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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진-은파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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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초반에 벌인 전투에 대한 내용은 옹진반도 전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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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진-은파산 전투
6.25 전쟁 이전 삼팔선 분쟁의 일부
날짜
1949년 5월 21일 ~ 1949년 11월 15일
장소
대한민국 경기도 옹진반도 일대
교전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지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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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옹진사령부 김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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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북한 국기.svg 38경비대
결과
대한민국의 옹진반도 사수
병력 2개 보병연대
105mm 곡사포
2개 보병 연대
122mm 곡사포
120mm 박격포
피해규모 사상자 830명 사망자 400명
1. 개요2. 배경3. 전개
3.1. 북한의 기습3.2. 대한민국의 반격3.3. 전투의 격화3.4. 은파산 전투
4. 영향5. 논란
5.1. 소련의 군사지원

[clearfix]

1. 개요

1949년 5월부터 11월까지 옹진반도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2. 배경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이 분단되었지만 삼팔선 인근에서는 양측의 소규모 교전과 상대편 군경에 대한 체포, 한국군의 월북 혹은 북한군의 탈북 등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군사적 충돌은 1949년 들어 더욱 심화되었는데 김일성과 소련 고문단은 남측의 경비태세를 알아보기 위해서 개성 송악산, 포천 등지에서 여러차례 군사적인 도발을 감행했다. 한편 옹진반도는 원래 황해도 최남단에 위치하였으나 삼팔선 이남에 위치했기 때문에 남한 영토에 포함되었으나 남한 본토의 연백군과는 해주만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월경지였다. 게다가 옹진반도 북쪽의 고지들은 대부분 북한이 통제하고 있어서 대한민국의 방비력이 상당히 불안정한 지역이였다. 따라서 김일성은 개성 송악산 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는 한편 남한의 군사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혹은 옹진지구의 해방을 노리고 1949년 5월 21일부터 11월 15일까지 대대적인 교전을 일으킨다.

3. 전개

3.1. 북한의 기습

5월 21일 북한 조선인민군 보병 대대를 투입하여 남침을 감행하였고 옹진반도 북부의 전투 발발 당일 국사봉을, 5월 26일에는 두락산을 점령했다. 이에 대한민국 국군 역시 2개 대대와 81mm 박격포를 동원하여 국사봉을 탈환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고지를 점령한 북한군에게 큰 피해를 입고 뒤로 물러섰다. 북한의 이러한 도발에 당황한 국군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여 1사단장 김석원 장군을 옹진지구로 보내어 지휘케 하는 한편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포병 지원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에 13연대 등의 타 부대들의 증원을 받은 후에 반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한다.

3.2. 대한민국의 반격

6월 1일 충분한 지원병력이 증원되었다고 판단한 국군은 옹진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한 후 반격을 실시하여 북한에게 빼앗겼던 국사봉을 되찾는데 성공한다. 뒤이어 6월 12일에는 총공세를 펼쳐 북한군에게 빼앗긴 두락산을 탈환하는 한편 38선 이북의 은파산 일대까지 점령하였고 6월 27일에는 북한군의 거점이였던 까치산 일부지역까지 진격하였다.[1] 한편 북한은 5월 말에 벌인 옹진지구 침투 작전에 대한 성공을 자축하면서 해주와 평양 등지에서 축하연과 관련 대회들을 벌였다.

3.3. 전투의 격화

대한민국 국군의 반격 후에도 38선과 인근의 감제고지 부근에서는 때때로 양측 간의 중대, 대대급 부대의 소규모 교전이 벌여졌으며 북한군에 의해 38선 부근의 주민들이 납치되기도 하였다. 북한군이 소규모 병력으로 38선을 건들이면 국군이 이에 응하여 반격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8월 4일 북한은 대대적인 재침을 해왔다. 이때 북한군은 옹진지구 해방을 목적으로 조선인민군 2개 보병연대와 이전에 없었던 122mm 곡사포, 120mm 박격포 등을 동원하여 화력을 보강한 상태였으며 이들은 옹진읍 외곽지역까지 진출하였다.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옹진군의 중심지였던 옹진읍이 점령될 일촉즉발의 위기였기에 곧바로 105mm 곡사포까지 포함시킨 2개 보병연대를 증원군으로 보냈으나 하필 파도가 거세어 옹진반도에 상륙할 수 없어서 날씨가 맑아질 때까지 옹진반도의 잔존 병력만으로 북한군을 막아내야 할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증원군이 상륙될 때까지 북한군을 옹진읍 외곽에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데 성공했으며 증원군이 도착하여 침입한 북한군을 격퇴한 8월 5일 이후부터는 전투가 소강상태로 빠져들었다.

3.4. 은파산 전투

북한은 8월에 있었던 옹진지구 해방을 위한 침입이 실패로 끝나자 10월 14일 새벽에는 또다시 은파산에 대해 공격을 감행했으나 국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특히 이때는 소련고문단의 개입까지 이루어졌다. 북한군을 격퇴한 이후 전선이 안정되자 11월 15일 2연대가 17연대에게 옹진지구 경비를 넘겨주면서 약 반년간 지속된 옹진지구에서의 전투가 종료되었으며 옹진반도에는 평화가 찾아들었다 단 반년 동안만.

4. 영향

당시 미국의 전투지침은 1개 사단이 10km 이하의 방어선을 맡는다는 것이였는데 문제는 막 그어버린 38선으로 인해 전선이 넓어진데다가 38선 인근의 주요 고지들은 대부분 북한에 귀속되었고 옹진반도라는 월경지까지 생겼다. 남한의 안그래도 모자란 병력으로는 이들 지역을 전부 방위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실제로도 당시 미군 상층부의 생각도 그리하였다. 따라서 미군은 옹진반도의 실질적인 방위를 포기하고 해당 병력들을 서부전선에 배치하여 서울에 대한 보위력을 높일 것을 대한민국 정부에 요구했으나 당시 이승만 대통령뿐만 아니라 국군 장성들, 정부 고위 관리들까지 38선 이남에 있던 옹진반도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며 반발하였다. 여기에는 남한령 옹진군이 비록 월경지이기는 하나 1,000km^2가 넘는 꽤 넓은 면적에 금광과 염전과 같은 중요한 시설들까지 있었으며 인구도 약 20만명이 넘는 실제로도 꽤 중요한 지역이였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결국 해당 전투 이후 옹진반도를 사수하기 위해 서부전선의 13연대 일부 병력을 빼서 옹진반도에 배치하였는데 결과론적으로는 안그래도 부족하던 병력을 퇴로도 없는 옹진반도로 분산시켜 버려 6.25전쟁 개전 당시 악영향을 주었다.

5. 논란

5.1. 소련의 군사지원

당시 스탈린은 김일성의 차후 있을 조선반도 해방 전쟁에대한 지원 요청을 씹고 있었으며 실제로 소련 정치국은 한반도 주둔 소련고문단에게 남북 군사적 충돌에 대해 불개입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10월 14일 은파산 전투에서 소련고문단이 북한군의 작전수행에 도움을 주었고 이에 스탈린은 격노하여 김일성에게 다시는 38선 일대에서 국경분쟁이 재발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며 경고했다. 따라서 10월 말 이후부터 6.25전쟁 전까지는 이전과 같은 군사교전은 일어나지 않으면서 불안정한 평화가 짧게나마 유지되었다.


[1] 이때쯤 6월 26일 안두희는 경교장에 머무르던 김구에게 자신이 옹진 총공세에 나가게 되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접근했고, 얼마 안 가 김구를 저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