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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23:51:23

운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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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山郡 / Unsan County
운산군
雲山郡 / Unsan County
국가 북한
광복 당시 면적 819.67㎢
광역시도 평안북도
광복 당시 행정구역 1읍 4면
시간대 UTC+9

1. 개요2. 역사3. 지리
3.1. 운산 금광
4.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5. 출신 인물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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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운산군(雲山郡)은 평안북도 동부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향산군 구장군, 남쪽으로 태천군, 서쪽으로 동창군 영변군, 북쪽으로 자강도 송원군과 접해있는 군이다.

2. 역사

고구려 시대에는 운양군(雲陽郡)이라 하였으며, 용호리에 있는 용호동무덤이 당시의 지역 발전을 말해준다. 고려시대에는 운중군(雲中郡), 운주(雲州)가 되었으며 조선 태종 때 운산군(雲山郡)이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산세가 매우 험준하고 빼곡히 밀림이 우거져있는 모습이 구름과 같다고 하여 그러한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더불어 고려시대의 행정단위명인 삭방도와 더불어 중국의 변방지명을 따온 사례로도 볼 수 있다. 운중과 삭방은 이미 중국 춘추전국시대부터 태행산맥 일대의 지명이었고, 후한시대까지 이어지는 지명이기도 했다. 문제는 단순히 중국에 대한 모화사상으로 지명을 따온 것이 아니라, 태행산맥 일대가 북방 기마민족이 중원으로 내려오는 주요 통로였고, 비슷한 성격과 지리적 특성을 가진 변경지라는 점을 생각한 고려정부가 행정지명으로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8.15 광복 이후 삼팔선이 그어지면서 북한의 영역이 되었다. 1952년에 북한이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운산군의 북동쪽 지역을 북진군으로 분리하여 신설하였으나 1954년에 도로 합쳤다. 현재의 운산읍은 옛 북진군 지역이며, 옛 운산읍은 현재의 구읍리 지역이다.

3. 지리

구룡강이 > 자 모양으로 흘러간다. 대략적으로 구룡강 상류 수계는 옛 북진군 지역, 조양강·룡흥강 수계는 옛 운산군 지역에 해당한다. 철도는 운산선이 있으며 옛 북진군 지역에만 지나간다.

연 평균 강수량 1,400mm로, 북부 지방에서는 손꼽힐 만큼 강수량이 많다. 이름값답게 구름이 많은 듯 하다.

구글 맵스에서는 운산으로 치면 안나오고 북진로동자구라고 쳐야지 나온다.

기후는 한반도 북부에 위치한 곳답게 겨울이 매우 추우며, 비공식적으로 1916년 12월 26일 관측된 -37.6 °C의 기록이 남아있다.

2012년 7월경 집중호우로 인해 이 지역에 3,517가구가 소실되어 12,433명의 주민이 피해를 입었으며 8명이 사망하였다. #

3.1. 운산 금광

오래 전부터 산지로 알려질 정도로 세계적인 규모의 운산금광이 존재하는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동양 최대 금광이었다. 1896년 미국인 모스가 운영하는 뉴욕 소재의 동양광업개발주식회사가 금광 채굴권을 따낸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대규모 채굴이 이어졌다.[1] 이 금광의 부대시설로 구한말에 설치된 운산수력발전소는 우리나라 최초의 수력발전소이기도 한데, 500kW급으로 당시에는 세계적으로도 최첨단 대용량 발전소였는데 역시 오로지 운산 금광 채굴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 현대 한국어의 속어인 노다지의 어원을 제공한 것으로 유력한 금광이기도 하다.

운산금광 채굴권을 넘겨준 사람은 명성황후가 아니라 고종이다. 조선왕조실록 호러스 뉴턴 알렌의 기록에 보면 운산금광 채굴권은 명성황후가 살해당하기 3달 전인 1895년 7월 15일에 허가를 했다가 바로 취소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명성황후는 운산금광 채굴권을 허락한 후 바로 취소하고 일본인들에 의해 살해 당했으므로, 명성황후는 결국 금광 채굴권을 넘겨 주진 않았다. 사후 운산금광 채굴권은 조선이 가지고 있다가 다음해인 1896년 4월 17일에 미국인 모스에게 채굴권을 허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운산금광 채굴권을 넘겨준 사람은 명성황후가 아니라 고종인 것이다.

한국의 대체역사 소설에서 이 금광을 본격적으로 개발하여 근대화를 이루는 것이 전형적인 클리셰가 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일제강점기 시절 운산금광의 최대 채굴량이 30톤 정도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선의 근대화가 금광 채굴만으로 가능했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은 없다.[2]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조선보다 훨씬 빠르게 문호를 개방했고, 150톤 가량의 생산량을 자랑했던 이와미 은광의 수익까지 더하여 자본을 축적했는데도 근대화 과정에서 돈이 모자라 파산하기 직전까지 갔다. 한 나라의 근간을 뿌리부터 바꿔야 하는 것이 근대화라는 점을 생각할 때 운산금광 단 하나의 매장량은 적진 않지만 여전히 부족한 규모였다. 다만, 한 푼 한 푼이 아쉬웠던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시드머니'의 역할로서는 유용했을 것이다.

평안북도 운산군뿐만 아니라 그 주위도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금광지대로, 운산금광뿐 아니라 이웃한 평안북도 창성군에는 운산금광 못지 않을 정도로 대규모인 대유동금광, 그리고 이 두 금광보다는 작지만 큰 규모의 여러 금광들이 존재한다. 대유동금광의 채굴권 역시 조선 말기 프랑스에 넘어갔다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회수해서 개발했다. 세계 순위에 들던 대형 금광이 아닌 주변의 소형 금광을 개발한 이들중에도 일제 강점기 조선 최고 부자들이 많이 나왔다. 경희학원의 설립자 조영식의 부친도 운산군 소형 금광주였고, 일제강점기 최고 부자였던 최창학도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금광 개발로 성공했다. 조선일보 창업주 방응모 역시 평안북도 삭주군에 위치한 소규모 교동금광을 개발해 조선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어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일제강점기 언론계의 중심부로 진출했다.

북한의 금광들은 오랫동안 많이 캐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금맥이 살아있는 상태로 보수적으로 잡은 조사에서도 북한은 세계 6위에서 10위 규모로 매장량이 아직도 풍부하다. 일제강점기의 낮은 기술 수준으로 매장량을 파악하고 캐다 중단된 상태로 현재 최신 기술로 다시 조사하면 매장량이 훨씬 더 늘어날 확률이 높다. 막대한 전력이 필요한 금 채굴 특성상, 평양 시내마저도 전력 사정이 좋지 못한 북한도 채굴 작업을 오랫동안 중단한 상태다. 북한 정권 입장에서도 대규모 금광 개발같은 경제적 충격이 갑자기 일어나면 예상치 못한 정권 안정의 불안요소가 될 수 있으니 닫아둔 상태.

4.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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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출신 인물

6. 기타

6.25 전쟁 초기 북진과정에서 중공군 유엔군이 최초로 접전하여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곳 중 하나이다. 여기서 미군 제1기병사단과 국군 제1보병사단, 제6보병사단이 중공군과 격렬하게 싸웠고 패퇴한 전장으로, 중국은 운산 전투가 발발한 10월 25일을 '항미원조기념일'로 기념하고 있다. 연대의 사상자가 절반 이상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미군 유해가 대략 1천 495구 쯤 있다고 추정된다고 한다.


[1] 비슷한 이름의 평안남도 은산군(광복 당시 평남 순천군 은산면)에도 금광이 있는데 조선 말기 은산의 금광 채굴권은 영국인이 가져갔다. [2] 애당초 한반도에 그 정도로 금이 많았다면 조선총독부가 전쟁 내내 적자만 봤을 리가 없다. < 한국 독립 전쟁>에서는 이런 한계를 감안해서 금광 자체를 써먹기보다 이곳의 채굴권을 가진 동양광업개발주식회사와 뱅크 오브 아메리카를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미끼로 끌어들여 한미 합작 은행을 만들고 본격적인 미국 자본 침투를 하는 전개를 썼다. [3] 일부 책에서는 이곳에 '천내읍'이라고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