능가하고, 영웅적인 기개는 위나라의 무제를 초월하였습니다. 삼왕(三王: 하의 우왕, 은의 탕왕, 주의 무왕) 이래로 폐하께 비견될만한 인물은 없을 것이며, 가히 헌원에 버금간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석륵이 웃으며 말했다.
"사람이 어찌 스스로를 모르겠는가. 경도 자신의 말이 도를 넘었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 짐이 만약 고제를 만난다면 북면하여 응당 그를 섬기면서 한신, 팽월과 채찍질을 경쟁하며 선두를 다투었을 것이나, 광무제를 우연히 만났다면 그와 중원을 두고 나란히 겨루면서 사슴이 누구의 손에 죽었을지 알지 못 하게 되었을 것이오. 이처럼 대장부는 모름지기 공명정대하게 일을 행하여야 하며, 사사로운 일에 구애받지 않음이 해와 달처럼 명확해야 하는 법이니, 끝내 조맹덕이나 사마중달 부자처럼 고아나 과부를 속여 천하를 취해서는 안 되는 법이오. 짐은 마땅히 고제와 광무제 사이에 위치할 따름이니, 어찌 헌원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석륵의 말이 끝난 후, 군신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면서 만세를 불렀다.

어느 날, 양국에 폭풍우가 몰아쳐 건덕전(建徳殿)의 단문(端門)과 양국 시내의 서문(西門)이 벼락을 맞아 무너지고, 이로 인해 사람 5명이 목숨을 잃었다. 또, 서하(西河)의 개산(介山)에서 달걀만한 우박이 내려 평지에서는 3척 가량 쌓이고 땅은 1장 가량 파였다. 여기에 더해서 갑자기 난폭해진 짐승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은 백성이 10,000여 명을 넘었으며, 태원(太原), 낙평(楽平), 무향(武郷), 조군(趙郡), 광평(廣平), 거록(鉅鹿)으로 통하는 1천 여리의 길이 수목이 무너짐에 따라 끊겼고, 곡식은 우박으로 전부 훼손되었다. 석륵은 정복을 갖추고 동당(東堂)에서 군신들을 모은 뒤, 서광에게 물었다.
"역대 이런 재앙이 얼마나 있었는가?"
서광이 답했다.
"주(周), 한(漢), 위(魏), 진(晉) 모든 시기에서 관찰된 적이 있었습니다. 재앙은 천지에서 항상 일어나는 일이나, 명군이 변치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 법이므로, 어떤 이유로 하늘의 노여움을 산 것으로 보입니다. 폐하께서 작년에 한식(寒食)을 금하셨는데, 폐하의 고향에서는 개자추를 대대로 신으로 섬겨왔으니, 그 풍습을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단 한 사람의 탄식으로도 왕도(王道)가 이지러질 수 있을진대, 하물며 뭇 신령들의 원한을 사버리면 어찌 상제께서 노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천하를 모두 같게 할 수는 없더라도 개산 일대는 진나라 문공의 봉지이니 그 백성들로 하여금 이를 받들게 하소서."
이에 석륵이 말했다.
"한식은 이미 병주의 옛 풍습으로 정착되어 있었거늘, 그곳에 나고 자란 짐이라도 이를 다르게 바꿀 수는 없는 모양이오. 전에 밖에서 회의를 하였을 때, 개자추는 제후신에 불과하므로 왕으로서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있어 짐은 이를 따랐을 뿐인데, 이 때문에 재앙이 닥칠 줄이야! 개자추는 비록 짐의 고향의 신이지만 한식에 관한 법을 제대로 제정한다면 이와 같은 재앙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니, 상서(尚書)는 옛 법을 참고하여 규정을 확립토록 하라."
이로써 한식은 병주에서 다시 행해질 수 있었다.

건평 3년(332년) 4월, 서광은 태자 석홍의 외삼촌인 상서우복야 정하와 함께 명제 석륵에게 나아가 중산왕 석호를 제거할 것을 간했다. 서광의 간언을 들은 명제 석륵은 묵묵히 고민하다가 어느정도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태자 석홍으로 하여금 정벌과 참수형에 관한 대사를 제외한 나머지 상서의 주사(奏事)를 결재케 하고, 중상시 엄진(嚴震)에게 태자의 업무를 감독토록 하였다.

건평 4년(333년) 7월, 명제 석륵이 붕어하고 태자 석홍이 황위에 올랐는데, 과연 서광의 우려대로 중산왕 석호가 정권을 잡았다. 정권을 잡은 석호는 그가 제일 먼저 가장 꺼리던 인물들인 정하와 서광을 붙잡아 살해하였다.


[1] 광문제 유연에 명령에 따라 배정(裴整)이 지키던 하내(河内)를 공략할 때 석륵과 유요가 맺은 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