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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22:50:39

문체반정

1. 개요2. 전개3. 무엇이 '패관문체'인가?4. 목적5. 여담6. 같이보기

1. 개요



18세기 말 조선 후기 정조가 당시 양반 사이에서 유행하던 문체였던 패관문체()를 배척하고 고문(古文)을 부흥시키려 했던 문풍 정책이다. 쉽게 말해 지식인들은 과거의 문체로 글을 쓰라는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인터넷 신조어 문학 배척 운동, 공무원 바른 표준어 쓰기 운동과 비슷한 느낌일 듯. 여기에 정부 기관이나 개인이 소장했던 패관문학이나 잡서[1]를 불태우고 수입도 금했다.

'반정(反正)'이라는 단어가 정치적인 수사인 만큼, 당대에는 '문체반정'이 아니라 기사순정(其辭醇正, 문장을 순수하고 바르게 함) 또는 비변귀정(丕變歸正, 크게 변하여 바름으로 돌아감)이라는 말을 썼다. '문체반정'이라는 표현은 후대의 연구자들이 이 운동이 의도한 정치적 목적성에 초점을 두고 붙인 명칭이다.

2. 전개

동지정사 박종악(朴宗岳)과 대사성 김방행(金方行)을 불러들여 접견하였다. 상이 종악에게 전교하기를,

"어제 책문의 제목 하나를 내어서 위서(僞書)의 폐단에 관해 설문을 해보았다. 근래 선비들의 추향이 점점 저하되어 문풍(文風)도 날로 비속해지고 있다. 과문(科文)을 놓고 보더라도 패관 소품(稗官小品)의 문체를 사람들이 모두 모방하여 경전 가운데 늘상 접하여 빠뜨릴 수 없는 의미들은 소용없는 것으로 전락하였다. 내용이 빈약하고 기교만 부려 전연 옛사람의 체취는 없고 조급하고 경박하여 평온한 세상의 문장 같지 않다. 세도와 유관한 것이어서 실로 작은 걱정이 아니다. 내가 그것을 바로잡아 보려고 고심 끝에 책문의 제목으로까지 내었던 것인데 만일 그 폐단만을 말하고 실효를 거두지 못하면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이러한 폐단의 근원을 아주 뽑아서 없애버리려면 애당초 잡서(雜書)들을 중국에서 사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제일이다. 그리하여 앞서의 사행 때도 물론 누누이 당부해 왔었지만 이번 사행에는 더욱더 엄히 단속하여 패관 소기(稗官小記)는 말할 것도 없고 경서(經書)나 사기(史記)라도 당판(唐板)인 경우 절대로 가지고 오지 말도록 하고,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을 건널 때 하나하나 조사해서 군관이나 역관 무리라도 만일 가지고 오는 자가 있으면 바로 교서관에서 압수하여 널리 유포되는 폐단이 없게 하라.

경사(經史)는 잡서와는 다르므로 이렇게 엄금한다면 다소 지나친 것 같으나 우리나라에 있는 것만도 빠진 것 없이 다 갖추어져 있어 그것만 외우고 읽어도 무슨 일인들 참고하지 못하겠으며 어떤 문장인들 짓지 못하겠는가. 더구나 우리 나라 서책은 종이가 질겨 오랫동안 두고 볼 수 있으며 글자가 커서 늘 보기에도 편리한데 하필 종이도 얇고 글씨도 자잘한 당판을 멀리서 구하려 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것을 꼭 찾는 이유는 누워서 보기에 편리해서인 것이다. 이른바 누워서 본다는 것이 어찌 성인의 말씀을 존숭하는 도리이겠는가."

하니, 종악이 아뢰기를,

"지금 성교를 받자오니 문교(文敎)를 숭상하고 바른 학문을 부양하여 만세를 두고 영원한 장래를 염려하시는 위대한 전하의 말씀임을 알고 이루 말할 수 없이 흠앙스럽습니다. 신도 당연히 엄히 금하여 만에 하나라도 그 뜻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대사성 김방행에게 이르기를,

"성균관 시험의 시험지 중에 만일 조금이라도 패관 잡기에 관련되는 답이 있으면 비록 전편이 주옥같을지라도 하고(下考)로 처리하고 이어 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여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여 조금도 용서가 없어야 할 것이다. 내일 승보시(陞補試)를 보일 때 여러 선비들을 모아두고 직접 이 뜻을 일러주어 실효가 있게 하라. 엊그제 유생 이옥(李鈺)의 응제(應製) 글귀들은 순전히 소설체를 사용하고 있었으니 선비들의 습성에 매우 놀랐다. 지금 현재 동지성균관사로 하여금 일과(日課)로 사륙문(四六文)만 50수를 짓게 하여 낡은 문체를 완전히 고친 뒤에야 과거에 응시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일개 유생에 불과하여 관계되는 바가 크지 않지만 띠를 두르고 홀을 들고 문연(文淵)에 출입하는 사람들도 이런 문체를 모방하는 자들이 많으니 어찌 크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일전에 남공철(南公轍)의 대책(對策) 중에도 소품(小品)을 인용한 몇 구절이 있었다. 그가 누구의 아들인가. 나도 문청(文淸)[2]에게서 배웠지만 지성으로 가르치고 인도해 주었기에 비로소 글을 짓는 방법을 알았다. 그의 문체는 고상하고 전중(典重)하여 요사이의 문체에 비할 바 아니었으므로 나도 그 문체를 매우 좋아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의 아들로서 그러한 문체를 본받는다면 되겠는가. 오늘 이 하교가 있었음을 듣고서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올바른 길로 가기 전에는 그가 비록 대궐에 들더라도 감히 경연에 오르지는 못할 것이며 집에 있으면서도 무슨 낯으로 가묘(家廟)를 배알하겠는가.

공철의 지제교 직함을 우선 떼도록 하라. 그 밖에 문신들 중에서도 너무 좋아하는 자들이 상당히 있으나 일부러 한 사람 한 사람 지명하고 싶지 않다. 정관(政官)으로 하여금 문신 중에서 그런 문체를 쓰는 자들을 자세히 살펴 다시는 교수(敎授)의 후보자로 추천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정조실록》 정조 16년(1792) 10월 19일자 첫 번째 기사 #
정조는 명말청초의 문집과 패관소설류, 잡서의 영향으로 당대 양반 사회에서 패관문체가 크게 유행하자 이것을 우려하였다. 패관이란 본디 옛 중국에서 왕이 민간의 풍속이나 정사를 살피고자 거리의 시사, 소문 등을 모아 기록케 한 임시직 사관을 가리키는 벼슬 이름인데, 후대로 오면서 이야기를 짓는 사람도 패관이라 일컫게 되었다. 당대 패관문체는 민간이나 말단 지방 유생들 정도를 넘어 꽤 학식 높은 사대부 학자들 사이에까지 퍼졌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연암 박지원이었다.

정조가 오늘날 대중들에게 개혁군주로 인식되는 점을 생각하면 꽤나 얄궂은 일이지만, 정황상 정조는 문화적으론 꽤나 근본주의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올바른 문풍이야말로 사회의 도덕성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여겼고, 문체반정도 이러한 목적으로 시행했다. 정조가 당대 유행하던 《 삼국지연의》를 잡스러운 책이라고 하면서 "나는 삼국지(연의)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 평소에 내가 읽는 책은 성인과 현인들이 남기신 경전을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말한 기록이 실록에 있다. 실록 링크.[3][4]

정조 15년(1791) 규장각 제학 오재순 기록에 의하면 정조는 "근래 사람들은 에 대한 취향이 나와 상반되니, 그들이 즐겨보는 것은 대개 병든 글이다. 어떻게 하면 이를 바로잡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한탄도 한다. 본인 취향이 남다르다는 건 인식한 듯 이렇듯 정조의 발언을 종합해보면 정조 입장에선 패관문체 대신 사용해야 할 문체란 바로 고전 속 문체였으며, 성리학과 옛 성현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문체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봤다.

정조는 문체반정을 시작하면서 왕립도서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규장각을 새로 건립했다.[5] 패관문체로 쓰여진 소설과 잡서 등의 서적을 모아서 불태웠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것까지 거두어 모아 불태우게 하고 나아가 중국에서 수입하지 못하도록 금하였고[6], 주자 본인이 직접 쓴 글과 두보 등 다양한 고문체 서적들을 신간하여 널리 보급하였다. 또 이런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대과에서 장원으로 평가받은 유생 이옥을 답안지 문체가 패관문체라는 이유로 꼴찌로 강등해버리는가 하면, 김조순, 박제가, 박지원과 같은 당대 유명 문인들에게도 패관문체를 사용한 죄로 고문체로 쓴 반성문을 바치라고 명령했다.[7] 덧붙여 성균관 유생들도 패관문체를 사용한 것이 적발되면 과거 응시 자격을 임시로 박탈했다가 문체를 교정하면 다시 응시 자격을 주곤 했다.
요즈음 대간과 옥당의 반열에 있는 자들을 보면 그저 치고 때리는 습관만 보여줄 뿐 충성을 바치기를 원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간혹 구언(求言)을 하더라도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치듯 하기나 하고 혹은 조그마한 장애 때문에 긴요한 일을 그만두자고 하거나 잘못을 바로잡는다고 하면서 더욱 못쓰게 만들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그냥 놔둔 채 멋대로 되게 한다면 골짜기에 밀어 떨어뜨리는 것과 다름이 없기에 신중하게 돌아보아도 어떻게 해야만 현재 양쪽 다 좋은 방책이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그대가 올린 만언소(萬言疏)를 보니, 이단(異端)이 정상적인 법도를 해치고 어지럽게 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폐단을 설명하고 구제할 방도를 제시하였는데, 무엇보다도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간절한 정성에 입각하여 교화의 근원을 우선 맑게 하는 공부를 하라고 직간을 하며 요구하였다.

나의 백성이 새롭게 되지 못하는 것은 나의 학문이 덕을 밝히는 데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고, 우리 나라가 인(仁)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나의 공부가 극기복례(克己復禮)하는 데에 독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밖에 함양하는 공부가 부족한 것과 겉치레에 치중하는 데 따른 폐단과 정시(程試)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과 선비의 취향에 내실(內實)이 결여되어 있는 것 등에 대해서도 모두 푯대가 바로 서있지 않기 때문에 그림자가 곧바르지 못한 것이라고 하면서 나에게 내 몸을 반성하고 내 마음속을 따져보라고 하였는데, 그대(최헌중崔獻重)가 해 준 말이야말로 구구절절 모두가 약석(藥石)으로서 흡사 한 첩(貼)의 청량산(淸凉散)과 같다고 할 것이니, 어찌 이 말을 약으로 여기고 받아들여서 가슴속 깊이 새겨두지 않겠는가.

이밖에 잡서(雜書)의 폐단에 대해서 말한 것은 더욱 정곡을 찌른 것이라 하겠다. ‘잡서를 보지 말라. 정력(精力)이 분산될 우려가 있다.’고 한 것은 주부자(朱夫子)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더구나 저 기괴하고 사설로 가득찬 책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야말로 모조리 태워 재로 만드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내부(內府)에 소장된 것 가운데 패관소설(稗官小說)로 이름 붙여진 것들은 옛날 편적(編籍)에 들어 있었던 것까지 아울러 서가 사이에서 없애버리도록 한 지가 벌써 수십 년이 되었는데 가까운 반열에 출입하던 사람들은 모두 이를 듣고 보았을 것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것까지 거두어 모아 불태우게 하는 것은 한갓 소요만 일으킬 뿐 명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을 우려도 있다.[8] 그러나 명나라와 청나라의 비뚤어진 인사들이 지은 문자에 대해서는 안으로 오부(五部)로부터 밖으로 팔역(八域)에 이르기까지 일체 없애버리고 감히 집안에 놔두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 교령(敎令)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주부자가 황벽승을 논하면서 전형을 분명히 바르게 한 율을 적용토록 할 일을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하라.
《정조실록》정조 19년(1795) 7월 25일자 첫 번째 기사

3. 무엇이 '패관문체'인가?

오늘날엔 이 당시 문제시된 패관문체란 게 정작 뭔지를 제대로 설명하는 기록이나 자료가 별로 없다. 패관문체는 정조가 대놓고 관찬 '배척운동'을 벌일 만큼 당대 선비들 사이에선 널리 퍼진 모양인데, 이러한 '신조어' 문체가 으레 그렇듯 공식 국가 문서나 기록문에 남는 경우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적극적으로 금지함은 공적인 문서 한정이고, 정조 사후엔 다시 쓰여졌다니 최소한 민간엔 다양한 기록이 남아있을 법도 하다만, 전근대시기인 만큼 이것도 딱 패관문체라고 정의되어 현재까지 내려오는 기록은 별로 없는지라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혹자는 백화문의 일종이라 보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찌라시를 소설처럼 묶은 것이라고도 하고, 중국의 말단 관직이었던 패관이 작성한 가십거리를 소설처럼 살을 더한 것에서 시작한 문학이라고도 보기도 한다. 사실 불온서적이니 유해매체니 하는 것들이 늘 그렇듯, 당대 조정 입장에선 정조 맘에 안 들면 다 패관문체라고 분류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유행하던 문체가 어떠했는지 대략이나마 감을 잡고 싶다면, 아래 열하일기의 '성경잡지'에서 발췌한 예시를 살펴보자. 당시 중국에서 사용되던 구어(만다린)를 백화문으로 그대로 옮겼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박지원도 열하일기 전체를 패관문체로 쓰지는 않았고, 인용문에서 구어체를 나타낼 때는 제한적으로 패관문체를 사용했다. 간혹 열하일기 전체를 패관문체로 사용했다고 여기는 경우도 있는데 열하일기 자체는 정격한문으로 썼다.
道俺[9]老身一口 路傍賣些甛瓜資生 你們高麗人三五十 俄刻過去時 暫停此中 初則出價賣喫 臨起一個個各手執蓏 鬨堂[10]都走
이 노인네가 혼자 길가에서 참외를 조금 팔아 먹고 사는데 당신들 조선 사람 삼, 오십 명이 한꺼번에 들러서 잠시 쉬던 차에 처음에는 돈을 내고 사 먹더니 나중에는 뿔뿔이 참외 한 개씩 들고 도망가는 꼴이 참으로 웃겼수.[11]

4. 목적

문체반정의 목적성에 대해선 딱히 정설이 있는건 아니라, 학계에서도 거시적인 관점부터 미시적인 관점까지 여러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다.

일단 정조가 단순히 문체 하나가 맘에 안들어서 이런 운동을 국가적 차원에서 벌인건 아닐 것이라고 보는 쪽에선, 당시 중국에서 수입된 패관문체류 문학들이 담고 있는 내용은 다수가 왕정에 위협적인 내용[12]이었기에 문체반정은 단순히 문화 운동이 아니라 몰락해가는 구 질서를 재정립하려는 처절한 시도로 볼 여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정조를 진보적 개혁군주가 아닌, 주자학 원리주의를 꿈꾸는 복고주의자로 보는 입장에선 문체반정을 정조의 근본주의적인 성향이 드러난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다른 정치적 관점에서 보자면, 정조가 왜 집권 초반도 아닌 후반기라 할 수 있는 정조 16년(1792)에 뜬금없이 문체반정을 일으켰냐에 주목해서[13], 정조가 당시 자기 정권에 참여한 이가환[14], 정약용 남인에 상대적으로 많던 천주교 관련자들에 대한 노론의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 그랬다고 해석하는 의견도 있다. 마침 정조 15년(1791) 신해박해가 있었음을 고려하면 시기가 묘하긴 하다.

정조는 재위 15년(1791) 서학 문제에 대한 대처방안으로 "서양학을 금하려면 먼저 패관잡기부터 금해야 하고, 패관잡기를 금하려면 먼저 명말청초 문집부터 금해야 한다." 하는 원칙을 제시하기도 했다. 즉, 종교 문제가 정치 쟁점화될 것을 우려한 정조가 대신 패관소품과 명말청초 문집을 비판하면서 정국의 물줄기를 돌렸다는 것이다.[15] 즉, 너나 잘하란 의도 아니냐는 것. 박지원, 김조순같이 대표적으로 정조에게 딱 걸려서 혼난 인물들이 노론 계열이었음을 생각하면 그럴 듯하다. 다만 이 의견을 받아들인다 치더라도, 결국 양쪽 다 제한을 받았으니 아이러니. 정조는 천주교의 괴력난신 드립을 비판하는 신하에게 '황당무계한 패관문학을 하도 보니까 그런 소리도 믿게 되는 것이니 기승전순정 고금체를 써라.'는 식으로 은근슬쩍 모두까기를 시전하기도 했다.

한편,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히기 직전인 영조 38년(1762)에 궁중 화원을 시에 <중국역사회모본(中國歷史繪模本)>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다름아닌 < 금병매>, < 수호전>, < 서유기>, 심지어는 < 변이채>와 같은 중국의 대중/음란 소설들을 소개하는 화첩이었다. 사도세자는 본인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펴낸 이를 ' 완산 이씨'라고만 언급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사도세자가 쓴 책인 줄 모를 리 없었고, 영조 눈치를 봐야 하는 정조는 아버지와 다른 길을 가야 살 수 있기에 그 반동으로 소설류 퇴출에 집착했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또는 조부 영조 또한 소설 읽기를 좋아했기에 오히려 할아버지에게 보인 반발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사실 후술하듯 누이들과 빈 등 다른 주변인들도 꽤나 소설 매니아였다. 정조도 집안 DNA로 제대로 소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매니아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정치적 관점과는 아예 다른 시각으로 보는 관점도 있는데, 정조가 관리들이 진지하게 써야 할 공문서에 패관문체를 자꾸 쓰니 보고서 읽다 짜증나서 사적인 이유로 벌인 것 아니냔 시각이다. 정조는 문체반정과 함께 마음이 바르면 글씨도 바르다는 논리로 '서체반정'도 시행하는데, 쉽게 말해 서예 좀 본인 맘에 들게 잘하라는 것이었다. 신하들이 글씨도 엉망이고 이상한 신조어도 마구 섞어 쓰니까, 정조가 공문서 읽다 짜증나서 그랬다는 주장.[16] 정조의 문체반정이 문체를 빌미로 피비린내 나는 대규모 숙청을 감행한 것도 아니고, 패관문체를 쓰는 신하들에게 반성문 써오라고 하고 인사고과에 반영하겠다고 한 정도인지라, '정치적인 목적'보다는 '정조 개인의 신하들에 대한 불만'이 더 큰 원인 아니냐는 것.

정조는 "옛날엔 초학자를 가르치는 법이 먼저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시경(詩經)》, 《서경(書經)》으로 가르치고 그 뒤에 차차로 《사기(史記)》를 가르치고 범위를 넓혀 문장가(文章家)의 글을 가르쳤다. 그런데 여기에 반대로 하는 자들은 먼저 《좌전(左傳)》, 《국어(國語)》,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로부터 시작하고 그 뒤에 비로소 경서(經書)를 가르친다. 이래서 혈기가 정해지기 전에, 일상 생활에 꼭 필요한 사덕(四德)이나 오상(五常) 등의 학설을 들어보지 못하니, 어떻게 바른 학문이 마음속에 쉽게 받아들여질 수가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경서의 습득을 중요시한 바 있다. 이런 정조 입장에선 경서로 도덕성을 기르기도 전에 사람들이 신조어를 써대고 경서가 아닌 잡기소설류부터 읽어대는 행태를 도덕성 문제와 결부시켜 좀 과하게 우려한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단순 유학자라면 캠페인에 그쳤겠지만, 정조는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라 이를 국가정책으로 삼아 추진할 수 있었다는 것.

5. 여담

6. 같이보기


[1] 경사자집(經史子集)이 아닌 책. 경사자집은 경서(經書)·사서(史書)·제자(諸子)·시문집(詩文集)의 총칭으로, 동양 도서분류법의 하나였다. [2] 남유용(南有容 1698-1773)을 가리킨다. 정조 자신이 재위 3년(1779) 남유용에게 문청(文淸)이라는 시호를 주었다. 남유용의 둘째 아들이 여기서 언급되는 남공철이다. [3] 헌데 얄궂게도 정조의 친아버지 사도세자와 정조가 존경했던 이순신 둘 다 정조가 잡스럽다고 평한 삼국지연의의 애독자였다. [4] 선조 시대 사람 기대승도 삼국지연의를 두고 '무뢰(無賴)한 자( 나관중)가 잡된 말을 모아 고담(古談)처럼 만들어 놓은 잡박(雜駁)하여 무익할 뿐 아니라 크게 의리를 해치는 소설'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정조나 기대승처럼 성리학에 일가견이 있었던 '학자'들이 보기에는 아무래도 격조 있는 한시나 경전류와 비교해 잡기소설류을 박하게 평할 수밖에 없었다. [5] 다만 정조 규장각의 첫 건립년도는 정조 즉위년(1776)이다. [6] 이미 조선에 많다는 것도 한 이유였다. 물론 금한다고 제대로 지켜지진 않았다. [7] 김조순은 반성문을 잘 쓴 덕에 신임을 얻었다. [8] 후술하였듯 실제로 정조 사후에도 소설류들은 민간에 버젓이 보급되었고, 더 나아가 정조 집권기에도 궁중 인사들이 잘만 필사했다. 문체반정이란 것이 정조만 안달난 몸부림이었던 점도 있다. [9] 我們을 축약한 구어체. [10] 웃긴 장면에서 사람들이 자지러지듯이 폭소하는 모습을 표현한 의성어/의태어. 哄堂이라고도 한다. [11] 헌데 이 참외장수는 조선인에 대한 분풀이인지, 정작 아무 죄도 없는 박지원 일행에겐 바가지를 씌워서(...) 비싼 값에 참외를 팔아먹었다고 한다. [12] 당장 조선에서 패관문학의 우두머리급으로 꼽힌 박지원이 쓴 < 양반전>이나 < 허생전>들만 보더라도 그러했다. 다만 노비 문제나 서얼허통론에도 나름 긍정적이던 정조였기에 단지 이 이유만으로 금지했을지는 의문도 있다. 애초에 정조가 딴지를 건건 일단은 문체지 내용이 아니었다. [13] 정조는 1780년대에도 "무슨 재미가 있길래 다들 그런 문집을 보는지 모르겠다. 나만 재미를 못 느끼는가?"라고 반문한 적도 있었지만, 취향의 영역으로 놔뒀을 뿐 딱히 관이 나서는 문체반정을 일으키진 않았다. [14] 사실 문체반정의 직접적 계기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정조 16년(1792) 이동직이 정조의 총애를 받던 이가환의 문체를 문제 삼아 상소를 올린 것에서 이 문제가 시작되었기 때문. 이에 정조는 이가환을 두둔하며 당시 유행하던 불순한 문체는 박지원과 그의 저작인 『열하일기』에 근원이 있다고 하여 박지원으로 하여금 순정한 고문을 지어 바칠 것을 명하였다. [15] 다만 정조가 사후 19세기 조선에서 벌어지는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급의 박해를 하진 않았지만, 분명 천주교 세를 점진적으로나마 줄이려 했던건 맞기에 천주교에 크게 호의적이었다고 보긴 어렵다. 스탠스가 애매해서 학자간에도 논쟁이 있는 부분. [16] 현대 사회에 비유하자면 회사 이메일에 ' 제곧내', ' 연관점이 1도 없음' 따위 말을 써대서 회사 사장이 표준어로 메일 적으라고 지시했다는 것. [17] 그렇다고 정조가 박지원을 마냥 박대하진 않았다. 정조는 박지원을 나름대로 총애하여 당시 천주교 문제로 골치가 아파 아무나 보낼 수 없던 면천 지역의 지방관으로 임명하여 처리하게 할 정도였고, 비록 정조가 숨을 거두어 불발되었지만, 박지원의 과농소초(課農小抄)를 바탕으로 농서 제작을 맡기려고도 했다. 참고로 박지원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간행한 시문집인 연암집은 박지원 사후 95년이 지난 1900년에 출판되었다. [18] 여담으로, 지금 와선 흔히들 쓰는 표현이지만, 사실 2000년대 인터넷에 ㅋㅋ체가 유행하기 시작했을 무렵만 해도 ㅋㅋ체가 경박하다고 싫어한 사람들이 연령대 가리지 않고 꽤나 있었다. 즉, 개인의 도덕성이나 심성을 떠나, 시대 상황에 따라 고작 10~20년 차라도 (물론 오늘날에도 공문서에 ㅋㅋ체를 쓰진 않지만 선배나 어른한테 사적으론 얼마든지 쓸 수 있듯) 사회적 예의범절의 기준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연관지어보면, 사실 정조도 패관문체가 막 유행하던 시절엔 큰 거부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나, 세월이 흐른 뒤엔 어찌 변했을지 모를 일이다. 아니면 이미 변한 뒤의 내용들이 정조 어찰첩에 쓰인 편지들일지도 모른다. [19] 사실 피해규모나 양상이 달라서 직접적인 비교대상은 아니다. 한 예로 유학을 높인 문체반정과 달리 분서갱유는 유학자를 묻어버릴 정도로 철저히 유학을 탄압했다. 다만 서적에 대한 관권의 개입이란 측면에선 공통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