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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5 01:48:20

중화민국 내전

1. 개요

1911년 신해혁명에서부터 1949년 2차 국공내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될까지 40년 가까이 지속된 중화민국의 내전을 말한다.

2. 전개

2.1. 북양정부 시기

2.1.1. 위안스카이 정권

2.1.1.1. 계축전쟁 백랑기의
신해혁명의 막바지, 북양군의 수령이자 총리대신인 위안스카이는 임시대총통 쑨원과 협상하여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2대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쑨원과의 합의를 무시하고 각종 독재행위를 저질렀다. 1913년에 거행된 선거에서 쑨원의 국민당이 약진하자 위안스카이는 국무총리 자오빙쥔을 사주하여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국민당 이사 대리 쑹자오런 암살했으며 이 사건을 무마시키고 반원세력을 진압하기 위한 자금마련을 위해 선후대차관 사건을 일으켰다.

쑨원은 분노하여 무력봉기를 주장했으나 국민당 내부의 반대로 일단 그만두었다. 그 사이에 위안스카이는 국민당 계열의 도독들을 해직하는 삼독해직사건을 일으켰고 국민당은 참지 못해 1913년 계축전쟁을 일으켰으나 2개월 만에 진압당했다. 위안스카이는 자신에게 대항하는 백랑기의까지 완전히 진압한 이후 1914년 중화민국 국회 해산까지 단행했다.
2.1.1.2. 호국전쟁
허나 여기에도 만족못한 위안스카이는 1915년 홍헌제제를 선포하여 황제에 까지 오르려 했지만 북양군벌 내부에서도 이를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차이어, 량치차오, 탕지야오가 호국군을 선포, 호국전쟁을 일으켜 맞서게 된다. 호국군이 선전하자 위안스카이의 옹호하던 각 성이 잇달아 위안스카이와 단절하고 호국군에 가담하였다.

위안스카이는 대세가 기울어졌다는 것을 알고 1916년 3월 23일 제제 취소를 선포하고 대총통 자리라도 지키려 했지만 이를 위해 소집한 난징회의에서는 각 성 대표들이 위안스카이 하야를 요구할 뿐이었다. 울화에 받친 위안스카이는 요독증이 악화되어 6월 6일 급사했고 부총통 리위안훙이 대총통 직위를 계임하여 위안스카이가 1914년 폐기한 임시 약법과 구 국회 회복을 선포하면서 호국전쟁은 끝났다. 이제 중화민국에 평화가 찾아오는가 했는데...

2.1.2. 북양정부 내부의 패권 다툼

2.1.2.1. 장훈복벽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 돤치루이 리위안훙 사이에서 부원지쟁이라 불리는 권력투쟁이 발생하면서 중화민국에는 다시 혼란이 찾아왔다. 돤치루이는 대총통을 그저 결재만 하는 인물 정도로 괄시하며 자파 세력의 확대를 꾀했고 리위안훙은 이에 불만을 가져 거부권을 남발하며 자신의 권한을 확대하고자 했다. 두 사람의 불화는 자꾸만 심해졌고 돤치루이는 리위안훙 제거를 위해 선통제의 복위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까지 고려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1917년 연합국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계기로 중국에 세계대전 참전을 요구하자 돤치루이는 이를 기회로 여겨 독일 제국에 대한 단교, 더 나아가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선전포고를 주장했다. 대독절교안까지는 영미의 로비에 힘입어 어찌어찌 되었는데 대독선전안에 대해서는 여전히 반대가 많았다. 이에 돤치루이는 깡패를 풀어 국회의원들을 위협하여 선전포고안 가결을 요구했는데 빡친 국회의원들은 국회 정회를 선언하고 돤치루이의 하야를 요구했다.

돤치루이는 리위안훙에게 국회 해산을 요구했지만 리위안훙은 도리어 돤치루이를 해임해버렸다. 이에 돤치루이는 장쉰과 결탁하여 각 성의 독립을 사주하는 한편 임시정부와 임시국회를 소집하여 리위안훙에 대한 정변을 준비했다. 겁이 난 리위안훙은 장쉰에게 정치적 중재를 요청했는데 장쉰은 이에 응하여 베이징에 들어오더니 하라는 조정은 안하고 리위안훙을 협박해서 국회를 해산하고 선통제 복위를 선포하였다. 이것이 바로 장훈복벽이다. 문제는 장쉰이 자신이 선통제의 섭정이 되어 다 해쳐먹으려고 했다는 것이고 돤치루이는 하라는 리위안훙 타도는 안하고 뻘짓하는 장쉰을 보고는 리위안훙으로부터 국무총리와 육군총장 직을 돌려받고 토역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장쉰의 변자군을 토벌해버렸다. 덕분에 복벽은 12일 만에 끝나긴 했는데 중화민국의 내전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2.1.2.2. 호법전쟁
복벽을 진압한 돤치루이는 다시 내각을 구성했는데 장쉰이 해산해버린 구 국회와 임시약법 체제에 대해서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량치차오가 주장하던 민국 재조설을 구실로 회복을 거부하고 멋대로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하여 세계대전에 참전해버렸다. 이 꼴을 본 쑨원은 국회의원들을 거느리고 광저우로 남하하여 1차 호법운동을 전개했다. 쑨원은 광저우에서 호법정부를 수립, 자신이 대원수에 오르고 계계군벌 루룽팅 전계군벌 탕지야오를 원수에 추대했다. 이에 돤치루이는 무력통일을 주장하며 쑨원 등에 대한 체포령과 토벌령을 하달했고 이로 인해 1917년 중국의 남북간의 내전인 호법전쟁이 발발했다.

호법전쟁은 처음에는 호법군이 우세하다가 나중에 북양정부가 반격하여 다시 호법정부가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호법정부 내부에서는 쑨원을 축출하려는 천춘쉬안을 비롯한 정학회 국회의원들과 사실 호법 따윈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세력확장에만 골몰하던 서남군벌들이 결탁하여 북양정부와 화친할 궁리만 하고 있었다. 북양정부 내부에서는 펑궈장, 차오쿤, 우페이푸 같은 직예군벌이 여러 이유로 전쟁에 반대하고 있었다. 1918년에 이르러 쑨원이 호법정부에서 축출되고 베이징에서는 새 대총통 쉬스창이 당선되면서 남북이 화의를 맺자고 결정하여 정전령이 내려졌지만 남북화의가 결렬되면서 분열된 중국의 통합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2.1.2.3. 안직전쟁
남북내전이 종결되자마자 이번에는 북양정부 내부의 충돌이 폭발했다. 돤치루이, 쉬수정 등의 안휘군벌은 세계대전 참전을 명목으로 참전군이라는 부대를 창설하여 안휘군벌의 군사력으로 삼았는데 이게 세계대전이 끝난 후의 일이었다.(...) 당연히 국내외적으로 비난이 빗발쳤고 이에 안휘군벌은 참전군을 변방군으로 개칭하여 1919년 외몽골 출병을 단행하여 복드 칸국의 자치를 박탈하여 변방군의 존재를 정당화하려 했지만 쉬수정에게서 변방군 지휘권을 빼앗고 변방군을 육군부에 귀속시키라는 요구는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920년 3월에 호남에 주둔하던 우페이푸가 병사들이 고향에 가고 싶다는 이유로 호법군과의 대치를 중단하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돤치루이는 하남성장 자오티를 자신의 심복인 오광신으로 교체하여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하남독군 교체 파동이라 불리는 정치적 소동만 있었을 뿐 소득이 없었다. 오히려 자오티는 환계를 저지하기 위한 8성 동맹에 가입해버렸다.

결국 만주의 장쭤린이 정치적 중재에 나섰으나 결렬 끝에 쉬수정이 장쭤린 암살을 시도했고 1920년 직예군벌, 봉천군벌의 연합과 안휘군벌 간에 전쟁이 발발했다. 실전경험이 부족했던 안휘군벌은 며칠만에 패배했고 돤치루이는 하야, 안복계와 환계 주요 장령들에 대한 체포령이 하달되면서 천하의 주인은 직예군벌로 바뀌게 된다. 짱짱하던 안휘군벌은 몰락하여 외몽골, 복건, 절강, 상하이의 일부 지역에만 세력이 잔존하게 되었으며 그나마도 1921년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백군과 담딘 수흐바타르, 허를러깅 처이발상의 몽골 인민유격대가 외몽골을 독립시켰으며 1922년 복건독군 이후기가 축출되면서 절강과 상하이만 남게 된다.
2.1.2.4. 직봉전쟁
하지만 중국의 분열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번엔 직예군벌과 봉천군벌 사이의 갈등이 빚어졌다. 직예군벌과 봉천군벌은 서로 내각이 편향되었다고 비난하며 충돌을 빚었고 결국 봉천군벌은 안휘군벌의 잔당과 중국국민당과 연계, 직예군벌에 대항하는 반직삼각동맹을 결성했다. 하지만 1922년의 1차 직봉전쟁에서 봉천군벌의 장령들 상당수는 현대식 군사지식을 경시하는 마적단 출신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이긴 해도 현대 군사교육을 받은 직예군벌을 상대로 한달도 안돼서 패전해서 만주로 도주했다. 봉천군벌을 축출한 직예군벌은 평소에 마음에 들지 않던 대총통 쉬스창이 정통성이 없다고 협박해서 쫓아내고 구 국회의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구 국회를 복구하고 약법을 회복했다. 그리고 리위안훙을 다시 총통으로 추대하였지만 어디까지나 직예파를 총통으로 삼기 위한 중간다리 총통에 불과했다.

1923년 6월, 직예군벌은 군비 문제로 리위안훙 총통을 압박해서 역시 쫓아내고 10월에 회선 사건이라 불리는 뇌물선거로 직예군벌의 수령인 차오쿤을 대총통으로 당선시켰다. 하지만 만주로 밀려났던 봉천군벌은 절치부심하여 군의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고 절강독군 루융샹, 쑨원 중국국민당과 연계하여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었다. 1924년 9월, 중앙과 단절을 선언하고 직계와 날을 세우고 있던 루융샹을 제거하기 위해 강소독군 치셰위안 강절전쟁을 일으켰고 장쭤린은 이를 비난하며 루융샹을 돕는다는 구실로 2차 직봉전쟁을 일으켰다. 루융샹은 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했으나 2차 직봉전쟁은 우페이푸의 논공행상에 불만이 많던 육군검열사 펑위샹 북경정변을 일으켜 봉계에 가세하면서 봉천군벌의 승리로 끝났다. 차오쿤은 11월에 하야하여 베이징에 연금되었고 우페이푸는 우한으로 패주했다.

펑위샹, 장쭤린은 돤치루이를 임시집정에 추대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돤치루이는 루융샹을 선무사에 임명, 봉계의 장쭝창과 함께 강소독군 치셰위안을 토벌하도록 했으니 이것이 바로 제노전쟁이다. 루융샹이 강소독판, 왕이탕(王揖唐)이 안휘독판이 되면서 장강 하류 지역이 다시 환계의 손에 들어오는가 했는데... 사실 봉계는 환계에게 장강 하류 지역을 줄 생각 따윈 없었고 루융샹과 왕이탕 모두 봉계의 압박으로 하야하여 장덩쉬안이 안휘독판, 양위팅이 강소독판이 되어 장강 하류 지역을 봉계가 장악하게 된다. 이로서 봉계의 천하가 도래하는가 싶었는데...
2.1.2.5. 손봉전쟁 직봉풍전쟁

2.1.3. 국민당의 흥기

2.1.3.1. 호법운동
2.1.3.2. 국민혁명

2.1.4. 외전

2.2. 국민정부 시기

2.2.1. 반장전쟁

2.2.2. 초공작전

3. 관련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