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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대한민국 사적 제123호 창경궁 | ||
<colbgcolor=#bf1400> 창경궁 빈양문 昌慶宮 賓陽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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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 와룡동) | |
건축시기 |
1616년 (창건 추정) 1833년 (재건) 1986년 (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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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빈양문[1] |
[clearfix]
1. 개요
창경궁 명정전의 후문이다. 그리고 단순한 정전의 후문 기능을 넘어 창경궁 내 합문(閤門) 역할을 했다. 합문이란 궁궐에서 행사 시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경계로 설정된 문을 말한다. # 빈양문은 외전 일대와[2] 내전 구역을 연결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합문을 두기 적절한 장소였다.명정전의 서쪽[3]에 있으며 남쪽으로 숭문당과 붙어있다.
‘빈양(賓陽)’ 뜻은 ‘밝음(陽)을 공경히 맞이한다(賓)’이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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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동궐도〉 빈양문 |
이후 주로 임금이 명정전으로 행차할 때 지나거나 #, 장례 때 망곡례[4]를 행하고 #, 발인할 때 재궁(梓宮)[5]이 나가는 공간으로 등장했다. # # 이외에 영조가 문과 식년시에서 뽑은 54명을 이곳에서 만난 기록이 있다. #
그 후 1830년( 순조 30년)에 다시 불탄 것을 3년 뒤에 복구했다. #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바꾸면서 많은 전각들을 헐 때 같이 철거했다. 8.15 광복 후 문화재관리국에서 1984년에 발굴조사를 거쳐 1986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3. 구조
- 문짝은 나무 판으로 중앙 열 3칸에 달았다. 가장자리에 바로 문짝을 달지 않았으며 본 기둥과 약간 간격을 두고 샛기둥을 세운 뒤 거기에 달았다. 가운데 왕이 다니는 어칸(御間)은 조금 더 높게 만들어 신하들이 다니는 좌, 우 문(협칸)과 차이를 두었다. 협칸의 본 기둥과 샛기둥 사이는 나무 판으로 마감했으며 어칸의 본 기둥과 샛기둥 사이, 그리고 양 측면의 칸에는 중인방을 끼우고 나머지 공간을 역시 나무 판으로 막았다.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했고, 문 위는 풍형 홍살을 꾸며놓았다. 단청은 모로단청[6]으로 입혔다. 바닥엔 전돌을 깔았다.
<colbgcolor=#bf1400> 빈양문과 명정전을 잇는 복도 | <colbgcolor=#bf1400> 문정전까지 이어진 빈양문의 복도 |
4. 여담
- 합문은 고정된 게 아니라 때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에 현직 관료가 아니면 합문이 어딘지를 잘 몰랐다. 이에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다. 정조가 창경궁에 머물 때 한 신입 사관이 창덕궁의 합문인 협양문에서 왕을 기다렸다. 하지만 임금이 거기서 나올 리 없었고, 뒤늦게야 정조가 창경궁에 있는 것을 안 사관은 빈양문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부랴부랴 건너갔다고 한다.(...) # #
5. 매체에서
- 빈양문 본채가 나온 적은 별로 없다. 대신 복도각이 자주 등장했다. 특이하게 고려나 신라 왕궁으로 나온 적이 있었는데 《 용의 눈물》에서 개성의 수창궁 일부로, 《 태조 왕건》에서 신라의 서라벌 궁궐으로 등장했던 것. 지나가는 배경으로 나왔다.
[1]
두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
정전인
명정전과
편전인
문정전 구역.
[3]
명정전은 동향했기에 뒷면은 서쪽이 된다.
[4]
望哭禮. 시신이나 무덤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곡하는 예식.
[5]
왕실에서 쓰는
관을 말한다.
[6]
부재 끝부분에만 문양을 넣고 가운데는 긋기로 마무리한 단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