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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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태종 무열왕의 왕녀
김고타소 | 金古陀炤 |
||
이름 | 고타소(古陀炤) | |
출생 | 627년 이후? | |
사망 | 642년 8월 | |
대야성 (現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
||
본관 | 경주 김씨 | |
골품 | 진골 | |
부왕 | 태종 무열왕 | |
모후 | 문명왕후 | |
부군 | 김품석 | |
형제자매 |
형제 -
문무왕,
김인문,
김문왕, 김노차(金老且), 김인태, 김지경(金智鏡), 김개원 |
|
자매 -
지소부인,
요석공주, 원성왕의 증조할머니 |
[clearfix]
1. 개요
신라의 인물. 태종 무열왕의 장녀이자 문무왕의 여동생. 이름은 김고타소(金古陀炤). 아버지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사망했기에 보통 공주라고 불리지 않으나 왕의 딸이라는 의미로 '고타소 공주'이라고 불리기도 한다.각종 대중매체에서는 문무왕의 누나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삼국사기에서 문무왕이 백제의 태자 부여융에게 모욕을 줄 때의 기록을 보면 분명히 '나의 여동생(我妹)'이라고 적혀 있으므로 문무왕은 명백히 김고타소의 남동생이 아니라 오빠이다. 문무왕이 626년생이므로 그의 여동생인 김고타소는 아무리 빨리 잡아도 627년에 출생했을 것이다. 대야성 전투가 서기 642년에 벌어졌으므로 사망 당시 그녀는 15세 미만의 어린 나이였을 것이다. 이로 볼 때 김고타소는 어린 나이에 김품석과 혼인했고 시집간 직후에 참변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야성 전투 당시 그녀의 아버지 김춘추도 39세에 불과했으므로 당시 김고타소의 나이가 10대였던 것은 거의 확실하다.[1]
2. 생애
김고타소의 남편 김품석은 요충지에 있는 대야성[2]의 도독으로 부임했고 김고타소도 남편과 함께 대야성에서 지내게 된다. 그러던 중 백제의 침공으로 대야성 전투가 벌어지는데 신라군이 방어에 실패해 대야성이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대야성주 김품석은 아내 김고타소를 죽이고 본인도 자살했다. 본인은 아무 잘못이 없음에도 아버지가 남편을 잘못 골라 남편은 대야성 함락이라는 초대형 사고를 쳐버리고 심지어 어린 나이에 남편에게 살해당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심지어 고타소의 시신은 백제에 인계된 뒤 성왕을 죽인 일에 대한 복수로 감옥 바닥에 파묻히는 고인모독도 당했다고 한다.[3]고타소가 김품석에게 살해당한 건 고타소 입장에서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게, 고타소는 어쨌든 신라의 고위 왕족인 김춘추의 장녀다. 만약 김품석이 고타소를 죽이지 않았으면 고타소는 백제에 붙잡혔을 것이고, 백제의 입장에서 왕녀인 고타소는 죽일 이유가 없기 때문에 죽이지 않고 포로로 끌고 가서 인질로 잘 써먹었을 것이다. 포로로 끌려가서 백제 왕족이나 귀족에게 팔렸을 가능성도 있지만 어쨌든 살 수 있었고, 고타소의 시신을 훗날 김춘추가 돌려받았듯이 어쨌든 살아있기만 한다면 김춘추나 김법민이 백제와 협상해서 고타소를 돌려받을 수도 있었다. 또 백제와 신라가 관산성 전투로 원수지간이 되긴 했지만, 동시에 진흥왕의 처 소비 부여씨와 정략혼한지 3세대밖에 안 되었던 시절이기 때문에[4] 양국관계의 완화라는 명목으로 동성왕의 처 비지의 딸처럼 백제 왕족과 재혼하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고타소가 백제의 포로가 되었다면 김춘추가 고타소 문제로 정적들에게 공격당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후술할 김춘추와 김법민의 태도를 보면 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고타소가 살아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고타소의 처참한 최후를 알게 된 김춘추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아 하루 종일 정신 나간 사람처럼 기둥에 선 채로 있었으며 앞에 뭔가 지나가도 알아채지 못했고 나중에 정신을 차리자마자 백제를 멸하겠다는 일념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고구려, 왜, 당나라를 차례대로 방문해 동맹을 타진하게 된다. 이후 김춘추는 이전보다 더욱 몸을 사리지 않는 행보를 이어가는데 고구려에서는 동맹 제의를 거절당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가까스로 탈출했으며 친백제인 왜에서도 거절당하자 김춘추는 마지막으로 당나라를 방문해 당태종과 나당동맹을 맺는데 성공한다. 또 고타소의 오빠인 김법민(문무왕) 또한 훗날 백제가 멸망한 뒤 고타소에게 고인드립을 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에게 대신 화풀이를 하며 고타소의 죽음을 따질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드라마 등 대중매체에서는 극적인 스토리를 뽑아내기 위해 김춘추와 김법민의 개인적 복수심을 이후 무리한 고구려 외교, 길게는 나당동맹 체결이나 백제 멸망전까지 스토리 전개의 동기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으나 정치적인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 당시 신라 정계에서 김춘추 일파가 입은 정치적인 타격 때문이었다. 대야성주 김품석은 아무래도 장인 김춘추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는 사람이었을텐데 김품석은 대야성 상실의 가장 큰 책임자이다. 이런 점과 김품석이 임전무퇴를 귀족의 미덕으로 여기던 신라 사회 분위기와 정반대로 끝까지 항전하지 않고 항복하려 했던 것은 김춘추에게 정치적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고 유추할 수 있다. 신라 정계는 김춘추가 즉위하기 전까지는 비담, 알천으로 대표되는 귀족 견제 세력이 존재했고 이들 계파와 경쟁하는 구도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김춘추가 딸을 아끼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대야성 전투의 여파가 크기는 했지만 단순히 정치 인생이 끝나서 그랬다면 빨리 정신 차리고 움직이지 하루 종일 정신 나간 사람처럼 있는 건 지나친 반응이기 때문이다. 김춘추와 김법민 입장에서 고타소는 당시 기준으로도 어린 나이에 시집가자마자 남편에게 아무 잘못도 없이 억울하게 살해당한 불쌍한 딸이자 여동생이며, 특히 김춘추는 자신이 사위를 잘못 골라서 나라가 위태로워졌고 어린 딸은 억울하게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테니 더더욱 멘탈붕괴할 만하다. 특히 당시 17살밖에 안 되어[5] 오빠의 면모가 컸을 김법민이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여동생 일을 두고두고 떠올리며 괴로워한 걸 보면 단순히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6]
그녀의 시신은 나중에 김유신이 647년 옥문곡 전투에서 붙잡은 8명의 백제 장군과 교환해 수습했는데 이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의 수도 사비성[7]이 660년 함락되고 백제의 태자 부여융도 사로잡히자 당시 태자였던 김법민(문무왕)은 부여융의 무릎을 꿇리고 침을 뱉은 뒤 "네 아비는 나의 여동생 김고타소를 참혹하게 죽이고 옥 중에 묻어 나로 하여금 20년이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였다."라고 일갈했다. 보통 삼국사기 뿐만 아니라 옛날 역사서들의 기록들은 대부분 정제되고 건조하거나 완곡한 표현으로 기록된 경우가 많은데 문무왕이 부여융을 모욕 줄 때의 발언과 행동은 상당히 노골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발언은 신라의 백제에 대한 증오감과 복수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으로 꼽힌다.
法敏跪隆於馬前 唾面罵曰 "向者 汝父枉殺我妹 埋之獄中 使我二十年間 痛心疾首 今日汝命在吾手中" 隆伏地無言
법민이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여동생을 억울하게 죽여 옥중에 묻은 적이 있다. (그 일은)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하였는데, 오늘날 너의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구나!" 융은 땅에 엎드려 말이 없었다.
《 삼국사기》 태종 무열왕 7년 기사
법민이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여동생을 억울하게 죽여 옥중에 묻은 적이 있다. (그 일은)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하였는데, 오늘날 너의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구나!" 융은 땅에 엎드려 말이 없었다.
《 삼국사기》 태종 무열왕 7년 기사
3. 대중매체에서
- 2012년 KBS 드라마 < 대왕의 꿈>에서는 아역은 정다빈, 성인은 배우 박그리나[8]가 연기했다. 어렸을 때 중증 시스콘 기질을 보였던 김법민만큼이나 중증 브라콘[9] 기질을 보였다. 성인 역으로 바뀐 이후에는 역사상에 나온대로 대야성이 함락되면서 남편 김품석과 함께 의자왕의 창에 끔살[10]되는 장면이 묘사되었으나 이건 아시발꿈이었고 실제 극 중에서는 출산 후 백제군 앞에서 남편 김품석을 독려하는 기개를 보이다가 백제군에게 살해됐다. 의자왕의 언급에 따르면 사후 남편 김품석의 시체와 함께 목이 베여 조리돌림당한 듯하다. 김유신이 대야성을 탈환[11]한 후 유해를 회수했다.[12]
[1]
김춘추의 외손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볼 때 혼인하고 얼마 안 되어 죽은 게 확실해보인다.
[2]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3]
일본서기에 따르면 성왕이
도도에게 죽은 뒤 성왕의 목을 도당에 파묻어버려 몸통만 백제로 돌아갔다고 한다. 다만 성왕 항목에서도 나오듯 사실일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한편 백제 측이 확보했던 김품석 내외의 유해는 647년 김유신이 옥문곡 전투에서 생포한 백제 장수 8명과 교환되어 신라로 돌아갔다.
[4]
당시 신라의 왕인
진평왕이 진흥왕의 손자다. 진평왕은
사도왕후 박씨의 손자라서 소비 부여씨의 손자는 아니지만.
[5]
삼국시대는 세는나이 14~16세부터 성인으로 취급했으므로 17살이면 현대 기준으로 대학생~사회초년생 정도다. 사회생활을 하자마자 가족의 끔살이라는 처참한 일을 겪은 셈.
[6]
역사에서 젊은 나이에 살해당한 형제자매에 대한 한이 평생 동안 맺힌 사람들은 많다.
조위의
황제인
조비가 그 예. 그나마 문무왕은 침 뱉고 모욕하기는 했어도 어차피 부여융은 적국의 왕자였고 그의 아버지인 무열왕이 용서해준 것도 아니니 참작 여지라도 있지 조비는 제 아비가 용서해준 사람, 그것도 자기 휘하인 장수를 상대로 마구 핍박을 해 죽게 만들었다는데서 문무왕보다 한 술 더 떴다...
[7]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8]
2010년
KBS 드라마 <
근초고왕>에서는
부여화의 시녀인 단단이 역.
[9]
김법민과 연화가 가까이 지내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
질투하는 모습이 종종 포착됐다.
[10]
극 중 만삭 상태라서 아무리 그래도
임산부를 죽이는건 잔인하지 않나 하는 의견도 있었다.
[11]
실제로 대야성은 백제가
멸망한 뒤에야
신라에게 되돌아오기에 재현 오류이다.
[12]
김유신이 대야성에서 잡은 비장 8명과 고타소 부부의 유골을 바꾸자 제안했는데, 이에 대해 의자왕은 마뜩치 않아했고 성충과 흥수도 반대했지만 충성스러운 장수들을 구하기 위한
계백의 간곡한 청으로 결국 교환이 성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