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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와이번스/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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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단 과정에서 인천의 노력2. 강병철 감독 체제 (2000~2002)3. 조범현 감독 체제 (2003~2006)4. 김성근 감독 체제 (2007~2011)5. 이만수 감독 체제 (2011~2014)6. 김용희 감독 체제 (2015~2016)7. 트레이 힐만 감독 체제 (2017~2018)8. 염경엽 감독 체제 (2019~2020)9. 김원형 감독 체제 (2021)10. SSG 랜더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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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단 과정에서 인천의 노력

전주 연고의 KBO 리그 제8구단 쌍방울 레이더스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모기업인 쌍방울이 자금난에 시달리면서 야구단 운영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1999년을 끝으로 구단 운영 포기 의사를 밝히게 된다. 그러나 쌍방울 레이더스를 인수하겠다는 기업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이에 KBO는 쌍방울 레이더스의 해체를 결정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 정부는 프로야구의 주무부처라고 할 수 있는 문화관광부를 통해 쌍방울의 뒤를 이어 8번째 구단(구단 순서로는 9번째 구단)을 운영할 만한 대기업을 물색하게 된다. 그리고 당시 5대 그룹[1] 중에서 유일하게 프로야구단이 없던 SK에 야구단 창단을 제안하게 된다.

손길승 당시 SK 회장은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2] 프로야구단 창단 제안을 받고 고심하다가, 2000년 2월 1일 미국 출장에 앞서 야구단 창단에 나서겠다는 뜻을 언론에 공식적으로 밝힌다.[3] 이후 SK에서는 프로야구단 창단의 3대 원칙을 제시하게 된다.
* 퇴출된 쌍방울 레이더스의 인수는 거부한다.
* 선수단은 쌍방울 선수단을 개별 계약으로 영입하고 기존 구단으로부터 선수를 지원 받는다.
* 새 구단의 연고지는 수도권 도시로 한다.[4]
KBO는 1989년 이후 11년 만에 다시 7개 구단 체제로 리그가 운영된다면 3연전 기간 동안 짝꿍이 없는 1개 구단이 무조건 쉬어야 하는 파행이 우려됐기에[5] 어떻게든 8개 구단 체제를 꾸려가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SK의 구단 창단이 필요했다. 그래서 KBO는 SK 측의 희망 사항을 되도록 많이 들어주는 방향으로 전향적 행보에 나섰다. 그런데 SK가 옛 쌍방울의 연고지였던 전주 연고권 승계를 거부하고 수도권 연고지 희망을 고수함에 따라 연고지 문제로 인해 창단 논의가 무려 한 달을 질질 끌게 된다.

KBO는 SK의 수도권 진입을 허용하고 SK에게 연고지 일부를 내주는 구단에게는 서울이나 다른 수도권 도시의 연고권을 개방하도록 한다. SK는 신생팀으로써 흥행에 유리한 서울을 원했지만, 신생팀에게 서울 연고권을 허가해 줄 경우 기존 구단인 LG 트윈스 두산 베어스의 반발이 예상되었고 KBO 또한 반대하였기에 수도권에 창단하겠다고 한 발 물러섰다.[6] 그러자 KBO는 SK의 연고지를 수원으로 하고[7] KBO에 가입 신청서를 제출하였고, 다음 날 정기 총회에서 지역 연고는 수원으로 한다고 결정되었다. 하지만 창단 당시에는 도시 연고제가 아닌 광역 연고제 시절이어서[8] SK만 광역 연고가 배제되었다. 이에 SK는 다른 구단처럼 광역 연고도 포함해 달라고 항의하였고, 경기도와 강원도 광역 연고를 희망하며 확정이 된다면 더 이상 서울 언급을 하지 않겠다고 어필하였다.

이렇게 될 경우 자신들의 광역 연고를 잃게 생긴 현대 유니콘스는 서울 연고 이전 야욕을 드러내며 KBO에게 으름장을 내놓으며 강력히 반발하였고, 현대는 서울로의 연고지 이전을 추진하게 되고 이를 알게 된 현대의 재계 라이벌 삼성 라이온즈가 강력하게 반대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SK의 야구단 창단이 확실해진 시점에서 인천광역시와 협의도 없이 야반도주로 수원으로 이전하였다.[9] 결국 KBO는 2000년 3월 15일에 SK의 연고지를 인천으로 결정하고[10] 서울로의 연고지 이전을 택한 현대는 서울의 새 홈구장 마련이 끝나는 2001년 전반기까지 수원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쓰기로 했다.[11]

SK 구단 창단의 최대 걸림돌이던 연고지 문제가 해결되자 나머지 창단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해체된 쌍방울 구단 프런트는 고용을 그대로 승계하되 구단 해체로 웨이버 공시 처리된 쌍방울 선수단은 개별 계약으로 입단 절차를 밟았다. SK 측이 최초 요구했던 선수 지원은 창단식 직전에 이뤄졌는데, 강병규, 권명철, 장광호, 송재익, 김종헌 등이 SK로 이적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러나 직전 시즌 13승을 찍고 SK로 온 강병규를 빼고는 기존 소속팀에서도 한물 간 선수였거나 1.5군급 선수들에 불과했기에 SK의 전력 증강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마저도 강병규는 시즌 후 태업을 일삼다가 결국 은퇴하게 된다. 이 선수들은 인당 10억씩 원 소속 구단에게 영입료를 지불했는데, 이는 기존 7개 구단의 텃세라고 보는 견해가 정설이다.

2000년 3월 20일, 구단 명칭을 현재의 SK 와이번스로 결정하고 신임 감독에 강병철 전 한화 감독을 선임했다. 당초 김준환 쌍방울 감독의 승격도 검토됐지만 창단 과정에서부터 SK 측이 쌍방울과의 단절을 희망했던 만큼 경험 많은 외부인을 원했던 SK 고위층 뜻에 따라 강병철 감독이 선임됐다.[12] 창단 절차를 모두 마친 SK 와이번스는 3월 31일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에서 공식 창단식을 갖고 힘찬 첫 발을 내딛게 된다.

2. 강병철 감독 체제 (2000~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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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에서 두 차례 우승을 맛봤던 베테랑 지도자 강병철 감독의 지도 아래 새롭게 창단된 팀이었지만 창단 첫 해 SK에 대한 전망은 매우 비관적이었다. 개별 계약 과정으로 선수단을 재편했지만 누더기처럼 헐거워진[13] 옛 쌍방울 선수단 대부분을 그대로 흡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1년 전 시즌 97패를 찍었던 옛 쌍방울의 전력과 큰 차이가 없었다. 더구나 신생팀 전력 지원의 일환으로 각 구단이 보낸 선수들도 전력 증강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창단 후 첫 경기인 2000년 4월 5일 대구 삼성전에서는[14] 예상과 다르게 삼성을 3:2로 꺾고 창단 첫 승을 거뒀지만, 결국 시즌 초반부터 연패를 거듭하면서 독보적이고 압도적인 꼴찌를 달려야 했다. 쌍방울과 계약했던 외국인 선수들도[15] 기량을 보고 영입했다기 보다는 그저 싼 값에 데려온 선수의 경향이 강했던 만큼 전반기 도중 외국인 선수 전원을 교체했고[16] 인천 연고팀으로서의 이미지 정착을 위해 자타공인 인천야구의 슈퍼스타로 불리던 김경기 현대 유니콘스에서 트레이드로 데려오고 미완의 대기였던 이호준 해태 타이거즈에서 트레이드로 영입해 타선 보강을 시도하는 등 각고의 노력도 했다. 그래도 창단 첫 해 꼴찌의 수모는 벗어나지 못했다. 2000년에 세운 시즌 44승과 0.338의 시즌 승률은 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최악의 시즌 기록이다.[17]

처참했던 팀 성적만큼이나 고역스러웠던 것은 지역민들의 철저한 무관심과 냉대였다. 프로 원년인 1982년 삼미 슈퍼스타즈 시절부터 인천 연고팀으로서 자리를 굳건히 했던 현대 유니콘스 연고지 이전은 인천지역 야구팬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1군 엔트리는 물론 코칭스태프까지 인천고, 동산고, 제물포고 등 인천지역 학교 출신 인사가 즐비했던 팀은 한순간에 사라져버리고 직전 해까지 회색 유니폼을 입고 인천에 원정을 왔던 전북 출신의 옛 쌍방울 선수들을 홈팀으로 맞이하자니 팬들 입장에서는 멘탈 붕괴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이 당시 인천의 야구팬들은 낯익은 선수단을 따라 현대를 응원하는 팬, 낯설지만 그래도 인천의 새 식구가 된 SK를 응원하는 팬, 그리고 아예 야구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린 팬으로 나뉘었다. 그 결과 창단 첫 해였던 2000년 한 해 동안 숭의야구장을 찾은 총 관중 수는 고작 8만4563명에 불과했다. 이는 경기당 평균 1281명으로 숭의야구장 좌석 점유율이 10% 남짓에 불과한 것이었다. 괜히 인천 팬들이 현대에서 잉여자원으로 전락한 왕년의 4번 타자 김경기라도 받아오라고 구단에게 요구한 것이 아니다. 시즌 종료 후 쌍방울 흔적 지우기의 일환으로 쌍방울의 마지막 감독이던 김준환 수석코치를 비롯해 이건열, 박철우, 함학수 등 쌍방울 출신 코칭스태프 대다수를 정리했고, 선수단 역시 쌍방울에서 넘어온 기량미달 선수들을 대부분 방출해버리는 등 대대적인 팀 개편이 있었다.

창단 2년차였던 2001년에는 LG와의 개막전에서 창단 첫 숭의야구장 홈경기 만원사례를 기록하고 그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며 산뜻하게 출발했지만 그래도 2000년과는 크게 차이나지 않는 전력 앞에 절망해야 했다. 그나마 외국인 투수 틸슨 브리또가 발군의 실력으로 타선을 이끌었고 외국인 선발투수 페르난도 에르난데스가 선발로만 무려 233이닝을 던지는 괴력과 혹사피칭을 선보였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래도 1년 전보다는 전력이 조금 나아졌고 리그 수준이 전반적으로 평준화된데다[18] 롯데가 최하위를 기록하면서 7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다만 명목상 순위에서 롯데에 1계단 앞서는 7위였을 뿐 실질적으로는 공동 꼴찌나 다름없었다. SK가 롯데보다 1승을 더하고 롯데가 4무를 한 탓에 승차 없이 승률에서 SK가 0.001 (1리) 앞서면서 7위를 했다.

세 번째 시즌인 2002년은 확실한 변화의 해였다. 1982년부터 30년간 인천 연고팀의 홈구장으로 쓰였던 낡고 좁은 숭의야구장을 벗어나 당시 KBO 리그의 최신식 경기장으로 각광을 받던 문학야구장으로 홈구장을 옮겼기 때문이다. 한화 이글스와의 시즌 홈 개막전에서 인천야구 사상 최초로 단일 경기 입장 관중수가 2만명을 넘어섰고 1년 내내 새 구장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19] 창단 첫 해 한 시즌 누적 관중의 5배에 육박하는 관중 증가세를 기록하며 1996년 이후 6년 만에 인천 연고팀 시즌 홈 관중 40만명 시대를 다시 열게 된다.

선수단 전력에도 변화를 줬다. 구단 창단 이후 최초의 외부 FA 영입으로 내야수 김민재를 영입했고 쌍방울 시절부터 전천후 좌완으로 뛰었던 오상민과 팀 내야진의 주축인 틸슨 브리또를 삼성에 내주고 과거 쌍방울 시절 락커룸 리더였던 김기태, 베테랑 포수 김동수, 인천 출신 2루수 정경배, 과거 OB의 에이스였던 김상진, 경험 많은 좌완 김태한, 우완 유망주 이용훈을 받아오는 대형 트레이드를 단행하게 된다. 다만 이 중에서도 SK에서 그럭저럭 굵직한 활약을 펼친 선수는 2009년까지 멤버로 뛰었던 정경배나 현역 말년을 불태운 김기태 정도 뿐이다. 김동수는 1년 뒤 현대로 이적해 친정팀에 비수를 꽂았고[20] 김태한과 김상진은 2003년을 끝으로 은퇴했으며[21] 이용훈은 부상으로 신음하다 고향팀 롯데로 트레이드된다.

이러한 변화에도 선수단 내에 뿌리 깊게 박힌 패배주의와 팬들의 거듭된 냉대에 부딪혀[22] 결국 또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했다. 그나마 2001년보다 1계단 올라간 6위로 시즌을 마감했고 강병철 감독이 계약 기간을 1년 남겨둔 시점에서 사퇴하게 된다.

강병철 감독이 재임했던 3시즌은 창단 후 단 한 시즌도 가을야구에 진출하지 못했고 줄곧 하위권에 머물렀기 때문에 구단 역사에서 흑역사로 치부될 수 있는 기간일 수도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구단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점에서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다. 구단 고위층에서 애초부터 옛 쌍방울의 색채를 지우고자 했던 만큼 쌍방울의 전력과는 다소 거리를 두는데 성공했다. 물론 김원형, 최태원, 조원우 등 쌍방울의 주축 선수 일부는 여전히 SK에서 활약했지만 이들마저도 없었다면 SK의 초창기는 더 암울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강병철 감독 재임 시기의 가장 큰 성과를 꼽는다면 어린 선수들의 성장이다. 강병철의 양아들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어린 선수들을 지나치게 중용하던 그의 용병술은 SK 시절에도 여전했다. 그 결과 쌍방울의 마지막 1차지명 신인이던 이진영을 주축 타자로 성장시켰고 해태에서 온 이호준을 팀의 굳건한 4번타자로 각성시켰으며 채종범을 붙박이 주전 외야수로 성장시키는 등의 성과를 냈다. 실제로 이진영 이호준은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로 성장했고 채종범 역시 SK 초창기 시절 없어서는 안될 핵심 전력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물론 과오도 있었다. 강병철의 대표적 과오로 꼽히는 투수 혹사. 군산상고 에이스 출신으로 창단 첫 해 SK 마운드의 유일한 희망이자 SK 초대 에이스였던 이승호 선발, 중간, 마무리 할 것 없이 무지막지하게 굴렸고[23] 외국인 에이스였던 페르난도 에르난데스의 어깨를 있는대로 갈아버렸으며 감독 재임 마지막 해에 입단한 신인 투수 채병용을 51경기 141이닝동안 투입하는 혹사를 자행한다. 결국 이승호와 채병용은 부상에 신음해야 했고 에르난데스는 얼마 못 가서 결국 선수 생활을 접게 된다. 또 어린 선수들을 중용한 나머지 베테랑 선수들을 괄시한 것도 강병철 시대의 과오라면 과오다. KBO 리그 사상 최초로 1000경기 이상의 연속 출장 기록을 세운 철인 최태원의 연속 출장 기록을 중단시켰고 연고지 인천의 슈퍼스타인 김경기를 사실상 떠밀어서 은퇴시킨 것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무시했다.

3. 조범현 감독 체제 (2003~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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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철 감독이 물러난 후 SK는 은퇴 후 야인으로 지내던 선동열을 감독으로 영입하고자 노력했으나 선동열은 해외연수를 선택하며 무위로 돌아갔다. 결국 삼성에서 배터리 코치를 맡았던 조범현을 2대 감독으로 영입한다. 이 당시로서는 꽤나 파격적인 인재 등용이었는데 SK 구단에서 신임 감독을 선임하려고 할 때 프런트 전 직원에게 어떤 감독이 현재 구단에 가장 적당하겠느냐는 추천을 권장하자 가장 많은 표가 나온 사람이 조범현이었다고 한다. 이를 보고 당시 구단 프런트 수장인 안용태 사장이 "조범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프런트가 추천하는 인물이니 그냥 해보자"면서 과감하게 임명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안용태 사장은 그룹 인사에 따라 구단을 떠나게 된다.

조범현 감독이 부임하면서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당시 FA로 나온 포수 중 최대어였던 박경완의 영입이었다. 조범현 박경완은 이미 쌍방울 시절부터 사제지간으로 두터운 인연을 지니고 있었고[24] 박경완 스스로도 "인생의 은사님인 조범현 감독님 때문에 SK로 간다"고 말할 정도로 박경완의 SK행은 당연한 일이자 상당한 파격이었다. 그리고 박경완의 영입은 훗날 SK의 최전성기의 주춧돌이 되는 신의 한 수가 된다.[25]

최고의 포수 박경완을 영입한 SK는 2003년 일대 돌풍을 일으킨다. 그 해 5월 초부터 선두권으로 치고 올라가더니 결국 창단 후 처음으로 시즌 중간순위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다만 선수단의 체력 부진과 부상 등이 겹치면서 7월 이후 하락세를 탔고 결국 한화와 막판 4위 경쟁을 하다가 턱걸이로 4위에 올라 창단 첫 포스트시즌 진출의 새 역사를 쓰게 된다. 이 당시 리드오프 조원우가 공격의 첨병으로서 제 역할을 했고 강병철 전 감독이 중용했던 이진영 이호준의 기량이 만개했으며 전천후 외국인 내야수 에디 디아즈가 공수에서 발군의 활약을 했고 마운드에서는 원조 에이스 이승호, 외국인 투수 트래비스 스미스, 2년차 채병용, 베테랑 김원형 등이 선발진에서 받쳐줬으며 조웅천이 구원왕에 오르는 등 투타의 조합이 어느 정도 맞는 모습을 보였다.

창단 처음으로 올라간 포스트시즌에서는 그야말로 돌풍의 연속이었다. 준플레이오프에서는 디펜딩 챔피언 삼성을 2승 무패로 눌렀고 플레이오프에서는 전통의 강호이자 유력한 우승후보였던 KIA를 3승 무패로 셧아웃시키며 창단 4시즌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영광을 안았다. 현대와 맞붙었던 한국시리즈에서는 극강의 슈퍼 에이스 정민태를 넘지 못하면서 3승 4패로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현재보다 미래가 더 주목받는 팀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며 앞으로를 기약하게 했다.

그러나 2004년에는 기존 선수들의 줄부상과 부진이 겹쳤고 기타 파동으로 인한 이적 이후 마무리 투수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던 이상훈이 시즌 초 돌연 은퇴를 선언하면서[26] 팀의 투수진 운용 계획이 모조리 꼬여버렸다. 타격에서는 홈런왕 박경완과 타점왕 이호준, 골든글러버 이진영 김기태가 활약했지만 투수력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KIA와의 치열한 경쟁 끝에 5위로 떨어지면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2005년은 다시 찾아온 우승의 최적기였다. 세대를 아우르는 인천야구의 아이돌 박재홍을 트레이드로 영입했고 외부 FA 자원이던 김재현을 영입했다. 신인 중에서는 유망주였던 최정이 이 때 입단했다. 타선에서는 이진영, 이호준, 박경완의 기량이 불을 뿜고 있었고 마운드에서는 토종 원투펀치 김원형 신승현의 건재와 정대현, 위재영, 조웅천의 완벽한 계투진 덕에 2년 만에 다시 투타의 균형이 맞았다. 전반기에는 다소 부진했으나 후반기 최고 승률을 기록하며 믿을 수 없는 진격의 행보를 이어나갔고 결국 정규리그 마지막날까지 삼성 라이온즈에 뒤진 2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문제는 후반기 막판에 전력이 뒷걸음질 쳤다는 점인데 결국 이 문제가 정규리그 마지막날 대형 사고로 터지고 만다. 2005년 시즌 홈 최종전이었던 LG전에서 이겼다면 2위를 확정짓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었지만 이 경기를 이기지 못하면서 두산에게 2위 자리를 내주며 3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3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탓에 선수단의 분위기는 바닥을 기었고 결국 그 준플레이오프에서 한화에 2승 3패로 패퇴하고 만다.[27]

2006년은 모기업의 CI 변경으로 푸른색의 팀 컬러를 붉은색으로 바꾸는 대대적 변화가 단행됐지만 선수단은 2005년 추락의 참사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했다. 야심차게 영입했던 일본인 타자 시오타니 가즈히코가 한국 생활에 대한 회의감과 때마침 찾아온 손가락 골절상[28]으로 팀을 떠났고 이후 영입한 외국인 선수들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결국 6위로 미끄러졌다. 그리고 조범현 감독도 재계약에 실패했다. 이후 SK는 조범현과 결별하는 대신 조범현의 은사를 신임 감독으로 영입한다. 그리고 이후 SK는 KBO 리그의 신흥 강호로 자리매김한다.

4. 김성근 감독 체제 (2007~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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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프렌차이즈의 최대전성기이자 SK왕조시절. 이때 5년간 5번 모두 한국시리즈 진출 3회를 우승했으며 왕조라 일커르는 2007년~2010년 4년간 승률은 삼성왕조(2011~2014), 해태왕조(1986~1989) 보다도 승률이 높을정도로 이 기간동안 SK는 말그대로 무적이었다.

2006년 10월 SK 구단은 제3대 감독으로 김성근을 영입한다. 2002년 한국시리즈 준우승 이후 LG의 구단 운영 철학과 김성근의 야구 철학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LG에서 해고됐고 이후 치바 롯데 마린즈 순회코치로 일본에 머물며 이승엽을 지도했던 김성근을 감독으로 데려온 것은 SK 구단의 운영 방향이 당장의 성과를 내야 하는 "윈 나우"를 지향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김성근이 당시로서는 김응용, 김영덕, 강병철과 더불어 KBO 리그에서만 통산 700승 이상을 거둔 베테랑 감독이고 중하위권에 머무르던 팀의 성적을 단기간에 상위권으로 끌어올리는 데에는 확실히 일가견이 있었던 만큼[29] 그의 능력을 믿은 것이다. 전임 감독이었던 조범현 김성근으로부터 야구를 배웠던 만큼 전반적인 팀 컬러는 조범현의 야구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조범현의 야구관은 김성근의 야구관에서 파생됐다고 봐야 하는 만큼 더 원론적인 데이터 야구와 스몰볼이 도입됐다고 볼 수 있다.

김성근은 감독 부임 이후 자신과 인연이 있던 가토 하지메를 투수코치로 데려왔고 가토 코치의 니시테츠 라이온즈 시절 동료인 오오타 다쿠지 코치와 수비 전담 지도자인 후쿠하라 미네오 코치도 함께 영입하는 등 일본인 코치들을 잇달아 영입한다.[30] 아울러 본인의 수제자들로 구성된 이른바 ' 김성근 사단'이 대거 SK 코칭스태프로 들어오게 된다. 대표적인 사람이 2군 감독을 맡았던 계형철.

김성근의 감독 선임과 더불어 이름값 높은 코치 1명이 더 들어왔는데 1997년 삼성에서 쫓겨나다시피 은퇴한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코치로 활동했던 이만수였다. SK는 KBO 리그 지도자 경력이 일천한 이만수를 1군 수석코치로 데려왔는데 애초에 이만수를 데려올 때부터 차기 감독감으로 미리 점지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돌았다. 이 이야기의 설득력을 높이는 일화가 있는데 이만수의 수석코치 취임식을 감독 취임식에 준하는 수준으로 별도 개최한 점이다. 이 자리에는 취임 후 얼마 되지 않은 감독 김성근도 단상에 같이 앉아있었다. 이 당시 이만수 수석코치는 거창한 취임 소감을 밝히기도 했는데 김성근 감독이 바로 옆자리에 있는 와중에 "팀을 바꿔가도록 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1군 선수단의 총책임자인 감독이 이미 있는데 수석코치가 팀의 방향 개편을 언급한 것은 훗날 두 지도자 간의 갈등이 예고된 것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어쨌든 김성근 감독과 이만수 수석코치 체제로 1군 선수단이 개편됐고 강력한 담금질이 시작된다. 이 당시 SK 선수단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강창학 야구장과 일본 고치현 오키나와현에서 훈련을 이어갔는데 익히 알려진 김성근 감독의 훈련 방식대로 어마무시하게 굴려졌다. 공포의 펑고로 불리는 수비 연습이 유명해진 것도 이 때부터였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신진급 선수들이 대거 기회를 얻게 되는데 소위 최전성기 외야 3인방으로 불리는 김강민, 조동화, 박재상 등이 대표적이었다. 신진급 선수들이 기회를 얻고 성장한 반면 김재현은 커리어 사상 최악의 부진을 면치 못했고[31] 박재홍 플래툰 시스템의 희생양이 돼 1군과 2군을 들락날락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2007년 시즌 초부터 선두를 달리기 시작한 SK는 단 한 명의 개인 타이틀 수상자를 내지 못했지만 팀 구성원 전체를 적재적소에 기용하는 토털 베이스볼과 김성근 특유의 데이터 야구가 들어맞으면서 두산 베어스를 4.5게임차로 제치고 창단 첫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창단 이후 처음으로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거둔 시즌이었지만 이 과정에서도 순탄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재일 한국인 출신인 김성근을 비롯해 일본인 코치들이 다수 지도한 탓에 "SK의 야구가 일본야구를 지향하는 것 아니냐", "SK의 야구는 너무 재미가 없다", "김성근 야구는 너무 얄밉고 인간미가 없다"[32] 등의 비판이 잇따랐다. 특히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이 논란이 커졌는데 SK 2루수 정근우가 주루 플레이를 펼치던 두산 이종욱의 다리를 잡은 것이나 SK 채병용 안경현, 김동주와 연이어 벌인 빈볼 시비가 결정적이었다. 안팎의 논란이 있었지만 SK는 사상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서 2패를 먼저 하고도 4연승으로 시리즈를 뒤집으며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이자 1998년 한국시리즈 이후 인천 연고팀의 통산 2번째 우승을 달성하게 된다.

2007년은 성적에서도 빛난 한 해였지만 대한민국 프로 스포츠 마케팅의 새로운 한 획을 그은 해라고 볼 수 있다. 2007년 시즌 시작에 앞서 신영철 사장은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를 결합한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라는 당시로서는 생소한 개념을 들고 나왔다. 단순히 야구장에서 야구만 보는 것이 아니라 야구장 안팎에 예능적 요소를 가미해 팬들이 즐겁게 야구장에서 한바탕 놀다갈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자는 것이 당시 구단의 방향이었다. 그래서 이 당시 구단 프런트가 했던 말 중에 하나가 "우리의 라이벌은 다른 구단이 아니라 에버랜드 롯데월드 어드벤처 같은 테마파크가 돼야 한다"였다.[33] 그러면서 문학구장 3루 내야석 위에 가로전광판을 달고[34] 야구장 내에 에어바운스 놀이터를 설치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된다.

아울러 경기에서 승리했을 경우 단순히 그라운드 시상식에서 그쳤던 수훈선수 격려를 확대했는데 수훈선수를 응원단상으로 초청해 팬들과 함께 인터뷰하고 때로는 선수들로부터 노래를 듣거나 춤을 같이 추는 일도 있었다. 현재는 문학구장 주말 홈경기의 상징처럼 자리 잡은 토요 불꽃축제도 이 해부터 자리잡은 전통이다. SK의 승패 여부와 관계없이 홈팀 팬과 원정팀 팬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불꽃놀이를 정례화해[35] 팬들을 야구장으로 불러모으게 하는 효과를 냈다.

스포테인먼트 캠페인의 정점을 찍은 것은 이만수 수석코치의 팬티 세리머니였다. 이 당시까지 문학구장 개장 이후 정규시즌 홈경기 만원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2006년에는 만원을 기록한 경기가 단 한 경기도 없었고 2005년에는 KIA 타이거즈와의 개막전이 유일한 관중 만원사례 경기였다. 이에 안타까움을 나타낸 이만수 코치가 2007년 4월 29일 문학 LG전에 앞서서 "앞으로 열리는 10번의 홈경기 안에 만원사례가 된다면 내가 팬티만 입고 야구장을 뛰겠다"는 폭탄선언을 하게 됐고 10번째 홈경기인 2007년 5월 26일 문학 KIA전에서[36] 만원사례를 달성하게 된다. 약속대로 이만수 코치는 이날 5회말이 끝나고 22명의 팬들과 함께 엉덩이가 밖으로 드러난 듯한 디자인의 팬티를 입고 야구장을 한 바퀴 돌았다. 이 장면은 미국의 유명 스포츠 잡지인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에도 소개될 정도로 화제가 됐다.

SK의 성적이 급상승하고 관중을 야구장으로 유입하고자 한 눈물겨운 마케팅은 결국 관중 폭발이라는 성과로 돌아왔다. 2007년의 SK는 1994년 태평양이 세웠던 인천 연고팀 단일 시즌 최다 관중 기록(47만6277명[37])을 13년 만에 깨고 65만6426명의 관중을 야구장으로 불러들여 역대 인천 연고팀 사상 최초로 시즌 평균 관중 1만명대 시대를 열었다.

2008년은 구단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전성기 중 한 해로 아직까지 회자되는, 역대 KBO 최강의 팀 중 하나다. 이른바 '지지 않는 야구'의 완성이었는데 2007년의 우승 전력이 그대로 있었고 2007년 한국시리즈를 통해 각성한 2년차 에이스 김광현이 그야말로 슈퍼 에이스 역할을 하며 정규시즌 MVP에 오르는 등 팀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성과를 낸 해였다. 물론 빈틈은 있었다. 2007년 17승을 거두며 팀의 에이스 역할을 했던 케니 레이번이 처절하도록 운이 따르지 않은 탓에 5승짜리 투수로 전락했고 또 다른 외국인 투수는 1년 내내 없었다고 할 정도로 함량 미달의 선수들이 연달아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4번타자 자리도 1년 내내 공석이었다. 이호준이 무릎 수술의 여파로 거의 1년을 통으로 쉬었다. 이 자리에는 박재홍, 김재현 등 기존 선수들이 들락날락해야 했다.

외국인 선수 기용이 쉽지 않았고 팀의 주포마저도 사라진 상황에서 SK가 거둔 2008년 시즌 전적은 무려 83승 43패. 126경기 체제에서 83승을 거두고[38] 승패마진이 무려 +40이 될 정도로 압도적인 시즌이었다. 또 이 해 정규시즌 최종 승률 0.659는 현재까지 깨지지 않는 구단 역대 통산 단일시즌 최고 승률 기록이자 126경기 체제에서 거둔 KBO 리그 사상 최고 시즌 승률 기록이다. 이 때 SK 팬들이 경기를 볼 때 느낌은 5점차 6점차로 뒤지고 있어도 이길거 같고 어차피 경기는 이기는 거니까 스탯이나 챙겨보자.

1년 내내 월간 승률이 6할을 넘을 정도로 압도적인 정규시즌을 보내고 맞은 2008년 한국시리즈에서는 1차전을 두산에게 내줬으나 2007년과 마찬가지로 2차전부터 4경기를 내리 이기며 4승 1패의 성적으로 창단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이자 해태 타이거즈(1996~1997), 현대 유니콘스(2003~2004), 삼성 라이온즈(2005~2006)에 이어 통산 4번째로 통합우승 2연패의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39]

2009년 이후의 시즌 내용은 별도의 문서가 있으니 아래를 참조하자.

5. 이만수 감독 체제 (2011~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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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감독 재임 중 SK는 3번의 한국시리즈 우승과 1번의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거두고 5시즌 동안 무려 372승을 거두며[40] 리그의 강호로 군림하게 됐다. 이 때문에 김성근 감독의 시대는 영원할 것 같았지만 이미 구단 안팎에서는 김성근 감독에 대한 회의론이 불거지고 있었다.[41]

김성근 감독과 구단은 결국 2011년 시즌 초부터 재계약 문제를 두고 갈등을 벌였다. 구단은 김 감독 측이 이미 몇 차례나 재계약 협상을 미뤄왔다고 언론에 터뜨렸고[42] 김 감독 역시 "재계약은 구단의 결정 사항이지만 나도 팀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며 맞섰다. 결국 2011년 8월 17일 김 감독이 "2011시즌이 끝나면 구단을 떠나겠다"는 폭탄 선언을 했고 다음날인 8월 18일 김성근 감독을 바로 경질해버렸다. 이후 SK 구단은 이철성 수석코치가 아닌 이만수 2군 감독을 1군 감독대행으로 발탁했다. 구단 측은 여전히 부인하고 있지만 2007년 이만수를 수석코치로 영입할 당시 차기 감독감으로 이미 낙점돼 있었다는 이야기가 이때 또 다시 주목을 받았다. 다만 SK 구단 측에서는 이만수 2군 감독을 시즌 끝나고 재계약을 하지 않을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성근 사단과 같이 해고될 운명이었는데 구단에서 갑자기 김성근 감독을 경질시키면서 새 감독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결국 이만수 감독대행은 2011년 잔여 시즌을 모두 치른 것을 넘어 포스트시즌에도 진출하게 됐다. 3위로 준플레이오프에 나가서 KIA 타이거즈에 3승 1패로 승리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플레이오프에서는 롯데에 3승 2패로 이기면서 5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만수 본인으로서는 역대 KBO 리그 감독대행 중 최초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감독대행이 됐다. 그러나 삼성에 막혀 우승에 실패하게 된다.

SK 구단은 큰 고민 없이 이만수 감독대행을 2012년부터 2014년까지 팀을 이끌어 갈 정식 감독으로 승격시켰다. 이만수의 야구관은 김성근의 야구관과 대척점에 있었다. 일본식 스몰볼과 데이터 야구를 신봉하던 김성근 전 감독과 달리 이만수 감독은 미국에서 배운 빅볼을 앞세웠는데 전임 감독과 스타일 차이가 상당히 컸기 때문에 감독대행 시절부터 무수한 욕을 먹었다. 이 당시 김성근 감독만을 무한으로 신봉하는 일부 극성팬을 중심으로 이만수 감독에 대한 비판이 거셌는데 서투른 투수교체나 영 좋지 못한 언론 인터뷰, 과도한 리액션 등으로 비난을 받았다. 그래도 부자는 망해도 3년은 먹을 것이 있다는 속담을 증명하듯 여전히 강한 전력을 보유하던 SK는 2012년에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며 KBO 리그 사상 최초로 6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하게 된다. 물론 2012년 한국시리즈에서도 삼성에 막혀 준우승을 차지했다.

2013년과 2014년은 별반 차이 없이 그저 그런 수준의 야구에 머무르면서 2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다만 이것이 모두 이만수 감독만 탓할 것은 아닌 것이 김성근 전 감독이 무리하게 선수를 끌어 쓴 혹사의 여파로 선수단이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고 외국인 선수들 역시 밥값을 해준 선수가 없기도 했다. 게다가 SK가 계속해서 높은 성적을 거두고 NC 다이노스의 창단 등으로 인해 신인드래프트에서 큰 소득을 얻지 못한 것도 한 몫을 했다. 결국 화려한 성적 뒤에 몇 년 간에 걸쳐 곪아왔던 문제들이 이때 한꺼번에 모두 터지면서 팀의 성적도 급전직하하고 말았고 당시 감독이 이만수였기 때문에 그 책임을 다 뒤집어 쓴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결국 2014년 시즌 후 이만수 감독은 계약이 만료되면서 물러났으며 구단은 김용희 2군 감독을 1군 감독으로 내부승격시킨다.[43]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팀의 왕조 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6. 김용희 감독 체제 (2015~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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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트레이 힐만 감독 체제 (2017~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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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염경엽 감독 체제 (2019~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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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만 감독이 가정 사정으로 퇴임하자 넥센 히어로즈 감독 출신 염경엽 단장이 새로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면서 삼각 트레이드를 통해 김동엽을 삼성으로 보내고 넥센에서 고종욱을 데려오는 등 선수단 재편에 나섰다. 염경엽의 야구는 빅볼 대신 스몰볼 야구에 가까웠는데 공인구 반발력이 증가했다는 이유로 정경배 코치 등이 지도했던 홈런 스윙 대신 밀어치기를 장착했다. 결국 2018년 홈런 1위 장타율 2위 OPS 2위였던 타선이 불과 한 해만에 홈런 3위 장타율 6위 OPS 6위로 주저앉았다.[44]

그렇다고 염경엽이 생각했던 안타를 쳐 점수를 만드는 팀이 되었냐면 당연히 아니다. SK는 시즌 막바지 까지 타자들이 못치니까 서태훈으로 대표되는 주력 투수들의 팔을 갈아내면서 1위를 유지했으나 결국 이 방식에도 한계가 드러나 밑에서 바짝 추격하는 두산에 달아나기 위해 이겨도 모자랄 판에 6연패라는 큰 충격이 다가왔으며 이는 결국 시즌 마지막 경기때 한화한테 이기고도 팀이 2위로 떨어지는, 팬들한테는 정말 충격적인 결과가 되었다. 타선 부진은 계속 이어졌고 키움 히어로즈와 만난 플레이오프 때도 망가진 투수진과 형편 없는 타선 때문에 0승 3패로 광탈하며 최종 순위는 3위까지 추락했다.

이처럼 팀이 망가진 것에는 새로 선임한 김무관 타격코치의 지도가 선수들과 잘 맞지 않았고 김무관 코치 해임 후 배터리코치 경험밖에 없는 박경완 수석코치와 주루코치로 시즌을 준비했던 박재상 코치에게 타격 지도를 일임하면서 타격 이론에 미숙했던 코치들이 선수들의 부진을 잘 수습 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로 보인다. 시즌 종료 후 SK 출신이자 선수 시절 타격에 일가견이 있던 이진영을 타격코치로 선임하며 2019년 시즌을 망친 타선을 수습할 수 있을지가 관건.

2020년은 창단 첫 해인 2000년을 빼고는 가장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팀 마운드의 묵직한 원투펀치였던 에이스 김광현 앙헬 산체스가 팀을 떠나고 하재훈, 한동민 등 주력 선수들이 크고 작은 부상으로 신음했으며 타격 실력 배양을 위해 데려온 이진영 코치도 메인 타격코치 경력은 일천했던지라 지도에 큰 혼란을 겪었다. 시즌 초부터 거하게 10연패를 찍으며 최하위권으로 내려가더니 결국 반등하지 못하고 9위라는 최악의 성적을 거뒀다. 설상가상으로 염경엽 감독은 시즌 도중 실신해버리며 건강 문제까지 불거졌고 결국 자진사퇴하며 팀을 불명예스럽게 떠나고 말았다. 잔여 시즌은 박경완 수석코치가 감독 대행으로 이끌었으나 시즌이 끝나고 팀을 떠난 상태. 최악의 부진을 겪은 시즌이었지만 그 와중에 최정 제이미 로맥 등 30홈런 선수 2명을 배출하는 것을 비롯해 여전히 홈런구단의 이미지는 잃지 않았다. kt wiz가 타격의 힘으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면서 SK가 타격의 팀이라는 인식은 희미해졌다.

9. 김원형 감독 체제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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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SK에서 SSG로 넘어가기 이전 시점, 2021년 시즌을 앞두고 구단의 문화를 잘 알고 있는 단장 출신의 민경삼 사장, 류선규 단장, 김원형 감독이 새로 선임되면서 2018년까지 뽐냈던 팀 컬러로 회복할 수 있을 것인지가 주목되고 있다. 류선규 단장이 "홈런군단으로서의 팀 컬러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고, 잠실에서 20개 이상의 홈런을 칠 정도로 장타력과 정교함을 동시에 갖춘 내야수 최주환을 영입하는 등 홈런군단 이미지 회복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10. SSG 랜더스 (2021~)

파일:SSG 랜더스 엠블럼.svg
SSG 랜더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SSG 랜더스/역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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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그룹, 삼성, LG, SK, 롯데 [2] 스포츠 관련 주무부처 장관이기도 했지만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국민의 정부의 실세로 불리던 인물이었다. [3] 기사에도 나오지만 손길승 회장은 "사회적 여망에 부응하고자 야구단을 창단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정부나 사회 안팎에서 SK가 야구단을 창단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크니까 들어주겠다"라고 볼 수 있다. 결코 SK가 스스로 나서서 창단에 나선 것이 아니다. [4] SK 측이 KBO에 신생 구단 가입 신청서를 처음 냈을 때 써냈던 희망 연고지는 서울이었고, 이후 조정 과정을 거쳐 수원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결국 현재의 인천으로 연고지를 확정하게 된다. [5] 홀수인 9구단 체제로 운영됐던 2013년과 2014년에 1개 구단이 쉬어가는 기형적 리그 형태가 드러났다. 이는 10번째 구단인 kt wiz가 창단되면서 해소된다. [6] 이는 SK가 각별한 인연이 있는 수원을 염두에 둔 판단이었는데, 당시 수원에서는 야구 인프라 투자 및 발전 방향에 대해 설명하라는 태도를 보였다. 서울 연고 운운하던 현대 유니콘스를 떠나보내고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적극적으로 신구장 이용 혜택 및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하겠다고 구애한 인천과 정반대였다. [7] 수원은 SK의 창업 지역이기도 했다. 최종건 창업주- 최종현 2대 회장 형제와 최종건의 아들 최신원 SK네트웍스 회장, 최종현의 아들 최태원 SK 총수 등 SK 오너 일가의 출신 지역도 모두 수원이다. 더구나 SK 오너 일가의 본관 역시 수원이다. [8] 연고제는 얼마 뒤인 2000년 3월 23일에 전 구단이 모두 도시 연고제로 바뀌게 된다. [9] 당연히 이 당시 엄청난 파장이 있었고, 현대는 연고이전 결정에 대한 팬들에 심한 반발을 예상하여 당시 팀의 광역 연고지였던 수원으로 급하게 이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 이 당시 인천광역시 측에서 SK에게 구애를 하기도 했다. 현대가 인천을 떠나면서 생기는 지역민의 반발도 고려했고, 머지않아 새 야구장이 문을 여는 만큼 SK에게 새 구장 이용에 대한 혜택을 주겠다고 나서면서 SK의 인천행이 급물살을 타게 된다. 이후 인천시는 구장 이용의 혜택 일부로 새 야구장 내부의 매점 운영권을 SK 측에게 넘겨주게 된다. [11] 물론 목동 야구장에 입성한 것은 현대가 해체된 이후였고, 현대는 2007년까지 수원 야구장에서 버틴다. 공식적인 연고지도 없는 상태로. [12] 김준환은 2000년 1군 수석코치로 팀에 남았지만 그 해 말에 쌍방울 출신 코칭스태프 전원이 해고되면서 팀을 떠나게 된다. [13] 해체 당시 쌍방울 선수단은 정상적인 1군 선수단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했다. 구단 운영난의 여파로 김기태, 조규제, 박경완, 김현욱 등 주축 선수들이 거액의 현금을 받는 조건으로 부자 구단에 팔려나갔고 주전 선수들의 잇단 이탈에 기존 선수들도 크게 동요했다. 여기에 팀의 젊은 주포였던 심성보는 이 무렵부터 지병인 당뇨병의 여파로 기량 쇠퇴의 비운을 맞게 된다. [14] 여담이지만 이 날 경기를 앞두고 상대팀 삼성 류중일의 은퇴식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삼성의 감독이던 김용희가 15년 뒤인 2015년 SK의 감독으로 부임하는 걸 생각하면 뭔가 아이러니하다. [15] SK 최초의 외국인 선수 중 한 명이 훗날 네덜란드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는 헨슬리 뮬렌이다. [16] 이 당시 데려온 선수 중 한 명이 삼성의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 주역 중 한 명인 틸슨 브리또였다. [17] 창단 이후 최악의 시즌으로 전락한 2020년에 하마터면 이 기록을 깰 뻔했다. 시즌 최소승 기록과 최저승률 기록은 남아 있지만 최다패 기록(86패→92패)은 2020년에 경신하고 말았다. [18] 이 당시 4위 한화 이글스와 최하위 롯데 자이언츠의 승차가 불과 2경기였다. [19] 문학야구장이 문학경기장역 인근에 있다는 점을 내세워 인천지하철공사 측과 공동 마케팅에 나서는 한편 동인천, 주안, 부평 등 인천지역 주요 부도심 지역과 야구장을 잇는 셔틀버스를 운행하는 등 팬들의 야구장 접근성을 높이는데 노력했다. [20] 당시 새 감독으로 취임한 조범현과는 삼성 시절부터 궁합이 맞지 않았다는 평이 있다. [21] 그나마 김상진은 은퇴 후 SK에서 코치로 일하면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22] 40만명 이상의 관중을 야구장으로 불러 모았지만 어디까지나 새 구장 개장에 대한 효과로 관중이 늘어났다고 볼 수 있다. 여전히 인천지역에서 "우리 지역 연고팀은 어디인가"를 꼽는 질문에서 SK는 단 한 번도 1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실제로 이 시절 SK 응원석보다는 KIA 타이거즈, 한화 이글스, LG 트윈스 등 인기 원정팀 응원석의 관중이 더 많은 날이 부지기수였고 한일 월드컵의 여파로 야구 인기 자체가 바닥으로 추락했기에 SK에 대한 인천 팬들의 관심은 여전히 차가웠다고 볼 수 있다. [23] 강병철의 재임기였던 3년간 투구이닝이 무려 503이닝에 이른다. 특히 2001년에는 무려 220⅔이닝을 소화하며 14승을 따냈지만 이 때의 혹사가 이승호의 선수 생명을 단축시키고 만다. [24] 쌍방울 시절 박경완의 투수 리드 사인을 대놓고 무시한 투수들을 향해 배터리코치였던 조범현이 하이킥을 날렸다는 이야기나 박경완의 전주 자택 인근으로 아예 이사를 간 조범현이 거의 매일 저녁마다 불러내서 박경완의 입에서 욕이 나오도록 지옥훈련을 시켰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25] 그 과정에서 좌완투수 조규제가 FA 보상선수로 선정되어 팀을 떠났고, 베테랑 포수인 양용모 김동수는 방출되었다. 다만 김동수는 박경완의 이탈로 인해 베테랑 포수가 필요했던 현대에 영입되었고, 강귀태 이택근을 대신하여 주전포수가 되어 부활한다. [26] 조범현 감독이 오죽하면 나와 같이 그만두자고 할 정도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27] 2005년의 이 참사는 14년 뒤인 2019년에 더 큰 역대급 대참사로 업그레이드돼 돌아오고 만다. [28] KIA 투수인 장문석의 공에 손을 맞았다. 결과적으로 이는 KIA에서 방출된 장문석이 이후 김성근 감독의 제의를 받았음에도 SK에 오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29] 만년 꼴찌였던 태평양 돌핀스를 일약 정규시즌 3위로 끌어올렸고 하위권에 머무르던 쌍방울을 공포의 돌격대로 만든 성과를 고려했다고 볼 수 있다. 공교롭게 SK는 두 팀과 모두 연관이 있었는데, 태평양의 연고지였던 인천에 서울로 떠나려던 현대 대신 자리 잡은 팀이었고 그가 쌍방울 시절 지도하던 선수 중 일부가 여전히 SK에서 뛰고 있었다. 대표적인 선수가 박경완. [30] 가장 큰 오해가 김성근이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아들인 김정준을 전력분석원으로 고용했다는 이야기인데 김정준은 아버지 김성근이 SK로 오기 훨씬 전인 2003년에 LG를 떠나 SK로 입사했다. 다만 아버지 김성근과 아들 김정준이 비슷한 시점에 그만 둔 적이 있기는 하다. 2002년 아버지가 LG에서 해임되자 본인도 LG를 떠났고 2011년 SK를 떠나자 본인도 SK에서 짐을 쌌다. [31] 다만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정규시즌의 부진을 정면으로 뒤엎는 성과를 보이며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MVP가 된다. [32] 자세한 이야기는 막걸리 야구 문서 참조. [33] 공교롭게도 훗날 이 구단을 인수하게 되는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도 SSG의 경쟁 상대는 롯데가 아니라 야구장과 테마파크가 돼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34] 프로 스포츠 경기장에 최초로 도입된 띠 전광판 설치 사례였다. [35] 물론 초기에는 "실컷 경기에서 져놓고 누구 좋으라고 폭죽을 쏘는 것이냐"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이내 사그라들었다. [36] 애초부터 이날을 D-Day로 잡았다는 시각이 많았다. 이 당시 SK의 순위는 단독 선두였고 관중이 가장 많이 들어오는 토요일 오후 홈경기였으며 압도적 티켓파워를 뽐내는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였기에 매진의 가능성이 애초부터 예고됐었다. [37] 다만 여기에는 당시 제2 홈구장 수원야구장의 입장 관중 수도 일부 포함돼 있기 때문에 순수하게 인천야구장에만 입장했던 관중은 40만명대 초반이거나 30만명대 후반으로 볼 수 있다. [38] 현재까지도 126경기 체제에서는 시즌 최다승 기록이 2008년 SK의 83승이다. [39] 페넌트레이스 우승팀에 상당한 어드밴티지를 주는 KBO 리그 환경상 페넌트레이스와 한국시리즈를 동시에 석권한 통합 우승 사례는 꽤 많다. 그러나 2시즌 이상 연속으로 페넌트레이스-한국시리즈 동반 우승을 거둔 팀은 현재까지도 해태, 현대, 삼성, SK 뿐이다. 삼성은 2005~2006년 2연패 이후 2011년부터 무려 4년간 페넌트레이스와 한국시리즈를 동반 석권한 역사가 있다. [40] 이 시기 리그에서 김응용과 더불어 유이한 1,000승 감독이란 기록을 세운다. [41] 2009년 한국시리즈 준우승 이후 신영철 당시 사장이 언급했던 이른바 막걸리 야구 발언 파동이 어찌 보면 '김성근 회의론'의 시작이라고도 볼 수 있다. [42] 당시 구단 사장이었던 신영철 SK텔레콤 홍보실장 출신이었기에 언론 대응에 매우 능한 사람이었다. [43] 김용희 감독은 1994~1998년 롯데 1군 감독, 2000년 삼성 1군 감독을 비롯하여 지도자로서의 경험이 상당히 긴 베테랑 감독이다. [44] 공인구가 문제면 리그 전체적으로 장타가 줄어들면 줄어들지 상대적인 순위에서 폭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