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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2025 시즌 코칭스태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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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81 미우라 다이스케 | |
1군 |
71
코이케 마사아키(외야수비·주루코치) · 72
츠루오카 켄지로(오펜스 치프코치) · 75
이시이 타쿠로(치프 타격 겸 주루 겸 1루 베이스코치) · 76
타시로 토미오(타격코치) · 77
스즈키 타카노리(타격코치) · 79
오오하라 신지(치프 투수코치) 80 아이카와 료지(디펜스 치프 겸 배터리코치) · 82 만에이 타카시(야수 코디네이터) · 94 코스기 요타(투수코치) · 97 타나카 히로야스(내야수비·주루코치) |
||
2군 |
83
아오야마 미치오(2군감독 겸 외야수비·주루코치) · 70
시모조노 타츠야(타격코치) · 73
후지타 카즈야(육성 야수코치) · 74
츠루오카 카즈나리(배터리코치) 84 시마무라 잇키(타격코치) · 85 야나기다 시게오(내야수비·주루코치) · 86 야기 카이(육성 투수코치) · 87 토노 슌(투수 어시스턴트코치) · 88 이리키 유사쿠(치프 투수코치) · 89 나카이 다이스케(야수 어시스턴트코치) · 90 오오무라 이와오(육성 타격코치) |
||
코칭스태프 | 투수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육성선수 | |||
틀: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로 돌아가기 | |||
다른 NPB 팀 명단 보기 |
스즈키 타카노리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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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B 일본시리즈 우승코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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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
|
1998 |
후루타 아츠야 ( 야쿠르트 스왈로즈) |
→ |
스즈키 타카노리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 |
아키야마 코지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
1997~1998년 센트럴리그 수위타자 | ||||
1996년 알론조 파웰 ( 주니치 드래곤즈) .340 |
→ |
스즈키 타카노리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335(1997년) .337(1998년) |
→ |
1999년 로버트 로즈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369 |
1997, 1998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외야수 부문 베스트나인 |
{{{#fff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베이스타즈]] 등번호 51번}}} | ||||
이시바시 미츠구 (1980~1990) |
→ |
스즈키 타카노리 (1991~1997), (2007~2008) |
→ |
타나카 미츠루 (1998~2006) |
{{{#fff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요코하마 베이스타즈]] 등번호 7번}}} | ||||
미야자토 후토시 (1991~1997) |
→ |
스즈키 타카노리 (1998~2006) |
→ |
니시 토시히사 (2007~2009) |
{{{#fff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요코하마 베이스타즈]] 등번호 86번}}} | ||||
나카무라 타케시 (2006~2008) |
→ |
스즈키 타카노리 (2009) |
→ |
시마다 마코토 (2010) |
{{{#fff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요코하마 베이스타즈]] 등번호 77번}}} | ||||
스기모토 타다시 (2009) |
→ |
스즈키 타카노리 (2010) |
→ |
타카기 유타카 (2012~2013) |
{{{#fff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등번호 77번}}} | ||||
츠보이 토모치카 (2015~2021) |
→ |
스즈키 타카노리 (2022~) |
→ | 현역 |
|
|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No.77 | |
<colbgcolor=#009dec><colcolor=#fff> 스즈키 타카노리 鈴木尚典 | Takanori Suzuki |
|
출생 | 1972년 4월 10일 ([age(1972-04-10)]세) |
출신지 | 시즈오카현 하마마츠시 주오구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요코하마 고교 |
신체 | 186cm, 88kg |
포지션 | 외야수 |
투타 | 우투좌타 |
프로입단 | 1990년 드래프트 4순위 |
소속팀 |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1991~2008) |
지도자 |
쇼난 시렉스 육성코치 (2009)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1군 타격코치 (2010) 카나가와 퓨처 드림즈 감독 (2020~2021)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1군 타격 코치 (2022~) |
응원가 |
96년도까지 사용[1][2] 97년도부터 사용 실제 응원 영상[3][4] |
[clearfix]
1. 개요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5]에 몇 안되는 프랜차이즈 스타중 한 명이다. 포지션은 외야수.
'하마의 안타제조기', '센트럴리그의 이치로' 등의 수식어가 있었으며 요코하마가 한창 머신건 타선으로 중흥기를 달리던 시절 3번타자로 활약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자신에게 맞지않는 타격스타일로 교정하다가 실패했을 때 선수생활이 어디까지 틀어지는지 잘 보여주는 선수이기도 하다.
2. 입단 전
고향인 시즈오카를 떠나 요코하마 고교로 진학하였다. 야구부에 입부한 이후로는 포수를 봤지만 어깨부상을 당하며 외야수로 전향했다.외야수비는 비록 평균이하였으나 타격이 워낙 뛰어났던지라 4번타자로 중용되었다. 2학년때 처음으로 고시엔에 출전했으며 고교 3년간 통산 39홈런을 때려내며 장타력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90년 드래프트에 참가해 4순위로 다이요 훼일스에 지명되었다.
3. 선수 경력
그러나 입단 이후 주목받았던 타격은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며 2군에 틀어박히는 시간만 길어졌다. 1군 경기에선 데뷔 첫 해인 1991년 시즌 최후반에 단 1시합 출장, 3타수 무안타에 그치고 이듬해엔 아예 1군에도 못 갈 정도로 기회를 받지 못했다.그러던 것이 1993년, 타케노우치 타격코치의 지도하에 서서히 타격포텐이 터지기 시작. 이 해에 2군에서 4번을 치며 .280 9홈런 47타점의 성적을 거두었고, 1군에서는 12시합에 출장해 24타석 22타수 6안타 1타점 타율 .272를 기록했으며 커리어 첫 안타를 때리고 커리어 첫 타점도 기록했다.
1994년엔 대타요원이긴 하지만 어쨌든 1군에 정착하는데 성공. 8월 9일 도쿄 돔 원정경기에서 요미우리의 상대 투수인 마키하라 히로미를 상대로 데뷔 첫 홈런을 대타 만루홈런으로 장식했다.[6] 1994년 성적은 48시합 출장, 81타석 77타수 타율 .260, 3홈런 8타점을 기록했다.
1994년 쏠쏠한 활약을 펼친 이후 1995년부터 붙박이 좌익수로 낙점받으며 출장 기회가 부쩍 늘어났다. 이 해 7월 16일 홈경기에서 요미우리를 상대로 9회 2사 1,2루에서 역전 끝내기 3점홈런을 날리는 대활약을 했는데, 이날의 활약상은 후에 나온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 3에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전용 시나리오인 기적 에서 해당 경기가 나왔을 정도.
1996년엔 처음으로 규정타석에 도달. 타율 .299를 기록해 아쉽게 3할은 실패했지만 95시즌보다 한층 더 좋아진 모습을 보여주며 다음 시즌을 기대하게 하였다.
1997년엔 데뷔 첫 3할-20홈런을 기록. 타율 .335 21홈런 83타점의 호성적을 올렸다. 이 해에 그는 타율 1위에 오르며 처음으로 수위타자에 올랐다.
1998년. 등번호를 자신의 우상 요시무라 사다아키의 7번으로 변경하였고 이 해 .337의 고타율로 2년 연속 수위타자에 올랐다. [7] 거기다 16홈런 87타점을 기록하여 타점도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며 요코하마의 38년 만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이 해에 열린 1998년 일본시리즈에서 6차전 동안 25타수 12안타 타율 .480 1홈런 8타점 9득점을 기록하며 팀을 38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고 자신은 시리즈 MVP에 올랐다.[8] 이 당시 기록한 9득점은 아직까지도 일본시리즈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아있다.
머신건타선이 정점을 찍은 1999년에도 타율 .329 17홈런 92타점으로 빼어난 활약을 보여주었다. 이해 스즈키는 3년 연속 타격왕을 노렸지만 팀동료 로버트 로즈가 엄청난 타격을 보이며 압도적인 성적을 찍는 바람에 수위타자 3연패는 실패했다. 이 해에 20차례의 맹타상을 기록하기도 했으며 시즌 110득점에 성공하며 구단 신기록을 썼지만 111득점을 기록한 카프의 오가타 고이치에 밀려 득점 1위 타이틀 획득 실패하며 결국 무관으로 시즌을 마쳤다.
2000년엔 시즌 초반 저조한 타격의 영향 때문인지 시즌 중반부터 페이스를 끌어 올렸음에도 3할 타율을 기록하는데 실패했다. 홈런은 1997년 이후 간만에 20홈런을 기록했다.
2001년에는 팀 운영 방침 문제로 선수단과 마찰이 있었던 곤도 히로시 감독이 결국 팀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코마다 노리히로가 은퇴하고 로즈도 퇴단하게 되면서 머신건 타선의 주축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 자연스럽게 타선이 약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이 감독으로 부임한 사람은 과거 세이부의 황금기를 열었던 명장 모리 마사아키. 오프시즌에 팀의 4번타자로 낙점을 받으며 오치아이 히로미츠에게서 새로운 타격지론을 전수받았으나 이는 선수생활에 있어 가장 큰 실수가 된다.
2001년 .315의 타율을 기록하며 3할 복귀에는 성공했으나 홈런이 6개로 크게 줄어버렸다. 거기에 좌타자 최초의 3연병경기까지 치른건 덤. 이와는 별개로 도루는 커리어 최다인 15개를 기록했다. 아무튼 이 해에 4번타자와는 거리가 먼 성적을 찍으며 무언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2002년에는 더 상황이 나빠졌다. 3할 타율은 고사하고 예기치못한 부상까지 겹치며 99경기 출전에 그친다. 1994년 이후 처음으로 100경기 이상을 소화하지 못하며 시즌을 접었다. 2002년 성적은 .282 9홈런 42타점
절치부심한 2003년엔 .311 19홈런 57타점으로 부활했다. 이 시즌에는 타점이 아쉽긴 했지만 다시 풀타임 3할 복귀에 19개의 홈런포를 쏘아 올리면서 전성기의 모습을 되찾은 듯 보였다. 하지만 2004년 새 감독으로 부임한 야마시타 다이스케 감독의 강한 2번타자 기용으로 다시금 침체에 빠진다. '강한 2번타자'라는 역할에 지나치게 얽매이며 부진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모양.
그러는 와중에 좌익수 자리는 사에키 타카히로에게 내 주었고 고교 후배인 다무라 히토시가 공수에서 맹활약을 하면서 스즈키의 입지는 더욱 줄어들었다. 이 시즌을 기점으로 스즈키의 출전 기회는 크게 줄어들었다.
2005년. 우시지마 감독이 새롭게 지휘봉을 잡게 되었고 스즈키는 주니치와의 개막전에 이름을 올리며 다시금 재기를 노렸지만 정작 개막전에서는 타츠나미 카즈요시의 타구를 다이빙 캐치 실패로 3루타를 내 주는 수비로 시즌 출발을 망쳤다. 덩달아 이날 팀도 뒤이어 터진 알렉스 오초아의 만루홈런으로 인해 참패를 당하면서 개막전부터 평판이 깎여나갔다.
이후 수비력을 중시하는 우시지마 감독의 방침에 따라 공수에서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던 스즈키는 수비력이 좋은 코이케 마사아키에게 외야 자리를 넘겨주고 철저히 팀 전력에서 배제되었다. 이 시즌 그는 타율 .215라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여야 했다.
2006년은 어깨 부상으로 인해 개막을 2군에서 시작했다. 2군에서 맹타를 휘두른 덕에 5월 1군의 부름을 받았고 주로 대타 혹은 교류전 지명타자로 활용되었다. 이 해에 스즈키는 대타타율 .380을 기록하며 지난 2년보다는 상당히 좋은 성적을 올렸다.
2007년 새로 부임한 오야 아키히코 감독은 '요코하마 재건'이라는 명목하에 팀을 고쳐나갈것을 시사하고 '스즈키 타카노리의 부활' 역시 요코하마 재건의 일환이었다. 치열한 주전 경쟁 끝에 일단 주전자리를 확보한 4월까지는 3할 타율을 유지하며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싶었으나 5월부터 타격감이 나빠졌고 결국 8월 2군행을 지시 받으며 시즌을 마감했다. 시즌 최종성적은 .232 3홈런 17타점
2008년 요시무라 유키의 외야 재전향과 오제키 타츠야, 래리 비그비, 오오니시 히로아키 등 외야자원이 더욱 많아지면서 외야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치열한 경쟁속에서 개막 로스터에 들어가 주로 대타로 활용되었지만 타격 부진으로 5월 초 2군행을 지시받는다. 2군에선 4할을 때려내며 불방망이를 휘둘렀고 용병타자 비그비의 부상을 틈타 8월 중순 1군에 올라온다. 승격 후에는 2개의 홈런을 쳤지만 2할 중반의 저조한 타율과 낮은 득점권 타율은 실망스러운 성적이었다.
10월 6일 구단으로부터 방출 통보와 함께 2군 코치직 제의를 받았다. 스즈키는 현역 연장과 은퇴를 놓고 한참을 고민하다 10월 13일. 결국 은퇴를 택했다.
NPB 통산 1517경기 1456안타 146홈런 700타점 타율 0.303 출루율 0.363 장타율 0.461 OPS 0.824
4. 은퇴
2009년 3월 22일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요미우리와의 시범경기를 은퇴 경기로 치렀다. 스즈키는 3회말 니시 토시히사의 대타로 현역 시절 등번호인 51번 유니폼을 입고 등장해 상대 선발 세스 그레이싱어에게서 우측 펜스를 넘기는 홈런을 터뜨리며 대미를 장식했다. 경기 종료 후 진행된 은퇴식에선 고교 시절까지 포함해 21년간 몸담았던 요코하마에 대한 애착이나 팬에게 대한 고마움을 전했으며 마지막으로 "오늘 하루, 선수로 돌아가서 행복했습니다. 18년간 정말 감사했습니다"라는 코멘트로 끝맺었다.5. 지도자 시절
베이스타즈 주니어 감독 시절 프로필 사진 |
2011년부터 요코하마 구단의 직원으로 NPO법인 베이스타스·베이스볼 아카데미활동을 하고 있으며 텔레비 카나가와로 중계되는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열렬한 LIVE'[9]의 해설도 맡았다. 2013년 이후에는 NPB 12구단 주니어 토너먼트에서 베이스타즈 주니어 팀 감독을 맡아 4년차에 접어든 2016년 대회에서 팀의 첫 우승을 안겨주었다.
최근에는 다시 구단 야구교실 강사로 돌아와 유소년 야구 육성에 힘을 쓰고 있다.
2020년부터는 카나가와에 새롭게 창단된 독립리그 구단인 카나가와 퓨처 드림즈의 초대 감독을 맡았고 창단 첫 해부터 팀의 지구 우승과 챔피언십 우승을 이끌었다. 2021년을 끝으로 임기가 만료되어 퇴임하였고 친정팀 요코하마 DeNA에서 츠보이 토모치카 타격코치가 퇴단하면서 타격코치 보직을 맡아 줄 것을 요청받고 2022년 팀의 새 타격코치로 부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2022년 팀 타선은 비효율적인 득점력으로 인해 시즌내내 물타선이란 비아냥에 시달린 한신 타이거스와 별반 차이가 없는 낮은 득점을 올리며 10년이 더 지난 시점에서도 타격 코치로서의 능력이 좋지 못하다는 것만 인식시키고 말았다. 그나마 쿠스모토 타이시가 데뷔 이후 가장 많은 경기에 나서며 준주전 수준의 타격을 보이긴 했다지만 그게 끝.[10]
결국 2023년 코치진 개편으로 인해 이시이 타쿠로 야수 종합 코치가 치프 타격 코치로 이동하면서 직함만 타격 코치를 유지할 뿐 사실상 이시이를 보좌하는 위치로 내려갔다.
6. 플레이 스타일
전성기시절엔 항상 3할-15~20홈런 안팎을 꾸준히 쳐내는 중장거리형 교타자로 활약했을만큼 배트컨트롤이 굉장히 뛰어난 선수. 타구방향이 상대적으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스프레이 히터이기도 하다. 데뷔 초 51번을 달고 뛸 적엔 센트럴의 이치로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녔을 정도. 강력하고 빠른 레벨스윙에서 나오는 라인드라이브 타구를 많이 만들어내는 유형이며 또한 주력도 제법 있는 편이어서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했던 시즌이 2차례가 있었고 내야안타로도 자주 살아나기기도 했다. 다만 주루센스는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니었는지라 통산 도루성공률은 그닥 높지 않다.[11]2001년 오치아이의 타격지도를 받은 이후에는 타격폼까지 변하면서 자신의 장점을 서서히 잃어갔다. 라인드라이브 타구를 많이 만드는 유형이었던 스즈키를 뜬공 타자로 만들려다 오히려 타구질이 나빠져 장타에서 손해만 보게 되었고[12] 이후 스즈키는 타격폼이 흔들리는 와중에 2002년 부상으로 주춤하기 시작했고 2003년 과거의 폼으로 돌아가면서 잠시 반짝한 후로는 기량이 급속도로 퇴보하였다.
수비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는데 이는 고교시절 당한 어깨 부상도 한몫했다. 어깨 부상을 당한 이후 외야로 전향했는지라 송구가 거의 가네모토 도모아키급으로 좋지 못했다. 그래서 스즈키 본인도 중계플레이를 할땐 항상 수비력이 뛰어난 이시이 타쿠로를 중심으로 중계플레이를 전개했다고 한다.
송구외에도 외야수비는 평균이하였다. 우승을 눈앞에 둔 98년 일본시리즈 6차전에서 9회초 만세를 부르는 바람에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일각에선 스즈키를 보고 '수비에서도 안타를 제조하는 유형'이라고 했다.
7. 기타
- 프랜차이즈 스타가 드물기로 유명한 요코하마에서 원클럽맨으로 은퇴한 몇 안되는 선수이자 최후의 요코하마 원클럽맨 타자였다. 때문에 요코하마 팬들에게 미우라 다이스케 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팀 레전드로서 좋은 대접을 받는 OB이기도하다. 스즈키의 뒤를 이어 요코하마 원클럽맨으로 선수생활을 마무리할 타자로는 이시카와 타케히로가 가장 유력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 니코니코 대백과에 따르면,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싶은 선수의 대명사라고 나와있다. 그도 그럴것이 충분히 2000안타도 거뜬해 보였던 타자가 2001년을 기점으로 폭망했다.
- 2007년 등록명을 '鈴木'에서 '鈴木尚'로 변경했는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스즈키 타카히로[13]의 등록명도 '鈴木尚'여서 요미우리와 경기를 할 때면 누가 누구인지 헷갈리는 사례가 생기기도 했다.
- 통산 타율은 .303을 기록하고 있는데 현재 NPB 역대 15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비륵 홈런과 타점은 빈약했지만 타율만큼은 2000년대 들어 부진으로 깎아먹었어도 3할대를 끝까지 사수했다.
[1]
走ればラッキー 投げればラッキー タカノリ ヨコハマ ラッキーボーイ
달리면 럭키 던지면 럭키 타카노리 요코하마 럭키 보이
ラッキーボーイ 勝利は君に任せた
럭키 보이 승리는 너에게 맡겼다 [2] 캣츠 아이(만화) 주제가에서 따온 곡으로, 레전드매치 같은 이벤트성 경기를 치를땐 이 응원가와 위의 응원가를 번갈아서 사용한다. [3] 駆け抜けるダイヤモンド 両手を高く上げ
달려나가는 다이아몬드 양손을 높이 올려라
とどろき渡る歓声が 君の胸を焦がす
울려퍼지는 환호성이 너의 가슴을 불태운다 [4] 이 응원가는 요코하마 구단 뿐만이 아니라 일본프로야구 역대 응원가 중에서도 명곡으로 꼽힌다. 명응원가를 언급할때면 빠지지 않고 거의 언급되는 응원가이다. [5] 현역으로 뛸 당시엔 팀명이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6] 이 당시 스즈키가 타석에 들어서기 전 벤치에선 "이 타석에서 치지 못 하면 2군행이다!"라고 협박(?)을 했다고 한다. 그러고나서 타석에서 홈런을 기록했는데 우측 폴대를 아슬아슬하게 직격하는 홈런이었다. 만일 이 타구가 조금이라도 우측으로 휘어서 파울이 되었다면 야구인생 지체가 뒤바뀌었을수도 있다. [7] 다만 이해 시즌 막판까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마에다 토모노리와 치열하게 수위타자 경쟁을 벌였는데, 그 해 요코하마와 히로시마가 양측의 수위타자가 걸린 최종전을 치르게 되자 당시 요코하마의 감독이었던 곤도 히로시가 "만약 마에다가 출장하면 스즈키는 결장시키고, 마에다는 전 타석 고의사구로 승부를 피하겠다." 라는 발언을 하였고 마에다가 이에 분노하여 "팬들에게 꼴사나운 모습 따위 보이고 싶지 않다. 고의사구나 받을 바엔 결장하겠다."며 스스로 출장을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최종전에서 두 선수가 모두 결장해 버렸고, 결국 타율이 2리 더 높았던 스즈키가 영 좋지 않은 모양새로 2년 연속 수위타자가 되는 찜찜한 결말을 맞이했다. [8] 안타를 기록하지 못한 6차전에서 8회말 애매한 땅볼 타구를 쳤는데 당시 1루 주자였던 하루 토시오의 절묘한 주루 플레이 덕분에 야수선택으로 출루했고 뒤이어 터진 코마다 노리히로의 우중월 2루타 때 결승 득점을 올렸다. [9] 요코하마의 경기를 전담해서 중계해주는 중계방송이다. [10] 허나 쿠스모토 마저도 23년도에 접어들면서 22년 시즌의 모습은 사라지고 1할타자가 되고 말았다. [11] 97시도 62성공 35실패로 통산 도루성공률이 63.9%밖에 되지 않는다. [12] 2000년대 들어서 머신건 타선의 주축 선수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면서 모리 감독은 팀 타선을 거포 위주의 타선으로 바꾸려고 했으며 그 일환으로 스즈키를 4번타자로 개조하기 위해 장타 위주의 타격을 하도록 타격을 교정했다. 하지만 스즈키의 거포 전환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모리 감독이 구상했던 홈런타선에 차질이 생겼고 이후에도 장타 위주의 타선을 꾸리려고 했지만 결국 팀성적만 깎아먹고 모리 감독은 팀을 떠났다. [13] 2002~2016년까지 요미우리에서 백업 외야수, 전문 대주자 등으로 뛰며 통산 228 도루(구단 사상 3위 기록이며, 단 1번도 규정타석을 만족하지 않고 200도루를 달성한 최초의 사례다.)와 대주자 통산 도루 1위(132도루)를 기록했다. 또한 200도루 이상 기준 도루성공률 통산 1위(228도루 47도루자, 성공률 82.90%) 기록도 가지고 있었다. 현재 1위는 87%의 성공률을 보유한 니혼햄의 니시카와 하루키
달리면 럭키 던지면 럭키 타카노리 요코하마 럭키 보이
ラッキーボーイ 勝利は君に任せた
럭키 보이 승리는 너에게 맡겼다 [2] 캣츠 아이(만화) 주제가에서 따온 곡으로, 레전드매치 같은 이벤트성 경기를 치를땐 이 응원가와 위의 응원가를 번갈아서 사용한다. [3] 駆け抜けるダイヤモンド 両手を高く上げ
달려나가는 다이아몬드 양손을 높이 올려라
とどろき渡る歓声が 君の胸を焦がす
울려퍼지는 환호성이 너의 가슴을 불태운다 [4] 이 응원가는 요코하마 구단 뿐만이 아니라 일본프로야구 역대 응원가 중에서도 명곡으로 꼽힌다. 명응원가를 언급할때면 빠지지 않고 거의 언급되는 응원가이다. [5] 현역으로 뛸 당시엔 팀명이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6] 이 당시 스즈키가 타석에 들어서기 전 벤치에선 "이 타석에서 치지 못 하면 2군행이다!"라고 협박(?)을 했다고 한다. 그러고나서 타석에서 홈런을 기록했는데 우측 폴대를 아슬아슬하게 직격하는 홈런이었다. 만일 이 타구가 조금이라도 우측으로 휘어서 파울이 되었다면 야구인생 지체가 뒤바뀌었을수도 있다. [7] 다만 이해 시즌 막판까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마에다 토모노리와 치열하게 수위타자 경쟁을 벌였는데, 그 해 요코하마와 히로시마가 양측의 수위타자가 걸린 최종전을 치르게 되자 당시 요코하마의 감독이었던 곤도 히로시가 "만약 마에다가 출장하면 스즈키는 결장시키고, 마에다는 전 타석 고의사구로 승부를 피하겠다." 라는 발언을 하였고 마에다가 이에 분노하여 "팬들에게 꼴사나운 모습 따위 보이고 싶지 않다. 고의사구나 받을 바엔 결장하겠다."며 스스로 출장을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최종전에서 두 선수가 모두 결장해 버렸고, 결국 타율이 2리 더 높았던 스즈키가 영 좋지 않은 모양새로 2년 연속 수위타자가 되는 찜찜한 결말을 맞이했다. [8] 안타를 기록하지 못한 6차전에서 8회말 애매한 땅볼 타구를 쳤는데 당시 1루 주자였던 하루 토시오의 절묘한 주루 플레이 덕분에 야수선택으로 출루했고 뒤이어 터진 코마다 노리히로의 우중월 2루타 때 결승 득점을 올렸다. [9] 요코하마의 경기를 전담해서 중계해주는 중계방송이다. [10] 허나 쿠스모토 마저도 23년도에 접어들면서 22년 시즌의 모습은 사라지고 1할타자가 되고 말았다. [11] 97시도 62성공 35실패로 통산 도루성공률이 63.9%밖에 되지 않는다. [12] 2000년대 들어서 머신건 타선의 주축 선수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면서 모리 감독은 팀 타선을 거포 위주의 타선으로 바꾸려고 했으며 그 일환으로 스즈키를 4번타자로 개조하기 위해 장타 위주의 타격을 하도록 타격을 교정했다. 하지만 스즈키의 거포 전환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모리 감독이 구상했던 홈런타선에 차질이 생겼고 이후에도 장타 위주의 타선을 꾸리려고 했지만 결국 팀성적만 깎아먹고 모리 감독은 팀을 떠났다. [13] 2002~2016년까지 요미우리에서 백업 외야수, 전문 대주자 등으로 뛰며 통산 228 도루(구단 사상 3위 기록이며, 단 1번도 규정타석을 만족하지 않고 200도루를 달성한 최초의 사례다.)와 대주자 통산 도루 1위(132도루)를 기록했다. 또한 200도루 이상 기준 도루성공률 통산 1위(228도루 47도루자, 성공률 82.90%) 기록도 가지고 있었다. 현재 1위는 87%의 성공률을 보유한 니혼햄의 니시카와 하루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