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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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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FFF> 한기범
韓基範[훈음] | Han Gibum
출생 1963년 6월 7일 ([age(1963-06-07)]세)
충청남도 천원군 입장면 하장리[2]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청주 한씨 (淸州 韓氏)[3]
현직 사단법인 한기범희망나눔 회장
한기범농구교실 단장
학력 입장국민학교 (졸업)
입장중학교 (졸업)
북일고등학교 (전학)
명지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경영대학 (경영학 / 학사)
신체 205cm[4], 90kg, A형
가족 아버지 한정섭, 어머니
배우자 안미애(1967년생, 1990년 10월 22일 결혼 ~ 현재)
아들 한이세, 한다온
병역 면제 (신장 초과)
소속 이피플코리아
포지션 센터
실업입단 1986년 기아자동차 농구단
소속 팀 기아자동차 농구단 (1986~1996)
국가대표팀 올림픽 1회 ( 1988)
FIBA 세계선수권 1회 (1986)
아시안게임 1회 (1986)
FIBA 아시아선수권 5회 (1983[5]~1989, 1993)

1. 개요2. 선수 생활3. 플레이 스타일4. 수상 경력5.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농구 선수.

일단 서류상으로는 하승진, 서장훈, 김병오 선수들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 농구 역사상 최장신 선수. 실제 신장이 205cm로 농구화를 벗고 잰것이며 착화 신장은 207cm이다.

2. 선수 생활

파일:attachment/hanki.jpg
리즈 시절

순전히 키가 크다는 이유로 농구를 시작했으며 고향 천안시에서 농구를 하다가 힘들어서 중도에 그만두고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가 시험으로 북일고등학교에 진학했다.[6] 그런데 막 농구부를 창단한 명지고등학교가 이 키 큰 고교생의 정보를 알고 한기범을 설득해 명지고로 전학시킨다. 운동을 쉬었다가 다시 하는 상황이라서 1년 유급을 했는데, 때마침 유급생 출전 정지 방침이 내려져서 명지고등학교 시절에는 경기에 많이 출전하지는 않았다. 한기범 본인 말로는 농구보다 당구를 더 많이 했던 시절이라고 한다.

명지고등학교를 후원하면서 그들과 인맥을 쌓던 정봉섭 중앙대학교 농구 감독은 1982년 한기범을 스카우트하는 데 성공했고, 이듬해 명지고 1년 후배인 김유택(1983)까지 스카우트하는데 성공했다. 중앙대에 진학한 이 둘은 한국 농구 최초의 장신 더블 포스트를 구축하며 중앙대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허재(1984)가 입학하기 전에 이 둘만 가지고도 대학 5관왕을 했었을 정도였다.

한기범은 중앙대 시절에 농구대잔치에서 대학팀 사상 처음으로 최종 결승전에 진출하며 실업팀에 도전장을 내밀었으나, 실업팀 선수들의 폭력이나 매한가지인 반칙과 수비에 시달리며 승리하기도 했으나 종합우승에는 실패했다.

1986년 졸업 후 당시 새로이 창단된 기아산업에 입단, 유재학과 1년 늦게 합류한 김유택(1987)과 함께 신생 팀 기아산업을 실업 3강으로 이끌었고, 이후 중앙대 후배인 허재(1988)가 합류한 뒤로는 기아자동차 불패 시대를 만드는 데 한 몫 단단히 했다. 1989-1990 농구대잔치 MVP를 차지. 리바운드 1위 역시 한기범의 차지였다. 당시 유재학은 부상에서 회복이 되지 않아 시즌 전체적으로도 경기를 별로 못뛴 상태에서 김유택이 불미스러운 일로 협회에서 결승전 출전금지를 당했고, 허재마저 경기 중 상대선수의 반칙성 플레이에 코뼈 부상을 입은데다, 허리부상으로 결승전 진출이 불투명하던 상황이었다. 허재가 부상투혼을 발휘해 득점왕까지 차지했지만, 한기범이 김유택의 빈 자리를 메꾸지 않았다면 쉽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MVP를 차지했던 시즌은 한기범이 이미 전성기의 기량을 잃어가던 때였다. 장신인 몸으로 인해 무릎에 부담이 가는 상태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국제 대회용 합숙과 국내 경기 일정은 한기범의 무릎이 쉴 틈을 주지 않았고, 그런 상태에서 대포주사[7][8]로 불리는 스테로이드 계열의 약물을 맞아 가며 출전을 이어간 끝에 결국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이미 한기범은 부상을 달고 살며 전성기의 위력은 잃어버린 선수가 되어 있었고, 1990년이 지나며 한기범은 부상으로 선수 생명 자체가 끝나다시피 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 한기범은 끝이 보이지 않는 재활에 매달린 끝에 전성기의 위력은 잃었을지언정 1992년 농구대잔치에 출전하며 선수로서 재기하는데 성공했다. 비록 연세대와의 경기에선 서장훈을 일대일로 수비하는데 버거워하는 모습을 보이며 팀이 패배하는 상황에까지 갔었지만, 기아자동차가 정규시즌에서 승승장구하던 고려대학교를 플레이오프에서 격파하고 결승에서 삼성을 격파하고 농구대잔치 총 7연패의 우승하는데 충분한 역할을 해내며 제 몫을 해내였다.

이러한 한기범의 활약은 기아자동차가 최후로 참여한 농구대잔치인 1996-1997 농구대잔치까지 이어졌다. 허재가 무면허 음주운전으로 선수자격이 정지되고 김유택조차 제 힘을 발휘 못 하며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기아자동차의 상황에서 은퇴 직전의 한기범은 만신창이가 된 무릎을 끌고 고군분투, 비록 기아자동차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하고 한 시즌정도 탈락했지만 한기범만은 한때 자신이 왜 한국 최고의 센터였는지를 재기하여 보여줬다.

1996-1997 농구대잔치를 끝으로 은퇴했다. 한기범 본인 말로는 원 없이 많은 농구대회에서 우승했기 때문에 후회나 미련은 남지 않았다고 한다.

3. 플레이 스타일


2미터가 넘는 큰 키를 가졌지만 키만 큰 일반인에 불과했던 이전의 2m대 한국 농구 선수들과는 달리, 한국 남자 농구에 처음으로 등장한 제대로 된 장신 센터.[9]

농구를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정말 연습을 죽도록 했다고 하며, 장신 선수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 하는 요령 자체가 부족했던 한국 농구 현실에서 정봉섭과 방열의 지도를 받아가며 자신의 키를 활용하는 법을 익혀나갔다. 연습 파트너는 김유택. 둘이서 1:1을 하면서 기량을 키웠다고 한다.

큰 키에 비해 힘은 좋지 않았던 편. 대학 때는 80kg대, 죽어라 살을 찌운 게 90kg의 몸무게에 불과했으며, 이 때문에 자신보다 작은 선수들에게도 힘에서 밀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후일 등장한 서장훈을 상대로도 엄청나게 고전을 했다. 한기범 자신이 꼽은 가장 막기 힘들었던 국내 선수로 서장훈을 꼽기도 했다.[10]

한데 전성기의 한기범에겐 키에 걸맞지 않는 유연함과 스피드, 농구 센스가 있었다. 밀리는 힘을 연습으로 다져진 정확한 중거리슛으로 보완했고, 속공에도 적극 참여하고 속공에서 바로 앨리웁 플레이도 해낼 정도의 운동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게 바로 한기범이란 선수. 전성기가 지나 부상을 달고 살던 상태에서도 속공 상황에서 원핸드 덩크를 많이 시전했고, 국내 최초로 풋백덩크도 했다. 거기다 리바운드 후 바로 한손으로 패스하는 빠른 아웃렛 패스 역시 한기범의 특기였고, 이러한 한기범의 패스는 바로 허재나 강동희에게 이어져 완벽한 속공 상황을 만들었다.

순발력과 승부욕에 조금 부족한 면이 있으나 많은 연습과 노력으로 하나씩 채워나갔다. 부상으로 인해 전성기가 너무나도 짧았지만, 한기범은 대한민국 최초의 제대로 된 장신 센터였던 것이다.

4. 수상 경력

날짜 수상 내용
1985. 05. 05. 종별대학농구선수권대회 MVP
1986.12 농구대잔치, 리바운드상,수비상,BEST5 외 다수
1990. 02. 농구대잔치 MVP
2016. 10. 대한민국 최고 인물 대상 사회공헌 부문
2015. 12. 코리아파워리더연말대상 사회공헌 체육인 부문
2014. 12. 대한민국 창조경영대상 문화체육공로부문
2013. 10. 대한민국 나눔국민대상 보건복지부장관상
2012. 3. 제1회 보건복지부 행복나눔인상 노블레스 오블리주 부문
2017 창조혁신 한국인 대상 체육 재능기부 부문
2018 제3회 아버지농구대회 최우수선수상
2018 한국예술문화복지사총연합회 복지대상
2019 제20회 대한민국 올해를 빛낸 인물 사회공헌부문
2019 코리아 파워 리더 대상 사회공헌부문
2020 보건복지부장관 표창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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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음] [2]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하장리. # [3] 현령공파(縣令公派) 33세 기(基) 항렬. [4] 서장훈, 김주성과 같다. [5] 중앙대 2학년때 첫 선발. [6] 북일고등학교에 62년생과 함께 1978년에 입학했다. 전교생이 운동장에 도열한 조회 시간마다 유독 표나게 키가 큰 학생이었다고... 충청남도에 농구부가 있는 대전고로 전학 보내려는 움직임도 있었다고 한다. [7] 원래 약품명인 데포메드롤의 발음과 비슷하여 이런 별명이 생겼다. 통증을 일시적으로 가라앉히는 당질 코르티코이드 계열의 약품으로 경기직전에 주사하면 마치 부상이 나은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과도한 남용에 의한 피해가 심각해서 현재는 금지약물이다. [8] 이런 주사는 당연히 선수생명을 갉아먹는 것이지만 한국에서는 이걸 맞는게 '부상투혼'으로 포장되어 프로야구 원년의 박철순도 맞았고 심지어 2002년 결승 당시 서장훈도 부상에도 불구하고 대포주사를 맞고 뛰었다. 물론 2021년 현재 선수관리가 투철한 NBA에서도 2019년 케빈 듀란트처럼 우승을 위해 부상투혼을 펼치는 선수들이 있고, 부상투혼 자체는 대단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통증을 참고 뛰는 정도가 아니라 도저히 뛸 수 없는 몸상태인데도 주사로 이를 가라앉히고 뛰게 하는 건 굉장히 위험한 행위이다. [9] 실제 2m가 넘는 키로 국가대표가 된 대한민국 농구 역사상 최초의 인물 중 하나이다. 그 이전까지는 2m에 턱걸이하는 키로 국가대표가 된 선수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키를 중요시하는 농구 종목의 특성상 190대 중후반의 키를 2m에 딱 맞춘 상징적인 숫자에 불과했으며 실제 2m대 국가대표 선수는 한기범이 최초이다. 다만 최초는 아니다. 하승진의 아버지 하동기가 한기범이 중학생이던 78년 방콕 아시아선수권 당시에 국가대표 센터로 뛴 적이 있다. 하동기의 현역 당시에는 2미터가 넘는 선수들의 키를 정확히 잴 수가 없었으나, 60이 넘은 나이에 아들 하승진의 유튜브 채널에 나와 (병원에서) 잰 키가 203cm가 나왔다. 보통 나이가 들면 2~3cm씩 줄고, 덩치가 크면 더 줄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현역시절엔 확실히 2미터 5거나 더 컸을 수도 있다. 물론 하동기의 기량은 평범했기 때문에 2미터 이상되는 스타급 센터라고 하면 한기범이 최초. [10] 대학시절의 서장훈은 한기범과 비슷한 키, 당시 전성기가 지난 한기범보다 빠른 스피드와 그를 압도하는 파워까지 갖고 있었다. 마른 체형이였던 한기범과 달리 110kg대의 거구였으니 파워에서 차이가 나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테크닉까지 뛰어나니 국내 무대에선 매치업할 수 있는 상대가 드물었다. [11] 사건 당시 한기범의 역할을 담당한 배우는 비중있던 조연인 배우 이종원이다. [12] 이 마르팡 증후군은 뼈·근육·심장·심혈 등의 이상 발육을 유발하는 선천성 질환으로, 대동맥 파열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유전성 질환이다(혈관 벽을 구성하는 단백질 조합이 잘 안된다). 마르팡 증후군 보유자의 특징은 한기범처럼 키가 크고 마르며 팔다리가 긴 체형이 많다는 것인데, 키에 비해 매우 말랐다면 이 증상을 의심해 봐야 한다. 비슷한 시기 한국 국가대표 남자배구팀 현대자동차서비스에 갓 입단한 2m 센터 김병선도 이 증후군 때문에 1995년 졸업을 앞두고 갑자기 심장질환을 일으켜 숨졌고, 수영 황제 마이클 펠프스가 마르팡 증후군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도 이게 지병이였다. 전직 배구 선수인 하경민 역시 이 병 때문에 선수 생활 중후반기에 상당히 고생했다. [13] 1981년 작고. [14] 한기수. 형이 졸업한 후 형의 등번호를 그대로 물려받아 중앙대학교에서 센터로 활약했다. [15] 특히 한기범은 30대의 젊은 나이에 자신과 같은 병으로 동생을 잃은 전력이 있어서, 제발 60살 때까지만이라도 살아남는 게 평생의 소원이였는데, 2022년에 59세(세는나이로 60세)까지도 건강히 생존하여 이루어졌다. [16] 2011년 10월 19일 KBS 2TV의 여유만만에 출연해 마르팡 증후군 때문에 자식을 갖지 않으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밝혔다. 다행히 아들들은 통통한 체형으로 이 증후군이 아닌 듯하다. [17] 산업은행, 한국은행 소속 선수들이 KBL 출범을 앞두고 프로화된 팀인 나래 블루버드에 합류할 것인지 아니면 은행에 남을지 선택해야 했는데 프로행을 포기하고 은행원의 길을 계속 걷기로 한 선수들도 있다. [18] ‘아식스 타이거’라는 신발으로, 슬램덩크 정대만이 신은 신발로 알려져 있다. [19] 하승진 유튜브 채널에 한기범이 출연해 약 두 달간 빌려갔다고 했다. 그것도 시합에서만 신겠다고 해놓고 무단으로 빌려간 셈. 당시는 해외직구가 없어 이렇게 발이 큰 선수들(둘 다 320mm)은 농구화를 구하기 힘들었는데, 한참 후배가 잠깐 신겠다고 해놓고 두 달이나 안 돌려줬는데 말로만 혼내고 돌려받았다면 오히려 대인배다. 애초에 구하기 힘들고 비싼 농구화를 빌려준 것만 해도 대단한 것. [20] 이쪽도 키가 177cm의 장신에 같은 한씨라서 그렇다. 물론 당연히 한기범만큼 큰 키는 절대 아니지만.. [21] 당시에 마눌(Wife)이라고 썼다. [22] 가족오락관 1106회에서 공개되었는데, 당시 허참 마늘이라 쓴 줄 알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