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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22:15:07

키코 비/결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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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친정 집안과 조상2. 어린 시절3. 후미히토 친왕과의 만남4. 소문5. 결혼과 화젯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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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친정 집안과 조상

1966년 9월 11일, 부친 가와시마 타츠히코(川嶋辰彦, 1940 ~ 2021)[1]와 모친 가와시마 카즈요(川嶋和代)[2]의 맏이이자 장녀로 태어났다.

가와시마 가문은 대대로 학자, 교수, 의사 등이 많이 나온 학구적인 집안이라고 한다. 타츠히코는 가쿠슈인 대학 경제학부 교수를 지낸 이름 높은 경제학자이며, 7살 아래의 남동생 가와시마 슈(川嶋舟, 1973 ~ )는 수의사이자 도쿄농업대학 강사이다.

할아버지 가와시마 타카히코(川嶋孝彦, 1897 ~ 1958)는 관료이자 내각통계국장을 지냈다. 증조부 가와시마 쇼이치로(川嶋庄一郎, 1870 ~ 1947)는 가쿠슈인의 교수였다. 할머니는 가와시마 이토코(川嶋紀子, 1907 ~ 2002)로, 손녀와 같은 한자를 쓴다. 할머니를 닮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지었다고. 이토코는 시집 가는 손녀에게 '남편에게 몸과 마음을 바치고 섬기도록 해라'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토코의 아버지는 이케가미 시로(池上四郞, 1857 ~ 1929)인데, 후쿠시마현 출신으로서 보신전쟁을 겪었으며 제6대 오사카시 시장을 지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제6대 정무총감을 지낸 인물이기도 하다.

2.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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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3월, 생후 6개월의 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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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5월, 생후 8개월의 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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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7월, 생후 10개월의 키코. 외할머니 스기모토 사카에코(杉本榮子,1916 ~ 2010)[3]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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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8월, 생후 11개월의 키코. 친척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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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6살 때의 키코. 미국에서 살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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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7살 때의 키코. 시치고산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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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쿠슈인 여자고등과 시절.

어린 시절에 외국 생활을 오래 하여[4] 외국어에 능통하다는 점에서 손윗동서인 마사코 황후와 비슷하다.[5][6] 타츠히코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대학원에 유학하게 되어, 가와시마 일가는 1967년 9월부터 1973년 여름까지 미국에서 살았다.

귀국한 후 가와시마 키코 초등학교를 몇 군데 옮겨 다니다가, 아버지가 가쿠슈인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되어 1976년 4월부터 가쿠슈인 초등과 4학년으로 편입학했다. 한 학기를 다닌 후 가와시마 일가는 다시 외국으로 떠났다. 이번에는 오스트리아였고, 키코는 영어에 이어 독일어에도 능숙해졌다.

가와시마 일가는 1979년에 귀국했고, 키코는 가쿠슈인 여자중등과 편입학했다.[7] 이후 가쿠슈인 여자고등과를 거쳐 1985년 4월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심리학과에 입학했다.

학창 시절의 키코 비는 밝고 명랑한 성격에 우수한 학생이었으며, 공부도 운동도 모두 잘 했으며 노력파였다고 한다. 당시 명문교인 가쿠슈인에 우수한 성적으로 편입학했고, 외국에서 오래 살다 왔기에 다소 서툴렀던 국어(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승마, 테니스, 스키, 등산 등을 능숙하게 즐겼고, 봉사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또한 키코는 예쁘고 청순한 외모로 남학생들에게 인기도 많았다[8] 고등학교 시절 축제 날에는, 전화번호를 끈질기게 묻는 와세다대학 남학생에게 엉뚱한 번호를 적어준 적도 있다고. 친구들은 키코에 대해 "차분하고 기품 있었지만, 은근히 장난기도 많았다"고 증언한다. 가끔 종례 전에 학교를 몰래 빠져나가 음료수를 사와서, 친구들과 나누어 먹기도 했다고 한다.

3. 후미히토 친왕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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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가쿠슈인대학 1학년 때의 가와시마 키코. 한국에 방문했을 때의 사진이다.

키코는 가쿠슈인대학에서 1년 선배인 후미히토 친왕을 만났다. 후미히토 친왕은 당시 법학부 정치학과 2학년이었는데, 그가 자주 이용하던 교내 서점인 세이분도(成文堂)에 신입생인 키코가 드나들자, 서점 주인이 후미히토 친왕에게 "가와시마 타츠히코 교수님의 따님입니다."라고 키코를 소개했다고. 그 뒤로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는 캠퍼스 커플이 되어 테니스, 자연문화연구회 등의 동아리 활동들을 함께 하며 교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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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 동아리 활동 당시의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흥미롭게도 시아버지 아키히토 덴노와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도, 젊은 시절 테니스를 치며 교제하다가 결혼했다.

두 사람은 나루히토 황태자가 먼저 결혼하기를 기다렸지만, 나루히토 황태자의 결혼 문제는 거의 진척되지 않았다. '일본 황태자의 아내'라는 부담이 무지막지할 것이 분명한 결혼이니, 결혼 적령기의 상류층 처녀들이 죄다 외국으로 도망가거나 급히 다른 남성과 결혼하는 등 대대적인 기피 현상이 일어났다. 게다가 나루히토 황태자는 그 당시 "오와다 마사코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 며 몇년째 끈질긴 구애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9] 기다리다 못한 후미히토 친왕은 가쿠슈인대학 근처 횡단보도의 신호등 아래에서 키코에게 청혼했다. 이 사건은 일명 신호등 아래의 청혼으로 당시에 큰 붐을 일으켰다.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가 1959년 황실로 시집올 때 '미치 붐(ミッチーㆍブーム)'이 일었던 것처럼 키코 붐도 크게 일었다. 또한 당시 후지 테레비에서는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의 만남, 교제, 결혼 과정을 < 헤이세이의 신데렐라 키코 님 이야기(平成のシンデレラ紀子さま物語)>라는 제목의 애니메이션으로까지 제작하여 방영하기까지 했다. 저 부부의 현재 모습을 아는 상태에서 보면 미화로 떡칠이 되어 있지만. 이 링크로 들어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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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결혼식 전의 모습. 당시 후미히토 친왕은 24세, 키코는 2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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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앞두고서 아버지 타츠히코 교수, 어머니 카즈요와 함께. 소매가 바닥까지 닿을 듯 치렁치렁한 후리소데(미혼 여성의 예복)를 입은 키코와, 짧은 토메소데(기혼 여성의 예복)를 입은 카즈요의 모습이 대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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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소문

윗문단 이야기(즉, 공식적으로 알려진 이야기)만 읽으면 아름답고 예쁘기만 한 사랑 이야기이지만, 두 사람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뒷이야기들도 많다.

결혼 후에도 잡음은 존재해서, 후미히토 친왕은 태국인 여성과 바람을 피웠으며[10], 2003년 차남 일가가 태국 순방[11]을 갔을 때도 그 태국인 여성을 만났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키코 비는 이를 참으면서, 순방 일정 내내 억지로 미소를 지어야 했다고 한다. 태국 여성과의 바람 외에도 후미히토 친왕은 수없이 많은 염문을 뿌렸으며,[12] 사생아가 있다는 소문도 있다.

또한 언젠가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의 결혼기념일에 한 방송사에서 그들 부부의 얼굴 모양으로 케이크를 만들어 선물했는데, 키코 비가 케이크 상자를 열어보지 않더란다. 왜 그런가 물으니 "전하께서 열어보시지 않았는데 어떻게 제가 먼저 열어 보겠어요…"라고. 심지어 남편의 코트를 일일이 다 입혀주는 모습, 키[13]도 훨씬 큰 남편을 위해 하녀처럼 우산을 들어주는 모습의 사진들을 보면… 일본 황실의 보수성과 남존여비도 대단하지만, 그런 고통을 다 견디고 살며 늦은 나이에 기어이 아들을 낳고야 만 키코 비도 대단하다.

5. 결혼과 화젯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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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 발표 기자회견에서
1989년에 약혼 발표 기자회견을 했다. 당시 시할아버지인 쇼와 덴노의 상중(喪中)이라서,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는 검은 옷을 입어야 했다.

상중에 약혼 발표를 하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좋지 않은 여론도 있었으나, 시집와서 황실에 잘 적응하여 열심히 사는 키코 비의 모습 덕에 그러한 여론이 수그러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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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날 아침, 아버지 타츠히코, 어머니 카즈요, 남동생 슈의 배웅을 받으며 정든 친정을 떠나는 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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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날 남편 후미히토 친왕의 머리를 다듬어주고 있는 모습.[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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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에서

1990년 6월 29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키코는 가쿠슈인대학 대학원생이었고, 결혼 후 황족으로서의 공무(公務)[15]와 육아를 병행하면서도 전공인 심리학 공부를 계속했다. 1995년에 심리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2013년에는 국립 오차노미즈여자대학에서 인문학 박사학위[16]를 받았다. 수어에도 능통하여, 수어 관련 공무도 하는 등 자주 활용하고 있다.[17]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에 이은 평민 출신의 비(妃)로서 화제가 되었다. 결혼 전까지 키코는 가쿠슈인대학 교직원용 아파트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는데, 일명 3LDK의 공주님(3LDKのプリンセス)[18]이라고 떠들썩하게 알려졌다. 그리고 당시 키코의 친정에는 TV가 없어, 가와시마 가문의 독특한 교육 방침도 화제가 되었다.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의 결혼 당시 신문기사

결혼하여 가장(家長)이 된 후미히토 친왕은, 태어나서 결혼 전까지 써 오던 어칭호 '아야노미야(禮宮)' 대신 '아키시노노미야(秋篠宮)'라는 미야고(궁호)를 새로 받아, 아키시노노미야 미야케(황족 가문)를 창설했다. 이에 후미히토 친왕과 그의 처자식은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로 불리게 되었다.[19]

[1] 2021년 11월 4일 작고. 부고 소식 [2] 결혼 전의 성씨는 스기모토(杉本). 스기모토 가문에는 하급 사무라이가 하나 있었다고 한다. [3] 공식적으로 알려진 사카에코의 종교는 창가학회이지만, 창가학회 신자라는 것은 위장이며 실상은 크리스천이라는 소문도 있다. 외손녀 키코에게 성경을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4] 그 때문에 귀국 후 일본어가 서툴러 고생했다고 한다. 이렇게 외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귀국한 사람을, 일본에서는 귀국자녀라고 부른다. [5] 다만 하버드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에 유학까지 한 마사코 황후와 비교할 수는 없다. 2015년 베니그노 아키노 3세 필리핀 대통령이 방일하여 일본 황족들과의 만찬회에서 영어로 연설했는데, 황족들은 모두 일본어 번역문이 적힌 종이를 읽고 있었다. 반면 마사코 황태자비는 필리핀 대통령의 연설을 똑바로 고개를 들고 쳐다보며 들어, 다른 황족들과 비교가 되었다. [6] 여담으로 이때 키코 비의 차녀 카코 공주가 첫 만찬회 데뷔로 화제가 되었는데, 당시 갓 성년(만 20세)이 된 그녀는 영국 유학 중인 언니 마코 공주 대신 많은 공식 석상에 참석해 아름다운 외모로 주목받으며 인기가 높았다. 또한 그해 4월, 영어 교육을 많이 시키며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이 많은 국제기독교대학에 입학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카코 공주가 베니그노 아키노 3세 필리핀 대통령의 영어 연설 내내 일본어 번역문만 보고 있어, " 카코 공주가 영어를 못 하는 것 아닌가"라는 말이 나왔다. 이에 대해 궁내청에서는 "연설 후 티타임에서는, 카코 공주가 능숙한 영어로 대화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후에 나오는 뉴스들을 보면, 카코 공주의 영어실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은 듯하다. [7] 1982년 3월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담임 선생님은 반 학생들에게 각자 메세지를 적게 했는데, 키코는 " 무지개 저 편으로 가자!!"고 썼다. [8]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의 키코 비는 정말 예뻤고, 자연스럽고 해맑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일본 황실에서의 생활이 길어질수록, 점점 억지스러운 미소와 좋지 않은 인상으로 변했다. [9] 키코 비의 아들 히사히토도 비슷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 [10] 이때도 키코 비의 친정아버지 타츠히코 교수는, 궁으로 쫓아와 사돈 아키히토 덴노 등에게 사위의 만행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였다고 한다. [11] 당시 가쿠슈인 초등과 6학년이던 마코 공주와 3학년이던 카코 공주에게는 첫 해외 순방이었다. [12] 후미히토 친왕과 다카라즈카 가극단 여배우의 염문설이 돌았던 적도 있다. 그 와중에도 후미히토 친왕은 아내 키코 비와 함께 다카라즈카 가극단 공연을 관람하는 공무를 하여 빈축을 사기도 했다. 더욱 우스운 일은, 후미히토 친왕의 생모로 거론되는 여성도 다카라즈카 단원이었다는 것. [13] 후미히토 친왕이 178cm, 키코 비는 162cm라고. 실제 후미히토 친왕은 現 일본 황실에서 가장 키가 크다. [14] 그런데, 감히 남편의 머리에 손을 댔다고 비난을 당한 사진이라 한다. 마냥 행복해 보이는 키코 비와, 당황한 듯한 후미히토 친왕의 표정 대비가 일품. [15] 황실과 갈등하며 심신의 병을 앓아 오랫동안 공무를 하지 못하고 칩거한 형님 마사코 황후와 대조적으로, 키코 비는 공무를 열심히 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2006년 히사히토 친왕을 낳은 후 차남 부부는 더욱 이런저런 공무 자리에 얼굴을 내밀며 존재감을 높였으며, 마코 공주 카코 공주도 자라면서 점점 부모의 공무에 자주 동반했다. [16] 키코 비가 석사학위와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이유에는, 학구열뿐 아니라 열등감 때문도 있다고 한다. 황족들 중에는 해외 명문대학에서 공부한 이들이 많은 반면, ( 가쿠슈인대학도 좋은 대학이지만) 키코 비는 해외 대학에 유학한 경험이 없기 때문. 한편 키코 비의 박사학위 논문은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지 않고, 오차노미즈 여대에서도 비공개(열람 금지)라서, 그에 대한 의혹의 말들이 있다고 한다. [17] 마코 공주 카코 공주도 어머니의 영향 때문인지, 수어 관련 공무를 많이 했다. [18] 방 3개에 거실(living room), 식당(dining room), 주방(kitchen)을 갖춘 집. 당시 가와시마 일가가 살던 집이 작아서, 혼수품을 놓아둘 공간이 없어 애먹었다고 한다. 시어머니 미치코 상황후처럼, 키코 비도 혼수를 꽤나 들고서 시집왔다고. [19] 일본 황족들은 성씨가 없지만, 어칭호나 미야고를 성씨처럼 쓰기도 한다. (학교에 다닐 때나 직장생활을 할 때)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노리노미야 사야코, 도시노미야 아이코 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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