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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을 지지하는 민주당원 범퍼 스티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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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이건 민주당원(Democrats for Reagan, Reagan Democrats)은 공화당 소속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을 지지한 민주당원을 뜻하는 단어다.2. 전신
2.1. 후버 민주당원
남북 전쟁 이후 남부는 인종주의적 남부 민주당원들의 기반인 굳건한 민주당의 텃밭이었지만 192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대선후보로 북동부 뉴욕주 출신 아일랜드계 미국인 가톨릭교도 앨 스미스가 선출되자 남부는 심하게 동요하기 시작한다. 그의 가톨릭 신앙은 잉글랜드계 개신교도들과 같은 WASP가 절대다수인[1] 남부인들에게 미국이 교황에게 지배당하고 국교가 가톨릭이 될 수 있다는 공포를 심어줬고 그의 금주법 폐지 공약과 KKK에 대한 반대도 남부에서 인기가 없었다. 공화당의 후버는 자신은 직접적인 네거티브에 거리를 두면서도 스미스에 반대하는 민주당원을 끌어들였다.앨 스미스는 남부 친금주법 민주당원들을 달래려고 아칸소의 조지프 T. 로빈슨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플로리다, 오클라호마, 텍사스에서 공화당 후버가 승리했다. 앨라배마에서는 후버가 48.5%를 얻으면서 배리 골드워터 이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중 최고 득표율을 얻었다.
2.2. 닉슨 민주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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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을 위한 민주당원 광고[2] |
닉슨을 위한 민주당원 캠페인에는 다수의 남부 민주당 인사, 평당원들이 동조했다. 미시시피 상원의원 존 C. 스테니스, 전 버지니아 주지사 밀스 고드윈이 대표적인 닉슨 민주당원이었다. 샘 넌, 존 스파크먼처럼 닉슨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맥거번 지지를 확고하게 거부한 민주당원들도 많았다. 닉슨은 당선 후 민주당 의회의 협조를 얻기 위해 남부 지역구에서 1972년 양원,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 공화당원들을 거의 지원해 주지 않았고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만이 닉슨을 대신해 남부 공화당원들을 조금 지원했다.[5]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휴버트 험프리의 지지 기반이던 노동조합 유권자들은 맥거번의 급진적 인종 통합을 우려하면서 지지와 자금 지원에 어물쩡댔고 몇몇 기부자들은 닉슨 지지로 전환하기까지 했다.[6] 최종적으로 CBS 출구조사 기준으로 무려 36%의 민주당원이 닉슨에게 투표했고 노조 유권자에서도 출구조사 오차범위 내에서 겨우 맥거번이 이겼다.[7] 4년 뒤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닉슨 민주당원들은 당내 보수파였던 지미 카터를 지지하거나 코널리, 고드윈처럼 공화당에 입당하기도 하였다.
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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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을 위한 민주당원 광고 |
1983년을 기점으로 미국의 경제가 안정세에 접어들자 상당수의 민주당원들이 1984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인 월터 먼데일 대신 로널드 레이건을 지지하게 된다.
- 남부 민주당원: 1976년 대선, 1980년 대선에서는 상당수의 남부 민주당원들이 前 조지아 주지사였던 지미 카터에게 투표했으나 1984년에는 미네소타 진보주의자였던 먼데일보다 레이건의 사회보수주의에 호감을 느낀 남부 민주당원들은 레이건을 지지했다. 레이건을 은밀한 인종차별주의자로 여긴 남부 흑인들은 먼데일에게 몰표를 주었지만 백인들에게 머릿수가 밀려 남부 주 모두 레이건이 압승했다.[9]
- 헨리 잭슨 민주당원: 그를 지지하던 이들은 1972년 조지 맥거번에 반대해 헨리 잭슨을 대선 후보로 밀던 자유주의 매파들이다. 사실 헨리 잭슨은 1940년대부터 정계에 입문하고 워싱턴주에서 30년간 미국 상원의원을 지낸 민권, 환경보호, 위대한 사회를 지지한 "주류" 민주당원이긴 했지만 대외 정책은 초강경 매파 성향으로 레이건 임기 초기 잭슨과 레이건은 대외 정책관에서 서로 공통점이 많았다. 1976년 잭슨이 대선 경선에서 카터에게 지고 레이건이 새로이 신보수주의적 이념을 내세우며 보수의 아이콘으로 떠오르자 그를 지지하던 대다수의 신보수주의자들이 공화당으로 전향했지만 일부 민주당에 잔류한 이들도 있었다. 그러다 잭슨이 1983년 사망하자 민주당에 잔류했던 이들은 비둘기파 먼데일 대신 레이건을 지지하게 되었고 일부는 공화당에 입당했다. "헨리 잭슨 민주당원"들 중 많은 수가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네오콘으로 활동하게 된다. 레이건을 지지한 다른 매파성향 민주당원으로는 진 커크패트릭이 있다.[10]
- 중서부 블루칼라 노동자: 1984년 대선 기간 먼데일은 제럴딘 페라로를 최초의 거대양당 여성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DNC에저는 제시 잭슨이 "무지개 연합"(Rainbow Coalition) 연설을 했다. 흑인, 여성, 도시민, 사회적 약자 유권자 집단에 집중한 선거 전략은 그만큼 루즈벨트 이후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층이던 중서부 블루칼라 노동자들에게 소외감을 야기했다. 상당수의 백인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레이건에게 투표했고 먼데일은 홈스테이트인 미네소타에서만 0.2%p 차이로 간신히 승리했다.[11]
4. 유사 현상
4.1. 집단
미국의 주요 대선 교차투표 | |||||
연도 | 명칭 | 원 정당 | 지지 후보 정당 | 사유 | 주요 세력 |
1864 | 민주당 주전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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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전쟁 지지 | 찬전파 민주당원 | |
1884 | 머그웜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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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블레인의 부정부패 | 공화당 반부패주의 소장파[12] |
1896 | 금본위 민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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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본위제도 지지 | 일부 버번 민주당원 |
은본위 공화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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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본위제도 지지 | 서부 공화당원 | |
1912 | 루즈벨트 공화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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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분당 | 공화당 진보파 | |
1932 | 루즈벨트 공화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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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 | 공화당 진보파 |
1952 | 아이젠하워 민주당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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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레이 E. 스티븐슨의 리버럴 성향 | 남부 민주당원 일부[13] |
1964 | 네버 골드워터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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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 골드워터의 민권법 반대, 강경 보수 성향 | 록펠러 공화당원 일부[14] |
2008 | 매케인 민주당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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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의 진보 성향 | 일부 힐러리 지지자[15] |
2020 | 바이든 공화당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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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럼피즘 비토 | 반 트럼프 공화당원 일부[16] |
4.2. 지역
- 켄터키주 엘리엇 카운티(Elliott County)는 140년간 민주당 대선 후보에게 투표했지만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도널드 트럼프에게 70%의 몰표를 주었다. 2016년 기준 카운티의 민주당원은 4,581명, 공화당원은 429명이었다. # 2023년 켄터키 주지사 선거에서는 카운티에서 앤디 배쉬어 주지사가 7%p 차이로 승리했지만 4년 전인 2019년 주지사 선거에 비해서 득표율 차가 훨씬 줄었다.
- 오클라호마주는 2014년 이전까지 민주당원이 공화당원보다 많았지만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공화당 대선후보에게만 투표했고 앨 고어 이후 어떠한 민주당 대선후보도 오클라호마주에서 단 한 개의 카운티에서도 이기지 못했다. # 오클라호마 민주당은 2010년까지 상당수의 주 전체 선출직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2010년 미국 중간선거 이후로 몰락해버렸다.
- 웨스트버지니아주는 로버트 버드와 광산 노조 유권자들 덕분에 민주당 강세 지역이었지만 민주당의 환경주의 추구 때문에 공화당 강세 지역으로 변모했다. 대중주의[17] 성향의 주 민주당은 2014년까지 주의회를 차지했고 2016년 짐 저스티스를 주지사로 당선시켰지만 저스티스가 공화당에 입당하고 2020년 주 재무장관 존 퍼듀도 낙선하자 조 맨친이 웨스트버지니아 민주당이 차지한 유일한 주 전체 선출직이 되었다. 민주당의 당원 수 우위도 2021년에 역전되었다. # 조 맨친의 2024년 미국 상원의원 선거 불출마 선언으로 웨스트버지니아 민주당의 마지막 잔재도 사라졌다.
- 버몬트주는 1974년 중간선거 이전까지 민주당 상원의원이 없을 정도였지만 1964년 대선과 1974년 중간선거 패트릭 레이히의 당선을 시작으로 민주당세가 강화되어 지금은 미국에서 민주당 득표율이 가장 높은 주다.[18] 그럼에도 주 공화당은 필 스콧 주지사가 현직으로 재임 중이고 성향도 중도우파에 가깝다.
5. 같이 보기
- DINO
- 보수연합
- 버번 민주당
- 보수주의 민주당
- 남부 민주당원
- RINO
- 록펠러 공화당
- 교차투표
-
뮨파 - 광범위한 당원 수를 갖고 있는 미국의 양당과 달리 진성당원을 위주로 구성된 한국의 양당 특성상 양당의 정당원들은 거의 모두 자동적으로 자당의 후보를 지지해 왔다.[19] 그렇기 때문에 뮨파는
제20대 대통령 선거 당시
더불어민주당의 당원들 사이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한 조직적 운동으로서 한국에서 레이건 민주당원과 같은 사건의 첫번째 예시다.
Democrats for Yoon
[1]
프랑스계가 많은
루이지애나주 남부 지역은 제외되는데 이곳에서는 스미스가 더 표를 많이 받았다.
[2]
휴버트 험프리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조지 맥거번의
군축 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3]
물론
댄 무디 전 텍사스 주지사,
제임스 F. 번즈 전 국무장관같이 1960년, 1968년 대선에서 닉슨을 지지한 민주당 인사들도 있었다.
[4]
가장 본선 경쟁력이 떨어지는 후보였던 그를 민주당 대선후보로 올리기 위해 닉슨의 백악관도 개입했다.
[5]
결국 딥사우스 지역에서 닉슨은 압승했지만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빼고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들은 전부 낙선했다. 닉슨의 지원 거부도 있었지만 남부 공화당원들은
스트롬 서먼드를 제외하면 경력이 민주당 후보보다 부실해서 인물론적으로 밀렸다.
[6]
휴버트 험프리 본인도 선거일 밤 전화통화에서 급진적인 맥거번의 당선보다 국가의 안정을 위해 닉슨의 재선을 더 바랬다고 말했다.
#
[7]
닉슨이 이때 받은 득표율이 노조 유권자 사이에서 지금까지도 공화당 최대 득표율로 남아 있다.
[8]
Boll Weevil (
영어 위키백과). 당 주류 의견에 충성하기보다는 레이건 행정부의 정책에 더 협조한 민주당원들을 일컫는 멸칭이다. 대부분이 남부 보수 민주당원이었다. 대표적인 목화 바구미 민주당원으로는
필 그램이 있다. 필 그램을 포함한 일부는 공화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9]
구
남부연합 11개 주 중에서 먼데일이 전국 평균보다 득표율이 높았던 주는
테네시밖에 없었다.
[10]
이후 공화당으로 정당 전환
[11]
유사한 사례로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트럼프의
러스트 벨트 뒤집기가 있다.
[12]
대부분 혼혈파 소속
[13]
스트롬 서먼드,
제임스 F. 번즈,
앨런 시버스 등
[14]
윌리엄 스크랜턴,
스피로 애그뉴 등의 나머지 록펠러 공화당원들은 본선에서 마지못해 골드워터 지지
[15]
PUMA(People United Means Action),
조 리버먼(
2006년 중간선거 시점에 이미 민주당 탈당),
젤 밀러,
도널드 트럼프 등
[16]
빌 웰드,
존 케이식,
필 스콧 등
[17]
사회적으로는 보수적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다.
[18]
이는 사회주의자 정치인인
버니 샌더스가 주에서 가장 큰 도시인 벌링턴 시의 시장으로 1981년부터 1989년까지 재임한 영향도 있다. 당시 지지도도 높았고 평가도 좋았기 때문에 버몬트 주 전체에서 버니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게 되었고 결국 양당 중 버니와 성향이 가까운 민주당으로 주의 지지세가 옮겨간 것이다.
[19]
게다가 한국과 달리 미국은 '해당행위'라는 개념이 비교적 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