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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30 01:00:08

김시진/선수 경력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김시진
파일:삼성의 에이스 김시진.jpg

1. 개요2. 아마추어 시절
2.1. 대학/육군 시절
3. 삼성 라이온즈4. 롯데 자이언츠5. 평가
5.1. 뛰어난 투수가 아니었다는 의견5.2. 반론
6. 연도별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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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시진의 야구 선수 시절을 다룬 문서.

2. 아마추어 시절

포항중 재학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대구상업고등학교 야구부(현 대구상원고 야구부) 출신. 이 때부터 이만수와 배터리를 맞춰 활약하였고, 한양대학교 체육학과로 진학해서도 이만수와 배터리를 맞췄다. 흔히 영혼의 배터리로 김원형- 박경완 배터리를 꼽지만, 사실 그 원조는 김시진- 이만수 배터리이다.

대구상고 야구부에서 에이스로 활약, 대구상고의 1970년대 전성기 끝물을 장식했던 에이스였다. 당시 경남고 최동원, 군산상고 김용남과 묶여 고교야구 3대 투수로 자리매김했었다. 1974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활약하면서 결승까지 진출, 경북고 야구부와 격돌하지만, 결승전 1회부터 선발이 난타당하면서 급히 구원등판하지만 몸이 덜 풀리는 바람에 역시 난타. 결국은 1회에만 4명의 투수가 내리 난타당하면서 준우승에 그치게 된다.

1976년에는 대통령배 대회에서 크게 활약하지만 결국 준우승의 고배를 마셨다. 결승전에서 군산상고 야구부를 맞아 10삼진을 잡으면서 호투했는데 9회 1점[1]을 내주고 패배. 이후 군산상고 투수 우수고교초청야구대회 결승전에서 다시 군산상고 야구부를 맞아 4피안타 완봉으로 설욕에 성공한다. 참고로 당시 상대투수가 김성한이었다.

2.1. 대학/육군 시절

1977년 한양대학교에 입학, 그해 니카라과에서 열린 대륙간컵 국가대표팀에 출전해 활약, 우승을 거둔다.[2] 하지만 당시에는 병역특례 제도가 없어 혜택을 받지 못한다. 1978년에는 한미 대학야구 친선경기에서 역투하여 결국 한국이 우승하였으며, 1980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로스터에 뽑히지만 어깨부상을 당해 하차한다.

1981년 한양대 졸업 후 원래는 포항제철 야구단에 입단하려 했으나, 1980년 국제대회 당시 입은 어깨 부상 때문에 포철은 계약금을 1500만원으로 깎으려 했다. 대학야구 스타로 자리매김하던 김시진에게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고, 결국 김시진은 육군 경리단에 입대한다.[3] 그리고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장효조, 정구선 등과 함께 군인 신분으로 참가, 우승했다. 하지만 김시진은 군인 신분이었으므로 병역특례를 받지 못한다.[4]

경리단 복무를 마친 뒤 1983년 삼성 라이온즈의 1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3. 삼성 라이온즈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투수 부문 수상자 (1985, 1987)
파일:삼성 라이온즈 초기 시절의 김시진.jpg

입단 첫 해에 17승을 거두며 일약 에이스로 부상, 이후 꾸준히 10자리대 승을 올렸다.[5]
파일:삼성 라이온즈의 에이스 김시진.jpg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재일교포 김일융과 짝을 이뤄 1985년 통합우승을 견인하기도 하는 등 좋은 활약을 보였다. 하지만 둘의 사이는 그닥 좋지는 않았다고. 이유는 구단에서 김일융을 데려오며 그에게 극진한 대접을 하자 대신 원래 에이스였던 김시진은 상대적으로 홀대받는다는 생각에 심기가 틀어졌으며, 또한 김일융이 한국무대 첫 등판에서 김시진의 승을 날렸던 일 때문에 첫인상에서 나쁜 인상을 심었기 때문일 것이다. 1985년 25승씩 거둔 것도 미묘한 둘의 신경전을 알고 있었던 코칭스태프가 승수를 조절한 결과. 하지만 둘은 서로가 "팀에 필요한 존재"라는걸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사이가 틀어진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경쟁 관계가 김시진의 베스트 시즌인 1985년을 만들었으며 나아가 삼성의 첫 우승을 이끌어낸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팀 내 라이벌 관계가 오히려 팀에 득이 된 경우.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김시진은 에이스답게 1차전 선발로 등판하지만, 예상외로 털리면서 조기 강판, 최동원에게 완봉승을 내주고 만다.[6] 3차전에서는 7회까지 호투를 이어가다가 홍문종의 타구에 부상당했고 뒤이어 등판한 권영호의 블론으로 패배(김시진은 ND 기록), 6차전에서는 부상이 낫지 않은 채 무리하게 등판했다가 얻어맞고 2패를 뒤집어쓴다.
파일:김일융 & 김시진.jpg
김일융 & 김시진
1985년, 김시진은 같은 팀 김일융과 함께 각각 25승을 기록하며 공동 다승왕을 수상, 탈삼진, 승률에서도 최고순위에 오르는 대활약을 펼친다. 47경기 25승 5패 10세이브, 10완투 269.2이닝 ERA 2.00을 기록하며 단연 리그 최고의 투수로 군림하게 된다. 게다가 85년 삼성은 지금도 심심찮게 회자되는 최강팀이었다.[7] 하지만 이 시기 121볼넷을 내주게 되는데 이는 2001년 페르난도 에르난데스가 깨기 전까지 피볼넷 최고 기록이었다. 이 해 삼성은 정규시즌 전/후기를 모두 우승하면서 KBO 리그 사상 단 하나밖에 없는 통합우승을 이루어냈고, 김시진의 포스트시즌 잔혹사는 쓰이지 않았다.

1985년 김시진은 201탈삼진-121볼넷으로 양 부문에서 당해 1위를 차지했다. 이 해 정규시즌에서 기록한 투구수는 삼성 라이온즈 기록실 기준 4,231구로 이닝당 15.68구를 던졌다. 이는 1983년의 장명부(5,886구)-1984년의 최동원(4,348구)에 이은 KBO 리그 한 시즌 최다 투구 기록 3위다.

1986년 정규시즌에서 변함없는 활약을 보였지만 1985년 269.2이닝을 던진 것에 대한 후폭풍 때문인지 좀 부진했던 편. 그 전년도에 워낙 독보적인 성적을 내긴 하지만, 그래도 200이닝에 가까운 이닝을 소화한 데다(196.2이닝)[8] 11완투에 16승을 기록하며 여전히 삼성의 에이스임을 과시하였다. 달리 말하면 혹사 하지만 1986년 포스트시즌에서 엄청 부진했다. OB 베어스 상대 1986년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패전을 기록했으며, 한국시리즈 1차전 진동한을 대신해 구원등판해서는 등판 당시 2점차로 지고 있던 해태에 8회말 2루쪽 1타점 적시타로 1실점, 9회 삼성이 1점을 더 빼냈음에도 불구하고 적시 3루타와 밀어내기 볼넷으로 순식간에 동점으로 만들어버리는 방화를 저질렀으며 연장 11회말 끝내기 안타를 내주며 패전하게 된다. 이는 본인의 슬로우 스타터 기질 때문으로 좀 억울한 면이 있다. 3차전에서는 연속 볼넷을 내주고 강판당했지만 승계주자가 들어오면서 실점하는 바람에 패전투수가 되었다. 5차전에서는 3회까지 4점을 내주는 졸전 끝에 패전투수가 되었고, 1986년 KS 도합 3패를 기록했다. 3승을 기록해 한국시리즈 MVP까지 받은 해태 투수 김정수와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파일:통산 100승을 달성한 김시진.jpg
최초 통산 100승을 달성한 김시진
히스토리 15 김시진 vs 최동원 '최초 100승' 전쟁
1987년 KBO 리그 최초 개인통산 100승을 달성했다. 그리고 23승으로 두 번째 다승왕 타이틀 획득. 1987년까지 삼성에서만 도합 111승을 올렸다. 이는 당시 투수들 중 최다승이었으며, 김시진은 1987년 KBO 골든글러브를 받았다. 이 당시 삼성은 1985년에 이어 정규시즌 전/후기 우승과 동시에 대부분의 타이틀을 석권, 골든글러브 수상자도 5명을 배출하지만 그해 한국시리즈에서는... 김시진은 1987년 한국시리즈에서 1차전 실책 퍼레이드와 2방의 피홈런으로 인해 패전의 멍에를 뒤집어쓰고 말았고, 4차전에서 또다시 피홈런과 적시타를 맞는 등 4이닝 3실점으로 강판, 이후 삼성이 만회하지 못하면서 또 다시 패전투수가 된다.

정규리그 통산 124승[9]을 올리며 승승장구했지만, 한국시리즈를 포함 포스트시즌에서는 0승 9패, 한국시리즈에서는 0승 7패로 좋은 기록을 내지 못했다. 이처럼 큰 경기에서 약하다는 이유로 새가슴이라는 별명을 갖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데뷔 후 5년간 무려 1,104이닝이나 던진 당대로 봐도 꾸준한 이닝이터였으며, 85년 통합 우승의 주축이자 수년간 삼성의 에이스 역할을 한 선수로 비록 80년대를 양분한 최동원 선동열엔 못 미치더라도 정규리그에 있어선 클래식으로 보나 세이버로 보나 NO.3였다 할 수 있는 80년대를 대표하는 선수였다.또한 그의 85,87시즌 단일시즌 선발 21승은 장명부의 선발 28승[10]에 이은 역대 2위 기록으로 최동원, 선동렬을 능가한다. 98년이후 합류한 외국인투수들의 경력을 합쳐도 장명부의 28승에 이어 16년 더스틴 니퍼트와 더불어 랭킹 2위다.[11]

4. 롯데 자이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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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롯데 자이언츠 최동원이 포함된 충격적인 4:3 트레이드로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 이후 4년간 13승 24패를 추가하는 데 그치며 현역에서 은퇴하였다.[12]

1989년 4월 14일 사직 OB전에서 한 경기 최다 투구 승리 기록을 세웠는데, 14이닝 동안 219구를 던져 완투승을 거뒀다. 이 경기에서 한 경기 최다 사사구 기록도 세웠다. 12사사구로, 11볼넷-1사구.

특히 1991년에는 젊은 선수들을 선호하는 강병철 감독이 부임하면서부터 출장 기회가 줄어들어 1992년에는 고작 4경기 밖에 등판하지 못했다. 결국 1992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하고[13], 92년 시즌 후 은퇴하면서 선수 생활도 막을 내리게 된다.

5. 평가

5.1. 뛰어난 투수가 아니었다는 의견

한 경기 최다 사사구 기록(12개, BB-11, HBP-1, 14이닝, 89.4.14, 사직, vs OB)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한국시리즈 투수 관련 흑역사 기록을 모두 갖고 있다. 통산 최다패전(7패)과 시리즈 최다패전(3패)뿐만 아니라 통산 최다피홈런(6개)[14], 통산 최다실점(26개), 시리즈 최다실점(12점) 등등... # 페넌트레이스의 에이스 모드와 한국시리즈의 부진으로 원조 커쇼?[15]삼성 팬들에게는 애증의 상징. 그 점에서 현대 코치 시절의 제자 정민태는 포스트시즌 기록만큼은 확실히 청출어람.[16] [17]

컨트롤의 제왕이라는 인식과는 달리 볼넷이 많은 편이었다.[18] KBO 리그/역대 개인 기록 문서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단일시즌 최다 볼넷허용 상위 10인 중 3번이나 이름을 올렸으며, 본인의 프로 시절 최고의 해였던 1985년에 세운 121볼넷은 현재 단일시즌 역대 2위를 기록중이다.[19] 통산 피볼넷은 5위.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통산 볼삼비라거나 그런 지표들도 꽤나 형편없는 수준. 게다가 당시 투수에게 관대했던 스트라이크존을 생각해보자면...이 때문에 많은 게임에서는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능력치를 좋지 않게 주는 경우가 많다.

여기까지가 고전스탯으로 본 김시진이고 세이버스텟을 보자. 스탯티즈 기준 통산 평균 조정 평자책이 119.6, 조정 평균 FIP 111.1, WHIP 1.30으로 레전드치고는 실망스러운 성적이다. 결정적으로 볼삼비가 명성에 비해 지나치게 낮다. K/9이 5.31, BB/9이 4.31로 K/BB를 계산하면 대략 1.23이 나오는데 이는 매우 낮은 수치다. 심지어 그의 프로 시절 최전성기였던 85년의 K/BB가 1.66으로 에이스치고는 별로 높은 편이 아니다. 삼성 2선발 수준인 차우찬의 2016년 K/BB가 1.85. 그리고 실제적으로 활약한 해는 1983년부터 1988년까지 약 6시즌에 불과하다.[20] 통산 10시즌. 위에서 언급된 김정수가 불펜요원이긴 했지만 평균 조정 평자책 122.8 조정 평균 FIP 111.9 WHIP 1.27찍은 것과 크게 차이가 나지를 않는다. 게다기 위의 김정수의 K/BB가 1.76이고 정민태가 2.60이다. 게다가 정민태는 극심한 타고투저의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을 뛴 선수다. 김시진 선수는 비교적 짧은 선수생활과 혹사로 인해서 전성기가 짧았고(사실상 83~88이라고 봐도 무방) 그 때문에 누적 WAR이 레전드치고는 낮다.[21] 약 34.58. 참고로 삼성의 에이스였던 윤성환의 누적 WAR이 이미 35를 넘는다(...).

그래도 최전성기였던 1985년 만큼은 누구보다 화려했다. WAR 10.52 ERA+ 177.3 FIP+ 137.0으로 해당시즌 투타합쳐서 WAR 1위였다. 2등은 최동원. 결론적으로 말 하면, 1985년만큼은 단연 최고였지만, 누적 스텟은 당시에 비교대상이였던 선동열, 최동원보다는 확실히 열세였으며 통산 기록도 레전드치고는 좋지 않다.

이렇게 볼삼비가 높은 이유는 제구력 문제도 있겠지만 정면승부를 피하고 상대 타자를 유인하는 플레이를 자주 즐겼던 김시진 본인의 성향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현실적으로 보면 그냥 결정구가 부족했다고 보는게 정확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투수로써 김시진은 과대평가된 면이 없잖아 있다.[22] 스탯으로 보면 김시진이 한국시리즈에 약했던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명성만큼 그리 뛰어난 투수가 아니었으며 한국시리즈에서 못 할만 해서 못 했다는 걸 알수가 있다.

다만 당시 최고 타선이었던 삼성 타자들의 도움과 리그 최강의 수비력이라 평가되던 삼성 내야진의 도움을 받아 승수를 쌓을 수 있었고, 김일융 재일교포인데도 한국말을 거의 못한데다 결정적으로 지병인 당뇨 때문에 일찍 일본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어 삼성의 초대 에이스 대접을 받게 된다.

5.2. 반론

커리어 하이 시즌만 따져도 85년 김시진의 RA9-WAR은 12.32인데 이는 86년 선동열과 83년 장명부에 이어 역대 3위에 해당하는 엄청난 기록이다. # 이 말인 즉 262이닝 0점대 방어율을 달성한 투수와 427이닝 30승을 거둔 투수를 제외하면 누구도 85년의 김시진을 능가하는 WAR을 기록하지는 못했다는 소리다.

또한 김시진 전성기 기록은 110경기 언저리 시절 기록으로 133경기와 144경기, 적어도 126경기 시즌을 주로 보내왔고 선수 활동 기간이 더 긴 언급된 선수들과는 그 비교 상황이 단일시즌으로 보나 누적으로 보나 다르다. 압도적인 지배력을 3년 이상 보여주고 한 시기를 지배했다고 할 수 있는 선동열과 최동원엔 못 미치지만 당대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이라는 말을 듣기엔 부족함이 없으며, 상술된 볼넷 같은 내용도 결국 좋은 투수는 좋은 결과를 많이 만드는 선수지 볼넷만을 적게 내는 선수가 아니기에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볼넷이 적은 투수가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기에 볼넷 기록에 주목하는 건데, 이미 좋은 결과를 냈는데 볼넷 기록으로 실력 자체를 저평가를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리그 평균보다 BB/9이 나쁠 정도로 실적에 비해 제구력이 매우 좋지 않았다 수준의 평가면 몰라도. 그리고 당시 타자들은 지금보다 훨씬 삼진당하기를 꺼리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리그 평균 BB/K가 현대보다 훨씬 높았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김시진이 많은 이닝을 소화한 83-90년간 리그 K/9은 3.7-4.5내외로 현대에 비해 아주 낮았으며, 김시진은 대체로 그 이상의 K/9을 기록했다.

그리고 FIP이나 볼삼비만으로 김시진의 성적을 평가하기에는 김시진의 통산, 또는 각 연도별 피장타율을 알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23] 볼넷을 많이 내주었을지언정 장타를 잘 내주지 않았다면 투구의 결과값은 나쁘지 않을 수 있다. 피홈런을 보았을 때, 1985년 269.2이닝을 던지면서 홈런은 딱 8개 맞은 것을 보면 장타를 쉽게 내주는 투수는 아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최다 승리에 묻혀있지만 선발승만을 놓고보면 83년 장명부의 28선발승(30승)에 이은 역대 2위 기록 (85년 21선발승, 87년 21선발승)을 무려 2번 갖고 있다. 선발투수로서의 능력으로 보았을때는 최동원, 선동렬에 뒤지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한국시리즈에 올랐던 1984, 1986, 1987시즌에 모두 리그에서 열손가락에 드는 투수였다. 순위를 빼고 기록만으로 봐도 압도적이진 않았을 뿐 무시당할 수치는 절대 아니었다. 김일융의 한국프로야구 데뷔 첫 해인 84시즌엔 명실공히 에이스로 리그에서도 최동원 다음으로 뛰어났지만[24] 이듬해인 85시즌엔 김시진은 그야말로 리그 최고의 투수로 거듭났고 김일융도 뛰어났지만 김시진과의 격차는 상당했다. 한국에서의 마지막해인 86시즌에도 김시진이 우위였기에 김일융과의 비교는 김시진이 우위다. 더군다나 우승 시즌인 85시즌의 리그 최고의 투수였으니 초대 에이스 이미지는 더더욱 당연하다. 김일융이 제일교포여서 그렇다나 일본으로 일찍 돌아가서 그렇다는 내용과 전혀 무관하게. 사족으로 삼성의 초대 에이스는 원년에 박철순 바로 다음의 활약을 보인 황규봉이고, 프랜차이즈 레전드 계보의 첫 순위로 꼽히는 투수는 단연 김시진이다.

6.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3 삼성 37 229⅓
(3위)
17
(3위)
12 1 0.586
(4위)
2.55 189 8 109
(2위)
154
(3위)
78 65 1.24
1984 39 215
(5위)
19
(2위)
11 2 0.633 3.18 178 14 125
(1위)
154
(3위)
94 76 1.35
1985 47
(2위)
269⅔
(1위)
25
(1위)
5 10
(2위)
0.833
(1위)
2.00
(3위)
172 8 136
(1위)
201
(1위)
63 60 1.09
1986 30 196⅔ 16
(5위)
6 3 0.727 2.47 161 6 116
(1위)
87 68 54 1.38
1987 33
(4위)
193⅓ 23
(1위)
6 0 0.793
(2위)
3.12 166 9 103
(1위)
113
(4위)
73 67 1.36
1988 25 144⅓ 11 9 0 0.550 3.49 107 10 77
(공동 2위)
67 62 56 1.23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9 롯데 19 111⅓ 4 9 0 0.308 3.87 106 8 68 55 53 48 1.49
1990 26 151⅓ 7 10 0 0.412 4.04 136 9 69 67 75 68 1.28
1991 13 55⅓ 2 4 0 0.333 6.18 70 5 27 31 39 38 1.74
1992 4 10⅓ 0 1 0 0.000 13.06 17 5 8 2 15 15 2.42
KBO 통산
(10시즌)
273 1577 124 73 16 0.629
(5위)
3.12 1302 82 838 931 620 547 1.30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83 17완투
(2위)
5완봉
(1위)
1984 11완투
(5위)
2완봉
(3위)
1985 10완투
(4위)
2완봉
(4위)
1986 11완투 1완봉
1987 7완투 3완봉
(3위)
1988 5완투 1완봉
1989 1완투 0완봉
1990 4완투 2완봉
(5위)
1991 1완투 0완봉
KBO 통산 67완투
(5위)
16완봉

[1] 경기 유일한 득점이었다. [2] 한국야구 사상 첫 세계구급 대회 우승으로 기록된다. [3] 일설에는 김시진이 NPB 진출을 위해 병역문제를 해결할 겸 해서 입대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4] 이 당시는 현역 군인이 병역특례 자격에 도달하였을 때 예술체육요원으로 전환시키는 규정이 없었다. 이후 규정을 개정하여 현역 군인이 아시안 게임 금메달 또는 올림픽 동메달 이상의 성적을 올리는 경우에 현역에서 체육요원으로 전환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축구 종목 농구 종목에서는 이 규정의 수혜를 입은 선수가 나왔으나 아직까지 야구 종목에서 이 규정을 적용받은 사례가 전무하다. [5] 그 해 7월 9일 대구 삼성전에서(8회 강우콜드) 완봉승을 거두며 순수신인 최초 2완봉에 도달한 투수가 되었으며 결국 통산 5완봉승으로 마감했는데 이 기록은 순수신인 최다 완봉승 기록으로 남아 있다. [6] 여기에는 비화가 있는데, 김시진이 1차전 경기를 앞두고 차를 몰고 출근하다가 동네에서 놀던 어린아이가 차에 부딪치고 만다. 김시진은 아이를 진정시키고 병원까지 데려다주는 등 사고를 수습하느라 경기장에 늦게 도착했고, 멘탈을 굳힐 새도 없이 등판하면서 털린 것. [7] 보통 게임에서는 2000년 현대나 2016년 두산, 듀얼로 따지자면 1986/1993년 해태 등의 팀에 밀리는 경향이 있지만 1985년 삼성 역시 이들에게 꿀리지 않는 최강팀덱으로 꼽힌다. 무엇보다도 1985년 삼성은 현재까지 깨지지 않은 단일 시즌 최고승률(.705) 팀이고, 투수로는 25승 듀오에 탈삼진, 구원, 승률(공동), 타자로는 타율, 홈런(공동), 타점, 출루율, 승리타점 등의 부문에서 석권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으므로 최강팀이라 평가되기에 손색이 없다. 다만 위 팀들과의 차이점이라면 타이틀을 중심 한두명이 다 해먹었다는 정도...? [8] 이후 200이닝 이상을 소화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러나 포스트시즌 이닝을 합산하면 217.1이닝으로 실질적으로는 200이닝을 소화한 셈이 된다. [9] 삼성시절 111승, 롯데시절 13승 [10] 시즌 30승 [11] 22승의 리오스가 있으나 약물 의혹으로 제외. [12] 구단과의 마찰로 인해 탈퇴한 것이라 이때 그대로 야구 인생이 끝장날 뻔했다고 한다. 다행히 고교시절 은사인 정동진 당시 태평양 돌핀스 감독의 부름을 받아 지도자 생활에 입문한다. [13] 다만 우승반지는 수여받았다. [14] 정작 김시진은 페넌트레이스에서 홈런을 많이 맞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15] 커쇼라고 부르기는 성적이 영 좋지 않다. 오히려 스타일은 톰 글래빈하고 비슷하다. 심판 상대로 스트존을 테스트하고 집요하게 스트존 구석에다가 던지는 스타일이라 볼넷이 많아, 세이버 메트리션들이 좋아하는 볼넷-삼진 비율은 낮다. 때문에 FIP은 별로다. 근데, 정작 ERA는 좋다. 커쇼가 파워피처에 가까웠다면, 김시진은 기교파 투수에 가까웠다. [16] 정민태는 PS 승수 1위에 KS 승수 2위다. 1위는 별명부터가 가을까치. [17] 그래도 김시진은 삼성 시절의 배터리 콤비와 비교될 정도로 인품은 좋다는 평이 있다. [18] 80년대에 활약했던 올드 선수들, 해설자들은 구속은 빨랐지만 구위는 압도적이진 못해서 정면 승부보단 유인구를 많이 던지는 투수로 평하곤 한다. [19] 다만 이는 이닝을 많이 던진 것에 수반한 결과이기도 한다. 단순히 시즌 볼넷이 많다고 제구력이 나쁘다고 평할 순 없다. 그렇지만 1985년의 BB/9는 4.04로, 비율로 따져도 그렇게 제구력이 좋다고 보긴 어려운 수치. [20] 이 당시 김시진이 30줄에 들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21] 레전드치고 낮다는 거지 누적 WAR자체는 70위권 안 쪽이다. WAR/144도 괜찮은 편이다 [22] 2020년 기준 현역 투수중 양현종, 윤성환, 김광현, 류현진(단, 김광현 류현진은 2020년 기준 MLB에서 활동하고 있는 투수다.)가 이미 김시진 누적 WAR을 넘겼다. [23] 스탯티즈 기준 투수의 피장타율 자료는 2013시즌부터 조회할 수 있다. [24] 이때 김일융은 한국시리즈에서 3승을 거두는 대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다만 이 해 한국시리즈에서 신으로 각성한 어떤 선수가 4승을 거둔 탓에 우승에는 실패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