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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16:27:54

애티튜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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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티튜드 시절의 레슬러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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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F 애티튜드 로고

The Attitude Era

1. 개요2. 배경
2.1. WCW의 압박2.2. 문제적 인물, 빈스 루소의 각본2.3. ECW의 영향
3. 전개4. 평가

1. 개요

다시 프로레슬링을 할 생각은 없다.[2]

10년이 지나도, 그리고 20년이 지나도, 이 업계에서 내가 남긴 자리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사라지지 않을 업적을 이루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에 나는 만족한다.
스티브 오스틴[3]
애티튜드 시기의 최전성기인 1999년 RAW is WAR의 오프닝
TV-14 시청제한과 attitude 로고, Thorn In Your Eyes, We Are All Together Now 인트로[4]와 함께 시작한다. 국내에서도 스타TV 시절 많은 팬들이 기억할 오프닝.

1990년대 후반에 프로레슬링의 시청률이 치솟았던 시대로, 1980년대의 프로레슬링 붐 시기와 함께, WWF - WWE 역사상 최고, 최대의 전성기로 남은 불후의 시대이자 현대 프로레슬링이 추구해야만 하는 정수. '애티튜드{Attitude}'는 행동이란 뜻도 있지만 '성깔, 인성'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특히 애티튜드의 주된 테마가 '반권위주의'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후자에 가깝다고 봐야한다. 1980년대 프로레슬링은 이른바 만화책이나 동화에서나 볼 수 있는 권선징악격 성격이 강했다면 애티튜드는 현실에서도 볼 수 있는 권모술수와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노사갈등이 주된 테마로 이뤄져 있어서 관중들이나 시청자들이 현실감과 동질감을 느끼게 해줬다. 게다가 모든 이벤트가 하나의 드라마와 같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음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 전개될까 하는 궁금증을 유발시켰다. 한 예로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이 빈스 맥맨에게 빅엿을 먹은 것으로 끝나면 사람들이 다음은 어떤 식으로 오스틴이 복수할까 하는 것. 아울러 이 오스틴 vs 맥맨 대결은 이른바 '소시민' vs '가진자' 간의 대결구도라는 점 때문에 많은 팬들이 열광한 컨셉이기도 했다. 전형적인 금수저인 '맥맨'과 텍사스의 조그마한 촌동네 출신으로 산전수전 다 겪고 올라와 그야말로 잃을게 없는 '오스틴'의 대립이 이뤄나가는 드라마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감정이입이 쉽도록 해서 더욱 큰 인기를 얻었다.

애티튜드 로고가 처음 사용된 것은 1997년 12월이지만 WWE가 공식 DVD나 관련 영상등을 통해 정의하는 애티튜드 시대는 영문 위키 설명에 따르면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의 최고의 명대사인 오스틴 3:16이 탄생한 PPV인 1996년 킹 오브 더 링을 시작으로 2002년 5월(WWF가 성명권 문제로 인해 WWE로 바꿨던 시기)까지이다. 일부 팬들은 시작점을 월요일 밤의 전쟁이 시작된 아웃사이더즈의 침공으로 보는 경우도 있고 이 시대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오스틴 더 락이 퇴장하게 된 WWE 레슬매니아 XIX를 시대의 끝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긴 한데 어느정도 대동소이하다고 볼 수 있다. 스테로이드 파동 이후 1980년대의 프로레슬링 붐이 죽은 상태에서, 브렛 하트, 숀 마이클스, 디젤, 요코주나, 레이저 라몬, 그리고 언더테이커 등의 신진 선수들이 탄생하여 큰 변화가 일어난 시기인 뉴 제너레이션 시대(The New Generation)와 브랜드 익스텐션(Brand Extension)으로 일컫어지는 일련의 움직임 이후와 존 시나의 데뷔 시점에 나온 멘트인 루쓰레스 어그레션(Ruthless Aggression)이라고도 불리는 시대의 중간 사이에 있다. 이 시기 WWF의 인트로에 attitude라는 단어가 삽입되었기 때문에 이를 애티튜드 시대로 보는 것.

1998년까진 PG등급이었으나 WWF 인 유어 하우스 22: 오버 디 엣지를 시작으로 PPV에서 TV-14를 도입하였고, 1999년부터는 TV로 송출되는 쇼의 상영 등급도 TV-14(14세 이상 시청 가능)로 올린 뒤 더욱 참신하고, 더욱 자극적이며, 더욱 유혈이 낭자한 폭력적인 장면을 앞선에 내세웠는데 이로 인해 유해성 논란까지 일어 방송 중간광고 때 '절대 따라하지 마세요'란 캠페인성 광고까지 삽입해야 했을 정도로 일반 대중들의 여론이 나빠지고 특히 믹 폴리로 대표되는 가학적인 경기 내용은 이를 더욱 부채질 하고 말았지만, 이런 자극에 열광할 수 있는 성인 팬들은 이에 환호하였고 WWE는 그런 팬층을 끌어모았다. 이를 통해 WWE WCW ECW의 경쟁을 종결시키고 그들을 몰락시켰으며, 최후이자 최고로 강력했던 경쟁자를 이겨낸 WWE는 지구상을 통틀어 적수조차 없는 압도적인 규모의 공룡급 프로레슬링 단체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2. 배경

2.1. WCW의 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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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F를 떡실신 시킨 WCW의 전설, nWo

1980년대 WWF는 빈스 맥마흔이라는 야심찬 인물의 주도 아래 프로레슬링 붐을 일으키며 경쟁단체를 물리치고 프로레슬링을 메인스트림으로 끌어올렸다. 이는 헐크 호건이라는 불멸의 아이콘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 당시 헐크 호건은 경기력뿐 아니라 쇼맨십도 출중해서 모두에게 인기를 끌고 있었고 특히 초등학교 어린이들 사이에서는 거의 아이돌급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호건 관련 굿즈 구매층의 상당수가 초등학교 연령대의 어린이들이 대부분을 차지했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더구나 이때 당시의 헐크 호건의 인기는 라이벌 WCW 릭 플레어와 1, 2위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정도였으며, 당시 양대 프로모션을 대표하는 두 거물들의 '가상 매치'는 호사가들에게는 그야말로 인기 떡밥 중 하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초, 미국을 강타했던 스테로이드 파동은 1980년대의 프로레슬링 붐을 순식간에 사그라들게 하였으며, 헐크 호건의 뒤를 잇게 하려고 생각했던 얼티밋 워리어는 경기력이나 엔터테인먼트 능력에서 헐크호건의 대체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능력이 떨어졌던지라 생각만큼의 흥행력을 보여주지 못한 상태에서 1992년 말에 해고되어 사실상 실패했고, WCW가 거액 + 널널한 스케줄로 유혹하여 WWF의 상징이었던 헐크 호건이 1994년부터 WCW에서 일하는 경악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며 사태는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거기다 당시 스테로이드 파동으로 인해 하마터면 빈스는 교도소에 갈 뻔하기도 했다. 이때 빈스는 교도소에 가면 자신이 살아서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WWE를 전국에 방송하도록 하기 위해 다른 프로모터들에게 상당한 원한을 샀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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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F를 궁지에 몰아넣던 에릭 비숍[5]

이런 상황에서 WWF는 그 대안으로 이전과 전혀 다른 스타일의 레슬러들인 브렛 하트 숀 마이클스, 사이코 시드 레이저 라몬 등을 내놓았고, 이러한 변화 속에 언더테이커와 지금은 케빈 내시로 유명한 디젤 등의 스타도 탄생했다. 손에 꼽히는 테크니션인 브렛 하트는 헐크 호건의 공백을 메꿔줄 정도의 경기력과 마이크워크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경기장에 들어선 후 어린이 관중에게 자신이 착용하고 있단 선글래스를 씌워주는 연출로 아동들의 인기도 늘려가는 등의 방식으로 '뉴 제너레이션' 이라 불리운 이 시대의 중심적 아이콘으로 활동하며 WWF를 지탱했고, 언더테이커는 '언데드' 컨셉으로 당시로는 꽤나 충격적인 연출을 보여주었으며 2미터가 넘는 거구임에도 간간히 하이 플라잉 무브를 보여주는등 혁신을 보여주는가 하면, 역사상 최고의 프로레슬러 중 한 명인 숀 마이클스는 WWF 레슬매니아 X에서 레이저 라몬과 함께 프로레슬링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다리 경기를 치르며 WWF는 이전에 비하여 크게 변화한 상태였다.

그러나 WWF의 경쟁자인 WCW는 에릭 비숍의 지휘 아래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WWF의 중심 선수들을 빼오기 시작했고, 이런 선수 빼오기도 어느정도 약빨이 떨어질 무렵에 1996년 역사에 길이 남을 nWo를 출현시키며 헐크 호건의 악역 전환이라는 사상 최대의 반전 등 성인 지향적인 스토리를 전개하여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케빈 내시 스캇 홀이 WCW에 등장한 1996년 6월 10일 부터 WCW는 파격적인 각본에 힘입어 WWF의 시청률을 압도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무려 83주 동안 WWF는 WCW에 시청률 떡실신을 당하기 시작한다. 그 유명한 월요일 밤의 전쟁(Monday Night Wars)이 시작된 것이다.

WWF는 WCW와의 경쟁에서 이겨내기 위하여,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살아남기 위하여 무언가 바뀔 필요가 있었는데……

2.2. 문제적 인물, 빈스 루소의 각본

이런 상황에서 1996년, WWF가 한 해 평균 2.6 레이팅이란 시청률(최저시청률은 10월 14일 방송분이었던 1.8 레이팅)을 기록하며 최악의 행보를 걸어가고 있을 때 이전부터 린다 맥마흔이나 각본진들과 교류가 있었던 희대의 문제적 인물인 빈스 루소가 WWF의 크레이티브 팀에 합류했고, 이후 "Crash TV" 로 불린 자신의 스토리 집필 스타일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헌데 이 빈스 루소가 프로레슬링을 대하는 태도라는것은, 몇몇 팬들 입장에서는 거의 레슬링을 모욕하는 수준에 가까운 편이었다. 빈스 루소는 "경기 잘하는 '좋은 레슬러' 라는건 없다. 연기자(performer)일 뿐이다." "올해의 경기에 선정될 만한 '좋은 경기' 따위를 펼치는건 의미가 없다." "캐릭터를 유지하고 연기하는게 제일 중요하다." 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다. # 어느정도는 근거가 있긴 하더라도 극단적인 사고 방식의 인물인데, 이런 인물이 각본을 책임지게 되자 각본도 자연스레 논란의 여지가 있을 정도로 자극적인, 그러나 화끈하긴 분명히 화끈한 스토리가 탄생하게 되었다.

빈스 루소의 폭력적이며 자극적이고, 때로는 신성모독적이기까지 한 각본은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온갖 상황에서 배신과 선악역 전환이 벌어졌고, 선수들은 피니쉬 기술을 맞고도 벌떡 일어나기도 했으며, 레슬링과 관계가 없어 보이는 순전히 재미를 위한 백스테이지 장면과 장애인 비하, 성적인 요소(대표적으로 발 비너스의 성기 절단 사건.)도 TV 쇼에 가득차게 되었다.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과 빈스의 거친 노사 대립, 악동 숀 마이클스의 디 제네레이션 X, 현란한 쇼맨쉽과 말발로 급성장한 더 락 등이 루소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물론 전부 빈스 루소가 혼자 다 했다는것은 오버 중의 오버고 선수들의 능력이 있었기에 뒷받침 되었던 것이지만 말이다.

여하간 이러한 루소의 스타일은 이후 독으로 다가오게 되지만, 그가 WWF에 남아 있었던 1999년대 말 까지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실제로는 그의 언급과는 달리 애티튜드 시대에 잘나갔던 스티브 오스틴, 숀 마이클스, 트리플 H, 언더테이커, 믹 폴리 등은 연기력과 경기력을 겸비한 선수들이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오너인 빈스 맥마흔이 프로레슬링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기에 빈스 루소가 폭주를 하더라도 통제가 됐다. 하지만 이후 빈스 루소가 WCW로 가면서 통제할 사람이 없어지고 경기력보다 연기력만 뛰어난 선수들을 중시한 결과, 노장 중용과 젊은 선수들의 WWE 러시만을 낳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빈스 루소의 영향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무엇보다 그의 등장 + WCW 및 ECW에의 벤치마킹 등으로 인해 적어도 80년대 식의 유치한 기믹들은 거의 사라지고 성인 취향의 기믹들이 등장했기 때문. 한물 간 80년대 식 유치한 기믹들 대신 당대의 트렌드에 맞는 성인취향 쇼로 전환한 것은 분명 빈스 루소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2.3. ECW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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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프로레슬링 계의 혁명가, 폴 헤이먼

WWE와 WCW의 경쟁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ECW의 존재인데, 보통 하드코어 단체로만 인식되는 ECW지만 이런 ECW를 이끄는 폴 헤이먼이 끼친 영향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사실 이전부터 WCW 등지에서 일하며 잔뼈가 굵은 인물인 폴 헤이먼은 재야의 스타들을 발굴하여 키우고, 미국 외의 지역에서 활동하는 크리스 벤와, 에디 게레로, 딘 말렌코, 크리스 제리코, 레이 미스테리오 등을 데려와 스타로 만들었다. 폴 헤이먼이 이렇게 새로운 선수 발굴, 기존에 알려진 선수지만 진가를 발휘하지 못했던 선수를 다시 스타로 만들기 등에 열중했던 이유는 선수 좀 키워 놓으면 WCW와 WWF, 특히 WCW에서 다 가져가버리니까 였다. 이런 ECW 물을 먹은 선수들 중에 일부는 WWF에 왔고, WCW를 먼저 간 선수들도 WCW에서는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다가 이후 WWF에 와서 진가를 발휘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경우는 WCW에서는 무시만 당하다가 WWF에 와서는 역대급 선수로 자리매김한 크리스 제리코. 믹 폴리의 경우는 ECW에서 이름을 알린 이후 1996년 WWF에 와서 애티튜드 시대의 중심적 선수 중 한 명으로 활약했다.

또한 폴 헤이먼은 만화 캐릭터와 같았던 프로레슬링 캐릭터의 깊이를 훨씬 깊게 하여 현실적이며 정교한 기믹을 탄생시켰다. 레이븐 샌드맨 등이 대표적인데, 특히 이 샌드맨의 기믹은 스티브 오스틴의 기믹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WWF는 반 WCW, 친 ECW 정책을 취했는데 제휴라도 맺었는지 노골적으로 ECW에서 사용했던 연출을 이후에 따라하기도 했으며, ECW의 하드코어 매치에 영향을 받아 여타 기믹 매치를 만들어내기도 했으며 한술 더 떠 그랜드슬램에 들어가는 하드코어 챔피언십까지 탄생했다. 아이디어 제공에 대한 보답으로 WWF는 침공각본 혹은 경기를 만들어주어 이를 통해 ECW 선수들이 RAW에도 출현하게도 하여 선수 및 ECW 인지도 상승에 도움을 주었다.

다만 ECW의 영향으로 인해 이를 모방하는 과격하고 위험천만한 경기들이 등장했다는게 큰 문제였다. 프로레슬링 기술이 모두 위험하고 과격하지만 여기에 스테이플러건이나 철조망, 철제의자같은 위협적인 흉기가 추가되어 선수들의 안전을 몹시 위협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ECW에서는 3층으로 테이블을 쌓아놓고 선수를 그 위에 눞힌 다음 코너 위로 올라가 플라잉 바디 프레스로 테이블 위의 선수를 찍어누르는 그야말로 잘못하면 반신불수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경기가 난무했었다. 여기에 더 큰 문제는 여성 로스터들 역시 이 위험한 경기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다른 프로모션들은 여성 로스터는 남자 선수들의 에스코트 또는 들러리 역할이나 여자부 매치를 따로 갖는것이 관행이었는데 ECW는 아예 여성 로스터 마저 이 위험하고 과격한 경기의 표적으로 만들어 그야말로 경악에 빠트려버린것. 이후 아마추어 리그에서 까지 이것을 모방하고 말았다.

3.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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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애티튜드 시대는 1980년 대, 이른바 골든 에이지라고 불리는 시대와 함께 프로레슬링 계의 황금기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애티튜드 시대는 비교적 최근이니 만큼 전자 이상으로 매니아 팬들에게는 가히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WCW와 WWF의 경쟁이 극에 달하면서 메이저 레슬링 업계의 시청자를 사로잡기 위한 부분이 최고조에 달했고, 이는 지금의 시청률과 비교했을 때에 이 때와 비슷한 수치라고는 하나, 이 때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도 방송국 수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았다는걸 감안하면 말도 안되는 수준임이 시청률에서 드러나고 있다.

다만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레슬링 팬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애티튜드 시대가 기실 '레슬링의 본질' 이라는 부분에서 보자면 꽤나 차이가 있었다는 부분이다. '레슬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경기력의 정점' 을 보여준 단체라고 할 수 있으며 별 다섯개 경기가 정말 수두룩하게 나온 1990년대의 전일본 프로레슬링이나, 세계에서 난다긴다하는 인디 계의 실력자들이 모여서 온갖 명경기를 만들어낸 ROH 같은 단체를 생각해보자. 이 단체들은 엔터테인먼트적 요소가 거의 없거나, 있어도 WWE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한 수준이다.

그시기의 프로레슬링이라는 것은, 시청자가 눈앞에 보여지는 것이 Competition인지 Booked인지 알건 모르건 간에 적어도 링 위에서는 마치 프로레슬링만이 할 수 있는 육체적 파이트 형식으로 보여주는데 주력했고, 등장하는 프로레슬러에게 각자의 개성에 맞게 대립을 주고받았지만 이때까지의 대립은 마치 과거 스트리트 파이터 2시절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런 각본에서는 주 시청자층이었던 청소년들과 당시 사회상이 원하던 권선징악이나 순수한 실력 우선같은 어느정도는 정직한 대결의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어떻게 보면 애티튜드는 이전까지 세웠던 프로레슬링의 본질적인 요소와는 가장 멀었던 시기의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애티튜드 시대에 큰 영향을 미친 빈스 루소만 하더라도 기존의 프로레슬링 매치 작법과 각본 클리셰따위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프로레슬러를 레슬러 라고 생각하지 않고 연기자 라고 부르며, '웃기고 재밌고 자극적인 쇼만 보여주면 그만이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앞서 WCW의 nWo에서 시작한 태도의 전환이 영향을 받아, 링 바깥에서 일어난 일들이 링 안에서의 스토리라인에 중요한 복선이 되고, 이전까지 아이들이 열광하면서 볼수 있던 슈퍼맨같던 초인 만화같던 레슬러들이 갑자기 배트맨처럼 정정당당한 선역들 조차도 서로 짜고 원수끼리 연합하고 뒤통수치고 배신하고 상대를 잔인하게 린치하여 유혈이 낭자한 레슬링판을 보여주었다. 이는 상술한 대전 액션 게임에서 더 킹 오브 파이터즈 시리즈 블레이블루 시리즈처럼 단체 내 속한 레슬러들간 인간관계와 이해득실이 그날 TV쇼의 분위기를 훈훈한 권선징악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피카레스크까지 장르를 정신없이 오갈 정도로 바뀌었다. WCW에서는 그러한 발상이 극단적으로 치달아 독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특히 ECW 팬들이나 현대의 ROH를 위시한 골수 매니아들은 빈스 루소를 매우 싫어한다.

그만큼 애티튜드 시대에는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요소가 많이 있었다. 애티튜드 시대의 핵심적 선수였던 믹 폴리조차 "기억이란 미화되기 마련이다. 애티튜드 시대에는 지나친 부분이 있었다." 고 말했을 정도.

그러나 애티튜드 시대가 그저 싸구려 폭력과 포르노에 가까운 섹스 어필적 요소로만 가득차거나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훨씬 더 과격한 하드코어 레슬링 이라든지 그런 자극들 때문에 성공했던 시기는 아니다. 과감한 작법의 변화로 이전까지 주목받지 못하던 선수와 스토리라인을 통해 TV쇼가 보여줄수 있는 다양성은 더 확장되었고, 단체간의 치열한 경쟁을 통한 선수 수급으로 인해 로스터는 풍부해졌고, 이로 인해 수 많은 명경기가 탄생하였다. 더들리 보이즈, 하디 보이즈, 에지 & 크리스찬 등이 주축이 되었던 태그팀 디비전의 치열하고 TLC(Table, Ladder, Chair) 매치같은 참신한 시도는 해당 디비전의 급을 올려놓았으며, 과거의 북미 메이저 단체에서는 선호되지 않았을 크리스 벤와, 크리스 제리코, 에디 게레로 같은 선수들도 팬들의 지지를 받으며 자리를 잡았다. 한번의 방송에서도 온갖 도발적 요소로 가득찼을 정도로 디바들의 섹스어필이 극에 달했을 시기가 애티튜드 시기지만, 역으로 '눈요깃감' 의 수준을 벗어나 실제적인 디바들의 경기력에서도 눈부신 발전이 이루어지던 시기가 애티튜드 시기기도 하다. 이후 여성들도 단순히 예쁜 얼굴과 빼어난 몸매만 가진 마네킹 혹은 인형과 같은 컨셉의 들러리역이 아닌 경기력까지 겸비한 여성들을 발굴해내는 성향이 높아졌고 이는 다양한 여성 프로레슬러들이 배출되는 계기가 된다. 아울러 여자부 경기라는 독립적 매치가 탄생하게 된 시발점이기도 하다. 이전까진 성인잡지에서 볼 수 있을법한 그야말로 미인형 마스크에다 잘 빠진 몸매, 여기에 성적매력이 넘치다 못해 줄줄 흐르는 디바들이 인기를 얻었다면 이제는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에다 경기력도 출중한 디바들이거나 베이글형에 경기력도 좋은 반전 매력형의 디바가 인기를 얻는것이 대세가 됐고 이는 디바들 역시 상당히 자부심을 느끼는 점이다[6].

말하자면 이 시기는 엔터테인먼트적 요소와 레슬링적 요소가 모두 WWE 내에서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궁극적으로 가장 큰 원동력은 WCW라는 WWE 역사상 가장 큰 업계 라이벌의 등장으로 인한 무한 경쟁의 긍정적 효과지만, WWE의 대약진을 가능하게 해준 동력은 엄청난 카리스마로 시대를 제패했던 두 명의 슈퍼스타, 스티브 오스틴 더 락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우수한 경기력과 카리스마, 그리고 관중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마이크워크로 열렬한 인기를 독차지 하다시피 했고 서로간의 대결구도와 전혀 다른 스타일의 플레이 스타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애티튜드 시대의 몰락은 WWE 입장에서는 의도하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로, 이 시대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던 스티브 오스틴과 더 락이 부상과 헐리우드 진출 등의 문제로 모두 이탈했으며, 서로의 라이벌리로 인해 상승 효과로 극에 달했던 레슬링 붐 자체도 아이러니하게도 라이벌 WCW를 먹어치운 뒤 완전승리라고 자부하던 그 시점부터 라이벌리가 없다보니 위기의식이 사라지게 되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면서 인기가 식어가게 되었다. 여기에 UFC라는 상위 격투기 경기가 대세를 얻기 시작하면서 레슬링 인기도 예전하고는 상당한 거리가 생기게 된다. 차세대 아이콘으로 키우기 위해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 시절부터 유망주로 주목하여 갖은 노력을 다했던 브록 레스너는 이탈 했고, 최연소 챔피언 벨트를 쥐어주며 회사차원에서 기대치가 높았던 랜디 오턴 역시 기대했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만다. 과도기가 길어지다보니 트리플 H나 존 시나 같은 몇몇 레슬러들의 장기 독재가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게 되었다. 과도기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에디 게레로를 비롯한 몇몇 선수들의 사망과 약물 관련 문제, 크리스 벤와의 잔혹사건 등이 터지면서 WWE의 대외적인 이미지도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2008년 7월부터 PG 등급이 시행되며 소위 말하는 '애티튜드적' 인 요소와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져가고 있다. 게다가 이 애티튜드 시대의 부작용이 생기게 된 것 중 하나가 소규모 인디계열 서킷의 경기들이 과격해졌다는 것이다. 웬만해서는 중상으로 이어질수 있는 기술들이 무작위로 해금되어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경기들을 하는 3류 프로레슬링 서킷들이 등장하게 된것이 치명적이었다.

WWE에서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트리플 H는 애티튜드 시기를 일시적인 방향으로 취급하는 듯. 1980년대도 황금기였고 애티튜드 시기도 황금기였지만 두 시기의 지향점은 완벽하게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꼭 자극적이고 폭력적인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뜻으로 보인다. 트리플 H는 자극적인 레슬링, 특히 범프, 스턴트 액션 등을 질색하고, 잘 못하기도 했다. 유혈낭자한 극렬 하드코어 경기를 잘만 소화하던 현역 시절의 행보와 비교해 보면 참 의외의 모습. 다만 이는 그가 스타덤에 오르기 위해 어쩔수 없이 치러야 했던 일종의 '통과의례' 정도였으며, 퍼포머로써 트리플 H는 오히려 고전적인 요소들을 중시하며, 그가 최고위급 임원이 되어 쇼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2010년대부터는 다시 이런 클래식한 요소들을 경기 내,외적으로 잘 배치시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것과는 별개로 애티튜드 시대에는 명백히 2인자 이상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도 그 양반의 메인 욕심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그 시대에는 트리플 H가 쇼의 탑페이스면에서도, 탑힐이라는 면에서도 그 앞에 항상 다른 레슬러 혹은 맥마흔 일가들이 자타공인 항상 있었다. 특히 오스틴은 부상으로 인해 결장하는 시간이 많았고 더 락 역시 헐리우드로 진출하면서 부터는 이에 더 신경쓰는 일이 많아지면서 트리플 H의 역할이 중요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이 시절에는 존 시나가 메인 이벤터로서의 자리를 아직 못잡던 시기이기도 했고.

사실 애티튜드 시대는 WCW라는 라이벌을 이기기 위한 WWF의 발악이 기적을 이루어낸 시절이라고 볼 수 있는데, 만약 WCW가 제대로 된 전문가들을 고위층에 배치시키고 쳐내고 고쳐야 할 것은 과감하게 고쳐나가 제대로된 프로모션으로 성장시켰다면 지금처럼 프로레슬링 자체의 위기감은 도래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테드 터너가 창설했고 잘 이끌어 나가긴 했지만 애시당초 테드 터너는 프로레슬링과는 연관이 없는 인물이었고 고위층으로 앉혀놓은 인물마저도 전문적인 인재들이 아닌 경영인을 고용한데다 이들 대부분은 '회장님의 방침'을 금과옥조로 여겨 고지식한 운영을 했고 그러다보니 일선에서 뛰는 고참급 프로레슬러들은 이 점을 악용해 꼰대짓을 부려 아예 프로모션을 개판으로 만들어 버렸다. 더욱이 WCW가 마지막 숨을 할딱하던때는 고위층마저 프로레슬링과 손절하겠다는 방향으로 결정내린 상태였고 그렇게 WCW는 비극적인 종말을 고했다. 반면 고집이 강한 빈스 맥마흔은 WCW를 이기기 위해서 몇 번이나 자기 결정을 꺾었다. 대표적으로 빈스는 오스틴을 탑 가이로 밀고싶지 않았다. 오스틴이 빈스에게 직접 찾아가 자신의 캐릭터에 대해 따지며 스톤 콜드 스티브 오스틴이란 캐릭터를 지켜냈고, 그것이 오스틴이란 아이콘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또한 더 락을 밀고 싶어하긴 했으나 무개성으로 욕먹던 락키 마이비아 캐릭터로서 밀려고 했다[7]. 애티튜드 시대의 아이콘이 된 두 인물이 하마터면 빈스의 고집으로 역사속으로 파묻힐 뻔 한 것이다. 특히 빈스의 고집이 꺾여 가장 큰 혜택을 본 것이 바로 여자부였다. 이전까지 들러리나 겉절이 취급이던 여자부가 트리쉬 스트래터스 리타와 같은 외모와 실력을 겸비한 인재들이 출현함으로서 여성들간의 매치도 성사되는 계기를 마련했고 더 나아가 여자부 경기의 주류입성에 큰 이정표를 세운 것이다. 이때 WCW를 이기기 위해 고집을 꺾은 빈스 덕분에 애티튜드 시대에는 다양한 캐릭터와 자극적인 요소가 넘쳐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요소들은 빈스 맥맨의 취향과는 반대로, 그는 블러드잡을 혐오했으며 디바들에게 위험하다며 경기를 갖게 하는 것도 싫어했다. 그리고 고집을 꺾은 빈스는 승리를 얻게 된다.

기실 매니아 팬들에게 만악의 근원으로 취급받는 PG 등급이 시행되기 이전의 WWE도 방송에서 에지와 리타와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를 하는 등 성인등급 수준의 쇼를 보여줬음에도 계속해서 시청률이 감소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시청등급이 어떠한가 하는 부분보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더 락이나 스티브 오스틴에 버금갈만한 스타를 발굴하는 것일 수도 있다. 락과 오스틴이 없다고 친다면, 애티튜드 시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락과 오스틴은 애티튜드 시대를 만들고 이끌어 나갔던 두 거물들이었다. 이 둘은 경기력도 경기력이었지만 무엇보다 시청자들과 관중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까지 갖췄던 인물들이다. 애티튜드 시대가 끝난 지금도 이 두사람을 잊지 못하고 있는것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신진세력이 안보인다는 점에서다. 한마디로 경기력도 출중하고 대중들을 사로잡는 카리스마도 완벽하게 소유한 차세대 슈퍼스타가 나오고 있지 않다는 것[8][9].

애티튜드 이후 WWE는 존 시나라는 새로운 아이콘을 발굴하는데 성공했지만, 랜디 오턴이나 제프 하디, CM 펑크 등 가능성 있어 보이던 다른 선수들이 모두 여러가지 문제로 그러한 위치에 올라오지 못하고 새롭게 등장한 선수들도 각본진의 문제, 부상과 이탈로 장장 10년이 넘게 존 시나 한 명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 말하자면 로스터의 전체적인 수준 자체가 얆아지고 있는 것으로, 2010년을 전후해서 WWE는 이 문제 때문에 브랜드 분리도 포기한 상태다. WWE는 존 시나를 이을 새로운 스타를 발굴하기 위해 로만 레인즈 등의 선수에게 큰 푸쉬를 주었지만, 사실 존 시나도 과다한 푸쉬를 받으면서 어마어마한 욕을 먹은 전적이 있고, 이는 로만 레인즈 등 포스트 존시나 세대의 선수들도 마찬가지인데, 오히려 과거 세대의 스타에 비해 부족한 경기력과 카리스마를 보여주면서 역반응이 심해지며 팬들의 큰 반발을 불러오고 있다. 그 더 락도 급푸쉬로 욕을 먹은 전적이 있었으나 본인의 역량과 이를 활용한 재미있는 각본으로 아이콘이 되었는데, 지금의 WWE는 각본으로 전혀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 않아서..

결국 애티튜드 시대에서 많은 시간이 지난 2010년대는 애티튜드 시대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NXT의 성공과 TNA의 몰락을 통한 재능 있는 선수들의 유입으로 경기력 자체는 많이 높아졌지만, 기존에도 까이던 각본진의 문제가 더욱 심화되고 새롭게 등장한 여러 신진 선수들 중에서도 푸쉬를 받고 제대로 정착한 선수는 소수이다. 이 때문에 과거의 선수들을 지속적으로 영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선수들은 아쉽게도 나이나 부상 등 여러 요소로 인해 파트 타임으로 뛰는 경우가 많아서 장기적으로 단체의 흥행을 이끌 선수는 아니다. UFC 종합격투기의 인기, 그리고 AEW 등 경쟁 매체의 등장으로 WWE의 인기가 위협을 받으면서 과거 애티튜드 시대의 WCW와 ECW의 경쟁이 그랬듯이 WWE가 혁신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전망도 나오고는 있지만, 최소한 TV 시청률 면에서 애티튜드 시대를 넘을 일은 없을 가능성이 높고 이 때문에 애티튜드 시대는 좋든 싫든 WWE의 리즈 시절로 계속해 팬들에게 기억될 것으로 보인다.

이후 2024년 들어서 WWE는 트리플 H가 권한을 잡았고, 각본을 다시 개선하는 등의 행보를 보인 끝에 다시 한 번의 시청률 상승과 엄청난 관중 동원력으로 애티튜드 시대의 영광을 재현해나가고 있다.

여담으로 2024년 기준으로 WWE 공식 로스터에 2000년대 애티튜드 시대를 거쳐나갔던 현역 선수중에는 R-트루스 랜디 오턴이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중이다. 다만 랜디 오턴은 애티튜드 시대가 끝나기 한달 전에 2002년 4월 23일 스맥다운에서 메인 무대 데뷔를 했고 데뷔 당시에 하우스 쇼, 다크 매치, 제이키드, 선데이 나이트 히트 위주로 활동했던 무명 시절이었기에 사실상 경험만 해본 수준이다. R-트루스는 애티튜드 시대의 상징으로 증명할수 있는 커리어인 하드코어 챔피언십 획득 기록이 있다보니 향후에 1선급 타이틀 혹은 2선급 타이틀중 한가지만 획득해도 (구)그랜드 슬램을 달성할수 있는 유일한 후보가 될수 있는 선수이기도 하다.

[1] 이 중 빈스 맥마흔과 아들 셰인 맥마흔의 얼굴이 반쪽씩 합성되어있는 사진(맨 위 왼쪽에서 4번째)은 2001년 열린 PPV인 WWF 인베이젼의 포스터다. [2] 그러나 은퇴 후 19년이 지나 레슬매니아 38에서 복귀 경기를 가졌다. 사실 오스틴의 은퇴는 자발적이라기보다 목 부상으로 인해 어쩔 수 없었던 면이 컸던지라 원 모어 매치의 미련이 있어도 이상하진 않았다. [3] 스톤 콜드 스티브 오스틴은 애티튜드 시대를 있게 했으며 가장 앞자리에서 이끈 일등공신이다. 오스틴을 빼놓고 애티튜드 시대를 논하기는 불가능할 정도로 그의 존재는 그 시대 자체였다. 애초에 WWF에서의 활동시기도 1996~2002 6년 간이며 WWE가 정의하는 애티튜드 시대와 완전히 일치하고, 그 시작과 끝을 장식한 레슬러 또한 오스틴이다. 물론 오스틴은 NWA, WCW 시절에도 한가닥 하는 프로레슬러였지만 오늘날의 오스틴을 있게 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이 애티튜드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오늘날과 같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애티튜드가 결정적이었다. [4] 이 곡은 1996년 발매된 WWF OST WWF 풀메탈의 오프닝 곡으로 사보타주의 보컬 존 올리바, 앤스랙스의 기타리스트 스캇 이언등이 참여한 밴드 슬램 잼이 불렀다. [5] 초반 얼마까지는 그랬었다. WCW는 이 사람의 기획으로 처음으로 흑자로 돌아서기도 했으며 시청률 전쟁에서 WWF를 완벽하게 눌러버린 화려한 업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선수를 발굴하는 능력이 부족했고 전반적으로 구시대적 발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문제였다. [6] 다시 말해 과거 80년대, 그러니까 프로레슬링의 전성기라 불리던 그 시대의 컨셉으로 가고 있는것이 여성부라고 할 수 있다. [7] 더 락이 인기를 얻기 시작한것이 페이스때였던 락키 마이비아(더 락의 외할아버지 ‘하이 치프’ 피터 마이비아의 성이다. 외할아버지 역시 프로레슬러였으므로.)가 아닌 악역 스테이블이었던 ‘네이션 오브 도미네이션‘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시기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8] 이렇다보니 스티브 오스틴이나 더 락이 등장하면 열광하는등의 사태가 흔하다. 더욱이 락은 50이 넘은 나이임에도 현재까지 현역이다(비록 파트타임 형식으로 뛰는 것이긴 하지만). 오죽하면 언더테이커와 같은 은퇴한 노장까지 동원되야 할 지경으로 상황이 심각하다. [9] 근데 정작 그 락은 2024년 새 아이콘 후보로 점찍었던 코디 로즈의 앞을 막을 뻔하거나, 2022년 클래시 앳 더 캐슬 당시 드류 맥킨타이어의 푸시를 막아버린 주범으로 지목되는 등, 어째 애티튜드의 그림자가 오히려 WWE의 앞길을 막는 상황으로 흘러가게 만들었다. 다행히 이후에는 고집을 꺾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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