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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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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구
金鉉球
출생 1944년 12월 1일
전라북도 금산군
(現 충청남도 금산군)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역사학자, 대학교수
학력 고려대학교 ( 사학과)
와세다대학

1. 개요2. 행적
2.1. 박사학위 과정2.2. 미국 UCLA에서 객원교수 시절
3. 학계에서
3.1. 가야사 연구자들의 평가
4. 최재석 및 이덕일에게 임나일본부설 학자로 지적당하다.
4.1. 최재석 논문 심사 거부 사건
4.1.1. 최재석 연구의 학문적 문제
4.2. 이덕일의 인용 왜곡 사건
4.2.1. 왜에 대한 이덕일의 주장 겸 왜곡: "왜는 가라, 신라, 백제를 지배했고 고구려와 패권 경쟁"
4.3. 김현구 임나일본부학자설
5. 단행본
5.1.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002
5.1.1. 일본서기를 사료로 쓰는 이유5.1.2. 일본서기를 사료로 쓴 것 자체가 문제다?5.1.3. 임나일본부설의 369년~562년까지가 아니라 507년~562년을 분석했다?5.1.4. 일본서기를 김현구가 임의적으로 년도를 바꿔 끌어썼다?5.1.5. 책에서 김현구 교수가 보인 일본서기에 대한 태도
5.2.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2010
5.2.1. 식민사학자 쓰다 소우키치를 치켜세워?5.2.2. 김현구는 "왜보다 삼국-임나가 왜에 사신을 압도적으로 많이 보냈다"고 주장했다?5.2.3. 책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김현구 교수의 해석
6. 관련 문서

1. 개요

1944년 전라북도(현재는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였으며 동대학원에서 일본사를 전공하고 석사 학위[1]를 취득하였다. 1985년 와세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 행적

2.1. 박사학위 과정

김현구는 외국학생이 박사과정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용납이 되지않던'' 1981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 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해 미즈노 유(水野祐) 교수의 지도에서 4년 만인 1985년 야마토정권의 대외관계 연구’를 제출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현구 박사의 박사학위는 당시 일본 와세다대 대학원 문학연구과 1호 문학박사'''였다.[2]

김현구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5~6세기 백제와 야마토 정권이 특수한 용병관계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선진문물이 필요했기에 중국 남조(南朝) 정권과 활발히 교류했던 백제를 파트너로 삼아 군사원조를 제공하고 선진문물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귀국 후에는 본격적으로 임나일본부의 실체를 밝히는 연구를 하였다. ‘임나일본부연구’(일조각)와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전 3권·공저) 등의 학술책을 썼다. 또 김현구는 국내 일각의 일본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기 위해 대중역사책인 ‘김현구 교수의 일본이야기’(창비)를 썼다. 이 책은 10만 부 가까이 팔린 베스트셀러가 됐다.[3]

2.2. 미국 UCLA에서 객원교수 시절

김현구 교수는 미국 객원 교수 시절에 미국 사회책에 이런 구절을 봐 충격을 받았다.
UCLA에서 객원교수로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당시 초등학교에 다니던 남매를 데리고 갔다. 아이들의 학교에서 공부하는 사회책이라고 기억되는데, 아시아에 관한 부분에서 "고대에 일본이 임나를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임나 문제에 몰두했던 나는 그런 표현을 한두 번 접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의 초등학교에서 그런 내용을 가르친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책을 보내준 그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002, 창비, 50~51쪽
스에마쯔의 주장에 대해서 한국에서는 열악한 연구여건과 연구자의 부족으로 수십 년 동안 반론다운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그 사이 스에마쯔설은 전세계의 교과서에 실렸고, 고대부터 한국이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것처럼 알려지게 되었다.-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50~51쪽

이걸 깨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북한 역사학자 김석형이 스에마쯔설을 이미 반박했다는 걸 알게 된다.
김석형의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내 분국론'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뒤 학문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과거 한일합방의 역사적 근거를 찾기 위해서 임나 문제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했다는 반성을 하고 있던 일본 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 결과 근래에는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기 위해서 임나일본부라는 기구를 두었다'라고 말하는 학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임나 문제는 이미 끝이 났고 일본에서도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학자가 없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어 있다.-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53~54

다만 일본학계에서는 여전히 광개토대왕비문을 들며 간접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김현구 교수는 그런 임나일본부설의 흔적에 대해 연구를 했고 그렇게 나온 게 아래 책들이다.

3. 학계에서

3.1. 가야사 연구자들의 평가

백제 가야를 지배했다는 주장을 한 탓에 가야사 연구자들에게 비판받기도 하였다. 실제로 백제가 가야를 지배했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현재는 가야사 연구자들과 일본사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임나일본부설의 실체가 가야의 안라국을 위해 외교활동을 펼쳤던 이른바 안라왜신관이었다는 설도 있기에, 백제 가야지배설은 논란이 있다.

4. 최재석 및 이덕일에게 임나일본부설 학자로 지적당하다.

그러다 2014년에 이덕일이 쓴 '우리 안의 식민사관 해방되지 못한 역사'에서 임나일본부설 학자로 비판당하게 된다. 이덕일은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이라는 김현구"라며 김현구 임나일본부설 주장자로 몰아세웠다. 이 행위에 대해 김현구는 이덕일을 명예훼손으로 형사고소 해 맞섰지만 대법원에서 패소하였다.

4.1. 최재석 논문 심사 거부 사건

근원은 최재석 교수다. 최재석 교수는 그의 저서 '역경의 행운' 중, '한국사를 일본사에 예속시키고 일본서 학위를 얻은 김현구 씨의 학위논문 내용: 수십 년의 연구보다 학위를 더 알아주는 한국사회' 에서 '는 백제의 속국'이라는 논문을 썼는데 김현구 교수가 그것을 '심사평도 밝히지 않은 채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게재 불가라는 판정을 내렸다'고 주장했으며, '김현구가 부정확한 일본서기를 지나치게 추종하고, 일본이 백제가 경영한 땅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기사에 대해 시종 침묵을 지키는' 등을 했다고 주장하며 '일본 중심의 역사관'을 가졌다고 주장하였다. [4].

4.1.1. 최재석 연구의 학문적 문제

를 백제의 식민지로 볼 근거는 문헌으로나 고고학적으로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서기나 그 외에 유물, 유적을 보면 백제가 왜에 문화적으로 영향을 미친 근거는 있어도 그게 곧 정치적으로 백제가 왜를 지배했다는 근거는 아니다. 그런 논리라면 중국 쪽에서 유불도를 들여온 한국의 고대국가들도 식민지 라는 동북공정급 논리가 된다. 최재석 교수의 주장은 확대 해석의 여지가 있다.

왜가 백제의 식민지였다면 『삼국사기』에서는 뭐하러 백제가 왜에 왕자를 질(質)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가? 김현구 교수가 삼국사기같은 기본사료도 검증 안 했을까?

백제가 바다 건너 왜를 마음대로 움직일 정도로 강했다면 진작에 가야나 신라는 멸망시켰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라도 남부 일대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 조차도 동성왕~ 무령왕 대 즈음에야 확보했다. 모순 되는 것. 당시 왜가 소국이었다고 하더라도 바다 너머에 있었다. 이를 유지할 힘이 백제에게 있었다면 왜 굳이 영산강 유역을 영역화하는 것도 6세기 이후에야 달성했는지 모를 일.

그리고 왜는 오래전부터 중국과 교류를 했고 견수사와 견당사도 파견하기도 했다. 왜가 백제의 식민지였다면 이렇게 백제를 의식하지 않고 중국과 교류를 하는 것도 힘들고 무엇보다 중국 측이 왜가 백제의 식민지 내지는 지배당하는 나라였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중국 측의 기록에서조차 이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당연히 고대사를 전문으로 연구한 박사가 이런 걸 모를 리는 없다.

더욱 자세한 건 다음 서적을 참고하면 좋다.

그리고 최재석 교수는 삼국사기를 자기한테만 유리한 기록만 취사선택한다. 백제 신라가 동맹이였을 때 왜가 신라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백제의 직할령 식민지가 본국을 무시하고 공격했다는건가? 아니면 삼국사기에서 이런 부분만 믿을 수 없다는 건가? 삼국사기 직접 인용해보자.
(내해이사금) 13년(삼국사기 208) 봄 2월, 서쪽의 군읍(郡邑)을 두루 돌아보고 열흘이 되어서 돌아왔다.
여름 4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으므로 이벌찬 이음을 보내 병사를 거느려 막게 하였다.
十三年 春二月 西巡郡邑 浹旬而返 夏四月 倭人犯境 遣伊伐飡利音 將兵拒之
(조분이사금) 3년(삼국사기 232) 여름 4월, 왜인이 갑자기 쳐들어와 금성을 에워쌌다. 임금이 몸소 나가 싸우니 적이 흩어져 도망하였다. 날랜 기병을 보내어 그들을 추격하여 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三年, 夏四月, 倭人猝至圍金城. 王親出戰, 賊潰走. 遣輕騎追擊之, 殺獲一千餘級
(조분이사금) 4년(삼국사기 233) 여름 4월, 큰 바람이 불어 지붕의 기와를 날렸다.
5월, 왜의 병사가 동쪽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가을 7월, 이찬 우로가 왜인과 사도(沙道)에서 싸웠다.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배를 불태우니, 적들이 물에 뛰어들어 모두 죽었다.
四年 夏四月 大風飛屋瓦 五月 倭兵寇東邊 秋七月 伊飡于老與倭人戰沙道 乘風縱火焚舟 賊赴水死盡
(유례이사금) 4년(삼국사기 287) 여름 4월, 왜인이 일례부(一禮部)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는 백성 1천 명을 붙잡아갔다.
四年 夏四月 倭人襲一禮部 縱火燒之 虜人一千而去
(유례이사금) 6년(삼국사기 289) 여름 5월, 왜의 병사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있어, 배와 노를 수리하고 갑옷과 무기를 손질하였다.
六年 夏五月 聞倭兵至 理舟楫 繕甲兵
(유례이사금) 9년(삼국사기 292) 여름 6월, 왜의 병사가 사도성(沙道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일길찬 대곡(大谷)에게 명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고 지키도록 하였다.
가을 7월, 가뭄이 들었고, 메뚜기떼의 재해가 있었다.
九年 夏六月 倭兵攻陷沙道城 命一吉飡大谷 領兵救完之 秋七月 旱 蝗
(유례이사금) 12년(삼국사기 295) 봄,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왜인이 자주 우리의 성읍(城邑)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히 살 수가 없다. 나는 백제와 도모하여 일시에 바다를 건너 그 나라를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서불한 홍권이 대답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은 물에서의 싸움은 익숙하지 않은데,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까지 가서 정벌한다면 뜻하지 않은 위험이 있을까 걱정스럽습니다. 하물며 백제는 거짓이 많고 늘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또한 함께 도모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十二年春 王謂臣下曰 倭人屢犯我城邑 百姓不得安居 吾欲與百濟謀 一時浮海 入擊其國 如何舒弗邯弘權對曰 吾人不習水戰 冒險遠征 恐有不測之危 況百濟多詐 常有呑噬我國之心 亦恐難與同謀 王曰 善
(흘해이사금) 36년(삼국사기 345) 봄 정월, 강세(康世)를 이벌찬으로 삼았다.
2월, 왜왕이 글을 보내와 국교를 끊자고 하였다.
三十六年 春正月 拜康世爲伊伐飡 二月 倭王移書絶交
(흘해이사금) 37년(삼국사기 346), 왜의 병사가 갑자기 풍도(風島)에 이르러 변방의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또 진군하여 금성을 포위하고 급하게 공격하였다. 임금이 병사를 내어 싸우고자 하자 이벌찬 강세가 말하였다.
“적은 멀리서 왔습니다. 그들의 날카로운 기세를 당해낼 수가 없으면 공격을 늦추어 그 병사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
임금이 그렇다고 여겨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적들이 식량이 떨어져 물러가려 하니, 강세에게 명하여 날쌘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도록 하여 쫓아버렸다.
三十七年 倭兵猝至風島 抄掠邊戶 又進圍金城急攻 王欲出兵相戰 伊伐飡康世曰 賊遠至 其鋒不可當 不若緩之 待其師老 王然之 閉門不出 賊食盡將退 命康世率勁騎追擊 走之
(내물이사금) 9년(삼국사기 364) 여름 4월에 왜병(倭兵)이 대거 이르렀다. 왕이 이를 듣고 대적할 수 없을 것을 두려워하여,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서 토함산(吐含山) 아래에 나란히 세워두고, 용맹한 군사 1,000명을 부현(斧峴)의 동쪽 들판에 매복시켰다. 왜인(倭人)이 무리가 많음을 믿고 바로 나아가니, 매복한 군사가 일어나 불의에 공격하였다. 왜인이 대패하여 달아나자 추격하여 그들을 거의 다 죽였다.
九年, 夏四月, 倭兵大至,王聞之, 恐不可敵, 造草偶人數千. 衣衣持兵, 列立吐含山下, 伏勇士一千於斧峴東原. 倭人恃衆直進, 伏發擊其不意. 倭人大敗走, 追擊殺之幾盡
(내물이사금) 38년(삼국사기 393) 여름 5월, 왜인이 와서 금성(金城)을 포위하고 닷새 동안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지금 적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에 깊숙이 들어와 죽기로 기를 쓰고 있으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다.”
그리고 성문을 닫았다.
적이 아무 성과 없이 물러가자 임금이 용맹한 기병 2백 명을 먼저 보내 돌아가는 길을 막게 하고, 보병 1천 명을 또 보냈다. 독산(獨山)까지 따라가서 양쪽에서 도와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三十八年 夏五月 倭人來圍金城 五日不解 將士皆請出戰 王曰 今賊棄舟深入 在於死地 鋒不可當 乃閉城門 賊無功而退 王先遣勇騎二百 遮其歸路 又遣步卒一千 追於獨山 夾擊大敗之 殺獲甚衆
(실성이사금) 4년(삼국사기 405) 여름 4월, 왜의 병사들이 명활성(明活城)을 공격해왔다. 그들이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자, 임금이 기병을 이끌고 독산(獨山)의 남쪽 길목에서 요격하였고, 다시 싸워서 그들을 깨뜨리고 3백여 명을 죽였다.
四年 夏四月 倭兵來攻明活城 不克而歸 王率騎兵 要之獨山之南 再戰破之 殺獲三百餘級

신라 호구. "백제의 식민지"가 자기들을 공격하는데 정작 백제와 동맹을 맺는다.
군사적으로 맞지 않고 중국사료에 대한 기본 조사도 없고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삼국사기도 반대사실들을 완전 무시하는 등, 기본도 되어있지 않은 논문을 통과시켜줄 수 있을 리가 없다. 학술논문에서 학술적 이유는 당연히 첫 번째다.

이것에 대해 "김현구가 저런 학술적 이유로 거부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건 악마의 증명이다. 그리고 논문 심사거부의 타당성 여부는 학술적 이유에 따른 것이다. 해당 논문 개제 요청자의 학술적 문제점을 지적한 것으로도 "논문 거부의 타당성"은 충족된다. 악마의 증명을 할 이유가 없다.

[삼국사기는 삼국사기고 일본서기는 서기인가? 서기를 모두 일본서기로 바꾸었음]

4.2. 이덕일의 인용 왜곡 사건

후에 이덕일이 2014년, 만권당에서 낸 책에서 김현구를 임나일본부설학자로 다시 몰아세우게 되었다. 이후에도 계속 왜곡 행위를 했다.

이덕일은 미디어오늘에서 다음같이 인터뷰했다.
'그(김현구)의 저서에서 왜의 야마토정권이 보낸 호즈미노오미 오시야마(지방장관)가 영산강 동쪽까지 다스렸다고 밝혔다. 이는 백제왕실에서 파견한 것이 아니라 야마토에서 직접 파견한 인물(직접 왜와 교류관계에 있던 지방수장)이라는 것이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4813

그런데 실제 원문에선 이렇게 되어있다.
"그런데 호즈미노오미 오시야마가 지방장관으로 있던 차리(영산강 유역)는 전방후원형 고분이 발견되는 지역과 중복된다. 다시 말하면 전방후원형 고분이 발견되는 지역은 왜계 백제관료가 지방장관으로 배치된 지역 중에서 백제조정이 직접 장악하고 있던 지역이나 중앙에서 군을 파견하여 상주시키던 지역이 아니라 조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영산강 동안 차리의 지방장관으로 있던 호즈미노오미 오시야마야말로 ‘백제중추의 왕통이 아니라 직접 왜와 교류 관계가 있던 지방수장’이라는 성격에 맞는 인물이 아닐까 생각된다. 더욱이 호즈미노오미 오시야마가 최초로 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513년(케이타이천황 6년 4월조)으로 영산강 유역에 축조된 전방후원형 고분의 축조연대와도 잘 합치한다. 어느정도 독자성을 보유하고 있던 지역의 지방장관이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왜계 지방장관들과는 달리 백제와 왜의 색체를 띈 전방후원형 고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p.193쪽

지금 김현구 교수는 왜계 지방장관들을 말한 것이다. 왜계 백제관료가 지방장관으로 배치된 것 중 조정에서 비교적자유로운 지역이라는 것이다. 인용자체를 조작했다.

4.2.1. 왜에 대한 이덕일의 주장 겸 왜곡: "왜는 가라, 신라, 백제를 지배했고 고구려와 패권 경쟁"

오히려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이덕일이 했다. '''이덕일은 "한반도에 있었던 왜는 백제와 신라를 영향력 아래 두고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맞서 싸웠던 강력한 정치 집단"이었다가 고구려한테 밀려서 열도로 이주했다는 주장을 했다.

이덕일은, 원래 왜는 한반도 지역 국가이고 신라, 백제, 가라를 지배했는데 고구려한테 패권 경쟁에 패배해서 열도로 이주했다는 괴상한 주장을 한 적이 있고 이걸 대중교양서에 써서내기도 했다.
왜의 위치는 광개토대왕 비문의 기사에서도 큰 논란거리였다. 한일 양국 사이에 수십 년에 걸쳐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유명한 신묘년(광개토왕1년: 백제 진사왕 7년:신라 내물왕 36년: 391) 기사를 보자.
<왜가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와서 □□과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광개토대왕 비문, 신묘년 조>
왜가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바다를 건너와서'라는 구절이 문제가 되지만 광개토대왕 비문은 마모가 심해 해자와 도자의 자획히 분명치 않다는 문제 제기가 일찍부터 있어 왔다. 또한 바다를 건넌 주체 세력이 누구냐는 문제도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222~224)
그런데 왜가 이 무렵 신라를 공격한 기사는 삼국사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왕 38년(393)에는 "5월에 왜인이 금성을 에워싸 5일 동안 풀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장수가 나가서 싸우기를 청하자 내물왕은 "지금 적이 배를 버리고 깊이 들어와 사지에 있으므로 그 봉을 당하기 어렵다."하고. 이에 성문을 굳게 닫았는데, 왜군이 물러가자 왕이 기병과 보병을 보내 습격했다는 내용이다. 이 때는 문제의 신묘년 2년 후다.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왜가 백제와 신라를 공격했다고 기록한 이 무렵 삼국사기도 왜가 신라의 금성, 즉 서울을 포위하고 위협했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일본사 연구자들은 신묘년. 즉 4세기 후반 일본은 통일된 정권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4세기 후반에 일본열도에서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공격할 정도의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일본 학계의 연구 결과다. 이에 따르면 일본열도에는 현해탄을 건너 신라를 공격할 만한 능력을 가진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 광개토대왕 비문이나 삼국사기의 여러 기록들에 나오는 왜의 실체는 무엇일까?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더라도 왜는 한반도 정세에 여러 차례 현실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6년(397)에 "왕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 진지를 인질로 보냈는 기사내용과, 신라본기 실성왕 1년(402) 3월에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혼을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는 당시 왜가 백제와 신라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던 강력한 정치집단임을 보여주는 것이다.…한반도에 있었던 왜는 백제와 신라를 영향력 아래 두고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맞서싸웠던 강력한 정치집단이었다. -이덕일, 교양한국사1, 2005, 휴머니스트224~225
다음 해인 영락 10년(400)광개토대왕 비문 기사는 광개토대왕이 대규모의 군사를 보내 왜군을 물리쳤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기사는 내물왕의 지원 요청에 따라 광개토대왕이 5만의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침입한 왜군을 공격하는 내용이다. 고구려군에 쫓긴 왜군이 도망간 지역이 임나가라인 점은 임나일본부와 관련해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 당시 임나가라가 왜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음을 시사해 주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이 보낸 군사가 무려 5만에 달하는 것은 다소 과장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정도의 군사는 보내야 물리칠 수 있었던 강적이 왜였음을 말해준다.…… 고구려에 맞서 한반도의 패권을 다투던 왜국은, 이렇듯 광개토대왕 비문에 따르면 400년에 남하한 고구려군에 타격을 받은 후 진열을 재정비해 404년 고구려의 대방 지역을 선제 공격하다가 또 다시 패배를 당했다. 두 번의 걸친 패배로 왜국의 국력은 약화되지만 여전히 신라왕이 선왕의 아들을 인질로 보내야 할 정도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405년 삼국사기 신라본기 실성왕 4년조는 "왜병이 와서 명활성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매, 왕이 기병을 이끌고 독산 남 에서 이를 요격하여 두 번 싸워 파 하고 300여 성을 살획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고구려 대방 지역을 공격한 왜가 1년 후에는 다시 신라를 공격했던 것이다. 이런 모든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한반도에서 그 영향력이 약하되어 가던 왜는 5세기 경 일본열도로 이주를 시작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이 무렵부터 일본 나라 지역에 거대한 고분들이 조성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일본열도로 이주하던 왜는 500년 무렵 그 중심 세력의 대부분이 이주를 마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500년(신라 소지왕 22년) 3월 장봉진을 공격한 왜인을 끝으로 삼국사기는 왜인에 대한 기록을 하지 않고 있다. -이덕일, 교양한국사1, 2005, 휴머니스트 227~229

이덕일은 김석형 과 김현구등이 박살 낸 임나일본부설을 살렸을 뿐만 아니라 왜가 백제 신라까지 지배하며 고구려와 한반도 패권을 경쟁하다 밀리니깐 열도로 이주했다는 왜곡을 벌였다.


이덕일이 쓴 책인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끼에서 이런 지도가 쓰였다. 잘보면 남부쪽에 왜 라는 지역이 있다!

자세한 건 이덕일/비판문서 참고하자. 일본의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설'에서 내선일체스러운 사상까지 더해졌다. 내선일체에 영향받은 환단고기 위서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답다. 물론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설은 북한 학자 김석형과 한국 학자 김현구가 예전에 반박했다.'''

"왜가 가야, 백제, 신라 를 지배하고 고구려와 패권 경쟁을 했다"고 왜곡하는 인간이 "임나일본부설은 말이 안 된다"고 말한 학자를 임나일본부설로 몰고있다.

4.3. 김현구 임나일본부학자설

이덕일이 어떠한 문맥을 무시한 인용으로 왜곡했는지는 김현구 임나일본부학자설항목을 참고하자.

일부에선 일본유학 자체를 문제삼지만 일본유학은 민족시인 윤동주도 갔다. [5]

5. 단행본

5.1.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002

고대 한반도인들이 일본 열도에 끼쳤던 영향이나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평가 그리고 백제, 가야(倭) 사이에 있었던 문화적 교류, 천황가에 대한 자세한 소개 등을 담은 대중역사책이다.

백제, 가야, 신라에서 로 건너갔던 도래인들의 활약상과 일본에서 활동했던 기(紀)씨 일족이 실은 백제계 성씨이라는 것이나 7세기 당시 신라 김춘추의 일본 방문이 사실 당시 일본 내부의 세력 교체와 연관성이 있을 가능성, 백촌강 전투에서 일본 백제를 필사적으로 지원했던 이유는 나당연합군의 다음 목표가 일본 열도였을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라는 가설들이 들어있다.

5.1.1. 일본서기를 사료로 쓰는 이유

'사실 여부에 논란이 있는 일본서기를 주요 사서로 채택해 논리를 풀어나가며 교차검증 없이 풀어간다'는 왜곡하는 게 있는데 오히려 김현구는 일본서기에 왜곡이 있다고 분명히 책에 써넣었다.

일본서기 509년의 기록에 '일본현흡;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당시엔 " 일본"이란 말이 없었으니 이 기록은 조작이라고 반박했다.[6] 543년 일본서기 기록에도 일본부가 등장한다. 역시 김현구 교수는 후대의 조작이라고 설명했다. [7] 544년 기록에 등장해서 임나에 활동한 일본인들도 백제 성왕의 명을 따르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거로 써서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했다. -[8]

그리고 위서는 서지사항이 조작된 책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서기는 내용이 조작된 책이지, 서지사항이 조작된 책이 아니다. 따라서 일본서기는 위사이지만 위서는 아니다. 당시 무슨 맥락에서 왜곡된 것이지 연구가 가능하고, 김현구는 그 과정에서 타당한 것만 판단해서 추출하려고 한 것뿐이다.

애초에 특정 내용에 잘못된 게 있다고 사료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는 일제시절 식민학자들이 삼국사기 초기 내용을 부정할 때 쓰던 방법이다. 삼국사기 왕들은 툭하면 100세를 넘긴 게 흔하고[9] 사위와 장인의 연대차가 120년이 난다. 석탈해의 경우처럼 태어나기도 전에 활동한 기록까지 보인다. 왕의 수명이나 재위기간, 계보 등에 후대의 조작이 추측가능하다. 그래서 식민사관학자들과 초기 한국 학자들도 부정했으나 이기백부터 삼국사기초기기록 불신론을 거부하고 추출해서 쓰고 있다. 김현구 교수도 위에서 교차 검증하거나 말이 안 되는 부분은 거부하면서 인용했다.

예로 일본서기에는 백제 유민 계통의 도래인들이 남긴 백제의 사료를 대거 포함하고 있다. 이른바 " 백제삼서"가 바로 그 것.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이 태어난 연도를 전하고 있지 않으나, 일본서기에는 전하고 있다. 이건 무령왕릉 발굴 때에 나온 무령왕릉 지석 명문과 대조해볼때에 일치하면서 검증됐다. 《일본서기》에선 개로왕이 임신한 후궁(실제로는 곤지의 애첩)을 그의 동생 곤지에게 주어 일본으로 가게 했다 주장. 461년 규슈 쓰쿠시(筑紫)의 각라도(各羅島)에 도달할 즈음 갑자기 산기를 느껴 사내 아이를 출산하였는데 이가 백제 무령왕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후에 무령왕릉이 발견됐는데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지석에 따르면 462년 태어났다고 나온다. 일본서기와 무령왕릉의 생년 차이가 겨우 1년 정도이고, 이건 삼국사기에 없는 내용이다.

그리고 일본서기에는 한성도읍기 시대의 백제의 왕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들이 즉위하거나 사망한 시기가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되 딱부러지게 120년의 차이가 난다. 학계에서의 통설에서는 일본 측에서 기록을 정리하면서 고의적으로 연대를 2갑자 즉 120년으로 올린 것으로 보고 있다. 이건 따로 이주갑인상 문서로 정리되어 있다. 김현구 교수의 주장은 임의적으로 끌어다 쓴 게 아니라 이와 같은 통설을 따른 것이다.

일본서기엔 정치적인 목적의 왜곡은 있지만 그 외에는 진실도 담겨있다는 게 확인했다. 그래서 일본서기를 맠든 정권의 의도를 감안하고 비판적 검토를 한 것이다. 만약 사실 논란이 있다고 그 사료에만 있는 내용을 (비판적 감토인데도) 쓰는 게 문제면 삼국사기에만 있는 내용을 인용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5.1.2. 일본서기를 사료로 쓴 것 자체가 문제다?

김현구 임나일본부학자설참고

5.1.3. 임나일본부설의 369년~562년까지가 아니라 507년~562년을 분석했다?

218 ◯ 위를 보듯 김현구 교수는 369년도 분석했다. 다만 이전 나무위키 버전에 인용된 게 507~562년 일뿐이다. 나무위키에 인용 된 내용이 김현구 교수 책의 전부라고 착각한 것이다.
219 ◯ 그리고 또한 임나일본부설 반박에서 509년 이후 기록은 중요하다. 왜냐면 일본학자들은 "확실한 증거"로 509년 기록을 들기 때문이다. 책에서도 "일본이 임나에 직할령을 두고 임나를 지배했다는 확실한 증거로 제시하는 것이 일본서기 509년 기록[10] 김현구 교수는, 일본학자들이 "확실한 증거"라 주장한 것을 반박하고 논파한 것인데, 이런 걸 문제거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5.1.4. 일본서기를 김현구가 임의적으로 년도를 바꿔 끌어썼다?

이런 주장이 존재한다.
일본서기 임나 관련 최초의 사건인 징구우황후(신공왕후,神功皇后)의 가야 7국 정벌은 신공왕후가 일본서기에 약 170~269년을 살았던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 비추어 성립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김현구는 이것을 갑자년 계산을 통해 임의적으로 끌어올려 369년에 벌어진 실제 사건으로 만든 후, 다만 백제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백제가 가야7국을 정벌한 일이 있다는 주장인데, 물론 그 근거는 역시 일본서기 뿐이다. 이후의 임나 관련 사건들도 근거는 일본서기뿐으로, 그 주체만 김현구의 임의적 해석에 의해 백제로 바뀔 뿐, 실제 벌어졌던 사건이 되고 만다. 결론적으로 김현구의 일본서기에 대한 태도는 '일본서기가 사실이라도'가 아니라 '일본서기를 어떡해서라도 사실로'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김현구 교수가 했던 년도 수정은 임의적이 아니다.

예로 일본서기에서 진구 황후가 했다고 설명된 업적은, 실제로는 근초고왕이 일구어 낸 업적을 조작했다는 건 이미 예전에 드러났다 근초고왕이 이룬 삼한정벌을 왜의 가상인물, 진구 황후가 했다고 조작을 한 것이다. 또한 년도 자체도 학계에서 통용되는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한성도읍기 시대의 백제의 왕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들이 즉위하거나 사망한 시기가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되 딱부러지게 120년의 차이가 난다. 학계에서의 통설에서는 일본 측에서 기록을 정리하면서 고의적으로 연대를 2갑자 즉 120년으로 올린 것으로 보고 있다. 김현구가 아무 검증없이 임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물론 백제의 가야7국정벌도 학계에서 비판받긴한데, 비판 받는 게 곧 임나일본부설이나 일본 우익사관이 되진 않는다.

이것이 원문이다.
일본이 임나를 중심으로 백제와 신라까지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출발점이 되는 기사가 『일본서기』369년의 기록이다. 『백제기』를 원용한 369년 기록……이 기록의 요지는 일본이 신라를 격파하고, 가야7국을 평정한 다음 침미다례(강진)를 취해서 백제에게 주자, 백제왕이 영원히 일본의 서번이 될 것을 맹세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은 일본이 임나(가야)지역을 중심으로 신라 백제까지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중에서도 이때부터 200년 가까이 지배하게 되었다는 가야7국에 대한 평정이 임나 문제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가야7국을 평정한 중심인물인 목라근자가 분주에는 백제의 장군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분주에서는 목라근자의 성을 알 수 없다고 했으나, 당시 백제에는 목(木)이라는 유력한 성씨가 존재했고 일본에는 '목(木)'이나 '목라(木羅)'라는 성씨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가야7국을 평정한 중심인물인 목라근자는 백제 장군이 분명하다. 가야7국을 정벌한 작전을 보면, 탁순, 즉 대구에서 시작하여 가야7국을 평정하면서 한반도의 남해안을 서진한 백제장군 목라근자와 백제의 수도 한성에서 서남쪽을 향하여 남하한 근초고왕과 왕자 귀수의 군대가 고해진(강진)에서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결과 양군에 둘러싸인 형태가 된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 등 구 마한 지역이 자연히 항복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목라근자와 근초고왕이 중심이 된 이 작전은 전체적으로 구 마한지역에 대한 백제의 작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야7국을 평정한 주체가 일본이라면 작전은 일본에서 도착하는 한반도의 남해안에서 개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목라근자가 중심이 되어서 진행한 작전은 내륙인 대구에서 출발하고 있다. 대구는 백제가 가야7국을 평정하는 집겹지는 될 수 있지만, 왜군이 가야7국을 평정하는 집결지는 될 수 없는 곳이다. 또 가야7국 평정의 주체가 일본이 아니고 백제라는 사실은 목라근자 등이 "남만 침미다례"를 취해서 백제에게 주었다는 표현으로도 알 수 있다."남만 침미다례"에서 '남만'은 '침미다례'의 방향을 표시하는 말인데, 침미다례는 백제의 입장에서 본 다면 '남만'이 되지만,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 '서만'이 된다. 이로써 침미다례나 가야7국을 평정한 주체는 백제였음을 알 수 있다. '남만'이라는 표현은 가야7국 평정의 주체를 일본으로 바꿔 쓰면서 부주의로 남겨놓은 하느님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역사를 완벽하게 날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근초고왕 때 가야7국을 평정한 나라가 일본이 아닌 백제라는 증거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일본서기』541년 4월 기록에는 "백제 성명왕이 '옛적에 우리 선조 속고왕(근초고왕), 귀수왕(근구수왕) 치세 때에 안라 가라 탁순의 한기(왕과 같은 존재) 등이 처음 사신을 보내 상통하여 친밀하게 친교를 맺었다. 자제의 나라가 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기록에도 "성명왕이 임나에게 이르기를 '옛적에 우리 선조 속고왕, 귀수왕이 당시 임나의 한기 등과 처음으로 화친을 맺고 형제가 되었다. 이에 나는 그대를 자제로 알고, 그대는 나를 부형으로 알았다. 같이 천황을 섬겨 강적에게 항거하였다[11]"라고 되어 있다. 또 554년 11월 기록에도 '"성명왕이 '임나와 우리 백제는 옛부터 이제까지 자제같이 되겠다고 약속하였다'"라는 541년 기록과 대동소이한 내용이 실려 있다. 근초고왕 때부터는 백제가 가야제국과 부자관계 내지는 형제관계를 맺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369년 기록에 의하면 목라근자가 근초고왕과 합동작전을 펼쳐 가야 7국을 평정한다. 따라서 369년, 즉 근초고왕 때 가야7국을 평정한 주체는 일본이 아니라 백제임을 알 수 있다.……일본 학자들은 가야7국을 평정한 일본이 가야와 맺은 관계를 더욱 돈독히한 사건으로서 『일본서기』382년 기록을 든다.…… 이 기록의 핵심은 신라를 치러 갔던 사지비궤가 신라를 치지 않고 도리어 대가야를 치자 가야왕과 그 일족은 백제로 도망갔다. 그리고 가야왕이 그 누이동생을 시켜서 일본에게 구원을 청하자 일본 천황이 목라근자를 보내서 사직을 부활시켜줬다는 내용이다. 382년 기록에서 대가야를 구원한 사람은 백제 장군인 목라근자로 되어있다. 지리적으로도 백제는 대가야와 국경을 접고 있어서 바로 구원을 나설 수 있지만, 일본이 내륙에 있는 대가야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너와서도 한반도 남쪽 지역들을 뛰어넘어야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입장이었다. 더구나 가야왕과 그 일족이 백제에 피난해 있으면서 일본에 구원을 청했다는 이야기도 말이 안된다. 그리고 근초고왕 이래 가야와 관계를 맺고 있던 나라도 일본이 아니고 백제였다. 그렇다면 이때 가야를 구원한 나라도 일본이 아니고 백제가 되어야 한다.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002, 창비, 56~61쪽

보면 알겠지만 이건 임나일본부설을 직접적으로 부정하는 내용이다. 오히려 " 하느님 선물" 이라는 종교적 표현을 쓰면서까지 "역사를 완벽하게 날조할 수는 없었던 것"이라고 감정적으로 다행이라 느끼는 문장까지 있을 정도다. 백제의 가야정벌설 자체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그 비판이 임나일본부설과는 무관하다.[12]

5.1.5. 책에서 김현구 교수가 보인 일본서기에 대한 태도

나는 우선 <일본서기>를 근거로 일본과 한반도 각국의 교류에 대해 조사했다. <일본서기>에서 임나 문제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기를 조사해보니 백제에서는 동성왕(東城王, 재위 479~501)과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23) 시기이고, 일본에서는 케이따이천황(經體天皇, 재위 507~31)이 즉위한 때부터 시작해서 킴메이천황(欽明天皇, 재위 540~71) 20년(559)까지의 50여 년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은 중국과 사신을 교한한 흔적이 전혀 없다. 고구려, 백제, 신라와는 양국이 각각 한 번씩 사신을 보내지만 일본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임나와 교류한 것에 관해서는 임나가 다섯 번 사신을 보냈지만 두 번은 백제의 사신에 딸려서 보낸 것이고, 한 번은 신뢰하기 어려운 것으로 결국 확실한 것은 두 번뿐이었다. 일본에서는 임나에 두 번 사신이 온 것으로 되어 있으나 다 인정하기 어려운 것들 뿐이다. 52년 동안 일본은 중국이나 고구려, 신라, 임나와는 거의 공식적인 교류를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같은 기간에 백제와 일본 사이에는 백제가 스물세 번이나 사신을 파견했고, 일본도 열네 번이나 사신을 보내왔다. 백제가 파견한 스물세 번의 사신 중에서 그 목적이 분명했던 것은 여덟 번인데 전부 군원(軍援)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백제가 군원을 요청한 것에 대해서 일본은 아홉 번 군원을 제공한다. 일본의 군원에 대해서 백제는 전후 아홉 번에 걸쳐서 오경박사(五經博士) 등의 전문가와 유교나 불교 관계 등의 선진문물을 보냈다.

<일본서기>를 조사해보면 일본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기간에 일본은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임나와는 거의 공식적인 관계가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일본서기>를 근거로 일본이 임나를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일본 학자들은 <일본서기>를 근거로 일본이 임나를 지배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일본서기>의 내용 중에 외국과 교류한 것을 근거로 하면 임나일본부설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콜롬버스가 달걀을 세운 것보다도 쉬운 일이었던 것이다. 일본이 임나와 공식적인 관계가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상 일본이 임나를 지배했다는 증거로 제시되었던 내용들은 전면적으로 재검토되지 않으면 안된다.

김현구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1) 근거 없는 '가야 사신 파견설'은 완전 부정하고 있다.
2) 오히려 일본서기만 검토해도 임나일본부설은 있을 수가 없다는 걸 입증할 수 있다.
3) 일본서기에서 왜곡된 임나일본부설을 버리고 재검토하자
일본이 임나에 직할령을 두고 임나를 지배했다는 확실한 증거로 제시하는것이 일본서기 509년 기록이다. 509년 기록의 "사자를 백제에 보냈다. 임나의 일본(日本)현읍에 있는 백제의 백성 중 도망해온 자와 호적이 끊어진 지 3~4대 되는 자들을 찾아내 백제로 옮겨 호적에 올리게 하였다"라는 내용을 근거로 임나에 있는 '일본현읍'이라는 곳은 '일본'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일본의 직할령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일본현읍'은 일본이 임나 내지는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좋은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日本)이라는 명칭은 7세기에 생겨난 말로 '일본현읍'이라는 표현이 보이는 509년에는 '일본현읍' 중의 '일본'이라는 표현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일본서기에 보이는 '일본현읍'의 정확한 표현은 '○○현읍'으로 그 주으이 '일본'이라는 단어는 720년에 일본서기를 편찬하면서 집어넣은 셈이 된다. 따라서 509년 기록의 '일본현읍'이라는 표현을 근거로 해서 509년에 일본이 임나에 직할령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002, 창비, 70~71쪽

여기서 김현구는 분명하게 509년의 기록에 "사자(使者)를 백제에 보냈다. 임나의 일본현읍(日本縣邑)에 있는 백제의 백성 중 도망해온 자와 호적이 끊어진 지 3~4대 되는 자들을 찾아내 백제로 옮겨 호적에 올리게 하였다"는 기록은 후대에 일본이 지어낸 주작이라고말했다.
543년 기록에 일본 천황이 "쯔모리노무라지를 보내어 백제에 이르기를 '임나의 하한에 있는, 백제의 군령, 성주를 일본부에 귀속하라'라고 하였다"는 내용을 근거로 '일본부'는 '일본'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일본의 기구가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일본부'가 일본의 기구가 분명하다면 그것은 일본이 임나를 지배하기 위해서 설치한 기구가 분명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일보눕'라는 기록이야말로 일본이 임나를 지배한 확실한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읍'과 같은 이유로 당시 '일본부'의 정확한 표현은 '○○부'로 '일본부' 중의 '일본'이라는 표현은 720년 일본서기를 편찬할 때에 집어넣은 셈이 된다. 그러므로 543년 기사에 나오는 '일본부'의 '일본'이라는 표현을 근거로 해서 543년에 일본이 임나를 지배하기 위한 기구를 설치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002, 창비, 71~72쪽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543년 기록에 일본 덴노가 "쯔모리노무라지(津守連)를 보내어 백제에 이르기를 '임나의 하한(下韓)에 있는, 백제의 군령, 성주를 일본부(日本府)에 귀속하라'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있는데 720년에 벌인 주작이라고 말했다.

5.2.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2010

임나일본부설 자체를 주제로 했다. 해당 설을 반박하고, 이런 주장이 어떤 과정에서 탄생했는가를 심도있게 고찰하고 파악하고 있다. 예로 일본서기의 기록에 보이는 임나의 경영의 주체는 실상은 백제였고, 왜와 백제가 맺은 관계의 실체는 야마또 정권과 문물 교류를 담보로 일종의 군사적 동맹 내지는 용병관계를 맺은 것이라는 주장이 담겨 있다.

해당 주장을 위해 김현구는 일본 우익들의 생각이 투영된 후쇼사 발행 일본 역사 교과서의 가야=임나 관(觀), 비정 지도를 그대로 차용했다. 애초에 이 책은 일본 우익 측 자료로 따져도 임나일본부설이 성립이 되지 않는 다는 걸 지적한 책'이다.

덧붙여 김현구는 김해 지역으로 임나일본부를 비정한 일제 식민사학자 '쯔다 소오키치'를 '일본 근대 사학의 아버지'라 했는데 이걸 추켜세운 것이라 왜곡하는 경우도 있다.[13]

그리고 책에서는 " 일본서기에 씌어진 내용으로 한정해서 논의해도 임나일본부설은 말이 안 된다."고 했는데 이걸 이덕일은 "김현구가 그걸 사실이라 주장한 것"으로 왜곡하기도 했다.

김현구 교수는 일본서기의 내용을 검토해보면서 '이런 내용이 있다'는 걸 소개했다.
"일본서기의 507년에서 562년 사이의 기록 가운데 야마토 정권과 한반도 각국의 인적˙물적 교류를 조사해보면 신라·고구려와는 각각 왕복 2회의 교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교류 내역을 보면 야마토 정권은 신라나 고구려에서 전혀 사자를 파견하지 않은 반면 신라와 고구려는 각각 2회씩 야마토 정권에 사자를 파견했다. 임나와는 왕복 8회의 교류가 있었는데 그중 야마토 정권은 3회에 걸쳐 임나에 사자를 파견한 반면 임나는 5화에 걸쳐 야마토 정권에 사자를 파견한 것으로 씌어 있다."-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p.131

마지막 문장을 보자. 분명히 씌어있다고 나온다. '사료가 맞는다'는 것이 아니라 '사료 내용은 이렇다'고 소개했다. 그런데 이덕일은 이걸 또 이렇게 인용을 왜곡했다.
김현구는 야마토 정권의 시각으로 고구려, 백제 및 임나를 본다. 야마토 정권은 신라, 고구려에 사신을 전혀 파견하지 않은 반면 신라, 고구려는 사자를 파견했다는 것은 무슨 논리인가. 야마타 정권이 신라, 고구려로부터 조공을 받는 상국이란 뜻이다. - 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p. 342
"씌어있다"는 문장을 읽지 못한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알 수 없다.

또한 이덕일은 여기서 김현구 교수가 말한 파견횟수를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김현구 교수는 야마토 정권이 신라, 고구려한테 조공을 받는 상국이라 말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인용 날조다. 위에서는 분명 상국이 아니라 교류라 말하고 있다. 거기다 다음 내용을 보자.
"야마또정권과 신라나 고구려의 교류는 각각 왕복 2회에 그쳤고, 임나와의 교류도 왕복 8회에 그친 반면 백제와는 왕복 39회에 이르고 있어 큰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백제와의 교류는 그 내용도 대부분 우호적인 관계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스에마쯔가 근거로 삼는 『일본서기』에 의하는 한 적어도 야마또 정권이 임나를 근거지로 백제와 신라를 간접 지배했다는 설은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p.133

해당 문장을 보면 알겠지만 김현구 교수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 일본서기를 기준으로 따져도 임나일본부설 세력의 주장은 틀렸다'고 말한 것이다.

이건 여기서도 드러난다.
"야마또 정권은 임나에 대한 의사를 전부 백제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 그 내용의 사실성 여부는 차치하고 『일본서기』에 임나 문제에 대해 야마또정권은 단순히 백제를 지원하는 위치에 지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p. 136
사실성 여부는 차지하고라고 분명히 쓰여있다. 일본서기에 한정해도 임나일본부설이 틀리다는 거지, 일본서기 자체가 맞는다는 게 아니다.

자세한 건 김현구 임나일본부학자설, 2.2. 김현구 교수의 주장 날조 참고

5.2.1. 식민사학자 쓰다 소우키치를 치켜세워?

"...그들이 한반도에 온 목적과는 전혀 다른 작전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아라따와께, 카가와께) 가공의 인물이라는 점은 '일본 근대사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쯔다 소오끼찌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반면에 목라근자는 이때 평정한 것으로 되어 있는 가야7국..."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P48-

해당문장은 "해당 일본역사학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도 그렇게 지적했다"고 설명한 것이며 추켜세운 내용은 없다.

객관으로 보면, 일본의 반박을 하면서 일본인의 영향력 있는 인물을 인용을 같이한 행동이다. 그러니깐 "일본의 주장의 근거가, 일본 내부의 주장하고도 반대된다."는 뜻이다. 한국인의 주장을 반박하려고 "위용"을 들먹인 게 아니라, 일본인의 주장을 반박하려고 "위용"을 내세운 것이다.

또한 여기에다 "식민사학의 수괴"라 써야하는데 그렇게 쓰지않았다는 이유로 치켜세운 것이라 하는데 마치 북한인물 말할 때 "북괴라 안 하면 종북"이라는 논리와 다를 게 없다. 논리적 오류다.

5.2.2. 김현구는 "왜보다 삼국-임나가 왜에 사신을 압도적으로 많이 보냈다"고 주장했다?

1. 왜 임나일본부설의 369년~562년까지가 아니라 507년~562년을 분석했는지는 차치하고,
2. 또 저 통계가 각 국가간의 모든 사신, 교류 왕래를 빠지지 않고 모두 기록한 것인지도 차치하고,
3. 더해 일본서기가 (특히 외교 부분에 있어) 신뢰성 있는 자료인지도 차치하고,
4. 교류 횟수가 누가 누구를 지배하거나 지배하지 않는 근거로 쓰이는 것이 타당하다고 전제하고......
분석해 보면, 동시에 항상 삼국-임나가 왜에 보낸 사신이 압도적으로 많게 나타나 마치 삼국-임나가 왜의 하대국으로 해석된다는 것은 생각하기 싫었나 보다.

그러나 김현구 교수는 그런 주장한 적이 없다.
실제 책에서 교류 이유를 언급한 이유는 이렇다.
일본서기를 조사해보면 일본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기간에 일본은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임나와는 거의 공식적인 관계가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일본서기를 근거로 일본이 임나를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일본 학자들은 일본서기를 근거로 일본이 임나를 지배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002, 창비, 55~56쪽
한반도 각국과 일본의 사절 교환(507~562년)
일본에 보낸 사절 일본이 보낸 사절
백제 25 15
임나 5 3
신라 2 0
고구려 2 0
중국 0 0
이런 표를 만들었으니 "그렇게 주장한 것이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보면 저 표는 "일본서기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지 "저 표가 팩트다"는 뜻이 아니다.

김현구 교수는 일본서기의 내용을 검토해보면서 '이런 내용이 있다'는 걸 소개했다.
"일본서기의 507년에서 562년 사이의 기록 가운데 야마토 정권과 한반도 각국의 인적˙물적 교류를 조사해보면 신라·고구려와는 각각 왕복 2회의 교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교류 내역을 보면 야마토 정권은 신라나 고구려에서 전혀 사자를 파견하지 않은 반면 신라와 고구려는 각각 2회씩 야마토 정권에 사자를 파견했다. 임나와는 왕복 8회의 교류가 있었는데 그중 야마토 정권은 3회에 걸쳐 임나에 사자를 파견한 반면 임나는 5화에 걸쳐 야마토 정권에 사자를 파견한 것으로 씌어 있다."-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p.131
마지막 문장을 보자. 분명히 씌어있다고 나온다. '사료가 맞는다'는 것이 아니라 '사료 내용은 이렇다'고 소개했다.
"야마또정권과 신라나 고구려의 교류는 각각 왕복 2회에 그쳤고, 임나와의 교류도 왕복 8회에 그친 반면 백제와는 왕복 39회에 이르고 있어 큰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백제와의 교류는 그 내용도 대부분 우호적인 관계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스에마쯔가 근거로 삼는 『일본서기』에 의하는 한 적어도 야마또 정권이 임나를 근거지로 백제와 신라를 간접 지배했다는 설은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p.133

해당 문장을 보면 알겠지만 김현구 교수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 일본서기를 기준으로 따져도 임나일본부설 세력의 주장은 틀렸다'고 말한 것이다.

일본서기의 교류 내용이 팩트라는 게 아니라, "일본서기에 근거해도 임나일본부설은 성립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문맥을 무시한 인용을 해서 마치 김현구 교수가 저 교류내용이 사실이라고 한 것처럼 주장한 것이다.

5.2.3. 책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김현구 교수의 해석

목라근자(木羅近資)가 369년 가야 7국을 평정하고 382년 임나(고령가야, 대가야)를 구원함으로써 백제의 임나경영이 시작되었다. 그후 백제의 임나경영은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木滿致)를 비롯하여 목군 유비기(木君有非岐), 목군 윤귀(木君尹貴) 등 주로 목씨 일족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임나경영의 토대를 만든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가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수도 한성이 함락되자 구원을 청하러 도일했다가 '소가(蘇我)'에 정착하게 된다. 그가 바로 100여년간 야마또정권의 실권을 장악했던 소가씨의 조상 소가만지(蘇我滿智)이다.[14]
그런데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자 일본과 신라 간에는 대립이 심화되고 일본에서는 한반도 각국을 일본에 조공을 바치던 나라로 취급하는 번국(藩國) 사상이 유행하게 된다. 따라서 소가만지의 자손들은 자기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조상인 소가만지가 원래부터 왜인이었음을 주장하게 된다. 그 결과 각 씨족들이 제출된 자료를 근거로 『일본서기』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소가만지의 부(父) 목라근자를 비롯한 목씨 일족들이 백제의 장군으로서 수행한 임나경영이 일본천황의 명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처럼 되어버린 것이다[15]

책에선 일본정권이 정권을 위해 조작했다고 쓰여있다.

6. 관련 문서


[1] 석사 학위 논문 : 大和政權의 對'日本進出韓人'政策考 : 7세기를 中心으로 [2] 출처는 아래 주석으로 달린 관련기사에 있다. [3] 관련기사 [4] 해당 내용은 이덕일이 쓴 '우리 안의 식민사관 해방되지 못한 역사, 그들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했는가'에서 '김현구에게 수모당한 최재석'부분 참고 [5] 한국대학에서 명예교수 자리에 오른 김현구와, 평생 항일 정신으로 무장한 삶을 살다가 자기 돈으로 공부를 했고, 일제의 탄압에 목숨을 잃은 윤동주 시인과 똑같다는 게 아니라 일본유학 자체에 문제거는 논리에 반박하는 문장이다. 이처럼 외국유학을 통해 학위를 받는 경우 유학 자체가 문제가 아니더라도, 학위 취득을 좌우하는 외국인 지도교수나 해당 외국 학계의 풍토가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물론 자신의 교육환경의 한계를 극복함에 있어서 개인적 편차는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국내파 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6]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002, 71쪽 [7]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002, 72쪽 [8]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002, 73~74쪽 [9] 장수왕이 왜 장수왕일까? 논리적으로 보면 그 정도로 나이먹는 게 매우 특별한 것이라서 그렇게 지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게 타당하다. [10]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002, 창비, 70쪽 [11] 이 인용문에는 천황이라고 말했다고 되어있는데 당연히 김현구 교수는 이게 실제라고 말한 적 없다. 오히려 밑에서 도움을 청했다는 내용이 조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12] 이건 6.25 전쟁연구에 오류가 있었다고 다 종북으로 모는 논리와 다를 게 없다. [13] '일본 근대 사학'의 아버지지 김현구 쪽의 아버지라 한 적 없는데? 학술적으로 보면 저건 특정 학자가 특정 국가의 역사학에 끼친 영향에 대한 분석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특정 국가의 아버지라고 할 만큼 영향 끼쳤다는 것과 치켜세우는 게 무슨 상관인가? [14]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창비, 2010, 197쪽 [15]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창비, 2010, 197~1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