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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22:03:26

조지 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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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포먼
George Foreman
본명 조지 에드워드 포먼
George Edward Foreman
출생 1949년 1월 10일 ([age(1949-01-10)]세)
미국 텍사스 주 마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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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91cm[1] / 118kg[2] / 199cm[3]
체급 헤비급
스탠스 오소독스
복싱 전적 81전 76승(68KO) 5패(1KO)
링네임 Big
주요 타이틀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권투) +81kg 금메달
링크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어린 시절3. 커리어
3.1. 아마추어 경력3.2. 프로 경력
3.2.1. 무서운 상승세3.2.2. 조 프레이저를 침몰시키다3.2.3. 무하마드 알리에게 기세가 꺾이다3.2.4. 론 라일과의 명승부3.2.5. 지미 영에게 뜻밖의 패배
3.3. 은퇴 후 목사가 되다3.4. 늦은 나이에 복귀3.5. 재은퇴
4. 은퇴 후5. 첫 번째 조지 vs 두 번째 조지6. 파이팅 스타일7. 평가8. 어록9.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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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설적인 권투 선수, 기업인, 개신교 목사.

현역 시절, 엄청난 신체능력을 자랑한 헤비급 복서로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며, 프로에 데뷔하고 통산 76승 5패 68KO, WBC, WBA, IBF 통합 세계 챔피언을 두 번이나 차지하고 은퇴한 뒤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복싱 커리어 내내 큰 부상으로 경기를 오래 쉰 적도 거의 없고, 10년 동안 복싱을 쉬다가 돌아온 40대에도 120kg에 육박하는 몸으로 위력적인 펀치를 발휘, 상대 복서들을 눕히며 챔피언에 또다시 등극하고 은퇴했다. 게다가 은퇴한 후 현재까지도 후유증 그런 거 없이 건강하다.

2. 어린 시절

어머니는 전남편 포먼과 별거하는 사이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져 포먼을 임신해서 출산했다. 그러므로 포먼이라는 성은 어머니의 남편의 성이고 친부의 성은 아니다.[4] 몇몇 복서들처럼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세월을 보냈고[5] 어린 시절을 문제아로 보냈다. 제대로 3끼를 먹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빈곤했다. 허나 포먼의 동생인 로이에 따르면, 포먼은 13살이 되던 해에 이미 6피트 2인치에 200파운드였다고 한다.[6] 전기 영화인 빅 조지 포먼에도 나온 당시 이야기를 보면, 맥도날드에서 가장 싼 치즈버거를 단품으로 사서 그걸 나이프로 썰어 나눠먹는게, 하루의 한끼였다고 한다.

포먼은 집안사정이 가난하고 학교에서 불량배 친구들과 함께 자라난 탓에 각종 폭행, 범죄 등을 서슴치 않는 양아치가 되었다. 그는 다니던 학교도 자퇴하고 시간을 허비하며 살았는데, 17세가 되던 해 포먼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도둑질을 하고 경찰에게 며칠을 쫓겨다니게 된다. 빈집의 찬장 옆에 웅크려 숨고, 온몸에 진흙을 발라가며 숨고, 어렵게 돌아온 자신의 집에서 또 숨는 등 어마어마한 고생을 하게 된 포먼은 "내가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는 거지? 내 인생을 바꾸고 싶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던 중 당시 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의 서민 교육정책인 직업학교 광고가 TV에 나왔는데 미식축구 선수 짐 브라운의 훈련 광고를 보게 되었는데, 그 광고에서 나오는 대사는 "당신의 삶을 바꿀 기회입니다."였고 포먼은 그 광고를 본 즉시 직업학교에 지원했다. 직업학교를 다니면 집을 떠나야 했기에 어머니도 포먼도 조금 고민했지만, 나쁜 패거리들과 어울리지 않아도 됐기에 어머니가 사인을 해주었다고 한다. 제대로 글과 공부를 배우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하면서 여러 고민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이 직업학교에서도 특유의 거친 문제아 기질은 남아 있어서 툭하면 시비에 휘말렸다. 그러자 친구 중 한 명이 "조지, 니가 그렇게 터프하다면 복싱을 해보는 게 어떻니?"라고 말하며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다.

3. 커리어

3.1. 아마추어 경력

원래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한 데다 힘이 장사였고,[7] 남다른 신체조건 덕분에 미식축구 선수도 고려했으나 최종적으로 복싱 선수가 되었다.

1966년 직업 군단(Job Corps)에 있을 때 권투를 시작하여 트레이너 찰스 "닥" 브로더스[8]의 밑에서 트레이닝을 받았고, 전 헤비급 세계챔피언 소니 리스턴의 스파링 파트너를 해주기도 하였다.

아마추어 데뷔전에서 P.T. 톰슨에게 부전패했고, 두 번째 경기에서는 맥스 브릭스에게 3라운드 판정패를 당했다.

1967년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서 마리온 존스를 1라운드 KO시키며 파크스 다이아몬드 벨트 헤비급 챔피언십(주니어 부문)에서 우승했다. 포먼은 이 경기가 자신의 첫 경기였으며, 위에 언급된 두 경기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1967년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KO승을 거두며 캘리포니아 골든 글러브 헤비급 챔피언십(주니어 부문)에서 우승했다.

1967년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토마스 쿡을 KO시키고 네바다 골든 글러브 헤비급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1967년 위스콘신 밀워키에서 열린 내셔널 골든 글러브 토너먼트 헤비급 결승에서 클레이 호지스에게 패배했다. 포먼은 아마추어 무대에서 호지스와 세 번 겨루어 세 번 모두 포인트싸움에서 밀렸다. 포먼은 호지스와의 경기는 두 번 치렀다고 말했다.

1968년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L.C. 브라운을 KO시키고 캘리포니아 골든 글러브 헤비급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1968년 세 명의 상대를 연달아 KO로 물리친 후, 오하이오주 톨레도에서 헨리 크럼프를 상대로 3라운드 판정승을 거두며 내셔널 AAU 헤비급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1968년 7월,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서 소니 리스턴과 함께 5라운드 시범경기를 두 차례 가졌다. 이때 리스턴은 22온스 맞춤 제작 에버라스트 글러브를 착용하였으며, 포먼은 훗날 리스턴이 "내가 링에서 만난 가장 무서운 인간이었고, 꾸준히 나를 뒤로 물러나게 만든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1968년 8월, 서독 하노버에서 열린 미국과 서독의 듀얼 매치에서 다이터 렌즈에게 파울을 당해 패배했다.

1968년 오하이오주 모미에서 열린 미국의 올림픽 선발전에서 앨버트 윌슨을 2라운드 KO시키며 우승했고,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서에서 오티스 에반스를 판정으로 제치며 미국 복싱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다.
올림픽 결승전. 상대는 소련의 요나스 체풀리스 선수.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결승전에서 승리한 후, 포먼은 작은 크기의 미국 국기를 들고 링 주위를 돌며 관중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포먼은 올림픽 금메달을 딴 것이 권투 경력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이었다고 술회했다.

3.2. 프로 경력

3.2.1. 무서운 상승세

1969년 6월 23일,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도널드 월하임을 3라운드 만에 KO시키며 프로 데뷔전을 화려하게 치렀다. 이후 1969년 한해에만 총 13전을 치르며 전승 11KO를 기록했다.

1970년 포먼은 12번의 경기에서 또다시 전승 11KO를 기록하며 헤비급 챔피언십을 향한 무패행진을 이어갔다. 이때 유일한 판정승은 아르헨티나의 그레고리오 페랄타를 상대로 10라운드 만장일치 판정승을 거둔 것이었는데, 포먼은 페랄타와의 경기에서 빠른 카운터펀치를 활용한 적극적인 복싱 스타일에 취약하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런 다음 포먼은 강철턱의 소유자였던 조지 추발로를 3라운드 만에 TKO로 제압했고, 3개월 후 분 커크먼도 2라운드 41초 만에 TKO로 제압했다.

1971년 포먼은 페랄타와의 재경기를 포함한 7번의 경기에서 이번엔 전승 KO를 기록했다. 32전 전승 29KO의 기록을 세운 후 WBA, WBC 양기구는 모두 포먼을 헤비급 랭킹 1위로 승격하였다.

3.2.2. 조 프레이저를 침몰시키다

당시 헤비급에는 전설적인 조 프레이저 무하마드 알리가 활동하고 있었고, 프레이저는 당시 WBA, WBC 통합 챔피언이었다. 프레이저는 아무도 못 이긴다는 무하마드 알리를 판정으로 이겼고, 당시 무패(29전 29승)를 자랑하고 있었다.

선샤인 쇼다운(The Sunshine Showdown)이라고 불리는 포먼과 프레이저의 대결은 1973년 1월 22일, 자메이카에서 열리게 되었다. 포먼의 신체조건이 월등히 우세하였으나[9], 대부분 프레이저의 승리를 점쳤다.

"Down goes Frazier!"[10]

프레이저는 포먼의 가드 사이로 레프트 훅을 적중시키며 경기를 스타트했고, 초반에만 포먼의 관자놀이에 한 방, 턱에 두 방의 레프트 훅을 먹였지만, 포먼은 그걸 다 씹고 프레이저의 가드 위나 이마쪽으로 펀치를 날려 프레이저를 다운시켰다.[11]
결국 프레이저는 포먼의 무자비한 펀치 세례를 두들겨 맞고 2라운드 만에 총 여섯 번이나 다운을 당하고 TKO패하는 처절한 패배를 맛보았다.[12][13]

이후 포먼은 1차 방어전에서 호세 로만을 상대로 1라운드가 시작된 지 겨우 2분 만에 KO시켰으며, 2차 방어전에서는 지난해에 무하마드 알리와 1승 1패의 호각을 이뤘던 켄 노턴을 상대로 2라운드 TKO승을 거두었다. 이때까지 전적은 40전 40승 37KO(92.5%).

3.2.3. 무하마드 알리에게 기세가 꺾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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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의 대결은 수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복싱 역사상 최고의 경기라 불리는 세기의 대결이다.

1974년 10월 30일, 자이르 킨샤사에서 열린 이 대결은 정글의 대소동(The Rumble In The Jungle)이라고 불린다. 이때 포먼에게 불운이 닥쳤는데, 훈련하다가 눈 위가 찢어진 것이었다. 이것 때문에 경기를 한 달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 부상 때문에 훈련량이 부족해졌다. 다시 상처가 날까봐 스파링을 중지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먼은 여전히 알리가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부자에 따르면, 포먼과 그의 세컨은 경기 전 포먼의 탈의실에서 포먼이 알리를 죽이지 않기를 기도했다고 한다.

알리는 1라운드부터 링 위를 분주히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포먼은 곧장 알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알리는 오른손 리드를 잘 활용해 포먼에게 여러 차례 클린히트를 적중시켰고, 포먼이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알리는 클린치를 걸어 포먼이 주도권을 가져가는 것을 방해했다. 하지만 포먼도 1라운드가 끝나기 전 그의 뛰어난 링커트 능력으로 알리를 따라잡고, 그에게 펀치를 몇 번 날릴 수 있었다.

2라운드가 시작한 후, 알리는 사각 링 로프의 반동을 이용해 포먼의 강펀치 충격을 교묘하게 분산시키는 일명 'rope-a-dope' 전략과 지능적인 플레이로 포먼의 포화를 피해갔다. 특히나 클린치싸움에서 알리가 포먼을 압도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했는데[14], 알리는 포먼에게 기대어 그가 자신의 무게를 지탱하도록 했고, 포먼의 목을 눌러 포먼의 머리를 아래로 잡았다. 이 동작은 방향 감각을 잃게 할 뿐만 아니라, 선수가 맞을 때 목이 더 크게 꺾이기 때문에 펀치의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알리는 또한 포먼을 끊임없이 조롱하며, 포먼에게 더 많고 강한 펀치를 던져보라고 도발했고, 그 말에 흥분한 포먼은 알리가 원하는 대로 펀치를 남발하였다.

몇 라운드가 지나자 포먼은 지치기 시작했고[15], 4라운드 시작과 5라운드가 끝나갈 무렵 알리의 콤비네이션에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마침내 8라운드에서 알리는 왼손 훅으로 포먼의 머리를 들어올렸고, 이내 재빠른 오른손 스트레이트로 결정타를 날리며 포먼에게 커리어 최초이자 유일한 KO패를 선사하였다.[16][17]

이 경기의 결과에 전세계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인물은 역시나 포먼 본인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더더욱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며 핑계를 들었다. 자신의 트레이너였던 딕 새들러가 자신이 마실 물에 약물을 탔다는 터무니없는 주장부터[18] 시작해서 치프 세컨인 새들러가 엉뚱한 명령을 내렸다거나 자신에게 빌려간 돈으로 주심에게 뇌물을 주었다 등[19] 책임전가를 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20] 이외에도 포먼은 링 로프가 너무 헐렁했다고 주장하였는데, 물론 포먼의 주장대로 로프가 헐렁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알리의 트레이너였던 안젤로 던디는 알리가 로프에 몰렸을 때마다 "로프에서 떨어져라"며 소리친 데다가 알리 본인도 'rope-a-dope' 전략이 경기 도중에 즉흥적으로 생각해낸 것이었다는 식의 발언을 하였는데..[21]허나 충격적이게도, 훗날 안젤로 던디는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본인이 직접 링 로프의 턴버클을 느슨하게 풀었다고 인정했다. 은퇴한 후 노년의 포먼은 '"저는 온갖 변명을 했습니다. 링 로프가 느슨했다. 주심이 카운트를 너무 빨리 세었다. 찢어진 상처가 훈련에 해를 입혔다. 약물을 먹었다. 그냥 베스트 맨이 이겼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전에 한 번도 진 적이 없어서 지는 법을 몰랐어요."'''라고 자평했다.[22][23]

3.2.4. 론 라일과의 명승부

파일:포먼 라일.jpg
아무리 전 챔피언이라 할지라도 포먼이 헤비급 왕좌를 탈환하기 위해선 탑컨텐더들을 쓰러뜨리며 타이틀 도전권을 얻어야만 했는데, 이는 복싱계의 전설인 알리도 겪었던 과정이다.[24] 그렇게 1년 만에 프로 복귀전을 치르게 된 포먼의 상대로 지목된 선수는 론 라일이었다. 라일 또한 1975년 5월 알리와의 타이틀전에서 11라운드 TKO패를 당했다. 라일 본인이 자서전을 통해 패인을 밝혔는데 "로프 어 도프 전략에 당할까봐 너무 조심스럽게 싸웠으며, 권투 선수로서의 기술에서 너무나 큰 차이가 났다."고 한다.
허나 포먼의 헤비급 왕좌 탈환 과정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알리뿐만 아니라 이전의 어떤 챔피언들과의 경우와 비교해 보아도 상당히 달랐기 때문이다. 먼저 챔피언인 알리는 공식적으로 '리매치는 없다!'며 계속해서 리매치를 거부했다.[25]그리고 협회는 포먼의 리매치 요구를 약 1년간 전부 무시해버렸다. [26]그럼에도 포먼이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리자 협회는 론 라일을 상대로 승리한다면 리매치를 주겠다는 약속을 하게 된다.
1976년 1월 24일, 70년대를 대표하는 헤비급 최강의 슬러거들 두 명이 만나 "세기의 격돌"이 벌어진다. 포먼은 1라운드에 라일이 휘두른 오른손 오버핸드를 턱에 정통으로 맞고 크게 휘청거렸으나[27], 2라운드에 라일을 로프에 몰아넣으며 KO 직전까지 갔지만 라운드 종료 벨이 울리며 라일은 살아남는다.[28]

4라운드부터 엄청난 난타전이 시작되는데 포먼은 라일의 펀치세례에 첫 번째 다운을 당하지만, 다시 일어나 역으로 라일을 다운시켰다. 라일도 물러서지 않으며 경기를 재개했고, 라운드 종료 3초를 남기고 온 힘을 다해 휘두른 오른손 훅을 포먼에게 적중시키며 그를 또다시 다운시켰다. 5라운드 두 선수들은 가드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서로를 때렸고 결국 포먼보다 먼저 지친 라일이 캔버스에 쓰러지며 KO패했다.[29]

하지만 협회는 그와의 약속을 어기고 알리와의 리매치를 주지 않았다. 이에 크게 분노한 포먼이 항의하자, 이번에 협회는 조 프레이저를 상대로 승리한다면 정말로 알리와의 리매치를 성사시켜주겠다고 약속한다. 이에 포먼은 조 프레이저와의 2차전에서 그를 5라운드에 두 번 다운시키며 TKO승을 한다. 그러나 협회는 이번에도 약속을 어겼고, 차례대로 스콧 르두, 존 디노 데니스, 페드로 아고스토 등의 선수들을 내보냈다. 포먼은 이번에도 이들을 상대해 모두 승리해내지만 이전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협회는 또다시 약속을 어기게 되고, 지미 영을 이기면 정말로 리매치를 주겠다고 약속하는데..

3.2.5. 지미 영에게 뜻밖의 패배

파일:foreman vs young.jpg

1977년 3월 17일, 알리를 상대로 설욕전을 노리며 복수심을 불태우던 포먼은 지난해 알리와의 타이틀전에서 논란의 판정패를 당했던 지미 영과 푸에르토리코 산후안에서 맞붙었다.

3라운드에 포먼의 지속적인 팔꿈치 사용에 대해서 영이 항의를 하자 주심이 포먼을 감점시킨 것을 제외하면 6라운드까지 경기에서 두 선수가 보여준 인상깊은 장면은 없었다. 하지만 7라운드가 시작하자마자 포먼은 경기를 거친 기세로 영에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영은 포먼에게 왼손 훅을 맞고 몸을 비틀거렸지만, 클린치를 하거나 로프에 몸을 기대면서 어떻게든 포먼의 공격을 버텼고, 나중엔 오히려 포먼에게 카운터를 날리며 맞불을 놓았다.[30]

8라운드 아웃복싱을 하는 영을 상대로 여전히 KO승만을 노리던 포먼은 링커트를 하기 위해서 영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으나, 영은 그럴 때마다 포먼에게 카운터펀치로 응수하며 차근차근 유효타를 쌓아갔고, 관중들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지며 '지미 영'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결국 킨샤사와 맞먹는 산후안의 더위로 인해 포먼이 점점 지쳐가던 중 12라운드에 영이 날린 라이트가 포먼의 안면에 제대로 걸리면서 커리어 최후의 다운을 당하였다. 경기의 결과는 후반 라운드부터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영의 만장일치 판정승이었고, 포먼은 이 경기에서도 3년 전과 똑같이 예상치 못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31]

경기 후 절망에 빠진 포먼은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링으로 올라온 하워드 코셀과의 질의응답까지 거부한 채 초라한 뒷모습을 보이며 링 밖을 나섰고, 자신은 이제 끝났고 협회에 이용만 당했다는 생각에 라커룸을 부수고 소리를 지르는 등 난동을 부리다가 심장마비를 일으키며 거의 죽을 뻔한 경험을 하였다. 이 경험은 포먼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3.3. 은퇴 후 목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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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먼은 영에게 패배한 후 거의 2년간 누적된 극심한 스트레스로 심장마비를 일으키며 쓰러졌는데, 이때 가사 상태에서 임사 체험을 하게 되었다. 기적적으로 깨어난 포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아나신다"고 소리치며 샤워실로 뛰어들었고, "할렐루야, 난 깨끗해! 할렐루야, 난 다시 태어났어!"라며 소리치기 시작했다.[32] 그 뒤로 포먼은 매우 열렬한 개신교 신자가 된다.[33]

그의 이러한 신앙 체험은 지극히 무뚝뚝하던 그의 성격을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매우 활달하고 유머러스하게 바꿔 버린다. 그가 소위 거듭난 이후 한 말은 그전까지 죽도록 미워하던 무하마드 알리에 대해 '이제는 그를 사랑합니다.'였는데 그의 어머니조차 이 말을 듣자 아들이 드디어 미쳤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전까지 종교와는 거리가 멀었던 포먼은 이때부터 열심한 개신교 신앙활동을 하다 전도사가 되었다. 그리고 전도사에 그치지 않고 목사 안수까지 받으며 여러 지역에서 목회 활동을 하는 한편, 전국적인 기독교 관련 방송에 나와서 자주 간증을 하기도 했다. 포먼은 그동안 모은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전도 활동과 청소년 센터 건립 등 신앙활동에 모조리 다 내놓았으며 거리에 버려져 자연스럽게 불량배가 되고 갱단에 들어가기가 좋은 환경에 놓인 청소년들을 보살피는 일을 했다.[34] 그런데 결국 그런 활동을 하다가 변호사가 가장 비참한 복서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할 정도로 거의 파산 직전에 이르렀고 그를 계기로 자선 활동에 필요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현역 복귀를 결심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전성기를 진작에 지나버린 38세였다.[35][36]

3.4. 늦은 나이에 복귀

초창기 포먼의 외모와 복싱계 내에서의 이미지는 아무런 캐릭터성도 없는 스트리트 파이터 1의 미국 스테이지 복서 마이크,[37] 또는 록키 3에 나온 클러버 랭과 비슷하다. 대중적인 인지도는 상당하지만 강타자라는 것 이외에는 개성이 다소 부족한 선수.[38] 반면 복귀 후 포먼은 대머리에 약간 배나온 겉으로만 보면 우스꽝스러운 모습에다, 전까지 무표정과 달리 항상 웃는 표정이라 이는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와 같은 느낌이 생겨 복귀 전과는 링 캐릭터가 확연히 달라졌다.[39]

1987년 복귀한 그는 당시 무적의 챔피언인 마이크 타이슨과 상대하기를 바랐으나, 타이틀 매치를 위한 지명전을 위해서는 승수를 쌓아야 하는 것이 복싱계의 룰이라서 처음에는 잔챙이 복서들과 대결을 하여 승수를 쌓았다. 포먼은 10년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원래부터 뛰어났던 피지컬과 70년대 레전드들과 치고받은 가락만으로도 젊은 잔챙이들을 상대로 또다시 연승행진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초기엔 언론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다른 인터뷰 영상에 의하면 복서로 활동할 나이가 아닌지라 대성하지 못할 거라고 프로모터들이 생각했기에 초기에 그를 매치업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게다가 일부 프로모터들이 젊은 시절 막나가던 포먼을 싫어했었기 때문이기도 한데, 실제로 아무리 한물간 복귀 선수라도 한시대를 풍미한 전 챔프가 몇몇 큰 선수와 다수의 작은 선수들을 상대로 20전 연속 전승을 달릴 동안 제대로 된 프로모터도 흥행작업도 붙이지 않았다는 건 비정상이다. 실제로 당시 힘있던 프로모터 밥 애럼은 포먼의 전성기를 직접 겪은 세대이고 포먼에 대해 인식이 안 좋아서 그의 대전을 추천하지 않았으며, 참다 못한 포먼이 직접 찾아가서 과거에 대해 반성하고 부탁을 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매치업을 잡을 수 있었다.

3.4.1. 게리 쿠니를 잠재우다

포먼은 복귀 후 1989년까지 19연승 18KO를 기록하지만 이때 상대한 복서들은 세계 타이틀 수준과는 거리가 있었고 각국 챔피언 출신이나 대륙 챔피언 출신, WBF 등 마이너 기구 챔피언 출신 정도였지만, 그나마 의미있는 승리라고 한다면 2004년에 복싱 명예의 전당에 오른 전 라이트헤비급, 크루저급 챔피언이었던 드와이트 무하마드 카위를 상대로 7라운드 TKO승을 한 것이나[40] 훗날 홀리필드와의 대결에서 그에게 커리어 첫 다운을 뺏어간 버트 쿠퍼[41]를 상대로 2라운드 RTD승을 한 것 정도가 다였다.

그러다 포먼은 드디어 네임드 선수와 경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 상대는 게리 쿠니로 한때 '백인들의 희망', '강철턱' 등의 별명으로 불리며 포먼을 은퇴시킨 지미 영을 상대로 4라운드 TKO승을 했고, 포먼을 두 번이나 다운시킨 론 라일을 1라운드 만에 KO시켰던 하드펀처였다. 하지만 쿠니는 1987년 마이클 스핑크스에게 5라운드 TKO패를 당한 후 지난 3년 동안 링 위에 오르지 않은 상태였다.[42]
포먼의 유명한 "산책 어퍼컷"을 보려면 5분 53초부터.

1990년 1월 15일, 재기를 꿈꾸던 두 선수의 대결은 다소 싱겁게 끝을 보게 되었다. 1라운드 쿠니는 레프트 훅으로 포먼에게 데미지를 입혔지만[43], 2라운드에는 포먼이 파워샷을 날리면서 쿠니로부터 첫 번째 다운을 뺏어갔다. 이내 쿠니가 다시 일어서는 것을 본 포먼은 그를 향래 뚜벅뚜벅 걸어가다가, 왼손 어퍼컷에 이은 오른손 스트레이트 콤비네이션으로 쿠니를 아예 켄버스에 처박아버리자, 주심은 경기를 중단시키기에 이르렀다.[44]

3.4.2. vs. 에반더 홀리필드

포먼은 복귀 이후 24승 23KO를 기록하며 무패행진을 이어갔고, 마침내 타이틀 도전권을 얻는 데 성공했다. 1991년 4월 19일, 포먼은 만 42세의 나이로 28세의 헤비급 챔피언 에반더 홀리필드와 복귀 후 첫 타이틀 매치를 벌였다.

포먼은 이 경기를 홍보하기 위해서 대중들에게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젊은 시절의 무표정한 얼굴과 대중을 기피하는 성격을 버리고, 전도사로 일하면서 180도로 변한 대중친화적인 성격과 그의 유머러스함을 앞장세우며 거침없는 도전정신과 친근한 인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주는 인물이 되었다.[45]

하지만 제 아무리 조지 포먼이라도 크루저급을 제패하고 마이크 타이슨에게 충격의 첫 패배를 선사한 버스터 더글러스를 3라운드 만에 KO시키며 헤비급 언디스퓨티드 챔피언까지 된 홀리필드를 상대로는 승산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46]

대망의 경기날이 되자 포먼과 함께 70년대 헤비급 복싱을 주름잡았던 무하마드 알리 조 프레이저가 경기장을 찾아와 포먼의 도전을 응원하였고, 포먼의 세컨에는 알리의 트레이너였던 안젤로 던디가 있었다.

경기 초반에 포먼은 홀리필드에게 파워샷[47]을 날리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홀리필드는 그의 특기인 빠르고 강력한 콤비네이션[48]을 포먼에게 날리며 경기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포먼은 몇 번 위태로운 상황이 있었지만, 우람한 팔뚝을 좌우로 교차시키며 커버링을 단단히 한 채로 홀리필드의 펀치세례를 견뎌냈다. 결국 경기는 판정까지 가게 되었고, 결과는 홀리필드의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이었다.

포먼은 경기에서 지기는 했지만 마흔이 넘는 나이에 젊은 챔피언을 상대로 12라운드까지 갔으며, 홀리필드의 무시무시한 콤비네이션에도 끝까지 다운을 허용하지 않는 차원이 다른 맷집을 보여주었다. 경기 이후에도 홀리필드와 함께 1991년 4월 24일자 '레이트 나잇 위드 데이비드 레터맨'에 공동게스트로 출연하며 그를 '훌륭한 챔피언'이라고 부르며 우대하는 등 패배를 받아들이는 자세에서도 한층 더 성숙해진 모습을 보였다.

3.4.3. vs. 토미 모리슨

그래도 홀리필드 전에서 여전한 실력을 증명했기 때문에 각종 방송활동(복싱 해설가, TV 쇼, 시트콤, 광고 촬영) 제안이 들어왔고, 선수 생활과 겸업하면서 계속 인기를 끌었지만, 그러는 사이에 포먼은 정작 중요한 복싱에는 소홀해지게 되었다.

1993년 6월 7일, 포먼은 마이클 무어러가 타이틀을 반납하면서 공석이 된 WBO 헤비급 타이틀을 걸고 토미 모리슨과 경기를 치렀다. 모리슨도 포먼과 마찬가지로 강한 펀치력으로 유명한 선수였지만, 이전부터 스테미나 이슈를 가지고 있던 데다가, 포먼과의 경기 전까지 9라운드를 넘겨본 적도 없었다.

전문가들은 7:5로 포먼의 우세를 점쳤고, 포먼도 경기 전에 이번 경기가 자신의 마지막 경기가 될 것이며,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두르고 당당히 나오겠다는 말까지 하는 등 각오를 다진 것처럼 보였다.

모리슨은 이 경기에서 적극적인 인파이팅을 하는 자신의 원래 스타일을 버리고 철저한 아웃복싱 전략을 가져왔는데, 이것이 포먼에게 제대로 먹혔다. 초반에는 포먼도 도망치는 모리슨을 침착하게 따라가며 파워잽을 던지는 등 경기를 풀어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모리슨은 체력이 쭉쭉 빠지고 입을 벌린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도 자신이 들고 온 전략을 고수하며 12라운드까지 경기를 끌고 가는 데 성공했고, 24세의 나이에 조지 포먼이라는 헤비급 레전드 선수를 상대로 승리해 새로운 WBO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연이은 타이틀 도전 실패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포먼이 복싱 커리어를 마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3.4.4. 마이클 무어러를 꺾고 챔피언 재등극

그 후에 포먼은 방송활동을 대폭 줄이며 훈련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리딕 보우와의 2차전에서 WBA, IBF 헤비급 타이틀을 탈환한 에반더 홀리필드를 꺾으며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던 무패의 젊은 복서 마이클 무어러를 상대로 헤비급 챔피언이 될 사실상의 마지막 기회를 얻었다.

1994년 11월 5일, 포먼은 20년 전 알리와 맞붙을 때 입었던 빨간색 트렁크를 입고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49] 무어러는 경기 초반부터 점수 면에서 크게 앞서고 있었으나, 7라운드에 들어서면서부터 전략을 바꾸어 포먼을 KO시킬 작정으로 압박하려 나서기 시작했다. 실제로 라이트를 연속으로 두 번을 제대로 맞히기도 했지만, 무어러가 간과한 것은 포먼의 사기적인 맷집이었다.[50] 포먼은 이 경기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오로지 KO승뿐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눈치챈 무어러의 세컨 테디 아틀라스는 10라운드 시작 직전 휴식 시간에 무어러에게 "포먼의 앞에 얼쩡거리지 말고 제발 움직여라. 포먼이 잽 뒤에 한 방을 숨기고 있으니 위험하다."라고 갈구듯이 조언을 했지만, 무어러는 자존심이 상한 것인지 아틀라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운명의 10라운드는 27분 47초부터.

포먼은 헤비급 복싱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우스 포 스타일의 무어러가 계속 왼쪽으로 빠져나가며 강력한 공격을 많이 피한다는 사실을 간파하였고, 10라운드에 지속적으로 왼손 훅을 큰 궤적으로 날리며 무어러가 빠져나갈 방향을 제약시켰다. 이내 무어러는 포먼의 레프트훅 헛방 작전에 말려들어 포먼이 내지른 원투에 맞아 순간 반응속도를 잃어버렸고, 곧바로 다시 들어온 원투에 제대로 턱이 돌아가며 나가떨어졌다.

포먼은 만 45세의 나이에 최고령 헤비급 챔피언이 되면서[51] 37세의 나이에 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한 저지 조 월컷의 기록을 깨뜨린 동시에 최초로 세계 타이틀을 잃은 지 20년 만에 되찾은 사람이 되었다.[52] 20년 전 알리가 킨샤사에서 기적을 일으킨 것처럼 포먼도 강인함, 재치, 중요한 순간에 파워를 내는 능력을 사용하여 젊음, 속도를 이긴 것이었다.[53]

3.5. 재은퇴

이후 WBA 랭킹 1위 토니 터커를 상대로 방어전을 치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WBA 타이틀을 박탈당했다.

1995년 4월 22일, 악셀 슐츠를 상대로 머저리티 판정승을 거두며 IBF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 경기의 판정과 관련하여 논란이 불거지자, IBF는 즉시 포먼에게 슐츠와의 재경기를 명령했고, 포먼이 이를 거부하면서 남아 있던 IBF 타이틀마저 박탈당했다.[54]

1997년 11월 22일, 섀넌 브릭스에게 머저리티 판정패를 당하기 전까지 리니얼 챔피언으로서 인정받았다.[55]

1999년 1월 23일에 래리 홈즈[56]와 맞붙을 예정이었지만, 프로모터 로저 레빗이 주요 재정 지원자들 중 한명을 잃으면서 적시에 대전료를 확보하지 못해 경기가 흐지부지되었다. 레빗은 이미 포먼에게 대전료 1,000만 달러 중 100만 달러를, 홈즈에게는 대전료 400만 달러 중 40만 달러를 선급한 상태였으나, 돈을 돌려받을 수는 없었다.

4. 은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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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포먼 그릴(George Foreman Grill)[57]

전설적인 권투 선수이자 재벌이기도 한 억만장자이다. 노익장과 상술한 개신교도가 된 이후의 행동들과 바뀐 성격으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이미지가 굉장히 좋아졌기 때문에 대중들의 인기를 얻어 그의 이름이 붙은 브랜드까지 나올 수 있었고, 특히나 위 사진처럼 세로로 홈이 여러 개 파이고 위 아래 모두 열선이 들어간 양면 그릴을 브랜드 불문하고 조지 포먼 그릴이라고 부를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58] 하지만 이름 때문에 오해할 수도 있는데, 이 그릴은 마이클 보엠과 로버트 존슨이 발명한 것이며, 포먼은 제품의 메인 홍보 역할을 핵심적으로 담당했다.

1999년 그릴 제조업체인 솔턴 사(Salton, Inc.)[59]에서 포먼에게 현금 1억 2,750만 달러 + 회사 주식 1,000만 달러를 지불하며 그의 이름과 판매 기술을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매수했는데, 그러고도 매년 그릴 수익의 일부마저 받고 있다(!).[60] 이는 조지 포먼이 평생동안 받은 파이트 머니보다 훨씬 많다. 참고로 포먼이 받은 가장 많은 파이트 머니는 1250만 달러를 받은 홀리필드전이다. 그리고 도리토스, KFC, 마이네키 카 케어 센터의 광고 출연료까지 받은 덕분에 복서 시절 얻은 재산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재산이 불어나서 억만장자가 되었다.

현재까지도 조지 포먼은 복서 재산 통계에서 넘사벽 갑부인 플로이드 메이웨더 바로 아래 2위로 거의 항상 꼽힌다. 거기다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이미지를 보여줘 성공학 강사로 뛰기도 했으며, 1991년부터 2004년까지 HBO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TV에 모습을 비추었다.[61]

알리는 파킨슨병, 프레이저는 간암으로 말년에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음을 상기한다면, 포먼은 그들이 죽은 나이와 비슷한 70대의 나이에도 건강에 문제없이 현재까지도 멀쩡하다. 아닌 게 아니라 근육도 거의 안 빠져 상의탈의도 간간히 하면서도 40살 시절과 흡사한 몸인 데다, 상단 사진 보면 알겠지만 잔주름 외엔 오히려 피부가 탱탱해지기까지 했다. 심지어 가끔 TV에 나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거나 뛰어다니기까지 한다.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보면 70대 중반인데 복싱 체육관에서 땀 좀 빼고 백 치는 모습 보면 자세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은퇴 후 돈도 복서 때보다 더 많이 벌었으니, 그야말로 복 받은 노년이라고 할 수 있다. 추억의 선수들이 80도 채 못 살고 떠난 올드 복싱팬들에게는 아직 만날 수 있는 선수로서의 각별한 의미도 남아 있다.

5. 첫 번째 조지 vs 두 번째 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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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fore & after.

처음 복서 생활할 때와 은퇴하고 신앙에 귀의하다 복귀했을 때 성격, 이미지, 파이팅 스타일 등이 너무 달라 전자를 첫 번째 조지(no.1 George) 후자를 두 번째 조지(no.2 George)로 부른다. 복싱 팬들 사이에서는 첫 번째 조지와 두 번째 조지 둘 중 누가 낫느냐는 얘기를 하는데, 각종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포먼 본인까지 두 번째 조지가 복서로서나 인간으로서나 더 낫다고 평가한다.

원래 조지 포먼은 대중을 기피하는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사람이었고, 시합에선 비틀거리는 상대도 죽일 듯이 달려들어 두들겨 팰 만큼 냉혹했다. 그러나 두 번째 조지는 한층 여유를 가진 채 농담도 자주 하고[62] 항상 웃고 긍정적인 이야기들을 했으며, 그로기인 상대는 더 때리지 않는 매너를 보여준다.

복서로서도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첫 번째 조지 시절, 포먼은 강력한 펀치력 덕분에 3라운드보다 길게 가는 시합이 별로 없었지만, 링에 올랐을 때마다 감정적으로 불안함을 느꼈다. 그렇기에 단순하게 힘으로 상대를 두들겨 패는 것만을 생각하였고, 여기에 더불어 체력 이슈까지 생긴 것이었다. 반면 두 번째 조지 시절, 포먼은 정신적으로 훨씬 안정되었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서 경기 운영과 스테미나 관리능력을 더욱 향상시킬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포먼 스스로도 "두 번째 포먼은 두뇌까지 씁니다. 첫 번째 포먼이 틈을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 쓰러뜨릴 겁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두 번째 포먼이 이깁니다."라고 했으며, 거의 모든 전문가들도 "한 방만을 노리는 슬러거 일변도에서 각종 올라운드 테크닉을 구사하게 된 두 번째 조지가 이긴다."고 인정한다.[63] 또 두 번째 조지가 자이르에서 알리와 붙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평가도 있을 만큼 두 번째 조지는 복서의 완성도로도 높이 평가받는다. 비록 젊을 때보다 순발력이나 체력, 맷집 같은 피지컬적인 면모가 많이 녹슬었어도, 그 녹슨 피지컬이 동시대의 복서들과 견줄정도였으며 거기에 경험이 쌓이고 멘탈이 튼튼해진 조지 포먼은 경기력과 링 캐릭터 면에서 훨씬 더 나은 복서가 될 수 있었다.

6. 파이팅 스타일

복싱 역사상 최고의 하드펀처 중 하나다. 헤비급에는 어니 셰이버스, 소니 리스턴, 켄 노턴 등 복싱 역사에 이름을 날린 쟁쟁한 슬러거들이 많지만, 사상 최강을 논할 때 조지 포먼은 반드시 거론된다.[64] 의외로 포먼은 전성기 때 체중이 별로 안 나가는데, 98~100kg 정도로 시합을 치렀다. 하지만 우월한 체구에 맷집까지 사기적인 강골인데다 막강한 근육을 탑재한 슈퍼 하드 펀처라서 그냥 대충 팔힘으로 툭툭 치는 거 같은데 상대가 픽픽 쓰러지고 몸이 붕 뜨며 마우스피스가 날아가는 것을 보면 기가 찰 정도다.[65]

커다란 덩치에서 나오는 파워와 사정거리가 너무 엄청나서 테크닉 의존도가 매우 낮은 복서라고 착각할 수 있는데, 비록 테크닉이 당대의 복서들과 비교했을 때 뛰어나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펀치의 정확도와 타점, 회수율 등도 파괴력 못지 않게 가공할 수준이었다. 즉, 필요가 없어서 화려한 기교를 쓰지는 않았지만 내지르는 한 방 한 방의 정확도와 정교함만큼은 최상급이었다.[66]

그가 헤비급에서 81전을 치르는 동안 다운당한 횟수가 고작 4번이었던 이유에는 물론 그의 사기적인 맷집의 역할도 있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디펜스 능력이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이는 그의 보조트레이너들이었던 샌디 새들러 아치 무어의 공이 컸으며, 이들의 가르침은 각각 첫 번째 조지와 두 번째 조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우선 첫 번째 조지는 롱가드를 활용한 디펜스로 상대방의 공격성을 역이용하였다. 상대방의 머리, 어깨, 팔, 글러브 등을 터치함으로써 마치 투우사가 황소를 조련하듯 상대의 포지션을 컨트롤하며 링커트를 할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링사이드에 몰아넣고, KO펀치를 날려 상대들을 잠재웠다. 그리고 가드가 내려가 있을 때도 상대방이 공격하려고 하면 팔을 앞으로 쭉 뻗어 상대가 날린 펀치가 팔에 걸리며 적중할 수 없도록 하였다.[67] 게다가 포먼은 커리어 초창기에 소니 리스턴의 스파링 파트너를 해주면서 그를 세계 헤비급 챔피언으로 만들어준 복싱스킬들을 배웠는데, 잽으로 상대방에게 체중을 실어 헤드 무브먼트를 조정하고, 후속타를 위한 파워샷을 셋업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조 프레이저처럼 맷집이나 스피드, 수비력을 내세워 파고드는 스워머 스타일이 포먼의 앞에 설 때면 그저 타격 연습을 하기 위한 샌드백 신세가 되었다.[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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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조지의 크로스 암 디펜스.

하지만 그가 중년이 되어 복귀했을 때, 그의 스피드는 이전과 비교하여 현저히 떨어지게 되었고, 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두 번째 조지가 선택한 방안이 바로 크로스암 가드였다. 크로스암 가드를 사용함으로써 펀치를 회수하지 않고도 바로 커버링을 할 수 있었으며, 또한 첫 번째 조지 시절 잽을 던진 후에 상대가 날린 투를 방어하지 못하던 문제점 역시 해결되었다. 물론 두 번째 조지도 여전히 롱가드를 사용하였는데, 롱가드를 사용하며 거리를 좁히는 데 성공하면 크로스암 가드로 전환하여 인파이팅을 하였다.

7. 평가

1970년대 헤비급 복싱을 호령하던 조 프레이저와는 두 번 싸워 모두 이겼으나, 무하마드 알리에게는 아래 언급된 부상이란 불운과 알리의 기가 막힌 운영에 걸려들어 딱 한 번 패배했다. 알리와 재대결을 원했으나, 협회로부터 농락당하고 지미 영에게 패배한 후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때 심장마비로 인하여 정말로 죽을 뻔하였다.

그 이후에는 죽다 살아나면서 깨달음을 얻었는지 종교에 귀의하여 개신교 목사 안수까지 받아 종교인으로 지내다가, 1980년대 말에 다시 40대 복서로 복귀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프로 복싱이 장난이냐며 그의 도전이 무모하다고 평가했지만, 조지 포먼은 그런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20~30대 팔팔한 젊은 복서들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소 증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45세라는 불혹의 나이에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다시 따내는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다.

아무리 격투종목이 경험과 노련함의 중요도가 커서 에이징 커브가 늦다고 하더라도 스포츠는 피지컬이 깡패라 커리어에서 전기와 후기를 나누면 당연히 전기가 비교적 강하게 평가되는 편이다. 그러나 전기 포먼이 워낙 경기시간이 짧아서 퍼포먼스를 평가할 시간이 적었고, 10년간의 공백이 오히려 몸에 휴식을 주어 커리어의 연장에 도움을 주었으며, 그만큼 자기 상황을 잘 알고 플레이스타일의 변화를 성공적으로 이끈 점이 후기 포먼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조지 포먼이 유명한 것은 초창기 활동시절 보다는 1차 은퇴후 복귀한 40대 복서 포먼이 활약한 영향이 더 크다.

게다가 20대 전성기 시절 KO를 바로 앞둔 그로기인 상대도 아랑곳하지 않고 패버리는 잔인함으로 유명했던 데다 대중을 기피하며 항상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여 인기 있는 스타일은 아니었던[69] 반면 복귀 후 중년의 포먼은 그로기 상태의 상대를 자비롭게 기다려 주는 선수로 변했다.

포먼의 전성기는 헤비급의 전성기로 조지 포먼은 이 시대를 수놓은 전설적인 복서들과 자웅을 겨루던 레전드 복서 중 하나였다. 2003년 링 매거진이 선정한 역사상 펀치가 가장 강력한 복서 100명[70] 중 당당히 9위에 선정되었다.

여담으로 2차 은퇴 후에는 종교인은 물론 사업가로서 면모를 과시하여 크게 돈을 벌었고, 성공학 강사로도 유명하다. 물론 목회 활동도 계속 했고 방송 출연도 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8. 어록

“Many people fail not so much because of their mistakes; they fail because they are afraid to try.”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실수 때문이라기보다는 시도하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Boxing is like jazz. The better it is, the less people appreciate it."
"복싱은 재즈와 같다. 잘될수록 사람들은 그것을 덜 좋아한다."
“The question isn't at what age I want to retire, it's at what income.”
"문제는 내가 언제 은퇴하고 싶은지가 아니라, 어떤 수입으로 은퇴하고 싶은지이다."
“The referee is going to be the most important person in the ring tonight besides the fighters.”
"심판은 오늘 밤 링에서 선수들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될 것이다."
“Be nice to everybody on the way up because you might meet them on the way down”
" 올라가는 길에 만나는 모두에게 친절히 대해주세요. 당신이 내려갈 때에 만날지도 모르니까요."
“people live thier lives by numbers. they say, 'oh i'm 80! I better go off somewhere and die.' Numbers are for accountants ”
"사람들은 숫자에 따라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말하죠. '오 난 80살이야! 그냥 어디 가서 죽는 게 낫겠다.' 숫자는 그저 회계사를 위한 것입니다."

9. 여담


9.1. vs. 마이크 타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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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세의 조지 포먼이 10년간의 공백을 깨고 1987년 복싱 링에 복귀하면서, 또 그후에도 마이크 타이슨과 대결하기를 여러차례 희망했으나, 타이슨이 철창 신세를 지고, 그 외 여러 이유로 결국 이 둘의 대결은 볼 수 없었다. 지금도 "둘이 붙었으면 어땠을까?"라며 많은 복싱팬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으로, 포먼과 타이슨의 대결이 성사되지 못한 이유를 논하려면, 우선 세간에 퍼져 있는 소문에 대해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타이슨이 포먼을 피했다는 소문은 오랜 권투 저널리스트인 프랭크 로티에조의 기사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다. 이 기사에 따르면, 로티에조는 오래토록 돈 킹 프로덕션(DKP)의 매치메이킹 담당자로 일하던 바비 굿맨과의 점심 식사 자리에서 그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듣는데,
"당신은 절대 믿지 못할 테지만 타이슨은 포먼을 무서워하고 그와 엮이고 싶어하지 않아요. 돈(돈 킹)이 싸움을 시도했을 때 제가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는 타이슨에게 포먼이 엄청난 돈을 대표한다고 말했고, 게다가 그는 늙고 느리며 문제가 없을 거라고 말했어요. 타이슨은 일어나서 킹에게 소리치며 말했어요. '난 그 빌어먹을 짐승하고 싸우지 않을 거야. 그 빌어먹을 놈이 그렇게 좋으면, 네가 그 놈하고 싸우라고!'"
타이슨이 포먼을 두려워한다는 바비 굿맨의 발언

다마토가 타이슨을 지도할 때 포먼 vs. 프레이저의 명경기를 분석차원에서 즐겨 보았고, 이때 다마토가 "너나 프레이저처럼 짧고 탄탄한 체격의 스워머에게 있어 포먼과 싸우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다. 포먼을 상대할 수 있는 건 키가 크고 리치가 긴, 계속 물러서면서 아웃복싱을 펼칠 수 있는 상대이다."라고 조언해 줬다는 이야기도 로티에조의 기사에서 나온 내용이다. #] 사실 해당 기사는 2003년도에 나온 것으로, 이는 타이슨이 버스터 더글러스에게 패배한 지 10년은 더 지나서였다. 하지만 로티에조의 기사는 대중들의 흥미를 끌만한 요소들이 차고넘쳤던 탓에 이 이야기를 실제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던 것이다.

그리고 TMZ 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포먼은 복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기에 무하마드 알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는 일화를 전했다. 전화를 통해 알리는 타이슨의 펀치파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포먼에게 "타이슨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라"는 경고를 했다고 한다. # 이외에도 포먼은 2019년 ESPN과의 인터뷰를 통해 타이슨에 관한 언급을 하면서 충격적인 발언을 하는데,
타이슨에 관한 언급은 14분 45초부터.
"저는 그를 마이크 '나이트메어' 타이슨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링에서 악몽이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가 왼손으로 당신을 놓치고, 오른손으로 당신을 놓치면, 그는 당신을 물었을 겁니다. 저는 그런 것과 엮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로티에조의 기사가 거짓이고, 상대방과의 시합을 피하던 사람은 타이슨이 아니라 포먼이었던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 또한 사실이 아니다.
이전까지는 계속해서 타이슨과의 경기를 원해왔지만, 위의 영상에서도 언급되는 "핵 이빨" 사건이 발생한 후에 그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고 발언한 것이며, 그를 두려워한다고 얘기했던 것 또한 포먼의 성격상 립 서비스일 가능성이 크다.[78] 일례로 그는 켄 노턴과의 경기에 대해 "나는 그가 너무 두려웠기 때문에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랬다."라든가, "운 좋게 큰 어퍼컷을 맞춘 덕분에 겨우 이길 수 있었지만, 라운드가 더 길게 갔으면 그가 이겼을 것이다." 등의 발언으로 띄워주었고[79], 조 프레이저에 대해서도 "나는 프레이저가 너무 두려워서 심지어 그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내 다리를 쳐다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등 거의 대부분의 선수들에 대해 좋게 얘기해준다. 이는 은퇴한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타이슨 퓨리나 앤서니 조슈아에 대해서도 "그들이 내 시대에 없었던 것이 내겐 큰 행운이다."라는 덕담을 해주기도 했다.

이렇듯 복싱팬들이 그토록 원하던 포먼과 타이슨의 드림매치는 무성한 소문만 남긴 채 영영 볼 수 없게 되었고, 이에 대한 정확한 이유가 밝혀지지도 않았기에, 사람들은 단순하게 두명 중 한 사람이 대결을 피했다고 결론지은 것으로 볼 수 있다.


[1] 1974년 무하마드 알리와의 경기에선 191cm (6ft 3in), 1994년 마이클 무어러와의 경기에선 193cm (6ft 4in)로 기재되는 등 정보가 뒤죽박죽인데 Boxrec 프로필에선 191cm로 기재하고 있다. # [2] 복귀 이후의 체중은 110kg대. 전성기 시절 체중은 97~100kg이었다. [3] Boxrec 프로필 [4] 친부의 이름은 르로이 무어헤드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참전 용사로도 알려져 있다. [5] 학교에 도시락도 못 싸갔다고 한다. [6] 188cm에 90kg [7] 한창 성장기인 유년 시절 돈이 없어 영양식은 꿈도 못 꿨고 학교에 도시락도 못 챙겨갈 정도로 가난해 세 끼 제대로 먹은 적이 별로 없는데 키 193cm에 몸무게가 90 후반이 나갔다. 아마 그가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 없이 잘 먹고 잘 성장했다면 2m가 넘는 무지막지한 거인이 되었을 것이다. [8] 슈거 레이 레너드, 레온 스핑크스, 마이클 스핑크스를 훈련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9] 프레이저는 체중은 포먼과 비슷했으나, 헤비급 선수로는 작은 편인 182cm의 신장을 가졌다. [10] 스포츠 캐스터 하워드 코셀이 외쳤던 멘트로 농구의 " Havlicek stole the ball", 야구의 " He dropped the ball!"등과 함께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유명한 멘트 중 하나이다. [11] 알리와의 대결에서 알 수 있듯이, 스워머지만 맷집에 자신이 있어서 잽 정도는 몇 대 허용하면서 파고들어 근접거리에서 때려부수는 게 프레이저의 스타일인데 포먼의 주먹은 맞고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12] 프레이저 역시 알리, 포먼과 함께 70년대 헤비급을 빛낸 레전드 선수였지만, 포먼과의 맞대결에서는 상성과 체격, 그리고 체급[80]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완패한 것이었다. [13] 1973년 링 메거진은 이 경기를 올해의 경기로 선정했다. [14] 후술하겠지만, 이때 포먼이 보여준 심각하게 무기력한 모습은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15] 포먼은 1971년 그레고리오 페랄타와의 재경기에서 10라운드 TKO승을 거둔 이후 4라운드를 넘겨본 적이 없던 데다 알리와 달리 킨샤사의 무더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다. [16] 1974년 링 매거진은 이 경기를 올해의 경기로 선정했고, 이 경기의 8라운드는 올해의 라운드로 선정했다. [17] 무하마드 알리를 다룬 2001년작 영화 < 알리(Ali)>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이 조지 포먼과 알리의 대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8] "Just before the fight with Ali, my trainer handed me a glass of liquid and said 'Here's your water'," Foreman said. "As I took a swig, I almost spit it out. 'Hey, this water tastes like it has medicine in it'," Foreman says he replied. He says Sadler insisted defensively that it was "the same water as always" and so he finished drinking it. # [19] 1995년 발간된 포먼의 자서전 'By George'를 통해 주장한 바이며, 해당 주장이 책의 판촉을 위한 마케팅의 일부였을 거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20] 이후 포먼은 에밀 그리피스, 켄 뷰캐넌의 전 트레이너로 유명한 길 클랜시를 새로운 트레이너로 고용했으며,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그후 딕 새들러가 자신의 세컨을 보는 일은 두 번 다시는 없었다고 전했다. [21] "I didn't really plan what happened that night," Ali said. "But when a fighter gets in the ring, he has to adjust according to the conditions he faces. Against George, the ring was slow. Dancing all night, my legs would have got tired. And George was following me too close, cutting off the ring. In the first round, I used more energy staying away from him than he used chasing me. So between rounds, I decided to do what I did in training when I got tired." # [22] 허나 포먼은 돈킹이 자신이 마실 물에 약을 탔다는 주장 하나만큼은 단 한 번도 굽힌 적이 없다. [23] 포먼이 마실 물에 약물을 탔다는 얘기는 그 당시 사람들이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이슈였다. 실제로 밝혀진 사실들만 나열하자면, 물은 주최측이 제공한 것만 마실 수 있다는 이상한 룰이 있었고, 이에 대한 포먼 측의 항의가 자이레 당국에 의해 묵살당했다는 것, 포먼이 1라운드 종료 후 코너에 가서 너무 어지럽다며 어지럼증을 호소했으며, 그 이후부터는 킨샤사의 엄청난 더위와 습기에도 불구하고 물을 최대한 안 마시려고 버티는 모습이 카메라에 찍혔다는 것 정도. [24] 1970년 복귀한 이래로 WBA 랭킹 3위이자 The Ring 랭킹 1위였던 제리 쿼리를 상대로 3라운드 RTD승을 거두었고, 2개월 후 WBA 랭킹 1위였던 오스카 보나베나도 15라운드 TKO로 제압하며 당시 조 프레이저가 차지하고 있던 헤비급 타이틀에 도전할 수 있었다. 챔피언십에서 첫 패배를 기록한 이후로도 전 WBA 챔피언 지미 엘리스와의 대결에서 12라운드 TKO승, 쿼리, 조지 추발로, 플로이드 패터슨과의 2차전에서도 모두 승리했으며, 1974년 포먼과 맞붙기 전에 프레이저를 상대로 이미 설욕전까지 완수한 상태였다. [25] 일반적인 경우, 리매치를 거부하면 타이틀이 박탈된다.[81] 허나 알리는 공식적으로 포먼과의 리매치를 계속 거부하면서도 타이틀을 유지했고, 다른 선수들과 수차례 시합을 치루기까지 했다. [26] 포먼은 이 기간 동안 체육관에 나가지도 않고 알리가 온다는 곳에 노숙하며 기다리다가 리매치를 요구하며 시간을 허비했다. 그 때문에 인생 최악의 슬럼프를 겪게 된 건 덤. [27] 라일의 무시무시한 파워와 포먼의 괴랄한 맷집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장면이다. [28] 이때 벨이 1분 일찍 울려 2라운드는 2분밖에 되지 않았다. [29] 1976년 링 메거진은 이 경기를 올해의 경기로 선정하였고, 이 경기의 4라운드는 2001년 링 매거진 선정 권투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라운드 6위를 차지했다. [30] 이때 영도 적잖이 당황했는지 나중에 "조지는 몰랐지만, 내가 서 있었을지 몰라도 나는 완전히 기절해 있었습니다. 그는 새끼 손가락으로 나를 밀어 넘어뜨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내가 그 라운드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결코 알 수 없을 겁니다."라는 말까지 하였다. [31] 1977년 링 메거진은 이 경기를 올해의 경기로 선정했고, 이 경기의 12라운드는 올해의 라운드로 선정했다. [32] 당시 현장에서 이 장면을 목격한 트레이너 길 클랜시는 나중에 "링 위는 지옥처럼 더웠어요. 그는 탈수증으로 환각을 보고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33] 인터뷰 영상을 통해 당시 개과천선한 포먼의 간증을 들을 수 있다. # [34] 상술했듯이 포먼이 어린 시절을 매우 불우하고 비참하게 보내다가 나이가 들고 신앙인이 되고 안정을 찾자 자신의 어린 시절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을 돌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35] 지금에야 40대 파이터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헤비급 파이터 같은 경우는 아예 30대 초반을 전성기로 보기도 하지만, 포먼이 복귀한 당시의 권투 선수들은 30대 초반이 되면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은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더군다나 포먼은 한국 나이로 39세였으니.. [36] 이때 포먼은 "차라리 시체 안치소의 시체를 꺼내다가 포먼과 경기를 뛰게하라."는 등 각종 수위 높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37] 한때 스트리트 파이터 2의 마이크 바이슨이 이 마이크다라는 썰도 있었지만 캡콤은 부정했고, 마이크 바이슨은 오히려 타이슨을 모티브로 따온 케이스다. [38] 소니 리스턴을 동경하여 챔피언 등극 이후에는 그의 캐릭터를 따라하여 살벌한 마이크워크를 구사하고 링 위에서도 상대를 죽일 듯 노려보기도 했으나, 이 역시도 리스턴의 카피일 뿐 그만의 개성은 아니었다. [39] 당연하지만 사람들이 주로 기억하는 것도 대부분 이 복귀 후 버전이다. [40] 하지만 카위는 포먼보다 체격이 훨씬 작았고 이 경기가 헤비급에서 치르는 첫 경기였다. [41] 포먼과의 경기는 1989년, 홀리필드와의 경기는 1991년에 치렀다. [42] 쿠니는 이 경기를 대비하기 위해서 포먼의 옛 트레이너였던 길 클랜시를 트레이너로 고용했다. [43] 포먼은 경기 후 토크쇼에 출연했을 때 쿠니의 펀치가 조 프레이저보다 더 강했다고 밝혔다. [44] 쿠니는 이 경기 후 바로 은퇴를 선언했다. [45] 이 이미지 변화 덕분에 많은 CF에 출연했고, 상당한 돈을 모을 수도 있었다. [46] 배당률도 3:1로 포먼이 언더독이었다. [47] 나중에 홀리필드는 포먼의 펀치를 맞고 자신의 이빨이 다 날아가버린 줄 알았다고 밝혔다. [48] 실제로 포먼은 홀리필드를 자신이 싸운 최고의 콤비네이션 펀처였다고 말했다. # [49] 이번에도 포먼의 세컨에는 안젤로 던디가 함께하고 있었다. [50] 홀리필드도 "무어러가 포먼을 우습게 보았다"며 무어러의 실수를 지적했는데, 실제로도 포먼은 이전 홀리필드와의 경기에서도 17번에 달하는 콤비네이션 펀치를 맞고도 끄떡없이 서 있었다. [51] 한국 나이로 무려 46세하고도 10개월의 나이다. [52] 심지어 이때 포먼과 무어러의 나이차는 무려 19살로, 이는 그전까지 챔피언과 도전자의 나이차 중 가장 큰 것이었다. [53] 이 경기를 보고 영감을 받아 훗날 영화 록키 발보아가 제작되었다. [54] 이때 46세 5개월 18일의 나이로 타이틀을 반납하면서 역사상 최고령 세계 헤비급 챔피언으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55] 오히려 이 경기는 포먼이 선전한 경기였는데, 브릭스가 판정으로 이기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56] 전 WBC, IBF 헤비급 챔피언. 포먼처럼 30대 후반에 복귀하여 당시 통합 챔피언이던 타이슨, 홀리필드와 각각 대결하고 40대를 훌쩍 넘기고도 선수 생활을 지속했지만, 왕좌 복귀에는 끝내 실패했다. 포먼만큼 공백기가 길진 않았다는 것도 차이점. [57] 보통 줄여서 Foreman Grill. 자매품으로 밀폐형으로 된 Foreman Oven도 있다. [58] 미국의 대표 MC 코난 오브라이언 Clueless Gamer에서 아타리 2600 게임을 했을 때, 아타리 2600의 본체를 보고 "이거 조지 포먼 그릴 아님?"이라고 드립을 쳤을 정도. 한국에서도 조지 포먼 그릴의 유사품이 초창기 홈쇼핑 등에서 큰 인기를 누리기도 했을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특히 파니니나 쇠고기 스테이크, 햄버그 패티를 자주 요리한다면 추천할 만하다. [59] 2009년 12월에 회사의 이름을 러셀홉스 사(Russell Hobbs, Inc.)로 바꾼다. [60] 원래 계약에 따라 그릴 수익의 약 40%를 받을 권리가 있었으며, 수익이 최고조로 달했던 시기에는 매달 450만 달러의 지급금을 받았다고 한다. [61] 2021년 기준 보유한 순자산만 해도 수천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62] 홀리필드 전에서는 "제가 이길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챔피언이 뱃살 때문에 벨트를 못 두르는 광경을 보실 거예요!"라고 농담하여 좌중이 폭소했고, 무어러 와의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무어러가 제 바디를 계속 쳤지만 제 몸은 치즈버거로 보호되고 있었죠" 라고 드립을 치기도 했다. [63] 오직 순수하게 펀치를 내지르고 상대 공격에 버티는 능력을 본다면 20대 초반이 40세 당시보다 월등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경기 운영력이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할 수 없기에 후기 포먼이 높이 평가받는 것이다. 피지컬로만 따지면 역대급 괴물이었던 포먼이 전성기가 지난데다 공백도 있던 무하마드 알리에게 지는 것이 말이 안되고, 실제로 포먼은 지고 나서도 납득하기 어렵단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알리는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포먼을 때려눕힐 수 있었다. 즉, 만약 전기 포먼과 후기 포먼이 영혼의 맞다이(...)를 뜬다면 당연히 피지컬에서 앞서는 전기 포먼이 백프로 이기겠지만, 본인이 스스로 밝힌 것처럼 후기 포먼은 신중하게 기다리면서 멧돼지같이 돌진하는 전기 포먼이 지쳐 빈틈을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때려눕힐 수 있는 것이다. [64] 펀치력만으로는 어니 셰이버스가 포먼 이상이라는 말도 많지만, 셰이버스는 파워가 굉장히 강한 반면에 크게 한 방을 노리는 선수라 그 한 방이 들어갈 때 무지막지하지 경기 운영이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다. 또 포먼과 달리 팔을 비교적 크게 휘둘러서 지르는 스타일이라 펀치가 빗나가거나 카운터를 얻어맞는 경우도 많아 파괴력 자체는 셰이버스가 포먼보다 위일지라도 시합 운영, 기술, 체력, 맷집 등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는 포먼에게 못 미친다는 소리다. 이해를 위해 적당히 수치화 해보자면 셰이버스가 한 대 맞으면 100만큼 아픈 주먹이 어쩌다 꽂힌다면, 포먼은 7,80 정도 아픈 주먹이지만 유효타 횟수가 훨씬 많다. [65] 하드펀처라고 거론되는 다른 선수들과 달리, 포먼은 급격한 체중이동을 통한 한 방 펀치보단 기민한 복싱을 하기에 복싱을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땐 툭툭 치는 펀치로 보이는 것. 이와 반대로 펀치가 세기로 가장 유명한 어니 셰이버스가 즐겨쓴 콤비네이션은 오른손 훅을 예로 들면 체중은 물론이고 머리까지 추로 사용하는, 말 그대로 모 아니면 도 식의 던지는 펀치이다. 마이크 타이슨의 경우는 특유의 위빙을 해서 가장 안쪽까지 들어가 실컷 두드리다가 가드가 조금이라도 내려갔다 싶으면 그대로 레프트훅을 날려 시합을 끝내버린다. [66] 슬러거 스타일의 복서들은 무식하게 힘만 쎈 복서들이라고 생각되는 경우가 많지만, 애초에 아무리 강한 주먹이라도 맞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렇기에 슬러거들에게 필요한 것은 펀치력보다도 그 정확성이고, 높은 정확도를 위해서는 탄탄한 기술이 당연히 요구될 수 밖에 없다. [67] 이때 양팔을 앞으로 뻗은 채 걸어가는 모습이 나오는 나오는 바람에 알리와의 시합 전 그에게 미라라는 조롱을 듣기도 하였다. [68] 보통 복싱 스타일의 상성은 아웃복서 > 슬러거 > 인파이터(스워머) > 아웃복서로 돌고 도는 형태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복싱이 많이 진화하여 한 가지만 할 줄 아는 선수는 반쪽짜리 취급을 받는다. [69] 이 점에 있어서는 알리와 매우 대조적인데, 알리는 링 밖에서 아무리 흥분된 설전을 벌여도 비틀거리면서 쓰러질 듯한 상대에게 불필요한 확인사살성 펀치를 날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포먼은 그로기 상태로 링에 걸쳐 있는 상대에게도 펀치를 날렸다. [70] 원제는 'The 100 Greatest Punchers of All-Time!'이었다. 1위는 포먼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헤비급 복서로 꼽는 조 루이스, 그리고 포먼의 보조트레이너들이었던 아치 무어 샌디 새들러는 각각 4위, 5위를 차지했다. [71] 애초에 하루 세 끼조차 제대로 챙겨 먹을 수 없었던 열악한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13세에 188cm에 90kg이 나갔으니.. [72] SBS 별별스포츠에서도 해당 일화에 대해서 다루었다. # [73] 하지만 딸들 중 한 명의 이름이 "조제타"라고 한다(...). [74] 재미있게도 조지 포먼 3세의 링네임은 Monk라고 한다. [75] 놀라운 것은 이전까지 포먼은 웨이트 트레이닝을 철저히 금기시해왔던 상태였다. 그런데도 270kg의 숫소를 업고 산을 오를 수 있었던 것. [76] 복귀한 포먼은 모든 종류의 웨이트 트레이닝을 수행했다고 한다. [77] 말은 1~2세 사이가 되면 320~350kg이 나간다. [78] 그리고 포먼이 타이슨을 실제로 두려워했더라도 타이슨과의 결투는 포먼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이기 때문에 그것이 경기를 거부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79] 경기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단순히 운이 좋아서 맞춘 어퍼컷이 아니다. 포먼은 라이트 어퍼컷을 적중시키기 위해 1라운드 내내 왼손 잽과 스트레이트를 날려 노턴이 오른쪽으로 돌도록 유도했고, 오른손으로는 지속적으로 바디를 쳐 가드가 내려가게 만들었다.


[80] 헤비급은 무제한급이기 때문에 프레이저의 체중은 92키로 당시 포먼의 체중은 100키로 정도로, 약 8키로의 차이가 있었다 [81] 당장 포먼만 하더라도 슐츠와의 리매치를 거부하자마자 즉시 타이틀이 박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