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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19:03:48

마이크 타이슨

마이클 타이슨에서 넘어옴

<colbgcolor=#2F3E46,#000><colcolor=#fff> 마이크 타이슨
Mike Tyson
파일:Mike-Tyson-Gives-Emotional-Statement-Following-Jake-Paul-Fight-Says-He-Feels-He-Still-Won.jpg
본명 마이클 제라드 "마이크" 타이슨
Michael Gerard "Mike" Tyson
별명 아이언 마이크
Iron Mike
키드 다이너마이트
Kid Dynamite
지구상에서 가장 나쁜 남자
The Baddest Man on the Planet[1]
출생 1966년 6월 30일 ([age(1966-06-30)]세)
뉴욕주 뉴욕시 브루클린 브라운스빌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8cm[2] / 100kg[3] / 리치 180cm
체급 헤비급
전적 59전 50승(44KO) 7패(5KO) 2무효
스탠스 오소독스
종교 가톨릭[4] 이슬람[5]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성장2.2. 핵주먹 타이슨2.3. 몰락2.4. 강간 사건2.5. 핵이빨 사건
2.5.1. 포스트 파이트 인터뷰
2.6. 마지막 타이틀 도전과 은퇴2.7. 은퇴 이후의 삶
2.7.1. 2000년대
2.7.1.1. 딸의 사망
2.7.2. 2010년대2.7.3. 2020년대2.7.4. 이후
3. 파이팅 스타일4. 평가5. 어록6. 기타7. 출연 작품
7.1. 영화
8. 매체9. 관련 문서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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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 권투 선수.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활동했던 복싱 헤비급 슈퍼스타로, 짧지만 역사상 가장 센세이셔널한 전성기를 보내며 무하마드 알리와 함께 복싱계의 아이콘이 되었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뉴욕 브루클린의 브라운스빌에서 태어났다. 2살 때 아버지가 집을 떠난 후,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강도짓을 일삼는 등 폭력으로 얼룩진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소년원에 수감되기도 했다. 형과 나이프로 찌르며 놀았을 정도라고 한다. 애초에 마이크 타이슨이 살던 지역이었던 브루클린 브라운스빌은 브루클린 내에서도 치안이 매우 좋지 않은 편이다. 게다가 타이슨의 유년 시절이 뉴욕 전체가 범죄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1960년대~1970년대임을 감안하면, 거의 콤프턴을 연상시키는 수준의 생지옥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6][7]

그가 처음부터 비행청소년이었던 건 아니었다. 타이슨의 회고록이나 일대기를 다룬 뉴스를 보면 아주 어린 시절에는 의외로 소심한 아이였다고 한다. 타이슨 본인도 율리우스라 이름 붙인 애완용 비둘기가 동네 불량아에게 죽기 전까진[8] 여자아이한테까지 맞고 다니던 소심한 아이였다고 회고한 바 있고, 본격적인 비행소년의 길로 빠져들게 된 것은 10살의 나이로 브루클린의 흑인 갱단인 졸리스톰퍼에 가입하고 나서부터라고 한다. 12살 때까지 체포된 횟수가 38번이었다고 한다.

더 화이팅에도 언급되는 이 비둘기 사건은 실화로, 10살일 때 도둑질한 돈 700달러로 새들을 사서 길렀는데 자기를 괴롭히던 불량아가 그 중 한 마리를 훔쳐 목을 잘라놓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자 생애 최초로 싸움을 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불량아의 얼굴은 묵사발이 되었다. 그 후에 자신감을 얻은 타이슨은 자기가 불량배가 되어(...) 온갖 비행을 저지르게 된다.

2.2. 핵주먹 타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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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슨의 목 둘레는 무려 약 52cm였다.[9]

파일:xkdltms.jpg

소년원 복싱 트레이너 바비 스튜어트에 의해 명 트레이너 커스 다마토와의 만남으로 마음을 고쳐먹고 복싱을 시작했다.[10]
파일:external/40.media.tumblr.com/tumblr_lrsbamtFTG1qzbwkjo1_1280.jpg
WBC, WBA, IBF 벨트를 모두 가진 채 찍은 사진
상상을 초월하는 체력과 맷집, 트레이드 마크가 된 체중 이동을 통한 강렬한 초스피드 연타로 1985년 데뷔 이후 연전연승을 거듭, 결국 1986년 11월 26일 약관 20세의 나이로 트레버 버빅을 쓰러뜨리고 WBC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덕분에 당시 국내에선 핵주먹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미국 링네임은 아이언(Iron).

프로 데뷔 이후 무려 37연승을 거뒀으며 19전 연속 KO승을 따낼 정도의 엄청난 괴물이었다. 첫 1패를 38번째 경기에서 당할 정도였으니 그 위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2.3. 몰락

하지만 빠른 성공만큼 몰락도 급히 닥쳐왔다. 트레버 버빅과의 타이틀 매치를 앞두고 양아버지이던 커스 다마토가 1985년 11월 4일 폐렴으로 인해 77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소년원에서 처음 만나 복싱을 가르치고 출소 후에는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복싱 뿐 아니라 글과 예절 등을 가르치면서 타이슨을 머리 빈 복서가 아닌 훌륭한 인간으로 성장시키려 했던 아버지 이상의 존재였다.

실제로 커스 다마토는 타이슨이 16살 때 어머니를 잃자, 그를 양자로 받아들이면서 이끌어주었고 당시 타이슨을 유일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타이슨의 어머니는 커스 다마토가 타이슨을 돌보면 사람 구실은 하고 살 거란 희망을 가지고 타이슨을 맡겼으며, 타이슨 역시 자신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가족을 버린 건달인 친부보다 커스 다마토를 친아버지처럼 따랐다. 그리고 타이슨 어머니의 희망은 제대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타이슨이 최소한 사람 구실은 하고 살 거란 걸 넘어서 영화, 방송에 진출하기까지 하는 업적을 이루게 된다.

멘토가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사람이라면 커스 다마토는 손을 잡고 함께 걸어주었던 존재였다. 타이슨에게 있어서 커스 다마토는 단순히 트레이너나 멘토 정도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였다. 당시의 타이슨은 아버지를 잃었다고 크게 상심했다. 그리고 너무 슬픈 나머지 커스 다마토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했고 그 당시 그러지 못한 자신을 겁쟁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런 커스 다마토가 사망하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여 어리숙했던 그의 돈을 노리고 사기꾼들이 접근했다. 커스 다마토가 살아 있었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당시 타이슨에게는 그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줄 사람이 없었다. 주위에 아부꾼과 한 탕 해먹으려던 인물들만 가득 차게 되자 타이슨은 점점 타락하여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생전 커스 다마토가 타이슨의 상처입은 자아와 두려움이 많은 성격을 파악하고 격려와 훈육을 통해 인격적인 성장 또한 이루어 준 데 반해, 커스 사후의 멘토나 프로모터들은 강력한 복서로 성장한 타이슨에게 "남자라면 생각이고 뭐고 꼴리는 대로 해야 한다. 너는 상남자다."같은 막나가는 식의 조언을 했다.

유년기의 상처가 깊었던 타이슨에게 이런 조언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고 자연스레 대중의 이미지도 나빠졌다. 그래도 커스 다마토 사후 26연승을 거두기는 하지만, 커스만큼은 아니어도 그나마 어느정도 타이슨을 조절해주던 지미 제이콥스마저 1988년에 사망하고, 제이콥스의 뒤를 이은 매니저와 세컨드 코치 캐빈 루니와의 연속된 불화 때문에 훈련을 제대로 못 하였으며, 이때부터 타이슨은 점점 추락하기 시작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김대환의 6부작 칼럼 참조. #

이러한 점을 알고 있는 복싱 팬들은 커스 다마토가 몇 년만 더 살았더라도 복싱의 역사가 달라졌을 거라며 아쉬워하고는 한다.[11][12] 게다가 코치는 아론 스노웰과 제이 브라이트였다. 이 둘은 타이슨의 코치였지만 정작 실제로 보이는 모습은 마치 타이슨의 훌륭한 부하였다.
버스터 더글러스전 하이라이트.
그리고 1990년 2월 11일, 일본 도쿄돔에서 벌어진 WBC, WBA, IBF 헤비급 통합타이틀 전에서 당시 완전히 무명이던 버스터 더글러스(당시 30세)를 맞아 10회에 KO라는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 경기에 대해선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프로모터 돈 킹은 8라운드에 더글라스가 다운당했을 때 심판의 카운트가 너무 느렸다며 결과에 불복하였다[13]. 이에 IBF는 그대로 더글라스를 챔피언으로 인정하였고, WBC와 WBA는 결과를 보류하고 경기를 재검토하였으나 결국 더글라스의 승리를 인정하였다.[14] 이 패배로 그동안 37승 무패로 승승장구하던 타이슨의 경력에 금이 가기 시작했으며 권투 선수로서의 경력으로 보나 인생 전체로 보나 이 경기를 기점으로 몰락이 시작되었다.

실제로 무하마드 알리, 슈거 레이 레너드같은 전설들을 만든 전설적인 트레이너 안젤로 던디는 다마토 사후 타이슨의 어깨 근육을 보면 연습량이 부족한 게 티가 난다고 언급했고, 크루저에서 헤비로 올라온 홀리필드가 타이슨을 이길 수 있단 말도 했었다.

참고로 제임스 더글러스는 8개월 뒤인 1990년 10월 25일, 홀리필드에게 3회만에 KO로 져서 타이슨을 이기고 차지한 챔피언 타이틀을 금세 잃어버렸다.

2.4. 강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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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발생한 미스 블랙 아메리카 참가자 Desiree Washington(데지레 워싱턴, 당시 19세)을 호텔에서 강간한 혐의로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 6년을 선고받아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6년 중 3년을 복역한 뒤 가석방되었다.[15]

재판에서도 타이슨은 범행을 부정하였고, 타이슨의 변호사는 호텔에서 나와 병원으로 찾아간 피해자를 진단한 응급실 의사의 진단서와 범행시간 이후 피해자의 행동들을 지적하며, 주장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사건 이후 타이슨은 방송이나 미디어 매체에 다시 출연해서 다른 일은 모두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맞으나, 성폭행만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16]

형을 살고 나온 후 1995년 재기에 나섰고, 1996년 9월 6일 프랭크 브루노를 TKO로 제압하며 WBA 챔피언 자리를 다시 되찾는다. 브루스 셀던과의 1차 방어전도 TKO로 이긴다. 그러나 2차 방어전에서 에반더 홀리필드에게 TKO로 패하며 타이틀을 내주고 기세가 확 꺾이게 된다.

그리고 1997년 홀리필드와 리매치를 한다.

2.5. 핵이빨 사건

파일:핵이빨.jpg
홀리필드의 오른쪽 귀를 물어뜯는 타이슨[17]
이 리매치에서 권투 역사에 길이 남을,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는 대형 사고를 일으키고 핵이빨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게 된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홀리필드의 귓바퀴 일부가 잘려나갔다. 경기에서 타이슨은 실격 처리되었다.[18]

6월 30일, 타이슨은 MGM 그랜드 호텔에서 사과문을 발표했다.
''저는 많은 운동선수들이 했던 것처럼 그냥 짜증을 내고 반응했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제가 왜 정확히 그런 행동을 했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

네바다 주 운동 위원회는 타이슨에게 300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19] 위원회는 또한 타이슨의 복싱 라이선스를 박탈했고, 이는 1998년 10월에 회복되었다.

타이슨이 감옥에서 나왔을 때 프로모터 돈 킹은 그에게 MGM 그랜드와 6회 경기 계약을 맺어주었으며, 킹은 MGM 그랜드 주식 618,557주를 받았다. 하지만 타이슨이 라이선스를 박탈당하자 MGM은 타이슨과의 관계를 끊기로 결정했고, MGM 그랜드의 지배주주인 커크 커코리안은 호텔과 카지노에서 킹의 지분을 2,750만 달러에 매수했다.

그리고 이 경기는 돈 킹이 마지막으로 주선한 타이슨의 경기였다. 1998년 타이슨이 돈 킹 프로덕션(Don King Productions)을 1억 달러에 고소했다. 그들은 2004년에 법정 밖에서 1,400만 달러에 합의했고, 이 모든 금액은 타이슨이 납부하지 않은 체납 세금에 대해 미국 정부에 직접 지불되었다.

2.5.1. 포스트 파이트 인터뷰

"그는 마우스피스를 뱉어내고 제 귀를 물었어요. 파울을 하고 경기에서 퇴장당하는 행위는 용기가 전혀 없음을 보여줍니다. 두려움은 사람들이 쉬운 일, 가장 빠른 일을 하게 만듭니다."
에반더 홀리필드
"제가 복싱을 하면서 본 것 중 가장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돈 터너(홀리필드의 트레이너)
"전형적인 bully의 움직임입니다. 타이슨은 홀리필드를 링에서 독차지했지만, 이제 15명이 그의 뒤에 있으니 갑자기 싸우고 싶어합니다. 겁쟁이입니다."
토미 브룩스(홀리필드의 보조 트레이너)
"그는 2라운드에서 나에게 버팅을 했고, 나를 보고 다시 버팅을 했어요. 아무도 점수를 차감하지 않았어요. 이건 제 커리어예요. 제가 뭘 해야 하죠? 저는 아이들을 키워야 해요. 그는 계속 저에게 버팅을 했어요. 홀리필드는 강인한 전사가 아니에요. 그는 귀에 작은 상처를 입었고 그만두었어요. 홀리필드는 무슨 짓을 하든 싸우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저를 보세요. 저를 보세요. 저는 집에 갈 거고, 제 아이들은 저를 무서워할 거예요."
마이크 타이슨
"마이크는 눈 위에 3인치 길이의 상처를 입었고, 에반더는 귀에 작은 틈이 생겼는데, 별 의미는 없고, 그게 핵심이에요. 그는 암캐처럼 뛰어다녔어요."
존 혼(타이슨의 공동 매니저)
"저는 마이크를 위해서 변명하려는 게 아니지만, 저는 그를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압니다. 그는 제 친구이고, 저는 그를 지지합니다. 그날 밤 일어난 일은 예외였고, 우리 모두가 피하고 싶어했던 슬픈 일화였습니다. 그전까지 마이크에게 일어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돈 킹

2.6. 마지막 타이틀 도전과 은퇴

홀리필드에 2연패를 당하며 커리어에 크게 금이 간 타이슨은 약 1년 반 정도의 공백기를 가진 뒤 복귀하여 간간히 논타이틀 매치를 벌였고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시간은 흘러 2002 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 6월 8일, 당시 IBF-IBO-WBC 헤비급 통합 챔피언이자 또다른 동년배 헤비급 빅네임인 레녹스 루이스에게 도전할 기회를 갖게 되었지만 현격한 기량 차이를 보이다 8회에 KO패했다. 이 때는 이미 루이스도 타이슨도 30대 중후반으로 넘어가는 시기였기에 너무 늦게 매치가 성사된 데에 대한 아쉬움을 표하는 팬들도 있었다.[20][21] 루이스는 타이슨과 리매치를 원한다고도 했지만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
레녹스 루이스전.

2003년 2월 22일, 클리포드 에티엔을 KO로 꺾으며 또다시 재기하나 싶더니 후속 경기가 뜸해졌다.[22] 이후 2004년 7월 30일 대니 윌리엄스에게 KO패[23], 그리고 2005년 6월 12일 케빈 맥브라이드에게 TKO패를 당한 것을 마지막으로 타이슨은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링을 완전히 떠났다.

2.7. 은퇴 이후의 삶

2.7.1. 2000년대

성격 때문에 자신의 아내 로빈 기븐스를 두들겨 패다가 결국 이혼을 당하면서 천문학적인 위자료를 지급한다거나, 재산을 그야말로 엄청나게 낭비하면서[24] 결국 2003년 파산신고했다. 복싱하면서 번 돈만 3억 달러, 즉 3000억원이 넘었다. 예금이 4억 달러였다고... 타이틀 획득 후 16년 만에 파산인 셈이니 단순계산으로 1년에 200억씩 펑펑 쓴 셈. 하지만 전처를 폭행한 점은 아직도 전혀 반성하지 않는데 '내 평생 최고의 펀치는 로빈[25]에게 날린 바디 블로우'[26] ("what the best blow he had ever thrown was")라고 하는 걸 보면 그 인생에 한 점 후회도 없는 듯하다.[27] 두번째 아내였던 모니카와도 2003년 최종적으로 이혼하게 되었다.

앨 고어는 그의 결혼 생활 동안 아내에게 헌신했다고 말합니다. 조지 W. 부시도 결혼 생활 동안 아내에게 헌신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다른 어떤 남자들도 하나같이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마이크 타이슨은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하여 진실만을 말합니다.
난 내 부인과 삐-를 한 지 1년이 넘었어요. 내가 앤드류 골로타[28]를 신경이나 쓸 것 같습니까? 내 애들도 한 달은 못 봤어요.
(방청객: 왜요?)
니는 알 거 없다, 이 흰둥이 새꺄. 한 달은 못 봤다고
마이크 타이슨은 그의 부인과 섹스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건 당신들이 알 바가 아닙니다, 흰둥이 여러분.
마이크 타이슨을 대통령으로.
부시와 고어의 선거전이 한창일 당시 코미디언 크리스 락 쇼에 등장한 영상.
2.7.1.1. 딸의 사망
마이크 타이슨은 총 7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타이슨은 2005년 늦둥이로 낳은 막내 딸 엑소더스를 매우 사랑했다. 그러나 2009년 5월 28일, 엑소더스는 런닝머신에서 놀던 중 줄에 목이 졸려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었고 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지고 말았다. 이 사고는 타이슨에게 매우 큰 충격을 주었고 딸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다. 수년이 지난 뒤 인터뷰에서 타이슨은 인생에서 가장 절망적인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딸의 죽음"을 이야기했을 정도였다.

그는 인터뷰에서 딸의 죽음이 준 충격으로부터 아직까지 회복하지 못했으며, 딸이 보기에 기뻐할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답하기도 했다. 실제로 딸의 죽음은 타이슨을 크게 변화시켰고 이 후 그는 상당히 자중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29]

타이슨 왼편 가슴에 타투로 새겨넣었다. 인스타그램 링크

2.7.2. 2010년대

딸의 죽음 이후 나이도 먹고 그래서인지 예전과는 달리 말썽을 잘 안 피우고 그나마 좀 사람답게 살면서 많은 팬들을 안도시키고 있다. 홀리필드와도 화해한 상태. 토크쇼에 같이 출연한 적이 있고, 홀리필드의 조미료 사업에 대해 서로 개드립을 날릴 정도로 친해졌다. "홀리필드가 만드는 조미료가 있다면 홀리필드 귀때기도 먹을 만했을 거다"라는 드립을 쳤고, 거기에 홀리필드가 먼저 "자기 귀때기 맛을 볼 테니 물어보라"고 개드립을 날렸다.

2010년 1월 12일(한국시각)일자 WWE RAW에 아들과 함께 특별 출연하였다. 자세한 것은 크리스 제리코 항목 참조.

외국의 동물 관련 프로에 출연해서 키우는 법을 강의하기도 했다. 관련 사진 위에서 기재되어 있듯 타이슨이 인생 처음으로 대판 싸운 사고 자체가 평소에 타이슨을 괴롭히던 양아치가 당시 타이슨이 키우던 비둘기를 죽인 것부터 시작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복싱을 안할 땐 늘 새 키우기로 시간을 보냈는데 그 경력이 워낙 길어서 이 분야에선 준전문가 수준이라고 한다. 그런데 워낙 키우는 새가 많다 보니 소음 때문에 가끔 다른 주민들과 마찰이 생기기도 한다. 예상과는 달리 죄송합니다를 연발하고 양해해달라고 통사정한다고 한다.

2012년 갑작스레 스파이크 리 감독과 뉴욕 브로드웨이와 라스 베가스에서 자기 자신을 주제로 한 원맨쇼를 진행했다. 공연 직전 그의 극장 앞에서 배트맨 상영관에서와 같이 총기난사를 하겠다는 글이 타이슨의 트위터에 올라오기도 했지만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2013년 토니상 오프닝에 타이슨이 등장한 것도 이 때문.

토크쇼 등 쇼프로 단골 손님에 복싱 빅매치엔 빠지지 않고 관전하는 잘 나가는 셀러브리티다. 선수 시절 워낙 인기가 많았고 스토리가 있는 캐릭터에 언변, 예능감도 좋아서 여러모로 성공적인 방송 연예인의 삶을 살고 있다. 망가지는 역할도 주저하지 않고 복싱이랑 전혀 상관 없는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 더 보이스 등에도 게스트로 나오는 등 화제성은 여전히 현역이다. 많은 스포츠인들이 은퇴 이후 해당 스포츠 업계에 남거나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 것과는 상반된 행보.

2015년부터 Hotboxin'이라는 개인 팟캐스트를 운영하고 있는데 유튜브 구독자가 벌써 300만명을 넘어섰다. #, 다른 채널

2018년 캘리포니아 주가 오락용 대마초를 합법화하면서 대마초 농장에 투자했다.

홀리필드와 함께 풋락커 광고를 찍기도 했다. 잘려나간 귀를 돌려주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면서 "내 입안에 남아있던 귀를 챙겨뒀어." 라고 화해를 신청하며 개드립을 하는 타이슨과 "내 귀잖아?" 라고 놀라면서 귀를 돌려받고 사과를 받아주면서 포옹하는 홀리필드가 압권이다. #

2.7.3. 2020년대

2020년 5월 12일(현지시각) 인스타그램에 비디오를 올렸는데, 맹렬하게 복싱 트레이닝을 하고선 카메라를 쳐다보며 "I'm back."이라고 한다. 복싱에 다시 복귀를 준비하고 있음이 확실시되었고 자선경기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경기는 전액 기부할 것이며 돈때문에 복귀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처음엔 에반더 홀리필드와 맞붙는 듯했으나 좀 더 거물급 선수라고 밝혔다. 대체 홀리필드보다 거물이면 누구인지 다들 궁금해하면서 별별 이름이 나왔는데, 현역 챔피언인 타이슨 퓨리까지도 언급되었다.[30]

2020년 5월 23일 열린 AEW의 더블 오어 나씽에 출연해 새로 공개된 AEW TNT 챔피언십 초대 챔피언 결정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코디에게 벨트를 수여하는 것으로 출연했다. 이후 다이너마이트에도 출연해 크리스 제리코와 2010년 이후 다시금 충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2.7.3.1. vs. 로이 존스 주니어
마침내 자선경기 상대가 결정됐다. 상대는 타이슨과 비슷한 나이인 로이 존스 주니어로 결정됐다. 2020년 11월 29일에 열린 해당 경기에는 스눕 독이 해설 위원으로 참가했으며, 경기 결과는 무승부. 그러나 타이슨의 나이가 50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에 따른 피지컬 감소와는 별개로 날카롭게 튀어나오는 펀치나 위빙 테크닉을 보면 타이슨의 클래스는 어디 안 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일부 언론에서는 이 경기에 대해 졸전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했으나 경기에 참가한 두 사람의 나이가 모두 50이 넘었다는 것과 해당 경기가 전액을 기부하는 자선 경기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꽤 무례한 표현을 사용했다고 봐도 무방할 듯.[31]

2.7.4. 이후

2022년 4월 21일 비행기 뒷좌석에서 취객 한명이 계속 조롱하며 시비를 걸자 참다못한 타이슨이 해당 취객을 두들겨패고 비행기에서 하기했다. # 자리에 앉기 전까지 타이슨은 이 취객과 함께 사진을 찍을 정도로 밝은 분위기였으나, 취객이 타이슨한테 물병을 던지는 등 뒷좌석에서 계속 깐족거리며 도발하였고 결국 타이슨이 참지 못하고 일어나 그를 폭행한 것. 타이슨 측 대변인은 해당 취객이 만취 상태로 도발을 멈추지 않았으며 물병을 던지는 등 위해를 가했다고 주장했다. 해당 취객은 이후 변호사를 선임하고 타이슨을 경찰에 신고했다고 한다.

취객 측 변호사는 순수한 팬심에 흥분한 것인데 타이슨이 과도한 대응을 했다며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하였으나, 이 취객은 이미 이전부터 워낙 크고 작은 사고를 너무 많이 치고 다니던 탓에 수 차례 전과가 생겨서 습관성 범죄자로 등재되기까지 한 인물이고, 사건의 내용이 담긴 영상이 인터넷에 공개되자 국내외를 막론하고 취객이 맞을 짓을 했다며 모두 타이슨을 옹호하고 있다. # 특히, 기내에서 난동을 피우는 것은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취객을 옹호하는 목소리는 거의 없는 편이다.[32] 결국 검사가 당시 정황을 참조하여 타이슨을 기소하지 않고 조용히 해당 사건을 종결하였다. #
2.7.4.1. vs. 제이크 폴
2024년 7월 20일, 제이크 폴과 경기가 잡혔으며 넷플릭스에서 라이브 스트리밍을 할 예정이었으나 # 타이슨이 위 궤양이 생기는 등 건강에 문제 생겨 경기 진행 여부가 불투명해졌고, 이에 따라 여차하면 제이크 폴은 형인 로건 폴 복싱 경기를 하기 위해 빌드업을 하고 있다.

결국 미국 시간 11월 15일, 한국 시각으로 11월 16일 오전 10시에 AT&T 스타디움에서의 경기로 미뤄졌다.

마이크 타이슨답게 성질머리가 죽지 않았는지 경기 전 체중 측정때 제이크 폴이 타이슨의 발가락을 밟자 바로 싸대기를 갈기는 화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2024년 11월 16일 마이크 타이슨과 제이크폴 경기가 성사되었다

다만 경기는 전반적으로 굉장히 루즈하게 흘러갔다. 1, 2라운드는 타이슨이 쫓아가면 폴이 클린치로 모면하는 형태였지만 이후 고령이 다 된 타이슨이 체력이 다했는지 들어가지를 못하고 멀리서 던지는 폴의 잽을 회피하려고만 하는 모습을 보였다. 코메인 이벤트가 치고박는 형태로 흥미진진했던 것과 비교하면 거의 가만히 서있다 돈 벌어간 수준. 결과는 제이크 폴의 만장일치 판정승. #

3. 파이팅 스타일

헤비급에 키가 작은 편에 속해[33]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헤비급 체중에 미들급의 스피드, 폭발적인 펀치력, 유연하고 안정적이면서도 빠른 체중이동은 마이크 타이슨의 아이덴티티이다. 그래서 별명이 자연스럽게 핵주먹이 된 것이며, 신체의 탄력과 리듬감, 유연성 역시 엄청났고 여기에 경기력을 받쳐주는 스타성과 쇼맨쉽, 미국 팬들의 지지를 받는 헤비급 복서라는 상품성 면에서도 압도적이었다. 최대의 복싱 시장인 미국에서도 타이슨의 평가에 대해서는 논쟁이 일어난다. 전성기 시절의 신체 능력과 기량만큼은 확실히 인간을 초월한 수준이었고 약물 중독과 수감으로 몰락하기 전까진 무적에 가까웠다는 것은 명확하며, 이로 인해 타이슨의 짧은 전성기를 아쉬워하는 팬들이 상당히 많다. 체급 불문하고 타이슨 이후 수십년간 타이슨이 보여준 임팩트와 스타성에 근접한 후배 복서들은 오스카 델라 호야 플로이드 메이웨더 정도이다.

결론적으로 역대 최강의 복서를 꼽을 때, 타이슨의 경력 전체가 언급되지는 않지만 타이슨의 전성기는 반드시 언급된다.
마이크 타이슨의 진정한 필살기였던 디펜스 스킬
복싱 역사상 강력한 챔피언은 여럿 있지만 타이슨처럼 센세이셔널한 인물은 정말 드물며, 아직도 호사가들이 최강 논쟁을 벌일 때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한국에서는 핵주먹으로 유명한 타이슨이지만, 타이슨의 최대 강점은 단순히 타고난 주먹힘만 강한것이 아니라 헤비급으로는 전무후무한 수준의 빠르고 유연한 움직임과, 헤드슬립, 위빙, 페인팅, 풋워크 등을 겸비했기에 사실은 아주 민첩하고 기술적인 인파이터라는 점이다.

마이크 타이슨은 헤비급 답지 않게 원투 펀치나 연타구사력이 경량급 엘리트복서보다도 더욱 부드러웠다.[34] 당연히 공격일변도도 아니며 방어와 회피도 완전히 갖춘 상태에서, 다른 신체능력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헤비급 복서들과 달리 영리하고도 맞지 않는 지능적인 복싱을 구사했다. 이미 15살에 커스 다마토가 "기술적으로는 더이상 가르칠 게 없다"고 말할 정도로 재능이 엄청났던 완전체 인파이터가 타이슨의 진면모. 타이슨은 일반적인 헤비급 선수들과는 근본적인 플레이 방식이 전혀 달랐는데, 허리와 등근육을 사용해 상체 전체를 좌우로 움직이며 뛰어난 동체시력으로 상대방의 잽과 공격을 모두 피해내는 슈퍼플레이는 전성기 그의 주특기였다. 전성기 기준으로 보면 완벽한 헤드슬립과 위빙으로 인해 타이슨에게 선타를 맞추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파이터 답게 맷집도 뛰어난 편이었으며 엄청난 목근육과 그 둘레 덕분에 턱에 펀치 몇 방 맞는 정도로는 미동도 하지 않는 맷집을 지녔었지만,[35][36] 전성기 기준으로는 거의 맞지 않는 복싱을 구사하는 선수였다.

그를 상대한 대부분의 장신 헤비급 복서들은 당연히 타이슨보다 리치가 길다 보니 잽으로 찔러넣고 거리를 유지하면서 느긋하게 아웃복싱을 하려 하거나, 혹은 우월한 덩치를 바탕으로 힘으로 깔아 뭉개려고 했다. 그러나 타이슨은 종전의 스워머 인파이터와는 달리 멈춰서 잽을 보거나 막지 않고 경지에 오른 헤드슬립[37]으로 그냥 잽을 흘려버린 뒤 들이대면서 원투를 치는 선수였기에 헤비급의 평범한 빅맨들은 리치차이가 남에도 타이슨의 무시무시한 스피드를 가진 파고들기에 오히려 선타를 내주고 연타 공격에 추풍낙엽처럼 완파당했다. 이러한 장점은 WBC 챔피언이었던 트레버 버빅과의 시합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 타이슨이 거의 넘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초단거리에서 주먹을 가볍게 피하던 모습은, 로프를 잡고 노가드 상태로 펀치를 죄다 피하고 상대를 농락하며 복싱 역대 최고의 동체시력을 가진자들 중 하나라 평가받는 바로 그 무하마드 알리와 비교될 정도이다.

빅맨들이 즐비한 헤비급에서 타이슨처럼 엄청나게 빠른 공격 스피드를 가진 경우는 정말 드물다. 다른 헤비급 복서보다 같은 시간에 두세 스텝은 더 밟을 정도니 미들급에서도 나오지 않는 공격 스피드를 가진 것으로, 천부적 재능의 영역이다. 거기다 작은 키에 비해 워낙 힘이 좋았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수준의 빠르고 유연한 체중이동이 가능했기에 좌우 모든 각도에서 펀치를 뿌리는데 그것이 엄청난 핸드스피드와 시너지를 내며 상대들은 채 반응하기 전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vs 토니 터커[38] 경기를 보면 터커와 타이슨이 잽싸움을 벌이는데, 타이슨의 잽이 터커에게 먼저 닿는다. 타이슨의 리치와 터커의 리치는 26cm가 차이난다. 그 정도로 독보적인 스피드 스타였으며, 이런 말도 안되는 수준의 핸드스피드로 인해 타이슨과 거리싸움을 한다는 것은 당시 대부분이 크고 강하지만 무거웠던 헤비급 복서들에게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약점도 명확했다. 전성기 기준으로 보아도 무결점의 복서라고 보기는 힘들다. 분명히 아웃복서에게는 압도적인 위력을 과시했지만, 클린치 게임을 하는 상대에게는 후반까지 비등한 경기를 펼치거나 판정까지 갔던 적이 종종 있었던 적이 그 사례. 우선 기본적으로 헤비급치고 키가 매우 작고 리치가 짧다 보니 복슬링을 구사하는 상대에게는 경기 운영이 아주 매끄럽진 못했다는 점이 있다. 그리고 핵주먹이라는 펀치력도 엄밀하게 말하면 압도적인 한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교한 타이밍과 연타력, 훌륭한 각도를 만든 후 좋은 궤도로 날리는 펀치의 특성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도 원인 중 하나이다. 즉, 거리를 두고 기량을 겨룰때는 막강했지만 클린치와 인파이팅을 반복하면서 다리를 붙이고 싸우는 상대를 압도할만한 능력은 없었던 것.

그래서 상대가 끈적끈적한 클린치 게임과 인파이팅으로 나왔을때, 자신의 정교하고 빠른 스텝을 살릴수 없게 될 경우 생각보다 많은 약점들이 있었다. 전성기때에도 조지 포먼 같은 상대를 피해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을 정도이니 대처가 쉽지 않은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여러 사생활 문제로 인해 자기관리가 되지 않으면서 체력적인 약점이 생긴 것이 치명적이었다. 몰락이 시작됐던 마이클 더글라스에게 당한 첫 패배 때도 게임 플랜의 차원에서 보면 클린치 게임에 대한 준비 미비가 있었기에 매우 고전했었다. 고전 끝에 결정적인 다운을 뺏어냈음에도 불구하고 후반 체력저하로 인한 집중력 문제로 경기를 내주기도. 이후 버팅과 반칙 및 클린치로 타이슨을 봉쇄한 홀리필드 2연전에서 이런 타이슨의 약점들이 부각되었고, 다른 패배들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나이를 먹고 전성기가 지난 이후부터는 라이트급에 비견되었던 독보적인 스피드가 조금씩 떨어지면서 전성기의 압도적인 디펜스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게 되었다. 사실 타이슨은 헤비급에서 키와 체격, 리치가 상당히 작은 편이다. 이를 무시무시한 스피드와 유연성으로 파고들어 연타를 날리면서 극복한 것인데, 속도가 떨어지니 파고들지 못하고 접근하다가 얻어맞게 된 것이다.

결국 속도와 잽 싸움에서부터 지고 들어가게 되자 리치와 체격이 작다는 단점이 그대로 노출된 타이슨은 그저 맷집 좋고 펀치력이 강한 단신 인파이터 수준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물론 좋은 맷집과 상당한 펀치력이 어느정도 살아있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지만 그의 전성기와 비교하면 확실히 약해지고 공략이 가능한 상대가 된건 사실이다.

하드펀처로 유명한 베테르비에프도 파워라는 카테고리에서 타이슨을 꼽았는데 감옥가기전 신체 텐션이 말도안되는 스피드와 탄력에서 나오는 가공할만한 펀칭파워가 잃어버린게 가장 큰 이유다. 실제로 감옥가기전 경기들과 출소이후에 상대방을 칠때 나는 소리와 묵직함이 모자라다.

4. 평가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견인했던 복싱 헤비급 역사상 최고의 슈퍼스타로 WBA, WBC, IBF 3대 세계 기구를 모두 석권했을 만큼 뛰어난 기량을 지닌 복서였다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처럼 엄청난 인기와 명성에도 불구하고 복싱 매니아들 및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잘 쳐줘야 프로복싱 역대 TOP 50 끝자리에 들까말까하는 수준인데 이유는 전성기가 굉장히 짧았기 때문이다.

트레버 버빅을 제압하고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을 때가 약관 20세인데, 이후 순식간에 3대 기구를 석권하고 더글라스에게 패해서 타이틀을 잃은게 23살 때 일이다. 요컨대 평범한 복서들이 데뷔전을 치르고 있을 시기에 그는 세계 챔피언이 되었고, 그들이 경력을 쌓을 시기에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러한 파멸적일 정도로 굴곡이 심한 선수 생활 때문에 팬들 사이에선 미완성 복서라는 인식이 강해서 만약 복서로서 완성되었다면 권투 역사가 바뀌었을 거라고들 얘기하지만 이미 다 지나간 이야기이다.
옛날 자료이기는 하지만, ESPN에서 뽑은 역대 최고의 복서 순위에서는 50위로 뽑혔다. 그 메이웨더가 48위이고 매니 파퀴아오는 순위에도 없으며 복싱 역사상 최고의 테크니션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 슈거 레이 레너드가 12위, 역사상 최강의 미들급 챔피언 중 한명인 마빈 해글러가 35위이다.

사실 한국인들은 이름도 모르는 20세기 초중반 복서들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역사성을 고려한 보수적인 랭킹이긴 하다. 10위 이내를 보면 대중적으로 알려진 복서는 2위의 무하마드 알리, 6위 로베르토 두란, 더 파이팅 덕에 알려진 잭 뎀프시 정도가 끝이다. Top 10은 두란과 알리를 제외하면 모두 1960년대 이전에 활약했던 선수들이다.

아래 복싱 역사상 최고의 피지컬을 지녔다고 칭송받는[39] 로이 존스 주니어는 46위, 괴물 조지 포먼은 20위, 1위는 그 어느 매체든 거의 무조건 1위로 뽑는 슈거 레이 로빈슨이다 ESPN 랭킹 보기. 이름값 때문에 "겨우 50위?" 라는 반문을 하곤 하지만 당대 동급의 실력자였던 에반더 홀리필드, 레녹스 루이스에게 모두 패했고 자기 관리 실패로 전성기가 3년이 채 안 될 정도로 짧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첫 챔피언이 된 시기가 86년도이고, 더글라스에게 패한 때가 90년도이다. 데뷔에서부터 전성기로 잡으면 수감까진 6년이다.

헤비급 한정으로 보면 역대 10위권 정도에 포진되어 있다. 2017년 5월 링지에 올라왔던 조사에 따르면 30여명의 전문가들의 의견을 취합한 결과 역대 헤비급 9위에 올랐다. 이는 레녹스 루이스 에반더 홀리필드보다 2단계 높은 수치[40]로 상당히 의외의 결과인데, 레녹스 루이스 - 비탈리 클리츠코 - 블라디미르 클리츠코로 이어지는 아웃복싱 스타일로 헤비급 자체의 흥미가 떨어진 것에 대한 향수로 해석될 수도 있다.[41] 이 조사에서 그보다 위에 있는 선수들은 대부분이 전설과 같은 선수들인 데다가 절반 가까이가 1960년대 이전 선수들이기 때문에[42] 1980년대 이후로 한정하면 조지 포먼 정도만이 그의 위에 있는 셈이다.[43]

물론 그렇다고 절대 대단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역대 최고라고 불리기에 문제가 많다는 것이지, 최소한 WBA, WBC, IBF 헤비급 3대 세계 기구를 모두 통합할 정도의 실력은 보유하고 있었다. 그 오랜 복싱 역사 속에서 헤비급 선수들만 헤아려도 최소 수만 명은 나왔을 텐데 헤비급 한정으로도 10위권은 된다는 거고, 모든 체급으로 쳐도 100명 안에는 들어간다는 소리.

거기다 복서로서의 스타성 하나는 대단해서 복귀 후엔 90년대 당시 경기당 평균 대전료가 3,000만 달러가 넘었고 홀리필드전에선 한 경기 대전료가 5,000만 달러를 넘겼을 정도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흉폭한 카리스마와 화려한 경기 스타일은 물론이고 한국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말빨도 대단해서 당시 엄청난 팬과 안티들을 몰고 다녔다. 인터뷰에서 '공개 자위를 해도 메디슨 스퀘어 가든을 꽉 채울 수 있다'고 장담했을 정도.

아무튼 상기한 카리스마적, 문제아적 행보로 오스카 델라 호야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가 등장하기 전까지 미국 복싱계 최고의 아이콘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가 링을 떠난 뒤 헤비급의 흥행력은 비탈리 클리츠코 블라디미르 클리츠코라는 두 거성이 주도하는 유럽으로 완전히 넘어갔고, 동시에 멕시칸 복서들의 주 무대인 라이트, 웰터, 미들급 등 경중량급이 미국 복싱계 대세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짧은 전성기에도 불구하고 미국 헤비급 아이콘으로서 여전히 많은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44][45][46]

5. 어록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47]
"Everyone has a plan,'till they get punched in the mouth."
"너와 싸우는 사람들이 모두 적은 아니며, 너를 돕는 이들이 모두 친구도 아니다."[48]
“Everyone that you fight is not your enemy and everyone who helps you is not your friend.”
"살면서 맞아본 가장 강력했던 기습 펀치는 바로 나의 성공이었다."
"the biggest sucker punch that I took was my success."[49]
"사람들이 간과하는 게, 복싱은 생각하는 사람들의 스포츠라는 거야. 터프가이의 스포츠로 잘못 알고 있지. 하지만, 이 바닥에서 가장 빨리 나가떨어지는 애들이 그 터프가이들이야."
"People don't realize that the boxing is the thinking men's sports. They think it's tough guys' sports, and those tough guys are the first who gets tossed out."[50][51]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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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레슬링 팬으로 알려져 있다.[56] WWF 레슬매니아 14 시즌 무렵 WWF에 얼굴을 들이밀었고 스티브 오스틴은 타이슨에게 쌍법규를 날린 일로 엄청난 어그로를 끌었다.[57] 원래는 좀 더 비중있는 역할을 맡을 계획이었으나, 레슬매니아 무대에서 특별 심판을 보는 것으로 끝났다. 그래도 나름 애티튜드 시대 WWE WCW에 전면적인 반격을 시작할 무렵을 이야기할 때 빼먹으면 서운한 인물.[58] 그래서 그 때의 공로로 WWE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당시에 오스틴과 사석에서도 같이 다녔는데, 오스틴은 복싱 팬이고 타이슨은 프로레슬링 팬이라 서로 즐겁게 지냈다고. 오스틴은 자서전에서 타이슨에 대해 아주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그리고 스톤 콜드인데 타이슨은 계속 콜드 스톤이라고 불렀다 하고, 스톤 콜드라고 얘기를 해도 계속 콜드 스톤으로 불렀다고 한다. 프로레슬링 팬이라서 그런지 메이웨더 빅 쇼 레슬매니아 24에서 이겼을 때 "이건 아니다"라고 의견을 표시하기도 했다.

파일:무한도전 말딸.jpg
후지타 사유리: 너무 부드러워요~ 이 맛이는 말딸소의 귀같은 맛이 나요~ 너무 부드럽고 기름이 많아요. 온 몸이 다 햄보케요. 고마워요 사장님~
정준하: 말딸... 뭐요?

파일:cliff-couser.png

7. 출연 작품

7.1. 영화

8. 매체


프랑스인 Jonathan Akamba(@akamztwenty20)는 마이클 잭슨의 춤을 추며 마이크 타이슨의 복싱을 구사한다. 공교롭게도 이름에 교집합이 있다: 마이크 타이잭슨 등등.

9. 관련 문서

10. 둘러보기

파일:external/i186.photobucket.com/DX-Logo.png
숀 마이클스 트리플 H 차이나
릭 루드 마이크 타이슨 X-PAC
빌리 건 로드 독 케인
토리 스테파니 맥마흔 혼스워글

파일:AEW-Jericho-Appreciation-Society-logo.png
{{{#!wiki style="color: #333"
{{{#!folding 【 Jericho Appreciation Society 】
해체 선언 당시의 멤버
크리스 제리코 제이크 헤이거 대니얼 가르시아 안젤로 파커 & 맷 미나드
새미 게바라 타이 멜로 애나 제이
전 멤버 객원 멤버
산타나 & 오티즈 MJF 워들로우 마이크 타이슨
}}}}}} ||
파일:WWEHOF.jpg
2012년 WWE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ringmaga.png
1986년 링 매거진 선정 올해의 선수
마빈 해글러 & 도널드 커리 마이크 타이슨 에반더 홀리필드
파일:ringmaga.png
1988년 링 매거진 선정 올해의 선수
에반더 홀리필드 마이크 타이슨 퍼넬 휘태커


[1] "아이언 마이크"와 함께 마이크 타이슨을 대표하는 별명. 구글에 The Baddest Man on the Planet을 검색하면 마이크 타이슨의 프로필이 뜰 정도로 유명한 별명이다. 국내에선 '핵주먹'이란 별명이 있다. 후에 종합격투기 선수 론다 로우지 크리스 사이보그가 성별만 바꿔서 그대로 별명으로 사용했다. [2] 복스렉(BoxRec) 프로필 [3] 전성기 시절 체중도 현재와 큰 차이 없는 97~100kg 정도였다. [4] 커리어 초반 시합 직전 링 위에서 글러브 낀 손으로 성호를 긋는 장면이 나온다. [5] 1992년 수감생활을 하던 중 샤하다를 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6] 흑백 차별이 극심하던 시절, 흑인들의 진로는 특출난 재능으로 성공을 하거나 아니면 갱단에 가입해 범죄를 저질러 수익을 내는 것 뿐이었을 정도로 입지가 좋지 않았다. 비슷한 사례로 마이클 잭슨의 아버지인 조 잭슨이 잭슨 파이브를 만든 이유도 음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어 아이들이 갱단으로 빠지는 걸 막기 위한 것이었다. [7] 사실 콤프턴은 크립과 블러드들이 활개치던 80년대에도 당시 할렘과 브롱스등의 미국 동부의 우범지대급의 환경은 아니었다. 타이슨의 고향인 브루클린의 브라운스빌도 그 중 하나로 타이슨은 실제로 LA에 거주 하면서 뉴욕 만큼은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수차례 심경을 보여왔다. [8] 이 때 타이슨은 울면서 주먹을 휘둘렀는데 그 불량아가 순식간에 뻗어버린 것. 이 당시 타이슨은 자신이 이렇게 싸움을 잘할 줄은 본인도 몰랐던 것이다. [9] 목이 두꺼우면 목뼈가 충격을 잘 흡수해주기 때문에 뇌가 흔들리지 않아서 KO당할 확률이 낮아진다. [10] 비하인드 스토리를 나열하면, 타이슨은 알리가 소년원에 강의 온 것을 보고 호기심에 복싱을 배우겠다고 스튜어트에게 간청해서 스튜어트는 행동을 똑바로 해야 가르쳐 준다는 조건을 걸고 가르쳐 주게 된다. 그 후에 타이슨이 스튜어트에게 자신이 이길 수 있다는 말을 한 것을 들은 스튜어트는 프로 복서의 내공으로 타이슨을 떡으로 만들어줬다. 하지만 타이슨이 끝까지 달려드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은 스튜어트가 다마토에게 데려다 주게 된 것이다. [11] 일단 지미 제이콥스는 타이슨의 '서양식 친구'이자 사실상 대부, 즉 커스 다음으로 타이슨을 잘 조절했고, 캐빈 루니는 타이슨의 장점을 최대한 녹슬지 않게 연마해 주었다. 하지만 88년에 제이콥스마저 죽은 데다 돈 킹, 기븐스와 얽히기 시작하고, 루니까지 주변의 농간에 의해 반강제로 해고당하면서 갈피를 잡지 못하자 타이슨은 재능이 급속히 추락했다. 실제로 90년도 2월 경기를 가지기 전 스파링을 하는 동영상이 있는데 타이슨이 카운터 맞고 다운되는 동영상이었다. 마이크 타이슨 스파링 도중 다운. [12] 즉, 엄밀히 말하면 커스 다마토가 사망해서 그랬다기보다는(물론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인 건 사실이지만 커스 다마토 외에도 상술했다시피 타이슨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들은 아직 남아 있었다.) 타이슨이 돈 킹, 로빈 기븐스 등과 어울리게 되면서 추락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13] 그러나 돈 킹의 주장과는 달리, 타이슨의 리커버리가 너무 늦었다. 타이슨이 심판의 카운트가 시작될 당시 일어나 자신의 마우스피스를 찾느라 고전하는 동안 심판의 카운트는 이미 6을 세고 있던 상태였고 그것도 거의 휘청거리다시피 하여 찾았던 상황이어서 심판의 판단으로 경기를 속개하기에는 너무 무리였다고 본 것. * [14] 이 결과를 가지고 타이슨이 억울하게 편파 판정을 당한 것이 아니냐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보통 복싱을 비롯한 많은 스포츠에서 편파 판정을 할 때는 유명한 스타 선수나 자국 선수에게 유리하도록 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이자 미국을 대표하는 복서였던 타이슨이 무명의 떡밥 선수 더글라스를 상대로 불리한 판정을 받았다고 보긴 어렵다. 실제로 기록상으로 보면 잽과 파워 펀치 등 펀치를 적중시킨 총 횟수는 타이슨이 101회, 더글라스가 230회로 더글라스가 2배 이상의 펀치를 적중시켰으나 당시 심판진의 채점표를 보면 세 명의 심판 중 더글라스가 우세하다고 판정한 심판은 단 한 명 뿐이었다. [15] 미국은 90년대까지 무기수를 제외한 나머지 형사범들은 형기의 반만 복역하면 자동으로 가석방시켰다. 이를 Half-time inmate(형기반감제도)라고 부른다. 그러나 범죄율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2000년대부터 75% 이상을 복역해야 가석방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16] 인터뷰 등지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면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17] 워낙 황당하고 충격적인 사건이라 Holyear vs Teethson 등의 온갖 패러디가 쏟아졌으며, 당시 타이슨을 닮은 모델이 권투 선수 차림으로 나와서 어느 특정 기업에서 만든 가방을 물어뜯는데 핵이빨에도 끄떡없다던 광고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애플 로고처럼 물어뜯긴 귀 모양의 초콜렛이 나온 것은 덤이다. 이런 이유로 타이슨에 대해 다른 것은 몰라도 이 핵이빨 사건만은 기억한다는 사람이 많다. [18] 타이슨의 전 트레이너인 테디 아틀라스는 경기 전날 기자들에게 타이슨이 "당연히 행운을 노릴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초반에 KO펀치를 날리지 못하면 " 엘보, 로우 블로, 헤드벗, 물어뜯기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실격패를 ​​자초할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19] 법에 따라 위원회는 타이슨이 받은 대전료의 10% 이상을 벌금으로 부과할 수 없었다. 타이슨은 3,000만 달러를 받았고, 홀리필드는 3,500만 달러를 받았다(2007년까지 프로 복싱 역사상 가장 높은 대전료). [20] 레녹스 루이스는 기본기가 탄탄한 선수라 나이를 먹어도 비교적 기량저하가 적지만 타이슨은 피지컬을 한도까지 이용하고 스피드를 주력으로 삼는 복서라서 나이를 먹으면 스피드를 잃게 되면서 기량저하도 크게 나타난다. [21] 또한 타이슨은 레녹스 루이스와 다르게 복싱을 쉰 기간이 많았고 이미 이 시기에는 멘탈적으로 무너져 더 이상 복싱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상태였다. [22] 이는 타이슨이 마지막으로 승리한 경기로 기록되었다. [23] 대니 윌리엄스전 당시 정신 차린답시고(파산해서 돈 벌어야 하는 것도 있었지만) 파퀴아오의 코치로도 유명한 프레디 로치를 영입해서 한창 훈련 중이었다. 그러나 너무 무리하는 바람에 무릎 인대가 찢어졌고, 이에 대한 여파로 역전패 후 몇 달간 휠체어를 타고 지냈다고 한다. [24] 어느 파파라치는 그를 따라다니면서 돈을 그야말로 물 쓰듯 펑펑 쓰던 걸 봐서 머지않아 망한다고 예상했는데 이게 맞아떨어졌다. [25] 전처 이름이 로빈 기븐스이다. [26] The former light-heavyweight champion Jose Torres once asked Tyson what the best blow he had ever thrown was. "Man, I'll never forget that punch," Tyson said. "It was when I fought with Robin in Steve's apartment. She really offended me and I went bam, and she flew backward, hitting every fucking wall in the apartment." The marriage ended in divorce. [27] 다만 타이슨의 전처인 로빈 기븐스도 제대로 된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타이슨의 돈을 뜯어먹기 위해 결혼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28] Andrew Golota. 2000년도 타이슨과의 매치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고 기권패한 폴란드 선수. [29] 2000년대까지 미국 사회에서 타이슨의 이미지는 한 마디로 '막장' 이었는데, 90년대 성폭행 사건부터 핵이빨 및 가정폭력까지 온갖 사건사고에 연루되어 이미지가 크게 떨어졌었다. 망가진 영웅 소리를 들었던 셈. 그러나 딸의 죽음 이후 그는 매우 조용해졌고 자중적으로 변했다. 타이슨에게 있어 딸의 죽음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30] 어느 정도 진지한 오퍼였는지는 의문이지만 실제로 대전 협상이 오가기는 한 것으로 보인다. [31] 당장 유튜브에 올라온 해당 경기에 대한 뉴스 영상들의 댓글만 보더라도 기자들이 이 경기의 목적과 경기 내용을 제대로 보고 기사를 쓴 것이 맞냐고 할 정도로 좋지 못 한 반응을 보인다. [32] 참고로 미국에서는 9.11 테러 때문에 비행기에서 난동을 부리는 사고를 치면 지구상에서 가장 처벌을 엄격하게 하는 국가다. 그래서 비행기와 관련된 사건사고는 무조건 FBI가 출동한다. [33] 외형만 보면 덩치가 커보이지만 키가 178cm로 미들급에서도 큰 키가 아니다. [34] 타이슨이 단타를 치는 일은 아예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35] 내로라하는 헤비급 선수들도 픽픽 날려버리는 어퍼컷을 보유한 도노반 러독과의 2차전에서도 몇 번씩이나 어퍼컷을 맞으면서도 꾸역꾸역 12라운드까지 끌고 가서는 판정승으로 이겼다. [36] 여담으로 목근육이 두꺼운 게 미식축구등에선 필수로 필요하지만 복싱에서는 오히려 KO를 유발한다는 주장도 있다. [37] 머리만 살짝 돌려서 잽을 무력화하는 방법. 만화에나 나오는 종잇장 한 장 차이로 피하는 수준의 반응이 필요하다. [38] 레녹스 루이스 전 세대 아웃복서, 전 IBF 챔피언. 타이슨과 경기 당시 34전 34승 29KO의 전적을 가지고 있었음. 타이슨과 경기를 가지고 1패를 적립한 후 90년도에 복귀, 하지만 15파운드가 쪄버리는 바람에 예전 기량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39] 단, 어디까지나 라이트 헤비급 시절에 나이도 최소 20~30줄이었던 전성기 기준. 헤비급으로 올라가서 노쇠하기까지 한 이후는 쳐주지 않는다. [40] 공동 11위 [41]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홀리필드-루이스가 타이슨보다 확실히 높은 평가를 받는 경향이었다. [42] 앞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복싱은 보수성이 심해서 1960년대 이전 선수들에 대한 고평가가 상당하다. [43] 해당 투표는 크게 트레이너/언론인/프로모터/복싱 역사가로 분류되어 실시되었는데, 의외로 복싱 역사가들에게 가장 높은 순위인 7위를 기록했다. 이는 8위였던 포먼보다도 높은 평가를 받은 셈이다. [44] 이는 마이크 타이슨 같은 방식의 복서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헤비급에서는 단신임에도 뚱뚱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마치 전광석화 같은 인파이팅 등 이런 방식으로 챔피언에 나타나야 할 것 이다. 물론 그 챔피언은 제 2의 마이크 타이슨이라 불리겠지만. [45] 이후 미국 헤비급 복싱에 신성으로서 그 타이슨이 우습게 보일 정도로 돌주먹인 디온테이 와일더가 나타났지만 미완성된 복서였기 때문에 결국 완전체 복서인 타이슨 퓨리에게 2패나 당하고 말았다. [46] 물론 디온테이 와일더가 완성되지 않은 복서라고는 하지만 나름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전술이 있었고 그 전술의 완성도 자체는 매우 높았다. 문제는 와일더는 결국 원툴 복서라는 것. 자신의 KO공식을 그대로 따라해서 통하면 상대 선수를 쓰러뜨릴 수 있지만 그 공식에 어긋나는 타이슨 퓨리같은 선수가 상대일 때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힘을 쓰지 못 했다. 그래도 역시나 전술의 완성도는 높았고 또 보완을 한 3차전에서는 괜찮게 싸우긴 했지만 밑천이 떨어진 후에는 역시나 퓨리의 승리였다. 어떤 의미로는 하필 동시대에 퓨리라는 걸출한 복서가 있었고 하필이면 그 퓨리가 와일더의 천적인 스타일이라서 손해를 본 셈. [47] 상당히 의역이 많이 된 표현으로, 제대로 번역하면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다. 주둥이에다가 주먹 한 방이 꽂히기 전까지는." 정도다. [48] 타이슨은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을만큼 한때는 사이가 안 좋았지만 지금은 홀리필드와 잘 지내는 반면, 프로모터인 인간 쓰레기 돈 킹, 전처인 로빈 기븐스와는 아직도 사이가 매우 나쁘다. [49] 조 로건과의 팟캐스트에서. 실제로 자기 자신에게 취해 헤롱거렸다고 표현하였다. [50] Hotboxing with Mike 에서 [51] 이게 철학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맞는 말이라는 것이 재미있는 부분이다. 몇 대를 맞아도 계속 더 때려보라는 식으로 전진하는 터프가이들은 그 전성기 동안 최강의 선수로 불리거나 관중들을 열광시켜 끌어모으는 역할을 할 순 있지만, 인간의 몸에는 명백히 한계라는 것이 있기에 그 데미지가 누적되고 쌓이고 육체적 피로도가 그 극에 달하는 순간 어이없을 정도로 급격히 무너지게 된다. 실제로 타이슨 본인도 터프가이라는 대중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철저하게 지능적으로 경기를 운영하던 권투선수였다. [52] 사진을 자세히 보면 마이클 잭슨의 왼손이 떠 있는걸 알 수 있다. 잭슨도 타이슨이 어떤 선수인지 알아서 행여 잘못 건드리면 주먹이 바로 나갈까봐 올린거라고. 하지만... 당시의 타이슨의 표정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팝의 황제를 만나서 두터운 친구가 되고 사진을 찍어서 좋아하는 것이 드러난것을 알 수 있다. 따봉은 덤이다. 타이슨의 평생 안주거리 획득 [53] 자세한 내용은 마이클 잭슨/아동성추행 논란 참조. [54] 2012년 12월 야후스포츠와 한 인터뷰에 따르면 로빈 기븐스와 이혼소송 중에도 수시로 섹스를 했다고 한다. 로빈 기븐스가 자신 외에 브래드 피트와도 섹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후로는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55] 자막에는 "강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으신 적이 있는데요."라고 나와 있지만, 실제 발언은 "We know you're a convicted rapist."였다. 직역하면 "우리는 당신이 유죄 판결을 받은 강간범인 걸 압니다."가 되고, 문맥에 맞게 해석하면 "당신은 유죄 판결을 받은 강간범인데요."가 된다. 즉 단순히 타이슨의 성폭행 전과 기록에 대해 거론한 것을 넘어 대놓고 타이슨을 강간범이라 칭한 것이다. 타이슨은 다른 건 자기 잘못이 맞지만 성폭행만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 늘 억울함을 호소했는데 생방송에서 대놓고 강간범이라 불렸으니 달가웠을 리가 없다. 거기다 타이슨은 과거 이 사건 이후로 안 좋은 일들이 계속 꼬였기 때문에 이 부분에 한해서는 당연히 민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56] 특히 WWE 2대 월드 챔피언이자 최장기 챔피언인 브루노 삼마르티노의 팬이라고 한다. [57] 각본이긴 하지만 얼마나 엄청난 사건(?)이었으면 전 세계 스포츠 신문 1면을 대문짝만하게 장식하고 "한국을 포함해" 타이슨을 조금이라도 안다 싶은 나라들의 스포츠뉴스에서도 비중있게 보도했을 정도였다. 기겁하는 빈스는 덤. [58] 농담이 아니라 WWE는 저 쌍법규 사태 이후로 스톤 콜드 특유의 막무가내 개썅마이웨이 기믹을 본격화시키며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열어젖히게 된다. 즉 타이슨은 프로레슬링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것이다. [59] 이름은 데일 하우저이며 별명은 '아리조나의 베이스라인 슈터'인 듯하다. 진행자도 별명을 듣자마자 놀란 듯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60] 아성체 고릴라나 암컷 고릴라도 잘 단련된 격투기 선수를 발라버릴 수 있을 정도의 맹수인데, 성체 실버백 고릴라와 맨손으로 싸우겠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그냥 자살행위다. 단단한 코코넛도 간단히 깨버리는 괴력을 가진 실버백 고릴라에게 팔이라도 잡힌다면 그대로 골절상을 입고, 모든 식육목 맹수들(호랑이, 북극곰, 점박이하이에나 등)보다 강한 600~700kg 대의 치악력을 가진 고릴라에게 급소를 물린다면 그대로 사망할 수 있다. 아무리 인간들 사이에선 강자로 손꼽히는 타이슨이라도 고릴라 앞에서는 그저 조금 센 인간에 불과하다. [61] 이 호랑이가 점점 자라고 있을 때 한번은 말을 잘 안들어서 풀파워 라이트 훅을 호랑이 몸에 날렸다고 하는데, 간지러워하는 반응도 보이지 않은 호랑이를 보고 엄청 놀랐다고 한다. 철문을 두드리는 느낌이었다고. 앞서 언급된 고릴라하고 싸우고 싶던 객기를 바로 접어버리게 된 계기였다고도 한다. [62] 최근에 마이크 타이슨이 유튜브에서 말하기를 백호의 이름은 켄야이고 암컷이었으며 무게는 250kg이나 나가는 거구였다고 한다 한번은 타이슨 집에 침입한 도둑의 팔을 산 채로 뜯어버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16년을 같이 살았으며 늙어서는 눈과 골반이 약해져서 동물원으로 보내게 되었다고. [63] 또한 인터뷰에서 알려진 바로는 호랑이는 총 3마리를 키웠는데 점점 자라면서 타이슨 옆에서 서로 자려고 할정도로 질투심이 세서 싸울 정도 였는데 그 광경이 살벌 했다고 한다. [64] 한번은 호랑이를 산책시키다가 옆집 마당에 개가 짖는걸 보고 철문을 넘어 잡으려고 하는걸 집주인이 목격 하였고 그날 동물보호협회 에서 연락이 오며 보호소로 보내졌다고 한다. [65] 다른 일화로는 타이슨 몰래 담장을 넘어 호랑이와 놀던 구경꾼이 호랑이에게 팔이 뜯겼는데 되려 타이슨을 고소해서 타이슨이 25만달러를 줬다고 한다. [66] 6675억 [67] 선수로서보다는 밥 샙의 스파링 파트너, K-1 유명 선수들의 세컨드로 알려져 있다. [68] 실제로 이소룡을 닮기로 유명한 배우 진국곤과 찍은 사진도 존재한다. # [69] 신체적으로 키가 작고 리치도 짧은 편이었던 마이크 타이슨과 달리 아리오스 킬레인은 작중 헤비급으로서 모든 것이 완벽 그 자체다. 무술의 업 그 자체인 무츠 야쿠모만 아니었다면 적어도 복싱룰로는 절대로 이기는 게 불가능한 수준. 심지어 작중 무가비라는 선수를 시합 도중 죽이면서 무츠 야쿠모와 동일한 선상에 오르기까지 한다. [70] 사실 스트리트 파이터 1에 나온 복서 마이크도 타이슨의 패러디이다. 2편에서 사천왕으로 나온 복서와는 동일인물이 아닌 전혀 다른 인물이다. [71] M은 마이크의 약자. [72] 특히나 이름이 너무 유사한 것이 문제였다. 마이크 바이슨(Mike Bison)과 마이크 타이슨(Mike Tyson) [73] 예외인 건 바이슨은 거한이지만 실제 타이슨은 작은 체격이었다는 점. 그리고 바이슨은 모으기 캐릭터지만 타이슨은 러시형 파이터라는 것. [74] 그러나 마이크 타이슨과 관련된 초상권 문제가 아니라 데이터상의 착오로 변경 되었다는 썰도 있다. [75] 닌텐도 역사상 최강의 보스이다. [76] 타이슨 본인이 미국 닌텐도 측의 요청을 거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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