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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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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沃溝 李氏 옥구 이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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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 <colbgcolor=#fff,#222>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
시조 | 이여(李驪) |
집성촌 | 백합마을 |
인구 |
0명(1985년) 201명(2000년) 1,003명(2015년) |
링크 | 옥구이씨 종친 밴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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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라북도 군산시를 본관으로한 한국의 성씨.2. 상세
시조 이여(李驪)는 옥구(沃溝)에 토착세거(土着世居)해온 사족(士族)의 후예로 연산군(燕山君)때 울산부사(蔚山府使)를 역임한 후 월성군 강동면 단구리(月城郡 江道面 丹邱里)에 이거(移居)하였다.약 300년 전 옥구 이씨가 백합마을에 처음으로 거주하기 시작하였으며, 약 50년 뒤 연안차씨 차도사(車都事)가 이주하여 와서 집성촌을 이루었다.
3. 본관지
옥구(沃溝)는 전라북도 북서부에 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마서량현(馬西良惡)인데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옥구로 고쳐서 임피군(臨陵郡)에 속하다가 1356년(공민왕 5) 금강의 조운(漕運) 기지로서 진포(鎭捕: 현재의 군산)가 되었다. 조선 초에 군산열도에 있던 진영(鎭營)을 옮겨오고, 용안현의 득성창이 나누어져 군산창(郡山倉)이 되면서 옥구현(沃溝縣)이 되었으며 1895년(고종 32)군으로 승격하였다. 1914년 군산부의 개항장 지역만 군산부로 남기고 나머지 잔여구역을 옥구군으로 분리하고 임피군을 옥구군에 병합했다. 1980년 옥구면이 옥구읍으로 미면이 미성읍으로 승격했다. 1989년 미성읍이 군산시에 편입되어 군산시 미성동되었고 옥구읍 서부출장소가 옥서면으로 분리되었다. 1995년 군산시와 통합하여 옥구군이 옥구읍으로 되었다.4. 인구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1985년에는 0명, 2000년에는 총 70가구 201명, 2015년에는 1,003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5. 인물
- 이변룡(李幾龍) : 자(字)는 견서(見瑞). 아버지의 상을 당해 아우 희룡(希龍)과 함께 묘소에 여막을 짓고 3년 시묘하였다. 이에 감동한 마을사람들이 그의 거실을 우애당(友愛堂), 시묘한 골짜기를 효막동(孝幕運)이라 하였고, 효행으로 천거되어 습독(習讀)에 제수(除授)되었다.
- 이희룡(李希龍):자(字)는 응서(鷹瑞). 1576년(선조 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금제하여 사헌부(司憲府) 감찰 (監察)이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주(慶州)와 울주(蔚州) 사이의 적세를 엿보고자 내려가다 충주(忠州)의 달천(獺川)에서 적을 만나 분전하다 순절(殉節)했다. 1689년(숙종 15)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증직(贈職)되고 삼강려(二綱間)의 특전)이 내려 졌고, 삼강사(三綱祠)에 제향되었다.
- 이문익(李文翼):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곽재우(郭再佑) 와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 이문성(李文里):조선조(朝鮮朝)에 훈도(訓導)를 지냈다.
- 이문진(李文珍):아버지 희룡(希龍)이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싸움터로 가다가 신령 (新寧)에서 적을 만나 역전하다 전사하였다. 1689년(숙종 15) 아버지 희룡, 그의 부인 월성김씨(月城金氏)와 함께 삼강려(三綱間)의 특전이 내려졌고,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증직(贈職), 삼강사(三綱祠)에 제향되었다.
- 이문참(李文參) : 조선(朝鮮) 때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를 지냈다.
- 이지온(李之編):조선조에 예빈시(禮濱寺) 첨정(余正)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