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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타야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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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타야 왕국
อาณาจักรอยุธยา
파일:아유타야 왕국 국기.svg 파일:Seal_of_Ayutthaya_(King_Narai)_goldStamp_bgred.png
국기 국장
파일:Southeast_Asian_history_-_Around_1540.png
푸른색이 아유타야 왕국의 판도이다.[지도설명]
1351년 ~ 1767년
위치 방콕, 아유타야 일대
수도 아유타야(1351-1463),
핏사눌룩(1463-1488)
아유타야(1463-1666)
랍부리(1666-1688)
아유타야(1688-1767)
정치 체제 도시연맹(1351-15세기)
봉건군주제(15세기-1600)
전제군주제(1600-1767)
인구 2,500,000명
국가 원수
언어 태국어
민족 태국인
종교 상좌부 불교(국교)
힌두교
그리스도교( 가톨릭)
이슬람
주요 사건 [ 펼치기 · 접기 ]
1351년 건국
1438년 수코타이 왕국 동군연합
1564년 따웅우 왕국의 점령
1583년 따웅우 왕국으로부터 독립
1767년 꼰바웅 왕국과의 전쟁과 멸망
통화 폿두앙(พดด้วง)
면적 1,200,000km²
성립 이전 라보 왕국
멸망 이후 톤부리 왕국
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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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건국2.2. 나레수안2.3. 확장의 중단2.4. 쇠퇴
3. 역대 국왕4. 여담5. 출처

[clearfix]

1. 개요

1350년에 태국에 세워진 나라. 수코타이를 멸망시키고 사실상 태국을 통일시켰다고 할 수 있는 왕국이다.

현재는 방콕 북쪽에 있는 주 이름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파일:nwse-asia-yun_3721.jpg
태국 아유타야에 있는 사원 '왓 야이 차이 몽콘'. Photo by (c)Tomo.Yun ( 저작자 홈페이지)

2. 역사

2.1. 건국

1350년, 우통[2]이 아유타야를 세웠다. 아유타야는 그전까지 타이족을 주도하던 수코타이를 공격해 1378년에 속국으로 만들고 1438년에 완전히 병합했다. 한편 그전까지 동남아시아의 패자였던 캄보디아에 대한 공격도 계속하여 1431년, 6개월간의 포위 끝에 앙코르를 점령했고[3], 캄보디아는 곧 앙코르를 탈환할 수 있었지만 앙코르를 더 이상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힘듦을 깨닫고 수도를 천도했다.

앙코르 이후 캄보디아의 수도는 로벡, 우동, 프놈펜을 전전했는데, 모두 지금의 시엠 리엡인 앙코르의 동남부에 위치한다.

파일:external/1.bp.blogspot.com/peter+dennis+illustration+for+osprey+book+war+elephants.jpg

성립 초기부터 '사끄띠나'라는 독자적인 계급체계[4]를 다지고, 불교와 힌두교 개념을 결합해 국왕의 권위를 강화하는 등 발전을 계속했으나, 이웃 버마의 따웅우 왕조의 침공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1547년[5] 따웅우 왕조의 따빈슈웨티의 공격으로 아유타야 왕 마하 짜크라팟은 부인 수리요타이 왕비를 잃었으며, 1563년 버인나웅의 침공[6]으로 결국 항복을 하고 속국이 되고 말았다. 왕인 마하 짜크라팟은 버마에 인질로 끌려간 의혹이 보이며[7] 북부의 중심지 피싸눌록을 지키다 버마군에 항복한 반정공신 마하 탐마라차[8]는 아들 나렛 왕자(이후의 나레수안 왕)를 인질로 보냈다. 이후 마하 짜크라팟과 그 아들은 다시 저항을 했으나 버인나웅의 재침공을 받고 아유타야는 함락되었다. 그리고 왕은 마하 탐마라차로 교체되었다. 하지만 그게 버마의 불행의 시작이었다.

15세기에는 남부 말라카 지역을 지속적으로 침공을 시도했지만, 마음대로 잘 되지 않았다. 게다가 명나라의 정화가 말라카로부터 조공을 받으면서 말라카의 국력은 훨씬 강대해졌다. 이를 계기로 아유타야는 남부 지역보다는 다른 지역으로의 확장을 더 기울이게 된다.

2.2. 나레수안

인질 생활에서 돌아온 나렛 왕자는 연이은 캄보디아의 침공을 모두 막아냈는데, 캄보디아는 아유타야의 독립 선언 이후까지 모두 환산하면 5번이나 침공했다. 나렛 왕자는 1581년 숙적 버인나웅이 죽고, 버마가 반란에 휩싸인 틈을 타 독립을 선포했다. 그리고 연이은 버마의 침공을 모두 다 막아냈다. 그 기록은 무협지 수준이다.[9] 1584년 버마가 혼란에 빠지자 버마 당국은 나레수안에게 반란 진압을 요청했다. 나레수안은 반란을 진압하러 갔다가 수도 버고 일대를 약탈[10]하고 국경을 건너기 직전 독립 선언을 했으며, 쫓아온 버마군의 장군을 보자 코끼리에 올라 큰 총으로 강 반대편에서 사살했다.[11] 또한 버마의 속국이었던 란나의 침공을 연이어 격퇴했다. 1586~1587년 버마 왕 난다버인의 친정으로 일어난 아유타야 공성전에서는 직접 반격해서 칼을 입에 물고 버마의 진지를 올라갔고 이후 난다버인이 나렛 왕자를 끔살시키기 위해 보낸 장군을 1대1 대결로 죽여서 버마의 침공을 끝냈다.

1590년 나레수안이라는 이름으로 즉위한 나렛 왕자는 1593년 농 싸라이 전투에서 1대1 코끼리 대결로 버마의 왕세자 밍기 스와를 죽이고,[12] 그 여파로 테나세림을 점령[13]했으며, 1594년에는 캄보디아를 침공해 수도 로벡을 함락시켜 캄보디아를 영원한 잉여의 길에 접어들게 했고, 1599년 란쌍을 격퇴하며, 란나를 합병했다. 1600년 따웅우 공성전 등으로 망하기 직전이었던 아유타야를 강대국으로 격상시켜버렸다. 이후 아유타야를 태국사 학자 데이비드 와이엇(David K. Wyatt) 교수는 '아유타야 제국'이라는 장으로 구분했다. 괜히 나레수안이 태국인에게 존경받는 것이 아니다.

덧붙여 여기에 나온 무협지스러운 일화들은 신뢰성에서 의심을 가질 수 밖에 없지만, 전투의 승패 자체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이런 무협지적인 일화가 연이어 나온다고 해서 나레수안을 과장된 인물로는 결코 볼 수가 없다. 단지 동남아사가 《연대기》의 조합일 뿐이다. 참고로 나레수안은 영웅적인 닥돌형 캐릭터였고, 실제 군사적인 업적은 친동생 에카토싸롯(나중에 왕이 된다)이 상당부분 관여했다.

파일:external/images.moviepostershop.com/legend-of-king-naresuan-hostage-of-hongsawadi-movie-poster-1020517718.jpg
나레수안 왕을 다룬 영화 포스터. 배우가 입은 갑옷은 배경이 된 시대에 유럽과의 교류를 통해 동남아에 전해져 일본의 남만동처럼 현지화된 플레이트 아머를 고증한 것으로, 주로 국왕이나 귀족들이 입었다고 한다. [14]

2.3. 확장의 중단

나레수안이 잉와 원정 도중 붕어하자 왕위는 나레수안의 친동생 에까톳사롯에게 넘어갔고, 에까톳사롯은 그동안의 확장 정책을 멈추며 내치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동안의 팽창으로 아유타야는 대륙부 동남아시아의 최강국이 되었으며, 그나마 아유타야에 견줄 수 있던 버마는 나레수안의 침공으로 분열을 겪고[15] 확장을 중단하면서 아유타야가 100여 년간의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아유타야 사절단은 1680년에 프랑스(파리)와 바티칸(로마)에 친선을 보낼 정도로 일찍이 국제적인 관계를 가졌다.
일본의 이와쿠라 사절단보다 백년 이상 앞선 시기에 유럽에 사절단을 보낼 정도로 개화되었다.

나라이 왕은 당시 시 수탐마라차와 동시의 왕의 권력을 갖게 되었는데,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네덜란드, 페르시아, 일본의 병력을 활용하여 시 수탐마라차를 제압하고 처형하여 왕이 되는 독특한 과정을 거쳤다.

당시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득세하는 상황이었는데, 때마친 명나라의 왕이 버마로 피신하면서 청나라의 적극적인 버마 공격으로 어부지리로 아유타야의 국력도 크게 향상되었다.

당시 나라이 시대 프랑스인들이 아유타야를 묘사하기를, 프랑스에 버금가는 만큼 부유하다고 표현되기까지 하였다.

이후 아유타야는 외국과의 교류를 활발히 했으며 외국인을 정계에 등용하기도 했다. 이는 아유타야의 개방적인 문화성도 한 몫하나, 더 근본적인 이유로는 봉건제로 인한 친위 세력의 부족이 꼽힌다. 외국인이 아유타야에 거주할 시 국왕의 친위군으로 병역에 임할 의무가 있었고, 이 때문에 아유타야에서는 외국인의 정계 진출이 활발한 편이었다. 이러한 개방정책은 계속되어 17세기 중반 나라이 왕 때는 그리스계 영국인 콘스턴틴 풀콘(Constantine Phaulkon; 1647년~1688년)이 고위직에 오르고, 프랑스에 친선 사절을 보냈으며, 나레수안 왕 이후 버마에 빼앗긴 란나를 재점령하고자 원정을 감행하기도 했다.[16]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태국과의 친선을 환영했으나, 실상은 태국에 가톨릭을 전파하고 식민지로 삼으려는 심산이었다. 당시 프랑스 측 사절이 그린 나라이 왕은 무슨 열대 덩치 큰 털보 왕으로 왜곡해 그렸다. 태국 측이 그린 나라이 왕 그림과는 인종까지 전혀 딴판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French_depiction_of_King_Narai.jpg
프랑스 측이 그린 나라이
하지만 지나친 개방성으로 태국 국내의 귀족층이 반발하기 시작했고, 프랑스군이 원정을 와 지금의 방콕에 성채까지 짓는 상황까지 되자 태국 내에서는 프랑스가 가톨릭화를 강요하고 나아가 태국을 손에 넣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일어났다. 콘스턴틴 풀콘이 차기 국왕이 될 삐 왕자를 이용해 태국의 통치자가 된다는 소문이 퍼져 귀족들의 경계심이 커진 와중에 결국 1688년 5월 나라이 왕이 중병에 걸리자 코끼리 전투부대의 책임관이자 사령관이었던 펫라차를 중심으로 보수파 귀족들를 중심으로 반정이 일어나 풀콘이 살해당하고 펫라차가 재상이 되었으며, 동년 7월에는 중병에 걸린 나라이 왕이 사망함과 동시에 방콕에서는 프랑스군과 아유타야군 사이에 공성전이 일어나 프랑스군이 철군하는 상황에 이르렀다.[17], 이후 펫라차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왕통이 다시 바뀌게 되었고, 100여 년간 아유타야와 외국과의 교류는 네덜란드, 중국, 일본 등을 제외하면 예전보다 크게 줄어들었다.

그 뒤로 캄보디아를 놓고 베트남 안남국과 티격태격하며 1694년 친(親)아유타야의 루앙프라방과 친버마의 위앙짠으로 분열된 란상에서 서서히 영향력을 키우던 도중, 분열되어 있던 버마가 재통일하며 16세기처럼 다시 버마와 전면전을 벌여야 했다. 1740년 버마 남부의 몬족은 프랑스의 지원으로 독립하여 그들의 왕국 한타와디를 재건했고, 1752년 버마의 수도인 잉와까지 점령하여 후(後)따웅우 왕조를 멸망시켰으나, 꼰바웅 왕조를 세운 알라웅파야의 반격으로 1757년 다시 멸망했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는 몬족이 버마족을 학살하고, 이후 버마족의 보복으로 몬족이 학살당하며 버마 내 민족 갈등이 극심해졌고, 몬족은 버마족의 치하에 사는 것을 포기하며 아유타야로의 대규모 엑소더스를 감행했다. 전통적으로 동남아시아에서는 국가의 영역이 영토보다는 인민의 지배에 가까웠기에, 아유타야는 몬족 난민을 다시 돌려보내 버마를 견제하려 했고 이를 막으려던 버마 사이에서 결국 전쟁이 재발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1759년 알라웅파야가 이끄는 버마군이 아유타야를 포위했으나, 이듬해 알라웅파야가 전사하자 버마군은 철수하였다.[18] 그러나 아유타야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강대국이 아니었다.

2.4. 쇠퇴

1688년 반정이 일어나 기존의 나라이 왕이 속해 있던 프라삿통 왕조가 무너지고, 마지막 혈통이자 반정을 일으킨 펫라차의 양자였던 소라삭 왕자 역시 왕위를 거부[19]하면서 나라이 왕계의 혈통이 끊겼다. 이후 왕사이자 재상이었던 펫라차가 반 플루 르앙 왕조를 열면서 르앙 왕조의 초대 왕, 즉 아유타야의 제28대 왕으로 즉위했다. 펫라차 왕 시절까지는 그래도 아유타야가 어느 정도 건재했다. 제30대 왕인 타이싸 왕 시절에는 대규모 운하를 건설할 정도로 국력을 과시했으나, 문제는 제31대 왕인 버롬마꼿 왕이 죽은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버롬마꼿은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적장자인 에까톳은 아둔하고, 그 동생인 우툼폰이 지혜로우니 왕이 되어야한다며 대놓고 선언해버렸고,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던 우툼폰이 1758년 왕위에 올랐으나 에까톳 왕자를 지지하던 일파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정치에 별 관심이 없던 우툼폰은 10일만에 형이었던 에까톳에게 선양하고, 왓 쁘라두 송탐(วัดประดู่ทรงธรรม) 사원에 들어가 불교에 귀의하며 승려가 되었다.

이로 인해 원래 적장자였던 에까톳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아유타야의 마지막 국왕인 스리야마린 보로마라차 3세이다. 동생의 선위로 예상된 형제간의 혈투는 일단 멈추게 되었으나 평소 인품과 성격을 알고 있던 대신들 사이에서 스리야마린 왕을 인정해야할지 말아야할지에 대한 당쟁이 심심치않게 벌어지고 있었다. 당연히 삼국지 유선 포지션이었던스리야마린 왕은 실추된 왕권과 현 상황에 크게 실망하여 정치에서 관심을 떼고 국정을 전혀 돌보지 않게 되었다.

당연히 이때를 틈타 이웃 버마 꼰바웅 왕조의 초대 국왕이자 명군이었던 알라웅파야가 상술한 바와 같이 버마 주요 지역을 대부분 장악하고, 테나세림을 통해 아유타야를 공격하기로 했다. 먼저 수군을 보내어 원래 버마와 아유타야의 국경도시였던 다웨이를 우회하여 해안가를 따라 1759년 테나세림 지역의 남쪽 끝 마을인 메르귀[20]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메르귀에서 타닌타리 강을 거슬러올라가 타닌타리 산맥을 넘어 아유타야와 방콕 인근의 펫차부리 지역까지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무서운 기세로 진군해오는 알라웅파야의 버마 군대를 막기 위해 보로마라차 3세는 남은 친위부대를 보냈지만 버마군이 모두 격파해버렸다. 결국 1759년 말 아유타야는 포위당했지만 여러 운하와 강 해자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에 수비군과 버마군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다가 위에 문단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듬해 알라웅파야가 가슴에 총상을 입고 전사했다. 결국 버마군은 철군했다.

물론 1761년 알라웅파야의 군대는 버마로 돌아가는 길에 마저 점령하지 못했던 무주공산 상태의 다웨이를 점령해 버마 영토에 정식 편입시켰다.

아유타야는 버마와의 전쟁에서 국력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기 때문에 더이상 재기가 불가능했다. 결국 얼마 못가 1765년 꼰바웅 왕조의 제3대 왕 신뷰신이 아유타야 침공을 감행했다. 군을 2개로 나누어 한쪽은 북쪽에서 란나를 통해서 남진시켰고, 한쪽은 전통적인 버마의 아유타야 침입로인 삼탑로로 동진시켰다.[21] 방 라잔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수개월 동안 항쟁을 했으나 역부족이었고[22] 프라야 딱 신[23] 등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패색은 짙어져 아유타야 왕이 속국이 되겠다고 항복을 애걸했으나 그조차도 거절되었다.[24] 결국 1767년 아유타야는 버마군에 의해 함락당한 뒤 방화와 약탈을 당했으며,[25] 지배층과 백성 수만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이 전쟁은 현재 미얀마-태국 민족 간의 감정을 나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버마는 청나라의 침공을 눈앞에 두던 상황이어서 아유타야 전토의 점령이 불가능해, 그 일대에 일부의 주둔군만 남기고 모두 철퇴했다. 하지만 중심세력을 잃은 아유타야(이하 시암으로 서술)[26]는 사분오열되었다. 이 상황을 해결한 사람이 프라야 딱 신(이하 딱신) 대왕이었다.

3.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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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담

5. 출처



[지도설명] * 다이비엣( 대월) - 보라색
* 참파 왕국 - 분홍색
* 란쌍 왕국 - 주황색
* 크메르 제국 - 연두색
* 란나 왕국 - 하늘색
* 아유타야 왕국 - 파란색
[2] 이원복 교수의 교양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선 중국 상인 출신으로서 태국 여성과 결혼해 태국인으로 동화됐다고 했으며, 《연대기》에서는 중국 한족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원래 다른 지역에 있던 왕국에서 아유타야로 이동해 아유타야를 건설했다고 하는데... [3] 태국사 관련 책에서 이후 태국이 계속 앙코르를 점령했다거나, 캄보디아가 태국의 속국이 되었다고 서술할 때가 많으나 사실이 아니다. 캄보디아는 여전히 독립국이었으며, 16세기 말까지 태국에 역습을 가했다. 완전히 속국이 된 것은 아유타야의 나레수안 왕 때였다. [4] 왕-승가-평민-노예의 4계급 순이다. [5] 동남아의 기후적인 특성으로 전쟁은 양력으로 12월경에 시작해서 그 다음해 봄이 올 때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많은 책에서 년도가 1년씩 차이가 날 때가 흔하다. [6] 이 전쟁은 흰 코끼리로 인해 일어났기 때문에 백상전쟁이라고도 불리운다. 버마가 아유타야에 흰 코끼리를 요구했고, 아유타야에서는 논의 끝에 주나 안주나 어차피 전쟁은 일어난다고 해서 안 주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예상대로 버인아웅은 애초부터 아유타야를 공격할 생각이었기에 버마는 이를 구실로 침공해왔다. 그래서 아유타야군은 전통적인 버마의 다이렉트 침공로인 삼탑로를 집중적으로 방어했고, 북쪽에는 마하 탐마라차를 보내 부족한 방어를 보완하려고 했다. 하지만 버인나웅은 예전에 점령한 란나를 통해 북쪽으로부터 침공을 했고 이를 예상못한 아유타야는 이 때문에 전쟁에서 졌다. [7] 의혹인 것이지, 정설 단계까지는 아니다. 이 기록은 버마 측 《연대기》에 보인다. [8] 마하 탐마라차는 마하 짜크라팟을 왕으로 세운 1등 공신이었다. 마하 짜크라팟의 즉위과정은 어지간한 드라마를 압도하는 스케일인데, 왕의 죽음 → 왕비의 섭정 → 왕비와 친척인 신하와의 불륜 → 왕비의 임신과 출산(!!!) → 유력한 왕자 제거 시도 → 그 왕자의 출가 → 왕비가 옛아들 대신 새아들을 왕으로 추대 시도 → 보다못한 신하의 쿠데타 → 왕비와 불륜 상대자의 끔살과 출가한 왕자의 즉위의 과정을 거친다. 이 왕자가 마하 짜크라팟이고, 쿠데타를 주도한 신하가 마하 탐마라차이다. 그는 마하 짜크라팟과 수리요타이의 3남 3녀 중 장녀인 위숫까삿 공주와 결혼해 그의 사위이기도 했다. [9] 사실 동남아사는 《연대기》 중심이며, 과장과 왜곡이 많은지라 원래 무협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믿을 만큼만 믿고 끝내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괜히 말도 안되는 것을 썼다고 따지면 피곤하다. 다만 당시엔 버마가 혼란에 빠졌을 시기이니 나레쑤안이 웬만한 사람보다 리더십이 좋았다면 찔끔찔끔 침공할 여력밖에 없는 버마를 충분히 막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10] 아유타야인 포로를 구출하기 위해서였다고도 한다. [11] 이때 쓴 총이 2.53m라고 한다. 그 당시 총의 명중률상 총이 이렇게 크고 아름답지 않으면 강 건너편의 적을 맞출 수준이 되지 않았다. [12] 이때 했다고 하는 말이 간지폭풍이다. "형제여 그대는 왜 차양에 몸을 가리는가? 미래의 어떤 군주도 할 수 없는 그런 결투를 해보게나." 다만 연대기의 미화인지 정말 사실인지는 불분명하다. [13] 편의상 영어 발음으로 했지만 버마식 발음은 '뜨닝다이'(tanintharyi. 버마어에선 r이 없다.)이다. 태국과 버마가 서로 주고 받던 지역으로 결국은 버마령이 되었다. [14] 현지의 동남아 갑주는 원래 가죽제질이었으며, 병사들에게는 가슴과 배를 보호할 수 있는 복갑, 그리고 머리만 보호할 수 있는 투구만 주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동남아에서 유럽식 갑옷은 무게도 무게인데다가 동남아의 살벌한 더위로 인한 열피로 때문에 입은 사람은 곧잘 지치거나 열사병으로 죽어나가 많이 쓰이지는 못했고, 심지어는 갑옷을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나가기도 했다 .-싸우기도 전에 더위로 죽을 수는 없으니까- [15] 이때 남부 버마는 프랑스계 포르투갈인인 필리페 드 브리투가 10여 년간 장악하기도 했다. [16] 하지만 일시적이었다. 란나가 아유타야-시암의 영향력에 들어오게 되려면 18세기 말 탁신 왕과 라마 1세의 시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17] 당시 프랑스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한터라 태국에 신경쓸 수가 없었다. [18] 아유타야 측에서는 알라웅파야가 유탄에 맞아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버마 측에서는 낙마로 인한 전사라고 기록되어 있다. [19] 소라삭은 이후 왕으로 즉위하는 펫라차에 의해 부왕직을 하사받게 된다. [20] 태국어로 미에익 [21] 알라웅파야 시절에는 테나세림 산맥을 건너가느라 병사들이 지쳐 아유타야와의 전쟁을 재대로 수행할수 없었는데, 신뷰신은 아예 테나세림 산맥을 우회하여 테나세림 지역의 북쪽 통로라 할 수 있는 삼탑로를 통해 미얀마 남부 해안도시인 모울메인을 지나 태국 국경인 메솟으로 진군한 후 남진하여 나콘사완, 롭부리를 수중에 넣고, 아유타야를 북쪽에서 포위했다. [22] 태국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국내에서도 어떻게하면 케이블에서 볼 수는 있는듯하다 [23] 딱의 제후 신이라는 뜻. 이후의 딱신 대왕 [24] 당연히 한번 더 아유타야를 살려주면 나레수안 대왕 때처럼 다시 버마를 박살낼께 뻔했기 때문에 살려두질 않으려는 속셈이었다. [25] 이원복 교수의 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 따르면, 아유타야 파괴 과정에서 빼앗겨진 보물은 현재 양곤 미얀마 국립박물관에 보존 중이라고 하나 사실 여부가 불투명하다. [26] 태국의 역사에서 왕조의 이름은 수도의 이름으로 한다. 이후 아유타야가 태국사의 주역이 된 이후 아유타야는 '사얌'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 명칭이 태국을 뜻하는 '시암'이 되었다. 아유타야가 멸망하기 전부터 아유타야는 시암이었고, 아유타야가 멸망하고 방콕-톤부리가 수도가 된 이후에는 더이상 아유타야라는 명칭은 맞지 않고, 현 왕조를 방콕이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에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시암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