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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19:15:23

한일혼혈

한일 혼혈에서 넘어옴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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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혼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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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회적 인식3. 역사4. 국적5. 유명 인물
5.1. 한국인5.2. 일본인5.3. 제3국 국적자
6. 같이 보기

1. 개요

한일혼혈()이란 한국인 일본인 사이의 혼혈을 말한다. 가장 엄밀하게는 그러한 부부가 낳은 자녀를 가리킨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귀화한 한민족과 일본인이 결혼한 경우 또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일본계 민족과 한민족이 결혼한 경우 태어난 자녀를 가리킨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일본서기 등의 사서와 고고학적인 자료, DNA 조사에 의하면 류큐인 아이누인을 제외한 현 일본 야마토인들은 원주민인 조몬인 한반도 중국 등지에서 온 이주민인 야요이인 및 도래인들이 혼혈된 종족이라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에 조상 DNA 테스트 시에는 생물학적으로 혈통상 반반 한일혼혈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부모 중 한 명은 한국인이고 한명은 일본인이라는 정보를 알리기 위해 한일혼혈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정확히 말하면 야마토 민족들한텐 한민족이나 몽골, 중국계 민족 등 동북아시아인들과의 혼혈은 혼혈이라고 보기 어렵지만 한민족 기준으로는 혼혈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일반적인 한민족과 야마토 민족들은 외양적으로 비슷한 사람들도 있고, 많이 차이나기도 하고, 외양적인 면이나 유전적 특성이 차이는 나지만 DNA상으로는 혼혈이 성립되지는 않는다.

2. 사회적 인식

한중혼혈과 마찬가지로 겉모습으로는 거의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외모로 차별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1] 하지만 한일관계 특성상 본인이나 주변을 통해 한일혼혈임이 알려지면 일본과 정치, 역사적으로 부딪히는 일이 타 국가에 비해 잦은 편이라 굳이 밝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에 따른 차별을 얼마나 겪게 될지는 어디까지나 주변 사람들의 수준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이는 문제린 만큼 한일혼혈이 일본이라고 무조건 이지메 당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이라고 무조건 왕따 등의 차별을 당하지 않고 크는 것도 아니며 양국에서의 대접은 전반적으로 사실상 딱히 다를 게 없다. 대뜸 '일본어 해봐봐', '축구는 어느 팀 응원해?'라고 묻는 것도 모두 넓은 의미의 차별인데 이는 한국에서 아직까지도 빈번하다.

20세기까지는 대체적으로 그리 환영받는 분위기는 아니었으나[2] 1980년대 중후반 ~ 1990년대 이후부터 태어나는 사람들은 김대중 일본 대중문화 개방으로 인해 한국에 애니, 만화 등의 서브컬쳐와 일식을 필두로 한 일본 문화가 널리 퍼진 덕분에 일본 문화에 친숙하고 한일혼혈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신기해하거나 오히려 이중국적인 점, 이중언어를 하는 점 등을 부러워하는 편이 많다. 그러나 한일혼혈, 특히 일본 쪽에 정체성이 더 강한 사람은 종종 군대 문제, 한일전 때 어느 쪽을 응원하느냐, 독도를 어느 나라 땅이라고 생각하느냐 같은 단골 질문을 질문 자체도 난감한데 지겨울 정도로 심하게 많이 받아 많은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고 한다. 이에 대한 트라우마로 자신은 아예 스포츠 경기 자체를 보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는 한일혼혈도 있다.

같은 한일혼혈이라도 한국어가 능숙한 쪽이 인기가 약간 더 높다는 주장이 있지만 인간은 초등생 이하의 아동조차도 생김새보다는 차라리 본인의 모국어와 같은 원어민일 때 더 호감을 느낀다.[3] 민족주의적 요인을 배제하더라도 한국에서는 한국어를 잘하는 혼혈이 상대적으로 친근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고 일본에서도 일본어를 잘 하는 혼혈이 상대적으로 친근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건 마찬가지다. 다른 쪽 언어도 잘 하면 사람에 따라서는 바이링구얼에 대한 동경 등으로 인해 호감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다.

3. 역사

원삼국 시대-야요이 시대에도 인구교류가 있어 왔던 것으로 생각되며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으로 간 사람이 상당했고 반대로 일본 열도에서 한반도로 온 이들도 다수 있었다. 특히 백제 야마토 왕권 간의 관계가 매우 긴밀했기 때문에 서로간의 교류가 잦았던 만큼 백제가 멸망한 뒤에 일부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 일본 민족에 흡수, 동화되었다.

고대에는 한반도계 도래인들이 일본으로 대규모로 이주하였지만 헤이안 시대[4] 신라 출신 해적들인 신라구가 일본에 자주 출현하여 규슈 일대는 물론 세토내해에서도 대규모 약탈을 벌인 후 점차 한반도 사람들의 일본 이주가 금지되기 시작했다. 이 때까지는 주로 한반도와 가까운 일본 서부에 도래인들이 모여살았으나 일본 정부는 신라구와 내통할 것을 우려해 도래인들을 일본 동부로 강제이주시켰고[5]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 일본인에 동화되었다. 오우치씨나 하타씨, 코마씨 등 도래인의 후손이란 정체성을 유지한 경우도 현대까지 일부 남아 있다.

심지어 고려시대에는 일본 상인 100여인이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고려로 들어갔다가 고려에서 그 재화를 모두 빼앗고(...) 원나라에 표문을 올려 일본인들을 전부 다 노비로 삼게 해 달라고 요청한 경우도 있었다. 고려에서 표류한 일본상인을 노비로 삼기를 요청하다 그런가 하면 조선에서는 일본인들을 노예로 사들이는 일도 꾸준히 있었는데 이들과의 사이에서도 한일혼혈들이 태어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왜인 노비를 사는 것을 금하다 도망갈 것을 우려하여 왜노(倭奴)를 궁벽한 곳에 옮겨 두게 하다 전주 판관 유서종이 왜인을 끌어들여 말썽을 일으키다

임진왜란 항왜들은 거의 전부가 남성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후손들은 한일혼혈이 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전부 동화되어 결국 한민족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식민지 조선에 이민 온 일본인과 현지 조선인 간의 결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제는 내선일체를 위해 한일합방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결혼을 합법화했는데 의외로 조선남-일본녀 조합이 일본남-조선녀 조합보다 압도적으로 더 많아서 조선총독부가 당황했다고 한다. #1, #2 보통 지배국의 남성이 피지배국의 여성을 취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일반적이었고 일제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 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일본이든 한국이든 가부장적인 시대배경상 일본인 여성이 조선인과 결혼하려고 조선으로 시집오는 일이 많았다는 뜻인데 이는 조선총독부측의 통계 자료에도 남아 있으며 왜 이런 역전현상이 나타났는지에 대해선 현재로서도 밝혀진 바가 없다고 한다. 일본 측 기록에는 조선인 남성이 식민지배를 받고 있다는 자격지심을 일본의 여자를 지배해서 풀고자 하는 목적으로 일본인 남자로 위장해 일본인 여성을 꼬시고(...) 일본인 여성은 그것에 속아넘어가 결혼했다는 식의 추측이 있으나 개인적인 동기는 될 수 있을지언정 엄연히 거시적인 통계현상을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1945년 8.15 광복 당시에는 부계혈통의식이 강해 아버지가 조선인인 혼혈아만 대한민국 국적을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일본인인 아이는 원칙적으로는 한국 국적 부여 대상이 아니었으나 아버지가 일본으로 떠나 남겨진 한국인 어머니의 국적을 따르는 일이 종종 있었다. 물론 책임감 있는 아버지가 가족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서 그 자손들이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반대로 한국인 아버지가 광복 이후 일본인 어머니를 버리는 일들도 종종 있어 버려진 일본인들끼리 모여사는 곳이 한국에 있었다고 한다.

한동안 한일관계가 단절되면서 이미 결혼한 가정이 2세를 가지는 경우와 한국에서 극소수 잔류 일본인( 8.15 광복 당시 미혼), 그리고 일본에서 재일 한국인과 일본인이 결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새로 한일혼혈이 생겨나지 않았다.

그러나 1965년 한일수교 이후 한국과 일본 간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한일 혼혈이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영남 지방에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영향이나 일본 취직으로 인해 한국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이 결혼하여 다문화 다자녀 가정을 이루고 있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6] 실제로 경상도는 제주도[7] 다음으로 재일조선인들이 많았던 도인 만큼 한일혼혈들도 많았고 재일 조선인 후손들도 많았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한국에 방문한 재일교포들이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간첩 사건 등 조총련과 엮여 간첩조작 사건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 #

4. 국적

한국, 일본은 출생국가와 상관없이 국적을 부여하는 속인주의 국가다. 과거 한국과 일본은 '부계주의 국적법'을 적용하였으므러 아버지 일본인이면 오직 일본 국적만을 부여받았고 아버지 한국인이면 오직 한국 국적만을 부여받았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한일혼혈은 당연히 일본 국적이었고 누구의 호적에 올라가느냐에 따라 해방 후 한국 국적으로 바뀌거나 일본 국적을 유지하는 식이 되었다. 가령 윤치호 윤학자 부부의 자녀는 성장 배경이 한국이고 한국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고 있지만 일본 국적이다.

일본 1984년 5월 1일생부터 '부모 양계주의 국적법'을 적용하여 부모 중의 한 명만 일본인이면 일본 국적을 부여하도록 바뀌었다. 따라서 당시 한일혼혈 자녀는 아버지가 한국인이고 어머니가 일본인이면 한국, 일본의 이중국적이 되었지만 한국은 여전히 부계주의 국적법을 택하였기 때문에 만약 아버지가 일본인이고 어머니가 한국인이면 자녀는 단독 일본 국적이 되었다.

한국 1998년 6월 14일생부터 부모 양계주의 국적법을 적용하여 부모 중 한 명만 한국인이면 한국 국적을 부여하도록 바뀌었다. 따라서 이후 태어난 한일혼혈 자녀부터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어느 국적이든 상관없이 한국 일본의 선천적인 복수국적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은 선천적 복수국적을 허용하지만 일본은 허용하지 않으므로 22살 전까지 국적을 선택해야 한다. 다만 현재는 한국과 일본 모두 기한 내로 국적을 선택하지 못한 자에게 추가로 1년의 국적 선택 유예 기간을 주고 있다. 따라서 여성은 23살 전까지 국적을 선택할 수 있는 셈이다. 선천적 복수국적 남성은 외국에 주소 생활기반을 두고 거주하는 자에 한하여 18세가 되는 해의 3월 31일까지 한국 국적을 포기할 수 있다. 해당기한이 지나면 병역의무가 부여된다.

5. 유명 인물

나무위키에 등재될 정도의 저명성 있는 인물만 기록 가능합니다.

5.1. 한국인

한국 국적을 포함한 복수국적자의 경우에는 한국인 항목에 포함하고, 복수국적임을 표시합니다.

5.2. 일본인

5.3. 제3국 국적자

6. 같이 보기


[1] 애초에 외모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2] 당장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사람 중 부모 중 한 명이 일본인인 사람들이 반일 감정이 극에 달하던 1950~70년대에 당한 차별을 떠오르면 이해가 갈 것이다. [3] 언어의 뇌과학, 2020. 아동에게 이국적 외모에 원어민 톤인 또래 vs 외모는 비슷한데 이국적인 악센트를 구사하는 또래 영상을 보여주고 "더 친해지고 싶은 쪽은?"이라는 질문을 하자 전자 쪽에 더 높은 호감도를 보였다. 이는 사회적으로 성장하면서 이런저런 편견이 생기기 전부터 갖고있는 본능에 가깝다 볼 수 있다. [4] 동시대의 한반도는 남북국 시대 [5] 이들 중 일부는 에미시와 접촉하여 에미시에 동화되기도 했다. [6] 통일교 신자는 가평군 설악면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많은 일본인들이 살고 있다. [7] 일제강점기에 이미 20만 명 이상의 제주인이 일본으로 이주했다. 1920년대부터 이미 제주~오사카를 운항하는 '군대환'등의 정기 여객선이 있었다. 이들 중 최소 10만 명 이상이 해방 직후 제주도로 귀향했는데 전쟁 직후인데다가 척박한 제주도에 갑자기 10만 명에 가까운 인구가 유입되자 식량부족부터 지역경제에 상당한 충격이 있었다. 1948년 제주 4.3 사건으로 다시 수 만 명 이상의 제주인들이 부산 영도와 일제강점기부터 제주인 공동체가 있었던 일본 오사카 일대로 이주했다. 그로 인해 오사카에는 제주인 출신 재일동포들이 상당히 많다. 제주도 사람들 중에서는 일본에 친척이 없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다. 젊은 세대들은 잘 모르지만 조부모님 세대만 하더라도 가까운 친인척 중에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여럿씩 있었다. 인구의 1/3에 가까운 사람들이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으로 이주한 적이 있거나 나중에 이주했기 때문이다. [8] 신동주가 한국어를 전혀 못하기 때문에 한국 언론과 만날 때는 아내 조은주가 통역해 주는 경우가 많았다. [9] 영친왕 이방자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10] 젊은 시절에 유도 선수를 했었다. [11] 반면 상사인 오오카와는 일본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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