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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17:54:34

집결호

집결호 (2007)
集结号 ASSEMBLY
파일:jijiehao.png
감독 펑 샤오강
출연 장한위, 덩차오
장르 전쟁 영화
원작 양금원 - 소설 《관사》
제작 펑 샤오강, 장징, 왕중쥔
기획 천궈푸, 왕중레이
촬영 위웨
미술 자오징, 장준허
음악 왕리광
무술감독 박주천[1]
제작사 파일:중국 국기.svg 화이브라더스
배급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시네마서비스
개봉일 파일:중국 국기.svg 2007년 12월 20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8년 3월 6일
상영 시간 125분
국내등급 파일:영등위_12세이상_초기.svg 12세 이상 관람가

1. 개요2. 줄거리
2.1. 1948년2.2. 1951년2.3. 1955년
3. 등장무기
3.1. 전차3.2. 대포3.3. 권총3.4. 자동화기3.5. 소총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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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공내전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한 중국 영화. 펑사오강 감독[2]의 2007년작.

중일전쟁-국공내전 참전군인인인 상맹란(常孟兰)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픽션인 양진위안(양금원)의 소설 《관사》를 영화화한 것이다. 국공내전에서 영웅적으로 전사했으나 실종자 처리된 부하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 분투하는 한 군인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참고로 집결호(集结号)는 중공군 용어로, 공준사나 퇴각때 모이는 집결용 참호가 아니라 집결 신호를 알리는 나팔소리를 뜻한다.

2. 줄거리

2.1. 1948년

국공내전의 전황이 역전된 1948년 겨울, 인민해방군 중원야전군[3] 독립2사단 139연대 3대대 9중대는 미 군수물자로 무장한 국민당 168사단과 시가전을 벌이고 있었다. 중대장 구지디[4] (장한위[5] 분)는 처음엔 국민당군을 투항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국민당군은 산포를 쏘며 엄청난 저항을 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지도원(정치장교)이 끔살당하자, 구지디는 포로는 필요없다는 명령을 내린다. 이 명령을 들은 구지디의 한 부하는 항복한 국민당군 지휘관을 쏴죽였다. 하지만 나머지 부하들은 이성을 잃지 않고 더 이상의 살육은 하지 않았다.

한편 구지디는 전투 후 누더기가 된 팔로군 군복[6] 대신 비교적 깨끗한 국민당군 방한복과 방한화를 부하들이 입도록 허가하고[7] 점호를 해보니 117명 정원인 중대에서 71명이 전사-중상자가 되어 나머지 인원은 46명이었다. 연대 정치장교는 구지디가 포로살해 명령을 내린 것과 부하들에게 포로의 피복을 함부로 빼앗은 것을 문제삼아[8] 3일 영창처분을 내리고, 중대 전체를 문제부대로 지정하여 연대 예비대로 재배치되게 된다.[9] 구지디는 영창 생활을 하는 동안 전투에서 겁에 질려 바지에 오줌을 싼 혐의로 마찬가지로 영창에 갇힌 교사 출신 왕금존을 알게 된다.

석방된 구지디는 류택수[10] 연대장에게 소환되어 저녁식사를 하게 된다. 둘은 중일전쟁시기인 1939년부터 같은 부대(9 지도연대)에서 함께 싸워온 동지였고, 같이 있던 부대에서 그때까지 살아남은 단 두명이었다. 그 뒤 연대장으로부터 문하현[11] 탄광을 정오까지 사수하되, 집합 나팔(집결호)이 울리지 않으면 계속 싸우라는 명령을 받는다. 구지디는 자신의 중대가 정원의 3분의 1인 46명으로 줄었다며 병력보충을 요구하지만, 보충병은 없다는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듣는다. 그나마 노획한 국민당군 방탄모[12] 맥심 기관총 산포, 그리고 비뢰포와 상당량의 폭약을 가져가는 것은 허락했다.

또한 구지디는 자기부대 정치지도원이 전사했다고 류택수에게 말했는데, 이에 류택수는 구지디에게 정치지도원도 겸직하라고 했지만, 구지디는 이를 사양하고 영창에서 만난 왕금존을 현지임관시켜 지도원으로 데려가겠다고 한다.[13] 류택수는 나팔수 량지를 불러와서 소개시키며, 구지디에게 다시 한번 "후퇴 나팔소리(집결호)가 없으면 최후의 한명까지 싸우라"는 다짐을 받고 구지디 중대를 탄광 앞 참호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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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국민당군은 이곳을 탈취하기 위해 대병력을 동원해 탄광진지에 파상공세를 폈고, 구지디의 중대는 가져온 모든 화기로 분전하지만 중과부적이어서 계속 사상자가 발생한다. 이 와중에 정치지도원으로 임명된 왕금존은 다시금 공포에 떨지만, 구지디는 다그치기는 커녕 갱도안에 있으라고 한다.[14] 그 후 구지디는 부하들을 독려하면서 부상자와 전사자[15]들을 갱도 속으로 후송시켰으나, 교전이 장기화되며 전투 가능 인원이 1개 분대급까지 급속히 줄었다.

이 와중에 초대붕 소대장은 국민당 전차에 화염병을 던지려다 오히려 자신이 뒤집어 써 불타올랐고, 구지디 역시 산포로 전차에 대응하다 전차포에 빗맞아 귀가 잘 안들리게 됐다. 이렇게 난전이 계속될 즈음 새카맣게 그을려 죽어가던 초대붕은 나팔소리를 들었다며 후퇴를 종용했고, 이에 중대원들은 들렸다와 안들렸다는 쪽으로 양분되었다. 이에 초대붕은 나팔이 불렸든, 안불렸든 이대로면 모두 죽으니 퇴각하자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고, 이에 구지디는 자신은 귀가 망가져서 들렸는지 안들렸는지 모른다면서 지도원인 왕금존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의외로 그는 "안 들렸다"고 단언해 사수로 방향이 잡혔다.

그 후 구지디는 연대에서 가져온 폭약과 도화선을 전방 곳곳에 매설했고, 그의 예상대로 국민당군은 대규모 야습을 감행했다. 이에 구지디는 적들이 매설 지점까지 다가오길 기다렸다가 격발 후 백병전에 돌입하지만 중과부적으로 정신을 잃고 만다. 그 후 난장판을 지나가던 다른 해방군 부대가 국민당 군복을 착용한 구지디를 발견하고 그를 포로 수용소로 이송했다.

몇달후 구지디는 어느정도 회복되었고, 자신을 치료하는 해방군 군의관에게 자신은 인민해방군 지휘관이라고 주장하지만, 군의관은 그가 PTSD로 정신이 나간 것으로 치부했다. 게다가 구지디의 신원을 밝혀줄 상급부대는 국민당군을 쫓다 연락이 두절되었기에 그의 주장을 밝혀줄 수 없었다. 하여간 군의관은 구지디가 뭐라든 그가 충분히 회복되었다 보고 석방시키려 했다.[16] 그리고 이때 모병관이 수용소 안으로 들어와 전향해 싸울 사람 있냐고 물어왔고[17], 구지디는 자신이 포를 다뤄봤다며 귀순병사 자격으로 포병으로 재입대해 포대장인 조이두( 덩차오 분)[18]를 알게 된다.[19]

2.2. 1951년

그로부터 얼마 안가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조이두 부대 역시 중국 인민지원군으로 참전한다. 그 후 1951년 강원도 횡성으로 내려온 그의 부대는 미합중국 육군 기갑부대가 근방에 배치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포대장인 조이두는 이들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 포격하기 위해 관측반을 이끌고 염탐하려 하는데 구지디가 합류를 자원해 그와 함께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으로 변장한다.[20] 이 과정에서 조이두가 대인지뢰를 밟고, 터지지 않는 상황에서 미군 탱크가 온다. 구지디는 침착하게 미 육군들은 한국어를 모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고,[21] 중국군 관측반원들은 담배를 피우며 미군에게 경례까지 하는 등의 여유를 부린다.

구지디가 예상한대로 미군 전차 승무원들도 한국군 복장을 하고 있는 중국군 병사들을 한국군이라고 알고 속아넘어갔고 지도를 가져와 길을 묻는다. 구지디는 아무 중국어로 대충 둘러대고 한국어처럼 "슴니다"를 덧붙였는데도, 미군은 어조의 차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조이두가 밟고 있는 지뢰를 살펴보고 " 프랑스제 지뢰구만"이라며 "굿럭"이라고 말하며 자리를 뜬다.

구지디는 조이두에게 내가 지뢰를 잡고 있는 동안 빨리 가서 관측반의 좌표를 전송하라고 한다. 조이두는 발을 떼면 지뢰가 폭발하여 구지디가 죽을까봐 머뭇거린다. 이 때 구지디는 "내가 청력이 나빠서 부대원들이 다 들은 나팔 소리를 못들어 후퇴를 못했지. 그래서 47명의 부하가 몰살당했다. 지금 죽어서 그들을 볼 수 있다면 여한이 없다"고 말하며 어차피 자신은 포병 지식이 없으니 지금은 나보다 당신이 더 무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조이두는 처음에는 자신 때문에 부하를 죽일 수 없다며 버티고, 끝내 부하인 구디지에게 "형님, 이러지 마세요."하며 만류하지만 구디지의 설득에 결국 지뢰에서 발을 뗐고, 미군 전차부대의 위치를 포착하여 본대에 정확한 좌표를 보고한다. 중국군 포병부대는 넘겨받은 좌표로 미군 전차 부대를 포격해 섬멸한다.[22] 하지만 구지디가 누르고 있던 지뢰는 폭발해 그의 한쪽 눈을 실명시켰고 다른쪽 눈 역시 시력을 상당히 잃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조이두는 구지디를 형님으로 극진히 모시게 된다.

2.3. 1955년

구지디는 한국전쟁에서의 군공으로 나름 참전군인 대접을 받지만, 1949년 이전의 군공은 아직 인정받지 못했다. 1955년 중공정부는 한창 내전에서의 전몰자들을 찾아내 유가족에 대한 원호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전사자와 실종자의 대우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유족들은 전사자로 인정받고 싶어하지만[23], 증거가 있어야 했다. 구지디는 자신이 국공내전에서 마지막으로 싸웠던 문하현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부하들의 자취를 찾고자 하지만, 해당지역은 이미 탄광개발이 진행되어 이전과 상당히 달라졌다. 이래저래 수소문하던 중, 우연히 남편 왕금촌의 실종신고를 하고 있던 부인 손계금을 만나게 된다. 손계금도 전쟁에 나간 후 소식이 끊긴 남편의 소식을 알고 싶어했고, 결과적으로 구지디가 그의 최후를 말해주었다.

구지디는 전멸한 부하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당과 군에 계속 자신의 부대 이야기를 하지만, 상부에서는 "그런 부대가 한 둘이냐"며 구지디의 청원을 무시하며, 그를 관종 취급한다.[24]

한편, 조이두는 한국전쟁의 공적으로 육군 중교[25]로 승진해 있었고, 구지디는 그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겨 형님처럼 모시는 조이두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 우선 함께 데려왔던 손계금이 몸이 안좋다며 치료를 부탁하고, 문하지역에 향군회관이 생겼다며 거기로 전출시켜줄 것과, 자신의 부대원을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조이두는 눈도 잘 안보이면서 괜히 그러지 말고 여기서 눌러앉아서 자신과 같이 있으라고 만류한다. 그리고 부하들의 일에 관한 건 자신도 상부에 요청했지만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이야기를 해준다. 구지디는 함께 데려왔던 손계금을 중매하여 조이두와 결혼하게 하고 이후 실종자 처리된 자기 부하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하지만 당에서는 그가 구조될 때 "왜 국민당군 군복을 입고 있었는가"를 집요하게 캐물으며 여전히 진상 관종 취급하고 있다. 화가 난 구지디는 조사원들을 향해 행패를 부리고, 조이두가 자신의 신분으로 간신히 이를 무마했으나 구체적인 증거 없이는 구지디의 주장을 인정받게 할 수 없었다.

이후 구지디가 소속되었던 연대의 후계 부대가 밝혀져서 구지디의 주장은 일단 인정을 받는다. 국공내전-한국전쟁 와중에서 이 부대는 해체와 재편을 거듭했고, 하여간 구지디의 주장은 증명이 됐다. 게다가 류택수 연대장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는 소식도 듣게 됐고, 류택수의 묘소에 성묘를 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당시 나팔수였던 량자가 상이군인이 되어 그곳의 관리를 맡고 있는 걸 보게 된다.

구지디는 량자에게 류택수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 마지막 전투 때 "나팔(집결호)이 울렸는데 귀가 잘 안들려 확신이 없었고, 후퇴하지 않은 것이 참으로 후회된다며 부하들이 그때문에 몰살당했다고 량자에게 자책한다. 하지만 량자는 자신을 나팔을 불지 않았다고 말했고, 구지디는 그동안 자신이 알고 있었던 사실과 달리, 류택수가 후퇴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을 알게 된다. 즉 류택수의 본대를 안전하게 후퇴시키기 위해 구지디의 부대는 국민당군을 상대로 모두가 전사하는 순간까지 싸워야 했던 것이다.[26] 게다가 류택수 부대의 정치장교는 탄광진지에 아군의 흔적이 없는 걸 보고[27] 9중대 전체를 실종 처리하여 부대원 모두가 전사자가 아니라 실종자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이에 구지디는 자신이 믿고 있었던 류택수 연대장에 대한 배신감으로 류택수의 묘 앞에서 난리를 치는 것을 주변인들이 겨우 만류한다.

이후 구지디는 곡괭이를 들고 갱도 입구를 찾겠다며 탄광 여기저기 미친듯이 파헤쳤으나 매번 허탕만 쳤고, 그곳의 광부들과 관리인은 그를 처치곤란 정신병자로 취급했다. 그러던 중 량자의 노력으로 139연대의 장 위원을 찾아서 구지디 부하들의 전사를 확인받게 되고 그들은 혁명열사로 추대된다. 이후 1958년에 인근 저수지 공사 도중 부하들의 유해가 발견되고, 그들을 기리며 조성된 위령비 앞에 모인 구지디와 관계자들은 9중대 보고 및 훈장수여식을 거행 후 나팔수였던 량자가 집합 나팔을 불고, 구지디는 1981년 군 요양병원에서 사망했다는 문구를 끝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3. 등장무기

밀리터리 동호인 (특히 총기 애호가)이라면 한번 볼만한 영화이다. 중국은 20세기 초 내내 내전을 벌였고, 각 군벌들이 세계 각국에서 총기를 수입하였기 때문에 국공내전은 세계의 총기박람회장이 되었다. 게다가 2차대전 후 미국은 장제스 정부에 태평양 전쟁의 잉여무기를 잔뜩 지원했는데, 국민당군이 대만으로 쫓겨나면서 이 무기들은 모두 중공군의 소유가 되었다. 여기에 중국영화는 1950년대부터 배달의 기수식의 영화를 무수히 만들어 봤기 때문에 각 시대에 맞는 소품을 모두 갖추고 잘 관리하고 있어서 고증을 잘했다. 시대별로 군복과 무기들이 꽤 고증에 잘 맞게 나온다. (중국 총기 동호인용 웹사이트 军武次位面에서 인용 #)

3.1. 전차

3.2. 대포

3.3. 권총

3.4. 자동화기

3.5. 소총

4. 기타



[1] 한국인이고 쉬리를 시작으로 여러 한국영화의 무술감독을 맡았다. [2] 주성치의 2004년작 영화 쿵푸허슬에서 악어파 두목 역할로 나온 바 있다. [3] 류보청 덩샤오핑이 지휘하던 부대로 약칭 류덩군이라고 불린다. 국공내전 당시 대단한 활약을 했고, 이후 남진하여 국민당군의 수도인 난징을 함락시켰다. [4] 한국한자음으로 읽으면 곡 자지, 중국어로 읽으면 구쯔디이다. 한국어로 번역된 자막에서 다른 이름은 한국한자음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주인공의 이름만 중국어 비슷하게 번역되었다. 이유는 한국한자음 이름이 남자 성기를 뜻하기 때문에 번역자가 적절히 변형한 듯. [5] 성우출신 배우이다. 한석규처럼 30대에 뒤늦게 영화배우로 입문했으나, 이후 중국의 대표적인 흥행배우가 되었다. 펑 샤오강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불리며, 최근에도 오퍼레이션 메콩에서도 중국군 특수부대 지휘관역을 맡았다. [6] 팔로군은 정규군이 아니었기 때문에 군복은 수작업으로 농민복을 개조해 염색을 한 수준이었다. [7] 다만 적진 침투가 아닌 피아가 뒤섞인 전장에서 이걸 하는 건 적으로 오인당할 수 있는 상당히 위험한 행동이다. 실제로 춘천-홍천 전투 막바지에 총소리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북한군들끼리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으니 총도 막 집어쓰면 안된다. [8] 특히 후자의 경우, 전술했듯 상당히 위험한 행동이다. [9] "예비대"라지만 이후 사지로 보내진 걸 보면 형벌부대나 다름없다. [10] 중국의 중견배우인 호군(후쥔)이 맡았다. 중드팬 사이에서는 중드의 유동근으로 불린다. 천룡팔부 2003년도판에서 소봉역으로 유명하다. 2006년에 나온 중드 주원장의 주원장 역으로도 유명하다. 2008년작 적벽대전(영화)에선 조운 역. [11] 문하 (원허)는 산둥성에 있는 지역을 말하지만 문하현이라는 행정구역은 없다. 즉 가상의 지명이다. [12] 이미 이걸로 한차례 징계를 받았음에도 굳이 부하들에게 국민당군의 미제 방탄모와 방한화를 착용시키려는 걸 보면 부하에 대한 애정이 각별함을 알 수 있다. 첫 장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구지디는 부하들에게 방탄모를 최대한 갖춰 주려는 모습을 보인다. 원래 국민당군은 미제 방탄모를 대규모로 원조받았고, 국공내전 당시 이를 사용하지만, 게릴라부대로 시작한 중공군은 1927년 창군시점부터 한국전쟁 끝날 때까지도 방탄모 없이 싸웠다. 이후 1980년대 초반까지도 2차대전의 일본군 철모를 모방한 방탄모를 썼다. 1979년 중월전쟁 이후에야 현대적 방탄모가 도입되었다. [13] 이는 생존부대원 중에서 글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편지를 써주거나 전사자 명부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글을 아는 사람을 지도원으로 써야했기 때문이다. 인민해방군은 소련에서 정치장교 제도를 도입했지만, 초기 붉은군대에서 사상이 의심스러운 러시아제국군 장교출신이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감시원이 필요했던 것과는 달리 인민해방군 지휘관들은 대부분 골수 빨갱이들이었기 때문에, 지도원은 그저 참모에 불과했고, 겸직하는 경우도 많았다. [14] 사실 구지디가 중대원들 편의를 봐주고, 그 덕분에 부대원들에게 인망이 높은 사례가 곳곳에 나오는데, 구지디의 시계가 망가진 것을 안 어떤 병사가 국민당군 전사자의 시계를 가져다 주기 위해 적진 앞에서 시신을 뒤지다가 저격되어 전사할 정도. [15] 사실 중공군들은 가급적 여력이 있을 때마다 전사자들도 후송시켜 매장이나 화장하는 문화가 있다. 이는 마오쩌둥이 중일전쟁당시 여력이 있으면 전사자의 장례식을 무조건 치르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물론 적지에서 죽거나 여력이 없으면 그런 거 없다. [16] 당시 인민 해방군은 국민당 포로들을 대부분 석방시켰는데, 먹일 입도 줄이고 무엇보다 국민당군은 사기도 바닥이라 전향시켜도, 국민당군에 복귀해도 쓸모가 없다 확신했기 때문이다. [17] 인민해방군은 대부분 보병이었기 때문에 특정한 기술을 가진 국민당군 장병들이 귀순하면 이전의 봉급과 직책보다 좋은 대우를 약속해 우대했다. 국공내전 말기가 되면 인민해방군은 이전에 없던 포병, 기갑, 공군까지 운용하여 국민당군을 밀어붙이는데, 이런 전력의 상당수는 이런 국민당군 출신 귀순병들이었다. [18] 이 영화는 덩차오의 영화 데뷔작이다. 이후 덩차오는 탑스타로 발돋움하게 되며, 현재는 국민배우로 불린다. [19] 사실 구지디는 산포를 다뤄봤을 뿐 포병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조이두가 포병용어인 사각, 편각에 대해 물어보자 구지디는 "당신 언제부터 군대 있었소?"라고 말돌리며 얼버무리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조이두는 구지디가 포병에 문외한임을 알고 여비를 주어 귀가조치를 하려고 하지만, 구지디는 전사한 부하 이야기를 꺼냈고, 조이두는 왠지 그 말을 듣고 마음을 바꿔 구지디를 부대에 머무르게 한다. [20] 일부 관객들이 이 장면에서 국군 군복을 '이승만 애들 것'이라 표현한다 해서 공산주의에 찌든 영화라고 오인하는데, 오히려 당시 중국 인민지원군 시각에서 따져보면 위와 같은 표현은 전혀 문제가 없고 고증이 좋다고 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라면 국군이 북한군을 '빨갱이 새끼들'이라 한다거나, 북한군이 국군을 '미제승냥이의 앞잡이' 같은 거라 말하는 것도 모두 문제가 되어야 한다. 사실 적성 장비로 위장하고 침투하는 건 한국전쟁에서 자유/공산진영 불문하고 흔했다. 일단 KLO 채명신 장군의 백골병단이 그랬고, 공산측도 금성 전투에서 국군으로 위장하고 침투하기도 했다. [21] 다만 이건 군사 고문단 같이 몸짓언어로라도 합동작전을 편 사람이 있으면 특유의 성조로 눈치채기 쉽다. 바꿔 말하면 운이 따라야 했던 것이다. [22] 해당 전투는 6.25전쟁 당시 국군 최악의 패배 중 하나인 횡성 전투이다. 다만 당시 횡성교는 포격에 무너지지 않았고, 중국 인민지원군을 상대한 국군 부대는 6사단이 아니라 8사단이었다. [23] 전사자에게는 쌀 700근을 주지만 실종자에게는 쌀 200근을 준다(죽었는데 못 찾은 건지 아니면 무섭다고 도망쳐 숨어있는지 모르니까) [24] 이부분은 영화 람보1을 연상시킨다. [25] 인민해방군은 1955년부터 계급이 생긴다. 계급장 부착 외 전후 새로 도입된 군복의 모습을 볼 수 있다. [26] 아이러니하게 류택수 역시 후퇴 당시 아군을 엄호하다 무전기가 고장나 퇴각 신호를 듣지 못하여 중상을 입고 후송되어 죽게 된다. 구지디의 사례와 오버랩되는 부분. [27] 이는 변변찮은 장비와 그냥 흙만 판 참호 속에서 농성해 흔적도 없어진데다 사상자 모두를 갱도로 후송시킨 것 때문이다. [28] 펑 샤오강 감독은 인민해방군 문선대 출신으로 중월전쟁에 참전했으며 그때 경험은 방화(2017)에 더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방화>는 중월전쟁의 참상 및 상이군인에 대한 형편없는 대우를 그렸다가 개봉이 2개월간 연기되었다. [29] 결국 2022년을 기점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준비하고있고 이미 미국에서 그 모습이 몇번 포착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는 중이다. [30] 구지디는 자신의 부하들의 명예를 회복시켜달라고 계속 상부에 청원을 내지만, 조이두는 "그런 편지들은 수백통씩 오지만 열어보지도 않고 다 버린다"고 말한다. 결국 구지디는 트집잡는 조사관을 폭행하기까지 한다. 영화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실종자에 대한 대접이 전사자에 비해 현격히 낮은데, 실종자를 "탈영병" 또는 "투항병"에 준해 취급을 하는 중국 정부의 원호정책도 꼬집고 있다. [31] 중국 의료진의 코로나19 방역을 주제로 한 전형적인 중국만세 영화다. [32] 본인이 출연하기를 적극적으로 원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중국에서 당국이 기획한 영화에 출연을 거절하면 당장 연예계 활동이 막히는 등의 불이익을 당한다. 한국에서도 1980년대 이전에서 정부가 주도해 만든 반공 영화에서 탑스타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출연한 것과 비슷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