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KBS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주인공 이방원의 극중 행적을 정리한 문서.2. 극중 행적
2.1.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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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에서 1418년 음력 8월 8일 비 오는 날 밤, 세자 충녕과 신하들이 양위 선언을 반대할 때 용상에 앉은 것으로 처음 등장한다. 세자가 무릎까지 꿇고 절하며 양위 선언을 거둘 것을 요청하나 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인지 한탄하고는 형제들과 아비에 외척까지 모조리 끊어내며 얻은 왕좌인데 거절하는 것이냐, 자신이 어떻게 해야 받아들일 것이냐, 자해라도 해야 받아들일 것이냐며 화를 내고 주변에 있던 청자를 집어던지고, 익선관도 벗어던지고는 곤룡포의 끈까지 풀고 상투까지도 풀어 헤치며 처참한 몰골을 한 채로 세자 앞에 엎드리더니 깨진 청자 조각을 스스로 손에 닿고 찌르려다가 자신의 부탁을 받아들이라며 울음과 웃음이 섞인 표정으로 세자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성군이 되라고 당부한 후 다시 일어선 뒤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간다.[1][2]
2.2. 가족들을 구하고, 대업 동참의 의사를 표하다
그리고 시점이 1388년으로 넘어가는데, 말을 타고 급히 가며 자신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중앙군에게 둘러싸여 죽임을 당하려는 순간[3] 막기 위해 뛰어들었으나 쓰러져 있던 군사들이 못 가게 막고 절규하며 비통함을 표현하던 순간[4] 꿈에서 깬다.[5] 같이 자고 있던 부인 민씨는 어찌된 일인지 묻고, 꿈이 이상하여 위화도로 간 아버지가 신경이 쓰인다 말하며 걱정을 하다가 민씨의 조언을 듣고 진정하게 되고 밖에 들리는 빗소리에 방을 나서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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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말 대신 도보 이동을 택하는 등 신경을 많이 썼으나 끝내 관병들에게 따라잡혀 잡힐 위기에 처하게 되고, 그들 중 장수를 회유하려 하나 실패하여 그와 싸우지만 패하여 쓰러지게 된다. 다행히 강씨의 도움[8]으로 추격해 온 장수를 처치하고 나서 가족들과 함께 개경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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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청해서 다시 업무를 보는데 상관뿐만 아니라 동료나 주변 신료들이 이성계 아들이라 전부 눈치만 슬금슬금 보고 인사를 해도 안 받아주고 그가 지나가면 딴 데로 가버리는 등 대놓고 고립을 당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에 이방원은 심란해하고 아내 민씨의 위로를 받는다. 이후 최영의 귀양길을 바라보다 환관들이 남몰래 담너머로 궁 안으로 칼과 갑옷을 반입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퇴청 이후에 공요군 군영을 찾아간다. 형들을 찾아가 지금 대궐 경비는 어느 부대가 하고 있냐 묻고, 이방의에게 "주변 눈을 의식해 궁궐에는 별도의 부대를 배치하지 않았다"라는 답을 듣는다.
아버지가 이방원만 편애한다고 분에 차있던 이방간은 질문하는 방원에게 "네가 군사를 뭘 아냐?"고 일방적으로 시비를 걸고, 형들이 말리면서 집에 가있으란 권유를 듣는다. 장막을 나오다 조영규를 만나서 영규에게 그가 따로 동원할 수 있는 가별초 50명을 모두 끌고 자신을 따라와 줄 것을 부탁한다. 그 사이 우왕의 이성계 저택 습격이 벌어져 경비를 맡은 조영무 휘하 가별초가 저지하는 사이 이방원이 데려온 가별초가 더해져 제압된다.[10] 21세의 미숙한 이방원이다보니 "방원이는 손에 피묻힌 우리와 달라.", "네가 군사를 뭘 아느냐?" 같은 말을 듣는데, 그걸 단번에 우왕의 암살 작전으로부터 가족을 지켜냄으로서 조롱과 불만을 불식시키는 건 물론 뒷날 그의 운명을 생각하면 기함하게 만드는 소리를 듣는 게 인상적이다.
이성계를 역적으로 규정하고 언젠가 이성계와 가족들을 모두 죽여버리겠다는 우왕에게 강한 불만을 품지만 그래도 그는 왕이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다음 날 형들이 모인 자리에서 물어본다. 이방우는 그래도 국왕이니 참아야 한다고 하고, 이방과도 일단 두고보라는 입장이지만 이방의와 이방간은 즉시 왕을 죽여야 한다는 과격을 주장을 한다. 그러다가 위화도 회군 때 이성계가 보여준 냉혹함으로 말이 옮겨가 분위기가 격해지더니 이방과와 이방간이 서로 칼을 겨누는 일이 발생한다. 이성계가 나타나 칼부림까지 벌어지진 않았지만 두 사람을 호되게 꾸짖은 이성계는 누구든 형제에게 칼을 겨누는 사람은 내 칼에 먼저 죽을 것이다.[11]라며 경고하고, 이방원과 형제들은 '예, 아버님.' 하고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한다.[12]
이후 우왕이 상왕으로 올려진 동시에 폐위되어 출궁했고, 그 아들인 창왕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돼서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와 따로 술자리를 가지게 된다. 이때 이방원은 서경에서 천명미상(天命靡常)[13]이란 글귀를 보았다는 식으로 운을 떼면서 이성계에게 "어디까지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새 왕조를 세울 생각이신 겁니까?"고 묻자, "그것이 백성을 위한 길이라면, 하늘의 뜻이라면 그럴 것이다."라는 말을 이성계에게 듣게 된다. 그 말을 들은 이방원은 그러면 어서 앞으로 나아가라고, 명분싸움에 얽매이지 말고 단칼에 승부하라고 말하자, 뭐가 그리 급하냐는 이성계의 말에 왜구가 백성을 유린하고 있고, 권문세족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고 있으니 머뭇거릴 시간이 없기에 그렇다고 답하였으나, 그것이 그의 진정한 마음이 아님을 눈치챈 이성계가 다시 물었고, 이방원은 이성계가 실패할까봐 두려워서 그렇다고 답하며, 과거 동북면을 떠나 개경으로 처음 왔을 때, 역모죄로 남성들은 모두 죽고 도성에 버려졌으며, 여성들은 울부짖으며 노비로 끌려간 한 가문이 망하는 모습을 본 뒤로 두려움이 새겨졌다 말하며, 자신도 가문의 일을 돕게 해달라고 말하나 이성계는 자신이 가는 길은 결코 아름답지 않은 길[14]이라고 말하며, 자신은 이방원이 그 길을 걷는 것을 원치 않으며 그만의 행복을 찾기를 원한다고 말하였고, 이방원은 별수없이 그리하겠다고 답한다.
술자리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을 얻게 되었고, 민씨와 함께 이번에는 꼭 잘 키우겠다고 다짐한다. 마지막엔 팔관회임에도 밀린 업무[15] 때문에 늦게 퇴청하고 나오던 길에 이성계를 암살하라는 우왕의 지시를 거부하고 고변하기로 한 예의판서 곽충보를 만난다.
곽충보에게 암살 모의를 전해듣고 아버지에게 알리려고 급히 말을 달려가는데 하필 팔관회가 열리고 있어 개경 거리에 사람이 가득 들어차 도저히 말을 달릴 수가 없었다. 결국 말을 내버리고 뛰어서 집에 도착한다. 조영무에게 자객이 있다고 말한 후 아버지를 찾아서 집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막 빈객들과 자리를 마치고 나오는 이성계와 마주친다.
뭐라 말을 꺼내야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김저와 정득후는 이미 등 뒤에 와있었다. 이성계는 김저와 정득후를 가리켜 이방원이 데려온 손님이라고 생각하고 물었는데, 순간 일이 글렀음을 짐작한 김저와 정득후는 비수를 빼들어 달려든다. 내원이라 가별초들이 없어 이성계와 이방원이 각각 맨몸으로 그들을 상대하게 되는데 50을 넘긴 이성계는 고려 최고의 맹장답게 맨손으로 무장한 자객을 두들겨 제압하지만 무예가 서툴었던 이방원은 어깨를 찔려 어찌어찌 버티다 결국엔 과다출혈과 쇼크로 쓰러진다.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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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정신을 차리곤 우왕과 우리 가문은 절대로 공존할 수가 없고 둘 중에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니 자신도 도울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한다.[17] 이성계는 칼로 벨 적은 다 쳐냈으니 이제 붓으로 벨 적만 남았고, 거기에 이방원이 도움이 될 거라는 계모 강씨의 조언에 이방원의 참여를 허가하고 형제들을 대표해 측근[18]들과 가지는 회의에 참여시킨다.[19]
김저 사건 이후 벌어진 회의에서 우왕의 처분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창왕이 아버지를 단죄할 리 없으니 유배지를 보다 멀리 옮기는 쪽으로 결론을 내릴 때 이방원이 끼어들어 주상(창왕)이 문제라면 주상 먼저 치워버리고 우왕도 처리할 것을 주장한다. 관망하던 정몽주는 향락과 폭정을 일삼은 명백한 과오가 있는 우왕과 달리 창왕에게 무슨 잘못이 있냐며 강하게 반박하고 신하된 자가 왕 끌어내린다는 말을 어찌 그리 쉽게 하냐 꾸짖는다.
회합이 끝나고 이방원은 자신이 괜히 끼어들었다고 이성계에게 죄송스러워하나 이성계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그러라고 널 참여시킨 것이다. 내가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 해줘라.'며 기운을 북돋아준다. 그리고 창왕을 끌어내리려면 명분이 필요하다며 그것을 찾아보라 말한다.
이후 집에서 아내 민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돌아와서도 밤새 고민하다 민씨의 권유로 잠자리에 들려는 찰나 '아이가 서방님을 닮았다. 씨도둑은 못한다.'는 민씨의 말을 듣고 일찍이 저자에 떠돌던 소문.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라는 소문을 떠올리고 이성계에게 달려간다.
"폐가입진은 사실이다. 신우와 신창이다."라며 완고하게 구는 이방원에게 맏형 이방우는 "고작 저자거리 소문으로 군주를 폐위시키는 경우가 어디있느냐. 네가 바로 역적이다."라며 이방원의 멱살을 쥔다. 형제간의 싸움이 벌어지려던 찰나 어머니 한씨가 이방원의 아들에게 줄 배냇저고리를 만들어 방문했다 이 광경을 보고 싸움을 말린다. 강씨를 보기 불편했던 한씨는 배냇저고리만 전해주고 떠나면서 요절한 막내 방연을 거론하며 형제끼리 우애있게 지낼 것을 당부한다.
한씨가 떠난 후 창왕이 폐위되면서 열린 연회에서 이방원은 보다 차분한 상태에서 이방우와 다시 이야기를 주고받지만, 충(忠)을 강조하는 이방우와 가족의 안위에만 집중할 뿐 암울한 고려에서는 이미 마음을 떠난 지 오래인 이방원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린다.
한편 공양왕이 즉위 첫 날부터 아버지 이성계에게 모욕감을 주며 반항을 하자, 형 이방과의 협조로 궁궐 주위에 가별초를 행진 시켜 공양왕을 겁에 질리게 하여 협박한다.[20] 결국 겁에 질린 공양왕은 이후 기존의 입장을 바꿔 이색과 변안열을 파직 후 유배를 보내고, 유배를 갔던 우왕과 창왕의 참수를 명하게 된다.
이로 인해, 이성계의 집안이 역적이라고 무지막지하게 욕을 먹게 되지만 이방원은 형들에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항변한다.[21] 이때 이방과가 도리어 이방원에게 뭐가 문제인지 일러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방과보다 경륜이 떨어지는 이방원이란 신선한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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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일로 맏형 이방우의 분노를 사 "내가 널 죽이면 우리 집안은 충신의 가문이 될 것이고, 네가 날 죽이면 역적의 가문이 될 것이다"라며 비 오는 날 이방우와 칼싸움까지 하게 된다. 말 그대로 진흙을 튀기며 치열하게 싸운 끝에 검을 놓치고 패배하여 형에게 밟혀 죽게 되나, 이방우는 차마 동생을 죽이지 못해 맨땅에 검을 찍고 통곡하며, 이방원도 일어나 애타게 형을 부르며 서로 얼싸안고 통곡한다. 그리고 이 싸움은 아버지 이성계가 몰래 지켜보게 된다.
아들들의 칼싸움과 백성들의 돌패매짓으로 왕위에 환멸을 느낀 이성계는 왕위에 오를 것을 포기하고 낙향하게 되자, 이를 막기 위해 형 이방우와 말을 타고 급히 아버지에게 달려가 자신들이 잘못했다고 사죄하나, 이성계에게 너희들 잘못 때문에 낙향하는 것이 아니며, 이대로 가면 골육상쟁이 기다릴 것이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듣는다.
아버지를 막는 데 실패한 뒤, 이방우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은 아버지의 짐을 덜어드리고 싶었다면서 착잡한 감정을 호소한다. 이성계가 금방 돌아왔지만, 부르실 때까지 잘못을 생각하며 근신하라는 정도전의 말을 따라 서책을 읽으며 장인인 민제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2.3. 정몽주를 척살하고, 아버지에게 버림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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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가문의 한 사람을 호출한다는 공양왕의 명에 따라 입궐하는데, 공양왕에게서 더 이상 꼭두각시 노릇을 하지 않을 것이며 역성혁명 세력이 일으킨 윤이, 이초 옥사에 연루된 인사들을 내일 석방하겠다는 선언을 듣고, 또 출궁하는 길에 정몽주와 그를 둘러싼 수많은 당여들을 목도하며 "아직 고려를 지키는 신하들이 많다고 아버지에게 전하라"는 선언까지 듣고 온다.
이후 자신이 어떻게든 옥사에 연루된 반대 세력들을 숙청하겠다고 격앙되어 청주로 달려간 정도전을 쫓아갔고, 정도전이 폭우로 인해 범람한 강을 무리하게 건너려다 빠진 것을 구출한다.
정도전을 구출한 뒤 한 민가에서 동이 틀 때까지 기다리다가 청주성으로 갔지만 군관으로부터 죄인들이 나무를 올라서 빗 속에서 탈출해 관아에 있다는 걸 듣자 관아로 달려갔지만 이미 정몽주가 온 상태였고 그렇게 죄인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결국 정몽주를 제거할 생각을 가지게 되는데,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쉽게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숙부인 정도전이 유배보내졌다는 소식을 듣고서 결단을 내리기로 마음을 먹었던 순간 한밤중에 친모 한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개경에 있는 형들과 같이 급히 한씨가 있는 포천으로 갔는데, 밤이 지나고 오전이 되었을 때 도착했지만 문 앞에서 마중 나온 여동생들이 상복을 입고서 오열하는 걸 보고서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형들과 같이 오열하고 통곡하면서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한다. 뒤늦게 도착한 아버지와 같이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가족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가 자신에게 3년상을 치러 줄 것을 부탁하자 대신 정몽주를 마음에서 버려달라고 간청하지만 아버지가 거절하자 하는 수 없이 한씨 묘 옆에다 움막을 지어놓고 3년상을 치르게 된다. 부인까지 떠나보내고 혼자서 지내다 보니 평소에 해보지 않던 장작패기도 서툴러하는 모습을 보이고, 그러다 정몽주가 찾아오자 문상객을 외면할 수 없기에 맞이한다.
정몽주가 묘에 절을 한 뒤 자신에게 어머니와의 인연을 얘기해주자, 어머니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다시 눈물을 흘렸고 그런 모습을 정몽주가 다독여주었다. 밤이 되자 정몽주를 자신의 움막에서 재우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후 잠든 정몽주를 몰래 지켜보다가 서서히 다가가서 지니고 있던 단검을 꺼낸다.
이방원은 갈등 끝에 결국 정몽주를 찌르지 못하고 오열하고 그 소란에 깨어난 정몽주는 침상에 놓인 칼을 보고 상황을 짐작한다. 이방원은 눈물 흘리며 제발 우릴 막지 말고 정 못볼 거 같으면 어디 산속에라도 들어가 있으면 우리 가문이 상황 다 정리할테니 그렇게라도 하라고 애원한다. 결국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한 정몽주는 미안하다는 편지를 남기고 떠나간다.
시묘살이에 어느 정도 숙달됐는지 장작 패기도 척척 해내는 이방원이지만 옆에서 곶감 까먹으며 깐족대는 이화상이 얄미웠던지(...) 한소리 하려다 마는 중에 이성계의 낙마 사고 소식을 듣고 서둘러 아버지가 있는 벽란도 객점으로 간다. 계모 강씨가 정도전도 없는 마당이니 이방원이라도 있으면 무슨 수를 낼 거라고 예측한대로 의식 불명으로 위중한 이성계를 당장 개경으로 옮기자고 한다. 식구들은 너무 위험하다며 말리지만 어차피 이성계 파 신하들이 다 죽으면 그때가서 이성계가 깨어나도 자신들은 다 죽을 것이라며 이대로 앉아서 죽느니 뭐라도 해야한다 주장한다. 이성계가 살아있다는 걸 알려야 정몽주 측이 더이상 허튼 짓을 안할거라는 이방원의 설득에 이방과가 찬성하면서 이성계를 가마에 태워 이동하게 된다. 처음엔 사병들이 가마를 지고 갔지만 중간부터 아들들 네 명이 직접 지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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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를, 죽일 것이다" |
조영무는 대감(이성계)이 절대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라며 신중한 모습을 보이지만, 방원은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고 하며 강행 의사를 보이자[22], 가별초의 한 지휘관이 동조하고, 이에 조영규도 동참하며 자신이 앞장 서고, 이에 조영무는 자신이 뒷수습을 하겠다며 가별초 지휘관들의 협조를 얻어낸다. 이후 그들과 함께 정몽주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도당( 도평의사사)으로 이동했지만 도당에는 정몽주가 없었다.
이에 정몽주의 행방을 찾은 결과 이성계의 집에 들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결국 방원은 이성계가 그를 건드리지 말라고 당부했음에도 결국 백주대낮에 부하들을 동원해 이성계의 집으로 나와 돌아가던 정몽주를 쫓아 선지교(= 선죽교)에서 철퇴로 그를 살해한다. 이후 조영무를 통해 정몽주의 피살을 확인한 뒤, 강씨와 형제들이 모인 자리로 돌아와서는, 이화상을 통해 아버지에게 자신이 정몽주를 죽였음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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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형들에게 정몽주가 살해당한 이후의 일처리 내용을 듣고 정몽주의 위치를 묻는데, 형 이방의와 이방간에 의해 선지교에 대역죄인이라는 명목으로 효수당한 정몽주가 있던 곳에 와 그의 목을 보자마자 도망치듯이 자릴 떠나고, 결국 주저앉아 죽은 스승에게 용서해 달라고 절규한다. 그러던 중 석방된 정도전을 만나 그의 죽음으로 자신이 살아났다는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정몽주 효수 건으로 같이 쫓겨난 이방의, 이방간 등과 함께 이성계의 집 앞으로 찾아왔으나 문전박대당한다.[23]
용서해주실 때까지 다시 찾아오자는 이방과의 말을 듣고 민씨와 함께 귀가하던 중, 민씨는 강씨가 얘기와 달리 이성계에게 이방원을 용서해달라고 청하지 않는 것 같다고 의심한다. 그러나 방원은 우리를 위해 나서 주신 분이 그럴 리 없다며 이를 만류한다.
이성계의 집 앞에서 형들과 함께 이성계를 기다리다가 정도전을 비롯한 신하들이 국새를 들고 오는 것을 보고 놀라는 것으로 9회 첫 등장을 한다. 이후 아버지와 같이 축하 연회를 할 수가 없어 형제들끼리 따로 모여 술자리를 가진다. 그러나 왕자가 되었다며 기뻐하는 다른 형들과는 달리 홀로 착잡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이방과에게 대업의 일등공신은 너이니 내일이면 아버지도 용서해 줄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는 격려를 받는다.
2.4. 버림받은 왕자, 고통의 나날을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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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이방원은 아버지의 즉위식에 형들과 함께 참석하려 하지만 내시가 나와 어명으로 궁궐 출입이 금지되었다며 가로막힌다. 이에 형제들이 이를 무시하고 들어가려 하자 호위군이 이들을 칼로 막는다. 결국 형들이 돌아간 뒤에도 혼자 무릎을 꿇고 버티고 앉아 있던 중 아버지가 퇴궐하려고 나오자 아버지를 위해 삶을 바쳤는데 돌아오는 게 이거냐며 제발 용서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소리친다. 그러나 이성계에게 물러나라는 말만 듣자 끝까지 버티려다 어명이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나 홀로 쓸쓸히 궁궐 앞을 떠난다. 조금 뒤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시아버지를 원망하는 민씨에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울지 말라고 말해 준다.
아버지에게 철저히 외면당한 상태에서 힘없이 자택에 머물고 있던 중, 설상가상으로 셋째 아들은 병들고, 이방석이 세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형들을 찾아가서 대책을 논하자고 하는데, 이방간은 우리들은 버림받았으니 당연히 계모의 자식 중 하나를 세자로 책봉하지 않겠느냐며 허수아비에 철퇴를 내리치며 화풀이를 하고 있고, 이방의는 아예 다 포기하고 음주가무를 벌이고 있으며 가장 믿음직한 이방과도 체념하고 술이나 마시는 것을 보고 답답해한다.
결국 형들을 설득하기를 포기하고 정도전을 찾아가서 적장자인 이방우 형님을 데려올테니 시간을 좀 벌어달라고 부탁하지만, 이미 정도전은 이성계와 강씨의 의중을 따르기로 결정한지라 그에게도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기로 찬동하여 죄송하다는 말만 듣게 된다.
결국 어머니 강씨에게 자초지종을 따지기로 한다. 경비병들이 칼을 뽑아들며 막아서지만, 어차피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으니 차라리 베어버리라며 그들을 물리고 저택에 들어서자 강씨 소생의 자녀들이 머물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미 강씨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동생들에게 울분을 터트리던 중 이후 강씨가 나와서 이방원을 방에 불러서 독대하는데, 강씨의 차가운 눈빛, 목소리[24]에 자신을 배신했다는 것을 깨닫고 격분하며 배신을 따진다. 그러자 강씨는 어머니로서 자기 배에서 나온 자식을 위해 나서는건 당연한 일이라며 자기 행위를 합리화한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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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 강씨가 친모 한씨를 들먹이며 어미 없는 자식들의 처지에 대해서 말하고 일찍 죽은 친모를 탓하라며 적반하장으로 나오자 분노하며 상을 뒤집고, 왕비의 신분인 강씨에게 "양심도 없는 사악한 여자"라며 비난을 퍼부으며, 목을 조르려다가 겨우 참는다.[26][27]
강씨가 지지 않고 차라리 목을 조르라며 손을 갖다대는 등 아예 이방원을 죽일 빌미를 대놓고 만들려 하는 찰나, 이화상에게 연락을 받은 아내인 민씨가 달려와서 "아바마마께 버림을 받고 제정신이 아니다, 제발 최영의 군사들이 쫓아올 때 왕비마마와 세자저하를 구해낸 공을 기억해 달라"면서 무릎을 꿇고 양손을 비비며 눈물을 흘리다가 옷자락에 매달리면서까지 용서를 빌자 "네가 좀 낫구나" 하면서 겨우 살아 나가게 되고, 그 난리통 중 찾아온 아버지 이성계에게마저 "네게 돌아올 줄 알았던 자리를 뺏겼다고 그러느냐!"며 욕심에 눈이 돌아간 놈이라는 비난을 듣고 나온다.[28]
이윽고 아내 민씨와 함께 처절한 마음으로 궁을 빠져나오고, 낙담한 이방원에게 민씨가 “오늘의 치욕을 절대 잊지 말라”라고 하자 분노에 찬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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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씨가 한씨 소생들을 용서해달라고 이성계에게 청한 상태였는데, 이후 직접 이방원의 집에 선물을 들고 행차한다. 이때 아내 민씨는 예의를 차리며 강씨를 안내하지만, 이방원은 고개도 숙이지 않고 강씨를 차갑게 노려보기만 한다. 방으로 찾아온 현비 강씨의 앞에 서 있다가 앉으라는 말을 듣고 망설이며 계속 서 있었지만 앉지 않을 거면 나가라고 하자 마지못해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러고도 현비 강씨의 말에 여러 차례 반발하자 현비 강씨가 돌아간 후 아내 민씨에게 그러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면 속이 시원해지냐며 못난 소리 좀 그만하라는 얘기를 듣고 말을 타고 바깥으로 나가버린다.[30] 그러나 민씨가 계곡 앞에 앉아 있는 이방원을 찾아와서, 이방원을 귀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며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니 그때까지 참고 기다려 달라고 울면서 부탁하자 그렇게 하겠다고 말한다. 이후 말을 매어둔 곳까지 오솔길을 함께 걸어가면서 정말 하늘이 기회를 줄 것 같으냐고 묻고, 하늘을 믿지 않으며 둘만의 힘으로 무엇이든 이뤄내겠다는 답을 듣고 둘만 믿으면 되겠다고 말한다.
그 뒤 이방과로부터 자신이 벼슬과 가별초 500호를 받은 것을 비롯해 형제들이 봉작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아버지가 자신들을 용서하신 거냐고 묻지만 정확한 답은 듣지 못한다. 그때 바깥에 가별초가 왔다는 이화상의 말을 듣고 바깥으로 나가보고 조영무로부터 자신들을 지휘해 달라는 말을 듣는다. 그렇게 현비 강씨가 이성계를 설득하여 어명을 받아 가별초를 받아들인 후 조영무에게 어디까지 자신을 따를 수 있냐고 물어보며 역심을 품는 모습을 보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민씨의 설득으로 훗날을 기약하기로 한다.
하지만 강씨에 의해 큰형인 이방우가 폐인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살고 있음을 알게 되자 더더욱 강씨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게 된다.[31][32] 사실은 이 모든 것이 강씨의 계략이었으며 일부러 이성계를 온천여행 명목으로 도성 밖으로 보내고 이방우에 대한 소식을 흘려 군사를 일으키게 한 뒤 진압하여 목숨을 끊으려는 함정이었으나, 이방원은 이미 이를 간파하고 자신은 아직 능력이 안된다면서 조영무를 포함한 가별초를 전부 의흥친군위로 보내고 이를 민씨를 통해 강씨에게 전달하게 하였다.[33][34]
그리고 명에서 조선의 건국에 대해 불만을 쏟아내는 서신을 보내고 이를 해명할 사신을 올려보내라는 요구를 하게 되는데 이는 까딱하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임무이며, 이성계는 고심한 끝에 이방원을 사신으로 보내게 된다. 이때 오랜만에 이성계에게 불려가 일대 일로 대화를 나누는데 그 장소는 한때 이방원이 위화도 회군 직후 가족들을 구해내 이성계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었던 바로 그 곳이었다. 이를 들은 이방원은 그 말이 아버지로서의 부탁인지, 왕으로서의 명령인지 묻자 이성계는 어디까지나 어명이라고 차갑게 대답하였으며[35], 그렇게 어명을 받아 민씨를 포함한 가신들의 배웅을 받으며 사신으로서 명으로 향하는 뱃길에 오르게 된다.[36] 명으로 향하면서 사절단 일행으로서 동행한 남재로부터 황제를 만나 내뱉은 말이 무엇이냐에 따라 국운이 달릴 거란 충고를 듣고 단 한번의 기회만 주어진 황제를 알현하면서 건넬 말을 고심하게 된다.
명나라에 도착해 주원장을 알현하게 되고, 주원장이 왜 자꾸 여진족들을 회유하면서 그대들의 영토로 끌여들이고, 또한 요동의 해안선을 염탐하냐며 장차 그대들이 우리를 침공하려는 게 아니냐고 추궁하였다. 그러자 아니라고 대답하였고, 이에 증거를 대보라는 말에 증거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서 신뢰를 가지고서 바라봐야 만 가지의 의심이 사라지는 거라며 주원장을 설득한다. 또한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이유는 순전히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에 남재로부터 잘하셨다고 칭찬을 듣고, 이후 모든 외교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온다.[37]
반년만에 귀국하고 나서 포구에서 부인을 만나면서[38] 명나라에 다녀온 소감을 말하는데, 명나라가 조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것을 바탕으로 조선의 숙명에 대해 평을 내린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비록 땅덩어리는 작지만 대국이 경계할 만한 강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소회를 밝힌다.
이후 궁궐로 들어가 남재와 함께 어전에서 귀국을 보고하고, 남재에게는 밝은 표정으로 기뻐하는 표정을 짓다가도 자신을 보면서는 여전히 정색하는 부왕을 보면서 이방원 자신도 부정(父情)에 대한 미련이 없는 듯 건조하게 물러가겠다고 한 뒤 나온다. 이후 세자 이방석, 중전 강씨와 마주치는데, 자신을 걱정했다는 이방석의 말에는 살갑게 받아준다. 주강에 참석해야 하는 이방석이 먼저 자리를 뜬 뒤, 자신을 경계하는 강씨에게 이전과는 달리 여유로운 태도를 보인다.
한양 천도 이후 새 집을 정리하던 중 처남들로부터 현비 강씨가 위독함을 전해 듣는다. 그 후 이성계가 세자를 부르러 잠시 나간 사이 강씨의 처소에 들러 문병을 왔음을 알린다. 강씨에게 냉대와 함께 자신의 사후 세자를 해칠 것이냐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듣고, 이에 세자는 자신의 동생이니 지켜드리겠다고 답하나 이를 믿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기어서 자신에게 접근한 강씨에게 목을 졸리게 된다. 그러나 일체의 저항도 없이 강씨를 가만히 노려만 보고 있는 상태에서 이성계가 돌아와 이를 보고 놀란다. 결국 이방원의 목을 조르던 현비 강씨가 쓰러져 죽고 이성계와 강씨 소생의 자식들이 몰려오자 바닥에 엎드린 채 잠시 있다가 이내 스님들을 지나쳐 궁궐을 빠져나온다. 그리고 궐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민씨가 현비 강씨의 안부를 묻자 떠나셨다고 대답하고 저벅저벅 걸어간다. 12화 엔딩 부분 내용은 신덕왕후가 헛것이나 꿈을 꾼 게 아닌 진짜였음이 드러나게 됐다.
이후 신덕왕후 강씨의 죽음에 슬퍼하다 몸져누운 이성계에게 이방과, 이방의, 이방간, 이방원, 이방번, 그리고 이방석을 불러 세자를 지켜 달라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이제 나가 보라고 해서 나가려는데, 이성계에 의해 남게 되고 강씨가 사망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는 질문을 받는다. 잠깐 망설이다 이성계의 재촉을 받고 그날 있었던 일을 이성계까 묻는 대로 대답하는데, 이성계에게 네가 강씨의 죽음을 앞당겼다며 탓하는 말과 중전의 사람 보는 눈은 틀린 적이 없다고, 넌 반드시 세자를 해칠 거라는 말을 듣자 계속 부정하지만 끝내 참지 못하고 전하와 중전의 기대에 부응해야겠다며 언젠간 해가 될 놈이니 이 자리에서 자신을 죽이라고 소리친다.[39][40][41] 이윽고 이성계가 휘두른 칼에 상투가 잘리고, 아버지로서 베푸는 마지막 자비라며 만일 조금이라도 세자를 해칠 기미가 보이면 그때는 목이 달아날 줄 알라는 소리를 듣고 궁궐에서 나와 머리가 풀어헤쳐진 채로 도성의 거리를 지나 자택으로 돌아온다.[42]
이 때문에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민씨가 거병을 하자며 결심을 해달라고 설득하지만, 이방원은 자신이 결심하면 많 은 사람 들이 죽을 것이고, 자신은 매우 잔인하게 변모할 것이라며 고민하고, 시간을 달라고 부탁한다.
2.5. 용상을 향한 투쟁을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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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만난 인재들과 얘기를 하고 난 뒤 밤길을 같이 걷던 민씨에게 자신도 함께하겠는 말을 듣지만 거절한다. 그리고 이유를 묻는 민씨에게 부인은 항상 안전한 곳에 두고 싶다고 말해서 설득시키나 싶었지만 이내 사병들에게 밥을 지어 주겠다는 말을 듣고는 그런 일은 노비에게 시키라며 말려도 민씨의 뜻을 꺾지는 못한다.
사병을 훈련시키던 중, 신덕왕후를 모신 사당으로 가던 이성계에게 훈련 현장에서 발각되어 무릎이 꿇리고 추궁받는다. 자중하며 가만히 있으라는 명을 어겼다는 이성계의 비난에 자신은 절제사로서 병사들을 훈련시키며 소임을 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반박하며, 자신을 베려는 이성계에게 눈빛 한 번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목을 내놓아야 하는 합당한 이유를 말해달라고 요구한다.[44] 세자 이방석과 정도전의 만류로 이성계는 이방원을 죽이지 않고, 대신 순군부에 하옥하라 명령한다.
자신을 순군부로 인솔하던 조영무가 자신을 풀어주며 부자 간의 사이가 멀어진 이유를 묻자, 자신의 목표를 조영무에게 순순히 털어놓으면서, 자신이 거사를 일으키면 어차피 조영무와 마주치는데, 이길 수 없다면서 조영무에게 자신의 사람이 되길 종용한다. 조영무는 거절했지만 흔들리기 시작한다.[45]
이성계의 경고를 들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병 훈련을 계속하면서, 그를 염려하는 장인 민제에게는 어차피 서로 속내를 다 간파했으니, 가만히 있어봐야 소용 없다고 냉철하게 대답한다. 그리고 하륜과 구체적인 군사들의 동선을 논의한 뒤[46], 정도전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륜에게서 듣게 된다.
그리고 잠자리에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민씨에게 만일 이성계가 세자를 바꿔주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칼을 뽑아서 다가오면 어쩔 거냐고, 아버지를 향해 칼을 뽑고 휘두를 수 있겠냐는 물음을 받고, 잘 모르겠지만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라고 대답한다.
사병을 훈련시키고 밥을 먹이던 어느 날, 내관이 사병 혁파를 하교한 어명을 들고 찾아와 사병을 다 압수당한다. 이방원을 비롯한 모든 이들의 사병과 무기를 빼앗은 이유는 이성계가 요동 정벌을 위해 징집한 것이었다. 사병이 있어야 성문을 열어 밖에서 들어오는 군사들을 맞이할 수 있었던 이방원에겐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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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말에 매우 기분을 잡친 이방원이었지만 그것도 잠시, 이숙번이 소수의 군사를 이끌고 신덕왕후의 묘를 수리하러 온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노역을 위해 대동한 군사들이었으므로 비무장 상태. 그러나 사병을 뺏기던 와중에도 민씨가 몰래 숨겨놓은 30명분의 무기를 보자 크게 기뻐한다. 거사를 시작하기 전, 이화상과 만나 한씨와 이방우의 묘소를 들러 마음을 다지면서 "이제 예전의 다정한 형님은 없다. 피범벅이 되어 으르렁거리는 짐승 한 마리가 서있을 거다. 나는 이제 괴물이다."라고 포부를 드러낸 뒤, 우연히 신덕왕후의 3년상을 마무리하고 돌아온 어가의 행차를 보게 된다. 백성들과 함께 엎드려있던 중 이방원은 갑자기 이성계가 병으로 쓰러지는 것을 목격했고, 정도전과도 눈을 마주친다. 처음엔 아버지가 쓰러지는 모습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그였지만, 오히려 이성계의 병마를 기회라고 생각할 만큼 이방원은 매우 차갑게 달라져있는 상태였다. 정도전은 무언가 불길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이성계의 병마를 핑계로 모든 왕자들을 궁궐로 소환해 안채에 묶어놓는다. 그러다가 민씨가 배를 잡고 쓰러졌다는 화상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이성계를 간호하는 이방석과 신경전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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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왕자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다
민씨에겐 이숙번의 병사들을 무장시킬 것과 두 처남에겐 정도전을 포함한 세자파 대신들의 행방을 주시하라는 지시를 한 뒤, 다시 궁으로 복귀한다. 그 날 저녁, 궁을 나갈 것을 조영무에게 통보하면서, 오늘이 거사일이며 마지막 선택을 기다리겠다는 회유를 한다. 그때 태조가 깨어났으니 왕자들은 모두 알현하라는 어명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내관들의 안내를 받아 이방의, 이방간과 함께 따라간다.궁궐이 어두운 이유를 이방의가 내관에게 묻자, 내관은 "등불이 너무 밝으면 떠돌던 병마들이 모여든다"는 이유로 삼봉 대감이 등을 끄라고 지시했다고 대답하는데, 이방원은 이를 듣고 의심한다. 철저한 유자로서 미신을 경멸하는 삼봉이 그런 이유로 지시를 한 것은 이상하다며 함정임을 직감,[49] 바로 삼봉의 자객들이 나타나자 형제들과 함께 달아난다.
이방의가 다급하게 숙위병들을 부르자, 조영무가 이끄는 가별초 숙위병들이 나타나 세 형제를 보호한다.[50] 세자파 대신들이 자신을 죽이려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이방원은 이제 자신이 반격할 차례라며, 세자의 등을 업은 간신들을 척결하고 이방과 형님을 세자에 앉히겠다며, 이방의, 이방간에겐 이방과 형님을 모시고 대피하라고 한 뒤, 이젠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선언하며, 무인정사의 시작을 알린다.
중간에 궁으로 가던 중인 이방번을 만나 궁은 위험하다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하나, 이방번은 어머니가 형은 믿지 말라고 했다며서 가버린다.[51][52] 이후 하륜의 작계를 따라 반란군들이 한양으로 집결하면서 일제히 총공격에 나선다. 이숙번이 정도전파 대신들을 살해하고, 남은 지휘관들이 삼군부와 도당을 장악하던 와중에 혼자서 있다가 도피중인 정도전과 마주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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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앞까지 점령하면서 이제 궁궐만 남게 되었고, 광화문 앞에다 군영을 세워놓고서 조영무의 투항을 기다린다. 이후 조영무가 투항하자, 박위에게도 투항할 것을 권하나, 이를 거부하자 즉시 진격하여 남은 숙위병들을 제압하고 궁마저 점령해버린다.
이후 궁에 들어온 뒤 쇠약해진 몸으로 칼을 들고 직접 찾아온 아버지 이성계와 대치한다. 부왕과 대치한 상태에서 휘하 병사들을 통해 압박한 뒤 자신도 이제 아버지처럼 나를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이든지 할 것이라면서, 이성계에게 궁궐 밖으로 나서면 위험하게 될 것이니 밖에 나서지 말라고 섬뜩하게 경고한다.[56]
한편 이방과는 이방원의 거사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네가 미쳤냐며, 세자가 되고 싶으면 그냥 하면 되지 왜 자신을 끌어들이냐며 격하게 화를 내고 이방원을 때린다. 이후 이방원은 이방과에게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세자 자리를 맡아 달라고 말한다. 이에 네가 날 협박하냐며 원래 이런건지 아니면 변한 이유가 있는 건지를 묻지만 워낙 복합적인 이유로 폭발한 탓에 자신도 명확한 이유를 모르겠다며 말하지만 적어도 확실한 건 내가 아버지를 죽이는 패륜아가 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세자가 되었다가 자신에게 왕위를 넘겨달라고 단언해 이방과의 기를 꺾어버린다.
그뒤 도당의 중신들을 회유 및 겁박하여 이방석의 폐세자 상소를 관철시킨다. 이후 폐출되어 유배길을 떠나는 이방석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며 자신도 좋은 세자이자 훌륭한 군주가 될 의지와 자질이 있다고 호소하자, 그에게 "그 모든 걸(좋은 세자, 훌륭한 군주), 내가 하고 싶어서다. 내가 왕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57]라고 차게 대꾸한다. 이에 "겨우 스스로의 욕심 때문에 이런 짓을 한 형님은 결국 잔인한 폭군이 될 것입니다." 라고 악담하는 이방석을 등진다. 이후 이방석은 호송하던 군관이 뒤에서 내려친 칼에 맞고 절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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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자진출두한 남은의 호소를 묵살하고 참살했고, 이어 경순공주의 집으로 살수들을 보내 흥안군 이제까지 죽여버린다.[59]
앞서 경순공주가 이방원을 찾아와 남편을 살려달라 애원하자 "이제가 정도전의 수하로서 저지른 그간의 죄를 자백한다면 살려주겠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남은이 나타날 때까지 이제가 오지 않자 여유를 더 주지 않고 그냥 죽여버린다. 이방원은 죄를 자백하면 살려주겠다는 조건을 걸었지만, 언제까지란 말은 하지 않았고 어쨌든 시간도 있었으니 이제가 죽어도 이방원이 약속을 어긴게 아니다. 남은의 경우도 공은 공, 죄는 죄, 남은의 목숨으로 죄값은 치르어야 한다는 논리로 죽였다.[60] 방간과의 대담처럼 이방원이 '명분' 없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요소다. 무인정사를 정리한 그날,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장모가 저녁상을 차려주겠다며 같이 데리고 온 큰 아들과 만나게 된다. 큰 아들을 부둥켜 안고서 울음을 터트리며 정신적인 고통이 컸음을 보여준다. 아내 민씨는 문틈으로 이 모습을 보며 눈시울을 붉힌다.
이후 장인과 자기파 대신들이 합작해서 이방과를 세자 자리에 앉히는데 성공하고, 뒤늦게 입궐하여 조영무를 뒤에 거느리고 들어가다가 이성계와 마주친다. 이성계가 원하는대로 해줬으니 어린 동생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찰에 잠시 다녀오겠다고 하자 도성 내의 사찰에만 가라는 조건으로 허락해준다. 그러면서 이성계에게서 지난번에 너의 목을 베었어야 했다는 말을 듣자, 그러셨어야 했다며 말대꾸를 한다. 그럼에도 이성계는 물러서지 않고 널 낳은게 내 최대의 업보라는 말까지 한다.[61] 사찰로 떠나는 이성계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조영무에게 직접 따라가서 사찰의 승려 외에 외부인은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한다.
거사의 성공에 축배를 드는 측근들과 자리에 있지 않고, 큰 아들들을 업고 밖에서 서성이다가 아내 민씨가 아이는 자기에게 주고 들어와서 공신들과 만나보라고 조언하지만, 이방원은 "외가댁에서 자라서 아버지 등에 오래 업혀보지도 못했으니 좀만 있다 들어가겠다"며 끝까지 놓아주지 않으려 한다. 민씨는 독촉하려다가도 결국 수긍한다. 그리고 곧 자식들의 이름을 지어도 되겠다는 민씨에게 방원은 자신의 거취가 확정되면 그때 아들에게 왕자의 이름에 걸맞은 이름을 지을 생각이라며 보류한다.
형인 이방과가 세자가 되면서 순조롭게 그 자리를 이어받을 것으로 보였지만, 집에 있다가 이성계가 이방과에게 양위를 했으며[62] 이방과가 첩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을 궁궐로 불러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건 약속과 다르다며 서둘러 입궐한다. 아들과 함께 있던[63] 이방과를 정전에서 만나, 자신은 무슨 수를 써서든 용상에 앉을 것이며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며, 방과에게 포기하길 종용하지만, 방과는 가족의 화합을 위해 방원과 적대할 것을 감수하며 강하게 나온다.
끝내 형인 이방과가 왕위에 오르는 걸 막을 수는 없었고 결국 '우리는 정적이다'라며 이방과와의 절연을 선언하지만 내심 속으로는 괴로웠는지 심란함을 드러내는데, 그 와중에 방석이 죽기 전 자신을 미치광이, 폭군이 될 것이라 저주한 것을 떠올리며 두려워 한다. 그리고 그리 되지 않겠다며 되도록 평화롭게 빨리 일을 끝내고자 다짐한다. 정안공에 봉해진 이후 자기 세력을 주요 요직에다 앉히면서 형을 압박하고, 그나마 형이 모아둔 신하들마저도 누명을 씌우고 죄다 사헌부로 압송시켜 버리는 치밀한 행보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방과와 만나 이성계의 방식대로는 자기를 이길 수 없다며 왕위를 포기할 것을 종용하지만 거절당한다.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골머리를 썩고 있던 이방원에게 박포가 자신의 공신직이 2등에 그친 사실에 분노하여 삼군부에서 난동을 피웠다는 조영무의 보고가 들어오고, 이방원은 끌려온 박포와 대면한다. 박포가 공적 없는 자들을 1등 공신으로 세웠다며 자기가 흘린 피땀은 어찌 되는 것이냐며 분통을 터트리자, 그 피땀은 자기가 기억해둘 것이라며 끝까지 기다리지 못한 박포를 차갑게 꾸짖고 모든 관직과 작위를 삭탈한다.[64][65]
그러던 와중 민씨로부터 이방간이 삭탈관직을 당한 박포를 포섭해 자신을 치려하며 이방의가 이에 동조하려한다는 첩보를 듣자, 둘째 형에 이어 셋째, 넷째 형까지 죽여야 할지도 모르는 자신의 상황을 비관하는 듯한 자조섞인 웃음과 함께 무기력함에 빠진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밤을 새고 나서 결국 이방간을 치기 위해 군을 준비한다.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킬 때 이방석은 죽여야한다고 이미 계산해두었고 실제로도 냉정하게 죽였었는데, 결국 동복 형제들과 칼을 겨눠야 한다는 사실에는 상당히 괴로워하며, 말로만 죽일 수도 있다고 압박하지만 갈등 중에도 이방과와 이방간에게 각각 부탁이니 지금 선에서 멈춰달라는 모습이 나온다.[66] 하지만 결국 이방간이 도성 시가에서 길목을 막아서고 전투태세에 돌입하게 되고, 조카인 이맹종이 쏜 화살에 맞지는 않았지만 피하면서 말에서 낙마하게 된다. 이방원을 급히 보호한 조영무가 더 이상 설득은 무리라며 공격을 지시해줄 것을 요청하자 체념했는지 공격을 지시하면서 전투가 벌어진다.
도성내에서 난전이 벌어지는데, 이 사실을 모른 도성의 백성들은 두 군세의 싸움에 휘말려 큰 피해를 입는다. 전투가 끝나고 구속된 이방간에게 가고 있던 이방원은 참상을 마주하게 되며 무고한 백성들이 형제 싸움에 휘말려 죽어나간 모습에 크게 충격을 받는다. 이후 이방간에게 직접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보여주며 왜 그랬는지 따지는데, 이방간이 단지 왕위가 탐났을 뿐이라는 답을 내고 자신을 죽이라 윽박 지르자, 허탈해하며 결국 자신은 미치광이, 폭군이 될 운명이라며 자조한다. 그리고 칼을 들고 이방간 형 뿐만 아니라 아버지, 형까지 모두 베고 왕위에 오르겠다며 윽박지르고, 정작 이방간은 베지 않은 채 둘째 형이 있는 궁궐로 향한다.
이방과와의 독대 자리에서 이방간을 베기 전에 이방과부터 베겠다는 폭언에 가까운 말을 하는데, 이방과가 그럼 나부터 베라는 일갈을 하자 정말로 칼을 뽑아들고 베려고 한다.[67]
2.7. 마침내 용상을 앞에 두었으나, 균열이 생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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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과에게 일침을 듣고 정신을 차린 이방원은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며 이방과에게 은의를 느끼고, 그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일단 이방간은 형제이기 때문에 가족의 정으로 살려두되 박포를 주모자로 삼아 처형하는 것으로 일단락시키고, 모의만 하고 정작 반란에 참여하지 않은 방의는 책임을 묻지 않고 조용히 넘어간다. 이방과는 이방원을 왕세제로 임명하려고 했지만, 자신은 적장자만이 왕이 될 수 있다는 법도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이방과를 설득해 양자로 들어가 세자가 된다.[70] 비록 세자이긴 하지만, 이방과는 인수부(仁壽府)[71]를 꾸려 모든 권력을 이방원에게 넘긴 뒤 조준, 권근 등의 대신들에게도 이방원을 도우라고 명했기 때문에 이방원은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는 상태다.[72] 하지만 상왕이 된 이성계와 마주할 때, 네놈의 목숨을 끊는 것이 내가 내리는 벌이라며 고집을 부리는 이성계를 경멸한 채 자신을 도성 밖으로 내보내달라는 요구를 묵살하고 자리를 나온다.
그러면서 이방과에게 무조건 이성계가 궐 안에 있도록 연금시킬 것을 당부하는데 무인으로서의 자만심과 아집에 삼켜진 이성계는 훗날 군사를 일으켜 자신을 죽이고 조선을 혼란에 빠뜨릴 것이며 그런 성정을 아들인 자신이 누구보다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설명을 들은 이방과 역시 이성계를 잘 알기에 납득하여 이방원의 의견을 수렴한다.[73]
결국 이방과로부터 세자의 자리를 받으며 용상에 오르게 되는 꿈이 코앞까지 다가왔지만[74] 본인보다도 더 좋아하는 민씨 일족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여러모로 속이 복잡한 느낌을 가진다.[75] 밤이 되어 돌아가는 이화, 이숙번, 조영무 등이 사병을 줄줄이 거느리고 가는 모습을 보며 하륜이 절제사 아닌 사람 서러워서 살겠냐며 농을 던지자, 이방원은 그럼 대감도 절제사로 삼아주겠다고 제안하지만 하륜은 뒤에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건 원치 않는다며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고, 박은과 함께 둘이서만 호위없이 돌아간다. 그 모습을 보고 뭔가 생각하는 듯한 면모를 보인다.[76]
이방원은 대궐로 돌아가기 전에 장인과 처남들, 아내 앞에서 권력을 틀어쥔 뒤에 처음 처리할 일로 사병혁파를 꺼내드는데,[77] 민씨 일가를 신뢰하기에 공론화 하기 전에 다른 누구보다 먼저 이 안건을 이들에게 드러내고 협력을 요청한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사병혁파를 반대하는, 심지어 다른 가문의 사병은 없애더라도 민씨 일가의 사병은 남겨야 한다는 이들의 강한 반발에 당황한다.
그 자리는 아내 민씨의 중재로 어찌 넘어가지만, 서둘러야 한다는 판단과 자신이 옳다는 자신감이 있는 이방원은 독단적으로 이를 공론화하려 한다. 그러나 이를 들은 아내는 민씨 가문과의 상의를 강력히 주장하며 이방원의 의사에 반대, 심지어 이방원이 왕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우자 자신이 이방원을 왕으로 만들었다, 그러니 조선의 반은 나의 것이라는 위험한 주장을 하기까지 이른다. 사랑하는 아내이자 오랜 정치적 동반자인 그녀의 이런 모습에 이방원은 혼란스러워 하며, 부부의 비극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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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아버지가 정종의 도움을 받아 궁궐을 빠져나갔다는 소식을 조영무한테서 보고를 받게 되고, 조영무를 보내 급히 추격하게 한다. 정종을 찾아가서 '어쩌자고 그러셨냐'며 항의한다. 정종이 더 이상의 불효는 저지를 수 없다며 전하께서는 단지 사찰에 가신 거지 군사를 모으러 가신 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이방원은 그걸 믿으시냐고 어이없어 한다. 그러나 방과가 '자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국왕으로서 행한 일이니 그만 따르라고' 하면서 힘 없는 아버지를 감시하지 말고 정사를 돌보라고 충고해주자 어쩔 수 없이 수긍한다. 그리고 정종이 자신에게 양위를 하겠다고 말하자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고, '가문의 피눈물로 세워진 나라다'라며 잘 이끌어가라고 하자 알겠다고 한다.
공신들을 모아놓고 사병혁파를 하겠다고 선포한다. 하지만 이거이와 처남들을 중심으로 반대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이후 하륜이 '정도전도 사병혁파를 추진하다 죽어버린 것'이 아니냐고 하자 '그래서 악순환을 끊겠다고' 말한다. 하륜이 그럼 민제를 설득하라고 하자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사이 민제가 먼저 나서서 자신의 뜻을 따르겠다 해주면서 다른 대신들을 설득하였고 일단 수월하게 추진할 수 있었다. 결국 이거이를 제외한 대다수의 대신들이 모두 따라주면서 사병을 혁파할 수 있었다.
아버지를 추격했다 뒤늦게 돌아온 조영무가 사병혁파에 반발하면서 병장기를 수거하는 군관들을 마구 폭행했다는 보고를 받게 되고, 이에 조영무의 자택에 직접 찾아가서 병장기를 수레에 실고서 직접 반납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고 하자 결국 조영무마저도 따르게 되었다. 그래도 항명의 죄는 물어서 파직 시킨 뒤 황주로 귀양을 보냈다.
이 일련의 사건때문에 골머리를 썩히는 이방원을 보고 하륜은 이방원이 지금 누리는 책임, 고통은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참고 건뎌야 한다는 취지의 조언을 하는데, 하륜이 뒤늦게 주제를 넘은 것 같다며 사죄하자, 아주 주제 넘으셨다고 능청스럽게 대꾸를 하고 그냥 내보낸다. 안 그래도 권력을 같이 가져야 한다는 아내의 발언 때문에 혼란스러운 이방원의 속을 긁어준 셈이 되었으니 이런 반응도 이상치 않다.[79]
즉위하기 전, 민씨가 다시 찾아와 자택으로 돌아오라며 화해의사를 표하지만, 이방원은 요지부동. 그러나 민씨가 자식들을 자택으로 데려왔음을 알리자 이방원은 반응을 보이며, 결국 자택으로 돌아온다. 자식들의 자는 얼굴을 보고 감회에 젖은 이방원은 아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어야 겠다는 의사를 표하고, 민씨에게 즉위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 부부가 오랜만에 기쁨을 공유한다. 그리고 자신이 죄를 저질렀으며 이 죄를 씻기 위해선 자신이 성군이 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음을 알리며,[80] 그러기 위해서 민씨가 자신의 동반자가 아닌 자신의 신하가 되어야 한다며, 정치에서 한 발 물러나 달라는 마지막 부탁을 한다. 민씨가 이를 거부하면 어찌되냐 되묻자 그러면 궁궐로 들어갈 수 없다는 답을 내놓는다. 그러나 민씨는 '차라리 역적이 되겠습니다'라며 거절을 하고 부부의 결속은 완전히 박살나고 만다.
2.8. 태종의 등극, 홀로 서는 군왕이 되기까지
이방원의 말대로 민씨는 즉위식에서 열외된다, 결국 이방원 혼자서 쓸쓸하게 즉위식을 치르면서 드디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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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400년 11월 13일, 이방원은 드디어 왕좌에 올랐다. 그가 바로 조선의 3대 국왕인 태종이다. 그리고 민씨는 그 날부터 이방원의 정적이 되었다." - 드디어 용상에 오르는 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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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식에서 이방원은 자신이 죄인이라며 살기 위한 몸부림이였다고 하나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고 자책하며, 그 죄를 씻기 위해서는 군왕은 군왕답게, 신하는 신하다움으로서 백성이 편안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천명하며, 조선을 천년대계로 이끌어가는 데 방해되는 자, 군왕의 권능을 침해하는 자들은 공신일지라도 엄히 다스릴 것이라는 선언을 통해 사실상 민씨 가문에 자중하라는 경고를 내리며 국왕으로서의 처신을 시작한다.
즉위식이 끝나고 신하들보고 먼저 나가도 좋다는 말을 남기는데, 신하들은 예법에 어긋나는 행위라 당황하다가 이방원이 허락한다고 하니 마지못해 나간다. 역사 또는 사극을 잘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가 조선 왕조를 다루는 사극에서 자주 나오는 왕이 뭐라 그러니까 대소신료에 세자까지 다 뛰쳐나와 무릎꿇고 "통촉하여 주시옵소서!'거리는 구도와 유사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이방원이 원했던 신하들의 행동은 자기가 나갈 때까지 그 자리에서 버티는 것임 역시 알 수 있으며, 이방원이 지금은 이러지만, 앞으로는 이렇도록 만들겠다며 왕권강화의 명확한 기준을 세운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81]
상왕이 된 이방과에겐, 태상왕인 아버지가 실패한 이유가 후처 강씨의 사사로운 정과 공에 휘둘려 국왕으로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자신은 아버지처럼 실패하지 않고 잘 하고 싶다, 그래야 용서받을 수 있다며 자신의 길을 천명한다. 그리고 침소에서 주역의 글귀[82]를 적으면서 '붕망(朋亡)'[83]이라는 단어를 되새긴다.
아내인 민씨가 자신의 허락도 없이 자식들을 내세워 입궁한 뒤, 끝까지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자, 자식들을 싸움에 이용하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도리어 담쟁이 덩굴이 돼서라도 버티겠다는 민씨의 선언에, 그것이 곧 오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란 경고를 남기고, 다음날 권근을 시켜 민씨를 왕비에 책봉하게 한다.[84]
그러나 민씨를 왕비에 책봉하자마자 미친듯이 궁녀를 침소에 들이고, 심지어 민씨가 사가에서 들인 여종마저[85] 침소에 들여버리며 민씨의 전의를 완전히 꺾어버리려 한다. 드라마상에서 이방원의 여성편력을 단순히 호색으로 묘사하기 보다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민씨를 견제하기 위한것도 있음으로 묘사한다.[86] 그러나 아무리 중전과 외척을 견제한다는 목적을 위해서라지만 부부간의 신의를 완전히 저버리는 원체 더러운 짓이다보니 스스로도 나름대로 죄책감을 느꼈는지, 하륜과의 대화에서 옛날 이성계가 이 길은 결코 아름다운 길이 아니라고 말한 것을 떠올리며 아버지보다 더 나은 왕이 되려 했는데 자신이 가는 길도 아버지와 다를바 없이 추하기 짝이 없다며 자괴감을 호소한다.
결국 원경왕후와 민씨 가문에 대한 견제로 원경왕후의 형제들인 민무구와 민무질이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폭발한다. 급기야 노골적으로 본인의 딸을 냉대하는 이방원의 모습에 그동안 숙이고 있던 장인어른 민제마저 분노해[87], 자신의 제자 전가식의 도움을 받아 유생들이 왕이 색을 탐하느라 국정을 돌보지 않는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게 한다. 이방원은 하륜을 통해 박은을 시켜 진상을 조사해 국문하도록 명을 내리는 한편 이숙번에게 조영무를 데려올 것을 명한다. 결국 국문을 통해 배후가 민제임을 알게 된 태종은 자신이 침소에 들인 여종이 밤새 비를 맞으며 방치된 끝에 죽을 뻔한 일까지 겹쳐 폭발하고, 민제를 사헌부로 압송하는 동시에 중궁전의 모든 궁녀와 시녀들을 쫓아내라고 지시한다. 또한 하륜에게 가례색[88]을 설치하고 제조[89]를 맡으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새 왕비를 뽑겠다고 선언한다.[90]
중궁전의 궁녀들을 모두 거둬들이고 또한 민제를 사헌부로 압송시키면서 더더욱 중전을 압박해 나간다. 또한 아이들까지 중전과 못 만나게 하는 강수까지 둔다. 한편 조영무를 사면시키면서 다시 조정에 복귀시킨다. 결국 민제가 백기를 들고 정계 은퇴 밎 은둔할 의사를 표하자, 민씨 가문에 대한 모든 견제 행위를 푼다. 그러나 가례색 등 중전에 대한 대응은 그대로 둔다.
중전에 대한 태도에 대해 형인 이방과가 더이상 그만해달라며 설득해도 요지부동인 방원이었지만, 방과가 신덕왕후 때문에 신의왕후 소생 형제들이 겪은 고통을 인지시키며, 자신의 아이들에게 그 고통을 안겨주고 싶냐며 설득하자 방원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한편 양녕이 두 동생을 데리고 무단으로 중전에게 가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결국 중전 눈앞에서 궁인들 손에 세 아들이 끌려가는 일이 벌어지고, 이 때문에 중전은 멘붕, 방원이 밤중에 중궁전에 가보니 난을 그리며 울고 있었다. 그녀의 눈물을 본 방원은 결국 중전과 휴전하기로 합의, 중전에 대한 강수를 일단 거둬들이게 되면서 가례색을 파한다.
그러다 조영무한테서 숙부인 이지란의 부고 소식을 보고받게 되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다가 조영무가 더 심각한 사안이 있다며 동북면에서 조사의가 반란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포착되었다는 보고를 하자, 동북면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조사의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고, 태상왕을 의심, 조속히 태상왕의 신변을 확인하라는 명을 내린다.
반란이 일어난 이와중에 태상왕이 사찰에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결국 태상왕이 배후라는 확신이 서게 된다. 그래도 태상왕이 배후인 사실이 퍼지지 않도록 입단속을 시킨다. 대신들과 대책을 논의하면서 어떻게든 관군이 진압해주기를 바랬지만 계속 연전연패를 당한다는 소식을 보고 받고서 낙담에 빠진다. 뒤늦게 한양으로 달려온 이화상으로부터 동북면을 중심으로 반란군의 수가 불어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화상은 자신도 전하를 위해 싸우겠다며 나섰지만, 그의 아버지이자 방원의 숙부인 이지란은 평생 태상왕의 신하였다면서 그의 명복을 빌어주라고 하면서 그를 빠지게 한다.[91]
선발로 이천우를 보냈으나 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결국 무너진 군기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친정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나서기 전, 세 아들들을 모아놓고서 아들들의 이름과 군호를 지어주면서 그 뜻을 알려준다.[92] 다만 첫째인 제한테만 군호를 내려주지 않았는데,[93] 이에 제가 이유를 묻자 원자는 군호가 필요가 없다고 설명해주었고 이에 제가 동생들을 보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반면 막내인 도는 뭔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훗날 후계자 문제에 관한 복선을 남긴다.
중전과 인사를 나누지도 않고 출정에 나서고, 평안도에 휘하 장수 이거이를 놓고서 군영을 꾸려놓고 전투태세에 나선다. 이거이에게 병력을 내줘서 반란군을 공격하도록 지시하였지만, 반란군의 일부가 미리 빠져나와서 숨어서 이거이의 군대가 지나가는 걸 지켜보고선 빈집이 된 군영에 기습공격을 감행해온다. 공격 소식을 듣고서 남은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친히 선봉에 나서서 반란군과 전투에 나서지만 결국 부상을 입었고 설상가상으로 포위를 당하게 된다.[94][95][96] 다행히 때마침 남도의 군사들을 이끌고 온 이숙번과 박은의 활약 덕분에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서 모두 제압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제압한 반군 지휘관에게 태상왕은 어디 계시냐며 캐묻고는, 군사들을 이끌고 태상왕이 있는 반군 본영에 기습을 감행하였고 이성계가 머무르고 있는 막사에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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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자신이 동북면의 왕이었던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다는 어린 시절의 소망과 이게 자신이 왕이 되고 싶은 야심이었음을 실토하는데, 아버지는 그 야심을 꿰뚫어 보고서도 차마 자식을 칠 수 없어서 아무 짓도 못하고 단지 포기하길 기다렸을 뿐이라며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 면모를 보인다. 꼭 지금 왕이 되고 싶은 욕망이 싹트고 있는 충녕을 겨냥한 듯한 말이기도 한데, 결국 태종도 태조가 거쳐갔던 그 심정을 그대로 따라갈 것이란 복선일 수도 있다.
그후 조영무가 반역자들에 대한 보고[97]와 동시에 이거이가 출전전 자신에게 이야기한 바를 듣고 공신들과 술자리를 가지는데 패장이니 죽여달라는 이천우에게 패하지 않는 장수는 없다며 위로하고[98] 같이 즐기나 싶었는데, 바로 술병을 세게 내려놓고 이거이에게 그 일을 추궁하며 물러가게 한 후[99] 대신들에게 공신의 자리는 명예와 자부심이지 오만과 특권이 아니라고 엄포를 놓으라는 동시에 권력에 미련을 놓으라며 민제에게 술을 따른다.
그 후 이거이와 그 아들들을 처벌한 뒤, 정몽주를 복권시키고 추증할 것을 명한다. 그때 명나라에서 혼인을 추진한다는 보에 원경왕후와 의논해 공주들을 미리 결혼시키기로 하고 중궁전에서 함께 밤을 보내며 관계를 일시적으로 회복한다.
원자인 제가 글공부를 소홀히 하는 걸 보고선 처음에는 혼을 냈지만 그래도 나중에는 잘 다독여주면서 '왕이 되면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한다'는 조언도 해주었다. 그러면서 대신들에게 원자의 교육을 철저히 시키기 위해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고 서연관을 배치한다.
아침에 이성계를 방문해 고통스럽다며 찾아오지 말라는 이성계에게 자신도 고통이며 그것이 자신이 받는 벌이며 오래 살면서 벌을 내려달라고 한다. 그후 이화상에게 청해군처럼 노루 한마리 잡아오라 하고 공신이니 벼슬을 내린다고 하더니 이화상이 계속 거부하자 어명이니 따르라한다.
그리고 처가에서 자기 눈치 보느라 힘들었을 것 이라며 세자와 함께 찾아가려고 하나 황희에게 왕의 씨가 버려져 여흥 부원군의 집에 머문다는 소문에 분노해 진상을 밝히게 하고 사실을 알게되어 아이와 어머니를 가마를 보내 궁궐로 들어오게 한다.
그후 원경왕후를 추궁하고 처가방문을 취소한다. 그후 단독으로 하륜을 불러 민씨 가문을 그대로 놔두면 안 되겠다고 말하며 준비하라는 명과 함께 본격적으로 민씨 가문에 대한 숙청을 예고한다. 민씨 가문을 쳐내기 위한 포석으로 그들의 죄상이 낱낱이 드러나게 하라는 지시를 하륜에게 내린다.
한편 세자가 또 글공부를 소홀히 하고 동생들을 만나러 나가는 것을 보고 얼마나 열심히 외웠길래 쉬려고 나가려 했는지 보겠다며 맹자를 외워볼 것을 명하고, 세자가 제대로 외우지 못하자 분노하여 그에게 쉬는 시간을 준 서연관 관리를 보며 "이런 간신들을 가려내기 위해서라도 글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다"고 단언한후 황희를 시켜 그 자리에서 서연관의 관직을 박탈하고, 세자가 나가는 것을 막지 못한 내관은 태 30대를 쳐버린다. 이제는 열심히 하겠다고 고하는 세자에게, 이미 그럴 사람이었으면 열심히 했을 것이라며 세자에게 학문 증진의 필요성을 스스로 깨닫게 해야겠다는 명목으로 양위 파동을 일으킨다.
국새를 세자궁에 두고 왔다는 지신사 황희가, 지신사의 사명을 마음에 새겼다며 방원에게 양위가 진심이냐는 어심을 묻게 되고, 방원은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믿을 수 있겠냐고 확인 질문을 한 뒤, 황희에게는 그 진심을 알려준다.
결국 세자가 직접 국새를 들고 찾아오자, 세자에게 이제 글공부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미안하다고 한 뒤 양위를 거두고, 그 가운데 본심을 들킨 민무구와 민무질을 사헌부 국문 결과에 따라 유배를 보낸다. 민무구와 민무질을 쳐낸 뒤, 상왕 정종에게는 어쩔 수 없었으며[100], 세자는 이런 일을 겪지 않게 하도록 자신이 총대를 맸다는 취지로, 중전 민씨에게는 자신은 그럭저럭 넘기려 했는데 대간들 때문이라고 둘러댄다.
26회에서 연출된 양위 파동을 1회의 양위와 비교하면 정말 재미있는데, 먼저 1회의 신하들은 늦은 밤에 폭우가 쏟아지는데 바깥에서 필사적으로 양위를 거두어 달라고 간청을 한다. 세자가 된 충녕은 꼭 괴물을 상대하는 듯이 내내 공포로 떨며, 그 누구도 양위를 진심으로 보지 않는다. 반면 26회에서는 밤이 늦어 임금이 주무실 시간이 되었으니 퇴청하라는 명을 내리자, 신하들이 "전하께서 주무신다니, 내일 와서 다시 간하자"며 무슨 퇴근하는 직장인 마냥 일어서서 여유롭게 나간다. 신하들의 표정도 밝고 심지어 민무구, 민무질처럼 양위를 정말이라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세자는 이게 쇼라는 사실을 전혀 인지 못한다. 태종의 온갖 왕권 강화책이 조선 조정의 분위기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요소라 할 수 있겠다.
더불어 26회는 방원이 딱히 양위할 생각이 없으면서 양위에 동조하는 무리를 잡아 족칠 생각으로 수작을 부린 것이다. 그런데 1회는 진심으로 양위하고 싶은데, 이방원이 또 숙청을 위한 밑밥을 깐다고 생각한 신하들에 세자까지 나서서 안된다고 막아서고 용상에서 나갈 수 없게 된 이방원이 고통으로 미쳐 날뛰는 구도다. 꼭 26회에서 태종이 저지른 업보가 고대로 1회로 이어진 듯한 느낌이다. [101]
2.9. 아버지를 고통받게 한 자, 아들에게 고통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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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102] 세 아들들이 모두 성인으로 자랐고, 본인도 수염이 많이 나는 등 나이를 먹은 모습이 보였다. 아침 문후를 온 세자와 왕자들을 맞은 뒤, 세자에게 자기 전에 글공부는 했냐고 물었고 세자가 했다고 하자 그럼 내용을 말해보라고 시켰다. 그러자 세자가 외우지 않고 마음에 새겼다고 말하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 직감한다. "외우진 않았지만 가슴에 새겼으니 필요할 때마다 꺼낼 수 있다."는 궤변에 어이가 없어하며 "그런 공부법이 어딨냐. 나도 충녕도 그렇게 공부하진 않았다."라면서 충녕과 비교하며 세자를 꾸짖고[103], "충녕과 비교하지 말라, 자신의 길을 가겠다"고 항변하는 세자에게 "네가 이 아비의 명을 거역하겠다는 말이냐"고 묻고, 이에 세자로부터 자신을 인정해달라면서 계속 반항한다.
세자의 반항에, 그가 공부한 것을 가슴에 얼마나 잘 새겼는지 확인해보겠다며 충녕과 함께 따라오라고 한다. 논어의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를 세자에게 먼저 묻고, 세자가 뜻을 말하자 그 뜻을 어떻게 새겼는지 물었다. 그러자 세자는 글공부에 대해 지금은 괴로워도 참고 견디자라는 식으로 말하고, 태종은 이에 한숨을 내쉬고 충녕에게 물었다. 충녕이 국왕으로서의 자세로 해석하자, 왜 국왕으로서 해석했느냐라고 물었고 충녕이 대답을 하자 마음에 드는듯한 눈빛을 지은다. 이어서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104]를 묻는데, 세자는 이번에는 아예 모르는 주제에 충녕이 더 잘 알게 뻔해서 대답할 필요가 없다며 거짓말을 늘어놓았고, 마침내는 반항하는 말투로 그만하시라고 대답하자 격노한다. 충녕 7살때보다도 못하다며 아무리 타일러도 제자리걸음인 것을 어찌하느냐고 꾸짖고 세자가 보는 앞에서 서연관들과 경승부의 관리들을 모두 파직시키고, 세자궁의 모든 내관들에게 장 20대를 가하고 궁궐 밖으로 내보내라고 명을 내린다.
이후 신하들이 민무구와 민무질을 죽여달라는 상소를 올리자, 두 죄인의 죄가 무겁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서도 공신이자 처남이기 때문에 장인과 장모를 생각해서 죽일 수 없다고 말한다.
세자 양녕이 몰래 밖에 나갔다는 사실을 알자, 세자궁에서 세자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세자가 오자 어디서 뭘 하고 왔냐고 추궁했고 술을 마시고 왔다는 대답을 듣는다. 글공부는 어찌하고 밤새 술을 먹고 왔느냐고 물었고, 쉬고 내일부터는 밤새 열심히 하겠다고 하자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그걸 믿으라는 거냐고 말한다. 그러자 자신은 근자에 열심히 하고 있다는 대답을 듣지만, 진정 열심히 했다면 결실이 있을 것이라며 너는 아무런 결실도 내보이지 못했으면서 열심히 했느냐며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세자가 그리 사람을 못 믿으면서 어찌 이 나라를 이끄시냐며 외숙부들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귀양을 보내셨다며 반항하자, 네가 죄인들을 두둔하는 것이냐며 국왕의 판결을 조롱하는 거냐고 화를 내며 세자의 턱을 잡고 한 번 더 죄인들을 입에 올리면 용서치 않을 것이고 너는 아직 나의 신하이니 다시는 국왕을 능멸하지 말라는 경고를 한다. 밖을 나온 뒤, 박 내관을 시켜 숙위병들로 하여금 세자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도록 지시한다.
유정현에게서 이성계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갔고, 어의가 이성계의 상태는 병이 아니라 이제 천수를 다해가는 것 같다고 고하자 충격을 받는다. 외출금지를 당한 세자가 민씨한테서 들은 조언을 제멋대로 해석해서 식음을 전폐하자 세자에게 어서 밥을 먹으라고 고함치고, 세자가 끝까지 말을 듣지 않자 분에 못이겨 밥상을 통째로 뒤엎어 버리지만 세자는 오히려 내관들도 다 내쫓았으니 자신에게 직접 벌을 내리라며 더욱 반항한다. 그래도 부모인지라 자식이 곡기를 끊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어 결국 황희를 시켜서 세자궁을 감시하던 숙위병들을 해산하고 쫓아냈던 내관들까지 다시 세자에게 돌려주면서 자식과의 기싸움에서 완전히 지고 만다. 황희가 명을 이행하러 나가자 혼잣말로 '내가 이놈을 꺾지 못하는구나'라고 한탄하며 혼자 술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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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생일 잔치를 대신들과 벌이는 와중에 태상왕인 아버지가 찾아왔다는 말에 황급히 아버지를 맞이한다. 아버지로부터 술잔을 받으면서 "막중한 국왕의 책무를 다해달라"는 말을 듣고, "잘 하면 된다"는 격려와 함께 아버지가 자신의 손을 잡아줌으로써 드디어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용서받고 국왕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에 기뻐하며, 아버지의 뒤안길을 보고 눈물과 함께 환희의 미소를 짓는다.[107] 후에 태상왕이 승하한 뒤, 형이자 상왕인 이방과가 위패에 절을 하며 아바마마라고 말하며 슬피 우는 걸 지켜보고서 자신도 혼잣말로 아버지라고 말하며 슬퍼한다.
장례를 치른 이후 상심하여 괴로워하다가,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세자에게 "네가 여길 왜 왔느냐? 아비를 거역하고, 아비를 능멸하고, 아비를 짓밟은 놈이! 아비의 사랑을 이용하여 아버지를 무릎 꿇린 불효자식이! 군왕의 가슴에 비수를 꽂은 역적 놈이!"라고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분노를 터뜨리다가 결국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세자를 끌어안고 통곡한다.[108]
상을 치른 뒤, 이방과가 바람도 쐬면서 자신과 세자를 화해시키기 위해 같이 불러내자 어느 정도 화가 누그러졌는지 세자에게 주변 경치를 보여주며 '장차 네가 다스릴 나라다'라며 동기부여를 해주었고, 세자가 달라지겠다고 하자 믿겠다며 다시 기회를 준다.
그 사이 장인인 민제가 죽고, 편전에서 신하들이 민무구와 민무질을 처형하라는 상소를 다시 올리자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때 세자가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싶다며 편전에 들어와서 신하들의 의견에 따라 죄인들을 극형에 처하라고 말하자 결국 두 죄인들에게 자결을 명한다.
태종은 이때도 처남들을 안 죽였을 가능성이 꽤 높았는데, 이방원은 자신이 한 번의 기회는 주는 사람이란 언급을 여러번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처남들은 이번이 첫 귀양이니 아직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초반에 장인과 장모를 명분삼아 처형하라는 요청을 거절했는데, 이때 장인 민제는 죽었지만 장모 송씨는 살아있으니 아직은 더 살려둘 명분이 남아 있었다. 문제는 세자가 편전에서 의견을 표한건 엄연히 정치적인 의사 행위기 때문에 이걸 무르면 세자의 권위에 타격이 오고, 처남들은 엄연히 죄인의 신분이니 더욱 거부할 명분이 없다. 결국 처남들을 원치 않게 죽이는 상황이 벌어진 것인데, 1회에서 태종이 처남들을 죽인 것에 죄책감을 표하는 이유가 드러난 셈이다.
이방원은 세자에게 네 말이 진심이라면 밖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절규를 견뎌내라며[109] 용상에 앉을 수 있다고 말한 뒤, 편전 밖에서 들려오는 중전의 원망섞인 절규를 애써 외면한다.[110] 그리고 충녕이 자신에게 '국왕이 정도를 걷는다면 외척의 발호를 막을 수 있다. 외숙부들의 사사는 과했다'는 진언으로 본인의 존재감을 어필하자, "네가 똑똑하다고 하여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고 여기지 말라"라면서 "정사에 관심을 두는 건 세자의 몫이니 너는 어머니나 잘 돌보라"는 경고 비슷한 말을 한다.[111]
민무구와 민무질을 사사하자마자 바로 민무휼과 민무회를 고위 관직에 앉히면서 나머지 처남들도 날려버릴 포석을 깔아놓은 뒤, 하륜의 비리에 관한 투서가 사헌부에 날아들고 이숙번이 안하무인격으로 조정의 위계를 무시하는 등 공신들의 기강이 해이해지자 이를 바로잡기 위해 다시 양위 파동을 벌였다.
양위 파동 사태가 지나간 이후 세자에게 "신하 열 중 하나는 충신이고 하나는 역신이다. 나머지는 군왕이 하는 것에 따라 충신도 되고 역신도 된다."라는 조언도 하고,[112] 군사 훈련도 같이 참관하며 사병 혁파의 의의도 알려주는 등 그를 잘 가르쳐보려고 하지만 세자는 때마침 맞이한 대비의 상중에 기생을 끼고 술판을 벌이는 사고를 치는 것으로 이를 되돌려주어 분노케 한다.
대비의 상중에 자신을 찾아온 아들들에게 두 처남을 사사한 것을 계기로 병상에 누운 민씨의 상태를 묻는 등 민씨를 향한 죄책감이 있음을 은연 중에 드러내는 가운데[113] 세자의 비행에 대해 알게 되자 그를 불러 "정신차린 줄 알았더니 나를 기만했다.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태평하냐, 너는 뭘 어찌하든 보위에 오를 수 있을거라 생각해서 그런거냐, 너밖에 없다 생각해서 그런거냐"며 실망을 표하면서, "내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이 아비에겐 지금 당장 국왕이 되어도 손색이 없는 아들 한 명이 더 있다" 라는 엄포를 놓는다.[114]
자신의 경고에 위기 의식을 느낀 세자 이제가 대학연의를 완독했다는 시강원의 보고를 받고 기뻤는지[115] 대신들과 같이 책거리 자리를 마련해 술잔을 벌여놓고 축하를 한다. 여기에 효령과 충녕도
이후 조영무를 남겨놓고 밤늦게 까지 같이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눴고, 조영무의 사직 의사를 재확인했는데 그럼에도 조영무가 뜻을 굽힐 생각이 없다는 걸 알고 결국 조영무를 보내준다.[116][117]
한편 효순궁주가 민씨 집안이 자신에게 했던 악행을 폭로하자 대신들을 시켜 민무휼과 민무회를 잡아들이고 압슬을 가하는 고문을 통해 어떻게든 죄를 자백받도록 하게 한다. 중전이 자신에게 달려와 엎드려 통곡하며 일전에 조선의 반은 자기 것이라고 했던 발언과 동등한 위치에 설 것을 요구했던 발언들까지 모두 사죄하며 동생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음에도, '자신은 가문을 넘어선 국가의 국왕이며, 지금 국문을 당하고 있는 자들은 중전의 아우가 아닌 이름 없는 불행한 외척일 뿐'이라며 매몰차게 거절한다. 민씨가 다리까지 붙잡으며 끝까지 빌지만, 자신은 사람이길 이미 포기했으니 피도 눈물도 잊어버린지 오래되었다고 하며 편전 바닥을 기어가면서 울부짖는 중전을 외면하고 나가버린다.[118]
충녕도 찾아와 외숙부들을 살려달라고 하자 조금 망설이나 세자가 충녕의 말을 가로채고 민무회가 자신에게 했던 그동안의 불충한 언사를 대신 말해주자 결국 민무휼, 민무회를 유배 보낸다. 그러면서 유배지에서 자진함으로써 죄를 씻겠다면 허락하라며 사실상의 자결을 종용하는 명을 내린다.
한편 유정현으로부터 세자가 어리라는 곽선의 첩을 빼앗았다는 것과 형 이방과가 총애하던 기생 초궁장마저 탐했다는 사실을 보고받고서 극대노하여 상소들을 뒤엎었으며[119]세자를 당장 궁에서 내쫓으라고 명을 내린다.
2.10. 충녕을 후계자로 선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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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녕이 왕좌에 대한 뜻을 밝히며
사실 태종의 이런 태도는 말도 안되게 충녕을 돕는건데 세자 자리가 공석인 상태에서 충녕대군이 왕이 되고 싶다하는 것도 아니고 형이 15년 가까이 떠억하게 세자로 버티고 있는데 유교적 정통성이나 대의가 없이 그냥 똑똑하고 성실한 셋째 왕자님이 갑자기 왕이 되겠다하면 '응 그래 너가 똑똑하니까 형을 폐하고 너한테 왕위를 계승하겠다' 하는 왕은 세상에 없다고 보는게 맞다. 양녕이 이미 구제불능 수준은 개망나니라 가능한거지, 온전히 정신 멀쩡한 성실한 세자가 있는데 왕을 하고 싶다고 했다가는 아버지고 형이고 뭐고 목이 떨어지는게 왕족의 운명이다. 당장 아버지인 태종도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을 대놓고 말 한것도 아니고 그냥 태조가 느낌이 쎄해서 '저놈이 왕 자리를 노린다' 하고 목을 날리려고 한게 한두번도 아닌데, 충녕대군이 15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세자를 폐하고 자신이 세자가 되어 왕이 되겠다 하는 태도 자체만으로도 역적으로 3족이 멸문되는데 부족함이 없다. 조선시대 세자 목숨이 파리 목숨이고 가장 스트레스 받는 직업 중에 하나라는 말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가 자신의 아버지인 왕일 때의 이야기이다. 아버지인 왕 앞에서나 동네북이지, 강상죄나 기군망상죄는 세자에게 저질러도 목이 날아갈 죄일 정도로 차기후계자로서 세자의 권위는 확실했다. 애초에 칼을 거꾸로 들지 않으면 세자를 폐하고 자신이 세자가 되겠다 하는건 불가능한 일이다. 즉 태종이 이미 충녕에게 이렇게 말하고 세자 자리를 차지해보라는 것 자체가 충녕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기로 마음을 먹었고, 책에서 보는 공부말고 현실 정치와 군사 신하들을 경험하며 공부하라고 배려해준 것이다. 애시당초 양녕의 경우 학문이 너무 미흡하여 대전에서 신하들과 대화조차 안될 정도로 우매하고, 충녕 수준의 학식 정도면 대화가 가능할 거라고 알고 신하들과의 술자리나 장군들과의 만남도 허락해주고 주선해준 것이라 해석하면 될 듯하다.
한편 사가에 쫓겨난 세자가 반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황희에게 세자가 진짜 반성하고 있는 것 같냐고 묻고 세자의 스승 역할을 하기도 했던 황희[124]가 확신한다고 단언하자 황희에게 그 발언에 책임지라고 한 뒤 이를 믿고 세자를 복귀시킨다.[125] 돌아온 세자가 앞으로는 달라지겠다 해도 "그런 말은 많이 들었다."라고 대답하며 냉랭하게 응수하여 더 이상 기대도 안함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었다.
하지만 입궁한 세자가 충녕이 대신들에게 주연(酒宴)을 베푼다는 것을 듣고, 일전에 종친에게 분경(奔競)[126]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냐고 지적하자, 그건 종친에게 관원들이 인사 청탁을 일삼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으며, 충녕은 절대 그럴 인물이 아니라고 답하며 옹호한다. 그러자 세자가 충녕에게 기회를 준 것처럼 자신도 대신들과 정사를 논할 기회를 달라고 하자, 이는 들어준다.
한편, 하륜이 간관들의 탄핵 상소를 이유로 사직을 청하자, 자신이 거듭 지켜주겠다며 하륜의 사직을 반려하려 하지만, 이미 여러 번 용서를 받았고, 자신은 끝내 물욕을 이기지 못했다면서 끝끝내 사직을 청하고 물러가는 모습을 본다. 얼마 뒤, 하륜과는 반대로 이숙번이 대신들의 연명을 받아온 상소를 들이밀며 사헌부 간관들을 처벌해달라고 청하자, 이미 이숙번의 패악질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대신들의 서명이 자발적인 것이 맞냐고 묻는다. 그렇다는 이숙번의 대답에, 군왕에게 거짓을 고하는 건 불충이라면서 다시 한 번 묻는다.[127] 그렇다고 하며 이숙번이 끝까지 자신을 속이자, 상소에 어보를 찍지 않고 일단 물러가라고 한 뒤, 돌아가려던 이숙번을 불러 세워 매우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이별하는 자리에서 조영무에게 "영무 아재"라고 했듯이 "숙번이"라고 이름을 부르며 "그 동안 고생 많았다"라면서 노고를 치하한다.[128] 그리고 유정현에게 교지를 내려 이숙번을 파직하고 유배하라 명하여 이숙번을 쳐낸다.[129]
얼마 뒤 세자의 요청에 따라 그에게도 기회를 주어 정사를 논하게 한다. 그러나 세자가 대신들과의 대담에서 비교적 간단한 문제[130]조차 우유부단하게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한숨을 짓는다.[131] 편전에서 세자와 독대하면서 그렇기에 학문이 필요한 것이라는 충고와 그래도 수고했다는 격려와 함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내일 다시 편전으로 나오라고 한다.
아들이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음에도 나름대로 애를 쓰려는 모습이 기특했는지, 세자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술과 음식을 들고 충녕대군과 함께 동궁전으로 향한다. 자신이 가면 형님이 달가워 하지 않을 것이라는 충녕의 말에 '그럴수록 더 마주해야 한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고, 결국 형제라는 사실도 잊게 된다.' 라고 충고하고 함께 동궁전에 도착했으나, 태종에 눈에 들어온 것은 또 다시 어리를 대궐에 데려온 것을 중전에게 들켜 혼나고 있는 세자의 모습이었고, 완전히 실망하여 이젠 화도 안 난다는 듯 한 허탈한 표정으로 잠시 세자를 노려보고는 그대로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떠나버린다.[132] 그리고 얼마 후, 유정현과 황희에게 2품 이상의 문관과 무관을 모두 모으라고 명하는데 놀란 유정현이 무슨일이냐고 묻자 세자를 폐할 것임을 밝힌다.[133]
양녕대군을 폐세자하고 새로운 세자를 앉힐 것을 주제로 회의를 연다. 여기서 황희가 끝까지 적장자 계승의 원칙을 내세워 양녕대군을 비호하자, 밤에 따로 불러 신료들의 만장일치로 충녕을 세자로 책봉하고 싶다며 마음을 돌릴 것을 넌지시 권하지만, 끝내 뜻을 굽히지 않자 세자를 감싼 죄를 물어 유배형을 내린다.
그날 밤, 양녕의 서찰을 받고는 만나러간다. 양녕이 밤중에 활을 쏘고있는 모습을 보고, "너는 궁에서 하면 안되는 짓도 모르느냐"며 꾸짖는다. 양녕이 반항하는 모습을 보이며, 폐세자 선언하기 전에 내가 조정대신들한테 물러나겠다고 하겠다는 식으로 나오자, 그런 기회는 주지 않을 것이며, 원래라면 분란의 화근을 자르기 위해 널 죽여야겠지만, 부모가 자식을 죽일 수는 없으니 "다른 방식으로 죽일 것"이라며 경고를 남기고 떠난다.
다음 날, 양녕이 보낸 서찰을 조정 대신들에게 공개해[134] 조금이나마 남았던 양녕에 대한 우호적 입장을 취하던 대신들의 마음까지 돌리게 만들어 정치적 생명을 끝장낸다. 조정 대신들이 폐세자를 극형으로 다스려 분란의 씨앗을 잡아야한다고 경고하지만, "어찌 부모가 자식을 모질게 대하겠는가, 중전이 슬퍼할 것"이라며 경기 광주로 보낼 것을 명하며, 폐세자에게 양녕(讓寧)이라는 군호를 내린다.[135]
그 와중에 부인 원경왕후 민씨가 "전하의 얼굴을 보면 지금까지 전하께서 저지르신 일과, 이후 저지를 일이 떠오른다. 전하께서 원하시는대로 홀로서는 군왕이 될 수 있게 해드리겠다"며 태종과 권력에 대한 집착에 환멸감을 여지없이 드러내며 중전의 자리를 내려놓고 사가로 떠나겠다고 하자, 안타깝게 바라본다.[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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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아들 효령대군을 불러 "충녕에게 양위를 하겠다"는 것을 전해달라고 하며, 곧바로 자신을 찾아온 충녕에게 국새를 넘겨 왕위에서 물러나지만[137] 병권은 자신이 쥔 채로 상왕의 자리에 앉는다.[138]
2.11. 마지막까지 손에 피를 묻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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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왕이 되자, 조용히 지내지 않고 세종의 처가인 청송 심씨 가문을 숙청할 계획을 세운다.[139] 심온을 영의정에 앉혀 숙청의 빌미를 만들려는 것을 눈치 챈 세종이 막으려하지만, "명 사행길에 왕실의 친인척을 보내 세종의 책봉 사실을 알리는 것이 더욱 좋다"며 세종의 눈길을 돌린다.[140]
심온에게서 숙청의 빌미를 잡지 못하자, 병조의 장계를 누락시킨 병조참판 강상인을 이용한다. 강상인의 장계 누락이 실수가 아닌, 누군가의 사주에 의한 계획된 실수라는 주장을 내세우며 의금부에 강상인을 압송해 국문을 열어 모진 고문을 가한다. 고문을 이기지 못한 강상인의 입에서 심온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강상인을 참하고, 심씨 가문에 대한 숙청을 시작하려는 순간에 숙청을 막으려는 세종과 대립한다.[141]
강상인으로부터 건수를 잡아 심온의 가문에 대한 숙청을 개시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반기를 든 세종을 향해 자꾸 그렇게 나온다면 주상을 보위에서 끌어내리겠다고 경고하며 처가와 왕위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압박한다. 소식을 듣고 궁으로 돌아온 원경왕후가 "어차피 듣지 않으실 것을 알지만 이 일은 주상에게 상처만 남길 뿐입니다."라며 멈출 것을 간원하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이에 굴복한 세종이 심온에게 숙청을 막아주지 못하니 이제 그만 편해지라는 명을 내리고, 심온이 이를 받아들여 순순히 사사를 당하면서 사태는 일단락지어진다. 사태가 끝난 후 원경왕후를 찾아가 궁으로 돌아올 것을 청하지만 그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떠나간다.
이후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실의에 빠진 세종을 다독이면서 '다 주상을 위해 한 일이다' 라는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 아닌 변명과 함께 성군이 되라는 당부를 전한다. 다행히 세종은 마음을 다잡고 '죄없는 백성들의 시체로 쌓아올린 토대 위에서 성군이 되라 하시는 거냐'[142][143]란 태종을 향한 독설과 함께, 반드시 성군이 되어 아버지의 방법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보이겠다는 다짐을 전한다.
그리고 편전 회의에 나서는 세종의 앞에 등장해 함께 회의에 동행한다. 회의에서 현란한 언변과 빼어난 지식을 선보이며 신하들을 휘어잡는 세종의 모습을 보며 아들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세종의 일처리에 만족함이 묻어나는 표정을 보인다.[144] 앞서 양녕대군이 세자 시절 회의에 참석했을 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던 모습과 비교되는 부분.[145]
2.12. 용상의 포로, 자신의 國 家 옆에서 눈을 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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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이화상과 함께 궁을 나온 원경왕후를 찾아 나선다. 가까스로 원경왕후를 만나 뒤늦은 용서를 구하지만 오랜 세월 쌓였던 원경왕후의 응어리는 일말의 풀어질 기색도 보이지 않아 그녀의 용서를 받는데 실패한다. 포기하고 다시 돌아가려 했는데, 이화상으로부터 민씨가 학질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밤에 다시 사찰을 찾아가 앓고 있는 민씨를 궁궐로 데려간다. 이후 자신이 직접 탕약을 가져가는데, 탕약을 가져가는 길에 내관으로부터 이미 민씨가 승하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충격을 먹고 그대로 탕약을 바닥에 떨어뜨린 뒤 엎드려 절규한다.[146]
이후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는 세종을 일으켜 정사를 돌보라고 다그치는 데, 세종은 "살아서도 어머니를 짓밟으시더니 이젠 상왕 전하의 죄악을 덮겠다고 슬퍼하는 것조차 막으시는 겁니까?"라며 울분을 섞으며 반항하지만 "나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소. 그 전에 주상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소."라며 "주상은 한 가정의 아들이 아닌 한 나라의 왕이니 어서 일어나 국왕의 직무를 수행하시오!"라고 세종을 다그쳐 다시 정사를 돌보게 한다.[147] 이후 자신이 전부터 추진하고 있었던 구선(거북선) 개발과 청계천 정비의 필요에 대해 알려주는데, 청계천을 정비하려면 노역이 필요하기에 백성들이 고단해질 것이라는 세종의 우려에 그래서 모든 원성이 주상에게 가지 않게 하기 위해 상왕의 명의로 하는 것이라며, 끝까지 세종의 정사에 관여하고 도움을 주려 하면서 모든 악업은 자신이 짊어질 것이며, 백성들의 원성은 자신에게 쏠리게 하고 주상에게 오지 않게 할 것이라 한다.
원경왕후를 떠나보낸 이후 점점 몸이 쇠약해지지만 아들 세종의 장래가 계속 마음에 걸리는지, 세종과의 독대에서 국왕된 자는 죽을 때까지 정치에서 마음을 뗄 수 없다면서, 세종에겐 태평성대가 도래했다하여 종교와 예술에 빠지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등,[148] 계속해서 세종에게 정사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세종에게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지금 자신이 하는 행위가 모두 세종을 위함이라 강변하지만, 세종은 이가 자신이 아니라 태종이 자신을 그림자 삼아 영원히 집권하기 위함이라 반론하고, 태종이 "용상의 포로가 되셨다" 라 일침하면서 이제 국왕은 자신이니 자신에게 믿고 맡겨달라고 간청하며 심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 태종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태종은 이 말을 듣고 무언가 느끼는바가 있었는지 꽤 당황한다.
원경왕후 사후 상왕 이방원의 행보는 문제의 소지가 있는데, 이방원이 스스로 왕은 오롯이 홀로 서는 존재라고 정의했건만, 왕이 아닌 이방원이 왕인 세종을 이끌려고 한다.[149] 태종의 주의대로라면 세종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일어서야 한다. 노역의 원성이 주상에게 가지 않게 상왕 명의로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왕이 마땅이 혼자서 감내해야 할 책임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21회에서 민씨의 책임을 부담하자는 의도를 거부하고, 하륜과의 대화를 통해 왕의 책임은 혼자서 져야 함을 스스로 인정했음에도 그걸 32회에서 스스로 어기고 있다.[150] 재미있는 점은 이가 모두 원경왕후와 갈등했던 요소들이고 태종이 당시 원경왕후가 원하던 방식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태종이 본래부터 이랬던 건 아닌데, 왕이 된 아들의 정사 처리를 아무 간섭없이 미소짓고 지켜보기만 한 데에서 알 수 있다. 이때만 봐도 더이상 가르칠게 없는 아들을 보는 눈이었다. 그런데 원경왕후 사후부터 무언가에 홀린 듯이 행동이 변한다. 원경왕후는 반려자라는 이방원이 왕권(國)을 위해 희생시킨 이방원 일가(家)의 대표격인 인물이다. 이방원이 양위전 이를 원경왕후에게 알리거나, 그녀를 찾아 용서까지 빌며 재결합 의사를 밝히는데, 國에서 벗어난 이방원이 다시 家로 돌아가고 싶어 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원경왕후는 죽을 때까지 그를 외면하고 완전히 떠나버렸다. 이방원에겐 용서받을, 그리고 받아 들여질 家가 이제 없는 것이다. 그렇게 결국 갈 곳을 잃은 그는 결국 國으로 돌아와 버린다.[151] 당연하지만 (이방원의 주의대로라면) 國에도 왕이 아닌 그가 있을 곳은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없는 자리를 만들려 하니 무리수가 벌어지는 것이다.[152]
이후 머리를 풀고 기우제를 지내면서도 역시 모든 악업을 자신이 짊어지겠다며 기원을 하는데, 그러다가 결국 병세로 인해 쓰러진다. 이미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도 세종에게 손을 내밀며 유지라도 전하려고 하지만, 아들이 "저도 아버지를 용서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제 하루라도 마음 편히, 자유롭게 지내다 가십시오."라며 만류하다가[153] 결국 아들이 자신의 손을 잡자, "고맙구나... 고맙다..."라는 말을 남긴 후, 숨을 거둔다.[154] 그리고 애증의 관계였던 아내 원경왕후 옆에 묻히게 된다.
이후, 숨을 거둔 뒤에 장례를 치르게 될 즈음에 실록대로 태종우가 내렸고[155] 그의 장례식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방원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이야기는 그렇게 막을 내리게 된다.[156][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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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의 영면과 더불어 내리는 태종우 |
"서기 1422년, 세종 4년, 태종 이방원이 숨을 거두었다. 그의 일생은 피로 얼룩진 비극적인 삶이었지만, 백성들에게는 평안함을 가져다 준 시대였다. 그는 자신과 가문을 위해 권력을 쟁취했지만, 결국 그것을 뛰어넘어 국가와 백성을 위해 헌신했다. 정치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평생을 국가에 헌신한 투철한 정치가였지만, 말년에는 스스로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와 한 인간으로 살다 죽고자 했다. 이방원이 눈을 감자, 하늘에선 비가 내렸다. 태종 이방원은 일생의 동반자이자 한 때는 정적이었던 원경왕후 민씨와 함께 잠들었다." -태종 이방원의 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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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때 네(세자)가 성군이면 나는 사람이 될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괴물로 남을 것이라 이야기한다. 실제로 세종은 <
용비어천가> 등 아버지 태종의 업적을 마구 치켜세우는 문헌들을 남기면서 후대 사람들에게 성군으로 인식되게 했으니 틀린 묘사는 아니다.
[2]
이 장면은 비 오는 날 벼락이 치는 순간에서 일어났는데, 난동을 부리는 순간마다 벼락이 치는 것이 마치 스파크가 일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주상욱의 연기가 실제
PTSD 환자를 보는 듯이 굉장히 실감나고 청자 조각으로 인해 이리저리 찔려 피로 물든 손까지 적나라하게 묘사되어서 정말로 무섭다. 과거 사극에선 이방원의 이런 고뇌를 절제해서 표현했기 때문에 꽤 새로운 편.
한명회,
왕과 비에서 세조가 혈육을 죽이며 왕에 오른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물로 표현되었지만, 이방원은 국가와 후대를 위해 단호히 마음을 다잡는 인물로 표현되어왔다.
[3]
이방우는 달려오는 말에 부딪혀 죽고, 이방의와 이방간은 싸우는 도중 군사의 창에 관통되어 죽고, 이방과는 말 탄 군사가 아버지한테 던져 날아오는 창을 자기의 몸을 던져 관통되어 죽고,
이성계는 온몸을 여러 군사의 창에 찔려서 서서히 죽는다.
[4]
이 장면이 시체 같은 부상병들이 떼로 달려들어 못 움직이게 잡고 이방원은 발버둥치며 아버지가 죽는 모습을 보며 원통해하는데 흡사 호러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구도다.
[5]
참고로 이 장면은 예고편부터 나왔다. 뭔가 장대할 거라 예상했지만 그걸 다 깨고 그냥 1회성 꿈으로 써버렸다. 어찌보면 제작진의 성공적인 낚시.(..)
[6]
아비가 역심을 품었으니 너 또한 역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킬 것이 아니냐며 패드립을 쳐서 시비를 걸었고 이에 대해 본인은 그렇다고 수긍하는 듯 하다가 그럴 일 없다며 맞받아쳤다. 이성계의 많은 자식들 중 이방원이 이방우 다음으로 충성심이 높았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잘못 건드린 것인데, 이방원이 정말로 화가 났으나 애써 차분히 얘기하는 것이 표정에서 잘 드러난다. 해당 대화는
본 드라마의 '명대사' 문서를 참고할 것. 이후 2회에서 이방원은 이방우에게 "신하는 자기를 죽이려는 왕도 섬겨야 하는 겁니까?"하고 묻는데, 이 시점의 이방원은 이성계가 일을 도모해도 백성을 위해 거사를 한다고 여겼지 왕을 끌어내릴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7]
친모 한씨와 계모 강씨, 친여동생인 경신, 경선과 이복동생인 이방번, 이방석으로 이 무렵 한씨와 여동생들은 포천, 계모와 이복동생들은 철원에 전장(田莊)을 두고 있었다.
[8]
이방원을 죽이려는 병사를 칼로 찌른다.
[9]
이 자리에 모인 가족 중에서 이방원과 끝까지 화목할 사람은 친모 한씨와 둘째 형 이방과, 셋째 형 이방의, 두 누이동생 뿐이라는 걸 생각하면 앞으로의 비극을 더 돋보이게 할 장면이다.
[10]
묘사를 보면 이방원이 오기 전부터 환관들이 밀리다가 조영규 휘하 병력이 오면서 쐐기가 박힌다. 기습이라지만, 환관이 당시 고려 최강 사병집단인 이성계의 가별초보다 싸움을 잘 할리는 없기 때문이다.
[11]
후에 벌어진
일들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말이다.
[12]
이 장면에서 이성계는 이방간에게는 "네 형이 왜구이냐?"라고 말했고 이방과에게는 "네 동생이 홍건적이냐?"라고 질책했었다. 대충 네 형/동생이 적으로 보여서 칼을 빼어든 거냐?라고 볼 수 있다. 근데 이 장면에서도 아는 사람들은 움찔하거나 피식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방과 역을 맡은 김명수는 불멸의 이순신과 각시탈에서 일본인 악역 역할을 맡은 적이 있다.
[13]
하늘의 명에는 정해진 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14]
이때 이성계는 조민수를 부패함으로 실각시키고, 최영을 처형했으며, 사복 차림으로 홀로 돌아다니다가 성계육을 파는 상인을 본 회상을 한다.
[15]
1화부터 그의 직함이 전리사의 정랑으로 관리의 인사를 실질적으로 담당하는데, 당시 빈 자리가 많아서인지, 결재나 업무를 할 때마다 상당히 많은 양을 자랑한다.
[16]
이 때문에 방과는 아버지가 죽을 뻔한 건 물론 사경을 해메는 방원의 상태 때문에 제대로 열받아 불로 달군 인두를 지져버리려 들며 협박할 정도로 빡돌은 모습을 보여준다.
[17]
대업에 참여하려는 동기가 대의나 이방원 개인의 야심이 아닌 가족의 안위이라는 점이 이 드라마의 이방원 캐릭터 포커스를 기존 여말선초 사극과 전혀 다르게 맞췄음이 드러난다.
[18]
정도전, 정몽주, 조준, 남은, 윤소종 등
[19]
사실 이방원 외에는 마땅한 선택지가 없었다. 첫째 이방우는 고려에 대한 충심이 강해 이씨 집안의 의견을 대변하기 어렵고, 둘째 이방과는 무인의 기질이 강해 유학자들과의 회의자리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어렵다. 셋째 이방의는 권력에 욕심이 없는 인물이라 관심이 없고, 넷째 이방간은 기본 인성부터가 글러먹었다.
[20]
어마어마한 부대가 이동하며 내는 소리로 겁을 준다.
[21]
이방원이 저지른 일이 이성계 가문에 엄청난 리스크인 게 민심도 민심이지만 이성계가 어떻게든 포섭하려는 정몽주가 마지막으로 부탁한 게 우왕과 창왕의 안전이었다.
[22]
이 말대로 정몽주 참살에 가담했던 가별초 지휘관들은 이성계로부터 처벌을 받지 않았고, 오로지 이방원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집에서 쫓겨나고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다.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한 책임을 피하지 않는 이방원의 일관된 성격이 여기서부터 적극 드러나고 있다.
[23]
한씨 소생 자식들이 이렇게 문전박대 당하는 사이 강씨와 강씨 소생 자녀들은 이성계와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24]
왜 아버지와 똑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냐며 당황할 정도였다.
[25]
이 말은 이후의 태종이 자식들을 위해 스스로 죄업을 뒤집어 쓰는 행보를 연상케도 한다. 태종이 자신이 증오한 강씨의 일면을 닮아가게 되었다고 해석해 볼 수도 있는 연출.
[26]
신덕왕후 본인과
그 자식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자기예언이 되는 셈.
[27]
여기서 말하는 것이 형님의 세자 자리를 뺏었다는 것도 다른 부분과 비해 특이한 부분인데, 이때까지는 자신은 공신으로서 이방우나 이방과가 세자가 되길 바랬던 것으로 보인다. 이건 전작 정도전도 마찬가지로 이방원은 이방과가 세자가 되는 것까지는 이해를 했다. 공으로 봐도 이방과는 방원에 뒤쳐지지 않으며, 이방우가 왕위를 이을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유교 정서상 그 다음으로 맏이인 이방과가 세자가 되는건 당연한 것이었다.
[28]
지금까지 드라마의 묘사로 보면 이때까지만 해도 이방원은 딱히 야심을 가지거나, 이를 의식하는 면을 보이지 않았다. 강씨뿐만 아니라 이성계도
자기실현적 예언을 만들어낸 셈이다. 다만 한씨의 죽음 후 이방원에게 3년상을 맡긴 걸 민제는 이성계가 이방원을 후계자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강씨도 같은 해석을 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본래 이방원에게 자기 자리를 물려주려던 이성계 자신의 속마음이 뒤틀린 것을 이방원에게 역정낸 것일 수도 있다.
[29]
이방원이
아버지의 냉대,
계모의 배반,
아들의 죽음이라는 삼중고를 겪으며 멘탈이 거의 무너진 듯이 절규하는 장면에 대비하여 궁궐에서는 강씨의 왕비 책봉으로 이성계, 정도전을 비롯한 모두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보여 이방원의 고통이 더욱 강조된다. 거기다 이방원의 아들은 명색이 왕자의 아들, 즉 왕의 손자인데도 불구하고 국장은 커녕 이방원의 식솔들과 형들(이방원에게 호의적이지 않던 이방간도 왔다.) 외에는 조문차 온 신하들조차 없고, 묫자리도 왕족이 묻히는 정식 무덤이 아니라 그냥 양지바른 곳에 이방원이 손수 파 매장한 작은 봉분이었다. 옛날에는 성인이 되기 전에 요절한 경우 그리 격식을 갖춰 장례를 치르지 않고 간단히 끝냈다고는 하지만.
[30]
이때 길을 지나다 이방원을 본 사람들이 "
포은 선생을 죽인 이가놈"이라며 손가락질한다.
[31]
이때 말투가 거의 오열하듯이 울분을 쏟아내는 말투인데, 의로운 선비로서의 형님, 어머니를 위하는 형님, 왕이 되고 싶었던 형님의 모습 모두를 이해하는 동생의 입장에서는 형을 이용하여 폐인에 가까운 상태로 만들어버렸으니 울분이 터질 수 밖에 없었다. 오히려 형님이 다 맞다고 위로하면서 복수심에 불탄다.
[32]
다만 처음에 이방우가 자신이 왕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말을 했을 때는 약간 권력의 욕심이 있었던 방원으로서는 약간 당혹스러운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이후에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토로하는 형 앞에서 그런 의심같은 것은 다 사라지고 강씨의 음모에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는 장남이자 형의 모습을 공감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없어 울부짖듯이 공감했다.
[33]
고려 말기 젊은 혈기에 섣부르게 행동하다 화를 부른 것에 비하면, 당장의 분기를 억누르고 먼 훗날을 바라보며 현재 가진 힘을 내려놓을 줄 안다는 점에서 점차 높은 정치력을 가진 태종 이방원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34]
이 과정에서 정도전은 갑옷까지 입은 채로 민씨의 눈에 띄어 오해를 사기 시작한다. 또한 이 상황은 정도전에게 걸어놓은 또 하나의 강씨의 덫이다. 성공하면 이방원을 제 손으로 죽인 충신이 될 것이고 실패하면 자신과 죽는 순간까지 함께 손잡아야하는 동료가 된 거라며 빠져나갈 구멍을 없애놓은 것.
[35]
실제 당시를 묘사한 실록의 기록과는 다소 다르다. 실록에 따르면, 당시 이성계는 이방원의 허약한 체질을 걱정하며 험한 사행길 중 자식이 무사할 지 염려하는, 부정 가득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해당 실록 기사
[36]
이때의 이방원의 표정은 상술한 질문을 할 땐 일말의 기대를 품은 우수에 찬 표정이었으나 확답을 듣고 명으로 떠날때의 표정에선 정말로 아버지에 대한 온정은 없어진 차가운 표정이 되었다.
[37]
참고로 명나라에 있는 장면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15회에서 이방원은 정도전과의 대화에서
연왕 주체와도 만났다고 언급한다.
[38]
이때 한 손을 들며 민씨에게 인사를 하다가 달려온 민씨의 가체에 얼굴을 부딪치지만 웃으면서 민씨를 안아준다.
[39]
이때 이성계에게 어머니(한씨)가 돌아가셨을 때는 눈물 한방울도 안 흘리더니 중전이 돌아가시니 울고불고 몸져눕기까지 한다며 팩폭을 한다.
[40]
사실 맏형인 이방우에 대한 감정도 겹쳤을 것이다. 이방우가 강씨에게 이용당해 완전한 폐인이 되어버렸는데도(드라마에서는 안 나왔지만 이방우는 이방원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기 몇달전에 죽었다.) 이성계는 이방우에게는 관심조차 없었다. 물론 한씨의 묘도 단 한번도 온 적 없다. 게다가 한씨의 무덤은 이름만 제릉일 뿐, 릉 형식을 전혀 갖추지 않고 봉분만 덩그러니 있는 평민의 묘 형식이었다. 강씨의 무덤은 법을 어겨서까지 도성 내에 능묘를 조성하고 뻔질나게 능행을 하는 것과 매우 대비된다.
[41]
이때의 대사내용을 보면 이방원은 자기가 신덕왕후에게 가졌던 부정적 감정까지 다 털어 놓을 정도로 솔직하게 군다. 그와중에 섭섭함을 털어놓을 뿐 역심은 드러내지 않는다. 사실 죽기전의 신덕왕후에게도 동생을 죽일 생각이 없다는 의사표현을 하고 신덕왕후가 죽자 충격을 먹은 적이 있기 때문에 이방원은 이때까지도 역심을 품지 않았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성계가 자꾸 자기를 반역할 놈이라 우기니 이방원은 자기는 언젠가 반역을 저지를 놈이니 지금 죽이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고 버럭대는데, 이게 미래에 정말 실현되니 문제. 결과적으로 보면 당시의 이방원의 대사는 오로지 진실만 있는 내용이 된다.
[42]
이때 상투가 잘린 모습이 프롤로그에서 스스로 상투를 풀어헤친 모습과 상당히 유사하다.
[43]
이때 한씨의 묘를 찾아가 자신이 할 일에 대해 용서해달라고 말한다.
[44]
이성계로서는 그 이유를 말할 수 없었던 게 자중하라는건 공식적인 어명도 아니었고, 훈련 명분도 합당했다. 뭘 말해도 억지밖에 안된다.
[45]
사실 이방원을 순군부로 인솔하던 중 무단으로 이방원을 풀어주고 대화를 나눈 시점에서 충성심이 흔들리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성계는 자기 명을 어기는 걸 결단코 싫어하는 사람인데, 그걸 아는 조영무가 명을 어겼기 때문이다. 이방원이 조영무에게 속내를 털어놓은 것도 이를 파악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46]
이방원은 도성 안에서 사병을, 이숙번 등 몇몇 부하들은 황주, 춘주(지금의 춘천), 안산에서 군사를 끌고 군사를 총괄하는 관청인 삼군부와 정무를 총괄하는 관청인 도당을 점령한 후 이성계에게 세자를 바꿔달라고 요청하는 작전.
[47]
그깟
왕
좀 폐위시키고 포은 한 명 죽인 걸로 으스대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제3자 입장에서야 정몽주 테러 사건은 자신과 의견을 달리한다는 이유로 저잣거리에서 정치인 한 명을 죽인 어이없는 사건이지만, 혁명파 입장에서는 정몽주가 살아있었다면 그 핵심인 전주 이씨 가문을 계속 벼랑 끝으로 내몰려고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도전의 말의 절반은 궤변인 셈이기도 하다. 다만 그때 당시 이성계는 고려의 정계는 물론 군권을 틀어쥐고 있는데다 마음만 먹으면 힘도 세력도 자신과 비교하면 크게 부족한 정몽주를 굳이 죽이지 않고 강제로 유배 보내는 걸로 끝내는 것도 가능했기 때문에 절반은 틀린말은 아니다.
[48]
후술하겠지만,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정도전을 죽이게 되었을 때, 정도전이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권력만을 탐하는 맹수라고 비난하자, 이방원은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면 숙부님을 살리려고 했을 것이라며 울분을 토한다. 이때의 대화가 이방원으로 하여금 정도전 역시 죽여야 한다고 확실히 못을 박은 계기가 된 것이다.
[49]
실제로 정도전은 불교를 비판하는 내용인
불씨잡변을 저술하는 등 세상을 유학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뼛속깊은 유학자였다.
[50]
조영무는 아직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정도전이 따로 계획을 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자객을 숨겨놓았기 때문에 조영무 역시 몰랐고, 왕자들을 죽이려 드는 자객들을 막는 것은 당연히 숙위병의 의무이기도 했다.
[51]
이방석은 세자라서 죽일 생각이었지만 이방번은 세자도 아니고 동생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살리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신덕왕후의 유언을 들먹이며 거부하는 모습에 여러모로 씁쓸해한다. 다행히
신우와
신창을 죽인 일로 발생한 비난을 겪은 경험 때문에 방원이 방번을 살려두기로 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그냥 그 자리에서 방번은 방원에게 숙청당할 운명이었다.
[52]
이방번 역시 이방석에게 이방원과 만난 사실을 알리면서 본래대로라면 적장자인 자신이 세자가 되어야하는데 자신이 고려 왕실의 종친과 혼인했다는 이야기로 제외되고 동생에게 빼앗긴 것에 열등감을 느끼고있었고 그래서 이방석에게 조금이라도 협력하지않았다.
[53]
자신의 뜻을 어겼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것, 계모의 냉대, 자식의 이른 죽음, 이방석이 세자가 된 것, 삼봉 본인의 거리두기.
[54]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방원이 정도전을 참살한 죄목을 역모죄가 아니라 종친모해죄로 기록하고 있다.
[55]
이때 칼집을 바닥에 버려뒀다가 나중에 말 타고 군영에 합류할 때는 칼을 칼집에 넣고 도착하는 옥의 티가 있다.
[56]
이때 이성계를 포위한 군사들의 손동작이 백미인데 이방원을 향해 칼을 겨누자 원 모양으로 둘러싸고, 창끝이 몸통을 향했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오자 창을 뒤집어 창대로 겨눈다. 이는 애초에 이방원이 아버지를 죽이지 않고 경고하려는 목적이지만,
천륜을 끊을 생각이 없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57]
영포가
한고제에게 반역한 후 그와 조우한 전장터에서 반역의 이유를 추궁하는 고제에게 "다만 황제가 되고 싶었을 뿐이오."라 대꾸했다는 일화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58]
이 말대로 이방원은 비록 무자비한 숙청으로 욕을 먹을지언정, 철저히 정치를 통한 명분에 입각하여 대상을 고르고 골라 숙청하는 편이다. 실제로 이방원은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 그 명분이 워낙 합당했는지라 형제간의 살육을 못마땅해하던 자들마저 이방원의 편을 들다못해 대놓고 지지해주는 경우가 많았던 반면, 이방간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 사욕에 눈이 먼게 너무 뻔해서 조정 대신과 친형제들은 물론 이방원이라면 이를 갈았던 아버지 이성계조차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아서 홀로 고립되어 패가망신을 당한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59]
이때 살수들을 끌고온 박포가 앞을 막아서는 경순공주를 그대로 밀쳐버린다(!!!). 그래도 공주인데 지나친 묘사 아니냐 할 수도 있지만 박포는 공신책봉에 당연히 따르는 정치적 안배(실세들을 이등공신, 일등공신엔 공은 없지만 명분을 줄 수 있는 노신들 배치)를 헤아리지 못해 대놓고 불만을 표시하다 귀양가고, 그대로 누가봐도 가망이 없던 이방간에게 붙어 반란을 일으켰다가 결국 실패하여 참수된 인물이다. 애초에 막나가고 분별력이 없는 인물인 것. 또한 이방석을 서자라 칭한 걸 알 수 있듯 동복누이인 경순공주의 왕족으로서의 권위도 사실상 박탈당한 상태나 다름없다는 걸 추측할 수 있다.
[60]
훗날 남은은 태조의 배향공신을 정하는 심사에도 올라갔다. 당연히 반대하는 상소들이 올라왔지만 태종은 과보다 공이 훨씬 더 크다며 결국 배향공신으로 종묘에 올라간다. 이는 매부인 흥안군 이제 역시 마찬가지.
[61]
태조는 이방원은 자식이고 자신은 부모였기에 질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것이 부모의 업이라고. 원래 역사에서
태종이 아들
양녕대군때문에 마음 고생한 일을 연상시키는 발언이다. 18회에서 이방원이 큰놈이(양녕대군)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세세히 묘사되기 때문에 더더욱.
[62]
이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만 해도 침착했다. 형이 아버지와 자신 사이를 중재하느라 어쩔 수 없이 보위를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
[63]
이때 이방과의 아들이 용상에 앉아 있다가 처소로 돌아갔다.
[64]
실제 작중에 등장하는 하륜(정사공신, 좌명공신), 박은(좌명공신), 조영무(개국공신, 정사공신, 좌명공신)는 태종의 비호를 받으며 잘 살다 갔으며, 이숙번(정사공신, 좌명공신)은 아직 팔팔해서 세종의 앞길을 막을까봐 결국 팽 당하긴 했지만, 태종이 건장했을 때는 역시 비호를 받으며 잘 살았다. 황희도 양녕의 폐세자 결정에 유일하게 반대하여 유배갔지만 세종이 다시 불러들여 그의 비호를 받으며 잘 살았다. 박포도 만약 잘 참고 기다렸으면 (그리고 결정적으로 왕권에 위협적인 행위만 안 한다면) 다른 공신들처럼 부귀영화를 누렸을 수도 있다. 게다가 박포와 같이 정사공신 2등에 오른 이숙번이나 아예 정사공신을 받지 못했던 박은은 이에 대한 불만이 없었다.
[65]
박포에게 자신은 원한도 은의도 모두 기억하는 사람이라 말하는데, 정작 이후의 이방원은 민씨 가문의 은의를 멸문지화로 되갚는다. 물론 그의 처남들은 양녕대군을 끼고 이방원을 자극하긴 했으며 본래 이들이 한 짓은 사실상 역적이나 다름 없어 극형에 처해도 이상하지 않을 짓이긴하나 귀양 정도로 봐준 것이다. 하지만 외삼촌들을 죽이는데 당시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앞장섰다는 게 문제였다.
[66]
이는 사실 이방석을 죽이고 아버지 마음에 비수를 꽂은 시점에서 이방원의 멘탈이 이미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또 패륜을 저지르기에는 이방원이 감당해야 하는 정신적 부담이 너무 커서 피하고 싶어 하는 것. 그리고 결국 이방간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멘탈이 나가 폭주하고 만다.
[67]
지금까지 이방원이 저지른 모든 악행에는 명분이 존재했지만, 이때만큼은 그냥 명분이고 뭐고 아무 잘못없는 이방과를 죽이려 들었다. 이방원이 얼마나 권력에 대한 갈망과 그로 인한 죄책감에 미쳐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묘사. 만약 이때 진짜로 이방과를 죽였다면 이방원은 민심을 완전히 잃으며 숟가락만 얹으면 될 밥상에 재를 뿌린 꼴이 되었을 것이다.
[68]
이성계의 신체 능력을 이방원도 어느 정도 물려받았겠지만 엄연히 이방원은 문관 출신이다. 아버지와 함께 평생 전장터를 누빈 무골이었던 이방과를 이방원이 1:1 대결로는 이길 수가 없다. 그리고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실제로 이방원은 몸이 강건한 무골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냥을 할 때도 창사냥으로 호랑이 등의 맹수를 잡았다는 기록이 있는 이성계와 달리, 사슴 등을 주로 잡는 활사냥, 혹은 매사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69]
이는 1회에서 이방원이 세자에게 뒷일을 맡기는 장면이 연상된다. 어찌보면 정종 → 태종 → 세종 순으로 뜻이 계승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연출이다.
[70]
훗날 이방원이 장자인 양녕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 애를 쓴 점의 복선일 수 있다.
[71]
현대 한국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연상시킨다. 다만, 인수부의 인수는 仁壽이고, 인수위원회의 인수는 引受이므로 의미는 전혀 다르다.
[72]
이방과는 궁 안에 이성계와 이방원만 두면 큰일이 날 것이라 생각해서 왕위를 물려주는 걸 뜸들이고 있음을 드러낸다.
[73]
이후 단식 투쟁을 이용해 동북면으로 빠져나온 이성계는
군사를 모아 이방원을 공격하게 되므로 맞는 예상이다.
[74]
상술했듯 이방과가 전권을 다 자기에게 맡겼기 때문에 그냥 왕이 되었다 봐도 무방하다. 사병혁파는 정종대에 이루어졌지만, 일반적으로 태종의 치적으로 그냥 볼 정도로 실제 역사에서도 이 당시의 이방원을 사실상의 왕으로 간주했다.
[75]
집안에는 전주 이씨는 자신과 아들 외에 소수고 온통 여흥 민씨뿐인데, 집을 조선 왕실로 대치하면 이방원이
무엇을 두려워 하며 처가를 숙청했는지 그림이 보인다.
[76]
참고로 하륜은 이방원의 표정을 보고 그의 속내를 눈치채서 다른 공신들과는 달리 한 발 물러서거나 공신들에게 이방원이 내심 골치아파한다는 말을 넌지시 던져 주의를 주는 등, 이방원의 눈치를 보던 상태였다.
[77]
실제 이방원의 정치인생의 첫번째 치적이다. 이 치적은 세자 시절에 이루었기 때문에 이방원의 세자 시절을 그냥 넘길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78]
20회 초반에 이방과가 옥좌가 우리 가문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고 말한 것을 연상시키는 부분. 이방원 부부가 왕좌를 사실상 차지하기 무섭게 튼실했던 부부의 연계를 찢어놓기 시작했다.
[79]
하륜의 조언은 이방원과 민씨의 갈등 요소를 건드린 셈인 동시에 이방원의 정치적 신념에 공감대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조언을 들은 이방원은 현재진행중인 부부싸움이 생각나서 불쾌하면서도, 자신의 이해자가 나타난 셈이니 기뻤을 것이다. 실제로 이 이후로 이방원은 냉혹한 정치를 펼치면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독과 갑갑함을 하륜에게는 털어놓는다.
[80]
1회에서 자신의 죄를 일거하는 이방원이 떠오르는 부분인데, 1회에서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은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이 바뀐 것인지, '이젠 자신이 인간인지 괴물인지 모르겠다'며 조소하고 울부짖고, 아들에게 네가 성군이 되어야지 내가 사람이 될 수 있다며 자식과 후세에게 그 역할을 떠넘긴다.
[81]
그런데 1회에서 자신이 힘들어서 양위를 하려 하니 신하들에 세자까지 자기가 뭔 속셈이 있다 생각하고 결사적으로 막아서는 상황이 벌어진다. 여기서 이방원은 양위를 막는 신하들을 간악한 무리라 욕하고 세자에게는 왜 날 안 믿어주냐며 울부짖지만, 22회와 연결해보면 실상은 태종의 자승자박이였던 셈이다.
[82]
包荒 用馮河 不遐遺 朋亡 得尙于中行. 거친 곳을 포용하며 맨몸으로 하수를 건너며 먼 곳을 버리지 않으며 벗을 잃으면 중도를 행함에 숭상을 받을 것이다.
[83]
사사로운 정을 끊지 못하면 공(公)을 바로 세울 수 없다.
[84]
명을 거역한 조영무는 정을 이용한 호소를 묵살하고 처벌을 가했는데 똑같이 자신의 명을 거역한 민씨는 그냥 넘어간다. 민씨를 처벌하면 그녀와 같이 들어온 자식들에게도 상처를 주게 되니까. 이방원의 자식사랑을 알 수 있는 부분.
[85]
입궁은 했지만 신분상 공식 궁녀는 아니고 민씨 집안의 노비다. 원경왕후의 여종으로 승은을 입었다는 점에서
신빈 신씨나
효빈 김씨가 예상되었는데 25회를 통해 통해 효빈 김씨임이 밝혀졌다.
[86]
처음 이방원이 처소에 궁녀를 끌어들일 때만 해도 원경왕후는 방원의 의도를 파악하며 어떻게든 참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원경왕후마저 자신의 여종마저 방원의 침소에 들어가자 평정심을 잃었을 정도니 일단 방원 입장에서는 확실히 효과를 거둔 셈.
[87]
전하께서 어떻게 이러실 수 있냐며 울분을 토하는 아들들 앞에서 소리만 안지를 뿐 손을 부르르 떨만큼 분노한 상태였다.
[88]
왕실에 국혼을 치르기 위해 임시로 설치하는 관부.
[89]
관부의 수장
[90]
물론 역사적으로는 아내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원경왕후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새로 왕비를 뽑은 건 아닌데(...)
후궁을 또 들였다. 물론 이 일은 왕실 어른들에게도 안 좋게 보였는지 동생에게 간섭을 전혀 안 하는
상왕으로 물러난 형도 유일하게 한 마디 했던 사건이다.
[91]
이때 부모의 상중이란 것을 언급한 것을 보면 자신이 모친 신의왕후의 상중에 정몽주를 척살한 것을 떠올렸을 가능성도 있다.
[92]
아들들에게 이름과 군호를 주며 그 의미를 알려줄 때 자식들이 아바마마도 훌륭한 분이 아니냐 묻자 '자신은 훌륭한 사람이 아니고 그리 되고 싶어하는 사람일 뿐이다.'는 말을 하여 본작의 이방원이 어떤 인물인지를 보여준다.
[93]
첫째가 군호를 받는건 16년이 지난 폐세자가 된 직후다.
[94]
사극에서 흔히 보이는 주인공 무쌍 같은거 전혀 없다. 일개 군졸 한 명 상대로도 쩔쩔 맨다. 악으로 깡으로 겨우겨우 버티다 죽기 직전에 지원군이 와서 살았는데 갑옷 제대로 갖춰 입지 않았으면 그전에 죽었다. 그래도 초반에 고려 군관 하나 상대로 쩔쩔매던 때에 비하면 제법 킬수를 올린 편이다.
[95]
전작만 해도
배우가
배우인지라 다소의 군졸을 상대로도 무쌍을 찍었었지만 이 드라마의 이방원은 문관출신이라는 걸 더 강조해서인지 전혀 무예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도 이성계의 아들이니 어느정도 기초 무예는 다졌을 것이고 그 기질도 적게나마 물려받았을 것이니 제법 선전은 한다.
[96]
주상욱은
선덕여왕 가상 화랑인 월야를 맡아서 거기서 무공을 어느정도 선보였지만 딱히 돋보였던 적은 없었다.
[97]
조사의와 김 내관 등 이성계의 가담자들이 모두 처형되었다.
[98]
이때가 하필이면 백전백승의 장수였던 이성계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패배를 안겨준 시점이라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 될 수도 있다.
[99]
이때 태종의 포스가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이거이는 제대로 된 변명도 하지 못하고 잔뜩 쫄아있었다.
[100]
정몽주를 죽일 때도,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킬 때도, 2차 왕자의 난과 조사의의 난을 진압할 때도 어쩔 수 없었다는 이유로 너무 많은 죄를 저질렀다며 지난 회에서 중전 민씨에게 한탄했는데, 결국 외척들을 내치는 이유도 어쩔 수 없다는 이유를 대고 있다. 태종의 변명을 들은 정종은 주상은 이젠 존재하지 않는 적하고도 싸운다며 한탄했다.
[101]
이때 민씨 형제들은 "세자가 미덥지 못해 차라리 양위하고 뒤에서 봐주며 왕으로 키우겠다는 것 아니겠냐."라며 들뜨는데, '미덥지 못하다'를 '경험이 부족하다'로 바꾸면 정확히 충녕에게 양위하는 의도가 되어 더 아이러니하다.
[102]
시간이 흘렀다곤 하는데, 직전에 민무구 • 민무질 형제를 유배보낸 게 1407년인데 불과 1년밖에 지나지않았다. 이성계가 퇴장하자마자 양녕대군이 보스로 등판할 것이기에 이런 연출을 한듯.
[103]
충녕은 물론이고 이방원 본인부터가 과거 급제까지 하며 공부의 끝을 찍어본 사람이다.
[104]
논어 자로편 제23장의 구절로, 뜻은 "군자는 화합하기는 하나 남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고, 소인은 남과 같은 생각을 가진 것 같아 보이지만 화합하지는 못한다."
[105]
이 장면은 태종과 술에 취한 세자의 대면과 유사하게 연출된다. 차이점은 태조와 태종의 대면은 태종이 술에 취해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는 장면이었다면, 태종과 세자의 대면은 세자가 술에 취해 아버지에게 반항한다는 점.
[106]
또한 태조 역의 김영철이 태종 역으로 출연한 대왕 세종에서도 비슷한 구도의 장면이 등장했는데, 양녕대군이 술에 취해 태종의 상왕전에 찾아와서 잘못했다고 사죄하는 장면이었다.
[107]
이때 이성계를 대하는 칭호가 태상왕 전하에서 아바마마로 천천히 변한다.
[108]
18회에서 어린 양녕을 끌어안고 울었던 때와 같은 구도이고 아버지를 처음으로 들이받아 이겼을 때와 아들에게 처음으로 진 때라는 대조를 이루어, 지금의 세자에게 그 때의 자신을 비춰보는 장면이다.
[109]
이는 태종이 양녕이 무슨 생각으로 그리했는지를 눈치채고 내린 벌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양녕은 일말의 대의도 없이 자신의 위치만 믿고 그럴싸한 충신으로 위장된 면모를 드러내면 민씨 형제들을 죽이지 않을 거란 안일한 착각으로 저지른 짓이었다. 즉, 태종의 속내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지레짐작 투성이의 동기로 아버지인 태종을 설득했던 것이고 그래놓고서 태종이 양녕 자신의 착각과 정반대의 상황을 만들어내자 어머니를 배신한 것에 대한 두려움과 절망에 멘탈이 깨져버린 모습을 보여준다.
[110]
그러나 동시에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민씨가 토해내는 모든 저주서린 말들을 묵묵히 다 듣고 있기도 했다. 세자에게 한 말 그대로 본인 역시 아내의 절규를 버텨내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양녕은 그런 어머니의 외침을 무시하고 오로지 용상에 앉을 수 있다는 태종의 말만 캐치해 용상을 팀욕스런 눈빛으로 바라봤다. 결국 권력을 탐하기 위해 어머니를 배신한 행위에 일말의 죄책감조차 내던진 것.
[111]
8회에서 정몽주 암살 건으로 격분한 이성계가 이방원에게 "네가 나보다 더 높이 날아 봤느냐? 네가 나보다 더 멀리 가보았느냐!?"라고 꾸짖었던 대사를 연상시킨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독선적이고 편집증적인 면모를 발휘하는 이방원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아버지 이성계를 닮아 있다.
[112]
충녕의 말이 이상적이긴 해도 큰 방향성은 이방원과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
[113]
실제 기록에서 이 시기에 민씨는 조졸한 공주를 출산한지 2~3달 정도 지났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내의 안부를 아들들에게 묻는 것으로밖에 표현 못할 정도로 관계가 좋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듯하다.
[114]
사실 이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정신차린 줄 알았다'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세자는 이번이 두 번째 기회이기 때문이다. 태종은 한 번의 기회를 주되 그 다음은 없다고 신하들에게 수도 없이 경고를 날리는데, 세자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며 자신의 원칙을 깼다.
[115]
그까짓 책 하나 끝내는데 6년이나 걸렸냐며 조금 어이없어하는 태도를 보이기는 했다.
[116]
처음엔 장군이라 호칭하다가 이후엔 친근하게 영무 아재라는 옛날 호칭으로 부른다.
[117]
실제로 조영무는 낙향한 뒤 9개월 후 사망한다. 이때가 조영무를 마지막으로 보는 모습이었던 것.
[118]
이 장면에서 이 드라마의 캐치프레이즈에서 제시하는 두 가지 단어의 의미가 드러난다. '家를 넘어서 國으로'에서 國은 바로
나랏님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방원이 말하는 '괴물'은 '피도 눈물도 잃어버린채 홀로 군림하는 국왕'을 의미한다. '家를 넘어서 國으로'라는 캐치프라이즈는 결국 왕(나라)이 되기 위해 자기 가족을 파괴하는 이방원의 행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119]
곽선의 첩 어리를 탐한 사실을 듣고도 어찌어찌 참았지만 존경하는 형의 여자까지 탐한 사실을 듣자 이성을 잃었다.
[120]
이는 자신에게 절대 기회를 주지 않았던
아버지와 대비되는 결정인데, 이방원은 지금까지 아버지같은 왕은 되지 않을 것이라며 그와 반대되는 행보를 보였기 때문에 이번에도 과거 자신의 야심을 꿰뚫어 보고 적대만 했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충녕에게 기회를 주었을지도 모른다.
[121]
형제간의 권력다툼의 참상에 대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태종이 이런 시험을 내렸다는 것은 충녕이 별 어려움 없이 손쉽게 양녕을 제압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시험으로 내건 조건은 최소한의 안전장치 역할을 겸하는 부분도 있는 걸 보면 경계를 아예 안하진 않았다. 또한 자신이 왕자이던 시절 부왕인 태조 이성계가 철저히 이방원을 배척하고 경계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이방원이 직접 충녕의 행보를 그가 내건 조건 하에서 묵인해 주겠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방원은 이미 이 시점에서 양녕의 폐세자를 잠정적으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122]
심지어 양녕의 스승들이 세자가 마음을 다잡고 공부한다고 보고할 때도 하는 말이 "충녕대군 같다."일 정도로, 충녕은 학문과 공부의 기준으로 인정받고 있다.
[123]
말만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지 절대왕권을 가진 이방원의 묵인과 허락 하나만으로도 충녕에게는 엄청난 도움이 된다. 이후 대신들과 주연을 가지는 일이나 삼군부를 출입하여 군사들을 독려하는 장면들에서 이방원의 허락이 있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124]
이 시점에는 공조판서를 맡고 있었다.
[125]
실제 역사에서 황희는 세자가 젊은 기운에 여자를 좋아할 수도 있고 젊은날의 치기나 실수 같은 것 아닐까 했다가 태종에게 목이 날아갈 뻔한 적도 있엇고 기어이 양녕이 폐위를 당하자 자신이 책임자임에도 불구하고 책임지겠단 말을 번복해 결사반대를 했다가 세종에 의해 복귀할 때까지 귀양을 당하며 대가를 치렀다.
[126]
벼슬아치들이 종친들을 찾아다니며 벼슬을 얻고자 로비하는 것을 말한다.
[127]
이것이 이숙번에게 주는 첫 번째 기회였기에, 만약 여기서 이숙번이 진실을 고하고 용서를 구했다면 너그러이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128]
이숙번은 그 의중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계속 전하를 위해 일하겠다고 답한다.
[129]
그러면서도 옛정을 생각하여 반드시 정승이 교지를 전하도록 했다.
[130]
사관의 편전 출입에 관한 논의. 즉, 공과 사의 경계를 분명히 밝히고 의견을 조율해 편전 출입 여부만 결정하면 끝날 간단한 사안이었다.
[131]
유정현이 "저하께서 공과 사의 경계를 분명히 밝혀주시면 되는 일입니다."로 요점을 집어줬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을 못 내렸다. 그 모습을 본 태종과 조정 대신들은 양녕을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132]
태종은 이미 자신의 철칙을 깨고 세자에게 여러번 기회를 줬었으나 이 일로 마지막 기회까지 날아가 버린 것.
[133]
세자가 중전에게 혼나는 장면부터 엔딩까지의 이 장면은 주상욱 배우의 연기가 절정인데 29화에서의 충녕대군역의 김민기 배우의 연기가 흥분과 두려움, 환희가 섞인 연기의 백미라면, 30회에서의 태종의 얼굴은 권태, 허탈, 슬픔만 있을 뿐 더는 세자에게 배신과 분노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망나니 아들에 지쳐버린 아버지의 얼굴 그 자체다. 태종은 왕이 된 후 아버지 이성계의 실수를 반면교사로 삼아 왕도를 걸어갔는데 방법은 다르지만 같은 궁궐에서 자신이 원하던 아들에게 왕위를 이어주지 못한 아버지 이성계의 삶을 그대로 이어받는 태종의 얼굴이 참 비극적이면서도 비통하게 표현된다.
[134]
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이와 같다.
"소자가 그깟 첩 하나(어리)를 들인 것이 그리도 잘못한 것입니까? 첩은 아바마마가 훨씬 더 많이 들이시지 않았습니까? 조정 대신 중 누가 그것을 빌미로 군왕의 자격이 없다고 하면 내려오실겁니까? 저만 갖고 그러는 거 못 참겠으니 그냥 제가 그만두겠습니다. 간신들이랑 잘 먹고 잘 사십시오."
약간의 각색은 들어갔지만, 실록에도 기록된 사실이다. 고증대로면 양녕이 세자 자리를 자진해서 물러나는게 아니라 끝까지 세자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용쓰다 열받아서 올린 상소문, 세자 자리에서 내려올 생각이 전혀 없는 심산으로 올린 상소문이라 훨씬 불경한 내용이었다. 대놓고 '효도 받기 싫냐'는 말이 들어가 있었다.드라마보다 현실이 더하다 저런데도 끝까지 아들이라고 생각해준 태종이 얼마나 자식들에게는 약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였는지 알 수 있다.
[135]
사양할 양, 강녕할 녕이다. 폐세자로 궁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세자 자리를 양보했다는 의미로 지어줬다고 한다.
[136]
이때 18년을
호랑이 등에 있었으니 이제 내려올 때가 됐다는 말을 하는데 실제로 태종 18년에 양위하면서 남긴 말이다. 조선 왕조에서 건강이 양호함에도 자의로 양위를 한 국왕은 태종뿐이다.
[137]
본편에서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를 하는 과정은 1화에서 보여준 분위기와 상황이 전혀 다르게 묘사된다. 조정 대신들이 양위를 거두어달라는 것만 동일하고, 나머지는 전부 반대로 그려졌다. 쾌속 전개인 탓에 어쩔 수 없긴 하지만, 프롤로그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던 그 인상적인 태종의 모습이 생략되고 너무 쉽게 양위를 해줬다는 느낌이 들어 아쉽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끼워맞춰보면 세종이 순순히 국새를 받는 후에 세종이 즉위하는 장면으로 이어지는 듯 보이나, 정황상 순순히 받으려다가 거절하고 1회 프롤로그 상황까지 이어졌다가 즉위한 것으로 봐야 한다.
[138]
상왕이 되자마자 전에 없던 흰 머리와 수염이 잔뜩 생긴다.양녕때문에 마음고생을 씨게 한듯하다..
[139]
심온도 이방원이 자신을 그냥 두지 않을 걸 예상하고 빌미를 잡히지 않으려고 손님들도 다 내쫓고 자중하지만, 이방원은 심온이 미워서가 아니라 원경왕후도 언급한 바와 같이
청송 심씨 역시
여흥 민씨 못지 않은 명문가라, 그런 가문이 대군의 처가인 정도는 감수해도 왕의 처가인 건 두고볼 수 없기에 숙청하려는 것이지, 심온과 청송 심씨 가문이 처신 잘 한다고 피할 수 있는 숙청이 아니었다.
[140]
세종은 이 말을 듣고, 장인이 명 사행길에 오르면 한동안은 국내 정치에 발을 들일 일이 없으니 숙청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한다.
[141]
이때 이방원을 위해서 움직인 인물이 박은이었다. 박은은 당시 심온의 정적이었으며 명 나라로 사행길에 가는 심온을 지켜보던 이도 박은이었다.
[142]
어떤 면에서 보면 세종의 성공적 치세가 '부왕 방원의 무자비한 정치 숙청 덕분'이라는 평을, 그것도 수혜자격인 세종을 통해 정면으로 반박하는 말이다.
[143]
다만 태종은 오히려 백성들에게는 자애로운 군주였다. 실제 태종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실수라지만 감히 자신의 침전까지 들어온 이를 조용히 몰래 내보내주기도 하고 자식들의 이름이 적힌 공을 차며 아이들이 놀았던 것도 '애들이 논거 가지고 뭐라 하지 마라'라는 일들을 보면 백성에게는 꽤나 관대했다. 태종이 무자비함을 드러냈던 이들은 대부분 왕권에 위협이 되는 이들이었다. 민씨 형제는 외척에 공신이었고 심온은 외척에 이숙번 또한 공신이었다. 이들 모두 미래권력을 얼마든지 휘두를수 있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공신과 외척을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을 때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하면 태종의 이러한 판단은 상당히 타당한 판단이었던 것. 사실 용의 눈물, 정도전 그리고 태종 이방원에서 킬방원의 이미지가 강조되어서 그렇지 숙청도 다른 군주들에 비하면 꽤나 덜한 편. 숙청의 대상이 자기를 보위에 올리는데 힘을 썼던 처남들이었다는 것과 세종의 장인인 심온이 세종이 컨트롤 하기 어려운 명문 가문이라는 이유로 철저하게 박살낸 그 이미지가 너무 큰 것.
[144]
심지어 이때 가장 먼저 한 말이 편전에도 사관을 들일 것이며 그 이유는 국왕이 소수의 측근과 정사를 결정하는 폐단을 막기 위해서라고 밝혔는데, 이는 사실상 본인의 방식을 면전에서 까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국왕이 그릇된 일을 계획하지 않고, 신하들이 이에 부화뇌동하지 않는다면 기록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거요." 라며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니 납득하고는 흐뭇하게 바라본다.
[145]
가장 처음 한 말이 편전에도 사관을 들이겠다는 것인데, 우물쭈물하며 결정을 못 내리던 양녕과는 달리 단숨에 이유를 설명하며 결정한다. 이는 더 이상 소수의 측근과 밀실에서 정사를 논하는 일은 없을 것이란 뜻이기도 하여, 아버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146]
심지어 원경왕후는 자신에게 가장 큰 불효를 저지른 양녕대군조차 미소로 맞이 해주는데, 이방원은 미소는커녕 원경왕후의 임종을 보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한다. 이방원이 자신의 가족에게 철저하게 소외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47]
신덕왕후의 사망 이후, 그녀가 살던 방에서 슬픔을 달랬던 이방석을 태조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 사실과 대비되는 부분. 물론 세자와 왕은 격이 다르고, 미성년자였던 이방석과 달리 세종은 성인이었다. 사실 두 사람의 진짜 대비점은 태조는 아들을 보호하려고만 했지만, 태종은 이끌어 주려 한다는 것이다.
[148]
단, 세종은 말년에
불교에 빠지긴 했다. 물론 앞서 언급된 군주들과 달리 최소한 나라를 말아먹을 정도가 되지 않도록 선은 지켰다.
[149]
이때가 세종 2년이다. 태종이 가르치고 싶은 것이 많다라며 앞에서 이끌려 하는데, 세종은 이제 초보 군주가 아니기 때문에 이끌어야 할 대상이 아니다.
[150]
만약 세종이 태종과 같은 주의였다면, 태종은 옛날 자신이 아내에게 그랬듯이 권력을 독점하려는 세종의 거센 저항에 부딫혔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태종과 달리 왕이 가진 부담을 나눌 수 있다는 주의라 태종과 공존이 가능했다.
[151]
세종 또한 차기 가장이니 家의 일원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다른 家 소속인물을 찾아 온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152]
작중 이방원은 앞서 한 말을 나중에 어기고 마는 경향이 있는데, 마지막까지 그리 된 것이다.
[153]
세종이 아들로서 아버지를 용서한다는 건 家가 이방원을 받아 들인다는 의미인데, 이방원이 마음 편히 자유롭게 살 방도는 家에 받아들여 지는 것 뿐이다. 문제는 이방원이 끝까지 이 속내를 아들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니 세종은 왜 태종이 이렇게 책임에 집착하는지 알 방도가 없고, 그러니 이런 모순된 말을 하게 된다.
[154]
용의 눈물과 대왕 세종에서는 이방원을 용서하는 주체가 원경왕후였는데, 태종 이방원에서는 세종이 되었다. 더불어 세종이 상왕 전하도 아니고 아바마마도 아닌 아버지라 칭한 것을 보듯, 태종이 國을 위해 짓밟았던, 그리고 말년에 그 따스함을 그리워했던 家에게 마지막에서야 용서와 포용을 받는 구도인 것이다.
[155]
정확히 말하자면 태종우 자체는
야사지만, 실제로 태종이 죽은 이후 비가 많이 왔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태종우는 가족애에 대한 갈증으로 가득찬 그의 마음이 드디어 채워 졌음을 보여주는 요소로 쓰인다.
[156]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보통 역대
KBS 대하드라마들이 주인공들의 사망 장면까지만 다룬 것과는 달리 본작은 주인공인 태종의 장례식 장면으로 마무리지었다는 것이다.
[157]
태종의 관을 양녕, 효령, 세종, 세 일가가 지켜보는데, 이 장면도 꽤 의미심장한 장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종 3형제는 각각 전주 이씨의 가장 큰 분파인 양녕대군파, 효령대군파, 그리고
조선 왕가의 파조가 되기 때문이다. 조선 건국 세대였던 이방원의 사망과 함께 함길도계 전주 이씨는 종결되고 조선과 한양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전주 이씨의 시작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방과가 이방원에게 선양을 결심하면서 전주 이씨는 이제 끝났으니 네가 새로운 전주 이씨를 만들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것이다.
"소자가 그깟 첩 하나(어리)를 들인 것이 그리도 잘못한 것입니까? 첩은 아바마마가 훨씬 더 많이 들이시지 않았습니까? 조정 대신 중 누가 그것을 빌미로 군왕의 자격이 없다고 하면 내려오실겁니까? 저만 갖고 그러는 거 못 참겠으니 그냥 제가 그만두겠습니다. 간신들이랑 잘 먹고 잘 사십시오."
약간의 각색은 들어갔지만, 실록에도 기록된 사실이다. 고증대로면 양녕이 세자 자리를 자진해서 물러나는게 아니라 끝까지 세자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용쓰다 열받아서 올린 상소문, 세자 자리에서 내려올 생각이 전혀 없는 심산으로 올린 상소문이라 훨씬 불경한 내용이었다. 대놓고 '효도 받기 싫냐'는 말이 들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