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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13:23:28

돌격대

충격보병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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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영어 Shock trooper/Assault trooper
Stormtrooper[1]
독일어 Stoßtruppen
Sturmtruppen
중국어 突擊隊/突击队

1. 개요2. 역사
2.1. 발생2.2. 발전2.3. 기타 국가들의 경우
2.3.1. 프랑스2.3.2. 러시아2.3.3. 미국2.3.4. 오스만 제국2.3.5. 오스트리아-헝가리2.3.6. 이탈리아2.3.7. 나치 독일2.3.8. 우크라이나
2.4. 한계2.5. 기타 사례2.6. 변형
3. 파생4. 미디어

1. 개요

파일:erggtretgrtgrs.jpg

Stoßtruppen(슈토스트루펜, 충격대). Sturmtruppen(슈투름트루펜, 돌격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이 운용한 돌격부대의 이름으로, 개전 초기 기관총으로 보강된 방어 진지에 큰 피해를 보자 본격적인 공세 이전에 적 방어선의 취약부를 강습하여 돌파구를 열기 위해 편성되었다. 이후 이들은 후티어 전술에 따라 운용되었는데[2], 기존의 볼트액션 소총 대신 MP18을 필두로 한 상당량의 자동화기를 가지고 중포의 허리케인 포격의[3] 종료와 동시에 적 참호선의 강점을 우회하고 약점에 침투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2. 역사

2.1. 발생

최초로 편성된 것은 1915년 3월 독일 제 8 군 산하의 칼조브 돌격대대(Sturmabteilung Calsow)이다. 특이하게도 칼조브 돌격대대는 무거운 철판으로 된 방탄복을 기본 복장으로 하고 심지어는 방탄 방패까지 들고 다니는 부대였다. 하지만 이들을 창설한 칼조브는 이 부대를 지휘하지도 못하고 이들은 원래 임무와는 다르게 일반병들과 같이 대프랑스 전선에 배치되어 협상군의 맹공에 절반에 가까운 병력이 별 활약도 없이 증발해버리고 만다.

이후 빌리 로어라는 사람이 1915년 8월 돌격대의 새로운 사령관으로 부임하는데, 로어는 공격 대대를 개편하면서 분대지원용 기관총 사수와 화염방사기 분대를 추가하였다. 또한 위의 철판 방탄복은 실전 투입 결과 비효율적이며[4][5], 스피드가 생명이라는 것을 깨닫고 신형 철모였던 슈탈헬름을 제외한 모든 방탄복을 제식무장에서 제외시키고 대대적인 경량화에 들어가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러한 점들이 있었다.

이러한 대대적인 개편 이후 이들은 1916년 베르됭 공세에 투입되어 맹활약을 펼쳤다. 이후 돌격대로 재미를 본 독일제국은 돌격대의 규모를 점차 늘리기 시작했다.

2.2. 발전

특히 제8군을 지휘했던 오스카 폰 후티어 장군이 이러한 돌격대 전술을 정교한 교리로 정립하였다. 이 전술은 그의 큰 공언을 기려 후티어 전술이라 불렸는데, 그는 해당 전술이 다음과 같은 단계로 이루어진다고 정의했다.

1. 적진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킬 정도로 강렬하지만 짧은 공격준비사격 실시.[7]
2. 이후 포병의 이동탄막 지원 아래 돌격대가 먼저 앞으로 나아가 적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면서 유기적인 기동을 통해 적 전선의 약한 부분을 뚫고 들어가 적의 사령부와 포진지들을 파괴 및 점령.
3. 다음 소규모의 보병 부대가 경기관총, 박격포와 화염방사기를 가지고 돌격대가 지나친 적 강화진지를 공략하며 돌파구를 더욱 확대.
4. 공세의 마지막 단계로서 일반 정규부대가 남아있는 적의 저항을 일소.

1917년에 들어오면서 독일 제국은 물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에도 돌격대 전술이 퍼졌고, 동맹국 전체에서 돌격대의 규모가 점점 더 커졌다. 서부와는 달리 참호전보다는 기동전 양상이었던 다른 전선에서도 이 전술이 종종 등장하고는 했다. 예컨대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유명한 중동 전역에도 독일 제국의 돌격대가 투입되었는데, 당시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선전을 하던 협상군의 이집트 원정군을 격파하여 요르단 강 이남으로 후퇴시켜버리기도 하였다.

2.3. 기타 국가들의 경우

돌격대가 독일의 고유 병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협상군도 이와 비슷한 교리를 개발하여 실전에 투입하려고 시도했었다.

2.3.1. 프랑스

협상국 중 가장 돌격대에 구체적인 전술과 전략을 구상하였던 국가는 다름아닌 프랑스였다. # 다만 적 참호들에게 전방위적인 타격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한 독일의 돌격대와 달리 프랑스는 적 장교 암살, 전투배치 파괴[8], 포로 생포를 통한 정보창출 등, 점령 외 목적의 전투에 적극적으로 이용되었으며 이후 독일의 돌격대에 모방을 한 정예부대 운용에 대해서도 논의가 나왔으나 이에 대해 프랑스군 총사령관 페탱은 회의적으로 판단하였고 독일의 돌격대 운용에 대해 "약한 부대와 강한 부대를 나눈 뒤, 강한 부대만을 소모시키는 행위" "스스로의 병사들에 대해 신뢰를 잃어버린 결과"라고 격렬히 비평했다. 그리고 이는 1918년 루덴도르프 공세에서 정예병을 모두 잃은 독일이 백일 공세에서 방어 입장임에도 교환비로 밀리는 결과로 나타나 페탱의 통찰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프랑스군은 위 결론에 따라 돌격대 대신 보병의 상향평준화를 목표로 두고 모든 보병이 공유한 Groupe de combat 전술을 개발했다. 1917년엔 15~20명, 1918년엔 13명으로 구성되었던 그루프 드 콩바는 돌격대보다 화력과 유연성이 부족했으나 돌격대가 아닌 모든 보병보다 뛰어남을 증명하여 상향평준화라는 목적을 달성했다. 동시에 그루프 드 콩바의 역할이 돌격대와 똑같았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모든 보병을 돌격대로 만들었다'고 평가받는다. 이 그루프 드 콩바의 정체는 현대의 #이다.

2.3.2. 러시아

러시아 제국군 같은 경우는 독자적으로 돌격대, 그들의 표현으론 '충격부대'를 양성해서 브루실로프 공세 당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들은 현 스페츠나츠의 조상격 되는 이들이다.

또한 충격부대는 훗날 2차 대전 당시 소련군의 '충격군' 제대로 이어진다. 충격군은 다수의 보병과 중포들로 무장하여 공세의 제 1파로서 적 전선에 강력한 타격을 가해 방어선에 구멍을 내는 역할을 맡은 야전군 제대다. 그럼 이들이 뚫은 구멍으로 기계화 부대가 진입, 방어선을 돌파하는 식의 전략이었다. 동시에 높은 보병 비중과 중화력을 살려 시가전에서도 활약했다.

2.3.3. 미국

참호 곤봉으로 무장한 트렌치 레이더(참호 습격병) 병과를 창설했고, 이후 뒤늦게 전쟁에 뛰어든 미군 참호 습격병들은 참호 곤봉, 야전삽, 산탄총과 트렌치 나이프로 무장하고 독일군과 근접전을 벌였다.

2.3.4.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은 독일 군사고문단을 통해 돌격대 전술을 수입하여 중동 전선에 투입했다.

2.3.5.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트리아 역시 러시아의 충격 전술에 크게 데이고 난 뒤 독일의 노하우를 습득하여 돌격대를 꾸려 동부전선에 투입했다. 다른 국가들과 대비되는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들은 독립 제대로 편성하기보다는 개별 사단과 여단급에서 돌격대를 편성하여 운용했다는 점이다.

2.3.6. 이탈리아

오스트리아가 돌격대를 도입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탈리아 왕국군에서도 주 전장이던 알프스 지역의 지리에 익숙한 산악부대를 돌격대로 편성해 운용했다. 그냥 'Reparti d'assalto'(돌격대)라고도 했지만 대개는 'Arditi'(아르디티, 대담한 자들)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아르디티라는 이름은 현재까지도 1차대전 시기의 이탈리아 돌격대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굳어져 있다.

파일:Flag_of_Arditi.svg.png
아르디티 부대의 휘장.

아르디티의 전체적인 개념은 돌격대와 비슷했으나 그 전술적 목적은 돌격대처럼 적 방어선의 약한 부분을 치고 나가 아군 본대의 진격로를 뚫는 것이 아닌, 적 방어선 전체에 타격을 주어 붕괴시키는 주공의 역할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르디티가 돌격대보다 마냥 우월했다는 말은 아니며, 독일군 돌격대는 스위스~북해까지 이르는 기나긴 참호선이 복잡하게 늘어지고 그 안에 식민지 전쟁으로 잔뼈가 굵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꽉꽉 들어차 있던 서부전선에서 싸워야 했던 반면에, 아르디티가 배치된 알프스 전선은 상대적으로 전선이 짧고 험준한 산악지형이라 참호를 길게 확장하기 어려웠으며 상대였던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군의 숙련도도 비교적 낮았기에 아르디티가 더 과감한 공세를 수행 가능했던 것이다.

파일:arditi.png
흉갑을 입고 수류탄으로 무장한 아르디티 병사. 단검을 입에 문 특유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르디티는 빠른 기동을 위해 기관단총 또는 권총, 단검과 수류탄, 철조망 제거용 툴을 휴대한 채[9] 아군의 지근거리 포격에 오폭되는 것도 감수하고 포격 와중에 돌격한 뒤 적 참호에 수류탄을 투척해 적에게 공포심을 불어넣은 직후 단검을 들고 근접전에 뛰어드는 위험천만한 전술을 즐겨 사용했다. 이때 양손에 각각 수류탄을 쥐고 있기에 투척 후 재빨리 단검을 쓸 수 있도록 미리 단검을 입에 문 채로 돌격하기도 했다. 이러한 전법으로 인해 위와 같이 단검을 물고 월계관을 쓴 해골과 같은 살벌한 상징을 가지게 되었다. 거기에 포병의 철저한 지원을 받는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이들은 권총과 폭탄, 칼 한 자루만 들고 적의 기관총과 소총 사이로 파고드는, 나쁘게 말해서 꼬라박는 전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작전의 성공과 실패에 관계 없이 항상 인적 손실율이 높았다. 그래서 이들의 모토 역시 모 아니면 도인 전술에 걸맞게 "O la vittoria, o tutti accoppati!(승리 또는 전멸!)"이었다.

이들은 열성적인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의 비중이 높았고 정예부대라는 자부심이 강했기에 전투의지 역시 왕성해 오헝 제국군에게 악명을 떨쳤다. 초기에는 자원병들로 구성되었지만 나중에는 따로 인원을 차출해 아르디티를 편성했다. 사르데냐 왕국 시절부터 존속해온 정예 경보병 베르살리에리, 고산지대 출신자들로 구성된 산악연대(알피니), 그리고 일반 보병부대 인원들로 이루어진 아르디티가 각각 존재했으며, 베르살리에리 아르디티는 붉은색, 알피니 아르디티는 녹색, 일반 아르디티는 검은색 칼라탭을 부착해 서로 출신을 구별했다. 하지만 아르디티를 일컫는 또다른 별칭인 'Fiamme nere'( 검은 불꽃)이라는 이름이 유명했기에 이전 부대 출신에 관계없이 "아르디티=검은색"이라는 인식이 생겨, 이후 무솔리니가 아르디티의 공격적이고 정예스러운 이미지를 따와 검은 셔츠단의 제복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파일:피아베의 카이만.jpg

아르디티 내에서도 독특한 케이스로는 Caimani del Piave(피아베의 카이만)[10]이라는 별명으로 수중침투에 특화된 별동대가 있었는데, 상설 부대는 아니었으며 일종의 태스크 포스에 가까웠다. 카포레토 전투 이후 피아베 강을 경계로 전선이 고착화된 상황에서 강 너머 적 진지를 정찰하거나 사보타주하기 위해 운용된 부대였다. 한밤중에 맨몸으로 강을 헤엄쳐 적지에 침투하는 극단적인 특공임무를 수행했다. 수영과 단검술, 맨손격투에 능했다고 하며 임무에 따라 그때그때 타 부대에서 일시적인 지원자를 받기도 했기 때문에 병력은 유동적이었다.

이들은 아르디티에 포함되기도 하고 해군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원래는 해군이 베네치아 방어를 위해 편성한 상륙전 병력이 시초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아베 전선에 참가했을 때는 인원의 상당수를 아르디티로 충당했으므로 아르디티와 해군의 혼성부대로 볼 수 있다. 일시적인 비공식 부대였던 까닭에 50년대 들어 영화화되기 전에는 이탈리아 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사적으로는 1차대전 종전 직후 해군 1연대 '산 마르코'라는 부대명 수여와 함께 정식으로 편제되어 현재까지도 이탈리아군의 주력 해병대로 존속하고 있는 유서 깊은 부대다.

2.3.7. 나치 독일

훗날 나치 독일의 경우 무장친위대 부대들을 돌격대와 같은 충격부대의 개념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1943년 쿠르스크에서 정예병과 무장을 대거 손실한 후의 무장친위대는 기존의 전술을 사용하기 어려워졌다.

2.3.8. 우크라이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우크라이나군 제3돌격여단 및 제5돌격여단, 제92돌격여단 등 여단 규모의 돌격대를 편성하였으며 각 여단은 2~5개의 돌격대대와 1개의 전차대대 및 다수의 기계화대대, 차량화대대, 소총대대 등이 편제돼 있다.

돌격대대는 m113이나 ypr765와 같은 기계화 장비를 이용한다.

2.4. 한계

그러나 돌격대 전술에는 근본적으로 보병전술이라는 점에 문제가 있었다. 이 전술은 기동력이 생명이지만, 인간은 체력에 한계가 있거니와 그렇게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생물도 아니었으므로 아무리 정예병이라도 지치니 금방 공세종말점에 이르고 돌파 후 전과확대를 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인간이 태어나서 자라고 정예병으로 단련되기까지 많은 시간과 자원이 요구되지만, 총 한방 맞으면 바로 전투 불능이 되어버리고, 가장 먼저 적진으로 돌격하기 때문에 집중사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특성상 돌격대 전술 자체가 소모성이 매우 커서 그러한 인적 자원이 다수 죽어나가니 오래 지속하기 어려웠다. 언젠가 인력이 고갈되는 시점에서는 시도는커녕 더는 방어조차 하기 버거웠다.

또한, 협상군은 몇 차례 돌격대 전술에 당하고 나서는 그 전술을 습득했을 뿐만 아니라 대응교리와 발전형 전술을 고안해내었다. 프랑스군은 1917년 말에 협상군과 동맹군 양쪽 모두 기동전으로 귀환할 수단과 방법을 개발했다 판단하고 독일군의 수단에 대응하기 위해 개발한 종심방어 지침을 회람했으며, 차량화포병연대, 차량수송화되어 철도 의존이 사라진 보병, 항공사단, 기계화기병군단으로 얻은 작전적, 전략적 기동력으로 춘계 공세 동안 돌격대에 성공적으로 대응했을 뿐만 아니라 대응에 실패한 영국군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프랑스군은 인간의 한계를 공업으로 해결해보려는 시도로서 전차를 개발했을 뿐만 아니라 1916년 말부터 실험적으로 운용하고 있던 차량화포병을 40개 연대 규모로 확대해 새로운 포병 발전의 단계를 열었다. #스톰트루퍼에 대하여

1918년 러시아가 혁명으로 인해 전쟁에서 빠지고 난 뒤, 독일군은 동부전선에 배치된 병력들까지 싸그리 모아 서부 전선에서 미카엘 공세를 펼쳤다. 당시 날씨가 좋아 돌격대의 기습공격 및 탱크를 통해 초반에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결국 목표달성에는 실패하게 되었으며, 이후 바로 벌어진 협상군의 100일 공세에 독일제국이 패퇴하면서 전쟁은 곧 끝났다.

2.5. 기타 사례

돌격대 전술 자체가 1차세계대전 당시의 부족한 포병 기갑· 기계화 기술력 속에서 이를 보병전술 중심으로써 해소하려는 시도였던 까닭에, 이와 비슷한 전장 환경이 조성되는 경우에도 자생적으로 발생한 사례가 있다.

예컨대 6.25 전쟁 당시 기갑과 포병이 부족했던 한국군 중공군 고지전이 벌어지고 전황이 교착상태가 되었을 때 돌격부대나 충격보병대, 레인저 등으로 불리는, 1차세계대전기와 유사한 전술을 구사하고는 했다. #한국전쟁, 그리고 한국군 충격보병 개념의 수렴진화 #2

2.6. 변형

2.6.1. 기동전

전차와 기계화 장비, 항공기 등의 발전으로 기동력이 진일보한 이후, 이러한 교착 상태를 타개하고자 보병을 갈아넣는 대신 이들 전력을 투입하는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국가마다 돌파부대, 충격군, 돌격부대 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며 목표에 대한 관점도 다르지만, 그 방식은 대동소이하다.

2.6.2. 나치 독일 돌격대

독일에서 성공적으로 운용되자 협상국에서도 비슷한 전술과 부대가 만들어졌고 보통은 대대단위로 편성돼서 돌격대(Sturmabteilung, SA)로 불렸지만, 훗날 이 이름을 이상한 조직이 물려받고는 유명해져버렸다. 그 탓에 SA라는 표현은 사멸하고 다른 동의어가 주로 쓰이거나 정 대대단위를 지칭하려면 Sturmbataillon이라는 표현이 쓰이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영미 문화권에선 물려받은 녀석들 탓에 이 항목의 문서가 형성되는 결과가 나왔다. 나치가 돌격대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특수부대로서의 심상을 부여하여 정예군인이라는 상징을 같이 엮어보려는 의미였지 본래 부정적인 용도는 아니었다. 비슷하게 덤터기를 맞은건 토텐코프가 있는데, 원래는 정예 기병과 그 후신인 전차/항공병과, 그리고 돌격대와 같은 정예 보병의 상징이었으나 나치 독일의 제 3 SS 기갑사단 토텐코프와 그들의 전쟁범죄 때문에 독일내에선 군사적으로 긴 역사를 지닌 이 상징물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SA와 함께 영어사전에 '나치 돌격대'로 수록될 정도로 유명해져서 본래 의미가 묻히게 되었다. 원래 의미는 정예 돌격병에 가까운데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캐나다군과 미군 부대에 대해서도 그 압도적인 전투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독일에서 돌격대라는 명칭을 붙여 줬다.

3. 파생

한편, 이러한 돌격대의 인상 깊은 활약상 덕에 사회의 여러 단체로 퍼져서 군사 용어가 아닌 다른 뜻으로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경우 보통 "잘한다!", "정예"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앞장서서 하자!"나 "이끌어간다!" 등의 뉘앙스도 붙는다. 다만, 아무래도 좀 군대스러운 느낌이 짙은 편.

가령 팬클럽이나 스포츠 동호회 사이에서도 무슨무슨 돌격대니 하는 식으로 쓰인다.

북한에서는 건설노무를 담당하는 인력을 청년돌격대라고 한다. 주로 정규군으로 복무하기에는 신체조건이 적당하지 않을 때 돌격대로 빠진다고 한다. 이들의 실상에 관해서는 북한 경수로 건설에 참여한 오영진씨의 만화 < 남쪽손님>을 참고.

4. 미디어


[1] 아래의 단어는 Sturmtruppen의 직역투이고, 위의 두 단어는 Stoßtruppen의 번역차용이다. [2] 1916년에 있었던 브루실로프 대공세에서 러시아군이 보여준 전술과 유사하다. [3] 공격준비사격의 일종으로, 적 방어선의 모든 방면에 사격하는 종래의 포격 전술 대신 가장 취약한 한 지점에 짧은 시간 동안 모든 포격을 집중하여 이뤄지는 포격 방식이다. [4] 2차 세계대전기까지 존재했던 이런 철판 방탄복은 사실 야금술의 발달 정도를 제외하면 근본적으로 중세~근대의 강철제 갑옷을 그대로 가져온 것에 가까웠다. 파편이나 중~근거리 권총탄, 원거리 소총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방호 효과가 있었으나, 기관총 사격을 받거나 참호내 근접전시에는 총검에 대한 방검효과와 제한적인 권총탄 방호력 외에는 큰 효용이 없었으며, 오히려 무거워서 발생하는 활동성 저하가 마이너스 요인이 되었다. [5] 참호전 특성상 최대한 빨리 무인지대를 돌파하고 적 참호에 접근해 근접전을 벌여야 하므로 도움이 되기 힘들었다. 또한 적 참호를 상대로 야습이나 잠입할 때 은밀성과 잠행성에서 마이너스가 되는 부분도 있었다. 그나마 착용 인원의 사기진작 효과가 있기는 했는데, 곧 이것도 참호전에 익숙해진 병사라면 차라리 안 입는 게 낫다는 것을 깨닫고 외면당하곤 했다. 참고로 섬유재질 방탄복도 존재하기는 했으나 이 역시 방탄 성능에 한계가 있었다. 소총탄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탄복은 1990년대에 가서야 실용화되어 보급되기 시작했다. [6] 위 사진의 수류탄을 든 대원처럼 옆구리 부분에 한 개씩 찼다. [7] 이런 형태의 포격 방식을 허리케인 포격이라고 불렀으며, 다수의 독가스탄 공격도 포함한다. [8] 춘계 공세 때는 무려 6km 종심까지 돌파한 후 귀환하며 독일군의 공격준비를 파괴한 사례도 존재한다. [9] 물론 점령한 참호를 수비하기 위한 기관총과 포병도 있었다. [10] 나중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