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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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83D8B><colcolor=#fff> 전진의 반역자 苻菁 | 부청 |
|
시호 | 없음 |
작위 | 평창공(平昌公) → 평창왕(平昌王) |
성 | 부(苻) |
휘 | 청(菁) |
자 | 불명 |
생몰 | ? ~ 355년 6월 |
출신 | 악양군(略陽郡) 임위현(臨渭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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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진의 황족. 태조 혜무황제 부홍의 손자. 고조 경명제 부건의 조카(형의 아들)[1]. 나름 전진 건국에 공을 세웠던 개국공신이었으나, 경명제 부건이 병상에 누운 틈을 타 태자 부생을 죽이고 황위를 빼앗으려다 실패하고 제거당했다.2. 생애
영화 6년(350년) 3월, 삼진왕(三秦王) 부홍이 암살당하고 세자 부건이 부홍의 뒤를 이어 저족을 통솔하게 되자, 부청도 무리를 이끌고 부건과 합류하여 양무장군에 임명되었다.영화 6년(350년) 8월, 석민의 정변으로 후조가 무너지고, 후조의 거기장군 왕랑(王朗)은 업(鄴)을 석민에게서 되찾기 위해 정예군을 거느리고 장안(長安)을 떠났다. 왕랑은 사마 두홍(杜洪)을 남겨두었는데, 두홍이 장안성을 스스로 점거하고 정북장군, 옹주자사를 자칭하니, 관서(關西)의 이민족과 한족들이 모두 그에게 호응하였다. 관중을 중심으로 세력을 성장시킬 작정이었던 부건은 장안을 빼앗고자 자신도 정서대장군, 옹주자사를 자칭하고 전군을 들어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지관(軹關) 돌파 임무를 맡은 부청이 군사 7,000명을 이끌고 출진하기 직전, 부건이 그를 마중나오면서 그의 손을 붙잡고
"만약 이기지 못한다면 너는 하북에서 죽을 것이고, 나는 하남에서 죽을 것이니 앞으로 다시는 서로 볼 일이 없으리라!"
라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후 군대를 이끌고 황하를 건넌 부청은 곧바로 건너온 부교를 불태워 퇴로를 끊고 선봉인
어준과 함께 서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부청과 어준은 황하 이북을 휩쓸면서 지나는 곳마다 성읍을 모두 함락시켰고, 그 소식을 들은 두홍은 두려워 장안을 더욱 굳게 닫아 지켰다.영화 6년(350년) 9월, 위수 이북에 이른 부청은 두홍의 정로장군 장선(張先)을 격파하고 사로잡으니, 삼보의 군, 현들부터 작은 보루들까지 전부 부청에게 항복해왔다.
영화 6년(350년) 11월, 마침내 장안에 입성한 부건은 참군 두산백(杜山伯)을 동진으로 파견하여 승전보를 알렸다. 당시 관중의 민심은 진나라를 그리워하고 있었기에, 이를 들은 진주(秦州)와 옹주(雍州)의 백성들이 부건에게 귀부하였다.
황시 원년(351년) 정월, 부건이 스스로 천왕, 대선우에 올라 국호를 대진(大秦)이라 정하면서 전진을 건국하였다. 부청은 위대장군에 임명되어 서궁과 동궁을 숙위하였고 평창공(平昌公)에 봉해졌다.
황시 2년(352년) 정월, 부건이 황제로 즉위하여 여러 공들을 왕으로 올리자 부청 또한 평창왕으로 진봉되었다.
황시 2년(352년) 6월, 동진의 안서장군 사상과 강족 수령 요양이 전진의 예주목 장우(張遇)가 진수하고 있는 허창(許昌)을 공격하였다. 경명제 부건은 부청과 부웅에게 보•기 20,000명을 주어 장우를 구원하는 동시에 이참에 관동의 땅도 빼앗아 오게 하였다. 부웅과 부청은 영수(穎水)의 계교(誡橋)에서 사상의 군대와 싸워 대승을 거두고 적병 15,000여 명을 사살하였다. 사상은 작피(芍陂)에 요양을 남겨둔 채 회남(淮南)으로 돌아갔고, 북벌을 준비하던 은호는 사상의 패전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수춘(壽春)으로 회군하였다.
황시 3년(353년) 3월, 전량의 장중화가 장수 장홍(張弘), 송수(宋脩)에게 보•기 15,000명으로 진주(秦州)의 정로장군 왕탁(王擢)과 합류케 하고, 전진을 정벌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부청은 부웅을 따라 용여(龍黎)로 나아가 전량군을 대파하고 적군 12,000여 명을 참수하였으며, 적장 장홍과 송수를 사로잡았다. 병력을 소진한 왕탁은 진주를 포기하고 전량의 도읍인 고장(姑臧)으로 달아났고, 경명제 부건은 영군장군 부원(苻願)을 진주자사로 삼아 상규(上邽)에 주둔시켰다.
황시 3년(353년) 6월, 좌위장군 부비(苻飛)가 구지의 양초를 공격했다가 패하니, 부웅과 부청은 보•기 40,000명을 이끌고 농동(隴東)에 주둔하였다.
황시 3년(353년) 9월, 부웅은 먼저 20,000 군사를 인솔하여 장안으로 귀환하고, 부청은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상낙군(上洛郡)을 침공해 평정하였다. 경명제 부건은 상낙의 풍양천(豐陽川)에 형주(荊州) 관청을 설치하고 보병교위 곽경(郭慶)을 형주자사로 삼았다.
황시 4년(354년) 2월, 동진의 정서장군 환온이 40,000 군사로 북벌하여 청니(青泥)에서 전진군을 격파하였고, 동진의 양주(梁州)자사 사마훈이 자오도(子午道)를 통해 장안을 노리면서 전진의 서쪽 변경을 노략질하였으며, 전량의 진주자사 왕탁은 진창(陳昌)을 공략해 동진군에게 호응하였다.
황시 4년(354년) 4월, 부청은 경명제 부건의 명을 받고, 태자 부장(苻萇), 동해왕 부웅, 회남왕 부생, 북평왕 부석(苻碩)과 더불어 요유(嶢柳)로 향해 환온의 북진을 막았다. 두 군대는 남전(藍田)에서 맞붙어 치열한 혈전을 벌였으나, 환온이 친히 전투를 독려하면서 동진군이 온 힘을 다해 싸우자 전진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동진군은 장안성 동쪽 파상(灞上)까지 나아갔고, 부청 등은 태자 부장을 따라 장안성 남쪽에 주둔하여 지켰다.
황시 4년(354년) 6월, 동진군이 보급 문제로 후퇴하기 시작하자, 태자 부장은 전군을 들어 그 뒤를 습격하였다. 환온은 동관(潼關)에 이를 때까지 전진에게 연속으로 패하였고, 죽은 자가 수만 명을 헤아렸다.
황시 4년(354년) 10월, 태자 부장이 옹현(雍縣)에서 동진군에게 호응하면서 봉기한 교병(喬秉)을 토벌해 참수함으로써 환온의 북벌은 막을 내렸고, 부창은 동진군을 막은 공로를 인정받아 사공으로 승진하였다.
황시 5년(355년) 4월, 회남왕 부생이 태자에 올랐을 때, 부청은 태위로 옮겨졌다.
황시 5년(355년) 6월, 경명제 부건이 병들어 눕자, 부청은 병사들을 정돈한 다음 동궁(東宮)으로 쳐들어가 태자 부생을 죽이고 황위를 찬탈하려 하였다. 당시 부생은 서궁(西宮)에서 부황 부건의 병을 간호하고 있었으므로, 동궁에 부생이 없는 것을 확인한 부청은 경명제 부건이 붕어했음을 단정짓고 조정을 장악하기 위해 동액문(東掖門)을 공격하였다. 변고를 들은 경명제 부건은 병상에서 일어나 단문(端門)에 오르고, 군사를 정열하여 스스로를 보위하였다. 경명제 부건이 아직 건재한 모습을 본 부청의 병사들은 무척 당황하였고, 이내 두려워 모두 병장기를 내던진 채 해산해버렸다. 경명제 부건은 그 자리에서 부청을 체포해 죄를 열거한 뒤 처형하였고, 부청의 난에 가담한 이들의 죄는 따로 묻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