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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마지막 충신
포은 정몽주 圃隱 鄭夢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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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 |
<colbgcolor=#a60c0c,#360505><colcolor=#fff> 봉호 | <colbgcolor=#fff,#111>익양군 충의백(益陽郡 忠義伯)[1] |
신분 |
삼사좌사 /
문하찬성사 (2회) → 예문관 대제학 (3회) → 문하찬성사 (4~6회) → 수문하시중 (7~8회) |
등장회차 | 2 ~ 8회 |
배우 | |
최종환[2] |
[clearfix]
1. 개요
|
배우 최종환이 맡았다. 그는 SBS 〈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조민수, SBS 〈 연개소문〉에서는 영류왕, 〈 여인천하〉와 〈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는 이방원의 5대손인 중종 역[4]을 맡는 등 사극 경험이 많은 배우이지만, KBS 대하드라마에는 처음으로 출연한다. 대하드라마를 제외한 KBS 사극 출연 자체도 적은데, 〈태종 이방원〉 이전에 출연했던 작품이 20여 년 전의 KBS 2TV 수목 드라마 〈 소설 목민심서〉였다.
작중에서 한 가지 웃긴게, 배우의 키와 덩치로 인해 웬만한 신하들보다 훨씬 큰 건 물론이고, 작중 무관인 이방과나 이지란등보다 피지컬 적으로 덩치큰 선비 정몽주가 나왔다.[5]
2. 극중 행적
2.1. 고려의 충신이자 이성계의 동지
2회에서 정도전과 함께 개경 밖 군영에서 첫 등장. 위화도 회군에서 승리하여 개경을 점령한 이성계에게 수고하셨다고 축하를 건네고 시국을 안정화시킬 대책을 논의한다. 또한 우왕이 폐위되고 창왕이 즉위하자 이성계의 집에서 그의 부인 강씨와 정도전과 함께 대책을 논의한다.[6] 고려의 충신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정몽주를 이성계, 정도전과 살짝 떨어뜨려 놓는 드라마가 많았는데[7], 본작에서는 정몽주가 역성혁명 건으로 갈라서기 전까지는 이성계와 입장을 같이 하던 막료 중 한 명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이후 3회에서 이성계의 측근들이 모인 회합에서 가문의 대표로 참석한 이방원이 창왕 폐위를 거론하자 반대하며 호통을 친다. 이 때 이성계가 이방원을 직접 말렸음에도[8], 신하된 자로서 군주를 제멋대로 폐하는 것이 바로 역적이라면서 꾸짖고[9], 회합이 끝나기도 전에 먼저 자리를 뜬다.
하지만 이방원은 기어코 우왕이 신돈의 핏줄이라는 향간의 소문을 빌미로 폐가입진의 명분을 찾아내고, 이를 받아들인 이성계 일파가 대비 안씨에게 창왕을 폐위시키라는 교지에 옥쇄를 찍어달라고 압박하는 자리에 함께한다. 이미 이성계와 이방원 앞에서 창왕은 폐위시킬 명분이 없다는 의견을 피력했기에, 차마 소리도 못내며 오열하는 대비 안씨가 폐위 교서에 옥쇄를 찍는 모습을 참담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2.2. 이성계와 갈라서다
창왕이 폐위되어 쫒겨나고 공양왕을 즉위하던 날 이성계가 마련한 술자리를 먼저 나가며 본격적으로 반목할 의사를 밝힌다.[10] 뒤쫓아 나온 이성계가 자신의 곁에 있어달라고, 그의 동의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며 설득하지만, 부질없는 약속이라고 웃으며 말하면서 사실상 거절의 의사를 밝힌다. 그래도 자리를 떠나다가 다시 돌아서서 폐위된 두 왕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부탁한다. [11]공양왕이 자기 뜻대로 이색과 변안열을 등용하고 대놓고 이성계에게 굴욕을 준 것이 무색하게도 이미 조정 전체를 장악한 이성계파 대신들이 이색과 변안열을 탄핵하며[12], 공양왕에게 전방위로 압박을 가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이방우에게 이성계가 명분이고 뭐고 다 집어 치우고 전하를 끌어내리려 할 수도 있다며 걱정한다. 결국 이방원의 협박에 굴복한 공양왕이 이색과 변안열 두 사람을 유배보내고, 우왕과 창왕마저 참수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이성계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여긴다.
이후 우왕과 창왕의 잔혹한 처형으로 인해 이성계에 대한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고, 궐 앞에서 유생들이 이성계를 비난하며 시위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착잡한 심정으로 떠나려 한다. 그 순간 자신을 발견한 유생들이 "어째서 고려 유학의 거두인 정몽주가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냐, 이성계의 개가 되려는 것이냐."라고 비난을 퍼붓는 동시에, 자신들과 함께해서 이성계 일파를 몰아내자고 권유하지만 그들의 절규를 뿌리치고 그 자리에서 등을 돌려 떠난다. 그러나 자신도 현 상황에 회의감을 느꼈는지 아무 말 없이 길을 걷다가 결국 한 민가의 처마 아래에서 주저앉아서는 "이성계 대감.... 차라리 내 목을 자르시오... 내 목을..."이라는 한탄을 내뱉는다.
이후 유배 중이었던 이색을 만난 뒤, 마음을 다잡고 공양왕과 고려를 지키기로 굳게 다짐한다.
2.3. 고려의 마지막 수호자가 되다
이후 도성으로 돌아오다가, 마찬가지로 잠시 떠났다가 돌아온 이성계를 만난다. 자신도 이성계와 마찬가지로 갈 길을 정했다고 말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대꾸하는데, 아직 정몽주를 포기할 수 없던 이성계는 "길이란 것이 다 이어져 있으니 결국 만나게 될 것이다"라며 떠보지만, 정몽주는 "그렇게 만나봐야 합일을 이루지 못하며, 결국 외나무다리에서 만날 원수일 뿐"이라고 선을 긋고는 먼저 갈 길을 떠난다.그리고 정도전의 집을 찾아가서는 "백성을 위해서라면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 죽이는 것이 옳은 것이냐, 우리 백성들이 그렇게 간악한 존재냐"고 따진다. 그리곤 당여들을 규합하여 이성계에 맞설 세력들을 구축한 뒤, 공양왕을 움직여 윤이·이초 옥사로 투옥되어 있는 인사들을 석방하도록 움직이고 이방원을 통해 이성계에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를 하게 한다.
자신의 측근이 된 김진양과 함께 폭우가 내렸던 청주옥에서 살아남아 다른 곳으로 옮겨진 스승 이색과 권근을 비롯한 죄인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게 되고, 그곳을 이방원과 함께 찾아온 정도전과 논쟁하며 그의 모습에 분노하는 동시에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정도전의 탄핵을 주도한다.[13] 이후 이를 처남들을 통해 알고 그의 저택[14][15]에 찾아온 이방원과 논쟁을 벌이고, 정도전이 탄핵을 당해 조정에서 쫓겨나는 동안에는 이성계를 찾아가서 정도전이 돌아오지 못하게 할 거라며 고려의 충신으로 돌아오길 간청한다.
하지만 이성계의 아내인 한씨가 사망한 후, 정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뒤늦게나마 방원이 3년상을 치르는 묘소를 찾아와 문상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고려 제일의 유학자임에도 고인이 독실한 불자였음을 배려해 극락왕생을 빌어준다. 그리고 한씨를 처음 만났을 때 이성계의 귀환을 기원하던 모습을 보았던 이야기를 해주며, 슬피 우는 방원을 진심으로 위로해 준다. 그러다 밤이 되어 방원의 초막에서 잠을 자게 되는데, 그 사이 단검을 든 이방원이 그를 노리면서 위험에 빠지게 된다. 끝내 자신을 죽이지 못한 이방원이 크게 오열하자 그 소리에 깨면서 자신이 위험한 상황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방원은 일어난 정몽주에게 제발 자신들이 가는 길을 막지 말아달라고 호소하지만 (이를 받아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는 편지를 남기고[16] 날이 밝자마자 바로 초막을 떠난다.
공양왕으로부터 수시중에 임명된 후 첩자를 통해 이성계의 동향을 파악하다가 사냥 중 낙마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자, 기회라고 판단하여 탄핵 상소를 통해 정도전에 이어 조준을 비롯한 다른 개국파 관료들을 끌어내린 후 공양왕에게 그들을 참형에 처할 것을 간곡히 요정한다.
하지만 공양왕이 이성계가 멀쩡히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근심한 나머지 이를 승인하지 않고 국문만 할 것을 명하자, 자신과 뜻을 함께 하는 다른 대신들과 공양왕의 처소 앞에서 무릎을 꿇고 다시금 청하는 동시에 국문을 맡은 관리들에게는 죽어도 상관없으니 개국파 관료들에게 가혹한 국문을 할 것을 명령하며 그들을 보낸다. 그러나 다른 대신들은 간 상황에서 그만 홀로 밤늦게까지 처소 앞에 남아 죄인들을 참수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그의 청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2.4. 선죽교에서 최후를 맞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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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 장면 |
그가 죽자 국문을 당하던 이성계 일파의 대신들은 모두 석방되었고, 고려에 충성하던 일파들은 모두 와해되었다.[18] 이방과, 이화, 이제는 공양왕을 겁박하여 정몽주를 대역죄인으로 몰고, 시신은 방의와 방간에 의해 저자에 효수된다. 이방원은 정몽주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이 상황을 형제들에게 뒤늦게 알고 그가 효수된 장소로 왔다가 무심코 뒷걸음질칠 정도로 충격을 받았고,[19][20] 도망치듯 외진 곳으로 가 울부짖으며 정몽주에게 사과한다. 그런 이방원과 마주친 정도전은 민심수습을 위해 누군가 정몽주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게 시신을 지키고 있던 군사들을 물리라고 이방원에게 조언한다. 그 후로는 제자들에 의해 거두어져 안장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21]
2.5. 사후
25화에서 자신을 죽인 이방원에 의해 지금 관료들은 정몽주의 왕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면서 복권된다.[22]3. 최후 관련 고찰
정몽주가 백주대낮에 살해 당하는 묘사를 두고 '드디어 역사 고증을 맞췄다.'라고 보는 경우가 있으나,[23] 실제로는 관찬 사서 뿐만 아니라 각종 야사집에도 정몽주가 죽은 시간에 대한 기록은 없다. 즉, 낮에 참살당하든 밤에 암살당하든 고증이 틀렸다고 보긴 힘들단 소리이다.다만 특정할 수 없는 시간대 외에 다른 건 충실한 고증이다.
이성계가 이방원을 꾸짖는 과정에서 한 발언[24]을 해석해 보자면 시간대와는 별개로 참살 직후 이방원의 수하들이 정몽주를 죽였다는 소문이 개경 시내에 삽시간에 퍼졌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정몽주 피살 사건의 실상이 인적 드문 곳에서의 암살이 아닌 만인들이 보는 앞에서 이루어진 공개 살인 사건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인적 없는 밤중의 암살로 그려진 예전 작품들(용의 눈물, 정도전, 육룡이 나르샤 등)의 선죽교 피격씬들에 비해 훨씬 나은 고증이다. 고려시대에 가로등이 있었을 리 없지 않은가. 설령 백주대낮이 아니라도 어느정도 사람들이 거리를 왕래하는, 해가 지기 직전인 늦은 오후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당초 이방원의 정몽주 참살 계획은 대낮에 도당으로 쳐들어가 그 곳에서 근무 중인 정몽주를 죽이는 것이었던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25] 이 부분만 봐도 이방원은 정몽주를 은밀히 살해하는 것이 아닌 반대파들에게 일종의 정치적 경고를 위한 공개 척살 대상으로 봤음을 알 수 있다.
정몽주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말을 박차 달아나는 묘사도 고증에 충실한 대목이다. 태조실록 총서에 말을 채찍질해 달아난 정몽주를 추격해 낙마시킨 다음 베어 죽였다고 적고 있다. 전작들은 심야에 당당히 맞서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식으로 묘사하는데 이런 묘사는 물론 보기에 멋있고 극적 카타르시스를 선사할 수는 있어도 여러 문헌들에서 드러난 역사적인 맥락과는 거리가 있다.[26]
한편, 이 과정에서 야사인 하여가와 단심가도 깔끔하게 생략되어 비장미보다는 죽음 자체가 더 강조된 편이다. 다만 이 부분은 6-7화에서 반복해 나온 이방원의 정몽주 설득 파트에 넣었어도 극의 흐름에 크게 방해가 안 되게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아예 없는 건 좀 아쉽다는 반응도 있다. 다만 한번에 직접적으로 담지 않았을 뿐이지, 하여가 단심가에서 묘사되는 서로의 입장은 6-7화의 담론 파트에서 충분히 묘사되기는 하였다.
그 외에 이방원의 단독행위로 묘사되곤 했던 정몽주 참살 사건이 이방원 혼자가 아니라, 이성계 주변 인물들의 공감대를 통해 시행되었음을 묘사한 점도 눈 여겨 볼만 하다. 이성계의 아우들인 이지란, 이화에게서 먼저 정몽주를 죽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고, 이방의가 정몽주를 죽여야 한다고 적극 주장하기도 했다. 형제들 중 가장 자기 주장이 약하고 온건한 이방의가 정몽주가 죽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정몽주에 대한 전주 이씨 일가의 적의와 두려움은 그만큼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계의 엄명으로 인해 일가 사람들이 정몽주를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방원이 아버지의 노여움도 걱정하지 않고 스스로 총대를 매는 구도가 형성된다. 정몽주의 죽음 이후 다른 일가 사람들에 의해 정몽주를 대역죄인으로 모는 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모습[27]을 보여 줌으로서, 이 사건이 이방원 혼자가 아니라 이성계를 제외한 일가 사람들의 의지에 의한 것임을 드러낸다.
작중 정몽주 참살 사건은 이씨 일가의 역할 분담을 강조하는데, 강씨의 묵인하에 이방원이 정몽주 참살을, 이방과와 이화, 이제는 왕을 겁박하여 명분 만들기를, 이방의, 이방간은 효수를 맡는다. 종래의 매체는 이 움직임의 중심을 이방원으로 묘사하곤 했는데, 본작에선 딱히 누군가가 중심이 되는 일이 없이, 이성계의 엄명으로 빠진 이지란을 제외한 가족 전원이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상술했듯 이방원은 어디까지나 정몽주를 죽이는 일의 "직접적인 실행과 책임만" 맡았다는 느낌이다. 상당히 충실한 고증인데 20대 중반에 불과한 나이에, 문관, 집안내 역할도 다섯째 아들이 할 만한 정도[28]에 국한되어 있던 이방원이 가별초 주요 지휘관들을 주도적으로 끌고갔을 확률이 거의 없기 때문. 당시 가별초를 이끄는 위치였던 이방과가 총괄지휘 겸 공양왕에 대한 공세를 담당하고, 이방원은 이방과와 실행조(조영무, 조영규, 고여 등) 중간에 있었을 확률이 높다.
결론적으로는 역대 사극 중 가장 객관적으로 묘사된 정몽주의 죽음이 되었다. 이전 사극들에서는 정몽주가 예정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물론, 본 작에서도 이성계 세력과 목숨을 걸고 맞서고, 이성계 일파가 자신을 암살할 것이란 소문이 파다한 와중에도 오히려 당당한 모습을 비치기 위해 단신으로 이성계의 집에 들어서는 담대한 모습도 보여준다. 하지만 자신의 죽음이 곧 고려의 멸망을 의미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입장에서 어떻게든 살아날 길을 모색하려 하고, 그럼에도 피할 수 없었던 최후를 담담히 보여준다.
또한 정몽주가 죽는 장면 역시 최대한 간결하고 급작스럽게 묘사되었고 그의 죽음 자체보다는 이후 벌어진 파장, 특히 이성계와 한씨 소생 자식들간의 갈등이 더 강조되어 이후 벌어질 참사의 떡밥을 뿌렸다.[29]
4. 인간 관계
4.1. 이성계
황산대첩 때 조전원수로서 참여해 이성계와 동고동락한 동지[30]. 위화도 회군 때까지는 뜻이 맞았지만 이후 이성계가 본격적인 새 왕조를 열려고 하자 고려를 지키기 위해 맞선다. 그러나 이성계가 정몽주를 애틋하게 여기는 것처럼 정몽주 역시 마지막까지 치달은 상황에도 눈물난다고 할만큼 각별한 사이다. 사실 이 작품의 이성계는 평소에 아끼던 이들이라도 한번 거스르기 시작하면 가차없이 쳐내는 성격이다. 최영이 그랬고 이방원이 그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대립했는데도 이성계가 붙잡고 애써 사정할만큼 우러러보던 게 바로 정몽주였다.4.2. 이방원
가르침을 준 제자. 영민하던 제자가 소위 대업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자 그 모습을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깝게 여기고, 8화에서 이방원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방원 본인도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를 죽이고 효수했을때 죄책감을 많이 느꼈으며 즉위 후에 그의 명예를 복권시켰다.4.3. 정도전
동문수학한 학우. 정치적으로 입장이 달라져 대립하면서 서로를 제거할 틈을 노린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짦은 추모를 할만큼 정이 남은 상태다.5. 어록
신하된 자가 군주를 폐한다는 말을 어찌 그리 쉽게 내뱉는단 말이냐? 제 멋대로 왕을 폐하고 섬기는 자를 가리켜 뭐라 하는지 아느냐?! 그걸 바로
역적이라고 하는 것이야! 알겠느냐? - 3회, 창왕의 폐위를 주장하는 이방원을 꾸짖으며
|
미안해하실 것 없습니다. 도성의 꼬마들도
목자(木子)가 왕이 될 거라는 노래를 부르며 다닌답니다. 그런데도 깨닫지 못하고
대감을 믿었던 제 잘못일 뿐입니다. - 3회, 폐가입진 후 이성계의 본심을 알게된 뒤 그를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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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의 길이 다르면 결국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일 뿐입니다. - 5회, 결국 이성계와 길을 달리할 것을 선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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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지 못한 방법으로 이룩한 것이 옳은 일이 될 수는 없네. 지금
자네가 저지르는 모든 악행은 언젠간
자네에게 고스란히 돌아갈 걸세. - 5회, 정치 공세를 밀어붙이는 정도전을 비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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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혼자라고 생각하느냐? 가서 이성계 대감께 전하거라. 이
고려를 지키려는 신하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고. 어서 가서 전하거라. 어서! - 5회, 세력을 모은 뒤 전주 이씨 가문에 선전포고하다
|
바로 그 불가피함을 난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느니라. 누군가 죄 없이 희생당해야 한다면 그건 옳은 일이 아니다.[31] 이건 삼봉뿐 아니라 이성계 대감께도 하고 싶은 말이고, 너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다. 백성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무고한 인명을 해치고 나아가서는 용상을 찬탈하려는 일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느니라. - 6회, 이방원과의 논쟁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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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울어라...
어머니란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날 게다. 지나가는 바람소리마저 어머니의 목소리 같아서 눈물이 솟을 게야. 더 울어라. 슬픔을 담아두면 독이 되느니라. - 6회, 3년상 중인 방원을 위로하며
|
내가 만약 유자가 아니라면, 대감처럼 부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다음 생을 기약했을 겁니다. 어쩌면 다음 생에는 대감을 왕으로 모셨을지도 모릅니다. - 8회, 이성계에게 남긴 마지막 말
|
[1]
사후 조선에서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 증작에 영의정 추증.
[2]
정도전에서는
임호가 맡았다. 최종환은
여인천하와
사임당, 빛의 일기, 임호는
대장금에서
중종 역을 맡았다. 그리고 임호도 태종 이방원에서
유정현 역을 맡았다.
[3]
실제 이방원의 스승으로 불릴 수 있는 인물은 유년기 스승인
원천석, 진사시 지공거
이숭인, 문과 지공거
우현보다.
[4]
임호와는
중종과
정몽주를 연기한 경험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5]
배우 최종환은 키 183cm으로 180cm인 이방과의 김명수보다 크고, 체격도 좋다.
[6]
이때 정도전이 "조민수 장군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라고 말하는데, 그 말을 면전에서 듣고 있는 최종환은 <육룡이 나르샤>에서 조민수를 맡았다는 것이 배우개그다.
[7]
동일한 시대를 다룬 〈
정도전〉에선 당장 이성계를 막을 방법도, 폭군인 우왕을 놔둘 수도 없으니 복잡한 심정을 꾹 참고 합류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이성계가 아예 왕조를 엎을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대립 시작.
[8]
사실 말리는 척만 한 거다. 방원을 회합에 참여시킨 이성계의 속셈은 자신이 직접 낼 수 없는 과격한 의견을 표출하여 반응을 떠보기 위한 식으로 내세운 것.
[9]
배우개그로, 배우가 맡았던 <육룡이 나르샤>에서 조민수는 위화도에서 이성계가 회군을 제안하자, 한 술 더 떠서 회군의 조건으로 우왕의 폐위를 내세운다.
[10]
이 술자리에서
들러리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게 순우리말인 줄 몰랐던 많은 시청자들이 사극에 외래어가 뭐냐며 급발진하다
이불킥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11]
<
정도전>에서 정몽주가 두 왕의 폐위와 살해에 앞장섰던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12]
이색은 조민수와 결탁하여 신돈의 핏줄인 창왕을 옹립한 혐의, 변안열은 유배된 우왕의 사주로 이성계 암살에 가담한 혐의로 탄핵당한다.
[13]
탄핵 장계는 간관인 김진양이 올렸지만, 그가 배후에 있었음이 암시된다.
[14]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듯 그의 저택에는 유생들이 잔뜩 모여있었고, 그 유생들이 정몽주를 찾아온 이방원을 막아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15]
여담으로 그의 집은 성리학을 한반도에 들여온 안향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소수서원에서 촬영되었다.
[16]
마지막에 '건강하거라.'라는 글로 끝내는데, 자신 또한 삼년상을 치러본 만큼 삼년상을 치르느라 고생할 방원에 대한 걱정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편지의 글이 나레이션으로 나올 때 개경으로 돌아가기 전, 방원을 안타깝게 여기는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을 죽이려 해서라도 상황을 타파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자신의 자괴감에 심적으로 많이 몰려있게 된 방원과 그런 방원을 몰아붙이게 만든 현실의 상황에 스승으로서 안타까움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17]
호위병력을 데리고 가라는 김진양의 부탁도 거부하고 갔는데, 이는 이성계가 두렵지 않음을 스스로 보여줌으로서 공양왕의 공포를 진정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작중에서 이성계는 정몽주를 거의 성역 취급하며 절대 건들지 말 것을 아들들에게 명령했으나 문제는 이방원이었다.
[18]
이방과를 통해 정몽주가 피살된 것이 알려지자마자 대신들이 모두 자신들의 집으로 숨었다고 언급된다.
[19]
유자로서 당할 수 있는 최악의 취급(신체훼손, 역적 취급, 매장되지 못함)을 모조리 받은 것이다. 이방원 또한 유자이므로 이 광경은 꽤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20]
정몽주가 효수된 장면을 공영방송 사극치고는 꽤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21]
우현보가 시신을 거두었다는 야사가 있지만, 야사의 특성상 사실이라고 확답을 할 수 없으므로 이것이 극중에서 꼭 반영될 이유는 없다.
[22]
실제로는 태종 즉위 원년에 복권된다.
[23]
용의 눈물,
정도전,
육룡이 나르샤,
대풍수 등 지금까지의 다른 사극 작품에서는 사람 인적이 드문 곳에서 밤에 살해당하는 것으로 연출했다.
[24]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大臣)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25]
이 기록은 8회에서도 묘사된 부분이다.
[26]
다만, 드라마 내적인 개연성은 충족시킨다.
용의 눈물,
정도전,
육룡이 나르샤 등 여러 작품들을 보면 극 중에서 정몽주는 자신의 힘만으론 고려를 지키기 힘들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으며, 비극적인 최후를 예상하는 듯한 암시가 몇 차례 나온다. 기록과 차이가 커서 그렇지.
[27]
이 과정은 이방원은 전혀 알지 못하고 모두 종결되고 나서야 겨우 듣는다. 이방원이 정몽주 참살 사건의 전체를 주도한게 아님을 보여주는 요소다.
[28]
빈객 접대 거들기, 위화도 회군 때 가족들 대피, 1388년 이색의 사행때 서장관으로 동행 등 딱히 지휘, 통솔을 발휘할 필요가 없는 보조 역할에 머물렀다. 창왕 입조 사절의 부사를 맡은 이방우, 가별초 핵심 지휘관 이방과처럼 책임자 위치에서 일을 수행한 적은 아직 없었다.
[29]
이성계는 직접적으로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뿐만 아니라 이 사건에 관여한 자신의 형제와 다른 자식들까지 모두 '방원이와 똑같다'고 평하며 문전박대하는데, 설상가상으로 정몽주 참살을 묵인했던 강씨가 슬그머니 발을 빼고 한씨 소생의 자식들과 이성계의 사이를
이간질하면서 이성계가 자기 형제들과 한씨 소생의 자식들을 불신하고 강씨 소생의 자식들을 편애하는 구도가 형성된다. 정몽주 참살을 고려 멸망뿐만 아니라 1차 왕자의 난의 시발점격인 사건으로 묘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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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는 황산대첩 이전부터 만났던 사이이다. 이성계와 정도전과의 관계보다 훨씬 더 가까워졌던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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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도 이 말은 훗날 태종 이방원의 아들 세종 이도가 처남들을 숙청하려는 이방원을 향해 비슷한 말을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