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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16:34:00

아카기(항공모함)

아카기급 항공모함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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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해군의 항공모함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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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정식 항공모함

호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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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조


 
순양전함 → 항공모함
3단 갑판 적용

아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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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


 
정규 항공모함 형태 확립
군축조약 탈퇴형 설계 적용

소류급 항공모함
히류급 항공모함

 
최초의 구상선수 도입

쇼카쿠급 항공모함


 
최초의 장갑갑판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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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호급 항공모함


 
1942년 계획, 취소됨

개(改)다이호급 항공모함


 
미드웨이 해전의 여파
야마토급 전함 3번함 개장

시나노


 
히류급 기반 중형 항공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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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류급 항공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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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qsjejn.jpg
파일:아카기2.jpg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c08038d9-s.jpg
赤城(적성)
Akagi-Class Aircraft Carrier

1. 개요2. 제원3. 함생
3.1. 탄생과 변화3.2. 3단 갑판, 독특한 설계3.3. 근대화 개장3.4. 전쟁 초기3.5. 운명의 5분3.6. 침몰 이후
4. 평가5. 여담6. 미디어에서의 등장

1. 개요

일본 제국 해군의 정규항공모함.

함명인 '아카기(赤城)'는 군마현에 있는 명승지인 아카기산(赤城山)에서 유래했다.[1] 본래 아마기급 순양전함의 2번함으로 건조하고 진수되었다. 건조 도중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되며 항공모함으로 개장했다.

2. 제원

항공모함 아카기 (赤城)
항목 개장 이전 개장 이후
운용국가 파일:해상자위대기.svg 일본 제국
함선 분류 항공모함
다음 함급 카가급 항공모함
조선소 구레 해군 조선소
모항 간토 가나가와현 요코스카
기공 1920년 12월 06일
진수 1925년 04월 22일
취역 1927년 03월 25일
격침 1942년 06월 04일
승무원 1,630 명
기준 배수량 26,900 t 36,500 t
만재 배수량 34,364 t 41,300 t
전장 262.21 m 260.67 m
전폭 33.53 m
비행 갑판 190.20 m x 30.48 m (상단)
55.02 m x 22.86 m (하단)
엘레베이터 2 기
249.17 m x 30.48 m
엘레베이터 3 기
추진 4 축
엔진 함본식 터빈 (고 저압 2 세트) 4 기
보일러 로호 함본식 보일러 11 개
혼합 연소 보일러 8 개
로호 함본식 대형 보일러 11 개
소형 보일러 8 개
출력 131,200hp 133,000 hp
속력 31.75 knot 31.2 knot
연료 중유 3,900 t
석탄 2,100 t
중유 5,775 t
항속 거리 8,000 nmi / 14knot 8,200 nmi / 16knot
무장 20cm/50cal 연장포 2 기 4 문
단장포 6문
12cm/45cal 고각 연장포 6 기 12 문
7.7 mm 기관총 2정
20cm 단장포 6문
12 cm 고각 연장포 6 기 12 문
25 mm 연장 기관포 14 기 28 문
장갑 현측 장갑 : 5 인치(127 mm) VC 스틸 (경사 12도)
탑재기 나카지마 3식 함상 전투기 : 16 대
미쓰비시 10식 함상 정찰기 : 16 대
미쓰비시 13식 함상 공격기 : 28 대
총 60대
1938년
미쓰비시 96식 함상 전투기 : 12 대
아이치 96식 함상 폭격기 : 19 대
아이치 96식 함상 공격기 : 35 대
총 66대

1941년
미쓰비시 A6M 0식 함상 전투기 : 21 대
아이치 99식 함상 폭격기 : 18 대
나카지마 97식 함상 공격기 : 27 대
총 66대[2]
착함 식별

3. 함생

3.1. 탄생과 변화

아카기는 본래 일본 해군 88함대 계획에 따라 16.1인치(410mm) 45구경장 2연장 포탑 5기로 총 10문[3], 배수량 41,000톤, 속력 30노트 제원의 아마기급 순양전함으로 건조되던 것이었다. 1919년 7월 17일, 아마기급 순양전함의 1번함과 2번함에게 각각 아마기, 아카기라는 함명이 주어지게 되면서 함선으로써의 운명이 시작되었다. 이후 1920년 12월 6일, 구레 해군 공창에서 아카기의 기공 작업이 성공적으로 끝났으나, 완성 이전에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의 제한을 피하기 위해 보조 함선으로써 은폐하였다가 항공모함으로 개장하게 되었다.

아카기의 언니이자 아마기급의 네임쉽인 아마기는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개장공사 도중에 용골이 파손되는 큰 피해를 입으면서 수리불가 판정을 받아 결국 스크랩되었다. 용골은 배의 척추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다른 부분처럼 파손된다고 해서 갈아끼우거나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4] 문서에 나온 대로 만약 배의 용골을 갈아끼운다면 배를 해체 후 재조립을 해야 한다. 그러느니 차라리 새 배를 건조하는 게 더 낫다.] 아카기의 동생 격인 3번함 타카오와 4번함 아타고는 건조의 진척도가 너무 낮았고, 남아있던 배수량 쿼터도 없었기 때문에 건조하던 도크에서 그대로 해체되었다. 이후 타카오와 아타고라는 이름은 타카오급 중순양함의 1번함과 2번함에 각각 붙게 된다.

이후 1923년 11월 19일, 전함 카가와 순양전함 아카기를 일본 해군 본부가 공식적으로 항공모함 개장을 통지하게 된다. 그리고 1925년 4월 22일, 아카기는 정규 항공모함으로 취역한다.

3.2. 3단 갑판, 독특한 설계

파일:아카기 3단 갑판.jpg
파일:external/www.model-making.eu/1264_220earlyversion1.jpg
본래 순양 전함으로 설계되었다가 선체를 무리하게 항공모함으로 개조했으므로 처음부터 여러가지 문제를 안게 되었다. 특히 3단 갑판이라는 독특한 아이디어는 영국 해군의 커레이저스급 항공모함이 2단 갑판을 갖고 있던 것을 참고한 것이었다. 문제는 중단 갑판에 20cm 연장포 2기가 배치되면서 함교와 비행 갑판으로는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3단 갑판을 통해 하단과 중단은 함재기의 이륙을 목적으로, 상단은 함재기의 착륙을 목적으로 설계하였으나 실상은 상단 갑판만 사용하게 된다.

상단만 사용하게 된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꼽히고 있다. 중단은 아카기의 선수에 설치된 8인치 연장포가 출구를 비좁게 만들었으며 출구로 나가는 도중에도 함교가 길목을 좁게 하고 있어 충분한 여건이 보이지 않았고, 하단 갑판은 중단 갑판처럼 출구가 좁지 않았으나 갑판을 중간 쯤에서 벽으로 막고 함재기 격납고로 사용했는데, 이렇게 되면 하단 갑판은 함재기가 이륙하기에 충분한 거리가 나오지 않아 문제가 되었고 결국 하단 또한 사용되지 않는 처지가 된다. 결국 남은 것은 상단 갑판 밖에 없는데 상단 또한 신형 함재기가 개발되면서 이에 따른 크기와 무게 증가가 아카기의 짧은 활주로가 이착륙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8인치 주포로 무장한 것은 항공모함을 소수의 호위함과 같이 정찰부대식으로 보내서 적을 정찰하다가 적과 충돌할 경우 항공모함도 부족하나마 순양함급 화력을 직접 발휘해야 한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 따라 일본의 또 다른 초기 항공모함인 카가 역시 주포로 무장했다. 물론 이런 기조는 항공모함이 장갑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구역이 격납고, 비행갑판 등 많으며, 피격시 대폭발과 큰 화재를 불러오는 함재기와 폭탄을 탑재하는 데다 비행갑판은 목재로 이루어져 있어 직접 적 함선과 함포로 교전하기는 대단히 위험하다는 점이 확인됨에 따라 곧 사라지게 되었다.

다만 이런 실수를 한 것은 다른 나라도 다르지 않아서 미군의 초기 항공모함인 렉싱턴급 항공모함도 역시 8인치 연장포 4기를 태평양 전쟁이 개전할 때까지 달고 다니다가 5인치 양용포로 교체했다. 뭐 이건 둘 다 원래 출신이 항공모함이 아니라 순양전함이었던 걸 개장해서 항공모함으로 만든 거니 그게 좀 크겠지만.
파일:external/www.model-space.com/build-akagi_9.jpg
또한 전간기 일본 항모의 특징인 굴절하강식 연돌도 문제가 되었다. 갑판 위에 무언가가 잔뜩 있으면 함재기의 발/착함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연돌을 하늘이 아닌 바다쪽을 향하도록 한 것인데, 골 때리게도 거주구역으로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조라서 창문을 열 수 없을 정도였고 그 여파로 결핵과 이질이 유행해서 아카기의 별명은 살인주택 아카기 였다. 1934년 당시 아카기의 이질 발병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5]
항공모함 아카기에 이질환자 50명[전통시부시 17일발] 가고시마현 시부시 만에서 제 1기 전투 기술 훈련에 참가중인 항공모함 아카기에 50명의 이질 환자가 발생하여 엄중히 소독을 행하는 동시에 환자를 격리시켰으나 아카기는 작년 여름에도 요코스카에서 수십명의 이질 환자를 발생시킨 일도 있었는데 당시의 소독이 불완전했기 때문에 보균중이었던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고 한다. 또한 동함 상기 OO기는 카야에서 항행금지를 당하고 있다고 한다.

3.3. 근대화 개장

함재기의 발전[6]으로 비행갑판 연장의 필요성을 앞세워 단일 갑판으로 개조하기 위해, 1935년에 대 개장을 실시하게 된다.[7] 먼저 단일 갑판으로 개장한 카가를 참고하여 나가시키 현, 사세보 해군 공창에서 작업이 이루어졌다. 개장에 의해 배수량이 41,300톤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중단과 하단 갑판이 밀폐식 격납고 형태로 개조되어 함재기 탑재량 또한 66대로 확장됐다. 특이한 것은 함교의 위치가 좌현이라는 것. 이는 좌측통행 함의 우현에 연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함의 건조 당시 항구 정박시 배의 좌측을 부두에 갖다대므로 좌측에다 이 굴절하강식 연돌을 달게 되면 부두에 있는 사람들이 매연을 뒤집어쓰게 된다는 이유로 연돌을 오른쪽에 달게 된 것인데, 연돌이 오른쪽에 있는 상황에서 함교를 왼쪽에 세우면 함의 무게 중심이 좌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간단히 밸런스를 잡을 수 있다는 발상이었던 것. 또한 함재기의 발함시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함교의 위치를 최대한 뒤로 끌고 와 함의 중간쯤, 연돌의 바로 맞은편에 두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함교의 배치는 함을 실제로 운용하게 되면서 문제점으로 떠오르게 된다. 좌측의 함교로 인해 생기는 난기류, 우측의 연돌이 뿜어내는 증기로 인한 난기류가 함의 뒤꽁무니쯤에서 서로 만나 회오리치기 시작한 것. 한마디로 착함이 대단히 어려운 환경이 만들어져버렸다. 여기에 뒤쪽으로 끌어내린 함교의 위치도 착함시 방해가 되었다. 결국 일본군 내에서 아카기의 함교 배치는 실패였던 것으로 결론이 지어졌고, 일본의 본격적인 대형항모로 건조되고 있던 쇼카쿠급 항공모함은 카가의 연돌과 함교 배치를 채택한다. 하지만 쇼카쿠급도 어느 정도 함의 형태가 완성되어 있던 상황에서 건조 도중 무리하게 함교의 위치를 바꿈으로서 결함이 생기게 되었다. 히류 역시 건조 중이었지만 완성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이었으므로 함교의 위치를 바꾸지 못하고 그대로 아카기의 우 연돌, 좌 함교 방식을 따르게 된다.

호쇼와 마찬가지로 밀폐식 격납고를 채용했는데, 밀폐식 격납고를 채용했던 건 일본 부근의 바다는 항공모함의 비행 갑판에까지 바닷물이 튀어오를 정도로 파도가 거칠었기 때문. 이로 인해 개방식 격납고는 바닷물이 격납고로 들어갈 위험성이 높았고, 이는 함재기의 컨디션 유지에 치명적이었다. 당시 일본군 신형 함재 전투기의 기체를 만든 재료는 매우 연약했으므로, 개방식 격납고를 채용했다가는 바닷물을 뒤집어쓰고 고장날 가능성이 컸다.

함재기만 문제가 아니고, 항공모함의 입장에서도 개방식 격납고를 채용했다가는 바닷물을 흠뻑 먹고 위험해질 수 있었다. 실제로 제 4함대 사건 당시에는 류죠가 항공기를 격납고 내로 반입할 때 쓰는 쪽문으로 파도가 밀고 들어와서 격납고와 항공기 일부가 파손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본의 항공모함 대부분은 밀폐식 격납고를 채용하게 되었다.

다만 개방식 격납고인 미 해군의 항공모함은 함재기를 격납고 천장에 매다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이것은 항공모함 와스프가 격침당하는 원인이 되며, 후에 날개가 완전히 접히는 F4F-4가 나오면서 해결된다.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쇼카쿠급 항공모함이 완성되는 대로 일본 해군 기동전대를 통솔하는 제1항공전대의 기함 자리를 쇼카쿠에게 물려줄 예정이었으나, 최신형이었던 쇼카쿠급이 의외로 해군이 원했던 기대치에 2% 부족한 함이라는 결론이 나면서 결국 기함 자리는 지켜내게 된다. 그리고 쇼카쿠 이후로 제 130호급( 다이호)와 제 302호급( 운류급 항공모함)의 건조계획이 잡히면서 이들이 완성되어 취역하면 현역에서 물러나 연습항모로 사용될 계획이었다.

나치 독일에서 그라프 체펠린급 항공모함을 건조하기 위해 참고 목적으로 방문하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인터넷 속설에 가깝다. 해당 항목 참조.

아카기는 개장 당시 일본군에서 가장 비싼 배였다.[8] 몇 차례나 개장을 거듭했으니 당연히 비쌀 수밖에 없었고, 아카기 자체가 일본군에서 가장 거대한 항공모함이라 돈을 그만큼 더 먹었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실전에 투입된 일본군 항공모함 중에서는 가장 큰데, 이보다 더 큰 항공모함은 야마토급 전함 3번함이자 세계 최대의 항공모함이었던 시나노밖에 없다. 그러니까 아카기는 야마토급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일본 해군의 전함과 항공모함을 통틀어 가장 컸다는 뜻이다. 비쌀 만도 했다.

3.4. 전쟁 초기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정하면서, 아카기는 제 1항공함대(第一航空艦隊)의 기함으로서 카가, 소류, 히류, 쇼카쿠, 즈이카쿠 데리고 하와이로 떠났다.

어쨌든 아카기는 성공적으로 하와이에 도착했고, 진주만 공습을 성공시켜 미 해군 태평양 함대를 괴멸시킨다. 전함이 전쟁의 주역이고, 항공모함은 어디까지나 2선급 보조전력이라는 상식을 완전히 박살낸 대전과였으며, 아카기는 휘하 항모들을 한 척도 잃지 않고 일본으로 개선했다. 원래 진주만 공습의 모티브가 된 건 영국 왕립 해군이 이탈리아의 군항인 타란토를 때린 타란토 공습이었지만, 전례를 참고하여 성공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일본은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고 미국은 엄청나게 분노하며 전력을 다해 일본을 무찌르기로 결의한다. 정확하게는 선전포고를 하긴 했으나, 일본 특유의 관료주의 기타 병크들로 인해 전달이 늦었고, 선전포고문인 14 Part Message[9]를 갖고 갔을 때는 이미 늦어서 미국 국무장관의 귀에 이미 진주만 피습 소식이 들어간 시점이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은 진주만 공습과 동시에 동남아를 공격했는데, 유럽에도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

아무튼 아카기는 진주만 공습 이후 격침대상 0순위가 되었다. 미국은 진주만 공습에 참가한 나구모 함대의 항모 6척을 모조리 없애버리기로 결의했고, 아카기는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데다가 나구모 함대의 기함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아카기는 인도양까지 진출해서 실론 해전에서 영국 동양함대를 격파하고 경항공모함 1척과 중순양함 2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일본 해군의 전성시대를 주도한 셈이며, 일본에서는 아카기와 카가가 '무적의 1항전'이라며 자랑했다. 그러나 진주만에 없었기에 살아남은 미 해군 항공모함들은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고, 아카기가 작전을 나간 사이에 둘리틀 특공대가 일본 수도 도쿄를 공습한다. 대낮에 당당히 쳐들어온 미군 폭격기들의 폭격을 당한 일본인들은 "도대체 해군은 뭐하고 있는 거냐?" 고 비난했고, 일본 해군은 미군 항공모함의 위협을 없애기 위해 미드웨이를 공격하기로 결의한다. 공격의 주역은 아카기와 그 휘하 항공모함들이었고, 제 1항공함대는 미드웨이로 진격한다.

그러나 5항전(쇼카쿠와 즈이카쿠)는 아카기와 동행할 수가 없었다. 산호해 해전에서 포트모르즈비 침공부대를 엄호하려고 출전했다가 미 해군과 전투를 벌인 끝에 쇼카쿠가 대파되고 즈이카쿠의 비행전대가 박살났기 때문이다. 이 해전에서 5항전의 미숙함은 적나라하게 드러났는데, 제 6전대에서 미 항모전단의 위치를 정찰기로 찾아내서 알려줬는데도 엉뚱한 곳에 있는 유조선을 공격하거나, 쇼카쿠 함재기들이 미 항모를 쇼카쿠로 착각하고 착함을 시도하는 등 아카기 승조원들의 비웃음을 살 만한 바보짓을 연발했다. 일본군 수뇌부도 기가 막혔는지, 미드웨이로 출전한 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의 갑판에 커다랗게 일장기를 그려넣으라고 지시했다. 아카기 승조원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5항전 애들처럼 멍청한 줄 아냐?"고 분개할 노릇이지만 까라면 까는 거다. 적과 아군을 분별하라는 의미였지만 커다란 일장기를 잘 알아보는 것은 미군 조종사들도 마찬가지였고, 미드웨이에서 이 일장기는 커다란 표적지가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카기가 '무적의 1항전'이자 나구모 함대의 기함이니 융숭한 대접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지겠지만, 일본군엔 그런 거 없다. 계속 전투에 참가했으면 휴식과 정비, 전력보충을 해줘야 하는데 일본군은 닥치고 미드웨이로 가라고 한 것이다. 나구모는 계속 정비와 전력보충을 요구했지만 쇠귀에 경읽기였고, 낡아빠진 키를 교체해달라는 요구도 무시당했다.

이게 얼마나 심각했냐 하면, 아카기가 1942년 4월 기준으로 탑재한 함재기는 전투기 18대, 뇌격기 18대, 급강하폭격기 18대였다. 히류와 소류처럼 정규항모치고는 작은 배들을 제외하면, 보통의 일본 항모는 9기의 비행중대를 비행기종류별로 2중대씩 싣고 여유분으로 2개 소대씩을 더 싣는다. 규정보다도 전력이 모자란다는 의미다. 5항전이 "비행전대가 없으니 출전하지 못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아카기와 동행하지 못한 걸 생각하면 대단히 큰 문제였다. 수뢰전대 출신인 나구모는 이를 신경쓰지 않았지만, 아카기의 함재기가 부족하다는 문제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일본 최대의 항모에 이 정도밖에 싣지 않는 건 분명히 곤란했다.

그래서 미드웨이로 가기 위해 함재기가 보충되었다. 뇌격기 대신 급강하폭격기를 싣기는 했지만 아카기는 중대 2개씩 실으라는 기준을 간신히 맞췄다. 그래도 모자란 게, 카가는 고장난 함재기 2대를 포함했는데도 정족수에서 2기가 모자랐다. 히류와 소류 역시 3~4대 가량이 부족했다. 물론 육군 비행전대는 충분했다 이건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이 당시 A6M 제로센 공장은 신제품을 개발한다는 이유로 가동중지가 되어 있었다. 망할놈은 그 이유가 있다

사실은 4항전의 항공모함인 류조와 준요가 있었지만, 일본 육군의 강력한 주장 때문에 4항전은 알류산 열도 공략에 파견되었다. 5항전이 바보짓을 하지 않았다면 아카기와 동행할 수 있었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런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4항전까지 잃었으니, 아카기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미드웨이 해전을 치르기 위해 출전한 아카기였지만 홀대는 여전했다. 일본군의 전함들은 아카기의 앞에 서서 보호해주는 게 아니라, 수백 km는 떨어진 후방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이래서는 아카기 같은 일본 항모가 적의 공격에 가장 먼저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최대의 항모이자, 일본 해군을 이기게 만드는 배에 대한 처사로는 너무나 야박했다. 아카기의 승조원들도 이런 처사에 분개했을 정도였다.

3.5. 운명의 5분

파일:아카기의 피탄 구역.png
아카기의 피탄 구역

미드웨이 해전에 참전한 아카기는 미드웨이를 폭격하고, 반격에 나선 미군기들을 모조리 격추했다. 미군도 미드웨이 비행장에 주둔하던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함재기들을 총동원해서 제1항공함대를 공격했지만, 항모 비행단 간의 연계 전술에 경험이 없었던 탓에 뇌격기와 전투기, 급강하 폭격기 부대가 모두 흩어져 축차로 투입되었다. 가장 먼저 일본 함대를 발견하고 공격에 나선 것은 육군 항공대로 파일럿들의 경험이 일천하여 한 번의 유효타도 내지 못하고 물러났으며 두 번째로 일본 함대를 발견한 뇌격기 부대는 전투기의 엄호도 없이 뇌격 코스로 돌입한 데다 이미 구식인 TBD 데버스테이터가 대부분이었던 탓에 대부분이 격추되거나 피격당했다. 뇌격기들 중 일부는 항공어뢰를 투사하는 데 성공했으나, 어뢰 자체가 쓰레기인데 제대로 작동할 리가 없었다. 뇌격기 조종사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제1항공함대에 명중한 항공어뢰는 한 발도 없었다. 일본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제1항공함대는 반격을 준비한다.

그러나 미군 뇌격기들을 요격하기 위해 일본 전투기들은 해면 가까이로 내려왔고, 제4구축대의 구축함 아라시를 쫓아온 엔터프라이즈 소속의 급강하폭격기들이 나타난다! 뇌격기들의 돌입 전부터 제1항공함대의 신경을 긁어대던 미군 나왈급 잠수함 노틸러스를 추적하다가 제1항공함대로 복귀하는 제 4구축대의 구축함 아라시가 속력을 내면서 넓은 항적을 남겼는데, 미군이 그걸 보고 따라온 것. 거기다 미군 뇌격기 부대는 직접적인 전공은 거의 없었지만 그들은 몸을 던져 일본군의 요격기와 견시의 시선을 저공으로 묶어두었기 때문에 후속으로 도착한 SBD 돈틀리스들을 막을 일본 전투기가 없었다! 4항전과 5항전이 아카기와 동행했다면 이런 사태에 대처할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아카기의 옆에 없었다.

더욱 끔찍하게도 일본군에게는 레이더도 없었다. 일본의 공학자 우다 신타로가 발명한 야기-우다 안테나라는 혁신적인 발명품이 있었는데도, 일본군은 레이더의 중요성을 망각한 탓에 신기술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탓이었다. 결국 일본군 견시들은 적이 머리 위에 나타난 뒤에야 "적기 직상! 급강하!"를 외쳤고, 함교에 보고된 시점에서 미군 급강하폭격기들은 거의 급강하 궤도로 들어간 뒤였다.

그러나 아카기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본 함대 상공에 도착한 미군은 당연히 편대를 나누어 아카기와 카가 둘 다 공격했어야 했지만, 사인 미스로 모든 급강하폭격기가 가까운 카가를 향해 날아가버렸다. 원래 급강하폭격기는 선두 그룹이 가장 먼 쪽에 있는 표적을 공격하고, 후방 그룹이 가장 가까운 쪽에 있는 표적을 공격해야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폭격기 편대를 지휘한 웨이드 맥클러스키는 전투기 조종사였다가 급히 차출된 상황이어서 제대로 된 폭격수행절차를 몰랐기 때문에 이런 사단이 난 것이었다. 덕분에 카가는 50발 가까운 폭탄에게 조준당해 미군 공식 5발, 비공식 추산 10여발의 폭탄을 맞고 박살이 났다.

이렇게 아카기는 살아남았습니다⋯로 이야기가 끝날 수도 있었지만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은 리처드 홀시 "딕" 베스트 대위가 폭격수행절차를 생각해내어 본인 포함 3기의 급강하폭격기를 이끌고 아카기를 덮쳤다. 첫번째 폭격은 빗나갔으나, 베스트의 두 번째 폭격이 중앙 엘리베이터 근처를 관통하고 상갑판을 박살냈는데, 하필 그 부분이 출격준비된 B5N 뇌격기들의 격납고여서 뇌격기들에 만재된 연료 유폭에 이은 어뢰 유폭으로 대화재가 발생하며 전투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게다가 화재 시에 방화 커튼을 내려서 화재를 격리해야 할 그 부분이 파괴된지라 화재가 퍼지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다. 이 명중탄을 기록한 베스트 대위는 자타공인 미 해군 최정예였던 엔터프라이즈의 급강하폭격기 파일럿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그야말로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파일럿이었다. 결국 미드웨이에서 그 명성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해냈다. 이름값을 제대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폭탄은 후방 갑판 가장자리를 그대로 관통해버려서 지근탄이 되었는데 하필이면 이 지근탄이 아카기의 키 근처에서 폭발하는 바람에 아카기는 조함 불능 상태에까지 빠지게 된다.[10] 낡아빠진 키를 교체해달라는 요구를 무시한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 것이다. 덤으로 소화용 펌프도 박살나는 바람에 화재 진압 가능성은 날아갔다.

아카기는 미국 함재기들의 공습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 원인 중 함대 전체의 문제점을 제외하고 아카기라는 개별 함의 문제점만도 따져 볼만한 부분이 있다. 아카기는 대공포 운용을 위해 비행갑판의 너비가 함체의 너비보다 좁을 정도로 개함방공에 나름대로 신경을 썼다. 하지만 대공포 자체가 상당히 낡고 구식이었다는 문제점이 있다.[11] 사격통제시스템은 비교적 신형이이었다고는 하나 대공포의 배치가 워낙 이상했던 탓에 일부 대공포는 함교에 걸려 특정한 각도는 쏠 수 없었다는 문제도 있었다. 결국 아카기의 대공포대는 급강하폭격기를 저지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전투기의 수도 모자랐다. 미군이 아카기를 격침시키려고 목숨을 던지며 공격해오는데, 아카기의 전투기는 고작 18기였다. 아카기의 조종사들이 아무리 에이스들이라 하더라도, 이걸로 미군의 뇌격기와 급강하폭격기를 다 막아내는 건 무리다. 남는 공간이 있다면 거기에 전투기를 꽉꽉 눌러담아야 했는데, 전력보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대가는 이렇게도 컸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아카기가 명중탄 1발, 지근탄 1발로 침몰까지 이르기는 어려웠다. 아카기는 원래는 순양전함이 될 예정이어서 선체도 튼실했고 급강하폭격으로 인한 피해라고 해봐야 갑판에 불길이 솟아오르는 정도였다. 하지만 폭격을 맞을 당시에 아카기의 격납고 전체에 폭탄과 어뢰가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다.[12] 이 폭탄들이 베스트 대위의 베스트 샷으로 일제 폭발, 아카기 전체가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그 밖에도 함 내 대부분의 내장재 및 가구용품이 가연성 소재로 만들어졌다는 점도 문제를 키웠고, 일본군의 낙후된 방재 및 피해복구 시스템도 아카기가 침몰하는 데 한몫 단단히 했다. 같은 전투에서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요크타운도 급강하폭격을 당했다. 하지만 요크타운의 승조원들은 연료관에 이산화탄소를 채우고 피해복구반이 신속하게 대처했고 순식간에 전투로 복귀하여 아카기와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13]

결론적으로 아무리 아카기의 선체 자체가 온전해서 가라앉지는 않는다한들 운행이 불가능하고 화재진압도 불가능했다. 따라서 탑승한 승무원들은 탈출하지 않으면 죄다 타죽거나 연기에 질색해서 죽을 운명이었다. 말 그대로 물에 떠 있는 불타는 관이었던 것. 비록 주 피해는 갑판에 집중되었지만 유폭 20분 후에는 조함장치까지도 손상을 입어서 자력이동도 불가능해졌다. 귀국할 수도 없고 화재를 제어할 수도 없으니 아카기의 운명은 사실상 결정되었다.

당시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자침조치는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아카기를 수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날, 히류마저 공격으로 전투불능에 빠지자 미군의 추가공격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항해능력과 전투능력을 잃은 함을 예인하다가는 노획의 우려가 크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아카기에 자침 처분을 내렸고, 일본 최대 최강의 항공모함 아카기는 제 4구축대의 구축함 아라시와 하기카제, 노와키, 마이카제의 어뢰를 맞고 처분되었다. 아카기가 침몰하고 난 뒤 구축함으로부터 구조된 아카기의 승조원들은 갑판 위에서 "아카기 반자이!"를 외쳤다고 한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가라앉은 4척의 일본 항공모함중 유일하게 함장이 생존한 배이기도 하다. 당시 아카기의 함장이었던 아오키 타이지로는 원래 선원을 모두 퇴함시키고 자신은 자침이 결정된 아카기로 돌아가 아카기와 운명을 같이하려 했다. 하지만 아카기 승무원들의 구조와 자침을 담당했던 제4구축대의 사령관 아루가 코사쿠가 직접 아카기에 올라타서 육탄전을 벌이며 뜯어말렸다. 결국 아오키 함장은 죽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도 구조되었다.

아카기의 함장을 직접 퇴함시킨 아루가 코사쿠는 이후 전함 야마토의 함장이 되어 전쟁 말기에 오키나와로 출격했다. 헌데 정작 본인은 퇴함을 거부하고 야마토와 함께 생을 마쳤다. 아오키 타이지로는 '부하들은 죽었는데 지 혼자 살아 돌아왔다는' 어처구니가 없는 이유로 왕따와 함께 예비역으로 좌천됐지만. 다시 현역으로 복귀해 각지의 항공대 대장으로 전전하고, 나중에서는 함경남도 원산에 있는 원산해군항공대를 마지막으로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시베리아에서 억류되었다가 일본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카기와 함께 죽지 않은 것과 이후 소련군에 포로로 잡힌 경력 탓에 죽을 때까지 비겁자라는 손가락질을 당했다고 한다.

후지다 미쓰오(淵田 美津雄) 아카기 항공대장(당시 중좌)은 탈출 과정에서 두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어 더 이상 비행임무에 종사하지 못하다가 끝내 패전을 맞이했다. 미군 포로 생활 과정에서 개신교에 귀의했고 1972년에는 대한민국을 방문해 식민지배를 사과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관련 저술에 참여하다가 1976년에 당뇨병으로 사망했다.

3.6. 침몰 이후

일본 해군은 아카기를 잃은 후, 쇼카쿠를 항모전단의 기함으로 삼았다. 아카기의 생존자들은 쇼카쿠를 비롯한 다른 항모로 보내져서 전력증강을 돕게 된다. 그러나 아카기만큼 거대한 항모를 건조하는 건 용이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이후 건조된 일본군의 정규항모들은 아카기보다 작아졌다.

그러나 일본군은 아카기와 카가의 공백을 메우지 못했고, 항모를 홀대하는 버릇도 그대로였다. 아카기에 있었던 조종사들은 과달카날 전역에서 대부분 소모되었고,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린 일본군은 항모에 실을 항공전력을 제대로 육성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육성하긴 했는데, 지상기지에 이들을 보내서 싸우게 하는 바람에 어그러진 셈. 결국 항공전력을 복구하지 못한 일본군은 필리핀 해 해전에서 칠면조 사냥을 당했고,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잔존 항모들을 미끼로 내던졌다. 아카기보다 큰 시나노(항공모함)도 만들기는 했지만, 미완성품에게 제대로 된 호위도 붙여주지 않고 위험한 항로를 지나게 했다가 격침되어버린다. 특히 다이호와 시나노는 공통점이 몇가지 있는데, 부실공사[14]와 단 한 척의 잠수함이 쏜 어뢰에 맞아서, 복구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15] 저 꼴이 났다는 거다. 결국 일본 해군은 모든 것을 잃고 패망했다.

4. 평가

아카기는 카가와 함께 일본 해군에서 가장 오랜시간 활동한 항모이기도 하나 사실 카가가 가장 활약한 시기는 중일전쟁이었고, 아카기는 카가보다도 늦깎이여서 태평양 전쟁부터 본격적으로 전투에 나섰다.

그러나 아카기는 진주만 공습부터 미드웨이 직전까지 나구모 함대의 기함으로서 연전연승을 이끌어내며 일본 해군 승리의 상징이 되었다. 이 당시에 벌어진 산호해 해전에서 일본군이 패배하기는 했으나, 아카기는 이 해전에 참가하지 않았고 해전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미숙한 5항전이니까 논외다. 다만 아카기와 카가는 태평양 전쟁의 초입까지 약 6개월간만 대활약했을 뿐, (아카기의) 미국 항공모함과 '첫 교전'이었던 미드웨이 해전에서 허무하게 침몰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진주만 공습으로 대표되는 일본군의 공세기의 상징이라는 점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아카기는 일본에서는 카가와 함께 최고 수훈함으로 평가받는다. 아무튼 아카기가 활동하던 태평양 전쟁 초반에는 연전연승을 거둔 반면, 미드웨이에서 아카기가 침몰한 후에는 일본 항모전단이 연전연패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실제로 일본 항모전단은 미드웨이 이후, 미군 상대로 전략적 승리를 거둔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일본 해군이 사보섬 해전에서 미 해군을 상대로 전략적 승리를 거둔 적은 있으나, 이 해전은 제 8함대 기함 초카이와 제 6전대 중순양함들이 주축이었다. 산호해 해전에서 5항전의 미숙함 때문에 물을 먹었던 바로 그 제 6전대 말이다. 막상 5항전은 1항전의 이름을 계승해놓고서도 엔터프라이즈에게 연일 얻어터지며 전략적 패배만 거듭했다.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 한 번도 못 이겼다!

그러나 일본을 제외한 해외에서는 미드웨이 해전 이후에 불리한 상황에서도 약 2년간 고군분투했던 쇼카쿠 즈이카쿠를 더 높게 치며 인지도도 아카기나 카가보다 이들이 훨씬 높다. 실제로 연합군에게 입힌 피해의 총량을 따져보면 쇼카쿠와 즈이카쿠 콤비가 일본 항공모함 중에서는 최고 수훈함이었다. 전략적 승리를 한 번도 못해서 문제지만. 그렇다고 해도 진주만 공습에 참가했다는 원죄가 있기에, 레이테 만 해전 당시 윌리엄 홀시 제독은 휘하 함대를 모조리 끌고, 상부의 지침마저 어긴 채 죽이러 갈 정도로 즈이카쿠를 미워했다. 미군이 얼마나 진주만 공습에 분노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미군은 진주만 공습에 참가한 일본 배를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격침시켰다.

5. 여담

2019년 10월, 2주 간격으로 카가와 함께 거의 온전한 잔해를 하와이 파파하노모쿠아키아 해양공원 해저에서 발견했다. 3D 소나를 통해서 발견했으며 심해잠수정을 투입하여 육안으로 정체를 확인했다. BBC뉴스 조금 더 자세한 뉴스 1998년 로버트 발라드[16]에 의해 발견된 요크타운의 잔해와 카가에 이어서 미드웨이 해전 침몰함선의 세번째 발견이 되었다. 2023년에도 촬영을 가졌다. #

6. 미디어에서의 등장


[1] 조모 3산(아카기, 하루나, 묘우기) 중 묘우기만 이 이름을 따온 군함이 없다. [2] 상시 노천 계류기 32기(함전 14기, 함폭 10기, 함공 8기) [3] 이 16.1인치 포는 대한해협 봉쇄를 위해 대마도의 토요포대와 용호동(부산) 장자등 포대에 설치된 것과 동형인데 일설에 의하면 아카기가 항모로 개조되면서 이 포와 포탑이 쓸모 없어지자 여기로 옮겨져 설치되었다고 추정된다. 혹은 건조 중단된 토사의 것이라는 설도 있다. 카가와 토사의 포탑은 나가토급 전함을 개장하는데 사용되긴 했지만 나가토급 2척의 포탑 수는 총 8기, 카가급 2척의 포탑 수는 총 10기이기 때문에 2기가 남게 되어 이걸 가져다 썼다고 하면 이상할 것은 없다. [4] [[용골(배)#s-2]|용골] [5] 더 큰 문제는 이 문제가 이미 다른 함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카가 항목을 참고할 것. [6] 함재기의 무게 증가와 발함시 활주거리 증가 [7] 1935년 10월 24일부터 ~ 1938년 8월 31일까지 [8] 개장 당시 환율로 5300만 엔(3,645만 달러), 추정. 개장 이전의 소요예산은 2,470만 엔, 3분의 1정도 공사가 진행되었다고 가정할 시 800만엔, 1922년 승인된 아마기(이후 카가에 투입)와 아카기의 예산이 9,000만엔 이었음을 감안해 반으로 나누면 4500만 엔. 즉 총 5,300만엔이 쓰였을 것이다. 영국 해군전함 넬슨은 1928년 환율로 조정 시 750만 파운드(4,700만 엔)이 들었다. 평가는 각자의 몫. [9] 솔직히 14 Part Message의 내용을 읽어보면 '이게 선전포고가 맞기는 한가?' 싶을 정도다. 당시 저걸 미국주재 일본 대사관보다 먼저 입수해서 해독한 미군조차도 그냥 일본제국에서 미 합중국에 보낸 엄중 경고로만 인식했을 정도니... [10] 경우가 약간 다르긴 하지만 비스마르크 추격전 당시의 비스마르크 또한 브레스트에 새 키를 대기시켜둘 정도로 낡은 상황에서 어뢰가 적중하면서 앉은뱅이가 되고만다. 이후는 알다시피 뒤쫒아온 영국 해군에게 두들겨맞고 격침. [11] 위력적인 대공포의 부재는 야마토에 이르기까지 2차대전기 대부분의 일본 군함의 문제였다. 그런데, 미 해군이 주력 대공포로 사용한 오리콘 20mm, 보포스 40mm는 모두 유럽산이며 전쟁 전에 개발되었다. 일본군도 그 회사들과 거래는 있었지만⋯. [12] 같이 출격한 중순양함 토네의 정찰기가 항공모함 발견 보고를 자꾸 번복했다. 그 결과 제1항공함대는 공격목표를 두고 우왕좌왕하여 항공기에 탑재한 무기를 급하게 다시 교체하느라 출격 시간도 지연되었고 환장과정에서 안전수칙을 제대로 지킬 겨를이 없었다. 자세한 내용은 미드웨이 해전 문서 참조. [13] 다만 요크타운은 미드웨이 해전 직전까지도 이전에 입은 피해 때문에 응급수리가 마무리 단계였고 공교롭게도 이 덕을 톡톡히 봤다. 때문에 수백 명의 수리병 등의 기술인력이 탑승한 상태였다. 이들은 요크타운의 응급 복구를 겨우 2시간만에 마쳤다. 일본군에게는 불행이 겹친 것이다. [14] 애초에 다이호의 경우는 내부 연료관 시스템에서 문제가 있었는데, 그걸 일본 제국 해군의 그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고, 시나노는 미완성이었다는 거다. [15] 다이호는 통풍 삽질이 원인이라면, 시나노는 우왕좌왕만 하다 침몰했다. [16] 타이타닉, 비스마르크를 발견해낸 미 해군 중령 출신의 해저탐험가이다 [17] 근데 사실상 미드웨이, 웨이크 섬 전투 맵에서는 모두 소류 스킨, 과달카날 에서는 아카기, 카가, 소류 두 척 이다. [18] 원전은 몽환의 군함 야마토. [19] 다만 미국을 점령하지는 못하고 미국도 핵공격 당한 다음날 핵을 완성하는데 성공한다. [20] 미드웨이 해전이 원래 역사랑 달리 미국의 참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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