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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세자 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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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출생 1498년 1월 19일[1]
(음력 1497년, 연산군 3년 12월 18일)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책봉 1502년 10월 25일[A]
(음력 연산군 8년 9월 15일)
사망 1506년 10월 20일[3] 이후 (요 8세)
(음력 중종 1년 9월 24일 이후)
강원도 정선군 유배지
(現 강원특별자치도 정선군)
사사형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4]
1502년 10월 15일[A] ~ 1506년 9월 28일[6]
(음력 연산군 8년 9월 15일 ~ 연산군 12년 9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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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파일:무제63_20230711075504.png )
부모 부왕 연산군
모후 거창군부인
형제자매 10남 9녀 중 2남 }}}}}}}}}

1. 개요2. 이름의 발음 논란3. 생애4. 사망 이후5.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연산군 거창군부인 신씨 사이에서 두 번째로 태어난 아들이자 살아남은 아들 중 장남으로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8세 때 중종반정으로 폐세자되었고, 얼마 후 사사되었다.

총명하고 어진 기질을 보여 연산군의 학정에 시달리던 신하들의 기대를 모았었다. 세자 이고는 학구열이 높아서, 마치 할아버지 성종의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야사에 따르면 중전 신씨의 오빠인 신수근이 박원종으로부터 반정에 참여해달라는 요구를 받았는데, “세자가 총명하니까 기대를 걸어보자”고 말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는 궁궐을 나와서 연산군의 큰어머니인 승평부대부인 박씨[7]가 양육했다. 당시 조선에선 왕자를 궁궐 바깥에서 키우는 관습이 있었다. 연산군 본인도 친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사사된 이후 궁 밖에서 살았다. 또한 연산군은 박씨를 상당히 후하게 대했으므로 이런 개인적인 친근감도 작용하였다.

정세명(丁世明)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납징[8]까지 하였지만 길례 전에 반정이 일어나서 정식 세자빈이 되진 못했다.[9] 다행히, 딱히 '납징까지 했으니 준세자빈과 같다'고 여겨 평생을 수절하게 하거나 혼삿길이 막히지는 않아서 그 후 정세명의 딸은 강희신의 아들과 혼인하였다. 이로 보아 당시에도 삼간택 수절설은커녕, 간택완료되고 세자빈으로 인정받았더라도 가례를 올리고 완전히 부부가 된 게 아니라면 별 흠 없는 처녀취급이었음을 볼 수 있다.

2. 이름의 발음 논란

이름인 파일:무제63_20230711075504.png 의 옳은 발음이 무엇인지 논란이 있다. 조선 왕실에는 정조의 휘인 祘(산, 성), 고종의 휘인 㷗(희, 형), 폐세자 이지의 이름인 祬(질, 지), 덕흥대원군의 이름인 岹(초, 조) 등 발음에 관해 논란이 있었던 이들이 많은데, 이들은 왕족으로서 백성들이 피휘하기 쉽도록 벽자를 이름으로 쓰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국역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에서는 발음을 '황'으로 표기하였고, 이 독음은 이후의 서적이나 인터넷 등에서도 반영되었으나, 잘못일 가능성이 크다. 이 글자의 부수가 머리혈(頁)이기에 왼쪽의 皇(황)을 성부로 파악한 것으로 보이는데, 음이 '황'이면서 모양이 비슷한 다른 글자 皝도 있어서 여기에 이끌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543년경 편찬된 《 옥편》에 따르면 반절이 公老切(ㅗㅇ+ㄹ)로, 음은 '고'가 된다. 이 문서에서는 이것을 따라 𩔇를 '고'로 읽는다.
공(公)과 로(老)의 반절이다. (뜻은) 넓고 큰 모양이다.
公老切,廣大皃。
《흠정사고전서》본 《옥편》 권4 혈부(頁部) 제36

한편 《 강희자전》 인용 《 광운》에 따르면 반절이 盧皓切(ㅗ+ㅎ)로, 본음이 ‘로’이다. 더구나 《오음집운(五音集韻)》은 음이 '고'이며 뜻이 '넓고 큰 모양'인 글자로 𩕍를 소개하면서 파일:무제63_20230711075504.png (+頁)가 𩕍(+頁)의 와전일 가능성을 지적하였고, 《정자통(正字通)》은 아예 와자라고 못박았다.
【廣韻】盧皓切,音。廣大貌。【正字通】譌字。◎ 按五音集韻,𩕍,古老切,訓廣大貌,或卽𩕍字之
《강희자전》

3. 생애

야사에서는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에게 박원종이 반정에 가담할 것을 권유하자 신수근은 세자가 총명하니 기다리면 될 것이다 라고 대답하며 거부했다고 한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이후에 연산군이 폐위될 때 정선으로 유배를 갔다가 살해된다.[10] 항년 8세.

중종반정 다음날 세자는 은둔지에서 먹는 식사에서 평소 자신이 좋아하던 꿩고기가 빠져 있자 상궁에게 꿩고기는 어딨냐고 물었는데 이를 보고는 궁녀들이 "앞으로 피죽도 못 드실 텐데..." 라고 말하며 눈물바다가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내려오지만 이 일화는 실록에 기록되지 않았으며 또한 출처 있는 야사 설화집 등 전해내려 오지 않는 것이므로 후대에 꾸며낸 일화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친동생 창녕대군, 이복동생 양평군, 이돈수 등도 모두 유배되었다가 같은 전철을 밟았다.

3.1. 중종반정 이후

아래는 유배를 갈 때의 기사이다.
박원종 등이 아뢰기를,
“폐세자 및 창녕(昌寧)·양평(陽平) 등이 성밖 가까이에 있어서는 온당하지 못하니, 외진 군읍을 골라 안치하고 관에서 먹는 것을 주며, 잡인 출입을 금하소서.”
하니, ‘그리하라.’ 전교하였다. 모두가 아뢰기를,
“고(皇+頁)는 정선(旌善), 인(仁)은 수안(遂安), 성(誠)은 제천(堤川), 돈수(敦壽)는 우봉(牛峯)에 보내어 모두 관가 근처에 안치하되, 그 담을 높직이 쌓고 항상 문을 잠그게 하소서. 그리고 옷과 먹는 물품의 출납은 관인(官人)으로 하여금 감독 관장하게 하고 그 공급은 소재처 관창(官倉)의 쌀로 하되, 관노비(官奴婢)를 시켜 음식을 마련하며, 또 군사로 하여금 수직(守直)하게 하고, 일이 있건 없건 수령은 매월 월말에 관찰사에 보고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 전교하였다.

원래는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지만 반정공신들이 폐주의 아들들을 놔두면 위험하다고 죽일 것을 청하였다. 중종은 가슴이 아파 차마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공신들의 강한 요청으로 어쩔 수 없이 조카들을 죽이고 만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의 기사.
영의정 유순, 좌의정 김수동·우의정 박원종·청천부원군 유순정·무령부원군 유자광·능천부원군 구수영 및 여러 재추(宰樞) 1품 이상이 빈청에 모여 의논하여 아뢰기를,
“폐세자 고(皇+頁)·창녕대군 성(誠), 양평군 인(仁) 및 돈수(敦壽) 등을 오래 두어서는 안 되니, 모름지기 일찍 처단하소서. 또 연산군의 폐비 신씨가 지금 정청궁(貞淸宮)에 있는데 선왕의 후궁과 함께 거처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동대문 밖 광평대군(廣平大君) 집에 옮겨 안치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고(𩔇) 등은 나이가 모두 어리고 연약하니, 차마 처단하지 못하겠다. 폐비는 스스로 허물이 없는데, 문밖으로 내쳐 보내기가 정의상 몹시 가련하니, 성안에 옮겨 안치한다고 무슨 안 될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정승들이 다시 아뢰기를,
고(𩔇) 등의 일을 전하께서 측은한 마음으로 차마 결단하지 못하고 계시지만 그 형세가 오래 보존되지 못할 것이니, 혹 뜻밖의 일이 있어서 재앙이 죄 없는 이에게까지 미치면 참으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지금 비록 인심이 이미 정하여졌으나, 원대한 염려를 하지 않으면 안 되니 모름지기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여 뭇사람의 마음에 응답하소서. 폐비는 신승선의 집을 수리해서 옮겨 두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폐비는 그렇게 하고, 고(𩔇) 등은 나이 연약하고 형세가 고단하니, 비록 있은들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하였다. 정승들이 다시 아뢰기를,
“이는 국가의 큰일이니, 차마 못하는 마음으로써 대체(大體)에 누가 있게 하여서는 안 됩니다. 모름지기 대의로써 결단하여야 합니다. 이는 신 등의 뜻일 뿐만 아니라 곧 일국 신민의 뜻입니다. 신 등이 전하께서 차마 못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뜻이 이와 같으므로 마지못하여 감히 품달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고(𩔇) 등의 일은 차마 처단하지 못하겠으나, 정승이 종사에 관계되는 일이라 하므로 과감히 좇겠다.”
하였다. 명하여 고·성·인·돈수를 아울러 사사(賜死)하였다.

4. 사망 이후

중종은 조카들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겨 후하게 장사지내주려 하였는데, 도리상으로는 이 쪽이 오히려 올바르다. 죽을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죽인다면 적어도 장례쯤은 후하게 치러주는 게 예의였다. 실제로 진짜 죽을 짓을 한 폐비 윤씨, 좀 꺼림칙하지만 진짜 죄를 지은 희빈 장씨도 나라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을 도왔고 이후 왕비에 준한 제사를 치르게 했다. 그런데도 반정공신들은 이미 죽은 서인에게 후한 대우는 필요없으니 관곽이나 내려주라고 하여 역시 무산되었다. 당시 폐세자 고의 나이가 겨우 8세였음을 감안하면 공신들이 어지간이 불안해했고 또 그만큼 자신들의 반정에 자신감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박원종을 비롯한 핵심공신 대부분은 연산군의 비호하에서 누릴 것을 다 누렸던 데다, 무엇보다 문치주의 국가인 조선에서 무신이 주축이 되어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 자체가, 조선왕조에서 경계하는 역적질의 대명사 무신정변을 떠올리게 만들어 사대부 민심을 잃을까 노심초사했기 때문이다. 후에 일어난 인조반정도 비록 계획은 무신들이 했으나 자신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문신들을 앞세웠다.

또한 인조반정 때에는 폐세자 이지의 나이가 이고보다 한참 더 많았고 광해군 연산군에 비해 쫓겨날 명분이 부족했는데도 인조와 인조반정의 공신들은 이지를 죽이지 않았다. 나중에 이지가 유배지에서 탈출하려다 걸렸기 때문에 결국 죽이긴 하는데, 이건 이유라도 있다.

그에 비해서 연산군은 쫓겨날 명분이 충분했고[11] 이고 역시도 행동이 반듯하고 나이도 더 어렸는데도 사사시킨 걸 보면[12] 중종반정 핵심부들의 취약성을 보여준다. 이 일로 중종은 박원종에게 원한을 품었는지[13] 그가 죽은 후에 그의 하나뿐인 아들(서자)인 박운이 분경[14]을 하는 죄를 저질렀다는 김안로측에 고변이 들어와 그를 변방으로 유배보냈는데 정광필이 "공신의 하나뿐인 자식인데 선처해주죠"라고 하니 말하기를 "이자가 공신의 자손이라고 봐주면 분경을 하는 자가 또 나타나지 않겠느냐" 하며 매몰차게 거절하였다. 박운은 결국 죽을 때까지 그대로 유배지에서 남은 여생을 다 보내야 했다.

5. 대중매체



[1] 율리우스력 1월 10일. [A] 율리우스력 10월 15일. [3] 율리우스력 10월 10일. [4] 3년 11개월 3일, 1,434일. [A] [6] 율리우스력 9월 18일. [7] 월산대군의 부인 [8] 주대(周代) 혼례의 육례(六禮) 가운데 4번째 절차로,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예물을 보내어 혼약(婚約)의 성립을 증거하는 예식이다. [9] 하지만 대간들은 정씨를 폐세자빈으로 칭하는 것을 보아 당대에는 연산군이 직접 세자빈으로 지목했고 납징까지 간 정씨를 세자빈으로 보았던 것 같다. [10] 흔히 '사사됐다'라고 표현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사사라기보다는 처형에 가깝다. 당시 법으로는 연좌를 하더라도 16세 미만의 미성년자나 여성은 처형하거나 사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사의 형식을 취했더라도 법적으로는 사사가 아니라 처형에 해당한다. [11] 연산군을 쫓아낸 게 잘못이라며 일어난 사건은 없었다. 반면 광해군은 쫓겨난 이후 역모사건에 계속 연루된다. [12] 실제로 어린이와 노약자는 역모에 연루되어도 노비로 만들거나 용서해주는 선에서 그쳤다. 정말 예외가 있었다면 기축옥사 때 이발의 아들이 곤장맞다 죽었고 봉산옥사 때 어린이들까지 끌려와 국문받은 게 거의 전부다. [13] 정쟁을 떠나서 결국 자신의 조카들을 다 죽인 것이니... [14] 奔競, 벼슬을 얻기 위해 청탁을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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