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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18:17:59

이원석(1986)/선수 경력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이원석(1986)

1. 개요2. 아마추어 시절3. 롯데 자이언츠
3.1. 2005 시즌3.2. 2006 시즌3.3. 2007 시즌3.4. 2008 시즌
4. 두산 베어스
4.1. 2009 시즌4.2. 2010 시즌4.3. 2011 시즌4.4. 2012 시즌4.5. 2013 시즌4.6. 2014 시즌4.7. 상무 피닉스 야구단4.8. 2016 시즌4.9. 1차 FA
5. 삼성 라이온즈6. 키움 히어로즈7. 수상 경력8.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

키움 히어로즈 소속 내야수 이원석의 선수 경력을 서술하는 문서.

2. 아마추어 시절

어린 시절 야구 선수였던 아버지를 따라 야구를 시작했다. 허나 현역시절에 워낙 고생을 많이 했던 부친이 강력히 반대하자, 대신 막 창단된 핸드볼부에 몰래 가입했다. 그러나 이것이 나중에 들키면서 아버지가 운동을 할거면 차라리 야구를 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며 학창시절인 후배인 이순철을 불러다가 야구 관련 테스트를 받게 했고, 이순철이 합격점을 주자 그대로 야구를 할 수 있게 됐다.
파일:이원석광주동성고.jpg

이후 광주동성고등학교에 진학하며 3번 주전 유격수로서 활약했다. 이원석이 2학년이던 2003년 제58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에선 9득점으로 해당 대회 최다 득점에 성공하며 우승에 일조하기도 했다. #

3학년엔 4번타자로서 결승타도 여럿 기록하는 등의 활약하며 또다시 청룡기 결승에 진출하는데 성공했지만, 성남고에 패배하면서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해당 대회에서 타격상과 최다 안타상을 수상했다.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대붕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는 각각 타격왕(0.545)과 타점왕(9개)을 수상했다. #

그 다음해 2005년 신인드래프트에서 롯데 자이언츠 2차 2순위, 전체 9번이라는 높은 순번으로 지명되었다. 계약금 1억 3천만원, 연봉 2천만원을 받고 입단했다. #

3. 롯데 자이언츠

파일:이원석롯데.jpg
<colcolor=#fff> 롯데 자이언츠 No.6
이원석
李沅錫 | Lee Wonseok

3.1. 2005 시즌

시즌 시작 전, 신인 선수들의 각오를 듣는 자리에서 주전자리 꿰차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포부를 밝힘과 함께 시범경기 타율 0.250에 1홈런을 기록하며 이번 시즌 주목받을 만한 신인 중 한 명으로 언급되기도 했었다. # 하지만 주 포지션인 유격수 자리에는 이미 박기혁이 버티고 있어 당초 백업 외로는 경기 출전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이원석의 타격을 높게 평가하기도 했으며 젊은 선수를 좋아하는 양상문 감독이 이원석을 3루로 돌려서라도 주전으로 쓰겠다 공언하였고, 실제로 이원석은 3루수로서 꾸준히 경기에 나서기 시작했다.[1][2] 무엇보다 시즌 개막 후 한달 여간은 신인 선수치고는 괜찮은 모습을 보였고, 주전선수가 되고 싶다는 본인의 말대로 팬들에게 꽤나 인상깊은 활약을 여럿 펼치기도 했었다. 또한 5월 초 허벅지 근육 부상을 당하며 2군 말소 된 후, 다시 회복하여 선발 출전한 두 경기만인 삼성전에서 마틴 바르가스를 상대로 프로 무대 첫 홈런을 만루홈런으로 치며 팀의 대구 원정 9연패를 끊기도 했었다. # 참고로 이때의 만루 홈런은 역대 최연소 만루홈런(18세 7개월 12일)으로, 2023년 기준으로도 깨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다. # 하지만 이후부터는 타격으로나 수비로나 꾸준히 하락세를 보이며 경기 출장 수가 적어지기 시작했고, 본인에게나 팬들에게나 아쉬운 시즌으로 남게 됐다.

3.2. 2006 시즌

강병철이 부임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3루보단 유격수로서의 출전이 많아졌는데, 강민호, 김주찬과 함께 대표적인 강병철의 양아들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아무리 내야 백업이라 하더라도 시즌 내내 1-2할대를 왔다갔다했을 정도로 저조한 타격 성적과 잦은 수비 실책에도 꾸준히 출장하면서 팬들의 복창을 터지게 했다.

3.3. 2007 시즌

아예 구단차원에서 체력문제를 달고 사는 박기혁 대신 이원석을 주전 유격수로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 물론 타율 2할 6푼, OPS 0.615이라는 역시나 주전으로 기용하기엔 아쉬운 성적을 거두었지만, 그래도 고졸 3년차의 우타 유격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성적이라는 점과 전 시즌보단 여러가지로 확연히 나아진 모습을 보이며 롯데 팬들에게 다시금 희망을 주었다.

3.4. 2008 시즌

새로이 부임한 제리 로이스터 감독 체제 하에서 1루를 맡던 이대호가 주전 3루수로 기용되면서[3] 3루수 자리는 물론, 이대호의 좁은 수비 범위를 커버하기 위해 이원석보다 수비 커버 범위가 더 넓은 박기혁에게 주전 유격수 자리에서도 밀렸다. 그결과 직전 2시즌의 절반도 체 되지 않은 것은 물론 데뷔 시즌 보다도 더 적은 경기 수를 갖게 되었다. 이것도 2008 베이징 올림픽이 끝나고 이대호가 지명타자로 들어가면서 비어있는 3루에서 좋은 활약을 펼쳐 겨우 얻은 기회이지만, 다시 이대호가 3루로 돌아오면서 본인의 자리도 벤치로 돌아갔다. 이후 진출한 포스트시즌의 엔트리에는 들긴 했지만 선발 출전 가능성은 매우 낮게 점쳐졌다. 운이 좋으면 대수비나 대타로서의 출전이 가능하겠다만, 이마저도 롯데가 상대인 삼성에 가볍게 업셋당하며 광탈하는 바람에 그렇게 교체출전도 하지 못한 채 벤치를 지켜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준플레이오프를 앞두고 타격 훈련 도중 강민호의 배팅볼 투수로서 타격 연습을 도와 동료들 사이에서 칭찬받기도 했다.[4] #

롯데 시절 이원석을 요약하자면, 말그대로 포텐이 터질 듯 터지지 않는 원석에 머물러 있는 유망주 그 자체였다. 실제로 팬들 사이에서는 김수화, 이왕기, 강민호와 함께 롯데의 BIG 4로 불리기도 했을 정도로 촉망받은 선수였다. 허나 롯데 코치진의 무능과 함께 본인 스스로도 뺀질이라 지칭할 정도로 느긋하고 놀기 좋아하는 성격 덕분에 기대만큼 성장하진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훈련에 비협조적이거나 땡땡이를 치는 등의 불성실하다는 말은 아니다. 또한 고교 시절의 누적치와 프로 무대에서 잠깐이나마 보여준 모습들을 통해 포텐이 충분히 있다는 것도, 더디더라도 시즌을 거듭할수록 성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그럼에도 직전 시즌에서 출장 기회를 많이 못 받았다는 것도 대부분의 롯데 팬들이 인정하는 사실이였기에 앞으로 충분히 긁어볼만한 기대치를 갖고 있는 유망주로 평가받았었다.

또한 실제로 롯데 프런트 측에서도 2008 시즌이 끝나고 스토브리그에서 당시 정상급 3루수던 정성훈이 FA신청을 하자 많은 구단에 러브콜을 받았음에도 "3루 보강은 정성훈을 영입하기보다는 이원석과 같은 유망주들을 키우는 게 낫다"라는 발언을 하는 등 트레이드 감으로는커녕 앞으로의 엔트리 구상에서 이원석을 키울 생각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

하지만 그럼에도 후술할 이유로 어이없게 두산에 그 유망주를 그대로 헌납하게 된 것은 물론, 이원석의 그 포텐이 바로 다음 해이자 롯데를 떠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터지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힘들게 경험치를 멕이기만 한 롯데 팬들만 배아픈 꼴이 되고 말았다.

4. 두산 베어스

파일:이원석보상선수.jpg
<colcolor=#fff> 두산 베어스 No.16[5]
이원석
李沅錫 | Lee Wonseok
2008 시즌 후, 롯데가 홍성흔을 FA로 영입함에 따라 이에 대한 보상선수로 두산 베어스로 가게 되었다. # 당초 이원석은 높은 지명 순위로 뽑힌 유망주로서 포텐도 갖고 있을 뿐더러 주전 경험이 꽤나 있었기에 18명의 보호 선수로 묶일 것이 예상되었었다. 하지만 롯데의 프런트들은 두산에는 내야수가 상대적으로 많았던[6] 반면에 투수가 부족했기에 보상선수로 투수를 지명할 것으로 판단하고 이원석 대신 투수 유망주들을 모조리 묶어버리는 선택을 하며 이런 참사가 벌어지고 말았다. 보상선수로 이원석이 지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롯데 관계자들이 굉장히 충격을 받기도 했었고, 지명 당시에도 두산이 롯데에게 한 방 먹인 것이라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애초에 두산은 투수 중에서도 좌완투수가 제일 부족했기에 롯데는 두산이 자팀의 좌완투수를 가져갈 줄 알고 2차 7라운드(전체 49번)에 뽑은 좌완투수이자 데뷔 이후 몇 경기 뛰지도 않은 김이슬도 당시 보상 인원인 18인에 묶었다는 게 정설이다. 그런 와중에 신인 드래프트 전체 9번에다 20살의 준주전급 내야수 이원석을 풀었으니, 두산이 얼씨구나하고 낼름 집어간 것. 즉, 두산은 그냥 포지션 중복을 신경쓰지 않고 제일 잘 할 것 같은 사람을 데려왔다.[7]

제일 잘하는 선수를 골라 FA영입한 팀의 허를 찌르는 두산의 보상선수 픽업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실제로 이원석 본인의 FA이적 당시에도 두산은 포수 자원에 여유가 있었지만 트레이드 카드로도 쓰기 위해 이흥련을 보상선수로 지명했었고, 최주환의 보상선수로 음주운전으로 아직 징계가 다 끝나지 않아 1년 반여간 경기를 뛰지 못했고 그래서 풀렸던 강승호를 데려왔다는 것이나 박세혁의 보상선수로 수술을 받고 회복 및 복귀까지 6개월여간 걸린다던 박준영을 데려온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러한 지명 방식은(물론 FA로 유출되는 선수가 많아 보상선수를 많이 뽑아간 점도 있지만, 그럼에도) 왜 유독 두산에서 보상선수 성공 사례가 많은 지를 반증하기도 한다.

반면 롯데는 이원석이 보상 선수로 지명받고 두산에서 포텐이 제대로 터진 이후로 보상 선수에 대한 PTSD가 상당했는지, 최준석을 FA로 영입하고 또다시 두산이 보상 선수를 지명해야 될 상황이 오자 제2의 이원석을 막고자 이번엔 두산의 전력을 감안하지 않고 팀 전력에 도움이 되는 선수의 우선순위를 감안해 보호선수 명단을 짜는 것으로 노선을 바꾸기도 했다. #

한편으로 세간에 당시 인터넷 상에서 이원석이 보상 선수로 지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팀에 합류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기 전, 그동안 머물던 롯데 선수단 기숙사에서 자신의 롯데 유니폼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갔다는 썰도 돌았으나 사실로 확인된 바 없다.

등번호는 48번으로 배정받았다. 원래 롯데 시절부터 달던 6번을 달고 싶었지만, 이미 김재호가 그 번호를 달고 있어서 포기했다고. 여담이지만 두산에서의 첫 시즌인 2009 시즌이 끝나고 나서 초등학교 야구부시절부터 고교시절까지 계속 달았던 7번으로 바꾸려 했지만, 그냥 48번으로 유지했다고 한다. # 이후 절친 금민철 넥센 히어로즈로 트레이드되고 나서 각 팀에서 둘이 똑같은 '48번'을 달기 위해, 금민철의 트레이드 상대이자 넥센에서 48번을 달았던 이현승의 양도 부탁을 거부하기도 했었다.[8] # 한편 금민철이 군입대를 하면서 48번을 비우자 이원석도 16번으로 등번호를 바꾸었고, 중간에 누군가를 한번 거치긴 했어도 그렇게 이현승은 전역 후 원하던 48번을 다시 달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금민철이 전역 후 48번을 달지 않았기때문에 이원석도 금민철이 48번을 안달아서 48번을 달 마음이 없어졌는지, 두산을 떠날때까지 16번을 달았고, 덕분에 이현승은 계속 달 수 있게 되었고, 은퇴할때까지 48번을 달면서 활약했다.

4.1. 2009 시즌

파일:이원석내야방황시절.jpg
이원석의 내야 방황 시절.jpg
롯데 시절처럼 주 포지션인 유격수 자리에는 이미 다른 주전급 선수들이 포진해 있고, 잔부상으로 지명타자로 출전이 많아진 김동주의 빈자리를 대신하고자 대개 3루수로 출전했다. 프로 무대에서 잠깐이나마 3루수 경험을 한 선수가 이원석 밖에 없어서 3루 주전을 무주공산으로 먹긴 했지만, 주전 내야진들의 연이은 부상으로 인한 땜빵으로 2루수나 유격수에 들어갈 때도 꽤 많았다. # 또한 상황에 따라 김동주가 3루수로, 1루수인 최준석이 지명타자 배치시 1루수로 출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위 짤방은 그런 이원석의 내야 방황시절을 잘 설명해주는, 포지션이 고정없이 일주일간 계속 바뀌는 모습이다. 여담이지만 저 경기는 2009년 5월 30일(토) 한화와의 경기로, 저때도 원래 2루수로 선발 출장했다가 6회 말에 1루수로 수비 위치가 바뀌었었다.

두산으로 간 뒤 롯데와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5월 1일 사직 야구장에선 임경완을 상대로 친정에게 비수를 꽂는 투런포를 날리며 임경완의 그 시즌 처음이자 마지막 피홈런을 장식한 것은 물론 경기의 쐐기를 박아 그날 경기의 MVP까지 차지했다. 그리고 그 바로 다음날엔 쓰리런을 장렬하며 롯데 팬들은 모두 뒷목을 잡았다는 후문. 다음날에도 롯데를 관광태울 뻔했으나 직선타로 아쉽게 아웃되었다. 하지만 5월 21일 경기에 또다시 롯데를 상대로 자신의 시즌 3호 홈런을 날려서 사실상 새로운 로나쌩 클럽 가입자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그 이후로도 꽤 자주 선발출장하였으며 10경기 연속 출장해서 5경기 멀티히트를 치는 등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면서 많은 롯빠들이 탄식을 울렸다.

2009 시즌 성적은 타율 0.298, 9홈런, 53타점, OPS 0.794로 데뷔 후 최고의 성적을 냈다. 타율이 올라간 것은 사직을 쓰다 잠실로 홈구장이 바뀐 것이지 않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장타와 함께 홈런이 많이 늘었기에 그냥 본인의 스텝업 내지 각성이라고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4.2. 2010 시즌

초반 연일 맹타를 휘두른 오재원에게 밀려 좀처럼 선발 기회를 잡지 못했으나 나올 때마다 한방씩 터뜨려주며 꾸준하게 활약했고 광저우 아시안게임 60인 예비 엔트리에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시즌 후반에 부상을 당하면서 성적이 하락하였고 결국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페넌트레이스에서 타율 0.268, OPS 0.761, 8홈런, 49타점을 기록했다.

롯데 자이언츠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12타수 5안타 2볼넷 1도루 3타점 2득점 타율 .417 장타율&출루율 .500을 기록했고, 팀은 2연패 뒤 3연승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당시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짓는 5차전 9회초 다이빙 직선타 처리 수비까지 해내기도 했다.

삼성 라이온즈와의 플레이오프에서 19타수 4안타 1볼넷 1타점 2득점, 타율&장타율 .211, 출루율 .250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탈락했다.

2010년 포스트시즌에서 31타수 9안타 3볼넷 1도루 4타점 4득점 타율 .290, 장타율 .323, 출루율 .353을 기록했다.

4.3. 2011 시즌

팀 분위기가 어수선했던 탓인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110경기에서 타율 .216(264타수 57안타) 2루타 11개 8홈런 35타점 36득점 1도루를 기록했다.

4.4. 2012 시즌

4월까지 타율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홈런을 터뜨리며 타선에서 제몫을 해주었으며 좋은 3루수 수비도 보여주었다. 특히 4월 11일 청주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팀이 스코어 1:0으로 앞서던 3회초에 선발 투수 양훈을 상대로 때려낸 쐐기 만루홈런은 팀 시즌 1호 홈런으로 기록되었다. 이날 이원석은 5타수 1안타 4타점 1득점을 기록했고 팀은 6:0으로 승리했다.

4월 28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KIA 타이거즈와의 홈경기에서는 4타수 3안타 2홈런 3타점 3득점 기록하면서 팀 내 홈런 1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팀은 이날 9:8로 재역전패하고 말았다.[9]

롯데 자이언츠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1, 4차전은 선발 3루수 겸 6번타자, 2차전은 선발 3루수 겸 5번타자, 3차전은 선발 3루수 겸 7번타자로 출장하여 17타수 4안타(2루타 2개 포함) 2타점 1볼넷, 타율 .235, 장타율 .353, 출루율 .278을 기록했고 팀은 1승 3패로 탈락했다.

4.5. 2013 시즌

파일:이원석두산.jpg
개막 직후에는 1군에 있었으나 썩 좋지 못한 성적으로 5월 중반부터는 2군으로 내려갔다. 2군 경기에서도 별로 좋지 못한 성적을 보이고 있다가 급격하게 살이 찐 모습이 공개되면서 모두에게 충격을 안기기도 했다. 그 모습 덕에 당분간은 1군에서 볼 일이 없겠구나 싶었는데...

윤석민 김동주의 부상 및 부진 등으로 인해 마땅한 3루수 전력이 없어짐에 따라 6월 28일 1군에 콜업되어 NC 다이노스전부터 3루수로 선발출장하게 되었다. NC전에서는 첫날 오재원과 백투백 홈런을 때려내고 다음날엔 3타수 3안타로 맹활약하는 등 타격에 대한 기대를 잠시 모았지만, 역시 타격에서 썩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느 붙박이 지명타자 덕분에 욕은 비교적 덜 먹었다.

8월 4일 문학 SK전에서 실책으로 노경은의 승리투수 요건을 날려먹었고 경기를 졌으면 그 날의 대역적이 될 뻔했으나 9회 초 김현수의 역전포로 구사일생했다. 당시 홈런 치고 덕아웃으로 들어오던 김현수에게 무릎을 꿇는 짤들을 남겼다.

9월 21일 KIA전에서 멀티 홈런을 기록했으며 그 중 하나는 역전 쓰리런이었다. 결국 두산은 KIA를 제압했다. 시즌 후반기에 타격감을 올리면서 맹타를 휘두르며 커리어 첫 3할과 10홈런을 기록했다. 다만 규정타석 미달.

팀이 시리즈 전적 2패로 몰린 10월 11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넥센 히어로즈와의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스코어 3:3이던 14회말 무사 1, 3루에서 끝내기 안타를 쳤다. 이날 이원석은 5타수 2안타 1볼넷 1타점을 기록했다.

10월 14일 목동 야구장에서 열린 넥센 히어로즈와의 준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6번 3루수로 선발 출전해 0-0으로 맞선 4회초 1사 1, 2루에서 좌측 담장을 넘기는 선제 스리런을 터뜨렸다. 팀은 연장 혈투 끝에 8:5로 승리하며 2연패 후 3연승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준플레이오프 전 경기에서 선발 3루수 겸 6번타자로 출장하여 21타수 7안타 1홈런 1볼넷 1사구(死球) 4타점 4득점, 타율 .333, 장타율 .524, 출루율 .391을 기록했고 팀은 3승 2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이원석은 LG 트윈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 1, 2, 3차전은 선발 3루수 겸 6번타자, 4차전은 선발 3루수 겸 5번타자로 출장하여 14타수 3안타 1볼넷 1타점 1득점, 타율 .214, 장타율 .286, 출루율 .267을 기록했고 공수에서 맹활약했다. 그리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1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그동안의 피로 누적 탓인지,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옆구리 통증으로 2차전까지만 출전하고 이후 5차전까지 출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11월 1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선발 3루수로 출전했는데, 스코어 2:2이던 6회말 1사 만루 위기에서 4번타자 최형우의 땅볼 타구를 잡고서 치명적인 홈송구 실책을 범하는 바람에 2실점을 하고 말았다. 이원석의 실책을 시작으로 팀은 6회말에만 5점을 실점하며 무너지고 말았고, 결국 스코어 3:7로 패하며 시리즈 전적 3승 1패 후 내리 3연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기에 입대를 앞둔 이원석으로서는 이번 가을야구의 마지막이 두고두고 아쉬움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3년 뒤 이원석이 FA자격을 얻어 삼성으로 이적했는데 위에 서술한 한국시리즈에 나온 송구 실책 덕분에 사실 이원석이 삼성왕조 주역이었다는 드립이 가끔씩 나온다.[10]

2013년 한국시리즈에서 1, 2차전은 선발 3루수 겸 6번타자, 6차전은 대수비, 7차전은 선발 3루수 겸 7번타자로 출장하여 8타수 2안타 1볼넷 2타점, 타율 .250, 장타율 .500, 출루율 .333을 기록했다.

2013년 포스트시즌에서 43타수 12안타 1홈런 3볼넷 1사구(死球) 7타점 5득점, 타율 .279, 장타율 .442, 출루율 .340을 기록했다.

4.6. 2014 시즌

주전은 김현수 뿐이라는 송일수 감독의 말대로 내야경쟁이 치열한 상황. 허경민과 함께 3루수 자리를 두고 경쟁중이다. 허경민이 잘할 때마다 중계자들은 이원석을 언급한다.

특징이라면 작년의 그 장타력은 온데간데 없고 똑딱이 복귀.
파일:이원석산란.gif
파일:이원석산란2.gif
알을 품은 이원석.gif
5월 25일 한화전에서 프로야구 초유의 사건의 주인공이 됐다. 정범모의 타구가 옷 안에 들어가 1루 송구를 하지 못한 것. 이 때 캐스터의 한 말이 압권인데, "이원석이 알을 품었습니다." 실책이 아닌 안타로 기록되긴 했다.

이런 일이 또 있겠는가 싶었는데 바로 다음 해 한화 이글스 권용관이 옷 안에 공이 들어가며 권용란이란 별명을 얻게 되어 이원석 혼자만의 일은 아니게 되었다.

5월 28일 드디어 시즌 1호 홈런을 때려냈다! 상대는 두산에서의 옛 동료 김태영. 이 홈런으로 시작된 타자일순으로 팀은 10:6으로 역전승.

5월 31일 롯데전에서 솔로홈런을 쏘아올렸다. 팀이 역사상 최다안타인 29안타로 두들겨 맞고 23:1 이라는 처참한 결과에서 유일한 득점이었다.

6월 8일 손승락을 상대로 동점 쓰리런을 뽑아내며 팀의 역전승을 이끌었다.

6월 16일 발표된 아시안게임 예비 엔트리에서 탈락하며 군입대 준비를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4.7. 상무 피닉스 야구단

시즌이 끝난 이후 양종민, 이용찬과 함께 상무에 입대 신청서를 냈다. 이후 FA 자격을 얻긴 했지만 FA 신청을 포기했다.[11] 11월 20일 최종 합격했다.

2015년 5월 11일 기준으로 타율 0.333에 홈런 4개,타점 15개로 괴물같은 활약을 펼치고 있는 상무 타자들에 비하면 많이 못 미치지만, 그나마 밥값은 하고 있다. 2015 시즌 최종 성적은 73경기 0.280 7홈런 37타점.

2016년에는 7월 27일까지 71경기에 출전해 타율 0.299, 7홈런 50타점, 출루율 0.430, 장타율 0.471을 기록 중이다.

9월 전역하면 확대 엔트리에 승선하며 두산에 내야수로서 큰 힘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지만, FA 자격 유지 중이라는 변수가 있는 터라 추가 등록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김태형 감독이 역시 상무 전역한 이용찬과 함께 바로 등록해 기용할 것이라 밝혔다.

4.8. 2016 시즌

전역 다음날인 9월 22일에 이용찬과 함께 등록되었다.
전역 후 첫 타석
9월 22일 kt wiz전에서 대타로 출전. 1타점 희생플라이를 치고 교체되었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타석에 등장하자마자 잠실이 발칵 뒤집혔다. 등장곡 이후에 바로 나오는 응원가 떼창은 가히 압권이다. 오죽하면 9월 22일 경기 최고의 데시벨로 뽑혔을 정도.

다음날 삼성전에서는 무려 김재호 대신 유격수로 선발 출장했다. 6회 초 차우찬을 상대로 동점 솔로 홈런을 터뜨렸다. 다만 팀은 박해민을 넘지 못하고 패배...

9월 27일 한화 이글스전에서는 선발 파비오 카스티요를 상대로 쓰리런 홈런을 때려냈다! 벌써 2경기 연속 홈런...

10월 4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시즌 최종전에서 안타를 때려내며 삼성에 이은 팀 통산 3만 9천 번째 안타의 주인공이 되었다.

NC 다이노스와의 2016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었지만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했다.[12] 그래도 팀은 4연승으로 우승하여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 및 21년 만에 통합 우승을 달성했고, 이원석 본인도 커리어 첫 우승반지를 손에 넣게 되었다.

4.9. 1차 FA

이미 2014 시즌 후 FA 자격을 얻었지만 이제야 FA를 행사했다. 다만 두산은 이미 본인 없이도 내야 자원이 탄탄해진 터라[13] 잔류할 가능성은 적을 듯 싶다.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2016112201001805700122131_99_20161121111604.jpg
2016년 11월 21일 삼성 라이온즈와 4년 총액 27억 원[14]의 조건으로 FA 계약을 체결했다. 기사 무려 12년 만에 삼성이 영입한 외부 FA[15]로, 거듭된 부진으로 인해 삼성 팬들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아롬 발디리스를 대체할 새로운 3루수로 이원석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발디리스의 삽질을 보며 고통받았던 삼성 팬덤 내에서는 대체로 이원석의 영입을 환영하는 분위기지만, 제일기획의 답답한 운영에 학을 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원석으로 땡 치고 차우찬 최형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적인 의견도 나오고 있다. 물론 200억 드립이 사실이라 칠 경우 30억으로 2명을 다 포기한다는 소리는 어불성설일 듯. 둘 중 1명이 해외진출을 하거나 해서 남는 돈으로 투자를 한 것일 수도 있으니... 그리고 최형우가 4년 100억에 KIA 타이거즈로 이적하자 삼성 팬들은 분노하는 중이다. 추가로 우규민을 FA로 4년 65억으로 영입하면서 벌써 95억원이나 쓴 탓에 차우찬의 잔류여부도 불투명하다. 그리고 차우찬은 4년 95억에 LG 트윈스로 갔다.

삼성 팬들 사이에서는 이원석을 환영하는 여론보다 누구를 보상 선수로 주게 되느냐가 더 화제이다. 두산 팬들은 쓸 만한 보상 선수가 없다고 불평 중. 보상 선수로는 포수 이흥련이 지명됐다.[16]

한편 이원석은 등번호로 17번을 배정받았는데, 두산 시절 등번호가 16번이였지만, 1년 선배인 김정혁이 이미 쓰고 있어 대신 16번과 가장 가까운 숫자인 17번을 희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17번의 주인인 김대우에게 양도를 부탁했고, 김대우도 이를 흔쾌히 수락하면서 본인의 등번호를 비어있던 19번으로 바꾸었고, 17번을 받을 수 있었다. #

김한수 신임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원석의 영입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요청해서라고 한다.

이 계약을 통해 이원석은 KBO 리그 최초로 FA 보상선수 출신으로 FA 이적에 성공한 선수가 됐다.

5. 삼성 라이온즈

파일:삼원석.jpg
삼성 라이온즈 No.16[17]
이원석
李沅錫 / Lee Won-Seok

5.1. 2017 시즌

파일:17원석.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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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2018 시즌

파일:18원석.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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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통산 첫 20홈런을 기록하며 팀의 중심타자로 올라선 이원석의 커리어하이 시즌.

5.3. 2019 시즌

파일:100홈런 이원석.jpg
6월 25일 포항 두산전에서 개인 통산 100홈런을 달성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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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2020 시즌

파일:2020이원석.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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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2차 FA

이원석은 2017~2020년, 총 4년동안 다음과 같은 성적을 내었다.
1차 FA 4년간 기록
<rowcolor=#fff> 출장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볼넷 삼진 병살타 도루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481 1688 458 87 2 70 219 305 178 338 31 6 .271 .347 .450 .797
프런트는 이원석에게 어느 정도 대우를 해줄 것으로 보인다. 이원석은 우규민과 달리 27억이라는 그다지 높지는 않은 가격에 엄청난 혜자의 면모를 보였으므로 팬들의 반응은 어느 정도 인정해주는 편. 특히 박석민의 빈자리를 잘 메꿔주었다는 평가다. 계약 기간동안 기록한 sWAR은 무려 8.08로 대표적인 혜자계약으로 유명한 박한이의 6.47보다 높다.

12월 29일, 삼성 라이온즈2+1년 최대 20억원에 계약을 맺으며 잔류했다. 계약 조건은 계약금 3억원, 연봉 3억원, 인센티브 합계 8억원으로 보장액은 총 9억원. 보장액 비중이 절반도 안 되지만, 3년을 채우고 인센티브까지 받으면 1차 FA와 거의 비슷한 연평균 금액을 받을 수 있다. 적당한 가격에 잘 잡았다는 평가로 우선 보장액이 그다지 많지 않은지라 거품은 절대 아니며, 최대 금액은 20억으로 이원석 본인도 어느 정도는 만족할 만한 금액이 뽑혔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먼저 삼성과 계약을 맺었던 오재일이 매일같이 전화해 언제 계약하는지 물었다고 한다. 심지어 '나를 두고 삼성을 떠나지 말라'라는 닭살돋는 멘트까지 날렸다고. 본인도 계약하자마자 오재일에게 제일 먼저 계약 소식을 알렸다. 이원석 본인의 소감에 따르면 오재일이 마치 자기 부모님처럼 기뻐했다고 한다. 둘이 사이가 얼마나 좋은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5.6. 2021 시즌

파일:21이원석.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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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로우. 노쇠화라는 평가를 받은 시즌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반기까지는 특기인 타점먹방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5.7. 2022 시즌

파일:22이원석.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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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수와 타점수가 비슷한 가부장적 타점 머신.

5.8. 2023 시즌

파일:LWSS.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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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초반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중이었으나, 4월 27일 키움 히어로즈로 트레이드되면서 삼성에서의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

6. 키움 히어로즈

파일:2024이원석.jpg
<colcolor=#fff> 키움 히어로즈 No.17
이원석
李沅錫 | Lee Wonseok

6.1. 202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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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큠메시.jpg

6.2. 202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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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수상 경력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svg

이원석의 KBO 수상 경력
2016 한국시리즈 우승
2017 드림 올스타(감독추천)
2018 드림 올스타(감독추천)
2021 드림 올스타(베스트12)

8. 연도별 주요 성적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이원석의 역대 KBO 기록
<rowcolor=#fff> 연도 소속팀 출장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RC+ sWAR
2005 롯데 72 200 33 10 1 1 21 18 0 18 58 .202 .294 .294 .589 58.8 0.12
2006 123 321 65 8 0 1 26 27 3 14 55 .226 .269 .265 .533 43.0 -0.11
2007 121 407 95 10 1 1 43 29 2 24 57 .262 .312 .303 .615 72.1 0.90
2008 53 134 33 7 0 0 14 5 2 8 15 .275 .320 .333 .654 87.1 0.31
<rowcolor=#fff> 연도 소속팀 출장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RC+ sWAR
2009 두산 125 414 112 20 4 9 49 53 2 28 52 .298 .350 .444 .794 99.7 0.87
2010 104 330 78 14 4
(4위)
8 36 49 1 26 44 .268 .334 .426 .761 98.0 1.29
2011 110 311 57 11 0 8 36 35 1 29 58 .216 .298 .348 .646 69.3 0.30
2012 107 372 87 13 2 8 36 42 1 30 35 .268 .337 .394 .731 105.7 1.12
2013 85 300 83 12 0 10 40 39 6 29 49 .314 .385 .473 .858 156.7 3.26
2014 79 255 58 8 2 5 29 25 0 19 53 .251 .308 .368 .676 65.2 -0.28
2015 군복무( 상무 피닉스 야구단)
2016 7 22 6 3 0 2 3 7 0 2 2 .316 .364 .789 1.153 167.8 0.33
<rowcolor=#fff> 연도 소속팀 출장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RC+ sWAR
2017 삼성 121 459 109 20 1 18 55 62 2 34 80 .265 .323 .450 .773 87.0 0.88
2018 128 543 144 30 1 20 74 93 2 52 103 .301 .374 .493 .867 109.7 2.24
2019 111 455 97 20 0 19 44 76 2 43 73 .246 .327 .441 .767 104.6 1.25
2020 121 467 108 17 0 13 46 74 0 49 82 .268 .341 .407 .748 90.9 0.07
2021 131 480 92 19 0 9 40 59 1 60 80 .231 .341 .346 .687 88.0 0.82
2022 88 335 77 13 0 10 31 60 0 33 70 .267 .346 .417 .763 110.3 1.16
<rowcolor=#fff> 연도 소속팀 출장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RC+ sWAR
2023 삼성/ 키움 89 345 75 10 0 2 22 30 0 34 67 .246 .326 .298 .624 76.6 -0.95
2024 키움 39 109 20 4 0 0 5 8 0 14 18 .220 .330 .264 .594 66.4 -0.53
KBO 통산
(19시즌)
1814 6259 1429 249 16 144 650 791 25 546 1051 .261 .332 .391 .723 92.5 13.05

[1] 훗날 주포지션이 3루수가 되기도 한다. [2] 이후 한참 뒤인 2023년, 이원석이 키움으로 이적하고 나서 수훈 선수 인터뷰때 해설자이자 인터뷰어였던 양상문을 농담조로라도 '아버지'라고 지칭했는데, 데뷔 시즌 한 시즌을 제외하고는 둘과의 야구관련 인연이 전무했음에도 그리 말한 것을 보면 양상문이 신인 시절의 이원석을 굉장히 잘 챙겨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이대호가 2004~2005 시즌 3루로 기용된 적이 있기도 했지만, 외야수로 손아섭, 카림 가르시아, 정수근, 전준우 등을 기용해 공격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또한 1루 멀티가 가능한 김주찬 역시 외야에서 1루로 빠지며 타선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4] 당시에는 1군 선수가 거의 배팅볼을 던지지 않았다. 남의 훈련을 도와주는 것은 그 시간에 연습을 할 필요가 없는 코치나 경기 외적 인물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 경기 미출전 선수라도 선수에 따라 괜히 무시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자존심 스크래치를 느끼는 선수도 있기에 연습을 하려는 상대 선수가 도움을 거의 부탁하지도 않았다. 물론 이원석은 절친한 강민호의 부탁으로 배팅볼을 던진 것이라 케이스가 다르긴 하다. 본인도 이러한 칭찬에 당황해할정도. [5] 이적 후부터 2012 시즌까지는 48번 사용 [6] 당시 주전 2루수와 3루수는 올림픽에서 국가대표였던 고영민, 김동주였으며 유격수는 김재호 이대수가 번갈아가며 보던 상황에서 기존 주전이었던 손시헌이 전역을 앞둔 상황이었다. 오재원, 최주환 등도 1,2군을 오가며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2차 1라운드로 청소년 대표팀에서 주전 유격수를 봤던 허경민도 지명한 상태였다. [7] 한때 3루수 보강을 원하던 KIA 타이거즈와의 트레이드용으로 데려갔다는 썰도 돌았다. # 물론 이후 KIA는 김상현+ 박기남 트레이드에 성공하며 이원석의 필요성이 없어졌다. 사실 이원석 트레이드는 이원석이 롯데에 있던 2007시즌에 주전 3루수 김한수가 은퇴하면서 3루수가 필요했던 삼성 라이온즈 사이에서도 썰이 돌긴 했었다. 물론 2008시즌부터 박석민의 포텐이 제대로 터지면서 이 썰도 그대로 묻혔다. [8] 여담으로 금민철은 이현승과 맞트레이드되었다. [9] 이날 기록한 2홈런은 연타석 홈런이었으며, 2012년에 이원석보다 먼저 연타석 홈런을 친 선수는 강정호가 유일하다. [10] 게다가 2010년 플레이오프에서도 삼성 상대로 타격이 그닥 좋지 않았다. 비밀사자인 셈. [11] 사상 초유의 군 미필 FA가 나올 것으로 보였으나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았다. 실은 2010년에 박기혁이 그렇게 될 뻔했으나... 항목 참조. [12] 사실 한국시리즈에 나올 자리가 없었다. 이원석이 전역한 시점에서는 허경민이 주전 3루수 자리를 완전히 꿰찬 상태였기 때문. [13] 3루 핫코너를 맡던 김동주가 은퇴한 후, 이원석의 경쟁자였던 허경민 최주환이 3루에 건재함은 물론 신인드래프트를 통해 입단한 김민혁, 여기에 2017년 3루를 볼 수 있는 내야백업 신성현까지 영입되었다. [14] 계약금 15억 원, 연봉 3억 원 [15] 삼성에게 '돈성'이란 별명을 안겨줬던 그 유명한 심정수, 박진만 영입 이후 처음. [16] 여담으로 본인이 의도하진 않았겠으나, 이흥련에게 김태형 두산 감독이 트레이드 카드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는 발언을 해 양 팀 팬들의 사이가 꽤 험악해져 버렸다. 미디어데이 때부터 이런 도발을 즐겨하는 사람이기는 했지만, 이후 이흥련은 2020년에 SK에 진짜로 트레이드되었다. [17] 상술했듯이 2017년에는 17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