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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01:12:22

장중경

張仲景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행적3. 교자의 창시자4. 관련 사료5. 매체에서6. 둘러보기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에 산 것으로 추정되는 전설적인 의사.

2. 행적

본명은 기(機 혹은 机)라고 하며, 형주 남양군 열양읍 출신이라 한다. 출생 연도는 150~154년 사이, 사망은 215~219년으로 추정[1]되며, '중경(仲景)'이라는 이름은 이다.[2] 항우 장제스처럼 본명보단 자로 더 유명한 사례이다. 상한잡병론의 저자로 이를 다시 재구성해서 지어진 상한론의 교신저자(?)이기도 하다. 동 시대의 인물인 화타, 동봉과 함께 건안삼신의(建安三神醫)라 불린다.

벼슬은 효렴을 거쳐 장사태수에 이르렀다고 하나 이 사람이 살았던 시대의 정사인 삼국지 후한서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그가 장사태수를 지냈다고 해서 장장사라 불렀다[3]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일부 학설에 따르면 손견 사망 이후 장사태수를 하다 유표에게 반란을 일으킨 張羨(장선)을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있으나, 장선이라는 사람이 의술에 능했다는 기록이 없어 학계에서는 논란이 분분. 게다가 생몰년도도 맞지 않는데, 장선은 서력 200년에 병으로 사망했지만 장중경은 그 이후까지 생존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라는 의견이 정설이며, 이 경우 장중경은 장선이 죽고 그 아들이 유표에게 항복한 뒤에 장사 태수가 되었다가 조조에 의해 한현이 장사 태수로 임명될 때 갈렸다고 추정해 볼 수가 있다. 이 추측이 맞다면 한현의 전임 태수인 셈.

다만 그의 관직 수행 여부에 상관없이, 바로 다음 세대의 의학가인 황보밀이 침구갑을경의 서문에 장중경의 일화에 대해 언급하는 것[4]이나 황보밀이 장중경을 언급한 내용이 진서에 나오는 것을 볼 때 존재 자체는 확실했던 것 같고, 아마도 벼슬을 한 것도 사실인 것 같다.[5]

장중경 본인이 상한잡병론에 쓴 자서에 따르면, 후한 말기에 난리가 빈번하고 역병이 유행하여 사망자가 많았는데, 장중경의 가족들도 과반수는 일찍 질병으로 사망하였기에 의술을 배웠다고 한다. 젊은 시절부터 유명했던 의술은 마을의 의사였던 장백조라는 사람으로부터 배웠다고 하며, 그 계기는 삼황오제 전설 속의 신의(神醫) 편작의 이야기를 듣고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그의 업적이라면 역시 상한론의 원전인 《상한잡병론》의 저술일 터이다. 당시 의술은 침구가 주류이고 탕약은 부차적인 것으로서, 탕약의 복용에 대해 정리된 학설이 없어 약초의 효능 정도만이 이리저리 흘러다니고 있었다. 말하자면 통합적인 의료 체계가 잡히지 않고 민간요법만 중구난방으로 떠돌던 상황.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탕약을 침구와 동등한 위치로 끌어올린 것이 바로 장중경이다. 따지고 보면 시대도 황제내경에서 얼마 되지도 않고, 황제내경은 워낙 학설의 짜집기가 심하고 후대에 개찬된 것도 많음을 감안하면 사실상 동급의 원전을 써낸 셈.

그의 저서로는 상한잡병론 이외에도 《요부인방》, 《오장론》, 《구치론》, 《황소약방》, 《변상한》, 《요상한신험방》, 《평병요방》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전해지지 않는다.

아무튼 화타와 동시대의 또 다른 의학의 별이지만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은데, 이게 다 삼국지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지의 주요 인물들과 밀접하게 엮인 바가 없고, 이 때문에 정사 삼국지에 기록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삼국지연의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황보밀과 맥결의 저자인 그의 제자 왕희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로 한의학계에서의 존재감은 장중경이 화타를 압도한다. 무엇보다 상한론은 현전하지만 화타의 저작은 현전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이유. 또한 장중경이 흔히 한의학을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탕약과 침구 처방에 능했던 반면 화타는 절개를 동원한 외과시술 쪽으로 더 유명한 것도 한 몫을 했다. 뭐 두 사람 모두 건안삼신의에 꼽혔으니 위상 자체는 동급이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고마워하며 청나라 초 순치제 재위기에 지금의 허난성 난양시(남양) 장중경의 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그의 사당인 의성사(醫聖祠)를 세웠는데, 청나라 함풍 이후 여러 차례 흉년이 들어 점차 황량해지고 건물이 황폐해졌으며 1928년에는 군벌 스여우싼의 군대가 다시 크게 훼손하였다고 한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남양시 인민정부는 1950년대에 사당을 두 차례 보수하여 장중경기념관을 건립하였으나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이 다시 철저히 파괴해 버리면서 거기 남아 있던 그의 기념품들도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이 시기에 장중경의 동상이 파괴되고 묘정과 비석이 파괴되었으며, '장중경기념관'의 전시품이 모두 약탈되었다. 현재의 의성사는 문화대혁명 이후에 재건되었으며, 현재 전국 주요 문화재 보호 단위와 국가급 4A 명승지이다. 현재의 의성사(醫聖祠)의 대문은 한나라의 건축양식을 재현한 것이며 현판 '의성사(醫聖祠)'라는 세 글자는 1959년 12월에 곽말약(郭沫若)이 썼던 것이라고 한다. 출처1 출처2

2021년에는 제로 코로나 정책을 펼치던 시진핑이 장중경의 사당에 방문해서 화제가 되었다. #

제자로는 두도(杜度)와 위침(衞沈) 등이 있다.

3. 교자의 창시자

파일:취한쟈오얼탕.jpg

장사 태수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인 남양으로 내려간 뒤, 혹독한 추위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동상에 걸리자 이를 치료하기 위해 약재와 고기를 넣은 요리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이름이 취한쟈오얼탕(祛寒嬌耳湯, 거한교이탕)으로 불렸다고 전해진다. 당시 문서에 의하면 얇은 밀가루 반죽에 고기와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약재들을 넣어 빚은 귀 모양의 음식 쟈오얼(嬌耳, 교이)을 만들고, 이를 넣어 탕을 끓인 탕을 약탕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만두가 밀가루빵이고 교자가 얇은 밀가루 피로 재료를 싼 음식인 걸 감안한다면 실제로 둘의 역사가 다르게 시작됐다는 전설이 그럴 듯 하다.

4. 관련 사료

5. 매체에서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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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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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에서는 대개 150~219로 추정 [2] ''이라는 글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차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3] 당시에는 지방관으로 임명된 사람을 '성+임지'로 부르는 문화가 있었다. 유비가 예주자사를 지낸 적이 있어 '유예주'로 불린 것과 같은 이치. [4] 같이 근무하던 20대의 시중 왕찬의 죽음을 예언한 이야기. 그런데 복용하라고 준 것이 오석탕이다. 어째 오석산과 이름이 같지만 한의학에서 산제와 탕제는 이름이 비슷하더라도 전혀 다른 처방인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상한잡병론에 나오는 사역산과 사역탕. 하나는 시호, 작약, 지실, 감초로 구성된 처방이고, 다른 하나는 건강, 부자, 감초로 구성되어 효능이 전혀 다르다. 참고로 오석탕은 상한잡병론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오석산의 구성 약재도 나오지 않는다. [5] 다만 정말 장사태수였는가는 의견이 분분한데 일단 이 사람의 사적이 기록된 《명의록》이 당나라 사람의 저작인데다가 위진남북조시대 사람들의 저작에는 이런 언급이 없고, 동시대 역사서에도 관련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