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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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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070년에서 1073년 사이 | ||
폴란드 대공국 | |||
사망 | 1113년 7월 8일 (향년 40~43세) | ||
폴란드 대공국 티니에츠 | |||
재위기간 | 폴란드 공작 | ||
1102년 ~ 1107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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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 어머니: 프셰츠와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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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 피아스트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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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대공국 피아스트 가문의 대공.2. 생애
마조프셰 공작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과 폴란드 귀족의 딸인 프셰츠와바의 사이의 외아들이다. 출생년도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학자들은 대체로 1070년에서 1073년 사이에 출생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브와디스와프 1세와 프셰츠와바는 슬라브 관습에 따라 결혼했다. 1080년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가 귀족들의 반란으로 폐위된 후 아버지가 폴란드의 새 대공에 선임되었다.1080년 또는 1081년, 즈비그니에프의 어머니 프셰츠와바는 기독교 예식이 아닌 고대 슬라브 예식에 따라 결혼했다는 이유로 브와디스와프 1세와 헤어져야 했고, 보헤미아 국왕 브르제티슬라프 2세의 딸인 유디트 프르셰미슬디카가 브와디스와프 1세의 새 아내가 되었다. 즈비그니에프는 이후에도 궁정에 남아있었고, 크라쿠프에 있는 대성당 학교에서 훗날 밤베르크의 주교가 될 선교사 오토로부터 기독교 신학 외에도 변증법, 문법 등 여러 방면의 지식을 익혔다.
1089년, 당시 궁정백으로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시에시에흐(Sieciech)에 의해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이는 브와디스와프 1세가 두번째 아내 유디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볼레스와프 3세가 대공위를 순조롭게 계승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즈비그니에프는 크베들린부르크 수도원에서 조용히 지냈고, 일부 기록에 따르면 사제가 될 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러던 1093년, 실레시아 귀족 마그누스가 잠재적인 정적으로 간주되는 귀족들을 연이어 숙청하는 시에시에흐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마그누스는 보헤미아 국왕 브르제티슬라프 2세와 폴란드 귀족들의 협력을 받아 즈비그니에프를 수도원에서 빼돌린 뒤 브로츠와프로 모셨다.
시에시에흐는 헝가리 국왕 라슬로 1세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헝가리 지원군이 도착하자 즉시 브로츠와프로 진격했다. 그런데 헝가리군은 도중에 폴란드 귀족들의 로비에 넘어가 시에시에흐와 브와디스와프 1세의 어린 아들 볼레스와프 3세를 납치했다. 브와디스와프 1세는 두 사람이 풀려나게 하게 위해 사생아로 간주되었던 즈비그니에프를 정식 아들로 삼고 후계자로 삼아야 했다. 하지만 포로 생활에서 풀려난 시에시에흐는 복수를 벼르다가 1095년 라슬로 1세가 사망한 후 헝가리 왕국이 칼만과 알모스 왕자간의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군대를 일으켜 즈비그니에프를 공격했다. 그 결과 1096년 고프워 전투에서 즈비그니에프의 군대가 시에시에흐에게 패배했고, 시에시에흐는 즈비그니에프를 사로잡고 실레시아를 탈환했다. 그러나 민심이 갈수록 불온해지자, 1097년 또는 1099년에 즈비그니에프를 석방해야 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1세는 내란이 일어날 조짐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즈비그니에프와 볼레스와프 3세를 포메라니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두 공자는 군대를 크라쿠프로 돌린 뒤 아버지에게 지금 즉시 분할 상속해줄 것을 강요했다. 브와디스와프 1세는 강요에 못 이겨 영지를 그들에게 상속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소폴란드, 실레시아, 대폴란드 서쪽 부분, 루부츠 일대를 상속받았고, 즈비그니에프는 그니에즈노를 포함한 대폴란드 동쪽 부분, 쿠아비아, 웽치차, 시에라츠, 마조프셰 등지를 상속받았다. 시에시에흐는 이렇게 분할되면 자신의 지위가 약화될 거라 보고, 두 왕자가 맡은 구역의 관리들을 자기 사람으로 채움으로써 실질적인 통치를 이어가려 했다. 여기에 두 형제를 아버지에 반역을 일으킨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할 준비를 했다.
볼레스와프 3세와 즈비그니에프는 시에시에흐의 계획을 눈치채고 스카비미르를 비롯한 폴란드 귀족들을 소집한 뒤 시에시에흐를 제거하기 위한 전쟁을 단행했다. 1099년, 필리차강 인근의 차르노비에츠에서 시에시에흐의 군대와 두 공자의 군대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그 결과 두 공자가 승리했고, 브와디스와프 1세는 시에시에흐를 해임하는 것에 동의했다.
1100년, 두 공자의 군대는 시에시에흐가 숨어 있던 시에시에호프를 포위했다. 그런데 브와디스와프 1세가 돌연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시에시에흐를 도우러 달려왔다. 이에 두 공자는 아버지를 완전히 실각시키기로 합의하고 프워츠크 인근에서 브와디스와프 1세와 시에시에흐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결국 두 공자에게 완전히 굴복한 브와디스와프 1세는 시에시에흐를 독일로 추방하는 데 동의해야 했고, 이후 대공위를 명목상으로나마 보장받는 대가로 모든 권력을 아들들에게 넘겨야 했다.
1102년 6월 4일 브와디스와프 1세가 사망한 후, 그는 볼레스와프 3세와 함께 폴란드를 양분하고 각기 대공을 칭했다. 이후 두 사람은 미래에 폴란드 공국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길 희망한 귀족과 측근들의 부추김을 받고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포메라니아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는 점도 갈등이 고조되는 요인이었다. 즈비그니에프는 이웃한 세력인 포메라니아와 경제적, 정치적으로 우호 관계를 맺고 싶어했다. 그러나 볼레스와프 3세는 포메라니아를 공략해 폴란드 공국의 영역으로 삼기를 희망했다. 볼레스와프 3세가 독자적으로 기사들을 이끌고 포메라니아로 쳐들어가서 바이알로가드를 공략하자, 포메라니아인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즈비그니에프의 영역을 침략했다. 이로 인해 자신의 동의 없이 포메라니아를 침략한 이복 형제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었다.
1103년, 볼레스와프 3세는 키예프 루스 대공 스뱌토폴크 2세의 딸 즈비슬라바와 결혼했다. 즈비그니에프는 결혼 동맹을 맺은 두 세력이 자신을 조만간 협공하리라 의심하고, 보헤미아 공작 보르지보이 2세와 손잡고 볼레스와프 3세의 영역을 동시에 공격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이에 맞서 모라비아로 2번 출진해 보르지보이 2세와 맞붙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보르지보이 2세에게 막대한 뇌물을 줬고, 이에 만족한 보헤미아 공작은 즈비그니에프와의 동맹을 끊었다. 이후 볼레스와프 3세는 즈비그니에프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포메라니아를 무너뜨리기로 마음먹고, 1104~1105년 포메라니아 원정을 단행해 포메라니아인들을 굴복시켰다.
1105년, 두 이복 형제는 티에니크에서 평화 협정을 체결해 그동안의 갈등을 종식하고 외교 정책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의논하여 타협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그러나 1106년 즈비그니에프가 포메라니아를 향한 원정을 돕기를 거부하자, 볼레스와프 3세는 키예프 루스 대공 스뱌토폴크 2세와 헝가리 왕국의 국왕 칼만의 지원을 받고 즈비그니에프를 공격했다. 볼레스와프 3세와 루스-헝가리 연합군은 큰 문제 없이 칼리슈, 그니에즈노, 스피시미에즈, 웽치차를 공략했다.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크라쿠프 주교 볼드윈의 중재를 통해 웽치차에서 볼레스와프 3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그는 공식적으로 볼레스와프 3세를 폴란드 공국 전체의 대공으로 인정하고, 대폴란드, 쿠야비아, 시에라츠를 포기하며, 웽치차, 마조프셰 등지에서만 영지를 가질 수 있었다.
1107년, 즈비그니에프는 푸와비 인근의 요새 중 하나이며 자신에게 반기를 든 이들이 농성하는 쿠로프를 파괴하라는 볼레스와프 3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볼레스와프 3세는 그가 명령 불복종에 포메라니아 원정군에 식량을 제때 제공하지 않겠다는 혐의를 덮어씌워 그를 반역자로 고발했고, 1107/1108년 겨울 루테니아와 헝가리 출신 전사들을 고용해 마조비아를 침공했다. 즈비그니에프는 이렇다할 저항을 못하고 굴복했고, 목숨을 부지하는 대가로 폴란드에서 추방당한 뒤 추종자들과 함께 프라하로 피신했다.
1109년, 즈비그니에프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에게 형제에게 빼앗긴 영지를 되찾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마침 폴란드 공국이 갈수록 강해지는 것을 우려하던 하인리히 5세는 이를 명분삼아 볼레스와프 3세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 내용은 즈비그니에프에게 전 영토의 절반을 제공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권위를 인정하고, 정기적으로 연간 은화 300 그지브나(grzywna)를 공물로 보내거나 군사 원정을 위한 기사 300명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볼레스와프 3세를 몰아내기 위한 원정군을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볼레스와프 3세가 이를 딱 잘라 거부하자, 하인리히 5세는 대규모 원정군을 일으켰다. 에어푸르트에 집결한 군대는 작센, 바이에른, 프랑켄, 로렌의 기사가 포함된 약 10,000명의 전사였다. 여기에 보브르 강 어귀에서 보헤미아군이 합세했다. 원정군은 1109년 8월 22일 비톰 오드잔스키에 이르러 공성전을 벌였지만 큰 손실만 볼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않자 그대로 지나쳐서 8월 24일 글로고프에 도착해 포위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9월까지 이어진 포위 공격에도 좀처럼 함락되지 않자, 하인리히 5세는 방어 수준이 글로고프보다 열악한 브로츠와프를 향해 진격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병력이 일천했기 때문에 정면 대결을 최대한 피했다. 그 대신 적의 보급로를 연이어 습격했고, 적의 진군로 주변의 모든 마을을 불사르고 농지를 뒤엎고 우물에 독을 타는 등 청야작전을 구사했다. 여기에 폴란드 농민들은 숲과 늪지대에서 침략자들을 끊임없이 습격했다. 하인리히 5세는 이러한 곤경에도 굴하지 않고 글로고프에 도착한 뒤 공성전을 감행했지만 막대한 희생만 치렀다. 13세기의 연대기인 <대 폴란드 연대기>는 하인리히 5세가 브로츠와프 시를 공격했지만 산 자 대신 시체만 얻었다고 묘사했다.
하인리히 5세는 볼레스와프 3세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폴란드의 수도인 크라쿠프를 파괴하겠다고 위협했지만, 제국군의 보급 물자가 바닥났고 병사들도 연이은 패배로 사기가 꺾이고 사상자가 많다는 점을 꿰뚫어 본 볼레스와프 3세가 응하지 않으면서 무산되었다. 하인리히 5세는 다시 사절을 보내 공물을 보낸다면 군대를 철수하고 평화 협약을 맺겠다고 제안했지만, 볼레스와프 3세는 이번에도 거부했다. 이후 병사들이 굶주림에 시달려 죽어가자, 하인리히 5세는 결국 남은 병력을 이끌고 본국으로 퇴각해야 했다. 즈비그니에프가 하인리히 5세의 실패한 원정에 직접 참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110년, 볼레스와프 3세는 하인리히 5세를 도와 자국을 침공했던 보헤미아로 쳐들어가서 보르지보이 2세의 형제이며 역시 자신에게 의탁한 소베슬라프 1세를 보헤미아 공작에 앉히려 했지만, 보헤미아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실패했다. 그는 본국으로 귀환하다가 보헤미아군의 추격을 받았지만 1110년 10월 8일 트루티나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을 격멸했다. 하지만 전쟁 물자가 바닥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물러난 뒤 1111년 보헤미아 측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보헤미아 측은 소베슬라프 1세가 블라디슬라프 1세를 보헤미아 공작으로 인정하는 대신 흐라데츠 크랄로베 시의 통치권을 얻게 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즈비그뉴가 폴란드로 돌아와서 시에라츠를 영지로 삼고 평온하게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폴란드로 귀환한 즈비그니에프는 왕실 강림절 의식에서 수많은 무리의 추앙을 받았고, 그 앞에 검이 옮겨졌다. 언젠가 영지를 되찾기 위해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반기를 들 거라 여겼다. 결국 즈비그니에프는 체포된 뒤 실명형에 처해졌다. 볼레스와프 3세는 이 일로 인해 그니에즈노 대주교 마르친으로부터 공개석상에서 저주를 받았고, 수많은 인사의 지탄을 받았다. 1113년, 볼레스와프 3세는 형제를 해친 것을 속죄하겠다는 명분으로 헝가리의 소모기바르 수도원을 순례해, 불온한 민심을 가라앉히고자 했다. <대 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볼레스와프 3세는 참회를 마친 뒤 즈비그니에프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한다. 즈비그니에프는 실명형을 받은 뒤 티니에츠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은거했다. 루비인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도원의 기록에 따르면, 즈비그니에프는 1113년 7월 8일 티니에츠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사망했고 그곳에 묻혔다고 한다. 그의 아내와 자식은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