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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01 13:30:14

장초(초한쟁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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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楚 | Chu Dynasty
기원전 209년 ~ 기원전 208년
<rowcolor=#ece5b6>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별칭 장초(張楚), 장대한 초나라(張大楚國), 초(楚)
위치 중국 허난성 일대
근거지 진성(陳城)[1]
민족 화하족
언어 상고 중국어
문자 한자
종교 중국 토속 종교
화폐 불명
정치체계 공치제[2] 가왕(假王) 오광
국가원수 [3]
국성 진(陳)
주요 군주 진승, 오광 (기원전 209년 ~ 기원전 208년)
현재 국가
[[중국|]][[틀:국기|]][[틀:국기|]]


1. 개요2. 국호3. 역사
3.1. 연표3.2. 진승·오광의 난3.3. 진승의 칭왕과 장초 건국
3.3.1. 장한의 등장과 분열
3.4. 멸망3.5. 멸망 이후 왕실
4. 군사
4.1. 지휘관
5. 정치6. 외교7. 역대 군주

[clearfix]

1. 개요

파일:rXS1CPu.jpg
진승의 즉위 장소이자 장초의 근거지인 진성의 위치 및 장초군의 진격로

중국 통일진나라 말기에 진승 오광중국사 최초의 농민봉기를 일으켜, 세력이 점차 강성해지자 건국한 중국사 유일의 공치제 국가. 근거지는 진성(陳城). 공식적으로 초나라의 계승을 표방하였다. 기원전 208년 진나라 최후의 명장 장한에 의해 최종적으로 진성이 함락당하고 도주하던 진승이 마부 장가에게 살해당하면서 멸망하였다.

2. 국호

공식적으로 초나라를 계승하였다고 표방하였으나 정식 국호를 단지 초(楚)로 하지 않고, 장대한 초나라라는 의미로 장초(張楚)라고 제정했다. 즉, 서초 후초처럼 국호를 초(楚)라고 제정했음에도 구분을 위해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이름이 장초(張楚)였던 것이다.

3. 역사

3.1. 연표

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 / 진승 장초왕 즉위
기원전 208년 오광 피살 / 진승 사망, 멸망

3.2. 진승·오광의 난

公等遇雨,皆已失期,失期當斬。藉弟令毋斬,而戍死者固十六七。(공등우비 개이실기 실기당참 자제령무참 이수사자고십육칠)
너희들은 비를 만나 모두 기한을 어겼고 기한을 어겼으면 참수를 당할 것이다. 참수를 당하지 않더라도 (수자리) 지키는 사람 열 명 중 예닐곱 명은 죽을 것이다.
且壯士不死即已,死即舉大名耳,王侯將相寧有種乎!(차장사부사즉기 사기거대명이 왕후장상영유종호)
또 장사(壯士)란 죽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죽는다면 명성을 드러내야 할 뿐이다. 임금(王), 제후(侯), 장군(將), 재상(相)의 씨가 어찌 따로 있단 말이냐!
『사기(史記)·진섭세가(陳涉世家)』 진승이 처음 난을 일으킬 때 인부들에게 한 연설

기원전 221년,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는 통일 전쟁으로 황폐화된 중국 전토와 민심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않은 상태로 급진적인 개혁과 가혹한 법률을 기반으로 한 강압적인 통치를 했다. 때문에 기원전 210년 시황제가 사망할 무렵 민심은 불과 11년 동안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시황제 붕어 이후 뒤를 이은 이세황제 호해(胡亥)는 환관 조고(趙高)에게 조종당해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고,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에 망조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기원전 209년, 양성(陽城)[4] 출신인 진승은 900여 명의 인부들과 함께 만리장성의 건설에 동원되어 공사처로 향하던 중 큰 비가 내려 900명이 함께 고립된다. 제때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 명백해지자 인부들은 진의 가혹한 법에 따라 받을 형벌이 두려워졌다. 목이 날아가게 된 처지에 놓이자 평소 야심이 있던 진승은 반란을 결심하고 봉기할 때 그는 휘하 인부들을 설득하면서 <왕후장상 영유종호>라는 발언으로 좌중을 선도하였다. 결국 진승은 친구인 오광과 함께 대택향에서 스스로 장군을 칭하며 중국사 최초의 농민봉기를 일으켰다.

자세한 사항은 진승·오광의 난 참고

3.3. 진승의 칭왕과 장초 건국

겨우 수백에 불과했던 농민반란군은 무서운 속도로 세를 확장했고, 회양군(淮陽郡)의 치소인 진성(陳城)에 이르렀을 무렵에는 전차만 600~700승(乘)이요, 기병 1,000여 기(騎)에 보병은 수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대군으로 불어나 있었다. 갈영에게 기현 공략을 맡기며 한 갈래 병력을 내주었음에도 저정도 대군이었는데, 당연히 진성 역시 중과부적으로 함락당하고 만다. 진성에 입성한 진승은 명사들의 요구에 따라 왕이 되려 했으나, 오직 진여 장이만이 진승의 칭왕을 반대하며 우선 진나라의 수도부터 함락시킬 것을 권했다. 그러나 진승은 이들의 제안을 거부하고 마침내 왕을 칭했고, 국호를 장초(張楚)라고 하였으며. 채사(蔡賜)를 상주국(上柱國)으로 삼았다.

3.3.1. 장한의 등장과 분열

한편, 진나라에서도 손 놓고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진나라 조정은 여산(酈山)에서 노역 중인 죄수들을 활용해 토벌군을 조직하자는 소부(少府) 장한의 건의를 획책하여 여산에서 노역중이던 죄수들은 물론, 노비의 아이들까지 사면시켜 토벌군으로 징발하였다. 그리고 장한에게 이 군대를 맡겨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이무렵 장초는 군대를 여러 갈래로 쪼개서 중국 전토를 정복중이었다. 형양성 방면으로는 오광과 전장(田臧), 이귀(李歸)를 보냈고, 위나라 방면으로는 주불을, 조나라 방면으로는 무신과 장이&진여를, 등종(鄧宗)은 구강군(九江郡)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리고 주적인 서쪽 진나라의 수도 관중 방면으로는 주문을 총사령관으로 삼아서 주력군 수십만을 보냈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장초로부터 독립하며 스스로 왕을 칭하는 등, 장초의 세력은 불열되어가기만 한다.

그 사이 출정한 장한은 처음부터 주문의 수십만 원정군을 세 번에 걸쳐 격파하며[5] 천하를 진동시켰다. 주문의 대패는 장초군의 사기에 어마어마한 악영향을 끼쳤다. 단적으로 형양방면에서는 주문의 대패소식에 동요한 전장이 오광을 죽이고 스스로 정예병들을 이끌고 오창으로 나가아 장한의 군대를 맞이했다가 전사하기도 했다. 장한은 구강방면으로 나아간 등열을 간단히 격파한 뒤, 서서히 장초의 본거지인 진성으로 진격했다.

3.4. 멸망

장한의 승전에 진나라 조정에서도 동예, 사마흔 등의 장수와 증원군을 보태줬고, 마침내 진성에 도달한 장한은 상주국 채사까지 격파해 죽이고 진성을 함락시킨다. 진승은 도망을 치다 수레를 몰던 마부 장가(莊賈)에게 살해당한다. 이로써 장초는 고작 6개월 간의 짧은 역사를 끝내고 멸망한다.

3.5. 멸망 이후 왕실

진승이 죽고 난 후, 그의 시종 출신이었던 여신(呂臣)이라는 인물이 신양(新陽)에서 병력을 다시 일으켜 진현을 함락하고 장가를 죽여 일단 원수를 갚았다. 그러나 곧이은 진군의 반격으로 다시 진현을 내주었는데, 물러난 여신은 이후 경포와 만나 다시 진현을 함락했고, 때마침 초회왕(楚懷王)을 옹립한 항량이 진현을 재건한 초나라의 수도로 삼았다.

그리고 훗날 한고제가 천하를 통일한 뒤에, 진승에게 은왕(隠王)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린다.

4. 군사

장초의 군대는 위에선 서술한 바와 같이 건국 직전에 전차 600~700승에 기병 1,000여 기, 그리고 보병 병졸은 수만 명이었다. 거기에 함양 진공을 목표로 출진한 주문의 원정대는 그 규모가 전차 1,000승, 병력 수십만명 규모였다. 이게 어느 정도의 규모냐면 춘추전국시대에 제후국은 '천승지국'으로 불렸는데, 천승지국의 천승이 바로 마차 1,000승의 그 천승이며 전국 7웅 최약체인 한나라는 30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즉, 이 시점에서 장초군의 규모는 이미 숫자상으론 춘추전국시대의 제후국이나 전국 7웅의 한나라 수준 정도로 불어난 셈이다. 그것도 전 병력이 아니라 원정대의 한 갈래가 말이다.[6] 규모면에서는 확실히 전국칠웅에 밀리지 않는, 오히려 이를 상회하는 병력을 지닌 셈이었다.

다만, 병력의 질은 상당히 낮은 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대부분은 훈련된 정규군이 아니라 진격하는 중에 모여든 백성들로 인해 머릿수만 많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사들의 마음가짐 면에서도 난세를 틈타 한몫 두둑하게 챙겨보려고 합세한 자들이 대부분이었으니 군기 면에서도 상당히 질 낮은 군대였을 것이다.

4.1. 지휘관

장초의 지휘관들은 크게 각 방면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아간 이들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진승으로부터 별도의 군단을 위임받아 지휘하며 각 방면을 착실히 공략해나갔다. 다만, 이들중에서는 자리를 잡자마자 독립한 이들도 상당 수 존재한다.

5. 정치

중국사를 통틀어 유일하게 공치제로 통치했다.

6. 외교

7. 역대 군주

<rowcolor=#ece5b6> 대수 시호 작위 재위기간 묘호
초대 은왕(隠王)[8] 진승(陳勝) 왕(王) BC 209년 ~ 208년 -
가왕 - 오광(吳廣) 가왕(假王) BC 209년 ~ 208년 -



[1] 수도라는 기록은 없지만, 진승이 공식적으로 왕을 칭하고 장초를 건국한 거점이다. [2] 중국사 유일의 공치제 왕조이다. [3] 기원전 209년부터 칭왕 [4] 지금의 하남성 등봉현(登封縣) 동남쪽 [5] 총사령관 주문은 이에 절망해 자결한다. [6] 물론, 다른 원정군들은 대부분 독립해버렸고, 주문의 부대가 가장 주력 원정대이긴 했다. [7] 물론, 전담 삼형제 역시 비범한 인물들임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8] 사후에 유방에 의해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