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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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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택
金裕宅
<colbgcolor=#e20e0e> 출생 1963년 10월 10일 ([age(1963-10-10)]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신장 197cm[1] 체중 86kg
직업 농구 선수 ( 센터 / 은퇴)
농구 감독
농구 해설자
학력 서울삼광초등학교 (졸업)
명지중학교 (졸업)
명지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 체육교육학 / 학사)
종교 불교
본관 청풍 김씨 (淸風 金氏)
실업 입단 1987년 기아자동차 농구단
현역 시절 등번호 14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 영구 결번)
소속 <colbgcolor=#e20e0e> 선수 기아자동차 농구단-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1987~2000)
코치 부산 기아-울산 모비스 오토몬스 (2001)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2008~2009)
대구 오리온스 (2009~2011)
감독 명지고등학교 농구부 (2002~2005)
중앙대학교 농구부 (2011~2014)
해설 파일:attachment/xports.jpg (2005~2008)
파일:SPOTV 로고.svg (2015~2016, 2019~2021)
가족 관계 아들 최진수[2], 김진영

1. 개요2. 선수 생활3. 플레이 스타일4. 국제 대회에서의 김유택5. 은퇴 이후6. 논란 및 사건사고
6.1. 폭행 논란6.2. 음주운전 논란
7. 기타
7.1. 최진수와의 관계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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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농구인.

1980년대 대한민국 대표하는 센터로 영리한 플레이와 기술로 기아자동차 농구단의 전성 시대를 이끈 주역이었다.

2. 선수 생활

어렸을 때부터 홀어머니 아래에서 성장해 농구라는 것은 잘 모르고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중학교 3학년 때 비로소 농구에 입문하게 되었다. 키는 컸지만 마른 체격에 농구도 갓 입문한 선수를 받아준 학교는 선수가 부족한 신생 구단. 창단한 지 3년 밖에 되지 않은 명지고에서 김유택을 받아주면서 농구 선수로서의 경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

집안이 어려웠기 때문에 농구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기량이 빠르게 늘어 3학년 졸업 무렵에는 고교에서 제일 가는 센터 자원으로 성장했다. 명지고 1학년 때부터 그를 눈독 들이던 중앙대학교의 정봉섭 감독이 잽싸게 스카우트하면서 1983년 중앙대로 진학했고, 1년 먼저 진학한 한기범과 함께 중앙대 전성 시대의 문을 열었다. 이 두 선수로 5관왕을 차지하면서 중앙대는 최고로 군림하기 시작했고, 후배인 허재(1984), 강동희(1986)가 들어오면서 아예 농구대잔치에서 실업팀에게까지 도전장을 내밀게 되었다.

1987년 졸업 후, 새로 생긴 기아자동차에 들어가서 중앙대 시절 함께 한 동료들과 호흡을 맞추며 기아자동차의 농구대잔치 5연패 및 7번의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 한기범과 함께 골밑을 지키면서 국내 사상 최초의 더블 포스트, 고공 농구를 선보였고, 허재, 강동희와 함께 일명 허동택 트리오로 불리는 가공할 만한 조합을 이뤄 한 시대를 풍미했다. 물론 너무 강하다보니까 나태한 모습도 종종 보이기도 했지만, 고비 때는 또 팀의 가장 맏형이기도 했기 때문에 팀을 다잡는 역할도 했다. 딱 한 번 하술할 1989년에 있던 불미스러운 일 빼놓고 말이다. 대표적으로 1995-96 농구대잔치를 앞두고 기아도 한 물 갔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후배들과 함께 로(...) 의기투합하면서 손가락에 바늘을 찔러 혈서도 쓰는 등 분위기를 다 잡은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 때문에 1995-96 농구대잔치에서 기아가 우승하자, 그 해 농구대잔치 MVP에 올랐다.

농구대잔치에서 통산 4,000득점과 2,500리바운드를 돌파하며 아마 무대에서는 정말 그의 선수 생활 막바지에 등장한 서장훈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적수가 없을 정도의 기량을 뽐냈다. 하지만 프로농구로 전환한 후에는 아무래도 나이도 30대 중반으로 접어들었고, 더 좋은 기량의 외국인 선수들이 영입되면서 그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식스 맨으로 바뀌었다. 이미 농구대잔치 막바지의 기아 전성기의 주역은 허택이 아니라 김유택 대신에 김영만이 들어와 허만으로 변신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래도 기량은 어디 안 가서 짧게 나와도 자기 역할은 충실히 다 했다. 프로농구 원년 시즌에는 용병에 밀려 잠시 주춤하였으나 힘으로 하는 용병과 다르게 국내선수의 노련미와 기술을 따라올 수 없었다. 용병에게 의지하다가 막판 우승은 허택 트리오의 노련미로 우승을 일궈낼 정도로 말이다. 원년 식스 맨 상의 주인공이기도 하고, 노련미를 바탕으로 젊은 선수와도 충분히 잘 해낼 정도로 역대급 농구 선수 중 하나였으니... 1997-98 챔피언 결정전에는 외국인 선수 저스틴 피닉스의 부상 및 태업으로 인해 다른 외국인 선수인 클리프 리드와 함께 골밑을 지키며 대전 현대의 공세를 막아냈다. 이게 노장의 최후의 불꽃이었다.

그렇게 3년을 시간을 보내면서 플레잉 코치로도 임명되어 활약하다가 1999-00 시즌을 마친 뒤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2000년 10월 26일 인천 신세기 빅스와의 시범경기가 그의 고별 경기가 되었으며, 이날 은퇴 경기 및 은퇴 행사를 치르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센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은퇴와 동시에 등번호 14번은 기아의 영구 결번이 되었다. 영구결번 지정에 은퇴 경기도 가졌으니까 성대하게 은퇴한 셈인데, 문제는 그가 은퇴한 후 기아 농구단이 모비스로 이관되는 과정에서 그의 영구 결번은 잊혀져 갔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영구 결번 처리가 되어 있으나 딱히 기념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김유택은 한 시대를 풍미한 센터였고, 한 시대를 완벽하게 지배한 선수였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김유택의 플레이는 센터의 교과서라고도 한다.

3. 플레이 스타일

늦게 시작한 농구였지만, 센스가 뛰어나서 금방 따라잡았다. 기본기에도 뛰어났고 특히 스텝은 오늘날의 선수들에 비해서 뒤질 것 없는, 아니 더 낫다는 평가를 받는다. 스텝과 피벗 동작을 활용해서 장신 선수들을 벗겨내고, 스피드를 이용해 한 발 더 빠르게 좋은 위치를 잡아 공격을 전개했다. 발이 장신 선수 치고는 빠른 편[3]이라서 속공에도 자주 가담하는 선수였고, 슛 레인지도 당시 센터치고는 넓어서 자유투 라인 인근에서의 미들 슛도 쏠쏠했고, 간간이 버저비터 3점 슛을 던져 성공시키기도 했다. 공격적인 기술이나 스킬은 정말 당대 최고였고, 스트레치 센터의 프로토타입으로 볼 수도 있겠다.

단점으로 워낙 마른 체구라서 웨이트에서는 밀렸기 때문에 국제 대회에서 애를 먹은 적도 많았다. 하지만 이를 탄력으로 극복했다. 그리고 늦게 시작한 농구에 더해 어려웠던 집안 사정 때문에 근성이 강하고, 성공해야 한다는 승부욕이 뛰어났던 선수다. 몸싸움에 강하다고 하기에는 체구가 말랐지만, 이 웨이트의 약점을 기술력으로 승부했다. 터닝슛이라든가, 스텝을 이용해서 상대를 제치고 넣는 레이업슛 같은 부분이 대표적이다. 사실 이러한 기술들은 농구의 기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 기본을 정확하게 제대로 구사하는 선수가 의외로 흔한 것이 아니다.

모든 당시 농구 관계자들이 평가하는 것처럼 힘보다는 영리함과 기술력으로 승부했던 선수였다. 여기에 근성과 승부욕이 겹치면서 당대 최고의 센터가 될 수 있었다. 늦게 시작한 농구 때문에 대학 시절 부정확했던 슛을 노력으로 극복했고, 작은 체구에도 다부진 승부욕으로 국제 무대에서 상대와 대등하게 맞서려고 애를 썼던 선수이기도 하다. 과거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센터의 역할이 스크린 걸기, 리바운드 잡기와 같은 부수적이고 궂은 일에 중점을 두었다면, 김유택의 등장 이후에는 센터와 골밑 플레이가 가장 쉬운 득점 루트이며, 공격의 기본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줬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4. 국제 대회에서의 김유택

신동파 이후 대한민국 농구는 세계 무대는 커녕 아시아 내에서도 단신팀이었고 이충희로 대표되는 슈터가 지휘하는 양궁농구 팀이었다. 때문에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주전 센터들은 국내에서의 이름값과 달리 국제 대회에서는 실력의 한계로 식물 센터로 전락하는 일이 잦았다. 김유택은 한기범과 함께, 신동파 이후 처음으로 국제대회에서 테크닉과 수비로 존재감을 드러냈던 대한민국의 주전 센터였다.

중국과의 경기에선 자신보다 큰 중국의 인사이더들을 특유의 피봇 플레이와 포스트업을 앞세운 공격력으로 제압해 버릴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돌아가며 튀어나오는 중국의 인사이더들을 상대할 선수가 부상을 달고 사는 한기범 아니면 김유택밖에 없었고, 결국 김유택이 파울 트러블이나 체력 저하에 빠지면 그 자리를 대체할 선수가 없었고 결국 한국 팀이 패배하게 되는 상황이 부지기수였다는 점.

1988년 올림픽에서도 세계의 장신 선수들을 상대로 투지 넘치는 플레이를 보였고, 마지막으로 전성기의 위력을 보였다고 할 수 있는 1990년 세계 선수권에선 스페인을 상대로 29점을 득점하는 힘을 보여줬다. 미국 상대로는 6점밖에 못 넣었지만...

5. 은퇴 이후

은퇴 이후에는 현역 시절 명성에 비해 잘 풀렸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한기범이야 유전병[4]으로 인한 건강 문제 때문에 그랬다고 해도, 김유택이 후배들인 허재 강동희에 비해 감독으로서 자리를 잡는 것이 늦어진 것은 아쉬운 일. 일단 은퇴 후에는 부산 기아의 코치로 선임되면서 지도자 경력을 쌓는 듯 했으나, 2000-01 시즌 종료 후 기아 농구단의 모기업이 현대모비스로 이관됨과 동시에[5]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로 팀명과 연고지를 변경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코치직에서 해임되면서 쓸쓸하게 팀을 떠나야만 했다. 이 시절 기아에서 모비스로 재출범하는 과정에서 새로 부임한 프런트가 과거 기아 시절 색채를 지우겠다고 각종 기행을 벌였는데,[6] 김유택도 이 기아 흔적 지우기 과정에서 희생된 것에 가깝다.[7]

모비스에서 나온 뒤 모교인 명지고에서 코치 및 감독을 하다가 이후 2005-06 시즌부터 2007-08 시즌까지 Xports에서 해설위원으로 활동했고, 동시에 김남기 감독과 함께 국가대표팀 코치로 활약하면서 지도자로 인정받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김남기 감독이 대구 오리온스의 감독으로 부임할 때, 김유택도 코치로 같이 부임하면서 다시 프로 팀 코치로 복귀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한동안 정체되던 이동준의 성장을 이끌어 내면서 빅맨을 키우는데 날카롭고 매의 눈을 가진 지도력이 있다고 인정받았다. 그러나 막장 프런트로 악명높은 오리온스 프런트가 2년 만에 김남기 감독 이하 코치진과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추일승을 새 감독으로 영입하는 과정에서 김유택도 팀을 떠났고, 결국 오리온스 코치를 끝으로 프로 무대에서는 지도자로 활동하지 못하고 있다. 항간에는 드래프트로 뽑힌 아들 최진수[8]와의 관계 때문이라는 설도 있었지만, 국가대표에서도 이미 한 번 호흡을 맞춘 적이 있기 때문에 그냥 오리온스의 막나가는 운영이라고 봐도 좋다.

2011년 모교인 중앙대학교의 감독으로 부임해서 대학농구 감독으로 처음 데뷔했다. 전임 김상준 감독이 입혀 놓은 바탕 위에 자신의 지도 철학을 입히면서 좋은성과를 이뤘다. 하지만 2012년 장재석 등 09학번 5인방이 졸업한데다가 학교의 선수 스카웃이 대학지원이 예전만 못해 큰 전력 보강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2013년이 고비가 되었지만 김유택 감독만의 특유한 조직력으로 리빌딩되어 가능성 많은 대학농구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 2014년 리그를 마친 뒤 양형석 코치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퇴임했다.

2015-16 시즌에는 SPOTV 해설위원으로 있었지만 이후 중계권이 MBC SPORTS+로 넘어가 해설을 쉬다가 2019-2020 시즌부터 다시 SPOTV가 KBL 중계를 시작해 해설위원으로 복귀했다. 이 시즌에 아들인 김진영 서울 삼성 썬더스에 입단해 프로에 데뷔했다. 농구팬들은 언젠가 두 아들의 맞대결을 아버지가 중계하지 않을까 기대 중이지만 아직 성사되지 않았다. 다만 최진수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로 이적한 이후 김유택의 중계때 최진수가 수훈선수 인터뷰를 한적은 있다. 이후 2021년 김진영이 음주운전 사고를 일으켜서 출장정지 징계 처분을 받으면서 둘의 맞대결에 중계를 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어졌다. 그리고 2021-22 시즌을 앞두고 해설진에서 하차한게 밝혀지면서 김진영 영향으로 하차한게 아니냐는 추측들이 나오고 있다. 공식입장은 계약만료였다고 하기에 이 사건이 관계가 있다면 계약을 연장하지 않은것으로 볼수 있을듯 하다. 이후 인터뷰에서 아들의 음주운전에 대해 사과를 했다.

6. 논란 및 사건사고

6.1. 폭행 논란

기아자동차가 잘 나가던 시절에 워낙 견제가 심해서 충돌도 잦았다. 허재도 그렇고 한기범도 그런 역사가 있었기에 김유택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본인의 회고대로 스크린 가면 주먹이 배로 들어오고, 중요 부위를 맞아 데굴데굴 구른 적도 많았단다. 선배라서 참다참다 폭발해서 시비가 붙은 적도 많았다. 농구대잔치 결승전에서 임정명과 시비가 붙어 서로 한 대씩 때린 적도 있었고, 박수교와도 반말을 했다가 시비가 붙어서 눈을 공격당해 실명을 당할 뻔도 했었다고...

6.2. 음주운전 논란

현역에서 은퇴하고 지도자로 활동 중이던 2004년, 음주운전을 한 적이 있다. 기사. 정작 본인 문서에는 하술하는 아들의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재발굴되어 작성되었다.

17년 후, 아들 김진영도 2021년 4월 말 음주운전 사건이 밝혀지자 아버지 김유택도 덩달아 욕을 먹고 있다. 실명이 언급된 기사도 5월 초가 돼서야 나온 것도 김유택이 무마시켰을거라는 의혹도 제기되는 중이며, 아버지는 불륜, 아들은 음주운전으로 각각 사고를 쳤다는 비아냥이 나오는 중이다.

7. 기타

뭉쳐야 쏜다 22화에 기아자동차 농구단 올스타의 일원으로 출연했다. 선수시절 굉장히 깔끔하고 예민한 성격 때문에 선배들에게는 좋은 후배였지만 대신 후배들을 고생시켰다고 하는데, 본인이 후배일 때는 본인이 고생했다고 한다.[9] 깔끔한 성격인만큼 선배들 빨래를 매우 깨끗하게 했다고 한다.

키가 큰 것에 대해서 컴플렉스가 있다고 한다. 키가 커서 남들이 쳐다보는 것을 싫어해서 한기범과 같이 다닐 때는 일부러 떨어져서 걸었다고 한다. 키 큰 사람 둘이 붙어 있으면 시선이 집중 된다고... 이 때문에 프로필 신장을 줄였다는 의혹이 있다. 프로필 197cm 인데 프로필 키가 비슷한 다른 선수들 보다 3~5cm는 더 커보였다.

7.1. 최진수와의 관계

불륜( 간통)으로 인해 이혼을 한 적이 있는데, 이혼하기 전에 아들 최진수(이혼 전 김진수)를 얻었었다. 최진수가 친아버지 김유택과 성씨가 다른 이유는 어머니가 재혼한 후 새아버지의 성씨를 따라 개명했기 때문이다. 재혼 후 얻은 아들인 김진영[10] 역시 대를 이어 농구를 하고 있다.[11] 경복고 고려대학교를 거쳐 2019-20 시즌 전체 3순위로 서울 삼성 썬더스에 지명돼 프로에 발을 들였다. 포지션은 가드로 역시 아버지를 닮은 호리호리한 체격이 특징이고 우리나라 대표할 가드로 충분한 가능성이 많은 재목이라 평가받고 있다.

이복형제인 최진수 김진영은 항간의 생각과는 달리 서로 가깝게 잘 지낸다. 최진수가 어린 시절부터 김진영을 많이 챙겼고 김진영 역시 최진수를 잘 따르며 인터뷰를 같이 할때는 마치 친형제 같은 케미도 보여준다.

8. 관련 문서



[1] 실제로는 200cm가 넘는다고 한다. 프로필 198~200cm로 기록된 다른 선수보다 확연히 더 컸다. 맨발 202cm인 최진수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면 키가 비슷하다. 신장이 큰 것에 대해서 컴플렉스가 있다고 하는데 그 때문에 신장을 낮춰서 적은 것으로 보인다 [2] 전처 사이에서 난 아들. [3] 전성기 때 100m를 12초 후반에 뛰었다고 한다. [4] 마르팡 증후군. 다행히 현재는 어느 정도 병세가 호전되어 각종 방송 출연이나 재능기부 등으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5] 2001년 6월 현대자동차그룹이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한 뒤 야구단 운영을 기아자동차에 맡겨 KIA 타이거즈로 출범시켰고, 동시에 현대자동차그룹 경영 정책 중 하나인 1사 1구단 원칙으로 인해 기존에 기아자동차가 맡던 농구단을 현대모비스에 넘긴 것이다. 현대자동차 역시 프로축구 전북 현대 모터스와 현대자동차 남자 배구단을 운영하고 있었으나 축구단 하나만 맡기로 결정하고, 배구단은 같은 그룹 내 현대캐피탈 넘겼다. [6] 강동희, 김영만 등이 모두 다른 팀으로 이적했고, 기아 시절부터 팀을 지휘해 온 박수교 감독도 이 때 해임된 뒤 최희암이 신임 감독으로 부임했다. [7] KBL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모비스가 기아의 역사를 계승했다고 소개되어 있고 기아 시절 우승 기록 역시 모두 승계됐지만, 모비스도 한때 기아자동차의 역사를 쓰지 않는 등 역사가 죄다 단절돼버렸고, 말이 모기업 변경이지 사실상 재창단된 거나 다름없다. [8] 성씨가 다른 이유는 아래 최진수와의 관계 문단 참조. [9] 현주엽 문경은도 기억한다는 르까프 양말 사건이 대표적인데, 양말 한 짝이 없어져서 현주엽이 새 양말을 건넸더니 "내가 신던 것으로 가져와라"라고 하여 문경은이 극적으로 세탁기 모터 사이에서 낀 것을 찾아내서 가져다줬다고. 문경은은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유택 선배한테 잘못 걸리면 외박 못 나간다라고 말을 하였다. 현주엽도 이때부터 고기 굽는 스킬을 터득했다고. [10] 법적으로는 최진수와는 이복형제다. [11] 다만 최진수는 1989년 생인데 성본 변경 및 기존의 친부모 - 자녀 관계를 영구적으로 단절시키는 친양자 입양 제도는 2008년부터 시행된 제도이고, 2008년 당시에는 친양자 입양 제도는 만 13세 이하에서만 가능했기 때문에 2008년 당시 만 18세 - 만 19세였던 최진수는 친양자 입양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법적으로 김유택과 연이 완전히 끊겼다고 보기는 공개된 사실만으로는 단정짓기 어렵다. 성본 변경의 경우도 상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