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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7 18:20:29

승평부대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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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의 부인
승평부대부인 | 昇平府大夫人
작호 <colbgcolor=#fff,#1F2023>상원군부인(祥原郡夫人)
→ 승평부부인(昇平府夫人)
→ 승평부대부인(昇平府大夫人)
출생 1455년( 단종 3년)
사망 1506년( 연산군 12년) 7월 20일(향년 52세)
본관 순천(順天)
부모 부친 박중선(朴仲善), 모친 양천 허씨
부군 월산대군
묘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1. 개요2. 생애
2.1. 혼인2.2. 불심 깊은 과부2.3. 연산군과의 추문
3. 여담4. 가족 관계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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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월산대군 이정의 정실 부인.

2. 생애

2.1. 혼인

1466년 8월 19일 의경세자 소혜왕후의 첫째 아들인 월산군과 혼인하면서 상원군부인(祥原郡夫人)으로 봉작되었다. 당시 박씨의 아버지 박중선은 병조 참판이었는데, 이듬해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적개공신이 되고, 남이의 옥사를 다스린 공로로 익대공신이 되어 마침내 평양군(平陽君)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또한, 박중선의 어머니 청송 심씨는 청천부원군 심온의 딸이자 소헌왕후의 여동생이었다. 즉, 아버지 박중선이 세조의 이종사촌이라서 혼인이 결정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 혼인은 세조의 조카 영순군[1]의 집에서 치러졌고, 세조와 정희왕후는 궁궐 안에 다락을 만들어 맏손자의 혼인을 구경하였다.[2]

2.2. 불심 깊은 과부

1471년 월산군이 월산대군이 되면서 승평부부인(昇平府夫人)으로 작호가 고쳐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488년 월산대군이 죽으면서 나이 34세에 과부가 되었다. 비록 슬하에 자식은 없었으나 여전히 왕실의 종친이자 성종의 형수였다. 사실 남편 월산대군이 왕이 되었다면 따라서 왕비가 될 수 있었지만, 일찍이 정희왕후가 "월산대군은 어려서부터 병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왕위 계승에서 배제했기 때문에 대군의 부인으로 남은 것이다. 성종은 권력에 욕심부리지 않고 물러난 월산대군에 대한 우애가 지극했고, 대군의 부인이자 자신의 형수인 승평부부인도 똑같이 우대하였다. 이때문에 1492년에 남동생 박원종이 젊은 나이로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을 때는 모두 그녀의 덕이라고 하였다. 신수근은 농담으로 "대간이 비록 고생스럽게 간쟁하더라도 승평부부인이 내전(內殿)에 건재한다"고 하였을 정도다.[3][4]

또한, 그녀는 과부가 되면서 불교에 대한 믿음이 더 강해졌는데, 월산대군의 명복을 빌겠다는 명목으로 묘 옆에 흥복사(興福寺)라는 사찰을 세웠다. 흥복사를 얼마나 크고 화려하게 지었으면 불상의 머리 위를 가리는 장식물인 보개(寶蓋)가 눈이 부시다는 비판까지 들었다.[5]
신이 듣건대 월산 대군(月山大君)의 부인이 불사(佛事)를 흥복사(興福寺)에서 행하니, 사대부(士大夫)의 부녀자들이 구름처럼 모였고, 사족(士族)의 부인들도 많이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승도(僧徒)들과 뒤섞여 머물다가 유숙(留宿)하고 돌아왔으니, 매우 불가합니다. 부녀자가 절에 올라가는 금령(禁令)이 《대전(大典)》에 밝게 실려 있는데, 이것은 반드시 수창(首唱)한 중이 있을 것이니, 청컨대 끝까지 추핵(推覈)하여 죄를 주도록 하고, 또 아울러 사족(士族)의 부녀자도 추핵하도록 하소서.
성종실록》 성종 25년 4월 11일

흥복사에서는 자주 법회를 열었고, 이 법회에는 사대부가의 여성들과 많은 승려가 참석하여 성황을 이뤘다. 당시의 조정 대신들은 《 경국대전》에도 '부인상사금지(婦人上寺禁止)'라고 하여 부녀자가 절에 드나드는 것을 금하는데, 대군의 부인인들 다르냐며 처벌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성종은 "흥복사의 불사는 내가 알지 못하고 형수를 치죄할 수는 없다"고 받아들이지 않았다.[6]

2.3. 연산군과의 추문

조선 전기에는 궁중에서 어린 아이를 키우지 않고 밖에서 키우는 일이 많았다. 연산군도 어린 시절에는 강희맹의 집에서 자랐으니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이런 전례에 따라 시조카 연산군의 원자 이고도 승평부부인이 키우게 되었다.

그래서 1502년 9월 21일, 9월 26일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자 그녀의 집에서 잔치를 열어주고 많은 물품도 하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승평부부인의 작호에 '大' 자를 넣어 승평부대부인이라고 부르게 하고, 은으로 된 도장까지 만들어 주기까지 하였다. 연산군이 이러한 특혜를 준 이유는 그녀와 간통을 저질러서였다고 전해진다.
사신은 논한다. "박씨(朴氏)는 수십 년을 과거(寡居)하며 불교를 받들고 믿어 정(婷)의 묘 곁에 흥복사(興福寺)를 세우고, 따라서 명복을 비느라 자주 그 절에 가므로 사람들이 혹 의심하기도 하였다. 왕이 박씨로 하여금 그 집에서 세자를 봉양하게 하다가 세자가 장성하여 경복궁에 들어와 거처하게 되면서는, 왕이 박씨에게 특별히 명하여 세자를 입시(入侍)하게 하고, 드디어 간통을 한 다음 은(銀)으로 승평부대부인이란 도서(圖書)를 만들어 주었다. 어느날 밤 왕이 박씨와 함께 자다가 꿈에 정을 보고는 밉게 여겨 내관으로 하여금 한 길이나 되는 철장(鐵杖)을 만들어 정의 묘 광중(壙中)에 꽂게 하였는데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렸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12년 6월 9일
월산대군 이정(月山大君李婷)의 처 승평부부인(昇平府夫人) 박씨가 죽었다.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12년 7월 20일

이 밖에 《 연려실기술》, 《동각잡기》, 《동국여지지》를 비롯한 자료에서 '연산군과 간통하고 부끄러워 자결한 것'으로 쓰고 있고, 이에 박원종이 분개하여 중종을 추대하는 중종반정을 이끈 것으로 설명한다.

실제로 연산군과 관계가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연산군이 그녀에게 이런저런 물품을 자주 하사하고 원자도 맡길 정도로 친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말 그대로 친지 관계임을 나타내 주는 증거일 뿐이고, 무엇보다 사망했을 때에는 자신의 직손이 아닐지언정 손자를 여러명 둔 할머니였다.

그리고 당시에는 '절에 다니는 여성'을 '음탕한 여성'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다. 전직 관리의 아내가 승려와 간통한 사건[7], 첩이 승려와 간통한 사건[8], 영응대군의 부인인 대방군부인 송씨가 승려 학조와 간통한 사건[9] 등 부녀자가 불교를 믿고 절에 다니면서 '믿음'에 기반하여 간통한 사건들이 많았다. 흥복사를 세우고 자주 법회를 여는 등 불교를 후원하였고 마침 연산군과 친한 사이였던 관계로 사람들의 '음탕한 여성'이라는 의심과 편견에서 비롯된 루머의 피해자일 가능성이 높다.

3. 여담

4. 가족 관계

5. 대중매체에서

파일:조선왕조 500년 - 설중매 승평부대부인.jpg }}} ||
<colbgcolor=#6d1b43> 〈설중매〉의 승평부대부인
1984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 에서는 배우 엄유신이 연기했다.
파일:장녹수 승평부대부인.jpg }}} ||
<colbgcolor=#6d1b43> 〈장녹수〉의 승평부대부인
1995년 KBS 드라마《 장녹수》에서는 배우 양미경[10]이 연기했다.
파일:왕과 비 승평부대부인.jpg }}} ||
<colbgcolor=#6d1b43> 〈왕과 비〉의 승평부대부인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배우 이덕희[11]가 연기했다.
파일:인수대비 승평부대부인.jpg }}} ||
<colbgcolor=#6d1b43> 〈인수대비〉의 승평부대부인
2011년 JTBC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는 배우 윤영주[12]가 연기했다.

[1] 세종의 적5남 광평대군의 아들이다. [2] 세조실록 39권, 세조 12년 8월 19일 무오 3번째기사. # [3] 성종실록 268권, 성종 23년 8월 7일 을사 2번째기사. # [4] 신수근이 내전(內殿)이라고 말한 것은 성종과 함께 왕대비 소혜왕후도 같이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월산대군이 소혜왕후를 간병하다가 병을 얻어 일찍 죽었으니 며느리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을 것이다. [5] 흥복사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 있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있고 찾아볼 수 없다. [6] 성종실록 295권, 성종 25년 10월 20일 을해 1번째기사. # [7] 태종실록 31권, 태종 16년 2월 25일 무자 2번째기사. # [8] 단종실록 1권, 단종 즉위년 6월 23일 갑신 2번째기사. # [9] 연산군일기 48권, 연산 9년 2월 11일 무신 6번째기사. # [10] 왕과 나에서는 정희왕후를 연기했다. 승평부대부인 역할을 고증에 맞게 인수대비(정확히는 노년기) 역의 배우( 장녹수에서는 반효정)보다 연하인 배우가 맡은 유일한 사례다. [11] 같은 작품에서 시어머니인 인수대비를 연기한 채시라보다 9년 연상이다. [12] 이쪽도 같은 작품에서 시어머니인 인수대비를 연기한 채시라보다 2년 연상이다. 그나마 이쪽은 이덕희에 비하면 채시라와의 나이 차이가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