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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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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28e><colcolor=#ffffff> 모기업 관련 정보 | 모기업 |
일본시리즈 우승 ★★ |
1960 · 1998 | |
리그 우승 (2회) |
1960 · 1998 | |
클라이맥스 시리즈 | 2016 · 2017 · 2019 · 2022 · 2023 · 2024 | |
시즌별 요약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경기장 | 1군 요코하마 스타디움 · 2군 요코스카 스타디움 · 지방 홈구장 HARD OFF ECO 스타디움 니가타 | |
과거 오사카 구장 · 카와사키 구장 | ||
홈 중계 채널 | TBS 테레비2 | |
현역 선수 경력 | 츠츠고 요시토모/선수 경력 | |
주요 인물 | 구단주 난바 토모코 · 감독 미우라 다이스케 · 선수회장 오오누키 신이치 · 주장 마키 슈고 | |
구단 상세 정보 | 역사 · 선수단 및 등번호 · 역대 선수 · 응원가 · 유니폼 | |
틀 문서 | ||
코칭스태프 | 투수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육성 선수 | 역대 감독 | 역대 1라운드 지명 선수 |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
1. 개요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의 역사를 기록한 문서. 시즌별 문서는 2012년부터 정리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 전까지의 역사를 다룬다.모기업이 고래나 잡고 어묵이나 만들어 팔던 회사였던 덕분에, 구단에 대한 지원이 빈약하여 태생적으로 센트럴리그 공인 동네북의 운명을 짊어져 왔다. 그래도 1950년대에는 모기업조차 없어서 시민들의 성금으로 운영하던 진정한 시민구단인 카프보다는 사정이 조금 나았다. 그 후 마쓰다가 경영권을 인수한 히로시마 도요 카프가 안정된 재정 상황을 바탕으로 강팀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까진 두 팀 다 짠돌이 모기업 덕분에 하위권에서 친하게 지내는 단짝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2005년 창단해서 2013년 첫 일본시리즈 진출 후 우승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과 함께 2016년까진 일본프로야구에서 일본시리즈에서 패한 적이 없는 둘 뿐인 구단이었다. 1998년 일본시리즈 3차전에서 패하기 전까지는[1] 일본프로야구 12개구단 중에서 유일하게 일본시리즈에서 단 1게임도 진 적이 없는 구단이라는 타이틀을 보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프트뱅크와의 2017년 일본시리즈 판도를 보면 첫 패배를 안을 가능성이 농후했고, 결국 4-2로 탈락하면서 승률 100%는 깨졌다.
2. 태동기
타이요 훼일즈 시절 심볼 로고 |
1953년 영화사인 쇼치쿠의 구단인 쇼치쿠 로빈스와 합병하여[3] 다이요쇼치쿠 로빈스(大洋松竹ロビンス로 이름을 바꾸고 쇼치쿠의 텃밭인 교토부로 연고지 이전을 했다. 그 뒤 1954년 요쇼 로빈스(洋松ロビンス)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으나[4] 1955년 쇼치쿠가 야구단에서 손을 떼면서 다시 다이요 훼일즈로 이름을 바꾸면서 가와사키시로 연고지를 바꾸면서 가와사키 구장으로 입성한다.
이 시기, 다이요 훼일즈는 드라마틱한 첫 우승을 달성하게 되는데 1954년부터 1959년까지 무려 6년 연속으로 꼴지를 달성, 이에 구단에서는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일본시리즈 3연패를 이끈 명장 미하라 오사무를 감독으로 영입하여 1960년 리그 우승[5]을 차지하고, 1960년 일본시리즈에서 다이마이 오리온즈을 4승 무패로 꺾고 우승하였는데, 전년도 꼴찌팀이 다음해 일본시리즈에서 바로 우승한 최초의 경우다. 에이스 아키야마 노보루, 구원투수 곤도 마사토시를 중심으로 한 투수진에 신인인 콘도 아키히토와 젊은 교타자 콘도 카즈히코의 활약, 그리고 감독 스스로도 '초2류선수' 라고 부른 시마다 겐타로, 스즈키 타케시 등이 명포수 도이 키요시와 조화를 이뤄 얻어낸 그야말로 깜짝 우승이었다.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시절 로고 |
이후 1978년 요코하마 스타디움의 개장에 맞춰 요코하마시로 연고지를 옮겨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즈(横浜大洋ホエールズ), 그 후 1993년 포경업에 대한 세계적인 여론 악화와 맞물려 기존의 포경업 이미지를 버리고자 시민구단을 표방하면서 팀 이름에서 기업명을 빼고 요코하마 베이스타즈(横浜ベイスターズ)가 되었다.
1993년부터 2011년까지 사용한 로고. |
3. 1990년대 이후
일본시리즈 두 번째 우승은 1998년에 나왔다. 명실상부한 베이스타즈 최고의 전성기로, 당시 일본프로야구 특급 마무리었던 사사키 카즈히로와 이시이 타쿠로, 하루 토시오, 스즈키 타카노리, 로버트 로즈, 코마다 노리히로, 사에키 타카히로, 다니시게 모토노부 등이 포진한 머신건 타선을 앞세워 두번째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1998년 일본시리즈 우승 직후 환호하는 사사키 카즈히로와 다니시게 모토노부 |
1997년 후반기부터 갑자기 팀이 미치기 시작, 당시 최강이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 맞짱을 뜰 정도로 상승세를 타면서 2위로 시즌을 종료.[11] 1990년 이후 7년만에 A클래스에 진입하더니 급기야는 1998년엔 리그 우승을 거두고, 일본시리즈에서 세이부 라이온즈마저 꺾어버리며 38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도 차지해버렸다. 리그 우승의 순간, 일본시리즈 우승의 순간이었다.
1999년은 개막 초반에 비틀거려 하위권으로 쳐지는 바람에 주니치 드래곤즈에게 리그의 주도권을 내주고 끝내 우승은 놓쳤지만 그래도 시즌 끝나고 나니 3위였다. 그래도 이 해 '머신건 타선'만큼은 절정에 달해서, 팀타율이 2할 9푼 4리에 달하고, 용병 로버트 로즈가 192안타[12], 타율 .369, 35홈런 153타점의 역대급 활약을 하는 등 절호조의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2000년 시즌을 끝으로, 팀을 더 강하게 탈바꿈 시킬 확실한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바라던 선수들과의 갈등으로 자율야구를 추구하던 곤도 감독이 사임을 한 뒤, 정반대 스타일의 관리야구의 대명사인 모리 마사아키를 감독으로 맞이한게 결정적으로 패착이 됐다. 세이부 라이온즈에서는 일본시리즈를 6번이나 우승하는 등 명감독으로 이름을 날린 모리였지만 이 팀에 와서는 그동안의 팀컬러에 맞지 않는 관리야구로 팀이 서서히 공중분해. 1999년 시즌을 마치고 팀의 기둥뿌리였던 사사키 가즈히로가 메이저리그로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3년연속 A클래스 + 우승을 경험해본 선수들의 끗발로 2001년까지는 어떻게 버티며 2년연속 3위를 차지해 5년 연속 A클래스에 성공했다. 그렇지만 해를 거듭하면서 몰락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음은 누가 봐도 확연했다.[13] 결국은 2002년 49승 86패로 최하위를 기록하면서 완전 몰락. 모리는 도중 사임했다.
2002년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팀 성적은 2003년 45승 94패 1무로 완전히 박살난다. 2004년 59승 76패 3무를 거두며 조금 나아졌으나 순위는 그대로 최하위. 결국 이 2년간 감독직을 역임했던 야마시타 다이스케는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우시지마 카즈히코 감독 체제 첫 해인 2005년에 잠깐 3위로 올라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2006년에 다시 최하위로 추락. 오야 아키히코 감독 체제 첫 해인 2007년에는 시즌 초반 2위를 하면서 모처럼 선전하는 듯 했지만 시즌 후반으로 가면서 투타가 붕괴되어 추락을 거듭했고 아쉽게 4위로 마감했다.
아무튼 이런 사정으로 인해 이 팀이 70년이 넘는 긴 역사 동안 리그 A클래스(1~3위)에 오른 적은 딱 20번 뿐이다. 현재 있는 12구단 중 21세기 신생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를 제외한 나머지 11구단 중 꼴찌이며[14] 심지어 일본시리즈 우승을 1번도 못 이루고 10년도 전에 해산한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22번) 보다도 밀린다. [15]
아래가 그 20번 A클래스의 연표. 볼드체는 일본시리즈 기록이다. 괄호 안의 숫자는 당시 순위.
1960(1) - 1962(2) - 1964(2) - 1969~1971(3) - 1979(2) - 1983(3) - 1990(3) - 1997(2) - 1998(1) - 1999~2001(3) - 2005(3) - 2016~2017(3) - 2019(2) - 2022(2) - 2023(3) |
팀이 이 모양 이 꼴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첫째로는 역지명제가 본격적으로 영향을 끼친 90년대 후반부터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던 비인기팀의 한계 때문에 최고의 신인은 늘 교진군과 같은 인기 많고 자금력 좋은 구단들에게 빼앗겼던 것이나, 구장이 유흥가와 가까운 탓에 이기면 기뻐서 한 잔 걸치고 지면 잊기 위해 한 잔 걸치는 막장스런 팀 분위기, 코치들의 역량 부족 등이 어우러져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모기업이 강한 팀을 만들어서 팬 수를 늘리고 인기팀이 되겠다는 의지와 비전을 가지기는 커녕 구단을 회사 경영에 방해가 되는 짐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았고, 12개 구단 체제를 깰 수 없어서 마지 못해서 근근이 연명만 가능한 수준 이상의 투자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4. 2008년~매각 이전
4.1. 2008 시즌
이전까진 꼴찌를 하긴 했어도 반등세를 보인 시즌이 존재했지만 08년 시즌부터 3년 연속 연속 꼴찌를 기록하는 등 일본인에게 동네북 이미지를 다시 한번 제대로 각인시키고 있다. 개막 3연전을 스윕패로 시작하더니 4월 한 달 동안 7승 18패를 기록하면서 일찌감치 맨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래도 이때까진 5위 히로시마와 3.5게임 차이여서 탈꼴찌의 희망이 조금이나마 있었지만 5월에도 변함없이 패전을 거듭하며 꼴찌자리를 더욱 굳건하게 유지했고 시즌 막바지에 당한 14연패로 확인사살까지 완료하며 1위 요미우리와 36.5게임, 5위 야쿠르트와 19게임 차이가 나는 압도적인 최하위로 시즌을 마쳤다.참고로 이 시즌 팀 승률은 리그 수위타자를 차지한 우치카와 세이이치의 타율(.378)[16]보다 더 낮은 승률(.338)을 기록했다..[17]
4.2. 2009 시즌
이 해에도 개막 6연패를 당하며 시즌을 출발했고 작년과 마찬가지로 시즌 초반부터 일찌감치 밑바닥에 틀어박혔다. 결국 5월 18일자로 성적 부진의 책임을 물어 오야 아키히코 감독을 시즌 도중 해임시키는[18] 초강수를 뒀지만 어차피 팀 꼬라지가 막장이었기에 큰 변화는 없었다. 결국 이번 시즌도 거의 매달 5연패 이상을 꼬박꼬박 적립하는 졸전의 향연 끝에 또다시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했다.이 해의 기록은 51승 93패로 정규시즌 우승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승차 42.5 게임이었다. 그리고 2년연속 90패 초과.
결국 2010년부터 명 투수 조련사로 불리는 오바나 타카오 전 요미우리 투수코치가 지휘봉을 잡게 된다.
4.3. 2010 시즌
2010 시즌을 앞두고 치바 롯데 마린즈와의 트레이드로 선발투수 시미즈 나오유키를, FA로 포수 하시모토 타스쿠[19]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자유계약으로 풀린 한국계 미국인 혼혈 강타자 터멜 슬레지를 영입하는 등 의욕적으로 출발했다.시즌 초반부터 삽질을 거듭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가 바닥을 깔아주고 이제껏 4월부터 죽을 쑤던 팀 성적도 나름대로 나아진 덕에 센트럴리그 4위까지 올라가는 등 선전했으나 얼마 못 가서 무너진 투수진과 전열을 다시 가다듬은 야쿠르트의 약진으로 인해 추락하기 시작하더니 교류전 최약체 아니랄까봐 교류전에서 처참하게 털리며 밑바닥으로 추락. 이후에도 줄곧 센트럴리그 꼴찌를 달리다가, 결국 5위 히로시마와 11.5게임, 1위 주니치와 32게임 차이가 나는 압도적인 승차로 센트럴리그 3년 연속 꼴찌가 확정되었다. 그것도 3년 연속 승률 3할대. 더불어 사상최초로 3년 연속 90패도 확정. 8-8-8-8을 찍은 시절의 롯데 자이언츠도 3년연속 90패는 안 했다.[20] 역시 센트럴리그 공인 동네북.
또한 이 해 일본 최초 최하위 기록 20번이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을 달성했다. 참고로 이 전까지 최다 최하위 기록을 가지고 있던 건 콩라인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19번). 또한 일본 최초 90패 기록 6번까지 달성했다. 참고로 이전 최다 기록도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5개)가 가지고 있었다.
감독으로 명투수코치 출신인 오바나가 감독을 맡았는데도 투수진이 전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2009년까지 팀 선발진의 기둥이나 다름없었던 미우라 다이스케는 평균자책점이 7점대로 치솟으며 부진했고 카가 시게루를 제외하면 믿고 맡길만한 선발투수가 사실상 전무한 수준이었다. 불펜도 1점대로 분전한 우시다 시게키와 30세이브를 올린 야마구치 슌 정도를 제외하면 안정감 있는 선수들이 없었다.[21]
마운드 사정이 이렇게 좋지 못한데 타선도 투수력 못지않게 심각했는데 팀 타율은 1위와 3푼 이상이 차이나는 압도적인 꼴등을 기록했다. 특히 가장 큰 피해를 본 게 사회인 야구에서 뛰다가 2010년 신인으로 입단한 카가 시게루. 신인임에도 꼬박꼬박 로테이션을 지키며 145이닝을 던져서 방어율 3.66이라는 훌륭한 피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정한 타자들은 그에게 3승 12패라는 처참한 기록만 안겨주었다. 그의 항목에 올라와 있는 방어율 순위표를 보면 참 눈물이 쏟아진다.
오프시즌에 구단 매각관련해서 홍역을 치렀으나 결국 매각처와의 교섭결렬로 2011년까지 계속 이 꼴로 갈듯. 게다가 뒤숭숭한 팀 분위기에 FA최대어인 우치카와 세이이치가 타구단과 교섭하겠다고 선언, 재정축소로 그냥 풀어주는 분위기상 팀 전력은 더 나락으로 떨어질 공산이 크다. 이 때문에 이 해 드래프트는 즉전력으로 쫙 깔고, 4명 지명하고 끝내는 팀도 있는판에 8명이나 대량으로 지명하여 전력 땜빵을 시도했다. 그나마 무라타 슈이치는 어떻게 어떻게 잔류시키는데에는 성공했으나, 우치카와 세이이치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떠나버렸다. 사실 우치카와의 경우는 오이타 출신이기 때문에, 인접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를 상당히 선호하고 있었다. 게다가 전력도 좋아 항상 우승후보로 꼽히고 못해도 플옵은 가는 팀이라 요코하마보다 싼 값을 불러도 갈 판이었다. 금상첨화로 돈지랄로 유명한 호크스의 모기업은 당연히 우치카와에게 제대로 된 대우를 해줬다. 안 뺏기는게 이상한 상황이다.
그래도 그 와중에 FA로 풀린 한국계로 유명한 모리모토 히초리를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4.4. 2011 시즌
여전히 동네북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기존 선수들이 전혀 도움이 안 되는지라 새로 들어온 신인 선수나 용병들을 마운드에 올리거나 타석에 올리지만 마찬가지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더욱이 2011년은 통일구 덕분에 유독 두드러진 투고타저의 시즌이 돼서 무라타나 브렛 하퍼, 터멜 슬레지의 장타력만으로 해결해야하는 팀의 입장에서는 곤란하게 됐다. 거기다 3월 11일 야쿠르트와의 시범경기에선 1-3으로 지던 7회 초에 그 지진이 나서 사상 초유의 지진 콜드패까지 당했다.다행히도 투고타저의 시즌을 맞이해서 선발투수 타카사키 켄타로의 안정적인 투구가 빛을 발하고 있다. 투고타저의 시즌이긴 하지만 오바나 감독의 투수 조련술이 어느정도 빛이 난듯한 느낌. 그 외에도 마무리 야마구치 슌을 비롯한 시노하라 타카유키, 후지에 히토시, 우시다 시게키 등등 불펜들도 잘 던진다. 기본적으로 실력이 있었던 투수들인 만큼 오바나 감독의 능력을 볼 수 있는 사례다.
다만, 다른 투수들은 별볼일 없는데다가 가장 큰 문제는 확실한 선발을 해줄만한 선수가 타카사키 켄타로 말고는 없다는 점이다. 2010년까지 히로시마가 마에다 켄타 한 명 가지고 버틴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22] 이것은 요코하마가 올시즌도 꼴찌에 3할 승률을 할 수 밖에 없어보이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물론, 타선도 시원찮지만 어차피 2011시즌은 투고타저의 시즌이기도 하고 다른 팀에 비해서 딱히 팀타율이 밀리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투수진의 안정이 남은 기간의 성적을 책임진다고 볼 수 있겠다.
투고타저의 시즌이니 만큼 오바나 감독이 마운드 하나는 제대로 휘어잡는 수 밖에 없을 듯. 얼마나 투고타저의 시즌이 심한지 요코하마에서 3할 타자가 안나올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 됐다. 7월 30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슬레지 선수가 5타석 5안타 3홈런 8타점이라는 성적을 기록해 9-5로 승리하였다. 한 선수가 한 경기에 3홈런 때리는 것도 힘들고 8타점 올리는 것도 쉽지 않다. 심각한 투고타저 시즌에 의미있는 기록이 하나 나온 셈이다. 그러나 이처럼 타선의 핵이나 다름 없던 슬레지는 8월 이후 부상에 시달리면서 자주 엔트리를 비우게 되었고 이는 후반기 팀 타선에 무게감이 사라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2011년에도 상황은 전혀 나아진 거 없이 4년 연속 최하위 확정. 거기다 4년 연속 승률 3할대를 기록. 다행히도 전력 절약을 위한 시간제한 규정 덕분에 무승부가 미친 듯이 늘어나서(11무승부) 사상 초유의 4년 연속 90패는 면했다. 그럼에도 86패를 했으니 만약 지진이 안 나고 예년처럼 연장전이 시간 제한 없이 12회까지 가는 승부였으면 아마도 4년 연속 90패는 확실하게 했으리라 예상된다. 그리고 팀을 떠난 우치카와로부터는 긴장감 없는 팀, 뛰는 보람이 없는 팀이라고 공개 인터뷰 상에서 디스까지 당했다.
결국 갈수록 수렁으로 빠져들면서 희망도 없어지고, 거기다 홈에서 주니치가 우승을 확정짓고 오치아이 감독을 헹가래 치는 꼴을 직관하는 굴욕까지 겪게된 타선의 주축 무라타 슈이치가 팀에 정나미가 떨어졌는지 2011 시즌 종료 후 FA권을 행사해서 팀을 떠나버렸다[23].
2000년대 초반까지 개판의 극을 달리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투수진을 지금과 같은 투수왕국으로 만들고, 2000년대 중반에 무능한 호리우치 밑에서 붕괴됐던 요미우리 자이언츠 마운드를 완전히 재건하면서 투수조련의 달인으로 불렸던 오바나 타카오를 감독으로 영입하면서 리빌딩을 꾀하여 더딘 속도이지만 마운드쪽은 그나마 젊은 선수들이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이른바 오바나 효과였다.[24] 그런데 그 오바나 감독도 2011년을 끝으로 구단이 매각되면서 경질되었다.
5. DeNA 매각 이후
5.1. 2012년
자세한 내용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2012년 문서 참고하십시오.5.2.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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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2024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1]
이 날 패전투수가 바로 하마의 반쵸
미우라 다이스케였다.
[2]
일제 강점기 당시 한반도 연안 어업을 장악해서 성장한 기업이다.
포경업도 병행해서 팀명에 훼일스(고래)라는 이름이 들어 가 있었다.
[3]
팀 승률 3할 미만은 상상도 못할 벌금 부과라는 사실상 캐삭빵을 단행했다. 이때 히로시마 카프까지는 살아남았고, 쇼치쿠가 3할에 못 다다르며 다이요와 합병했다. 참고로 쇼치쿠 로빈스는 센트럴리그 초대 우승팀이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을 가지고 있던 구단이었다.
[4]
앞의 요쇼는 다이요(大洋)의 요(洋)와 쇼치쿠(松竹)의 쇼(松)을 따서 지은 것이다.
[5]
그리고 창단 이래 최초의 리그 A클래스.
[6]
다이요 어업에서 마루하로 개칭한 이름. 참고로 마루하는 개명 이전에도 다이요 어업에서 썼던 브랜드로 타이요 웨일스 시절(정확히는 카와사키 시절) 동그라미 안(참고로 동그라미는 일본어로 마루)에 히라가나 'は(하)'가 박힌 로고를 소매패치로 쓰기도 했다.
[7]
이 때의 요코하마 타선은 특별히 거포라고 할만한 선수는 없어서 단타, 2루타 위주로 득점을 내기는 했지만 타선이 마치 기관총을 난사하듯, 1번부터 8번까지 정신을 못차릴 정도의 연타로 상대팀 마운드를 KO시키는게 주특기였다.
[8]
이 시기동안 요코하마는 1997년에서 2000년까지 수위타자를 독점한다.
스즈키 타카노리(1997년, 1998년),
로버트 로즈(1999년),
긴조 타츠히코(2000년).
[9]
가장 큰 특징은 시마다 나오야, 수염마인 이가라시 히데키, 곤도의 긴테츠 시절 애재자이던 아와노 히데유키, 사사키의 후계자로 기대되던 요코야마 유키야나 왼손 스윙맨 세키구치 이오리 등
중간계투진의 로테이션화를 들 수 있다.
[10]
1969~1971년 다이요 훼일스 시절
벳토 카오루 감독 휘하에서 3년 연속 3위를 기록한 이후 두번째였다. 괜히
거인의 별의 호시의 라이벌 "사몬 호사쿠"가 다이요 소속으로 나오는 게 아니다.
[11]
이 해가
나가시마 시게오의
교진군 2기 감독 시절 유일한 B클래스(4위)를 찍은 해였다. 전년도에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 14게임차 나던 걸 뒤엎고 리그 우승을 달성하고선(일명 메이크드라마. 그러나 일본시리즈에선
오릭스 블루웨이브에게 패배했다.) 다음 해 하위권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지도력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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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센트럴리그 최다안타를 기록했다. 이 기록은 2005년 202안타를 친
아오키 노리치카에 의해 깨지고, 2010년에 214안타를 친
맷 머튼에 의해 다시 한번 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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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예로 5년 연속 A클래스의 마지막 해인 2001년엔 3위팀 주제에 승률이 4위팀이었던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밀렸다. 당시 베이스타즈의 성적은 69승 67패 4무 승률 0.507 이었고 카프의 성적은 68승 65패 7무 승률 0.511 이었다. 이렇게 기묘하고 이상한 성적이었기 때문에 1위와의 게임차도 3위인 베이스타즈가 8인데 4위인 카프가 7.5인 못 웃을 상황까지 벌어졌다. 왜 이런 상황이 됐냐면
이 해엔 승률이 아니라 승리 수로 순위를 결정지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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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는
요미우리 자이언츠(73번), 2위는
한신 타이거스(50번), 3위는
주니치 드래곤즈(49번), 4위는
오릭스 버팔로즈(47번), 5위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45번), 6위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44번), 7위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29번), 8위는
치바 롯데 마린즈(26번), 9위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22번), 10위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1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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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만년 약체팀 취급을 받다보니 실제로 캠프 기간 중 한국 야구팀과 일본야구팀이 연습경기라도 할라치면 모 사이트에서 "한화 이글스가 어떤 팀이냐"라는 질문이 들어오는 경우 한국야구 사정을 잘 아는 유저로부터 NPB로 치면 암흑기 요코하마라는 한마디 대답으로 정리되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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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프로야구 사상 우타자로서는 단일시즌 최고 타율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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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부터 우치카와가 완전히 각성하게 되어서 3할 타자에 장타력도 보유한 중장거리형 타자로 변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5년 후,
한국에 있는 이 팀과 운명이 똑같던 팀이 이 굴욕을 한 번 더 겪게 되었다. 당시 타격 1위가 0.348,
2위가 0.345, 한화 승률은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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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여 시즌은 타이요 훼일즈 시절의 레전드였던 타시로 토미오 코치가 대행을 맡았다. 2011 시즌에
SK 와이번스의 코치를 맡았던 사람이며 SK 이후 요미우리, 라쿠텐의 코치를 역임했다가 2019년 다시 친정팀 코치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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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모토는 롯데에서 백업포수로 뛰면서도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는 준수한 공격형 포수였으나 부상으로 먹튀화되어 제대로 뛰지도 못하고 계약기간 종료 후 방출당해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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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 가지 간과해선 안 되는 점이, 요코하마는 144경기에서 90패를 한 거고, 롯데 자이언츠는 133경기에서 2년 연속 90패를 했다는 것. 요코하마가 144경기 중 54승 90패를 거두었다면, 승률이 .351이 되는데, 한국프로야구 기준으로 3할 5푼대의 승률을 기록하려면 133경기에서 47승 86패이다. 즉, 일본에서의 90패와 한국의 85패가 승률이 같다는 소리. 하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론 2001년 70패, 2002년 97패, 2003년 91패, 2004년 72패로, 85패 이상도 2년 연속으로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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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야마구치도 30세이브를 올리는 동안 8패를 당하는 등 보여지는 성적에 비해 안정감이 그렇게까지 좋았던 수준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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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히로시마는 2011년에는 벌링턴이 가세하면서 좀 나아지긴 했는데 이번에는 마에다가 부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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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무라타가 떠나게 된 이유가 답이 없는
하마팬들이 선수 자가용에 테러를 해버린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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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나 타카오가 요코하마의 감독을 맡으면서 2010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투수진은 그대로 붕괴되어 버렸다. 그만큼 능력을 인정받은 코치였다는 점이었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경우에는 워낙 재능이 훌륭한 선수가 많았던지라 아직도 잘 버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