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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5 00:50:05

홍명보/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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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명보의 선수 경력을 다룬 문서.

2. 클럽 경력

2.1. 프로 데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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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와선 믿기지 않지만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150cm가 조금 넘을 정도로 키가 작은 신체 조건 때문에 고등학교 때까지 맘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님께서 어렸을 때부터 키 좀 크라고 보약을 왕창 먹였더니 그 한약빨의 포텐이 중학생 때가 지나서야 터져 동북고등학교 시절에 폭발적으로 컸다고 한다.

2.2. 상무 축구단 (군 복무)

1990년 대학을 졸업하고 K리그에 진출할 당시 최대급 대어였으나, 황선홍과 함께 드래프트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황선홍은 독일에 진출했고 홍명보는 상무에 입대했다.

독자였기에 복무기간이 6개월로 단축되었다.

2.3. 포항제철 아톰즈

여론과 타구단의 반발을 이기지 못한 포항은 홍명보의 상무 전역 후 드래프트 시장에 내놓게 되었고 홍명보는 유공의 손에 들어갔다. 그러나 포항에서 이미 가급여를 받고 있었고, 이중 계약 파문으로 번질 수 있었지만 3:1 트레이드[1][2]를 통해 포항제철 아톰즈에 입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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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데뷔 첫 해 MVP 수상, K리그 베스트 11, K리그 우승
1994년 세계올스타전 출전, 아시아 축구 연맹 수비상, K리그 베스트 11
1995년 세계올스타전 출전, 5월 10일 유공 코끼리(현 제주 유나이티드)전에서 48m 프리킥 골 성공(당시 최장거리 골), K리그 베스트 11 영상
1996년 K리그 전북 다이노스전에서 해트트릭 기록, K리그 베스트 11, FA컵 우승, FIFA 올해의 선수 공동 21위(스페인어)
1997년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우승

1994 미국 월드컵에서 2골을 기록한 후 당시 대표팀 기술고문이었던 비쇼베츠를 통해 유럽 3개 팀[3]으로부터 오퍼를 받았지만 계약 문제로 유럽 진출이 거듭 무산되다가 마침내 '1996 시즌이 끝나면 해외 진출을 허락한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이적할 팀을 물색,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본행을 결심한다. 그런데 1994 미국 월드컵 직후 주병진 토크쇼에 출연했을 때, 자신은 한국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J리그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했다.

2.4. 벨마레 히라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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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7월 J리그 벨마레 히라츠카 입단. 당시 이적료 11억. 세계올스타전 출전.

벨마레 데뷔전은 스위퍼가 아닌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 그러나 보복 행위로 백태클이 들어오자 그 선수를 밟아 레드 카드를 받았다. 당시 벨마레엔 일본대표 와그너 로페스와 나카타 히데토시가 있었기에 홍명보에게 리베로 역할이 아닌 수비의 구심점 역할을 요구했고, 당연하게도 진가를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다 1998년 팀 재정이 악화되면서 고액 연봉자를 팔기 시작했고 홍명보도 트레이드 시장에 나왔다.

2.5. 가시와 레이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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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J리그 가시와 레이솔 이적.

1999년 홍명보를 영입한 가시와 레이솔은 만년 중하위권 팀에서 단숨에 리그 3위로 도약, 2000년 외국인으로서 팀의 주장을 맡았으며 이 시즌도 역시 리그 3위. 우승을 목표로 황선홍 유상철을 영입해 외국인 3명 제한을 모두 대한민국 대표팀 주전으로 채운다. 이른바 코리안 삼총사 탄생이다. 홍명보가 일본 축구팬에게도 커다란 존경과 애정을 사는 이유도 이 당시 활약상 때문이다.[4]
1998년 가시와 레이솔의 경기당 실점률은 1.7점. 99년에는 0.8점이 됐다.

흔히 홍명보를 말할 땐 리베로를 떠올리지만, 실제 대표팀 시합에선 수비에 치중하거나 공격에 가담한다 해도 제한적인 경우[5]가 많았다.

결국 '철저하게 리베로 홍명보를 중심으로 조직되고 기능하는 팀'은 대표팀이 아닌 J리그 프로팀인 셈이었다. 황선홍과 함께 1990년대 일본 대표팀에게 무수한 좌절을 안겨준 인물이 홍명보란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6]

2.6. 포항 스틸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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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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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와에서 아이콘이나 다름없던 홍명보에게 은퇴 후 지도자 생활-차기 감독-을 요청했으나,
일본의 팀은 인솔하고 싶지 않다. 나의 영혼은 항상 한국에 있다.
라는 말과 함께 사양하고 J리그 생활을 정리한다.[7] 당시 한국에서 개최되는 월드컵에 매진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홍명보는 월드컵 직전인 2001년 포항 스틸러스와 2003년까지 2년 계약을 맺었다. 계약 기간 중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뤄내면서 홍명보는 다시 한번 포항의 인기 스타로 떠올랐고, 포항 경기 때 홍명보를 보러 포항스틸야드가 매진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월드컵 이 후 출연한 경림이의 길거리 특강에서 포항 스틸러스를 좋은 팀으로 만들고 떠나고 싶다고 했었다.

2.7. 로스앤젤레스 갤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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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7월 본격적으로 LA 갤럭시 이적을 고려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고 2002년 11월 LA갤럭시 입단을 선언했다. 이로써 2002년 11월 17일 K리그에서 마지막 경기를 치르고, 5일 뒤 미국으로 출국해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축구선수로는 고령에 해당하는 30살 중반의 나이와 (홍명보 문서에서도 몇번이고 지적된) 별 특출나지 못한 피지컬 탓에 당연히 LA한인 팬들에게 유니폼팔이만 하며 말년에 적당히 꿀빨다가 은퇴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MLS 선수들을 찍어누르며[8] 미친 회춘 모드의 엄청난 맹활약을 하며[9] LA갤럭시 선수들에게 역으로 축구를 가르쳤으며, 이적한 첫 시즌인 2003년에는 MLS 외국인 선수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기염까지 토한다. # @ 이적하자마자 2003시즌 30경기 중 총 25경기에 출전하는 등 구단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닥주전의 자리를 꿰찼지만 다음 시즌인 2004년에 부상을 당하며 은퇴한다.

2003 피스컵 코리아 당시 LA 선수로서 방한, 마찬가지로 PSV 에인트호번 선수로서 방한한 박지성과 맞붙기도 했다. # @ 경기 결과는 박지성의 득점을 포함한 4:1의 스코어로 LA가 패배했다.

단순 선수로서의 활약 외에도 LA 생활 동안 미국에서 긍정적인 족적을 많이 남겼다고 한다. 경기 전에 애국가도 나오고 한국계 미국인이 미국 국가를 불렀으며, 하프 타임에 태권도 시범단의 공연이 나오는 등 한미 문화 교류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LA갤럭시에서 보관 중인 홍명보의 축구화.

3. 국가대표 경력

3.1.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989년부터 2002년 11월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1989년 겨울 이회택 전 감독이 고려대학교의 홍명보를 국가대표팀에 선발. 동년배 황선홍과 함께 막내였지만 이미 황선홍 1988 AFC 아시안컵 카타르를 통해 스타가 되었기에 홍명보 본인은 꽤나 열등감을 느꼈다고 한다.

3.1.1.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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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주전 수비수였던 스위퍼 조민국이 부상을 당해 대안으로 국가대표로 뽑혔고, 1990년 2월 노르웨이와 친선경기에서 대표팀에 데뷔했다. 그리고 이회택 전 감독의 총애를 받으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전 경기 선발 출장했다. 그러나 대표팀은 졸전을 거듭하여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24강 본선 진출팀 중에서 승점 0점 3전패 조 최하위 대회 22등으로[10] 기록했을 정도로 처참했다.[11] 그러나 그 속에서도 홍명보는 일생의 동료이자 친구 황선홍과 함께 '향후 10년 국가대표팀을 대표할 선수'로 평가받았다.

3.1.2. 1994 FIFA 월드컵 미국



1993년 도하 월드컵 지역 예선 한일전에서 0:1으로 패배 후 홍명보는 "앞으로 내가 또 한일전에서 패배하면 축구화를 벗겠다" 라고 맹세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맹세는 끝까지 지켜냈다. 그리고, 1997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에서 일본과 2차례 대결했는데 이미 출전을 확정지은 대표팀이 잠실 홈경기에서 사지에 몰려있던 일본에 0:2로 패배한 바 있다. 이 때 홍명보는 경고 누적으로 1경기 출전정지가 되었기 때문에 출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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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FIFA 월드컵 미국이 홍명보란 이름을 처음으로 널리 알린 실질적인 대회였다. 첫 경기인 스페인전에서는 0:2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1:2로 따라붙는 프리킥골을 성공시켰다. [12] 그 직후 황선홍과 2:1 패스 후 날카롭게 서정원에게 찔러준 패스가 1:1찬스를 만들었고 서정원이 득점하면서 버저비터같이 경기가 거의 끝나기 직전 2:2로 극적인 동점으로 스페인에 승점 1점을 획득했다.[13] 이날 1골 1어시라는 엄청난 기록을 했지만 수비에서 불안한 모습을 자주보이며 2골이나 헌납하며 우려를 자아냈다. 그리고 대망의 독일전에서는 디펜딩 챔피언 독일을 상대로 여전히 불안한 수비력을 보여주며 전반에만 3골이나 먹히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후반 1:3으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그림같은 중거리슛을 성공시키면서 그나마 만회를 했다. 이 골은 1994년 미국 월드컵 가장 먼거리에서 성공시킨 골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이 골로 대한민국의 첫 월드컵 한 대회 본선 멀티골 기록자가 되었다.[14] 그러나 팀은 2:3으로 패배했고 이로 인하여 승점 2점 2무 1패 조 3위 1994년 미국 월드컵 대회 20위로 16강 진출이 좌절되었다. 독일전에서 주장 완장을 찼는데 원래 주장은 아니었고 최인영이 주장이었는데 전반전의 부진으로 이운재로 교체되면서 홍명보가 주장 완장을 찼다.(위 사진에서도 완장을 찬 사진과 없는 사진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골 1어시로 수비수로써 엄청난 공격 포인트를 올렸지만 3경기 5골이나 내주는 처참한 수비력으로 아쉬운 월드컵이였다.

3.1.3. 1996 AFC 아시안컵 아랍에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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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아시안컵에서도 팀의 주축으로 출전했지만 당시 스위퍼로 포변하여 황혼기를 불태우던 김주성과 겹쳐서 당시 감독인 박종환이 홍명보의 패싱력을 써먹기 위해서 미드필더로 올렸는데[15] 그때마다 성과는 영 아니올씨다였다. 다만 이란에 2:6으로 패한 전설의 "씩스투참사" 때는 김주성이 미드필더로 홍명보가 스위퍼로 원상복귀 했는데 전반전엔 2:1로 이기고 있다가 후반전엔 알리 다에이의 학살이 시작되면서 참패했다. 알리 다에이의 마지막 골 상황에서는 가볍게 제쳐지는 굴욕도 있었다. 후술할 하나회 사건도 이 참패로 불거지기도 했고 승승장구하며 잘나가던 홍명보가 처음으로 곤혹스런 입장에 처한 시기인데 그 후 차범근호 시기에 워낙이나 아시아를 씹어먹으며 승승장구해서 조용히 잊혀졌고 홍명보는 계속 주축 수비수였다.

3.1.4.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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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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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프랑스 월드컵 멕시코전 때.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는[16] 수비진의 핵심으로 팀을 이끌었다. 도쿄 대첩을 비롯한 예선에서 대한민국은 펄펄 날면서 본선행을 결정지었고 덩달아 당시 감독이던 차범근, 주 득점원이던 최용수와 더불어 주가가 올랐다.[17] 그러나 본선에서는 세계와의 격차만 확인하며 처참하게 발렸고 이에 홍명보라고 별 수 있던건 아니었다. 0:5로 발린 네덜란드전에서 그냥 빨리 경기가 끝나기만 바랐다고 한다. 그 후 마지막 경기인 벨기에전에서 처절한 플레이를 펼치며 벨기에를 1:1무승부 탈락시키며, 대회 30등으로 마감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으로 대한민국 축구는 처참하게 세계와의 격차만 확인했고 차범근 감독은 중도경질당하는 등 내홍을 겪었으나 홍명보는 계속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계속 감독이 바뀌는 와중에도 홍명보의 자리는 탄탄했으며 핵심이었다. 그리고 홍명보도 이젠 원숙미가 느껴졌고 팀이 지고 있거나 경기가 답답할 때는 공격에 가담하면서 센터백 오버랩을 본인의 장기이자 국대의 한 공격 옵션으로 만들었다.

대회 후 최영일이 대표팀에서 은퇴했기 때문에 최영일을 이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에 선임됐다.

3.1.5.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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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레바논 아시안컵에서 이란과의 8강전에서 이동국의 극적인 골든골에서 완성된 오버랩을 볼 수 있다. 당시 대한민국은 0:1으로 패색이 짙다가 경기 종료 직전 김상식의 동점골로 극적으로 연장으로 간 상황이었다. 연장전 들어서 홍명보는 수비보다 공격에 더 치중했고 수비에서 2:1 패스를 이용해 갑자기 치고 나가며 노정윤에게 연결했고 노정윤은 이동국에게 결정적인 찬스를 만들어주면서 골든골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렇게 극적으로 올라가서는 사우디아라비아에 힘겹게 패하며 3위, 4위전으로 가서 최종 3위를 기록했다.

3.1.6.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1 이운재 · 2 현영민 · 3 최성용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유상철
VC
· 7 김태영 · 8 최태욱
9 설기현 · 10 이영표 · 11 최용수 · 12 김병지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이민성 · 16 차두리
17 윤정환 · 18 황선홍 · 19 안정환 · 20 홍명보
C
· 21 박지성 · 22 송종국 · 23 최은성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거스 히딩크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항서
스태프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해성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현태 ·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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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 히딩크 전 감독이 부임한 후에는 거스 히딩크와 힘싸움 내지 자존심 싸움이 있었다. 거스 히딩크는 틈만 나면 대한민국 축구도 포백을 써야 된다며 역설했는데, 주지하다시피 홍명보는 쓰리백에 최적화된 수비수인지라 이 말은 곧 홍명보를 플랜에서 배제하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 실제로 몇 달 동안 홍명보가 국대에 뽑히지 않은 시기가 있었고, 심지어 가끔 쓰리백을 쓸 때조차 거스 히딩크는 유상철이나 송종국 등 멀티플레이어를 리베로로 시험해 보았다. 게다가 2001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이 끝난 후 피로 골절로 클럽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대표팀은 점점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홍명보에겐 꽤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상황은 2002년 골드컵과 우루과이 원정을 다녀오면서 바뀌었다. 월드컵을 반년도 남겨두지 않고 처참한 경기력과 매경기 허무하게 실점 하는 대표팀의 경기력을 보면서 홍명보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대두되었고 홍명보는 이런 의견에 개의치 않은듯 보였으나, 결국 3월 유럽 원정 명단에 오랜만에 포함이 되었고 하반신 통증을 참아가며 뛴 결과 그때부터 쭉 대표팀 발탁이 되어 결국 최종 명단에 주장으로 발탁되었다.

결국 히딩크도 팀을 통솔하는 리더로서의 홍명보의 가치를 인정하였고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32개국 본선에서는 쓰리백과 포백을 넘나들면서 그야말로 절정의 활약을 보여줬다. 홍명보가 이끄는 대한민국의 3백 최진철-홍명보- 김태영[18]은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19]등 엄청난 강호들을 상대로 단 2실점[20]만을 기록하며[21]최고의 수비 라인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스페인전 승부차기에서 마지막 키커로서 승리를 확정 짓는 장면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대한민국 축구 최고의 명장면이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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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매우 아쉽게도 마지막 3위·4위전에서 경기 시작 11초 만에 공을 터키 공격수 하칸 쉬퀴르에게 빼앗겨 실점하는 실수로 아직도 깨지지 않은 월드컵 최단 시간 골을 만든 흑역사도 있다.[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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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월드컵이 끝나고 홍명보는 아시아인 최초, 더 나아가서는 유럽과 남미를 제외한 지역 출신으로서 최초로 브론즈볼을 수상하면서 유종의 미를 거둔다. 그리고 홍명보가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브론즈볼을 받았던 소감을 말하길, "그 전 까지는 월드컵에서 조별리그만 마치면 짐싸서 대한민국으로 돌아왔으니까, 이렇게 골든볼같은 수상 제도가 있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라고 농담조로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사실 대한민국은 FIFA 월드컵에서 아시아 지역 예선은 항상 승승장구했어도 1986년 멕시코 월드컵[25]부터 연속 본선진출을 한 뒤 조별리그만 올라가면 세계 강호들과 경쟁에서 힘겨웠던 시절이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그리고 골든볼이 골키퍼인 올리버 칸이고, 실버볼이 공격수인 호나우두였던 것을 감안하면 월드컵 최고의 수비수로 평가받은 격이다. 또한 2002년 FIFA 올해의 선수상 투표에서도 다섯 표를 받으면서 공동 17위에 랭크되는 영광을 누린다. 참조(독일어)[26]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당시 박항서 전 코치가 와일드 카드로 뛰어달라고 요청했지만, 후배들이 국가대표팀에서 뛸 기회를 줘야 한다면서 사양했다.

3.1.7. 국가대표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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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나고 2002년 11월 20일 브라질과의 평가전[27]에서 황선홍과 함께 명예롭게 국가대표팀을 은퇴했으며 후배들이 무동을 태워서 경기장을 한바퀴를 도는 훈훈한 모습이 연출되었다.

홍명보는 1990년~2002년 사이의 4회의 월드컵에 개근하였으며, 대한민국이 치렀던 모든 경기에 출전했던 선수이다. 그가 월드컵에서 치른 경기는 16경기로, 이는 아시아 선수로는 최고의 기록이다.[28]

[1] 포항 김진형, 이석경, 조정현↔홍명보 [2] 이 트레이드가 포항의 압승이라고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김진형은 줄곧 유공 포백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통산 자책골 0'을 기록할 정도로 준수한 수비력을 보였고, 조정현은 통산 188경기에서 36골 23도움을 기록하며 이원식 전까지 유공의 슈퍼 서브로 맹활약했다. 따지고 보면 윈윈 트레이드였는데 홍명보의 이름값이 넘사벽이고, 김진형과 조정현이 국가대표와 거리가 먼 선수들이어서 그렇다. [3] 그 중에 FC 바르셀로나와 AC 밀란이 있었다. [4] 이때문에 당시 발매된 위닝일레븐 J리그 시리즈에서 홍명보의 능력치는 그야말로 신급이다. 가시와 레이솔을 잡고 확인해보면 팀 기본전술에도 센터백 오버랩이 설정되어있고, 켜는 순간 수비진 가운데의 노란 점 하나가 폭풍처럼 오버래핑을 한다. [5] 전방에서 워낙 공격이 안 풀리니 어쩔 수 없이 올라가는 형태 [6] 센터백 오버래핑을 팀 전술로 완성시킨다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도자 문제도 있고, 팀의 규모 문제도 있고 한국 프로에서는 쉽지 않았다. [7] 이때 이 말을 들은 일본 팬들 중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식의 볼멘소리도 조금 있었다고 한다. [8] MLS는 피지컬 하나만큼은 분데스리가, EPL과 동급, 아니 그 이상급으로 평가받는다. 물론 홍명보도 2002 월드컵 당시 히딩크에게 체력 특훈을 받은 뒤였기 때문에, 더이상 J리그 시절의 그 멸치가 아니긴 했다. [9] 2003년 당시 MLS 팀 중 최소 실점을 한 팀이 LA갤럭시였다. [10]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승점 1점 1무 2패 대회 20위 후 2계단이나 하락했다. [11] 엄밀히 얘기해서 그렇게까지 졸전은 아니었다. 그냥 당시 대한민국 축구의 실력이나 수준이 세계 레벨과 워낙에 격차가 있었을 뿐이다. 당시의 대한민국 축구의 위상은 현재 대한민국 축구 위상과는 많이 달랐다. 즉, 제 실력을 발휘 못했다거나 특별히 본선 무대에서 더 못했다거나 했던 건 아니었다. [12] 대한민국의 첫 득점을 신고하며 뒤늦게나마 추격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이 골은 의미가 컸다. 이 경기를 중계하던 해설진이 지금부터 재밌는 경기 양상이 될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 진짜로 이 골이 들어간 후부터 대한민국의 사기는 확 올라갔다. [13] 단, 당시 중계화면을 보면 추가시간이 2분 남아있었다. [14] 2024년 현재에도 2골 이상 기록자는 홍명보를 비롯해서 안정환, 박지성, 손흥민(이상 3골), 황선홍, 이청용, 이정수, 유상철, 김영권, 조규성(최초 1경기 멀티골)(이상 2골)이다. [15] 김주성은 미드필더에서 무릎 부상으로 인해 스위퍼로 포지션을 바꾼 것이여서 미드필더에서 오래 뛰기 힘들었다. [16] 주장은 최영일이었다. 그런데 최영일이 결장한 경기(멕시코전 등)엔 유상철이 대신 찼다. [17] 다만 당시 예선을 하면서 포스트 홍명보라며 장대일이란 신예가 등장하며 몇 경기는 빠지기도 했었다. 미남에 연예인과 약혼도 했던 장대일은 큰 주목을 받았다. [18] 물론 송종국과 이영표가 양쪽에 서서 수비에 활발하게 가담함으로써, 수비 상황에서는 5백과도 같은 상황이기도 하였다. [19] 훗날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은 2006년, 2010년, 2014년 월드컵에서 차례로 우승을 차지한다. 그러나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튀르키예와 이탈리아가 월드컵 진출에 실패하고, 폴란드, 독일이 32강 조별리그에서 탈락(독일 22위, 폴란드 25위),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16강전에서 탈락하며(스페인 16강 10위, 포르투갈 16강 13위) 이 기록은 깨진다. [20] 미국전에서 1실점, 그리고 터키전에서 3실점을 기록하며 7경기 6실점, 0점대의 실점율을 기록했다. 지옥과 다름없는 최악의 대진표로 월드컵 7경기를 모두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월드컵 0점대 실점율을 기록했다. [21] 당시 상대 공격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포르투갈의 루이스 피구 파울레타,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 토티 크리스티안 비에리, 스페인의 페르난도 모리엔테스, 독일의 미하엘 발락 미로슬라프 클로제 같은 유럽에서도 하이 레벨의 월드클래스 선수들이었다. [22] 애국가 영상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장면이기도 하며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기록하는 여러 기록물중에서 홍명보가 승부차기를 성공시키며 만면에 띈 웃음과 함께 양팔을 쫙펴고 달려가는 모습은 대한민국 4강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주로 쓰인다. [23] 이 사건에 대해 홍명보는 "유상철이 골키퍼에게 패스할 줄 알았다. 그 상황에서는 골키퍼에게 패스하는게 당연하다"고 해명했다. * [24] 이 사건을 계기로 홍명보와 유상철이 사이가 틀어져 그 다음부터 공식 석상에 한 번도 같이 안 나왔다는 얘기가 돌았는데, 당연히 루머이다. 그 후로도 같이 잘만 나왔다. # # 월드컵 3위·4위전은 월드컵 3위를 차지하는 보너스 경기와 같은 것이다. 상식적으로 난다 긴다하는 월드클래스 선수들도 어이없는 실수를 경우가 굉장히 많은게 축구인데 이거 가지고 싸워서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이 경기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원래 월드컵 3위·4위 결정전은 그동안 경기에 못뛰던 벤치 멤버가 나오거나 유종의 미를 거두는 식으로 김빠진 경기가 된다. 대한민국은 당시 우승 후보들을 탈락시키고 월드컵 4강 진출을 달성하고 그동안의 열정을 알기에 축제 분위기에서 보너스 경기처럼 대회를 마무리 했기 때문에 터키에 연속으로 골을 먹은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김병지가 이운재를 선택한 거스 히딩크 전 감독의 결정을 존중하고 인정하지만 3위·4위전에서는 내보내줄 수 있지 않았냐며 푸념하기도 했다. [25] 24개국 본선 진출 대회. [26] 또한 같은 해에 2002년 발롱도르 투표에서는 설기현이 노미네이트 되는 영광을 누렸다. 참조 [27] 2:3으로 대한민국이 아쉽게 패배했다. 호나우두가 혼자서 2골을 넣었으며 경기 막판에 호나우지뉴 페널티킥으로 결승골을 넣어 브라질의 전설 마리우 자갈루 전 감독에게 A매치 100승을 안겨준 경기로 더 유명하다. 이때 대한민국 감독은 김호곤이었다. [28] 그리고 손흥민이 다음 2026 FIFA 월드컵에도 출전한다면, 홍명보와 같은 FIFA 월드컵 4회 출전으로 타이기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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