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15:26:43

상앙

공손앙에서 넘어옴
사기(史記)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D0D2D9"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본기(本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rowcolor=#ffffff> 1권 「오제본기(五帝本紀)」 2권 「하본기(夏本紀)」 3권 「은본기(殷本紀)」
공손헌원 · 전욱 · 제곡 · 방훈 · 중화
[ 펼치기 · 접기 ]
^^
하나라
^^
우왕 · 익왕 · 계왕 · 태강
중강 · 상왕 · 후예 · 한착
소강 · 저왕 · 괴왕 · 망왕
설왕 · 불강 · 경왕 · 근왕
공갑 · 고왕 · 발왕 · 걸왕
[ 펼치기 · 접기 ]
^^
선은 先殷
^^
· 소명 · 상토 · 창약 · 조어
· 왕해 · 왕항 · 상갑미 · 보을
보병 · 보정 · 주임 · 시계
^^
조은 早殷
^^
성탕 · 외병 · 중임 · 태갑 · 이윤
옥정 · 태경 · 소갑 · 옹기 · 태무
중정 · 외임 · 하단갑 · 조을 · 조신
옥갑 · 조정 · 남경 · 양갑
^^
만은 晩殷
^^
반경 · 소신 · 소을 · 무정 · 조경
조갑 · 늠신 · 경정 · 무을 · 태정
제을 · 제신
<rowcolor=#ffffff> 4권 「주본기(周本紀)」 5권 「진본기(秦本紀)」 6권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 펼치기 · 접기 ]
^^
서백 西白
^^
후직 · 부줄 · · 공류· 경절
황복 · 차불 · 훼유 · 공비 · 고어
아어 · 주공 · 태왕 · 왕계 · 문왕
^^
서주 西周
^^
무왕 · 성왕 · 강왕 · 소왕 · 목왕
공왕 · 의왕 · 효왕 · 이왕 · 여왕
주정공 · 소목공 · 공백화
선왕 · 유왕 · 휴왕
^^
동주 東周
^^
평왕 · 환왕 · 장왕 · 희왕 · 혜왕
폐왕 · 양왕 · 후폐왕 · 경왕(頃王) · 광왕
정왕 · 간왕 · 영왕 · 경왕(景王) · 도왕
서왕 · 경왕(敬王) · 원왕 · 정정왕 · 애왕
사왕 · 고왕 · 위열왕 · 안왕 · 열왕
현왕 · 신정왕 · 난왕
[ 펼치기 · 접기 ]
^^
진(秦)나라
^^
비자 · 진후 · 공백 · 진중
장공 · 양공 · 문공 · 헌공(憲公)
출자 · 무공 · 덕공 · 선공
성공 · 목공 · 강공 · 공공
환공 · 경공 · 애공 · 혜공
도공 · 여공공 · 조공 · 회공
영공 · 간공 · 후혜공 · 출공
헌공(獻公) · 효공 · 혜문왕 · 무왕
소양왕 · 효문왕 · 장양왕
시황제 · 이세황제 · 진왕 자영
<rowcolor=#ffffff> 7권 「항우본기(項羽本紀)」 8권 「고조본기(高祖本紀)」 9권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
항우 유방 여치
<rowcolor=#ffffff> 10권 -2「효문본기(孝文本紀)」 11권 「효경본기(孝景本紀)」 12권 「효무본기(孝武本紀)」
유항 유계 유철
보사기(補史記) 「삼황본기(三皇本紀)」
복희 · 여와 · 신농
※ 13권 ~ 22권은 표에 해당, 23권 ~ 30권은 서에 해당. 사기 문서 참고
}}}}}}}}}}}}
⠀[ 세가(世家) ]⠀
||<-2><tablewidth=100%><tablebgcolor=#3d414d><width=33%><rowcolor=#ffffff> 31권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 ||<-2><width=33%> 32권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2><width=33%> 33권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 ||
⠀[ 열전(列傳) ]⠀
||<-2><tablewidth=100%><tablebgcolor=#3d414d><width=33%><rowcolor=#ffffff> 61권 「백이열전(伯夷列傳)」 ||<-2><width=33%> 62권 「관안열전(管晏列傳)」 ||<-2><width=33%> 63권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
}}} ||

諸子百家
주요 제자백가 사상가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4E4FF 0%, #F8F8FF 20%, #F8F8FF 80%, #E4E4FF); color: #000; min-height: 34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8F8FF> 유가 공자 자하 맹자 순자
묵가 묵자
도가 노자 장자 양주 열자
법가 이회 오기 신불해 상앙 한비자 이사
명가 혜시 공손룡 등석
농가 허행
병가 사마양저 손무 손빈 울료
불명 고자 후자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중국의 SNS 시나 웨이보에서 발표한 중국인들이 선정한 '가장 위대한 중국인' 명단이다.
TOP 10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공자 시황제 노자 채륜 한무제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마오쩌둥 맹자 수문제 주자 덩샤오핑
11~25위
<rowcolor=#FFF>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사마천 한고제 장자 당태종 장중경
<rowcolor=#FFF>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이사 송태조 주문공 굴원 동중서
<rowcolor=#FFF>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홍무제 석도안 염민 장건 상앙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상앙
商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hangyang.jpg
작위 <colbgcolor=#FFFFFF,#191919>상군(商君)
(姬)
공손(公孫)
이름 (鞅)
최종직위 대량조(大良造)
고향 위나라(衛國)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390년? ~ 기원전 338년

1. 개요2. 인생 전반기3. 진에서의 변법
3.1. 인정을 받기까지3.2. 개혁의 내용
4. 몰락과 최후5. 평가
5.1. 긍정적인 평가5.2. 부정적인 평가
6. 대중매체7. 관련 문서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춘추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재상이자 법가 정치가. 강제의 관중, 북송의 왕안석, 명의 장거정 등과 더불어 중국사에 이름을 남긴 변법가(變法家)이기도 하다.

2. 인생 전반기

본명은 공손앙(公孫鞅)인데, 공손씨인 이유는 위(衛)나라[1]의 공족이었기 때문이다. 또 위나라 군주의 서자 출신이라 '위앙'(衛鞅)으로 불리기도 한다. 진나라에서 상읍(商邑)을 봉지로 받아 상을 씨로 사용하여 '상앙(商鞅)'이라고 부른다.[2][3]

사기》에 따르면 어렸을 때부터 형명학(刑名學, 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학문)에 관심을 가졌고, 성인이 되어서는 고국을 떠나 위(魏)나라의 재상인 공숙좌의 가신이 되었다. 공숙좌는 그의 자질을 알아보고 위 혜왕[4]에게 추천하지만 혜왕은 공손앙을 등용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자 공숙좌는 병으로 죽기 전에 문병온 혜왕에게 '왕께서 공손앙을 쓰지 않으시려거든 반드시 죽여서 후환이 없게 하소서'라고 조언하고 공손앙에게는 '왕에게 그렇게 말했으니 빨리 떠나도록 해라'라고 말했다. 그 말에 공손앙은 "왕이 저를 쓰라는 말도 안 들었는데 죽이라는 말은 듣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여느 때와 다름없이 위나라를 떠나지 않았다. 과연 그의 말대로 혜왕은 노망이라 여기고 그냥 공손앙을 내버려뒀다.

위혜왕의 동생 공자 앙도 위혜왕에게 상앙을 추천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3. 진에서의 변법

3.1. 인정을 받기까지

결국 공숙좌는 병석에서 세상을 떴고, 공손앙은 진 효공(孝公)이 내건 구인령을 듣고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향했다.

각처에서 몰려온 제자백가의 인재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상황에서 효공과 대면할 수 있는 지름길을 찾으려 연구한 끝에 효공이 총애하는 신하인 경감(景監)이란 자[5]에게 줄을 대서 기다리지 않고 바로 효공을 알현할 수 있었다. 이 당시의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처음 효공을 만났을 때 삼황오제의 도인 ' 성인의 도'를 설파했으나, 단기간에 강국의 반열에 올라가기를 원한 효공은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이런 왕도론 따윈 아웃 오브 안중이어서[6] 내내 코를 골며 졸았다.
상앙은 재차 경감에게 부탁해서 효공을 두 번째로 만났는데, 이번에는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3대의 성군들의 정치철학인 ' 천자의 도'를 설파했다. 그러자 효공은 저번보다는 관심을 기울이는 듯했으나 그다지 솔깃한 기색은 아니었다.
사정사정해서 세 번째로 효공을 만난 상앙이 '패자의 도'를 소개하니 비로소 효공은 상앙의 말에 흥미를 가졌다.
이후 상앙이 네 번째로 효공을 만난 자리에서 패자의 도를 상세히 설명하자 효공은 몇날며칠이 지나도록 넋이 나간 채 상앙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효공의 전적인 지원을 받아 상앙은 법치 철학에 근거한 여러 가지 개혁을 실행하였다. 상앙은 군제, 세제, 법제를 정비하고, 토지제도와 군현제를 시행하는 대개혁을 단행했다. 이로 인하여 진나라는 일개 주변국에서 중앙집권화된 군사강국으로 성장하였다. 행정적으로는 농업에 중점을 두어 진행되었고, 귀족의 권력은 줄어들었다.

3.2. 개혁의 내용

상앙이 추진했던 개혁, 즉 변법은 당시 법가사상을 바탕으로 강력한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였다. 천대받는 서생이었던 그는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자신의 정치사상과 법가를 실현할 나라로 진나라를 선택했다. 마침 강력한 부국강병을 원했던 효공과 뜻이 맞아떨어져 2류에 불과했던 진나라를 전국칠웅 최강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된 상앙 변법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7]
상앙은 일명 신상필벌로 요약할 수 있는 법제 개혁을 단행했으며, 이때 제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행한 일화가 있다.
令旣具 未布 恐民之不信
법령은 이미 갖추어졌으나 백성이 새 법령을 믿지 않을까 염려하여 아직 널리 알리지 않았다.
已乃立三丈之木於國都市南門
그래서 세 길이나 되는 나무를 도성 저잣거리의 남쪽 문에 세우고
募民有能徙置北門者予十金
백성을 불러 모아 말하길, 이 나무를 북쪽 문으로 옮겨 놓는 자에게는 10금을 주겠다.
民怪之 莫敢徙 複曰
그러나 백성은 이것을 이상히 여겨 아무도 옮기지 않았다. 다시 말하길
能徙者予五十金
이것을 옮기는 자에게는 50금을 주겠다.
有一人徙之 輒予五十金
어떤 사람이 이것을 옮겨 놓자 즉시 그에게 50금을 주어
以明不欺 卒下令
나라에서 백성을 속이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고 나서 새 법령을 널리 알렸다.

어떤 제도나 정책을 시행할 때 신뢰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로 현대에도 종종 인용되곤 하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나온 사자성어가 이목지신(移木之信)으로, 약속을 지켜서 신뢰를 얻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상앙이 이렇게 법 제도를 확실히 하자 시민들은 그 제도를 칭찬했는데, 상앙은 병사들을 시켜 그들을 잡아오게 했다. 이유인 즉 "법을 싫어하는 자 못지 않게 찬양하는 자도 잡아야 한다"라고. 즉 '이런저런 감정을 넣지 말고 그냥 지켜라'는 의미다.

효공과 상앙의 강력한 추진에도 불구하고 이 변법을 좌초시키기 위한 시도는 여러 번 일어났다. 변법 자체가 기득권층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진나라 최고의 유력부족인 맹, 서, 백씨 부족의 반발과 당시 태사였던 감룡과 두지의 반대로 변법은 여러 번 중단 위기를 맞았다. 효공에게 이르는 반대 상소만 하루 수천 개였다 하니 실로 나라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그래도 상앙은 변법에 대한 반대를 용서하지 않았고, 변법을 어길 경우에는 강력한 엄벌주의로 대처했다. 이 변법 앞에서는 당시 태자였던 영사[11]도 예외는 아니었다. 태자가 변법이 불편하다며 일부러 어기자, 태자는 건드리지 않았지만 스승이었던 공자 영건(효공의 형이자 태자의 백부)에게 죄를 물어 처벌했고, 다른 스승에게는 먹으로 죄명을 얼굴에 새기는 형벌을 내렸다. 이후 영건이 또 죄를 저지르자 코를 베는 형벌에 처했고, 결국 영건은 영원히 은둔하게 되었다. 이 일 때문에 영건과 태자는 상앙에 대해 증오를 품게 된다.

이렇게 밀어붙여진 개혁은 진나라를 크게 안정시킨다. 《사기》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行之十年 법령이 시행된 지 10년이 되자
秦民大說 진나라 백성은 매우 만족스러워하고
道不拾遺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 가지 않으며
山無盜賊 산에는 도적이 없고
家給人足 집집마다 풍족하며 사람마다 마음이 넉넉했다.
民勇於公戰 백성은 나라를 위한 싸움에는 용감하고
怯於私鬦 사사로운 싸움에는 겁을 먹었다.
郷邑大治 도시나 시골이 모두 잘 다스려졌다.

이렇게 착실히 쌓은 국력을 바탕으로 상앙의 진나라는 하서(河西) 지역을 수복했고[12] 당시 마릉 전투 이후 흔들리는 위나라를 치자는 주장을 해 군사령관에 임명된 후 패권 국가였던 위(魏)나라를 제압하고 패자로 등극하게 되었다. 반대로 위나라는 이때부터 약해졌고, 하서 지역을 잃어 도읍인 안읍이 위급해지자 대량으로 천도하게 된다. 이 과정에는 다소 졸렬한 꼼수가 있었는데, 상앙과 친분이 있었던 공자 앙(卬)이 위나라의 사령관이 되자 상앙이 회담을 구실로 그를 유인해 사로잡자마자, 기습대를 보내 사령관 없는 위나라 군대를 크게 무찌른 것이다.[13]

결과적으로 진나라의 군사력은 매우 강대해졌는데, 양인이 많아지면서 병력수가 증대했고 재정이 확충되었기 때문이다. 상앙은 이 공으로 대량조에 올라 효공과 함께 명실상부한 사실상의 공동군주가 된다. 공손앙이 사실 상앙이 된 때도 이때인데 제후에 봉해져 '상' 땅을 봉토로 받았기 때문이다.

4. 몰락과 최후

진효공의 치세가 끝나갈 무렵, 상앙은 다른 이의 소개로 조량(趙良)이라는 숨은 현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상앙이 조량에게 직언해줄 것을 부탁하자, 조량은 진목공 때의 명재상 백리해와 상앙을 비교해 말했다.
오고대부 백리해가 나라를 다스릴 때, 어진 정치를 펼쳐 모든 이들이 그를 존경했고 그가 세상을 떠나자,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세운 제도는 도리를 등지고 당신이 고친 국법은 이치에 어긋나니 이를 교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극형으로 사람을 다스리니 원한을 사고 재앙을 쌓아놓았습니다. 백리해가 나라를 순시할 때 무장한 호위병을 동행할 필요가 없었으나, 당신은 무장한 병사들이 탄 수십 대의 수레가 없으면 외출조차 하려 하지 않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자는 흥하고 마음을 잃는 자는 망한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처지가 이토록 위태로운 데도 더 오래 영화를 누리기를 바라십니까? 관직과 영지를 돌려주고, 물러나 꽃과 풀에 물을 주며 사는 게 어떻습니까? 숨어 사는 현인을 세상에 나오게 하고, 노인을 봉양하고 고아를 보살피며 부모와 형을 공경하고, 공을 세운 자를 추천하며 덕있는 이를 존중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렇게 한다면 마음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직까지 더 많은 영지를 탐내며 진의 정치를 농단하니 백성들의 원한을 사고 있습니다. 진왕께서 세상을 떠나시면 어찌 진나라가 당신을 제거하는 명분이 적다고 하겠습니까? 당신의 파멸은 한 발을 들고 넘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요약하자면 백리해와는 반대로 상앙은 법과 엄벌로 사람들을 억지로 따르게 하고 적을 많이 만들었으니, 이제 더 이상 적을 만들지 말고 은퇴해 조용히 사는 것만이 화를 면할 수 있다는 이야기. 그러나 상앙은 이 말에 따르지 않았다.

조량이 말한대로 효공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그는 점차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특히나 상앙에게 증오를 품고 있던 태자( 혜문왕)는 즉위함과 동시에 상앙의 반대파를 규합했다. 이들은 이제껏 상앙의 변법에 반대를 해온 진나라의 주요 원로세력이었다.[14] 여기에는 옛날에 혜문왕 대신 벌을 받은 공자 건도 포함돼있었다. 이들은 당연히 원한이 만땅인 상태인지라 상앙을 탄핵했다.

이렇게 하루 아침에 반역자가 되자, 상앙은 일단 위(魏)나라로 망명을 하기로 하고 국경이었던 함곡관을 밤에 몰래 넘으려고 했다.[15] 그러나 "새벽 첫닭이 울 때까지", 즉, 해 진 이후부터 해 뜰 때까지 관문을 여는 건 금지돼있다는 게 진나라의 법이었기에[16] 할 수 없이 그 날은 여관에 머물고자 했다. 그러나 여행증이 없는 사람은 받아줄 수 없으며 어기면 주인이 엄벌을 당한다는 것도 진나라의 법이었기에 그는 거절당하고 만다. 그런데 이런 법들을 만든 게 상앙 본인이었다. 그야말로 자승자박의 극치. 결국 자기가 만든 법을 자기가 어기려고 했으며 자기가 만든 법 때문에 자기의 목숨이 위험해지게 된 여기서 나온 고사성어가 '작법자폐'(作法自斃)다.

상앙은 결국 어찌어찌하여 위나라로 갔지만, 위나라 사람들은 그가 은인이었던 공자 앙을 속이고 감금시켜서 전쟁에서 이겼던 일[17]을 잊지 않았기에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상앙이 다른 나라로 떠나려고 하자, 위나라 사람들은 그를 다른 곳으로 고이 보내면 진나라의 보복이 있을까봐 그를 다시 진나라로 돌려보냈다.

상앙은 할 수 없이 살기 위해 일단 자신의 영지였던 상 땅으로 가서 군대를 모았는데, 강대한 진나라 군대와 맞설 자신이 없어 일단 약소국이었던 정나라를 공격해 영토와 인력물자를 확보하려고 했다. 하지만 민지라는 땅에서 혜문왕의 군대가 그의 배후를 쳐 대패하고 포로가 됐으며 결국 살해당하고 만다. 상앙의 시신은 함양으로 보내져 거열형에 처해진 다음에 분해된 조각들이 각 지방에 보내졌고, 연좌제로 삼족이 몰살당했다.

혜문왕은 상앙의 후원자였던 아버지 진 효공이 죽자 절호의 기회를 포착했고, 이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 동안 상앙의 변법으로 권력을 잃은 원로 세력들을 포섭할 필요성이 있었다. 즉위 초에 상앙을 제거함으로써 본인과 상앙의 정적인 원로 세력들의 원한을 함께 풀면서 국정을 안정화했다. 그러나 혜문왕은 정작 상앙의 법은 쓸모가 많다면서 폐지하지 않았다. 변법은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예전의 체제로 되돌리려던 원로 세력들의 통수를 치고 반발하는 이들은 제거해버렸다. 혜문왕은 비록 자신이 어렸을 때 변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벌당했지만, 상앙의 변법에 힘입어 진나라가 발전하는 것을 보고 존경을 표했던 변법 신봉자였고, 혜문왕이 이같은 뛰어난 재치로 국정을 안정시키면서 상앙의 변법은 유지될 수 있었다. 진나라는 혜문왕 때부터 전국칠웅 최강국으로 등극하면서 혜문왕의 현손 진 시황제 천하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그는 생전에 《상군서》라는 책을 집필해 남겨놓았다. 이는 전국시대 역사연구에 아주 중요한 사료가 되며 상앙 자신의 생각을 아주 잘 알 수 있어 귀중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선진문헌이 다들 그러듯 상앙 본인이 집필한 게 아닌 걸로 추정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유비가 죽을 때 유선에게 《상군서》를 열심히 읽으라고 유언한 걸로 보아 이미 후한-삼국시대에도 널리 퍼져있었던 듯하다.[18]

5. 평가

상앙의 변법은 변방 강국에 불과했던 진나라를 단숨에 강대국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이는 훗날 진나라의 천하통일의 기틀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강력한 만이 모든 걸 이룰 수 있다고 믿었으며 교육과 교화에는 관심이 없었고, 사람의 마음이나 인정 등은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법가 성향이 짙은 제갈량조차 상앙은 덕으로 교화함이 부족했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가혹한 법률과 억압적인 정치는 반대파를 양산했고 결국 상앙은 자신이 만든 법에 목숨을 잃었다.
"상군(상앙)은 천성이 각박한 사람이다. 효공에게 등용되기 위해 제왕의 도를 말한 것은 마음에도 없는 헛소리를 지껄인 것일 뿐 본심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군왕의 총애를 받던 경감을 이용했고, 자리에 오른 뒤에는 공자 건을 처형하고 위나라 공자 앙을 속였으며 조량의 간언을 듣지 않았다. 이 또한 그가 각박한 자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나는 일찍이 저 《상자》(商子)[19]의 개색과 경전 등 여러 편을 읽었는데, 그 내용은 그의 행적과 비슷했다. 진나라에서 그의 악명이 높았던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 사마천
사기》의 사마천은 상앙을 '인정머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잔인한 정치가'로 평가했다. 이는 그의 행적도 행적이지만 사마천이 살았던 한나라는 진나라의 가혹한 법가정치를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이며, 상앙은 그 법가정치의 시초인 인물인만큼 좋게 평가할 이유가 없던 것이다. 사마천은 이외에도 《사기》 <열전>의 '혹리' 편을 쓸 당시 그들에 대한 평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근본은 혹독한 법령에 있는 게 아니라 도덕에 있다"고 천명한 적이 있다. 물론, 본인도 상앙이 나라를 강하게 만든 건 인정했다.
"상앙은 진국을 강하게 만든 천재였다. 그러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은인을 배반하였으며 진나라 백성들에게 지나치게 긴장의 끈을 강요하다가 그 긴장의 끈이 끊어지자 자신의 목숨을 잃게 만들었다."- 사마광

반면에 유교 문화가 꽃피운 송나라 시대에 살았던 사마광은 옛 제도를 유지하자는 구법당에 속해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자는 신법당과 대립했다. 그런데 그런 사마광이 유교의 안티에 가깝던 법가를 따른 데다가 나라의 제도를 이것저것 뜯어고친 상앙을 두고 나라를 강하게 만든 천재라고 평가했으니 사마광이 상앙을 상당히 호평했다고 할 수 있다.[20]

그리고 상앙이 철저한 법치주의자로 평등주의를 내세웠지만 지나치게 가혹한 법률을 집행한 탓에 원한을 많이 샀다. 1200년 후 상앙처럼 철저한 법치주의자이지만 가혹한 형벌을 지양하면서 인권을 우선시한 포청천과는 대조적이다.

5.1. 긍정적인 평가

상앙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엇갈리는 것은 강력한 법치가 주로 대토지 소유자 출신인 식자층의 기득권을 침해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요컨대 상앙에 대한 선비들의 부정적인 서술은 호족에 친화적일 수밖에 없는 출신배경을 감안하여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법이 명확하지 않고 관례에 따르는 일이 많아지면 행정/사법에 인적/물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개입할 수 있는 지주 호족/귀족들에게 유리하다. 일례로 초기 법가이자 상앙에게 큰 영향을 미친 위나라의 명재상 이회는 유가의 예법(관습법 혹은 관례)이 귀족의 특권을 옹호하는 기능을 한다고 여겨 예법의 실천에 반대한 바 있다. 다른 예로 한고조 유방은 함양에 입성한 후 약법삼장[21]을 발표하고 법치를 대폭 완화하였는데, 이는 호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포석이 깔려있는 것이었다.

또한 상앙의 변법이 지나치게 대민통제에 치중했다는 비판도 오류가 많은 것이 애당초 전세계 그 어느 지역과 문화권을 막론하고 전근대 왕조들 중 대민통제를 추구하지 않았던 왕조는 없다. 즉 전근대 시절 피지배민들을 상대로 있었던 대민통제로 말할 것 같으면 근대에 접어들면서 인권 의식 등이 발달하기 이전 인류 역사의 전반적인 잔악상을 메타적으로 논할 문제이지 유독 상앙에게만 그와 같은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옳지 않다. 특히 중국 대륙의 경우에는 이미 법가가 출현하기 훨씬 이전인 상나라 시절에도 온갖 지독한 대민통제와[22] 인신공양이 가득했던 곳인데 이에 비하면 상앙의 진나라는 차라리 훨씬 온건한 축에 속했다.

지방 유력자들에게 토지를 빼앗기는 등의 횡포에 시달리던 전근대 중국의 가난한 평민 처지에서는 가혹할지언정 평등한 법이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당장 사마천 사기의 서술만 보더라도 변법 시행 후 10년이 지나자 백성들이 만족해하고 사람마다 마음이 넉넉해졌다고 전하고 있다. 특히 사사로운 싸움을 두려워했다는 말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상앙의 가혹하지만 공평한 법은 역설적으로 밑바닥 백성에게는 힘 센 이의 횡포를 막는 보호막이었던 것이다. 거기다 수급을 베어오면 관작을 올려주는 제도는 신분상승의 기회가 크게 제약돼 있던 전근대 사회에서 능력주의에 따른 출세를 국가에서 보장해주는 획기적인 혁신이었다. 상앙변법이 상앙이 죽은 뒤에도 진나라에서 쭉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패도를 꿈꾸던 왕의 의도뿐만이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어느 정도 지지받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는데, 상앙 변볍과 관련하여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강자와 약자 사이에 억압하는 것은 자유이고, 해방시키는 것은 법이다.

5.2. 부정적인 평가

다만 식자들이 단순히 특권층이었고, 법가와 다른 사상인 유가 신봉자라서 상앙을 극딜했다는 것 또한 여러가지 제반 사항을 고려해서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특히 상앙에서부터 시작된 법가적 통치가 빠르게 중국 전역으로 번진 이후, 처음 발생한 가장 큰 반란인 진승과 오광의 난은 권력자들의 궐기가 아닌 대규모 민란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상앙은 물론이고, 그의 정책을 계승한 진 제국의 황제인 시황제, 그리고 그를 곁에서 보좌했던 이사와 법가의 대표적 사상가인 한비자와 같은 여타 인물들을 혹독하게 극딜했던 사마천은 극렬 유가 신봉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가 살았던 한나라에 무조건 충성하는 인물도, 부유한 권력자하고도 거리가 있었다. 심지어 항우 여후를 실질적인 통치자로 보고 열전이 아니라 본기에 넣은[23] 태사공은 왜 상앙과 그 후예들을 비판했으며, 후대의 정치가인 제갈량은 왜 상앙의 법가적 통치를 무시하지는 아니했으나 한편으로는 상앙과 법가가 가진 한계를 고찰했을까?

일단 법가에서 말하는 '법'과 근대를 거쳐 지금에서 확립된 우리가 알고 있는 '법'의 체계의 사상적 근간에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 긍정적인 평가에서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거론하며 은근슬쩍, 상앙을 위시한 법가가 추구한 법의 근간을 만민의 합의에 의거한 법의 정신과 동일시하고 있으나 상앙이나 한비자, 이사 같은 법가에 속한 이론가와 정치가의 법의 근간은 군주의 절대 권력 확립, 이기적이고 믿을 수 없는 인간을 혹독한 형벌과 적당한 상을 통해 군주가 철저히 통제하는 것에 두고 있으며, 법가를 따르는 정치가 중 군주는 이러한 법 체계와 여러 모략 등을 통해 신하와 백성들이 감히 군주의 생각에 반항조차 할 수 없게끔 통제케 하고, 신하는 군주가 제시하는 의견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면서 군주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하는 처세에 초점을 두었다. 물론 이토록 군주의 권위와 권력이 강하고, 신하가 군주의 의중에 유연하게 처신하도록 할 때, 이 군주와 신하가 사회 전반의 발전과 역량 강화, 백성의 삶에 대한 안정을 염두에 둔다면, 강력한 권위와 그에 순응하는 정책 제안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이며 이것이 진나라가 거대 제국으로 발돋음 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었다.

그러나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가 고작해야 21년이라는 통치기간 끝에 허망하게 붕괴된 것, 그리고 법가적 통치를 통한 강력한 전제 군주를 꿈꾸었던 한무제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어떠한지에 대해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법가적 사상의 한계에는 이토록 강력한 권위와 권력을 쥔 군주 스스로가 어떤 인격과 목표를 지녀야 하는지, 그것이 강화된 권력에 의한 통치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한 고찰이 빠져있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또 상앙의 정책이 전국시대와 같은 정복전 체제에서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천하가 평정되어 전쟁이 적어진 이후에는 백성들을 가혹하게 억압하게 되어 있다는 비판도 있다. 원래 진나라의 법이 엄격해도 전공으로 얻은 작위 반납으로 처벌을 면하는 구조였는데, 이건 달리 해석하자면 까다로운 법과 연좌제로 백성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어서 그 처벌을 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전공을 세워야만 하는 착취 시스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대규모 전쟁이 사라져서 전공을 챙기지 못하게 되니 백성들(특히 피정복민)은 가혹한 진나라 법의 처벌에 그대로 노출된다. 그래서 결국 민심 폭발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6. 대중매체

2009년 드라마 대진제국1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효공에게 사실상 국정을 일임받고 법가사상으로 소국 진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으나 기득권세력을 중시한 혜문왕에 의해 처형된다. 상앙이 처형되는 씬으로 드라마는 막이 내린다.

7. 관련 문서

8. 둘러보기

사기(史記)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D0D2D9"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본기(本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rowcolor=#ffffff> 1권 「오제본기(五帝本紀)」 2권 「하본기(夏本紀)」 3권 「은본기(殷本紀)」
공손헌원 · 전욱 · 제곡 · 방훈 · 중화
[ 펼치기 · 접기 ]
^^
하나라
^^
우왕 · 익왕 · 계왕 · 태강
중강 · 상왕 · 후예 · 한착
소강 · 저왕 · 괴왕 · 망왕
설왕 · 불강 · 경왕 · 근왕
공갑 · 고왕 · 발왕 · 걸왕
[ 펼치기 · 접기 ]
^^
선은 先殷
^^
· 소명 · 상토 · 창약 · 조어
· 왕해 · 왕항 · 상갑미 · 보을
보병 · 보정 · 주임 · 시계
^^
조은 早殷
^^
성탕 · 외병 · 중임 · 태갑 · 이윤
옥정 · 태경 · 소갑 · 옹기 · 태무
중정 · 외임 · 하단갑 · 조을 · 조신
옥갑 · 조정 · 남경 · 양갑
^^
만은 晩殷
^^
반경 · 소신 · 소을 · 무정 · 조경
조갑 · 늠신 · 경정 · 무을 · 태정
제을 · 제신
<rowcolor=#ffffff> 4권 「주본기(周本紀)」 5권 「진본기(秦本紀)」 6권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 펼치기 · 접기 ]
^^
서백 西白
^^
후직 · 부줄 · · 공류· 경절
황복 · 차불 · 훼유 · 공비 · 고어
아어 · 주공 · 태왕 · 왕계 · 문왕
^^
서주 西周
^^
무왕 · 성왕 · 강왕 · 소왕 · 목왕
공왕 · 의왕 · 효왕 · 이왕 · 여왕
주정공 · 소목공 · 공백화
선왕 · 유왕 · 휴왕
^^
동주 東周
^^
평왕 · 환왕 · 장왕 · 희왕 · 혜왕
폐왕 · 양왕 · 후폐왕 · 경왕(頃王) · 광왕
정왕 · 간왕 · 영왕 · 경왕(景王) · 도왕
서왕 · 경왕(敬王) · 원왕 · 정정왕 · 애왕
사왕 · 고왕 · 위열왕 · 안왕 · 열왕
현왕 · 신정왕 · 난왕
[ 펼치기 · 접기 ]
^^
진(秦)나라
^^
비자 · 진후 · 공백 · 진중
장공 · 양공 · 문공 · 헌공(憲公)
출자 · 무공 · 덕공 · 선공
성공 · 목공 · 강공 · 공공
환공 · 경공 · 애공 · 혜공
도공 · 여공공 · 조공 · 회공
영공 · 간공 · 후혜공 · 출공
헌공(獻公) · 효공 · 혜문왕 · 무왕
소양왕 · 효문왕 · 장양왕
시황제 · 이세황제 · 진왕 자영
<rowcolor=#ffffff> 7권 「항우본기(項羽本紀)」 8권 「고조본기(高祖本紀)」 9권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
항우 유방 여치
<rowcolor=#ffffff> 10권 -2「효문본기(孝文本紀)」 11권 「효경본기(孝景本紀)」 12권 「효무본기(孝武本紀)」
유항 유계 유철
보사기(補史記) 「삼황본기(三皇本紀)」
복희 · 여와 · 신농
※ 13권 ~ 22권은 표에 해당, 23권 ~ 30권은 서에 해당. 사기 문서 참고
}}}}}}}}}}}}
⠀[ 세가(世家) ]⠀
||<-2><tablewidth=100%><tablebgcolor=#3d414d><width=33%><rowcolor=#ffffff> 31권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 ||<-2><width=33%> 32권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2><width=33%> 33권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 ||
⠀[ 열전(列傳) ]⠀
||<-2><tablewidth=100%><tablebgcolor=#3d414d><width=33%><rowcolor=#ffffff> 61권 「백이열전(伯夷列傳)」 ||<-2><width=33%> 62권 「관안열전(管晏列傳)」 ||<-2><width=33%> 63권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
}}} ||


[1] 진(晉)에서 갈라져 나온 위(魏)나라가 아니라 주 무왕의 아우 강숙 봉을 시조로 하는 위(衛)나라이다. [2] 상앙의 봉지인 상읍은 무관 근처에 있다. [3] 정작 상앙은 생전에 상앙이라 불린 시간이 극히 짧았다. 상 땅을 봉지로 받은건 진효공 21년인데 진효공은 이후 3년 뒤에 죽기 때문이다. [4] 맹자》의 첫머리에 나오는 양 혜왕이 바로 이 사람이다. 위나라가 영토를 상실하면서 수도를 대량으로 옮겼기 때문에 이 시기 이후의 위나라를 수도의 이름을 따서 양나라라고도 불렀다. [5] 경감은 이름이 아니고 경씨 성을 가진 환관이라는 뜻이다.'감'이 춘추전국시대에는 환관을 뜻하기도 했다. [6] 애초에 효공의 입장에서는 아직 일개 변방국인 진나라가 성인의 도니, 천자의 도니 따지는 건 먼 미래의 얘기고, 당장 주변 국가들을 제압하고 진나라를 강대국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패자의 도가 더 와닿았을 것이다. 실제로 법가가 본격적으로 비판받은 것도, 성인의 도니 천자의 도니 따질 만한 여유가 된 것도 제대로 된 통일왕조인 한나라 때부터였다. [7] 물론, 이런 제도들은 이미 전대인 진헌공 때 실시된 것도 있다. [8] 십오(十五)가 아니다. 갖은자이기도 하면서 각각 "열 사람", "다섯 사람"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9] 동아시아에서는 근대 전까지는 목조 건물이 대부분이라 한번 화재가 나면 번질 위험성이 매우 컸고 특히 실화라면 모를까 방화라면 방화 그 자체만으로도 범법적인데 방화범에게 명백한 목적(재물 약탈 등)이 있다면 더 골치아파진다. 옛날엔 방화는 중죄고 화재는 중대한 재난인 만큼 그걸 진압한 사람이 전공을 세운 것 취급을 받는 것도 아주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니다. [10] 다만, 함양과 장안은 바로 옆이지만 다른 도시다. 함양은 위수 북쪽, 장안은 위수 남쪽이다. 한고제 서한을 건립할 때 장안을 건설한 후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 함양시는 아직도 서안시 북쪽에 존재한다. 바로 시안 셴양 국제공항의 소재지로 여기서의 "셴양"이 바로 함양이다. [11] 진나라 군주의 성씨는 영씨였다. 대표적으로 진시황의 이름은 영정이다. 이 사람은 나중에 효공의 뒤를 잇는 혜문공이 되는데 왕을 칭했기 때문에 혜문왕 혹은 혜왕이라고 한다. [12] 원래 효공의 조상이었던 목공이 진(晉)나라의 내분을 수습해 주고, 진 혜공(문공의 이복 동생)을 군주로 세워주는 조건으로 황하 이서 지역을 받기로 했는데 결국 받지 못하자 힘으로 결국 얻게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진나라 문공의 아들인 진 양공 시대에 이걸 빼앗겼고, 진나라가 분열된 후 위(魏)나라가 차지하고 있다가 손에 넣은 것이다. [13] 드라마 대진제국에서는 공자 앙이 무능하고 오만한 찌질이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이 공자 앙도 공숙좌처럼 위 혜왕에게 상앙을 적극 추천했던 인물이었고 상앙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해준 인물이었다. 비록 공과 사를 엄격히 분리해야하는 전쟁이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은인에게 회담을 요구해놓고서 회담장소에서 납치하는 상앙의 비열한 행동은 두고두고 비판의 대상이 된다. [14] 진 목공 이후로 진나라의 정치는 원로세력과 왕권의 균형을 통해 이뤄졌으나, 점차 그 균형이 무너져 원로세력이 득세하게 됐다. 하지만 효공 이후로 왕권을 다시 회복하고자 변법을 시행한 것이었다. [15] 함곡관은 크게 보면 위나라를 동-서로 나누는 중간 지점에 설치됐으니, 상앙의 변법에 힘입어 위나라 영토를 절반이나 잡아먹은 것이다. [16] 나중에 혜문왕의 아들이였던 소양왕 시대에 그 유명한 제나라 맹상군이 진나라에서 달아날 때도 이런 상황에 놓였는데 그의 식객 중에 닭 울음소리를 기똥차게 흉내낼 수 있는 자가 있었기에 속아 넘어간 수문장들이 문을 열어줘서 달아날 수 있었다. 국경을 지키던 이들은 법을 어긴 셈이었지만 (가짜라곤 해도) 닭 우는 소리가 들리자 연 건데 어쩌겠냐는 식으로 그냥 넘어갔다고한다. [17] 아무리 공사 없는 전쟁이라지만 은인이었던 적 사령관을 회담이라 속이고 감금한 업보라고 볼 수 있겠다. [18]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흔히 유비는 인덕의 아이콘으로 실용적인 모습을 떠올리기 어렵지만 유선에게 남긴 유언에는 상군서와 같이 치국을 위한 여러 서적들을 권한 것으로 보아 단순히 인품만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9] 상앙의 법가 이론을 담은 책으로, 위에 나온《상군서》와 같은 책이다. 귀족의 특권을 억누르고, 엄벌주의와 연좌제를 실시하는 등 혹독한 통치의 전형을 보여준다. [20] 어쩌면 당시 신법을 주창하여 신법당을 이끌었던 왕안석과의 애증 때문일 수도 있다. 구법당의 사마광은 신법당의 왕안석과는 정적관계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서로 존중하고 공경하는 관계였다. 또한 사마광은 왕안석의 신법의 가치는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신법이 가져다올 부작용을 우려했고 실제로도 부작용이 있는건 사실이었다. 즉 본인은 무조건적으로 개혁을 기피하는 것도, 개혁가를 혐오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정치성향이나 상앙이 개인적으로 한 일과 무관하게 '상앙의 개혁으로 진나라가 강해진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기에 사실 그대로를 쓴 것이라 볼 수 있다. [21]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상해를 입힌 자와 재물을 훔친 자 역시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행한다. 이 세 개의 법만을 남기고 다른 모든 법을 폐지하였다. [22] 예를 들어 백성을 뜻하는 한자 자는 본래 노예로 잡혀온 사람의 눈()에 날붙이를 쑤셔넣어 멀게 만드는 것에 기인한 상형문이었다. [23] 후한 초기에 편찬된 한서에는 항우본기와 여후본기가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