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02 14:04:22

조지 포먼

<colbgcolor=#bd7f41><colcolor=#ffffff> 조지 포먼
George Foreman
파일:MV5BMWU5NDBiYmQtZmQzMi00ZGVjLTgyZWMtMDNlNzE2Mjk4NGIzXkEyXkFqcGdeQXVyMTI0Nzg3MTM@._V1_.jpg
본명 조지 에드워드 포먼
George Edward Foreman
출생 1949년 1월 10일 ([age(1949-01-10)]세)
미국 텍사스 주 마셜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신체 191cm[1] / 체중 118kg[2] / 리치 199cm[3]
전적 76승 (68KO)[4]5패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금메달
체급 헤비급
별명 Big
링크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어린 시절3. 초기 프로 경력
3.1. 초창기3.2. 리즈시절: 선샤인 쇼다운(Sunshine Showdown)3.3. 정글의 대소동 - 무하마드 알리와의 대결3.4. 은퇴하고 목사가 되다
4. 늦은 나이에 복귀
4.1. 복귀 초반4.2. 챔피언 재등극4.3. 재은퇴
5. 은퇴 후6. 첫 번째 조지 vs 두 번째 조지7. 파이팅 스타일8. 기타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전설적인 권투 선수, 사업가, 개신교 목사.

현역 시절, 엄청난 신체능력을 자랑한 헤비급 복서로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며, 프로로 전향한 뒤 통산 76승 5패 68KO, WBC, WBA, IBF 통합 세계 챔피언을 두 번이나 차지하고 은퇴한 뒤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차 은퇴 때 심장마비를 겪긴 했지만, 복싱 커리어 내내 큰 부상으로 경기를 오래 쉰 적도 거의 없고, 10년 동안 복싱을 쉬다가 돌아온 40대에도 120kg에 육박하는 몸으로 전성기 못지않은 위력적인 펀치를 발휘, 상대 복서들을 눕히며 챔피언에 또다시 등극하고 은퇴했다. 게다가 은퇴한 후 현재까지도 후유증 그런 거 없이 건강하다.

2. 어린 시절

텍사스 마셜에서 태어나, 휴스턴에서 자라났다. 어머니는 전남편 포먼과 별거하는 사이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져 포먼을 임신해서 출산했다. 그러므로 포먼이라는 성은 어머니의 남편의 성이고 친부의 성은 아니다. 몇몇 복서들처럼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세월을 보냈고[5] 어린 시절을 문제아로 보냈다. 제대로 3끼를 먹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빈곤했다.

포먼은 집안사정이 가난하고 휴스턴에서도 가장 거칠고 위험한 지역에서 자라난 탓에 각종 폭행, 범죄 등을 서슴치 않는 양아치가 되었다. 그는 다니던 학교도 자퇴하고 시간을 허비하며 살았는데, 17세가 되던 해 포먼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도둑질을 하고 경찰에게 며칠을 쫓겨다니게 된다. 빈집의 찬장 옆에 웅크려 숨고, 온몸에 진흙을 발라가며 숨고, 어렵게 돌아온 자신의 집에서 또 숨는 등 어마어마한 고생을 하게 된 포먼은 "내가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는 거지? 내 인생을 바꾸고 싶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던 중 당시 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의 서민 교육정책인 직업학교 광고가 TV에 나왔는데 미식축구 선수 짐 브라운의 훈련 광고를 보게 되었는데, 그 광고에서 나오는 대사는 "당신의 삶을 바꿀 기회입니다."였고 포먼은 그 광고를 본 즉시 직업학교에 지원했다. 직업학교를 다니면 집을 떠나야 했기에 어머니도 포먼도 조금 고민했지만, 나쁜 패거리들과 어울리지 않아도 됐기에 어머니가 사인을 해주었다고 한다. 제대로 글과 공부를 배우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하면서 여러 고민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이 직업학교에서도 특유의 거친 문제아 기질은 남아 있어서 툭하면 시비에 휘말렸다. 그러자 친구 중 한 명이 "조지, 니가 그렇게 터프하다면 복싱을 해보는 게 어떻니?"라고 말하며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다.

원래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한 데다 힘이 장사였고,[6] 191cm인 남다른 신체조건 때문에 미식축구 선수도 고려했으나 최종적으로 복싱 선수가 되었다. 아마추어로 시작하여 총 전적 22승 4패로, 만 19세의 나이에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통상적인 아마추어 복서들은 경기 일정이 굉장히 빡빡한 탓에 체력도 비축할 겸 정교한 유효타로 포인트를 쌓는 경우가 많은데, 포먼은 그냥 프로 복서들과 다를 바 없이 KO를 노리는 특유의 붕붕 펀치를 휘두르며 올림픽 금메달까지 수집했다. 그가 어마어마한 피지컬을 타고난 데다 복싱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기술적인 정교함까지 완성한 천재형 복서였음이 세상에 알려진 순간이었다.

3. 초기 프로 경력

3.1. 초창기

파일:external/www.blackpast.org/foreman_george_0.jpg
1969년 프로에 데뷔하였고, 그 다음부터 무패를 자랑하였다. 이렇게 한동안 계속 무패 행진을 계속했고 대부분의 승리를 KO로 장식하여, 1972년까지 32전 32승 29 KO라는 사기적인 실력을 보여주었고, 그 KO도 모두 3회 이내로 장식하는 무시무시한 복서였다.

3.2. 리즈시절: 선샤인 쇼다운(Sunshine Showdown)

당시 헤비급에는 전설적인 조 프레이저 무하마드 알리가 활동하고 있었고, 프레이저는 당시 WBA, WBC 통합 챔피언이었다. 프레이저는 아무도 못 이긴다는 무하마드 알리를 판정으로 이겼고, 당시 무패(29전 29승)를 자랑하고 있었다.

포먼의 신체조건이 월등히 우세하였으나[7], 대부분 프레이저의 승리를 점쳤다.

포먼과 프레이저의 대결을 선샤인 쇼다운이라고 하는데, 1973년 1월 22일 자메이카에서 열렸다. 포먼은 프레이저를 시작부터 무지막지하게 두들겨서 1회에 3번, 2회에 3번의 다운을 빼앗았고, 프레이저의 상태를 본 주심은 경기를 중지시키고 TKO를 선언하였다.[8] 포먼은 챔피언이 되었고, 첫 번째 방어전에서 호세 로만을 1회 2분 만에 KO로 이기기도 했다. 이는 마이크 타이슨 때까지 깨지지 않는 기록이었다.


위의 영상이 선샤인 쇼다운의 풀 경기 영상. 프레이저가 붙지 못하게 저지하며 핵펀치를 날리는 포먼. 1라운드 중반부터 이미 포먼이 여유 있게 펀치를 날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상대는 전해에 무하마드 알리와 1승 1패의 호각을 이뤘던 켄 노턴이었다. 이 방어전에서도 포먼은 2회 KO로 이겼다. 이때까지 전적은 40전 40승 37KO(92.5%).

3.3. 정글의 대소동 - 무하마드 알리와의 대결

파일:external/www.newhistories.group.shef.ac.uk/rumble.jpg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의 대결은 수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복싱 역사상 최고의 경기라 불리는 세기의 대결이다.

1974년 10월 30일 자이르에서 열린 이 대결은 The Rumble in the Jungle(정글의 대소동)이라고 불린다. 이때 포먼에게 불운이 닥쳤는데, 훈련하다가 눈 위가 찢어진 것이었다. 이것 때문에 경기를 한 달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부상 때문에 훈련량이 부족해졌다. 다시 상처가 날까봐 스파링을 중지했기 때문이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알리는 예상과는 달리 맹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포먼은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고, 2회부터는 포먼이 공세를 취했다. 그래서 알리는 빠른 스피드로 파워풀하지만 느린 포먼의 펀치를 피하는 전법을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링 로프의 반동을 이용한 일명 rope-a-dope 수비[9]와 지능적인 클린치로 포먼의 포화를 피해갔다. 그리하여 포먼은 알리에게 특유의 살인 펀치를 제대로 맞출 수가 없었고, 이렇게 연장전이 되자 점점 피로해지기 시작했다. 포먼은 대부분 3회 이내에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이런 지구전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포먼이 힘이 빠지자 알리는 맹공격을 하다가 8회 포먼에게 결정타를 날려 KO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것은 포먼의 첫 번째 패배가 되었다.

이후 설욕전을 바랐으나 기회가 오지 않았고, 아예 알리의 전기 영화 촬영장에 난입해서 육두문자를 날리고, 자신이 건재하다는 걸 알리기 위해 하루에 프로 경력이 있는 복서 5명과 3라운드 경기를 가지는 등 기행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떻게 회복해서 1977년 1월 22일에 페드로 아고스토와 경기를 가졌고 그 경기에서 이긴 후 2달[10] 만인 그해 3월 17일에 다시 지미 영과 맞붙지만, 포먼이 방심한 건지 너무 쉽게 펀치를 허용하는 등 좋지 않은 퍼포먼스를 보이며 12라운드 경기 후 판정패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경기 후 탈의실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거의 죽을 뻔한 경험을 하였는데, 이것이 포먼의 인생을 크게 바꾼다.

무하마드 알리를 다룬 2001년작 영화 < 알리(Ali)>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이 조지 포먼과 알리의 대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3.4. 은퇴하고 목사가 되다

파일:목사_조지포먼_400px.jpg

이 심장마비를 일으켰을 때 포먼은 가사 상태에서 임사 체험을 하고 기적적으로 수술이 성공해서 살아남은 뒤로는 매우 열렬한 개신교 신자가 된다. 그의 간증에 따르면, 그때 저승사자에게 붙들려 지옥으로 끌려가던 중 하나님에게 자신을 살려줄 것을 애걸하였더니 하나님이 나타나서 그를 구해줬다는 것. 후술되지만, 그의 이러한 신앙 체험은 지극히 무뚝뚝하던 그의 성격을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매우 활달하고 유머러스하게 바꿔 버린다. 그가 소위 거듭난 이후 한 말은 그전까지 죽도록 미워하던 무하마드 알리에 대해 '이제는 그를 사랑합니다.'였는데 그의 어머니조차 이 말을 듣자 아들이 드디어 미쳤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전까지 종교와는 거리가 멀었던 포먼은 이때부터 열심한 개신교 신앙활동을 하다 전도사가 되었다. 그리고 전도사에 그치지 않고 목사 안수까지 받으며 여러 지역에서 목회 활동을 하는 한편, 전국적인 기독교 관련 방송에 나와서 자주 간증을 하기도 했다. 포먼은 그동안 모은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전도 활동과 청소년 센터 건립 등 신앙활동에 모조리 다 내놓았으며 거리에 버려져 자연스럽게 불량배가 되고 갱단에 들어가기가 좋은 환경에 놓인 청소년들을 보살피는 일을 했다.[11] 그런데 결국 그런 활동을 하다가 변호사가 가장 비참한 복서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할 정도로 거의 파산 직전에 이르렀고 그를 계기로 자선 활동에 필요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현역 복귀를 결심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전성기를 진작에 지나버린 38세였다.

4. 늦은 나이에 복귀

4.1. 복귀 초반

초창기 포먼의 외모와 복싱계 내에서의 이미지는 아무런 캐릭터성도 없는 스트리트 파이터 1의 미국 스테이지 복서 마이크,[12] 또는 록키 3에 나온 클러버 랭과 비슷하다. 대중적인 인지도는 상당하지만 강타자라는 것 이외에는 개성이 다소 부족한 선수.[13] 반면 복귀 후 포먼은 대머리에 약간 배나온 겉으로만 보면 우스꽝스러운 모습에다, 전까지 무표정과 달리 항상 웃는 표정이라 이는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와 같은 느낌이 생겨 복귀 전과는 링 캐릭터가 확연히 달라졌다.

1987년 복귀한 그는 당시 무적의 챔피언인 마이크 타이슨과 상대하기를 바랐으나, 타이틀 매치를 위한 지명전을 위해서는 승수를 쌓아야 하는 것이 복싱계의 룰이라서 처음에는 잔챙이 복서들과 대결을 하여 승수를 쌓았다.[14]

하지만 다른 인터뷰 영상에 의하면 복서로 활동할 나이가 아닌지라 대성하지 못할 거라고 프로모터들이 생각했기에 초기에 그를 매치업하지 않았었다고 한다(언론도 초기엔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일부 프로모터들이 젊은 시절 막나가던 포먼을 싫어했었기 때문이기도 한데, 실제로 아무리 한물간 복귀 선수라도 한시대를 풍미한 전 챔프가 몇몇 큰 선수와 다수의 작은 선수들을 상대로 20전 연속 전승을 달릴 동안 제대로 된 프로모터도 흥행작업도 붙이지 않았다는 건 비정상이다. 실제로 당시 힘있던 프로모터 밥 애런은 포먼의 전성기를 직접 겪은 세대이고 포먼에 대해 인식이 안 좋아서 그의 대전을 추천하지 않았으며, 참다 못한 포먼이 직접 찾아가서 과거에 대해 반성하고 부탁을 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메치업을 잡을 수 있었다. 복싱이든 MMA든 격투기 무대는 올림픽이 아닌 사기업들이 주선하는 흥행쇼이므로 발생하는 뒷사정이다.

포먼은 10년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원래부터 뛰어났던 피지컬과 70년대 레전드들과 치고받은 가락만으로도 젊은 잔챙이들을 상대로 또다시 연승행진을 기록하였다. 처음에는 코웃음치던 전문가들도 포먼의 연승이 계속되자 다시 주목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젊었을 때 무표정했고, 대중을 기피하는 성격이 전도사로 일하는 동안 180도로 변화, 대중친화적인 성격으로 바뀌어 거침없는 도전정신과 친근한 표정으로 호감을 주는 인물이 되었다.[15] 이 이미지 변화 덕에 많은 CF에 출연했고 상당한 돈을 모았다.

이 과정에서 상대한 복서들은 세계 타이틀 수준과는 거리가 있었고 각국 챔피언 출신이나 대륙 챔피언 출신, WBF 등 마이너 기구 챔피언 출신 정도였지만, 철저히 무명 복서들하고만 경기를 가진 것은 아니고, WBC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출신의 J. B. 윌리엄슨이라든지, 백인의 희망이라 불리던 강타자 제리 쿠니[16] 등 일부 유명 선수들도 KO로 압살해버리는 등 전설의 복서다운 실력을 보여주었으며, 복귀 후 타이틀 도전 직전까지 20회가 넘게 가진 경기를 전승한 것도 모자라서 판정승 1회, 기권승 1회를 빼면 그의 전성기 시절과 비슷하게 모조리 KO승이다.

재미있게도, 복귀 전 젊은 시절과 비교해서 캐릭터가 변화하면서 경기 스타일도 조금 변했다. 물론 힘과 체격을 바탕으로 일격필살로 상대를 요단강 건너게 하는 것은 동일했으나, 경험과 여유가 생기면서 라운드 운영을 잘 하게 됐고,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상대에게도 무자비하게 확인사살 펀치를 날리던 젊은 시절과는 달리 상대방이 그로기 상태에 빠지면 더 때리지 않고 자비롭게 조용히 코너로 물러서는 신사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더 인기를 끌었다. 물론 이게 더 무서워 보인다는 의견도 있었다.[17]

아래 영상은 1990년 1월 15일에 열린 제리 쿠니와의 경기. 당시 조지 포먼은 41세, 제리 쿠니는 33세였으며 쿠니는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해버렸다. 어딘지 조급해 보이는 쿠니에 비해, 경쾌한 풋워크는 없지만 웬만한 공격은 막거나 흘려버리며 여유 있게 강펀치로 대미지를 누적시키는 포먼을 볼 수 있다. 뚜벅뚜벅 걸어오다가 어퍼컷과 스트레이트 연속기로 쿠니를 컨버스에 처박아버리는 마지막 KO 장면은 공포심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날아가는 마우스피스만 봐도 저 펀치가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아래는 마이크 제이미슨과의 경기 장면 중 하나. 더킹으로 피했음에도 순식간에 반대쪽 주먹으로 어퍼를 날리는 노련함을 엿볼수 있으며, 그냥 한 대 툭 친 것으로 보이는데도 몸을 가누지 못하는 재미슨과 저 멀리 날아가는 마우스피스가 킬포인트.[18] 이때 포먼은 자애롭게도 펀치를 멈추고 마우스 프로텍터를 다시 끼울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해당 장면은 3라운드에 나왔으며, 결국 경기는 4라운드 포먼의 실신 KO승으로 끝났다.

파일:0801e813ffb4df82fdba275984b86d0466cb5be6.gif

이런 뛰어난 연승 행진을 벌였는데도 타이틀전을 갖기까지 뚜렷한 프로모션을 받지 못하고 20회가 넘는 경기를 가지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는 점이 당시 그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아쉬울 따름이였다.

4.2. 챔피언 재등극

파일:external/s.fixquotes.com/george-foreman_GjAMZ.jpg
포먼은 계속 승리를 거듭하여 타이틀 도전권을 땄고, 1991년 만 42세의 나이로 27세의 헤비급 챔피언 에반더 홀리필드와 타이틀 매치를 벌였다. 물리적으로는 포먼이 나이 때문에 이기기 힘든 경기였다. 그럼에도 12라운드까지 가는 저력을 보여주었고, 아깝게 판정패했다.[19]

홀리필드전에서는 확실히 잘 싸우기는 했지만 유효타 수가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나고 홀리필드의 지속적인 교묘한 반칙을 눈감아주는 편파판정 등 이기기는 어려운 경기였다. 심판 전원일치 판정패.[20]

그래도 홀리필드 전에서 여전한 실력을 증명했기 때문에, 각종 방송활동(복싱 해설가, TV 쇼, 시트콤, 광고 촬영) 제안이 들어왔고 선수 생활과 겸업하면서 계속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세계 타이틀 도전 기회를 얻어 WBO 챔피언이던 토미 모리슨과 경기를 가졌지만 또다시 판정패를 당했다. 선수생활과 방송 활동을 겸업하면서 포먼의 준비가 부족했고, 모리슨의 치고 빠지는 전략이 제대로 통했기 때문.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포먼이 복싱 커리어를 마무리 지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후엔 방송활동을 대폭 줄이고 훈련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결국 1994년 45세의 나이로, 에반더 홀리필드를 꺾고 당시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던 마이클 무어러를 상대로 헤비급 챔피언이 될 사실상의 마지막 기회를 얻게 되었다.

여기서 포먼의 택한 전략은 오로지 KO를 노리는 것이었다. 9라운드까지 마이클 무어러에게 수많은 유효타를 맞으며 점수상으로는 밀리고 있었던 상황에서, 무어러가 승리를 확신했던지 좀 더 공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라운드에서 그 동안 잘 보여주지 않았던 오른쪽 스트레이트를 적중시키기 위해 왼쪽 훅을 대여섯번 정도 날려 무어러의 움직임을 제약하고, 기어이 오른쪽 스트레이트를 적중시키면서 무어러를 KO로 제압한다.[21] 젊은 시절의 조지 포먼보다 경기 운영 면에서 크게 노련해졌음이 드러난 경기. 여담으로 무어러가 도대체 왜 저런 가벼운 펀치에 대짜로 뻗어버린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을텐데, 다른 각도에서 슬로우 모션으로 보면 포먼이 툭툭 때린 원 투가 꽂힐 때마다 다른 선수들의 풀스윙 훅이 꽂힌 것마냥 무어러의 머리 전체가 휙휙 돌아간다. 45세라도 포먼의 파워는 무시무시했던 것이다. 게다가 무어러는 턱이 약한 편이었는데 이것이 치명적이었다.

사실 경기 내용, 점수 면에선 무어러가 크게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무어러가 7라운드 들어서면서부터 전략을 바꾸어 포먼을 KO시킬 작정으로 압박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실제로 라이트를 연속으로 두 번을 제대로 맞히기도 했고,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은 포먼의 사기적인 맷집. 홀리필드도 '무어러가 포먼을 만만히 본 거지, 직전에 포먼이랑 붙었던 나도 17번의 펀치를 맞혔지만 그는 멀쩡히 서 있었어.' 라고 명백한 무어러의 실수를 지적했다. 10라운드 시작 직전 휴식 타임에서 무어러의 세컨 테디 애틀러스가 '포먼의 앞에 얼쩡거리지 말고 제발 움직여라, 포먼이 잽 뒤에 한 방을 숨기고 있으니 위험하다' 라고 갈구듯이 조언을 했지만 왠지 무어러는 이를 듣지 않았다.[22]

결국 운명의 10라운드에 포먼의 레프트훅 헛방 작전에 말려든 무어러는 그가 내지른 원투에 맞아 순간 반응속도를 잃어버렸고, 곧바로 다시 들어온 원투에 제대로 턱이 돌아가 나가떨어지고 만다.

이렇게 조지 포먼은 IBF, WBA 헤비급 챔피언을 따냈다. 이전까지만 해도 무어러는 무패의 복서였다. 그리고 이 때 포먼이 입은 트렁크는 바로 20년 전 알리와 싸울 때 입었던 것이었다.


무어러전.[23] 지칠대로 지친 상태인 45세 복서의 툭툭 꽂는 펀치가 결국 26세의 팔팔한 챔피언을 캔버스에 눕혔다.

4.3. 재은퇴

포먼은 다시 마이크 타이슨과의 대결을 원했으나, 성사되지 않았고, 토니 터커와의 방어전과 IBF 1차 방어전 상대였던 액설 슐츠와의 재대결을 포기하면서 WBA, IBF 타이틀을 반납한다. 이후 IBA, WBU 등의 마이너 타이틀을 지키며 크로퍼드 그림즐리, 루 사바레세 등 젊은 선수들을 꺾고, 1997년 섀넌 브릭스[24]와 대결하였으나, 12라운드까지 가는 끝에 판정패했다. 이 판정에 대해서 여러가지 말이 많았으나, 포먼은 이 경기를 끝으로 다시 은퇴하였다. 당시 나이는 48세.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소 증명했다. 1999년에 다시 복귀한다는 떡밥을 던지며 80년대 초반의 강펀처였던 래리 홈즈[25]와 대결을 추진하였으나, 결국 대전료 차이로 무산되었다.

5. 은퇴 후

파일:external/content6.flixster.com/11968292_ori.gif
이후 요리기구 및 주방용품을 사업을 하던 러셀 홉스 사에 고용되어서 그의 이름이 붙은 브랜드가 나왔고,[26] 노익장과 상술한 개신교도가 된 이후의 행동들과 바뀐 성격으로 인하여 이미지가 굉장히 좋아졌기 때문에 대중들의 인기를 얻어 매우 성공했다. 특히 이 요리 기구들이 기름기를 쪽 빼주어 건강에 좋다는 홍보가 매우 효과가 좋았다. 실제로 그와 동시대의 전설적인 복서인 무하마드 알리는 펀치 드렁크 증세와 파킨슨병으로, 조 프레이저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음을 상기한다면, 그는 멀쩡한데다가 은퇴 후 돈도 복서 때보다 더 많이 벌었으니, 그야말로 복 받은 노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두 번째 패배를 안겨 준 지미 영도 펀치 드렁크+약물중독으로 고생하다 향년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특히나 위 사진에 나온 세로로 홈이 여러 개 파이고 위 아래 모두 열선이 들어간 양면 그릴을 브랜드 불문하고 조지 포먼 그릴[27]이라고 부를 정도로 성공했다.[28] 미국의 대표 MC 코난 오브라이언 Clueless Gamer에서 아타리 2600 게임을 했을 때, 아타리 2600의 본체를 보고 "이거 조지 포먼 그릴 아님?"이라고 드립을 쳤을 정도. 한국에서도 조지 포먼 그릴의 유사품이 초창기 홈쇼핑 등에서 큰 인기를 누리기도 했을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특히 파니니나 쇠고기 스테이크, 햄버그 패티를 자주 요리한다면 추천할 만하다.[29]

1999년에는 솔튼 사라는 다른 주방용품 기업과 평생 계약을 맺어 더욱 큰 돈을 번다. 솔튼 사의 포먼 그릴 모델료로 1억 2750만 달러+회사 주식 1000만 달러를 받았는데, 그러고도 매년 그릴 수익도 일부 받고 있다(!). 이는 조지 포먼이 평생동안 받은 파이트 머니보다 훨씬 많다. 참고로 포먼이 받은 가장 많은 파이트 머니는 1250만 달러를 받은 홀리필드전이다. 그리고 KFC, 도리토스와 맺은 계약, 그리고 따로 가지고 있는 레스토랑 프랜차이즈도 있다고 한다.

다양하게 얻은 명예와 이미지 덕분에 이런 사업들도 할 수 있었고, 여기에 포먼 본인도 사업가적인 면모가 꽤 있어서 복서 시절에 얻은 재산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재산이 불어났다. 현재까지도 조지 포먼은 복서 재산 통계에서 넘사벽 복싱재벌 플로이드 메이웨더 바로 아래 2위로 거의 항상 꼽힌다.[30] 거기다가 이미지까지 좋으니 정말 모든 걸 갖추고 있다.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이미지를 남겼기 때문에 성공학 강사로 뛰기도 하고, TV에도 자주 나온다.

자식들을 12명이나 키웠다고 하는데, 한 여자가 모두 낳은 게 아니라 입양한 자식과 배다른 자식들을 포함한 수라고. 재미있는 점은 아들들의 이름을 모두 조지로 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5명의 아들들이 순서대로 조지 주니어부터 조지 6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딸들의 이름도 조지로 하고 싶었지만 그건 좀 심한 것 같아서(...) 다른 이름으로 했다고 한다.[31] 그리고 조지 포먼 3세는 복서로 데뷔해서 16전 16승 15KO라는 좋은 성적을 내고 사실상 은퇴했다. 딸인 프리다 포먼도 미들급 여자 복서로 활동하여 6전 5승 1패 3ko라는 좋은 성적을 내고 은퇴. 조지 포먼은 프리다가 복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계속 은퇴를 권했다고 한다. 프리다는 안타깝게도 2019년 3월 42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때는 무하마드 알리가 자신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사이가 안 좋았으나 2000년대 초반의 인터뷰에서는 같이 행사에도 참여한 적 있다며 "알리에게 유감 없다"고 밝혔다.[32]

NBC에서 제작하는 꽃보다 할배의 미국판 리메이크(2014년 9월 tvN 정식 라이선스)인 " Better Late Than Never"에 출연하게 되었다. 30일간 촬영된 총 6화 분량의 에피소드 중 1개 분량을 촬영하기 위해 한국도 방문했다. 에피소드 내내 적응력이 매우 빠르고 사람 좋은 캐릭터로 나오는데, 윌리엄 샤트너가 위에 나온 조지 포먼 그릴 드립을 치는 게 깨알같다.

자타가 공인하는 자동차광이다. 페라리, 람보르기니 할 것 없이 억소리 나는 슈퍼카의 오너로 유명하다. 하지만 의외로 본인이 가장 아끼는 차는 1977년형 폭스바겐 비틀로, 본인의 첫 차라고 한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했다.

UFC 파이터 데릭 루이스가 포먼에게 복싱을 배웠다고 한다.

더 마스크드 싱어시즌 8에 "파리지옥"이란 가명으로 출연했다.

6. 첫 번째 조지 vs 두 번째 조지

파일:external/davebrogansdrumblog.files.wordpress.com/george-foreman-e1314210012776.jpg
before & after.

처음 복서 생활할 때와 은퇴하고 신앙에 귀의하다 복귀했을 때 성격, 이미지, 파이팅 스타일 등이 너무 달라 전자를 첫 번째 조지(no.1 George) 후자를 두 번째 조지(no.2 George)로 부른다. 복싱 팬들 사이에서는 첫 번째 조지와 두 번째 조지 둘 중 누가 낫느냐는 얘기를 하는데, 각종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포먼 본인까지 두 번째 조지가 복서로서나 인간으로서나 더 낫다고 평가한다.

원래 조지 포먼은 대중을 기피하는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사람이었고, 시합에선 비틀거리는 상대도 죽일 듯이 달려들어 두들겨 팰 만큼 냉혹했다. 그러나 두 번째 조지는 한층 여유를 가진 채 농담도 자주 하고[33] 항상 웃고 긍정적인 이야기들을 했으며, 그로기인 상대는 더 때리지 않는 매너를 보여준다.

복서로서도 더욱 발전했다. 첫 번째 조지 시절, 포먼은 강력한 펀치력 덕분에 3라운드보다 길게 가는 시합이 별로 없었다. 때문에 속으로는 거만했지만 링에 올랐을 때 감정적으로 불안했고, 힘으로 상대를 두들겨 패는 것만 생각하는 단순한 복서였다. 무하마드 알리 전에서 알리가 로프에 기대서 도발하자 바디가 비어있음에도 알리의 얼굴에 큰 펀치를 날려 한 방에 눕히려고 들었고, 심지어 펀치의 강약조차 조절하지 않아 자기 체력을 혼자 다 깎아먹고 나이 든 알리보다 먼저 체력이 고갈되었다. 즉 첫 번째 조지는 선택받은 피지컬과 펀치력에 비해 멘탈과 경기 운영력이 약한 것이 분명한 단점이다.

두 번째 조지 시절엔 대부분을 3라운드 내로 끝장내는 건 여전했지만 40세가 넘은 나이에도 운영과 페이스 조절 능력을 향상시켜 12살 어린 챔피언 에반더 홀리필드를 상대로 12라운드 판정까지 끌고 갔고, 15살이나 어린 마이클 무어러를 상대로는 10라운드에서 눕혀 챔피언이 되기까지 했다! 나이가 들었으니 펀치력이나 반응속도, 스태미너는 줄었겠지만애초에 줄어도 괴물의 신체능력이다., 정신적으로 훨씬 안정되고 여유가 생기면서 스태미나 관리능력, 끈기, 시합 운영 측면에서 발전한 게 훨씬 크게 작용했던 것. 무어러전에서는 한방을 노리는 척 크게 레프트훅을 두어 번 날리는 심리전을 걸어 무어러의 회피할 방향을 제약한 다음 침착하게 턱을 계속 때려 K.O를 따냈다. 알리전에서 상대가 열어놓은 바디조차 때릴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경기 운영이 천지 차이 수준으로 발전한 것.

이와 같은 이유로 포먼 스스로 '두 번째 포먼은 두뇌까지 씁니다. 첫 번째 포먼이 틈을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 쓰러뜨릴 겁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두 번째 포먼이 이깁니다.'고 했으며 거의 모든 전문가들도 '한 방만을 노리는 슬러거 일변도에서 각종 올라운드 테크닉을 구사하게 된 두 번째 조지가 이긴다.'고 인정한다. 또 '두 번째 조지가 선샤인 쇼다운에서 알리와 붙었으면 게임은 달라졌을지 모른다'고 평할만큼 두 번째 조지는 복서의 완성도로도 높이 평가받는다.[34] 비록 젊을 때보다 순발력이나 체력, 맷집 같은 피지컬적인 면모가 많이 녹슬었어도, 그 녹슨 피지컬이 동시대의 복서들과 견줄정도였으며 거기에 경험이 쌓이고 멘탈이 튼튼해진 조지 포먼은 링 캐릭터에서나 권투에서나 훨씬 나은 복서가 되었다.

스포츠는 피지컬이 깡패라 아무리 멘탈이나 완성도가 다소 늦게 완성된다고 해도 커리어에서 전기 vs 후기를 나누면 전기가 비교적 강하게 평가되는 편이다.[35] 그러나 전기 포먼이 워낙 경기시간이 짧아서 퍼포먼스를 평가할 시간이 적었다는 점과 더불어, 10년간의 공백이 오히려 몸에 휴식을 주어 커리어의 연장에 도움을 주었고 그만큼 자기 상황을 잘 알고 플레이스타일의 변화를 성공적으로 가져간 것이 후기 포먼이 높은 평가를 받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36]

오직 순수하게 펀치를 내지르고 상대 공격에 버티는 능력을 본다면 20대 초반이 40세 당시보다 월등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경기 운영력이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할 수 없기에 후기 포먼이 높이 평가받는 것이다. 피지컬로만 따지면 역대급 괴물이었던 포먼이 전성기가 지난데다 공백도 있던 무하마드 알리에게 지는 것이 말이 안되고, 실제로 포먼은 지고 나서도 납득하기 어렵단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알리는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포먼을 때려눕힐 수 있었다. 즉, 만약 전기 포먼과 후기 포먼이 영혼의 맞다이(...)를 뜬다면 당연히 피지컬에서 앞서는 전기 포먼이 백프로 이기겠지만, 본인이 스스로 밝힌 것처럼 후기 포먼은 신중하게 기다리면서 멧돼지같이 돌진하는 전기 포먼이 지쳐 빈틈을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때려눕힐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분야는 다르지만 같은 운동선수인 숀 마이클스와도 많이 비교된다. 마이클스도 은퇴 중 갱생하여 재데뷔했던 시절이 인성이든 실력이든 더 높게 평가되기도 하는 인물인지라.

7. 파이팅 스타일

파일:fae6f3508ebd102d5a1a927dd4a752b5.gif
파일:hcTdV5.gif

급이 다른 펀치력을 지닌, 역대 최강의 슬러거중 한명이다. 복싱 역사상 최고의 하드펀처 중 하나로 헤비급에는 어니 셰이버스, 소니 리스턴, 켄 노턴 등 복싱 역사에 이름을 날린 쟁쟁한 슬러거들이 많지만, 사상 최강을 논할 때 조지 포먼은 반드시 거론된다. 의외로 포먼은 전성기 때 체중이 별로 안 나가는데, 98~100kg 정도로 시합을 치렀다. 하지만 우월한 체구에 맷집까지 사기적인 강골인데다 막강한 근육을 탑재한 슈퍼 하드 펀처라서 그냥 대충 팔힘으로 툭툭 치는 거 같은데 상대가 픽픽 쓰러지고 몸이 붕 뜨며 마우스피스가 날아가는 것을 보면 기가 찰 정도다.[37]

KO 장면 모음 영상을 보면 심지어 상대방이 포먼의 공격을 가드했는데도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다운되는 장면도 있다. 그야말로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거구 괴물 복서인 셈.[38]

무지막지한 덩치에서 나오는 파워와 사정거리가 너무 엄청나서 테크닉 의존도가 매우 낮은 복서라고 착각할 수 있다. 실제로 영상을 보면 얼핏 보기에도 그냥 펀치를 내지르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비록 테크닉이 당대의 복서들과 비교했을 때 섬세하지는 않았어도, 펀치의 정확도와 타점, 회수율 등도 파괴력 못지않게 가공할 수준이었다. 즉, 필요가 없어서 화려한 기교를 쓰지는 않았지만 내지르는 한 방 한 방의 정확도와 정교함만큼은 최상급이었다는 의미.[39] 체구나 파워를 타고난 슬러거들은 많지만 그만의 정교함도 최강 슬러거로 등극한 중요한 요인이다. 사실 내지르는 펀치도 매우 교과서적인 힙드라이브와 체중 이동을 통해 몰아치는 것으로 피지컬 못지않게 기초 역시 탄탄했던 복서.[40]

펀치력만으로는 어니 셰이버스가 포먼 이상이라는 말이 많다.[41] 그러나 셰이버스는 파워는 정말 강하지만 크게 한 방을 노리는 선수라 그 한 방이 들어갈 때 무지막지하지 경기 운영이 뛰어난 선수는 아니다. 또 포먼과 달리 팔을 비교적 크게 휘둘러서 지르는 스타일이라 펀치가 빗나가거나 카운터를 얻어맞는 경우도 많았다. 요컨대 복서로서의 완성도는 물론 전적에서도 둘은 넘사벽 차이가 있다. 셰이버스는 한 번도 챔피언이 된 적이 없다. 다시 말해 파괴력 자체는 셰이버스가 포먼보다 위지만, 시합 운영, 기술, 체력, 맷집 등 다른 부분에서 크게 밀린다. 종합적인 강력함을 따지면 포먼에 미치지 못한다는 소리. 쉽게 야구로 비유하자면 어니 셰이버스는 170KM를 던지지만 체력이 떨어지고 제구가 좋지 않은 투수, 포먼은 165KM를 던지지만 제구와 구종, 체력까지 좋아 완성도가 높은 투수라고 할 수 있다.

포먼의 파워는 선천적으로 타고났지만, 경험과 노력도 뒷받침이 되었다. 그는 복싱 역사에 남을 하드펀처 소니 리스턴의 스파링 파트너였기에 가공할 잽과 숏펀치들을 배웠다. 포먼의 잽에 턱을 맞은 선수들은 고개가 돌아갈 정도였으니 파워도 리스턴과 비슷했다.

그러다 보니 특히 상성으로까지 밀리는[42] 스워머 스타일, 즉 조 프레이저, 마이크 타이슨 같이 맷집이나 스피드, 수비력을 내세워 파고드는 복서들은 아예 상대가 안 됐다.

위 동영상에 나오는 1위가 바로 프레이저 vs 포먼 전이다. 프레이저는 포먼을 상대로 한 1차전에서 레프트 훅을 가드 사이로 적중시키며 경기를 스타트하고 초반에만 포먼의 관자놀이에 한 방, 턱에 두 방의 레프트 훅을 먹였는데, 포먼이 그걸 다 씹고 프레이저의 가드 위나 이마쪽으로 펀치를 날려 프레이저를 다운시켰다. 알리와의 대결에서 알 수 있듯이, 스워머지만 맷집에 자신이 있어서 잽 정도는 몇 대 허용하면서 파고들어 근접거리에서 때려부수는게 프레이저의 스타일인데 포먼의 주먹은 맞고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프레이저는 포먼의 무자비한 펀치 세례를 두들겨 맞고 2라운드 만에 총 6번이나 다운되어 TKO 당하는 등 처절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프레이저 역시 복싱 올타임 베스트 20에는 들어갈 전설적인 복서이고 알리, 포먼과 함께 헤비급을 빛낸 라이벌이지만, 맞대결에서는 상성과 체격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완패했다.

저 프레이저 전의 임팩트는 실로 대단해서, 20년 가까이 지나서 아직 살아있을 때의 커스 다마토 마이크 타이슨을 지도할 때 타이슨은 이 포먼 vs 프레이저의 명경기를 평소에도 분석차원에서 즐겨 보았다. 이때 다마토는 "너나 프레이저처럼 짧고 탄탄한 체격의 스워머에게 있어 포먼과 싸우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다. 포먼을 상대할 수 있는 건 키가 크고 리치가 긴, 계속 물러서면서 아웃복싱을 펼칠 수 있는 상대이다."라고 조언해 줬다고 한다. 물론 커스 다마토는 1985년 11월에 죽었고 포먼은 1987년 중반에 복귀했으니, 자신의 제자와 포먼이 싸울 수도 있으리란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타이슨이 제임스 더글러스에게 패배하자 재기전 상대로 포먼이 물망에 올랐다! 당시 타이슨은 네임밸류의 회복이 필요했고 포먼은 타이슨과 싸우고 싶어 안달난 상태였으므로 권투 프로모터인 돈 킹이 매치를 제안했으나, 타이슨은 죽은 코치의 조언이 생각나서인지 포먼과의 매치를 거절했다고 한다.

사실 무자비한 공격력과 우월한 피지컬이 강조되지만, 전성기 당시 경기 운영 능력도 괜찮은 편이다. 프레이저 전에는 체격도 큰 그가 무자비하게 패버리는 것이 눈에 띄지만, 잘 보면 인파이팅을 하려는 프레이저를 주먹으로 치거나 (반칙이 안 될 정도로만) 슬쩍 밀거나 스탭을 밟아서 계속 거리를 어느 정도 두는 걸 알 수 있다. 스워머인 프레이저가 안쪽으로 들어오는 걸 막은 것. 프레이저도 당대 최고의 복서였는데 그렇게까지 속수무책 당한 건 (물론 피지컬과 상성이 절대적이지만) 포먼의 전략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절대 피지컬만 믿고 미련하게 주먹만 휘두르는 파이터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한 방 한 방이 살인적인데 경기운영도 지독히 무자비해서 크로스 암 가드를 올려 상대의 펀치를 막고 워킹 스텝으로 압박하다가 오른손 한방으로 끝내는 패턴을 갖고 있었다. 전성기인 20대에는 가장 무식하게 상대방을 패는 선수라고 알려졌다. 포먼은 선수 시절에는 KO를 바로 앞둔 그로기인 상대도 무지막지하게 패는 잔인함으로 유명했고, 대중을 기피하며 항상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여 인기 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43] 물론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중년의 포먼은 그로기 상태의 상대를 자비롭게 기다려 주는 선수로 변했다.

그는 당대의 라이벌 조 프레이저와는 두 번 싸워 모두 이겼으나, 무하마드 알리에게는 아래 언급된 부상이란 불운과 알리의 기가 막힌 운영에 걸려들어 한 번 패했다. 알리와 재대결을 원했으나, 이후 무명인 지미 영에게 패하자 권투계를 은퇴했다. 후술하겠지만, 이때 급성 심장마비로 사망할 뻔했다.

그 이후에는 죽다 살아나면서 깨달음을 얻었는지 종교에 귀의하여 개신교 목사 안수까지 받아 종교인으로 지내다가, 1980년대 말에 다시 40대 복서로 복귀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프로 복싱이 장난이냐며 그의 도전이 무모하다고 평가했지만, 조지 포먼은 그런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20~30대 팔팔한 젊은 복서들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소 증명했다.

중년 포먼 스타일은 젊을 때와 파이팅 스타일이 다소 달라졌는데, 상대에게 무자비하게 큰 펀치를 계속 휘두르던 과거와 달리 침착하게 잽과 스트레이트를 효율적으로 쓰며 경기 지구력이 상승했다. 순발력과 스피드가 떨어졌지만 특유의 크랩 가드를 함으로써 이를 보완하기도 했다. 비록 콤비네이션 펀치는 젊을 때보다 못하게 됐지만, 20kg 가까이 증량된 몸에서 나온 단발 펀치는 오히려 파워가 배가됐다.

그리고 마침내 45세의 나이에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다시 따내는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다. 오늘날에도 조지 포먼이 유명한 것은 초창기 활동시절 보다는 1차 은퇴후 복귀한 40대 복서 포먼이 활약한 영향이 더 크다. 여담으로 그는 복귀하면서, 또 그후에도 마이크 타이슨과 대결하기를 여러차례 희망했으나, 타이슨이 철창 신세를 지고, 그 외 여러 이유로 결국 이 대결이 성사하지는 못했다. 지금도 "둘이 붙었으면 어땠을까?"라며 많은 복싱팬들이 궁금해하는 부분. 결국 1997년을 끝으로 복싱계를 떠난다.

2차 은퇴 후에는 종교인은 물론 사업가로서 면모를 과시하여 크게 돈을 벌었고, 성공학 강사로도 유명하다. 물론 목회 활동도 계속 했고 방송 출연도 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포먼의 전성기는 헤비급의 전성기로 조지 포먼은 이 시대를 수놓은 전설적인 복서들과 자웅을 겨루던 레전드 복서 중 하나였다. 권투 전문 잡지인 미국의 링 매거진이 선정한 역사상 펀치가 가장 강력한 복서 100명[44] 중 당당히 9위에 선정되었다.

8. 기타

미식축구선수를 준비했던 것과 그의 펀치 파워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어마어마한 장사였다고 한다. 전성기땐 270kg의 수소를 들쳐메고 훈련하기도 했다고.

권투 선수로써 전성기는 무하마드 알리, 조 프레이저 등과 상대한 1970년대지만, 2차 복귀 때의 대머리에 약간 배불뚝이 외형으로 바뀐 쪽이 보통 사람들에게 기억에 더 남아 있는 듯하다. 아랑전설 액셀 호크는 딱 조지 포먼의 외모를 본따 만든 복서 캐릭터.

알리는 파킨슨병, 프레이저는 간암으로 말년에 고생하다 일찍 떴지만 조지 포먼은 그들이 죽은 나이와 비슷한 72살 현재에도 팔팔하다. 추억의 선수들이 80도 채 못 살고 떠난 올드 복싱팬들에게는 아직 만날 수 있는 선수로서의 각별한 의미도 있다.

심슨 가족에는 위의 조지 포먼 그릴의 패러디로 조지 포먼 편지 분류기가 나온 적 있다. 편지를 내용에 따라 좋은 편지와 나쁜 편지로 나누고 나쁜 편지들은 햄버거 패티로 구워준다. 나쁜 편지의 예로는 비자카드 요금 청구서, 심슨의 불법복제판(JURY SUMPSONS라고 나온다), 패티와 셀마의 생일 초대장 등이 있다.

한국에서도 아는 사람이 무척 많았는데, 1980년대 컬러TV가 서민층까지 보급될 때, 권투는 아직 인기있는 스포츠였다. 그리고 주말 낮은 권투경기 녹화중계시간이었고, 포먼은 단골로 등장했다. 미디어 채널이 한정적이던 당시 포먼과 타이슨의 경기영상 인기는 십 수 년 뒤 종합격투기스타를 몇 배 능가했다.

UFC 미들급 파이터 션 스트릭랜드는 포먼과 비슷한 경기 스타일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무표정하게 크랩 가드를 올리고 뚜벅뚜벅 걸어들어가 상대를 쥐어패는 것이 판박이 수준.

2023년 12월 11일부터 21일까지 조지 포먼이 소유한 1931-2005년식의 고급차 52대를 경매에 부쳤다.


[1] 경기 시작 전 프로필엔 6피트 4인치(193cm)로 소개되지만 본인이 밝힌 실제 신장은 191cm이다. [2] 복귀 이후의 체중은 110kg대. 전성기 시절 체중은 97~100kg이었다. [3] Boxrec 프로필 [4] KO률이 약 90%에 달한다. [5] 학교에 도시락도 못 싸갔다고 한다. [6] 그렇다. 한창 성장기인 유년 시절 돈이 없어 영양식은 꿈도 못 꿨고 학교에 도시락도 못 챙겨갈 정도로 가난해 세 끼 제대로 먹은 적이 별로 없는데 키 191cm에 몸무게가 90 후반이 나갔다는 것(...). [7] 프레이저는 헤비급 선수로는 작은 편인 182cm의 신장을 가졌다. [8] 6번이나 벌떡벌떡 일어나는 프레이저도 사람의 맷집이 아니었다. 노년의 프레이저의 코멘트를 빌리자면 "젠장, 내가 뭘 잘못했다고 여기서 이러고 있지?"(...) 여담이지만 이때 아나운서가 외쳤던 "Down goes Frazier! Down goes Frazier!"은 농구의 " Havlicek stole the ball" 야구의 " He dropped the ball!" 등과 함께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유명한 멘트 중 하나이다. [9] 사각 링 로프의 반동을 이용해 포먼의 강펀치 충격을 교묘하게 분산시키고 포먼의 신경을 긁는 데 성공했다. [10] 복서의 회복기로는 매우 짧은 기간이다. [11] 상술했듯이 포먼이 어린 시절을 매우 불우하고 비참하게 보내다가 나이가 들고 신앙인이 되고 안정을 찾자 자신의 어린 시절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을 돌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12] 한때 스트리트 파이터 2의 마이크 바이슨이 이 마이크다라는 썰도 있었지만 캡콤은 부정했고, 마이크 바이슨은 오히려 타이슨을 모티브로 따온 케이스다. [13] 소니 리스턴을 동경하여 챔피언 등극 이후에는 그의 캐릭터를 따라하여 살벌한 마이크워크를 구사하고 링 위에서도 상대를 죽일 듯 노려보기도 했으나, 이 역시도 리스턴의 카피일 뿐 그만의 개성은 아니었다. [14] 여기엔 타이슨이 포먼을 회피했다는 꽤 신빙성 있는 소문도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 타이슨을 키워낸 커스 다마토는 자주 타이슨에게 포먼과 상성이 매우 불리하다고 교육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타이슨이 늙은 포먼에게 상대도 안 되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이 시점의 포먼은 펀치력만은 전성기만큼 강력했지만 세월은 세월이라 스피드, 체력, 전반적인 신체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상태였고, 결국 챔피언이 되긴 했지만 전성기와는 비할 바 없는 고전을 겪어야 했다. 둘 다 전성기라면 확실히 포먼이 굉장히 유리했겠지만, 20대 초반의 전성기 타이슨과 다 늙은 포먼이라면 이야기가 많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타이슨은 포먼을 상대로 얻을 게 없다. 까다로운 상대를 이겨봐야 40이 다 되가는 늙은이를 이기는 게 뭐 대단하냐는 소리나 들을 거고, 만에 하나 졌다간 최전성기의 타이슨이 늙은 포먼에게 지는 거니 망신이다. 상성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클래스 차이가 있다면야 그냥 찍어눌러서 이기면 되겠지만, 포먼도 늙어서 그렇지 클래스가 떨어지는 선수는 아니니 굳이 얻을 것 없는 싸움에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던 것. [15] 아래 두 사진의 표정을 비교해 보자. 나이 차이가 있다곤 해도 같은 인물인지조차 의심스럽다. [16] 게리 쿠니라는 표기로도 유명. 실제 발음은 제리 쿠니에 가깝다. 80년대 한국 언론에도 심심찮게 등장하던 선수. [17] 간혹 그로기 상태에서 추가타를 날리기도 했지만 이는 경기 중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경우였고 눈치채거나 심판이 제지하면 바로 물러가는 것은 여전했다. [18] 마우스 가드가 날아간다는 건 최소한 턱에 충격이 가해졌다는 뜻인데, 턱은 직격타가 아닌 빗맞은 타격이라도 치명상이 나올 수 있는 급소와 같은 부위다. 턱을 가격하면 뇌가 요동치기 때문인데, 얻어맞은 직후 바로 그로기 상태에 빠지는 제이미슨의 모습을 보고, 그 위력을 바로 가늠할 수 있다. [19] 아마도 영화 록키 발보아의 스토리 라인은 이 경기를 토대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20] 홀리필드는 타이슨의 핵이빨 사태의 피해자로 유명하지만 사실 대전자들 모두가 손사레 칠만큼 지독한 더티 복서였다. 원투 박치기 클린치와 훅 팔꿈치 가격은 기본에 어퍼컷 로블로까지 일삼는데도 프로모터의 금전적 지원에 지적받지 않는 편파판정 등. 조지 포먼 본인도 '이렇게 지저분한 스타일의 복서는 처음이다'라고 평했다. 그래도 홀리필드는 훗날 포먼의 다큐멘터리 영화에 출연해서 '내가 11라운드 막판에 왜 나이든 노인네를 붙들고 늘어졌냐고? 일말의 역전의 가능성을 봉쇄한 게 잘못된 건가? 난 그런 실수따위는 하지 않아' 라며 포먼이 가진 한 방의 위력을 간접적으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하술하지만 마이클 무어러는 이 점을 간과해서 내내 점수 상 앞서 있다가 포먼의 한방에 나가떨어져 챔피언 타이틀을 내주게 된다. [21] 헤비급 복싱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우스 포 스타일의 무어러가 계속 왼쪽으로 빠져나가며 포먼의 강력한 공격을 많이 피했으나, 10라운드에 무어러의 경기 스타일을 간파한 포먼이 지속적으로 큰 레프트 훅을 날려 무어러가 빠져나갈 방향을 제약시켰고, 재빠르게 레프트 잽 - 라이트 스트레이트 원투를 두 번 연속으로 턱에 꽂아넣어 KO시킨다. [22] 나이든 포먼을 상대로 정면승부를 피하고 판정승을 노리는 것이 자존심 상했을 수 있다. [23] 운명의 10라운드는 정확히 40분부터 시작한다. [24] 훗날 WBO 세계 챔피언이 된다. [25] 전 WBC, IBF 헤비급 챔피언. 포먼처럼 30대 후반에 복귀하여 당시 통합 챔피언이던 타이슨, 홀리필드와 각각 대결하고 40대를 훌쩍 넘기고도 선수 생활을 지속했지만, 왕좌 복귀에는 끝내 실패하였다. 포먼만큼 공백기가 길진 않았다는 것도 차이점. [26] 그가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만 빌려주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운영한다고 생각했다. [27] 보통 줄여서 Foreman Grill. 자매품으로 밀폐형으로 된 Foreman Oven도 있다. [28] 본인 트윗에 따르면 알리에게 KO당했을 때 거대한 고깃덩어리가 "날 구워줘"라고 하는 환각을 봤다고 한다...참고로 포먼이 그릴을 발명하진 않았다. 발명한 건 대만의 가정용품 기업 짠 쿠엔 회사. [29] 이 그릴이 기름기를 빼는 데 좋긴 한데 그렇다고 막 건강식이 되거나 고기를 건강하게 섭취하는 건 아니다. 당연하지만 그릴 하나 바꾼다고 그렇게 극적인 효과가 있진 않다. 그러나 일반 그릴에 비해 발암 물질 등으로부터 안전하게 조리할 수 있다고 한다. 미국의 식문화 특성상 의료보험 한두 가지 만으로는 도저히 커버할 엄두가 나지 않는 괴악한 조리과정(...)을 가진 음식이 판치는 마당에 이러한 건강한 조리법을 지향하는 제품은 매우 각광받을 만한 세일즈 포인트 이기도 했으며 또한 이 그릴은 집 안에서 고기 구워먹을 때 매우 편리하고 유용해서 집에서 직접 조리하여 소규모 파티를 여는 미국의 문화 특성상 상당한 인기를 구가할 만한 제품이었다. [30] 2021년 기준 대충 순자산이 3400 억을 조금 넘기며, 복서들 중 4위에 랭크됐다. [31] 하지만 딸들 중 한 명의 이름이 "조제타"라고 한다(...). [32] 마이클 무어러 전 직전에 포먼의 라이벌들이던 프레이저와 알리가 등장했는데, 알리가 시합 직전 포먼을 포옹하며 "행운을 비네(Good luck)"이라고 격려해준 것을 보면 화해는 그 이전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포먼의 성격은 죽다 살아난 이후 초긍정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상할 것은 없다. [33] 홀리필드 전에서는 '제가 이길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챔피언이 뱃살 때문에 벨트를 못 두르는 광경을 보실 거예요!'라고 농담해 좌중이 폭소했다. [34] 사실 첫 번째 포먼이 너무 열혈파라 알리와의 경기에서 바로 생각을 해내지 못했던 것이지, 포먼 정도의 완력이 있다면 상대를 클린치로 로프에서 뜯어낸 다음 팰 수 있었기 때문에 첫 번째 포먼에게도 로프 어 도프가 두 번 통하는 일은 없었다. 알리가 포먼의 첫 번째 은퇴 이전까지 절대 다시 싸워주지 않은 이유가 있다. 저 말은 두 번째 포먼의 향상된 링IQ라면 처음 보는 전술을 파훼하기 위해 한 경기가 아니라 한두 라운드밖에 필요하지 않았을 거라는 의미다. [35] 대표적 사례로는 코비 브라이언트로 전기 8번 시절과 후기 24번 시절. [36] 비슷한 사례로는 블랙캣 조던 vs 전기 3핏 조던 vs 후기 3핏 조던 케이스가 있다. [37]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싸움을 한번도 해본적 없는 사람이 치는 것처럼 치는데 그런 주먹에 맞는 상대가 날아가는 것을 보면 헛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 [38] 하드펀처라고 거론되는 다른 선수들과 달리, 포먼은 급격한 체중이동을 통한 한 방 펀치보단 기민한 복싱을 하기에 복싱을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땐 툭툭 치는 펀치로 보이는 것. 이와 반대로 펀치가 세기로 가장 유명한 어니 셰이버스가 즐겨쓴 콤비네이션은 오른손 훅을 예로 들면 체중은 물론이고 머리까지 추로 사용하는, 말 그대로 모 아니면 도 식의 던지는 펀치이다. 마이크 타이슨의 경우는 특유의 위빙을 해서 가장 안쪽까지 들어가 실컷 두드리다가 가드가 조금이라도 내려갔다 싶으면 그대로 레프트훅을 날려 시합을 끝내버린다. [39] 사실 그냥 내지르는 것 같아도 발을 자세히 보면 순간적으로 체중을 실어 펀치를 낸다는 걸 알 수 있다. 실제로 포먼은 체격이 알리같은 동시대 라이벌과 비슷한 체형인데(알리가 기교형이라 날렵해서 슬림할 거란 편견이 있지만 의외로 소니 리스턴과 몸무게가 거의 비슷했다.) 파워는 넘사벽이다. 이는 주먹을 내지르는 짧은 순간에 체중을 실을 수 있고, 반대로 체중을 실었음에도 빈틈을 거의 주지 않을 만큼 짧고 강렬하게 때린다는 것. 파괴력만큼은 그를 능가한 셰이버스와 차이점이 이 점이다. 굳이 크게 한 방을 노리지 않고도 충분히 강력한 펀치를 낸다는 것. [40] 슬러거 스타일의 복서들은 무식하게 힘만 쎈 복서들이라고 생각되는 경우가 많지만, 애초에 아무리 강한 주먹이라도 맞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렇기에 슬러거들에게 필요한 것은 펀치력보다도 그 정확성이고, 높은 정확도를 위해서는 탄탄한 기술이 당연히 요구될수 밖에 없다. [41] 포먼, 셰이버스와 둘 다 붙어본 무하마드 알리, 켄 노턴도 셰이버스가 파워만으론 한수 위라고 했다. 노턴은 셰이버스에게 한 번 맞을 때마다 시합을 포기하고 싶었을 정도라고 고백했다. [42] 보통 복싱 스타일의 상성은 아웃복서 > 슬러거 > 인파이터(스워머) > 아웃복서로 돌고 도는 형태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복싱이 많이 진화하여 한 가지만 할 줄 아는 선수는 반쪽짜리 취급을 받는다. [43] 이점에 있어서는 알리와 매우 대조적인데, 알리는 링 밖에서 아무리 흥분된 설전을 벌여도 그로기 상태의 상대에게 불필요한 확인사살성 펀치를 날리지는 않았다. 이는 소니 리스튼과의 2차전 팬텀 펀치나 포먼과의 경기에서도 드러난다. 비틀거리면서 쓰러질 듯한 상대에 대해 알리는 펀치를 날리지 않았다. 반면 포먼은 그로기 상태로 링에 걸쳐 있는 상대에게도 펀치를 날렸다. [44] 원제는 The 100 Greatest Punchers of All-Time!으로 2003년 발표하였는데, 1위에서 8위까지는 미국 스포츠의 흔한 과거보정 시스템에 의해 19세기 혹은 20세기 초반의 인물들이다. 포먼과의 나이 차이는 최소 30년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