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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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Dharmanandi생몰연도 불명
오호십육국시대 서역의 승려. 토화라(吐火羅) 일대에 존재하던 서역 국가 중 하나인 도거륵국(兜擧勒國) 출신. 음역된 이름은 '담마난제(曇摩難提)'이고, 의역된 이름은 '법희(法喜)'이다.
2. 생애
나이에 비해 정신이 성숙하고 총명하여 7~8세 무렵부터 속세를 떠났고, 경전을 연구하고 암송한 끝에 정통할 수 있었다. 다르마난디는 불교의 삼장을 모두 암송하였고, 아함경부터 난경(難經)을 들은 뒤에 습득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후 조국을 떠나서 여러 나라를 유람하면서 부처의 도(道)를 전파하였다.건원 20년(384년), 전진의 도읍 장안에 도착했을 때는 다르마난디의 학업이 훌륭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진 상태였다. 전진의 천왕 부견은 이를 듣고 다르마난디를 세심히 살핀 다음 예를 갖추어 대접하였다.
건원 20년(384년) 8월, 무위(武威) 태수 조정이 천왕 부견에게 출가를 청했을 당시, 선비족 모용충이 군대를 이끌고 장안을 핍박하는 바람에 거부당했다. 이에 조정은 마침 장안에 있던 다르마난디에게 안공(安公) 등과 함께 부처의 도를 배우기를 청하였으며, 다르마난디는 그의 요청에 응하여 장안성 중심에서 승려들을 모아 아함경을 가르치고 비담(毗曇, 아비다르마) 등의 법도를 강의하였다. 이후 도안(道安), 축불념(竺佛念) 등과 더불어 중아함경, 증일아함경 등 106권을 번역하였다.
건초 6년(391년), 전진의 고제 부등과 세력을 다투던 요장이 다르마난디를 불렀지만, 다르마난디는 위험을 느껴 사양하고 서역으로 돌아갔다. 이후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