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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24 17:51:01

남경(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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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서울특별시 휘장.svg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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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려 의장기.svg 고려 삼경
남경 (한양부)

南京 (漢陽府)
파일:고려시대 남경 영역도.jpg

당시 남경과 남경이 관할하던 주변 지역의 영역
<colbgcolor=#fedc89><colcolor=#670000> 관할 행정구역 교하군·봉성현·심악현· 행주·고봉현
견주· 사천현· 포주· 풍양현
장관직 남경유수
전신 양주목
존속기간 1067년 ~ 1395년 6월 6일
후신 한성부
현재 서울특별시
1. 개요2. 역사

[clearfix]

1. 개요

고려시대에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북 지역에 설치되었던 행정구역. 문종 때인 1067년에 설치되어 조선이 건국되고 난 후인 1395년 6월 6일 한성부(漢城府)로 개칭될 때까지 만 328년을 존속하였다.

남경의 지역적 범위는 여러 설이 있는데, 지금의 서울 사대문안, 용산, 신촌 일대로 보는 설도 있고, 더 넓게보아 지금의 구리시 남양주시 삼패동까지 포괄했다는 설도 있다. 남경의 중심 시가지는 대략 청계천 일대로 추정한다.

2. 역사

본래 이 지역은 양주목(楊州牧)에 속하였으나, 문종 때에 한양천도론이 거론되면서 양주목을 남경으로 승격하여 고려의 삼경(三京) 중 하나가 되었다. 문종은 남경에 별궁을 짓고 천도를 준비했으나 흐지부지되었고, 몇 년 뒤 남경이 폐지되어 다시 양주목에 속했다가, 숙종 때에 다시 설치되었다.

원 간섭기가 시작되면서 제후국은 천자국에서만 쓸 수 있는 (京)을 쓸 수 없다고 하여 1304년( 충렬왕 34년)에 모두 신라 때의 옛 이름을 살려 개경(開京)은 개성부(開城府)로, 서경(西京)은 평양부(平壤府)로, 동경(東京)은 계림부(鷄林府)로, 남경은 한양부(漢陽府)로 일제히 격하되었다.

1356년 기철을 죽이고 반원 개혁에 나선 공민왕은 남경(한양)으로의 천도를 추진했으나 흐지부지되었다. 남경 천도론은 이후로도 빈번하게 일어나 우왕 때인 1382년(우왕 8년)에 실제로 천도했으나, 이듬해 개경으로 복귀했다. 1390년 공양왕도 잠시 천도했다가 이듬해에 개경으로 복귀했다. 고려 말기에 벌어진 천도 움직임은 이후 조선 초 한양 천도에 영향을 주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로 태조는 전 왕조의 색채가 강하게 남은 개성을 떠나고 싶어 했고, 조정에 새 수도 후보지를 올리라 명한다. 처음에는 계룡산(지금의 충청남도 계룡시 신도안면)으로 정해졌으나, 경기도관찰사 하륜은 계룡산 땅이 너무 좁고 근처에 큰 물이 없어 도읍으로는 적절치 않다고 하며 한양 땅을 추천하였고, 한양부가 새 수도로 낙점되어 1394년 11월 21일에 천도를 단행하였다.

그 이듬해인 1395년 6월 6일에는 한양부를 옛 수도였던 개성부의 전례에 따라 한성부(漢城府)로 개칭하면서 옛 양주를 한양에서 분리시키며 한양도성 바깥에 있는 지역은 고양군 양주군으로 편입시켰다. 현 용산구 둔지산을 경계로 서쪽은 고양군에, 동쪽은 양주군이 되었고[1], 양주군 관아는 지금의 광진구 광장동 일대에 두었다.

태종 시절까지는 옛 개성부를 가리키던 말인 개경에서 따와 한경(漢京)이라고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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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지만 이들 지역 중 사대문 주변 지역은 세종대에 한성부 성저십리로 편입되었다. 그럼에도 조선 후기 이전에는 해당 성저십리 주민들은 조세를 한성부가 아닌 원 소속 군현(고양, 양주)에 납부해야 했던 등 애매한 부분은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