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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03:09:02

허황옥

허왕후에서 넘어옴
<colbgcolor=#87CEEB><colcolor=#000> 허황옥
許黃玉
파일:attachment/her_start_1.jpg
일반적으로 알려진 초상화.
출생 32년
사망 189년 3월 1일 (향년 157세)
칭호 왕후(許王后) / 허황후(許皇后)
성씨 허(許)
이름 황옥(黃玉)
국왕 세조(世祖) 수로왕(首露王)
왕자 김거등(金居登)
출신국 아유타국(阿踰陁國)
묘지 구지 동북 언덕(龜旨 東北 塢)
1. 개요2. 기록3. 어디서 온 인물인가?
3.1. 인도 출신설
3.1.1. 아유타국설3.1.2. 타밀나두인설
3.1.2.1. 반응
3.1.3. 반론
3.1.3.1. DNA3.1.3.2. 유물
3.2. 불교윤색설
3.2.1.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아유타국3.2.2. '인도'에서 배를 타고 왔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이유3.2.3. 육로설도 어려운 이유3.2.4. 가야 철기와 인도와의 관계?3.2.5. 허황옥을 인도인으로 만들어야 할 이유
4. 여담5. 한인관계에서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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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허황후', '허왕후'라고도 불리며 한국 성씨 중 하나인 허씨의 시조. 《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나오지 않으며 《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만 등장하는 인물로 《삼국유사》에서는 고향 인도 아유타야라고 기록했다. 금관국 수로왕 혼인 아들 10명을 두었는데 2명에게 허씨 성을 주어 허씨 성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첫 두 아들은 김해 허씨가 되었고 여기서 더 갈라져 나머지 본관들이 생긴 식. 허씨 성을 물려받은 두 아들과 태자 거등왕을 제외한 아들 7명은 모두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경상남도 김해시 수로왕비릉이 현존하며 김해시는 이러한 이유로 인도의 아요디아 시와 자매 결연을 맺었다. 아요디아 시가 위치한 우타르프라데시 주에서도 김해시가 속한 경상남도에 자매 결연 및 교류 협력을 제안한 적이 있다. 다만 후술되어있듯 그 실체에 관해선 여러 설들이 제기된다.

여담으로 인도 현지에서는 "슈리라트나(Suriratna)[1], 심바발람[2]"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는 역사나 고고학적인 뒷받침이 있는 것은 아니고 인도의 저자인 "프라사난 팔타사라티(Prasannan Parthasarathi)"가 2015년에 발간한 만화책에서 그대로 황옥(黃玉)을 힌디어로 번역한 것이어서 실제 허황옥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이름이다.

2. 기록

건무(建武) 24년 무신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아뢰기를 “대왕이 강령하신 이래로 아직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셨으니 청컨대 신들의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항려가 되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니 짐에게 짝을 지어 왕후(王后)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일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라고 하고,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경주(輕舟)를 이끌고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望山島)[3]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망산도는 서울 남쪽의 섬이고 승점은 연하(輦下)의 국(國)이다.으로 가게 하였다.

갑자기 바다의 서남쪽에서 붉은 색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매달고 북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은 먼저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곧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왔다. 신귀간은 이것을 보고 대궐로 달려와서 그것을 아뢰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구간(九干) 등을 찾아 보내어 목련(木蓮)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열여섯살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황후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황천(皇天)을 뵈었는데, 황천은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라는 자는 하늘이 내려 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곧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것이 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림에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갔다. 꿈을 깬 뒤에도 황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을 향해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아름다운 모습으로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에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왔으니 이 사람에게는 매우 다행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이틀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니 이들에게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 내외도 역시 재갈을 나란히 수레를 함께 탔으며, 중국의 여러 가지 물건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오정(午正)이 되려 하였다. 왕후는 이에 중궁(中宮)에 거처하고 잉신 내외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은 비어 있는 두 집을 주어 나누어 들어가게 하였고,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빈관(賓館) 한 채를 주어서 사람 수에 맞추어 구별해서 편안히 있게 하였다. 그리고 날마다 지급하는 것은 풍부하게 하고, 그들이 싣고 온 진귀한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고 왕후의 사시(四時)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삼국유사》 제 2권 기이편 가락국기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장차 동쪽으로 가려 하였는데 파도신의 노여움에 막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 부왕(父王)에게 말하였다.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고 명하니 곧 쉽게 건널 수 있어서 남쪽 해안에 정박하였다........ 탑은 모가 4면으로 5층이고 그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 돌에 미세한 붉은 반점 색이 있고 그 질은 무르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4]
《삼국유사》 제 3권 탑상편 금관성파사석탑

3. 어디서 온 인물인가?

허황옥의 출신지에 대해 학계에 다양한 학설이 존재한다. 애초에 가야사와 관련된 기록이 극소수일 뿐더러 그나마도 부실하고 유적 발굴에만 의존하는 형편이기 때문. 그런고로 기록 그대로 현 인도 지역으로 추정되는 아유타국에서 왔을 것이라는 설, 본래 토착민이거나 혹은 이주민이더라도 인도인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은 허황옥을 권위를 위해 불교적으로 윤색하고 그 과정에서 인도를 끌어와 신성성을 부여시킨 것이라는 설 등 여러 의견이 많았다. 다만 아유타국설은 근거가 많이 부족하여 기존 학계에선 주로 불교 윤색설을 신뢰하는 분위기였는데, 일부 DNA 연구가 진행되며 현재는 인도 북부 아유다도, 아유타국도 아닌 인도 남부 타밀나두에서 왔다는 설 역시 부상하고 있다.

3.1. 인도 출신설

3.1.1. 아유타국설

허황옥 관련 현전하는 실질적인 기록은 위에 인용한 삼국유사 가락국기뿐이다. 다른 기록은 전부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고 쓴 2차적인 것들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허황옥은 아유타국(阿踰陁國) 공주 출신이다. 정확한 위치는 논란이 있으나 허황옥 인도인설을 긍정하는 쪽에서는 인도 북부의 아요디아(Ayodhya)에 있었던 아요디아 왕국이나 후술된 인도 남부의 칸야쿠마리 지역 등을 아유타국이라고 추측하는 편이다.
파일:external/www.futurekorea.co.kr/28070_18883_3314.jpg
한양대학교의 김병모 교수가 2006년도에 추정한 아유타국의 위치[5]

태국 지역의 왕국이었던 아유타야(Ayutthaya/Ayudhya)를 거론하며 헷갈려하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이는 인도의 신화인 라마야나에 등장하는 아유타(혹은 아요디야)지역명에 영향을 받았기에 이름만 비슷할 뿐[6] 시대적으로는 완전히 동떨어진 나라다. 아유타야 왕국은 14세기 중반~18세기 중후반 까지 존속했다. 중세시대 중반기에 수코타이 왕국이 세워지기 전까지 타이족의 국가 자체가 존재하지 않거나 크메르 등의 타국의 주민으로 활동하였다.

2012년 방영된 KBS 스페셜 등 허황옥 아유타국설을 긍정적인 입장에서 다룬 대중매체에서는 가야에서 아유타국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인도계 유리 구슬이 나오고 가야의 철정 기술이 인도 남부와 유사한 점 등을 거론하기도 했다. 실제로 삼국유사에 적혀있듯 허황옥이 한국으로 가져온 돌로 쌓은 파사 석탑이 지금도 김해시의 수로왕비릉에 현존하고 있는데, 조사 결과 이 은 한반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재질이라고 한다. # 정확하겐 한반도에서는 나지 않는 엽랍석 성분의 사암으로, 중국이나 일본, 베트남 등에서 나는 재료라고 한다.

한반도의 철정 기술은 기원전 7-5세기에 무산의 범의구석 제5문화층에서 출토한 도끼, 기원전 4-3세기- 범의구석 제6문화층과 기원전 2세기경의 시중군 노남리, 중강군 토성리, 영변 세죽리 출토 철기들이 선철(銑鐵) 제품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기원전 5-4세기에는 철기를 부분적으로만 사용했고 기원전 3-2세기에 비로고 철기가 광범하게 보급되었다고 주장한다.[7] 기원전 3∼2세기 무렵 한반도의 세죽리유적(細竹里遺蹟)은 신석기· 청동기· 철기의 순서로 된 문화층이며 5기의 주거지와 함께 철제의 호미·괭이·낫·도끼·끌·손칼·살촉·명도전 등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3.1.2. 타밀나두인설

허황옥이 인도 남부 타밀나두의 칸야쿠마리(카니아쿠마리) 지역에서 왔다는 설이다.

2004년 서울대 연구팀이 가야 대성동 고분군에 가야 왕족으로 추정되는 유골들의 유전자 검사를 진행한 결과 7개 중 6개의 미토콘드리아가 남인도 타밀족의 DNA와 일치한다는 것이 확인되어, 어느정도 신빙성 있는 가설이 되었다.[8] 미토콘드리아 유전물질은 모계를 통해 유전되는데 서울대학교 유전학 연구소 서정선 교수와 한림대학교 의대 김종일 교수가 김해 예안리 고분 유골의 염기서열을 분석한 결과 57호 순장자의 염기서열이 인도 남방계 타밀 쪽 유전자와 가깝다는 것. 즉, 이 무덤에 안치된 사람의 조상이 곧 허황옥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인도 남방 타밀계 사람과 비슷한 유전자를 가졌을 개연성은 높다는 말이다. #, 관련 KBS 영상.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유골들 중에서 타밀인들을 포함하는 남방계 유전자인 모계 M7 유전자가 검출됐다는 것이다.

미토콘드리아는 수백 세대격인 수만년간 변이가 일어나지 않고 모계쪽에서만 전달되기에 Y 염색체와 함께 인류의 이동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고 한다. 이를 통해 가야 왕실과 남방계가 무언가 연관성이 있다는 것 자체는 사실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이러한 유전학적 분석은, 고고학적 분석과 역사학적 분석과는 다른 것이며, 유전적인 분석이 고고학, 역사학을 뒷받침해주는 자료는 될 수 있지만, 고고학적 증거와 문헌 없이 오직 유전적인 증거로만은 결판을 낼 수 없다. 또 구글 검색 결과 확인 가능한 2004년 기사에 따르면 연구팀은 "유골 4구 가운데 1구에서 이같은 결과를 얻었으며, 나머지 유골 3구를 더 연구하면 정확한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추후 연구 결과에 대해선 확인이 필요한 부분.

또한, DNA에 관련된 영상에 후술된 김종일 교수 설명에 따르면, 남방계 유전자가 꼭 인도 지역으로만 한정되는 개념은 아니다. M7 남방계는 아프리카에서 나와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인도 남부와 남아시아 등지까지 훑는다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 정확하겐 이 M7과 인도 타밀 지역 사람 샘플 하나, 이렇게 둘 다가 당시 가야 고분 유전자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 언급한다. 단지 연구 당시 아무런 타밀인 한명을 데려와 DNA를 검사해보니 결과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마치 유골의 신변 = 타밀인으로 포장했다는 것이 함정. 사실상 타밀계를 떠나 남방계 사람일 확률이 높아진 것이지, 타밀을 콕찝어서 거론된 것이 아니다.

관련해서 절충론 비슷하게, 허황옥은 사실 타밀어 사용 지역인 인도 남부 지역에서 왔되, 일연이 좀 더 불교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불교의 기원지와 가까운, 힌디어 냄새가 나는(?) 인도 북부 지역의 지명을 사용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는데, 아직은 말 그대로 뇌피셜 수준이라 확신할 근거는 없다.

타밀어와 한국어의 유사성[9] 설명할 자료가 없었는데 이와 연관지을 수 있다는 것이 해외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다만 오해하면 안되는 것이 허황옥이 타밀어를 들고 와서 한국어와 타밀어가 유사해진 것이 아니라, 허황옥의 존재 자체가 고대에 한국과 타밀 지역이 교류했다는 증거이며, 타밀어와 한국어의 유사성도 뿌리가 같아서가 아닌, 교류를 통해 전해진 것으로 보이기에 문헌과 고고학 자료가 하나도 없는 한국과 타밀 지역의 교류에 대한 증거 중 하나로서 사용될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이다. 타밀어와 한국어의 유사성도 대부분 우연의 일치나 억지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틀렸다고 단정짓기도 애매한 것이, 원래 언어의 전파 과정 자체가 미지수인 부분이 있고, 유래나 언제부터 쓰였는지 모호한 단어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정설은 아니더라도 가설의 근거로서 허황옥이 타밀에서 왔다는 것을 뒷받침하기에 쓸 순 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드라비다어-한국어 동계론(Dravido-Korean Theory)" 자체가 현재 언어학계에서는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있기 때문에 이 또한 지지가 멈춘 상태. 더군다나 이 모든 것은 아직은 가설 단계이며, 가야 지역과 타밀 지역이 서로 교류했다거나 하는 식의 고고학적 자료가 확실히 뒷받침되지 못해 좀 더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3.1.2.1. 반응
남인도인들은 대개 이 학설을 지지하며 사실상 정설로 취급하는데, 그래서인지 허황옥이 북인도와 연관되는 것을 일종의 역사왜곡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인도 유튜브에서 허황옥 관련 영상이 다루어질 경우 십중팔구는 댓글창에서 남인도인(주로 타밀계)과 북인도인(주로 힌두계)들이 서로 역사왜곡하지 말라며 키보드배틀을 뜨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인도계 댓글러들은 학계를 통한 출처나 인용문을 채용한 것이 아닌 단순한 "우리 엄마가 말하길... 우리 할머니가 말하길..." 등의 이야기를 말로만 듣고 그대로 믿는 것이 함정. 이로인해 "허황옥이 500명이나 되는 인도인들과 한반도에 도착했다"부터 "한국인은 원래 타밀계"라는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3.1.3. 반론

3.1.3.1. DNA
2023년 기준, 가야에 대해 새롭게 발견된 과학적 정보로 인해 허황옥과 그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이들이 인도에서 왔다는 가설의 신빙성은 많이 떨어지고 있다.
파일:2022년 가야 DNA.png
2022년에 발표된 삼국시대 남부쪽 DNA 분포 그래프 ( 출처)
보라색 조몬계 DNA
노란색은 중국 북쪽( 만주 - 시베리아) 기원 DNA
현대 기술로 밝혀진 결과, 가야는 다수 인종이 살던 국가로 여겨지고 있으며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한국계"가 아닌 조몬인들도 살고 있던 곳으로 알려진다.[10][11] 조몬인 문서를 읽으면 알 수 있듯이 하필이면 이들의 모계 하플로가 M7a(남방계)이며 고대 가야가 위치했던 곳에 가장 많이 발견된다고 한다.[12]

뿐더러 이 조몬계 DNA를 가진 이들 중 다수가 가야의 왕족이었다는 걸 봐, 위에서 상술된 허황옥의 자손으로 여겨지는 이들에게서 검출된 남방계 유전은 그들이 사실 조몬계여서 나타났을 확률이 높다. 이 때문에 그나마 과학적으로 가장 유력했던 타밀나두 출신설이 더욱 믿기 어려워졌으며, 이유는 같은 남방계여도 지리적, 고고학적, 역사적으로 한반도에 인도인보다 조몬인이 존재했을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

즉, 허황옥의 인도 출신설이 당시 가야에 있던 조몬계 민족의 존재로 인해 사실인 것마냥 정설이 됐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을 따르면 유골의 기원은 인도계가 아닌 조몬계이며 2004년도 연구가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상 자료 부족으로 인해 별 진전이 없는 인도설 보다 꾸준한 연구와 새로운 자료가 더해지는 요소들: 남방계 M7 유전자의 존재, 주 거주 국가였던 가야, 임나일본부설 반도 일본어설 등 가야가 일본과 자주 엮이는 것을 보면 가야의 왕실은 남쪽 북쪽 상관없이 인도인들이 아닌 조몬계에 가까운 인물들이였을 확률이 더 높다.
3.1.3.2. 유물
허황옥을 상징하는 "쌍어" 모양의 기원도 확인된 상태. 확실히 아유타(인도)에서 시작된 것도 아니었다.
파일:김병모 허황옥 2018.jpg
2018년 김병모 교수가 정정한 '신어사상'의 루트
앞서 상술된 아유타국의 위치를 추정한 김병모 교수가 최근에 기재한 신어사상의 기원 지도를 따르면 쌍어를 나타내는 풍습의 기원은 바빌로니아였다고 하며 인도를 포함해 이라크, 러시아, 중국, 일본 등에서도 나오는 유물이라고 한다. 김병모 교수 또한 허황옥이 실제 인물이길 바라며 여태 연구를 진행해왔지만 고고학적 결과들을 봤을 때 가상의 인물일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신어사상의 쌍어의 기원이 인도(아유타)라고 추측됐던 유물들마저도 의미를 잃어버린 상태.

3.2. 불교윤색설

학계에서는 허황옥의 출생지를 불교적으로 윤색하고 신성성을 부여한 것 아닐가 하는 설에 더 무게를 싣는다. 기록에 쓰여진 것이 다 사실이라고 보는 설은 인도학, 불교학 관련 논문 일부 등에서만 주장하는 소수설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3.2.1.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아유타국

'아유타(阿踰陀)'는 '아요디아(Ayodhya)'를 가리키는 듯한데, 문제는 '아요디아'라는 지명이 굽타 왕조 시대, 즉 4세기 이후에 성립한 듯 보인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사케타(Saketa)'라고 불렸고 5세기 법현의 <불국기>에서도 '사케타'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사기(沙祇)'라고만 나타난다. 7세기에는 '아유타'라는 지명이 보인다. 고로 이 설이 맞는다면 당연히 1세기에 한반도에 왔다는 허황옥이 '저는 아유타국 출신입니다.'라고 소개할 리 없다.

3.2.2. '인도'에서 배를 타고 왔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이유

현실적으로 볼 때 당시 인도 지역에서 '아유타국'으로 후대에 불리게 되는 지역 사람이 해로를 통해 한반도까지 올 가능성이 희박하다. 항로 자체가 한 사람이 스쳐가듯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서 고생 끝에 만들어낸 경로가 대부분이다. 현실적으로 예전 바다를 건넌다는 것은 한반도에서 일본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이런 경우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으며 일본처럼 항해가 발달할 수 있는 환경의 국가도 견수사 파견 등의 예를 보면 일본에서 중국으로 바다를 건너는 정도도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고 그 심각한 어려움 때문에 견수사로 파견된 인구도 매우 적을 뿐만 아니라 횟수도 매우 적을 수 밖에 없었다. 차라리 말을 타고 육로로 이동하는 것이 훨씬 가능성이 있다. 현재 불교라고 생각하면 인도를 떠올리기 쉽지만 당시 가야가 존재하던 시기에는 인도보다는 간다라 등 불교가 융성하던 곳은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 동부의 대월지국이였으며 이들은 기마민족들이기 때문에 육로로 간다라 양식 불교가 한반도로 전파될 가능성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단 더 높다. #

실제로 인도로 가는 가장 유력한 경로는 실크로드를 거친 육로였으며 당시 불교라고 생각하면 인도를 생각하기 쉽지만 당시 불교가 가장 융성하였던 곳은 현재 아프가니스탄 동부의 중앙아시아 근처 간다라 지역 이였고 이곳은 주로 서쪽의 몽골 지역을 통하여 만주까지 길이 이어졌다. 중국에 불교가 수입된 것 또한 입국 승려들의 국적을 볼 때 실크로드를 거친 것으로 여겨지며 이 경향은 4세기 무렵까지 변화하지 않았다.

물론 해양 경로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김해에서 출토된 유리 유물 중 일부가 인도계로 추정되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문제는 이 김해 출토 유리기는 2~4세기 유물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허황옥 전설의 시대와 맞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가야 자체의 건국 기년이 끌어올려졌다는 의견이 다수이기에 넘어가더라도, 이 유리 유물의 출토 지역은 Arikamedu, 현재의 Kakkayanthope 인근 지역으로 추정된다( 링크). 그런데 후대에 '아요디아'로 불린 지역은 갠지스 강의 지류에 붙어 있는 내륙... 아니, 말이 내륙이지 오늘날의 지리적 관점에서는 남인도보다 히말라야 산맥에 더 가까운 지역이다. 지도 지리적으로도 이 지역은 내륙과 연결된 쿠샨 왕조의 지배를 받거나 지척에 있는 지역이었으며( 지도) 동방 여행을 간다면 육로가 더 나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도 추측의 영역이다.

그러나, 현지인들은 우타르프라데시의 아요디야는 옛날에는 사케타라는 이름이었고 타밀나두의 칸야쿠마리가 옛날에는 아유타라고 불렸기에 허황옥은 타밀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위치적으로는 유리구슬의 원산지와 정확히 일치하긴 하다.

가덕도에서 신석기시대 유물과 묘에서는 유럽계 유전자가 많이 발견되었다. 섬에 머문 것으로 해로를 따라온 것으로 추정된다. 해로로 왔다면 인도를 경유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근해로 오는 것은 어려움이 없다. 문제는 육지를 경유할 때 마찰이 생기는 경우다.

3.2.3. 육로설도 어려운 이유

허황옥이 육로로 한반도까지 왔다고 가정할 경우 경로는 다음과 같다. (허황옥 인도유래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지도들도 다 3가지 경로를 제시한다)
가덕도에서 신석기시대 유물과 묘에서는 유럽계 유전자가 많이 발견되었다. 섬에 머문 것으로 해로를 따라온 것으로 추정된다. 해로로 왔다면 인도를 경유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근해로 오는 것은 어려움이 없다. 문제는 육지를 경유할 때 마찰이 생기는 경우다.
  1. 티베트 경유
북인도 (북쪽으로) ➝ 히말라야 ➝ 티베트 ➝ 칭하이 호 일대 ➝ 서량 ➝ 중원 ➝ 요동 ➝ 한반도
2. 중앙아시아 우회
북인도 (서쪽으로) ➝ 파키스탄 ➝ 중앙아시아 ➝ 타클라마칸 사막 서량 ➝ 중원 ➝ 요동 ➝ 한반도
3. 미얀마 경유
북인도 (동쪽으로)➝ 아라칸 산맥 ➝ 미얀마지역 ➝ 남만 익주 ➝ 중원 ➝ 서해 ➝ 한반도 (위의 지도 참조)

문제는 1, 2, 3번 모두 힘들다는 것이다. 일단 허황옥 일행이 중원까지 도착하기가 힘들다. 이 경로들은 하나하나가 현재도 교통로가 미비하여 거쳐가기가 힘든 지역이며, 고대에는 더욱 더 거쳐가기가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당시에 이 경로를 인도인 귀족 집단이 무사히 통과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에 가깝다.
1번이 어려운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티베트인들은 아직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았으며 강족의 한 갈래였다. 강족은 사나운 오랑캐로 이 당시 중국의 변경을 습격하며 살고 있었다.[13] 당연히 외부인이 자기 영역을 통과하는 것을 묵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한말 끊겼던 실크로드는 후한의 명장 반초의 활약으로 흉노를 격파하고 1세기 후반에 다시 이어지지만, 이것은 타클라마칸-서량의 통로를 확보한 것일 뿐이며, 그 남쪽에 있는 티베트 지역은 당시 강족의 부족국가들이 할거하고 있었다. 이런 곳을 인도인 귀족집단이 무사통과하기란 어림 없었을 것이다. 비단 강족이 아니더라도 히말라야는 평균 해발 5,000m 이상, 티베트는 평균 해발 4,000m에 이상인 고지대이며, 고산병 및 혹독한 기후로 물리적으로 통과하기가 어려운 지역이다. 17세기 말 아르메니아인 상인 호바네스가 티베트의 라싸에서 칭하이성[14] 시닝으로 이동하는데 1년이 걸렸다고 한다.[15][16] 도로가 없는 거친 산악지대를 약탈이나 습격에 대비해서 이동하려면 이동 속도가 무척 느릴 수 밖에 없다. 라싸와 시닝의 거리를 기준으로 인도에서 가야까지 이동 시간을 계산하면 허황옥은 청춘을 전부 다 산과 숲을 타고 넘는데 낭비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2번의 경우는 허황옥이 불교의 전파로를 타고 들어왔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가능성이 조금은 있는 경우다. 이 경우에는 티베트를 거치지 않고, 쿠샨 왕조의 행정력이 미치던 현재의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쪽으로 우회해서 역시 후한이 장악한 실크로드 동쪽을 거쳐 중원까지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당시에 지루가참 같은 인도승려가 낙양까지 와서 역경사업을 했으므로,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경로도 보통 위험한 것이 아니며, 그보다 수백년 후에 그 루트로 중국에서 인도로 갔던 현장도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고서야 겨우 인도에 닿았다. (그리고 그 모험담이 서유기로 각색된다.) 종교 전파의 사명을 띤 역경승이나 구법승이 목숨을 걸고 넘어갔던 루트를 인도인 귀족집단이 위험을 무릅쓰고 통과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3번은 1번만큼이나 가능성이 없다. 먼저 인도-미얀마 사이에는 험준한 아라칸 산맥이 있으며, 아라칸 산맥은 인도와 동남아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이곳이 얼마나 험준한 곳이냐면, 그보다 약 1800년 후인 서기 1944년에 이곳에서 벌어진 임팔 작전에서 작전에 참가한 일본군 반이 아사했을 정도로 인간이 통과하기 힘든 지역이다. 게다가 운좋게 미얀마 지역에 닿았다고 해도, 미얀마의 북쪽에 있는 남만에서 중원으로 들어가기가 상당히 어렵다. 제갈량의 남만 정벌에서 보듯이 문명과는 거리가 먼 미개종족의 영역이었으며, 자연환경도 야생동물과 병충해가 들끓는 열대 밀림지대라서 통과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설령 여기를 넘어 왔다고 해도, 후한의 치세는 2세기 중반부터는 급격히 약화되며 이 후부터는 중원을 통과하기도 어려워진다. 이렇게 약화된 결과 2세기 후반에는 황건적의 난 삼국시대(중국)가 펼쳐진다. 허황옥이 그나마 중원을 통과할 가능성이 있는 시기는 반초가 활약한 1세기 후반부터 당고의 화로 후한이 어지러워지기 직전까지인 2세기 중반까지 약 50여년 뿐이며, 그 이후에는 중국 대륙이 군벌로 갈려 매일을 전쟁으로 싸우던 시기라서, 중원을 통과하기 힘들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2번을 조금 변형해서 인도인 이주집단이 중국 쓰촨에 머물렀을 때, 허황옥이 태어났다는 설을 주장한다. 그 근거는 허황옥의 묘비에 새겨진 "보주태후허씨릉"이라는 명문이다. 이를 근거로 인도 이주민들이 2번투트로 쓰촨까지 와서 허황옥을 보주(普州) (현재 쓰촨성 안웨현)에서 낳았다는 설을 주장하고 있고 환빠스러운 일부 언론에서도 비슷하게 주장하는데 #, 이것도 말이 안된다. 중국어 위키 백과 #에 따르면 보주는 북주 (AD 575)시절 처음 설치되었다 수나라 때 폐지되고 다시 당나라 때 설치되고 이후 설치와 복원을 반복하다 명나라 때 최종 폐지된다. 허황옥이 살았던 시기는 보주가 처음 설치될 북주 시기보다도 400년 전인 후한 시기이므로 보주 탄생설도 허무맹랑한 설이다.

3.2.4. 가야 철기와 인도와의 관계?

가야의 철정 제작 기술이 인도와 비슷하다는 주장은 근거조차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인도 고인돌에서 나왔다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인도는 유럽 대륙만큼 넓다. 게다가 영문 위키백과의 고인돌 목록(List of Dolmens) 문서에서는 '아유디아'(다시 말하지만 후대에 그렇게 불리게 되는 지역)가 속한 우타르 프라데시 주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고인돌이 제작되는 것은 인도에서도 철기 시대의 일인데, 4대 문명에 속한 범인도 지역은 철기시대도 빨라서 한반도와는 500년 이상 차이가 난다. 이러한 무리한 추정과는 달리 한반도의 철제 유물 제작 기술은 대체로 전국시대 중국의 제철 기술이 고조선을 거쳐 한반도 남부로 확산된 것으로 여겨진다(이성주(2007), <청동기·철기시대 사회변동론>, 학연문화사).

또한 조금만 생각해보면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는데, 허황옥과 인도 제철 기술의 전래(만일 그런 것이 존재하기는 했다면)가 관련이 있다면 허황옥은 여행 다니는 와중에 배에다가 광산 노동자와 제철 기술자를 싣고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고대 항해는 현대인의 생각보다 여러 모로 경이롭기는 하지만 그것은 성공 사례일 뿐, 전근대에 배 타고 멀리 가다가 식량 떨어져서 굶어죽는 배가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해 보면[17] 항해에 아무짝에 쓸모없는 인원을 태우고 한반도까지 온다는 것은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다.

3.2.5. 허황옥을 인도인으로 만들어야 할 이유

허황옥의 출신지를 굳이 각색할 이유가 있냐는 것도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간단한 문제다. 불교계에서 인도는 천축국 말 그대로 성지이며, 진흥왕도 아소카 왕이 만들다 못 이룬 불상이 어쩌다 떠내려와서 신라에서 완성했다는 터무니없는 얘기를 하며 어떻게든 인도와 연결짓고 싶어 했을 정도로 선망의 대상이 되던 곳이다. 그뿐만 아니라 개국 전설은 후대에 신화화되기 가장 좋은 소재이다. 단군, 박혁거세, 고주몽, 해모수 등 고대 국가의 개국에는 객관적 사실과 무관하게 전설들이 많다. 가야 역시 "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잡아서 구워 먹겠다."라는 노래로 대표되는 건국 신화가 있었다. 물론 현대인들은 곰이 쑥과 마늘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 등 이런 신화를 말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로 알아듣는 사람은 없다. 즉 신화적 기록은 사실과 허구가 섞인 거라고 이해해야 합리적이다. 고로 허황옥의 경우도 이런 건국 신화처럼 후대인들이 각색하여 신성한 권위를 부여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허황옥 일가가 가야에 미쳤던 영향력을 고려해야 되는 측면도 있는데, 좌지왕 시절 허황옥 일가는 왕의 결정을 거부하고 이를 관철시킬 만큼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에 질지왕이 왕후사를 짓고 허씨 가문과의 연대를 공고히 하는 등의 모습들도 보인다. 즉, 가야 왕실이 허황옥 집안을 높이기 위해 불교적 윤색을 할만한 영향력은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는 것. 신라에 병합된 이후 김유신 후손들이 가야 세력의 영향력을 높이는 과정에서 허황옥을 신격화시켰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또 나아가 왜 기록이 삼국유사에만 적힌 것인가에 대해서도 한번쯤 고려해볼 만하다. 삼국유사에 기록될 정도면 다른 역사서에도 충분히 이런 얘기들이 기록될 여지가 있었을 텐데 삼국사기 등에선 이런 얘기를 적지 않았다.[18][19]

애초에 시조 또는 추앙하고자 하는 인물의 격을 높이기 위해 억지로 외국을 엮은 전설, 전승은 흔하다. 예를 들어 고대 로마 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트로이 인이라고 주장했으며, 아우구스투스 베르길리우스를 시켜 트로이 전쟁과 로마 건국을 엮는 이야기를 꾸며내도록 하였다. 그것이 바로 아이네이스다. 한편 트로이는 영국의 전설에도 이용되는데, 브리튼 섬의 초대 왕 '브루투스'가 트로이인의 후손이며, 그 브루투스 왕의 직계 후손이 바로 아서 왕 이라는 내용이다. 물론 아이네이스건, 아서 왕 전설이건 트로이인의 후손이 로마인, 영국인이라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허황옥 전설을 다르게 볼 이유가 없다.

4. 여담

전설(가락국기)에 따르면, 허황후가 가야 땅에 도래할 때 신하 신보(申輔), 조광(趙匡)과 그 두 사람의 아내 모정(慕貞), 모량(慕良), 시종 등을 포함해 20여명이 상륙했다고 한다. 특히, 그중 허황옥의 오빠이자 승려 장유(長有), 또는 장유화상[20]이라는 인물도 있었다. 김해시 장유면(現 장유동) 이름이 유래이며, 신어산 소재 영구암을 창건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미 고대부터 준전설 취급이었던 탓인지 의외로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21]

5. 한인관계에서

여하튼 허황옥이 자주 인도 출신이라고 언론매체에 소개되는 이유는 불교계의 영향력도 있고, 현실적인 측면에서도 한-인도 친선 외교 관계에서 중요한 인물로 부각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도 가락중앙종친회는 매년 아요디아를 방문해 제사를 지내고 있고,[22] 심지어 인도에는 지금도 아요디아 왕족이 존재한다. 아요디아 라자의 궁전에 가면 허황옥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데, 라자도 허황옥이 자기 집안 사람이 분명할 거라고 믿는다고. 이 라자 가문은 1999년 국민의정부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의 초청으로 방한하여 김해 김씨 종친회와 공동으로 수로왕비릉을 참배한 적도 있었으며,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 김수로왕과 허황옥 왕후의 만남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를 개최할 때도 마찬가지로 구경을 왔었다.

인도에서는[23] 한국-인도 관계의 상징적 인물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실제 2010년대 들어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박근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당시 한국과의 인연을 강조하며 허황옥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이를 주제로 한 소설 <비단공주>가 인도 현지에서 출간되기도 했고, 뮤지컬 제작 논의도 있었으나 현재는 감감무소식인 듯. 전 인도 대사 인터뷰.

2018년 문재인 전 대통령의 인도 국빈 방문 당시에도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인도 공주가 한국에 와서 수로왕과 혼인해 일가를 이뤘고, 그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한국에는 아주 많다고 한다. 놀랍지 않은가?"라는 식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인도 외교부 산하 단체인 인도문화교류위원회(Indian Council for cultural Relations, ICCR)에서도 허황옥을 주제로 2015년 7월 14~15일 간 컨퍼런스를 연 적이 있다. 사무총장 사티시 메타(Shri Satish C. Mehta) 사무총장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에 인도와 관련이 있는 분[24]천만 명 가까이 있다는 것은 양국 관계 발전에 큰 힘이 될 것이며, 이번 컨퍼런스는 인도가 한국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2015년 9월에 김해시 부산광역시는 허황옥이 배를 타고 인도에서 김해로 오는 과정을 재현한 허왕후 신행길 축제를 공동으로 개최하였다. 앞으로도 매년 개최하여 특색 있는 전통 관광상품으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2018년 11월 2일(현지시간)에 영국의 BBC는 김정숙 여사의 인도 방문을 앞두고 허황옥 관련 이야기를 보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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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30일에 한국과 인도에서 허황옥을 주제로 한 기념우표가 공동발행되기도 했다.

2019년 10월 5일 김해에서는 허황옥 콘텐츠 공모전을 개최했다. 이 또한 주한인도대사가 참관하고 주한인도대사상 경우 인도대사가 직접 수여했다.

2019년 한 유튜브 영상을 보면 심지어 아요디아 지방과 관련도 없는 타밀어 한국어 비교 영상에까지 인도인들이 몰려와서 허황옥 드립을 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타밀어를 쓰는 지역은 인도의 남쪽 지방이다. 실제로 해당 영상에서는 힌디어 화자인 인도인 유저가 "난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는 댓글도 남긴 것을 볼 수 있다.) 인도 국내에 허황옥 신화가 생각보다 제법 퍼져있기는 한 듯.

다만 허황옥의 출신지가 남인도인 타밀나두 지역이라는 학설도 존재하고, 남인도인들은 사실상 이 학설을 정설처럼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리 이상한 현상은 아니다. 게다가 남인도와 북인도 사이의 지역감정도 이러한 논쟁에 한몫 보태는 중이기도 하다.

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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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인도 [2] 타밀쪽 [3] 부산광역시 강서구 송정동에 위치한 섬. 행정구역상 부산이지만 창원시 진해구 용원동 시가지와 붙어있다. 근처에 대한제국 순종때 허왕후 전설을 전하기 위해 만든 유주비각이 있다. 다만 이 망산도가 기록상 망산도가 맞는지에 대해선 학계에서도 견해가 분분한 편이다. 당연한 소리지만 과거의 지형과 지금의 지형은 특히 바다와 인접한 섬의 경우 다를 확률이 높기 때문. [4] 일연 스님이 직접 현장답사를 가 파사석탑을 관찰하고 쓴 글. 실제 현대 조사에서도 재질이 한반도에서는 나지 않는 엽랍석 성분의 사암으로 밝혀졌다. 다만 인도라고만 확정할 순 없고 중국이나 일본, 베트남 등에서도 나는 재료라고 한다. [5] 참고로 위 지도는 인도 혈통의 중국인 허황옥이 대륙을 건너 다시 해로를 통해 한반도로 건너온 것이라는 설을 주장한다. 허황옥을 일컫는 보주태후에서 보주가 뭘까 고심하다 이게 중국 사천땅의 옛 지명이고 이곳에서 허씨 성을 가진 인물이 마침 비슷한 시기 반란사건을 일으켰다 진압당한 사실에 착안해 추측성 주장을 한 것. 물론 딱히 명확한 물증은 없다. [6] 인도 신화와 태국의 신화는 상당히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거나 내용이 거의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는 라마야나 서사를 태국식으로 해석한 '라마끼안'이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태국인들의 정체성과 사고에 큰 영향을 주는 신화이기도 하다. 태국인들 절대다수가 불교를 믿으며 사실상 불교국가나 다름없기 때문에 가능한 점. [7] (『조선고고학개요』). [8] 다만 밑에 후술됐듯이, 최근에 와선 조금 신빙성이 떨어진 상태. [9] 다만 항목에도 있듯 유사언어학스런 분위기도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10] 다만 실제로 조몬인보다 즐문 토기 시대인의 후손들일 확률이 더 높다. 둘 다 거주지만 다를 뿐(한반도/일본열도) 같은 조몬"계"이자 문화적으로 비슷했기 때문. 자세한 내용은 고훈인#한국 문서 참조. [11] 같은 시기 한반도에 아주 극소수로 퉁구스족도 존재했다고 한다. [12] 다만, 그렇다고 가야가 일본 영토였다거나 일본의 식민지라는 뜻은 아니다. 단지 일본어와 유사한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고 유전자도 조몬계에 가까웠다 뿐이지 임나일본부설에서 주장하는 바는 절대 아니다. 애당초 가야 또한 삼한에서 파생된 구역이였으며 그들 또한 고구려, 백제, 신라를 포함해 "한(韓)"족으로 여겼을 것이다. 추후 신라한테 흡수당해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 현재 한국인들한테도 평균 5%의 조몬계(남방계) DNA가 남아있다고 한다. 여담으로, 현대 일본인(야마토인)들에게도 조몬인의 DNA는 많아봤자 13%에 그친다고 하며 적으면 3%까지 떨어진다. 현대의 조몬인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아이누 문서 참조. [13] 허황옥의 동시대인 삼국지에 등장하는 서량 출신 대군벌들 ( 동탁, 마등, 마초, 한수)가 엄청난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강족을 막는 한족의 방어선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14] 당시에는 간쑤성 [15] 약 2,000km의 거리이며, 현재는 칭짱철도가 놓여 있어서 이틀이면 간다. 하지만 이 철로를 놓느라고 중국 측은 수백명의 건설노동자가 순직할 정도로 악전고투를 했다. [16] 대충 간단하게 계산해도 직선거리 상 하루에 평균 5km를 간 셈이다. [17] 비타민 부족으로 숙련된 항해사들마저 괴혈병으로 픽픽 죽어가던 시기가 1~2세기도 아닌 자그마치 16세기까지 존재했다. 물론 대항해 시대로 대표되는 원양항해 이전에는 근해에서 항해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한국의 바다 유적이나 조선 통신사에서 알 수 있다싶이 그런 배들도 심심하면 암초에 부딛히거나 파도에 휩쓸려 죽기까지 했다. [18] 삼국사기는 어디까지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만 쓰여있다. [19] 물론 '이러한 전설이 있다.' 정도는 쓸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것조차 안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승려 묘청의 난을 진압하기도 한 유학자라 불교를 배척한 점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해볼 수 있다. 또한 김부식이 적은 삼국사기는, 주로 한국 본토에서 기록된 글과 전승되는 이야기들을 옮겨 적은 삼국유사와 다르게, 중국 기록을 많이 참고하여 옮겨 적은 부분이 많다. 또 승려 일연 입장에서도 불교와 관련된 허황옥 얘기는 꼭 쓰고 싶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 김부식은 괴력난신을 배격하였기에 기실, 허황옥 얘기만이 아니고 많은 건국신화를 배격했다. [20] 和尙, 과거에 문어체에서 승려를 높여 부르던 단어. [21] 오죽하며 승려 일연이 엮은 삼국유사에서조차 영구암 창건 일화를 소개하며, "~라는데 믿기 어렵다"라고 적어 놓은 지경. [22] 다만 김해 김씨 문중내에서도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논개처럼 전설이 있다 정도로만 언급하고 기념해도 될 것을, 확실하지도 않은 설에 너무 오버한다는 것. [23] 선을 그었지만 실제로 극우힌두민족주의 세력에서 이용해 먹고 있다. 어떻게 보면 고대 인도의 해외 진출의 하나로 볼 수도 있는 내용이기 때문인 듯 하다. [24]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인천 이씨 등 ‘가락종친회’ 회원. [25] 서지혜는 2005년에 방영된 MBC 드라마 신돈에서 원나라에서 고려로 시집온 노국대장공주 역을 맡은 바 있었기 때문에 김수로에 출연하면서 외국인 출신 왕비를 2번이나 연기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