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쓰시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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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민간에서 제기되는 민족주의 담론 가운데 일본의 나가사키현에 소속되어 있는 쓰시마섬에 대한 영유권 주장의 역사·현상·문제점 등을 정리한 문서.2. 역사적 사실
2.1. 15세기 이전
자세한 내용은 쓰시마섬/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240년대의 사실을 기록한 《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쓰시마섬은 이 무렵부터 '대마국'으로서 울릉도의 우산국, 제주도의 탐라국처럼 반독립적 세력으로 존재했다. 관직명 기록을 통해 이 당시 대마국이 일본 열도의 패권을 쥐던 야마타이국(야마토 정권)의 간접 지배 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1]
408년 2월, 《 삼국사기》에 따르면 왜인이 쓰시마섬에 군영을 설치해 신라 침공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은 실성 마립간이 먼저 왜국의 진영을 격파하려고 했으나, 서불한 미사품(未斯品)이 이를 말리자 그만두었다. 삼국시대에 쓰시마섬이 신라의 영역으로 간주되지 않았으며 왜계 세력이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는 점을 암시하는 기록이다.
664년, 《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 조정이 백강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해 쓰시마국, 이키국, 쓰쿠시국에 방(防)과 봉화를 설치해 방어를 강화했다. 667년 11월에는 쓰시마섬에 가나타노키(金田城)라는 성을 쌓았다. 671년 11월 10일과 674년 3월 7일 기사에는 대마국사(對馬國司)가 일본 조정에 올린 보고서의 내용이 남아있다.
894년 9월, 《 부상략기》에 따르면 현춘이 이끄는 신라구 2,500명이 10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일본에 침입했는데 그 중 45척의 배가 쓰시마섬을 습격했다. 이에 일본 본토에서 파견된 장수 훈야노 요시토모(文室善友)가 이들을 격파하고 뒤쫓아 302명을 사살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일본 측 사서에서는 삼국시대 이래 일본이 쓰시마섬을 통제하고 있었다는 식의 기사가 여럿 나타난다.[2] 8세기에 저술된 《 고사기》의 야시마라는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듯, 이미 고대부터 쓰시마가 일본 본토에 귀속되어 있었다는 인식은 적어도 일본 내에서 확고했다.
고려시대의 한국 측 사료인 《 고려사》, 《 고려사절요》, 〈이문탁 묘지명〉 및 여러 문집에서는 대마도가 언급될 때마다 '일본국' 또는 '일본'이라는 수식어가 앞에 따라붙기 때문에, 당시 한국에서도 쓰시마섬을 일본의 영역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쓰시마섬은 지리적 위치 때문인지 일본 본토뿐 아니라 인접해 있는 고려와도 조공책봉관계를 맺어 교역하였다.
1085년 2월 13일, 《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선종 시기 '대마도 구당관'이 사신을 보내어 감귤을 바쳤다. 고려시대부터 쓰시마 도주는 이키나 탐라와 더불어 구당관이라는 작위를 받았으며, 이러한 체제 하에서 쓰시마는 고려에 조공을 바친 것이다.
1368년, 《 고려사》와 《도은집》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 시기 쓰시마 도주 소 츠네시게(宗經茂)[3]가 '대마도 만호'로서 7월 11일과 11월 9일 두 차례 사신을 파견해 와 토산물을 바쳤고, 고려 조정은 그에게 쌀 1,000석을 하사했다. 만호는 고려의 무관직이고, 쓰시마는 진봉선 무역의 형태로 고려와 통교한 것이다.
2.2. 대마도 정벌 이후
1419년 6월 9일, 조선 태종은 3차 대마도 정벌을 준비하며 전국에 교서를 반포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다. "... 대마도는 본래 우리나라 땅인데,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1419년 6월 20일, 이종무는 귀화한 왜인 지문을 보내 대마도의 슈고 다이묘였던 소 사다모리(宗貞盛)에게 편지를 전달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다. "... 대마도는 우리나라와 더불어 물 하나를 서로 바라보며 우리의 품안에 있는 것이어늘 ..." 이에 대해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는 답장하지 않았다.
1419년 6월 말, 첫 승전보고에(이 보고 직후 일부 패전이 생겼다) 태종은 기뻐하며 선지를 전달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다. "...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해서 심고 거두는 데 적당하지 않아서, 생계가 실로 어려우니, 내 심히 민망히 여기는 것이다. 혹 그 땅의 사람들이 전부 와서 항복한다면, 거처와 의식을 요구하는 대로 할 것이니,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도도웅와(소 사다모리)와 대소 왜인들에게 깨우쳐 알려줄 것이니라. ..." 이는 1417년 태종이 실시한 공도 정책으로, 대마도가 진정 조선에 속하자면 대마도 주민들은 섬을 비우고 조선으로 모두 건너오라는 것이다.
1419년 7월 17일, 조선군의 철수 이후 태종은 병조판서 조말생에게 명해 귀화한 왜인 등현 등 5인을 통해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에게 교지를 전달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다. "... 대마도라는 섬은 경상도의 계림(鷄林)에 예속했으니, 본디 우리 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가 있다. ..." 세종실록 4권, 세종 1년(1419년) 7월 17일 경신 5번째 기사[4]
1420년 1월 10일,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의 부하 시응계도가 조선을 방문해 대마도주의 뜻을 전했다. "우리 섬으로 하여금 귀국 영토 안의 주·군(州郡)의 예에 의하여, 주(州)의 명칭을 정하여 주고, 인신(印信)을 주신다면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지키어 시키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이에 태종은 1월 말 대마도주에게 답서를 보낸다. "대마도는 경상도에 매여 있으니, 모든 보고나 또는 문의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본도의 관찰사에게 보고를 하여, 그를 통하여 보고하게 하고, 직접 본조에 올리지 말도록 할 것이요, 겸하여 청한 인장의 전자(篆字)와 하사하는 물품을 돌아가는 사절에게 부쳐 보낸다."
1421년 4월,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는 조선 예조판서에게 일부를 반박하는 편지를 보냈다. "대마도가 경상도에 예속되었다 했는데, 역사 서적을 조사하여 보고 노인들에게 물어보아도 사실 근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세종)대왕께서 훌륭한 덕을 닦고 두터운 은혜를 베푸신다면, 누가 감히 귀의하지 않겠습니까 ... 반드시 옛날대로 <일본 소속으로>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덕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5] 세종실록 세종 3년(1421년) 4월 6일 무술 3번째 기사
조선 초기 두 차례(1396년, 1419년) 의 대마도 정벌 과정 전후, 태종과 세종은 위와 같이 교서를 보내 대마도가 본래 조선 영토라는 주장을 전개하고 속주화를 시도하였으나, 무로마치 막부의 항의와 쓰시마도주 및 호족들의 저항 등 여러 가지 사정이 겹치면서 쓰시마를 영토적으로 편입시키는[6] 대신 도주에게 직책을 주어 쓰시마를 번병(藩屛)으로 삼는 정치적 종속관계를 맺었다.[7]
1443년 7월 22일, 세종은 일본인 등구랑의 건의에 따라, 일본의 이키섬(일기도)을 살필 목적으로 강권선을 초무관(招撫官)에 임명했다. 초무관은 왜적의 동태를 살피고, 잡혀간 사람들을 되찾아오는 것이 주 임무였다. 강권선은 1443년 8월 2일에 일기도로 출발, 1444년 4월 초에 등구랑과 함께 일기도에서 왜적 여럿을 잡고, 대마도, 부산을 거쳐 한양으로 돌아와 4월 30일에 왕에게 임무를 보고했다. "대마도는 일본국왕의 명령이 미치지 못하는 곳", "대마도, 일기도, 상송포 등지의 사람을 후하게 대하여 순종하고 복종하게 할 것", 규슈 일대 왜적의 동태 등을 자세히 보고했다.
1462년, 《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 세조가 이조판서에게 "대마도 도주 종성직에게 판중추원사 겸 대마주 도절제사를 제수하도록 하라"고 명한다. 판중추원사는 정2품의 중추원 관직이고, 중추원은 고려 시대 행정기관이었으나 조선 초 의흥삼군부의 존재로 유명무실해졌다가 세조 시기 중추부로 개칭되어 존속한 것이라, 속주 신하에 적합한 명예직으로서 제수한 것이다. 도절제사 역시 정2품의 관직이다. #
1471년 신숙주가 《 해동제국기》를 저술했다. 신숙주는 과거 1443년 조선 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방문해, 쓰시마 도주와 계해약조(癸亥約條, 일본에서는 가길조약(嘉吉條約)이라 한다.)를 체결한 경험에 여러 정보조사를 더했다. 이 때 쓰시마를 해동제국 즉 바다 건너 조선의 영토도 아니지만, 동시에 일본의 8도 66주에도 속하지 않게 별도로 기술하였다. 1481년에는 《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저술되었다. 《해동제국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두 권은 쓰시마섬이 신라 이래의 실지라는 인식을 담고, 이후 각종 문헌과 지도에 반영되었다. 이들은 쓰시마의 소속을 일본 본주는 아니되 일본국으로 기재하고 있다.[8]
무로마치 시대에는 쓰시마가 조일 양속 하에서 막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는 반독립적인 정치체제였기 때문에,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조선 조정과 더욱 밀접하였다.[9]
1531년 신증동국여지승람 팔도총도 지도에 대마도가 조선 영토로 되어 있다.
2.3. 에도 막부 전후
그러나 임진왜란 시기 쓰시마의 독립성은 크게 약화되었다. 1587년,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규슈를 정벌하자 신종을 선언해 다이묘의 직함을 받았으나, 그 이전부터 조선으로부터 예조참의 관직도 받은 바 있었다. 1589년, 히데요시에게 '조선을 정벌하라'는 명을 받기도 했으나, 같은 해 창덕궁을 찾아 선조에게 술을 따르기도 하며 침략을 경고하는 의미에서 조총을 시연하기도 했다. 1590년, 조선 통신사를 조선 측엔 '축하 사절'로 초청하고, 일본 측엔 '항복 사절'로 하여 히데요시에게 알현시켰다. 하지만 끝내 전쟁이 발발하자, 쓰시마섬은 1592년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으로서 전쟁에서 본국 편에 서서 참전한다.1603년, 에도 막부가 들어서자 쓰시마는 막번 체제에 편입되었다. 1607년, 에도 막부는 쓰시마에게 조선-일본 외교관계를 정상화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후 에도 막부 기간 대 조선교섭권은 쓰시마가 독점한다.[10] 1609년, 조일관계를 정상화 하기 위해 광해군이 쓰시마 번주와 기유약조를 맺었으나, 조선이 쓰시마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과거에 비해 엄격화하였기 때문에 쓰시마는 막부의 재정 지원을 받게 된다. 또한 1635년 쓰시마가 1607~1609 관계 정상화 과정에 국서를 위조한 사건이 폭로된 것을 계기로, 막부는 쓰시마의 대조선 교섭권 독점을 인정하는 대신 배후에서 그것을 감독하였다. 게다가 왜관무역의 쇠퇴가 맞물리면서 18세기 중반부터는 막부의 재정지원이 일상화되었다.[11]
1861년, 러시아 포사드닉 호가 이모자키(芋崎)를 점거하자, 쓰시마번은 이봉 청원서를 제출해, 쓰시마 전체를 막부의 직할령으로, 규슈 쪽의 자신들 토지를 봉해줄 것을 요구하여 막부의 지원을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막부가 쇄항 노선을 결정하고 이봉 운동이 실패하자, 그들은 양이가 본토를 공격할 근거지로 쓰시마가 활용될 수 있다는 주장을 더욱 부풀리는 한편, 조선에 대한 식량의존도 및 조선이 양이의 근거지가 될 수 있음을 피력했다. 자신들이 식량을 의존하는 조선과 단교하기 위해서는 미리 그에 소요될 자금과 병기, 군함 등을 원조해달라는 것이었다. 쓰시마 번사 오시마 도모노조(大島友之允)는 1864년, '조선진출건백서'에서 조선을 비하하며, 조선을 미리 도모하고 삼포개항 당시 무역 전성기처럼 양국 사절이 가벼운 차비로 자주 왕래하며 수도에 가고, 허례허식과 불필요한 비용을 감축해야한다고 주장했다.[12]
에도 막부는 표면적으로 쓰시마번에 재정을 원조하였으나, 실상 양이가 조선에 주둔했다거나 저들을 축출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며, 조선 자체로서도 "약한 나라라고는 해도, 청조의 속국인지라 이를 복종시킨다는 것 역시 가능치 않다."고 전망했다. 막부는 "쵸슈의 양이와 쓰시마의 조선 처치는 표리를 이루는 역모"로 보고 이를 수용할 의사가 없었다. 1863~64년 쓰시마의 원조운동은 무위로 돌아갔지만, 이 과정에서 쓰시마가 전개한 정한론은 이후 전개될 조일관계에서, 방편으로서의 조선 활용을 고착시켰다.[13]
메이지 유신으로 1868년 4월에 세워진 일본 정부는, 쓰시마번주에게 조선과 새로 외교관계를 맺을 국서 전달을 지시하였고, 쓰시마번주는 해당 서계부터는 조선 국왕이 내린 도장 대신 일본 조정이 내린 도장을 사용해, 조선이 쓰시마를 번신으로 대해온 굴욕과 오류를 바로잡고자 한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즉, 일본의 국위를 손상시키는 ‘사교(私交)’를 근본적으로 변화하고자 한 것이다. 쓰시마 측은 일본의 번병으로서 임무(藩屏守辺)를 다할 수 없고, 이를 해결키 위해서는 통교 상의 구폐(弊礼)부터 속히 갱신해야만 한다며, 조선이 고집을 부리면 은혜가 아니라 혁연히 응징해야한다고 재차 주장했다.[14]
1869년 판적봉환(版籍奉還)과 함께, 일본 정부는 쓰시마번을 이즈하라번(嚴原藩)으로 개칭했다. 같은해 9월 일본 외무성 관리가 쓰시마에 파견되었고, 이어서 1871년 폐번치현에 따라 이즈하라번은 나가사키현의 지방행정단위로 편입되었다. 1872년에 이르면 외무성이 대조선 외교권을 장악하고 부산왜관을 접수하였다. 마침내 수도서제와 세견선이 폐지됨에 따라 쓰시마와 조선의 종속관계는 청산되었다.[15]
3. 광복 후 '쓰시마 반환론'의 형성
3.1. 2000년대 이전
1945년 8~9월, GHQ가 일본열도에, 미군정이 한반도에 들어섰다. 미국은 후술할 여러 조사를 거쳐, 쓰시마섬은 일본의 영토로, 독도는 대한민국의 영토로 규정했다. 1951년 9월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반환영토가 확정될 때까지, 반환 영토에 대한 협상은 일본측이 내놓은 초안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독도를 제외한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한국에 반환한다'[16]를 바탕으로 미국과 일본간에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고 한국은 협상 당사국이 아니었다. 당시 이승만 정부의 쓰시마섬 영유권을 주장은 영토 반환 협상에 참가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협상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내려진 조치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1952년에 선포된 이승만 라인(평화선)에서 쓰시마섬은 제외되어 있고, 이후 역대 어느 정부도 쓰시마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하지 않고 있다.1946년 1월 29일, 연합국 최고사령관은 일본 정부에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SCAPIN) 제677호'를 하달한다. 미국은 다시금 쓰시마섬은 일본의 영토로, 독도는 대한민국의 영토로 규정했다.
1949년, 대한민국 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쓰시마섬의 영유권을 제기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쓰시마섬은 원래 우리나라 땅이다. 1870년 일본이 점령했다.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무조건 돌려줘야 한다"고 일본에 반환 요구를 했다. 광복 직후에는 일본으로부터 대마도를 돌려받아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주장이 한국에서 많았고, 이에 힘입어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 영유권 주장 및 반환 요구성명을 60차례 발표한다. #
1950년 3월 30일, 이에 관해 미국 정부가 조사해 다음과 같이 결과보고서를 낸다. 미국은 한국 측의 근거가 일본 측의 근거보다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서기 500년 이전까지는 한국이 우위, 중간엔 독자적 세력, 1668년 이후부터는 일본이 실효지배했다고 보았다.
There is no question of Tsushima's status as a dependency of Japan after 1668. The Japanese reorganization of the government of Tsushima following the Meiji Restoration antagonized the Koreans, but they could only express disapproval of it. No other nation has sought to challenge Japan's control since 1668. Therefore, from the information available, Korea's claim does not appear to be well-founded. Although Korea apparently held a dominant position on the island before 500 A.D., its claim to control in subsequent periods is not supported by the facts available.[17]
(해석) 1668년 이후, 쓰시마가 일본령이라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의 쓰시마 지배 체제 개편은 한국의 반발을 샀지만, 한국은 그것을 승인하지 않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 외 다른 국가들은 1668년 이후로 일본의 지배에 도전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주장에는 합리적인 근거가 없어 보입니다. 서기 500년 이전에는 한국이 섬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이후의 기간에 대해 한국이 지배권을 주장할 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해석) 1668년 이후, 쓰시마가 일본령이라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의 쓰시마 지배 체제 개편은 한국의 반발을 샀지만, 한국은 그것을 승인하지 않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 외 다른 국가들은 1668년 이후로 일본의 지배에 도전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주장에는 합리적인 근거가 없어 보입니다. 서기 500년 이전에는 한국이 섬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이후의 기간에 대해 한국이 지배권을 주장할 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1951년 4월 27일, 한국 정부는 쓰시마섬에 관해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2005년에 미국 국무부 외교문서 공개)
In view of this fact the Republic of Korea requests that Japan specifically renounce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the Island of Tsushima and return it to the Republic of Korea
(해석) 한국은 일본이 쓰시마섬에 대한 모든 권리, 호칭, 청구를 분명히 포기하고 그것을 한국에 돌려줄 것을 요청한다.
(해석) 한국은 일본이 쓰시마섬에 대한 모든 권리, 호칭, 청구를 분명히 포기하고 그것을 한국에 돌려줄 것을 요청한다.
1951년 7월 9일, 미국은 '쓰시마섬은 일본이 오랫동안 통제하고 있고 이번 평화조약[18]은 쓰시마섬의 현재 지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한국의 요구를 거부했고 이대로 같은 해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라인(평화선)이 선포되었고 여기에 쓰시마섬은 제외되어 있다. 이후 독도 해역에서 일본 어선 나포[19], 일본 어민 감금,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등 독도를 영유하기 위한 노력들이 전개되지만, 쓰시마섬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이후 정부 차원에서 하지 않고 있다.
1982년 6월 30일, 가요 ' 독도는 우리땅'이 발매되었다. 가사 중 '대마도는 일본땅,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가사가 있다.[20]
3.2. 2000년대
2005년 1월 14일,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 다케시마의 날' 조례를 제정하자, 이에 반발해 한국 지자체들의 반발로서 대마도 영유권 주장이 일어난다.2005년 3월 17일, 울산시의회가 '일본 독도 영유권 야욕 규탄 및 대마도 반환 요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
2005년 3월 18일, 마산시(후일 창원시로 통합)의회가 6월 19일을 ' 대마도의 날'로 지정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 시는 매년 전문가를 불러 특강을 개최했으며, 대마도가 역사적으로 고유한 우리 영토라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2007~2010년 사이 4차례에 걸쳐 전 국민을 대상으로 대마도 학술 논문을 공모했다. 시의회 의원들도 직접 3차례나 대마도를 찾아 우리 역사와 관련된 장소를 둘러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보통 이런 지자체 조례들은 선언적 의미가 짙고 해당 지역민들은 크게 관심이 없는데, 대마도의 날 조례는 실제로 시민들에게 반향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2005년 마산시의회가 대마도의 날 조례를 통과시켰을 때, 회원구(현 마산회원구) 교방동의 한 중국집 주방장은 집 앞에 "중국 동북공정, 일본 독도 왜곡: '加[21]不面死'"라고 쓰고 "까불면사"라고 읽는 팻말을 내걸었는데, 까불면 죽는다라는 뜻이다.[22]
2008년 7월 21일, 국회 차원에서 50여명이 "대마도 반환 촉구 결의안"을 발의했다. #
2009년 12월 25일, 일본 정부가 문부성 고교 지리·역사 새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 영유권을 반영하자, 이에 반발해 한국 정부-지자체들의 반발로 대마도 영유권 주장이 강화된다.
3.3. 2010년대
2010년 4월, 한나라당 허태열 최고위원은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초등학교 교과서에 기재한 것에 반발하여 국회에 '대마도 반환 결의안'을 발의했다. #2010년 9월, 국회에서 대마도 영유권을 따져 보기 위한 '대마도 포럼'이 창립되었는데 허태열(한나라당) 의원을 비롯해 안홍준(한나라당), 백재현(민주당), 김용구(자유선진당) 등을 포함해 여야 37명이 참여했다. #
2011년 9월 8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의회에 "대마도 반환촉구 결의안"이 발의되었다.
2012년 8월 17일, 부산시의회가 '대마도 실지회복 결의안'을 검토했다. #
2012년 8월 26일, 경상북도의회에 "일본의 독도 영유권 침탈야욕 분쇄 및 대마도 실지회복을 위한 촉구 결의안"이 발의되었다. #
2012년 9월 8일,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쓰시마섬 되찾기 운동'이 계속되자 김황식 국무총리는 "쓰시마섬을 우리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며 "국제사회가 쓰시마섬을 일본 땅으로 인식하는 상황에서 우리 땅이라는 역사적 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주장은 어렵다)"고 설명했다.
2012년 9월 14일, 전라남도 순천시의회에 "일본의 독도 영유권 침탈 야욕 분쇄 및 대마도 실지회복(失地回復)을 위한 촉구 결의안"이 발의되었다. #
2012년 9월 17일, 경남도의회에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침탈 행위 즉각 중단 및 대마도의 대한민국 영토 확인을 위한 정부 차원의 대응 촉구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
2012년 9월 18일, 뉴데일리는 이런 주장의 기사도 냈는데, 기사 내용을 엄밀히 고찰하면 당시 일본 중앙에서 쓰시마섬를 조선 사이의 경계지대로 파악했다는 증거일 뿐 한국이 역사적으로 쓰시마를 점유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될 수 없다고 봐야 한다. 지도에서 쓰시마가 조선령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은 프랑스어판 지도와 영어판 지도에서 발생하는 문제일 뿐이고[23], 신문 기사에서 일본의 날조라고 주장한 일본 국내 고지도에서는 쓰시마를 일본 땅으로 기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 국내에서 에도 막부 공인 지도로 소개된 ‘대마여지도’는 에도 막부의 공인을 받았다는 증거도 부재하고, 메이지기 민간으로부터 구입한 지도라고 한다. 게다가 저자인 모리 코안은 대마여지도를 일본지(日本志)의 이도부(二嶋部)에 수록하고 있다. 실제 에도막부 제작 국회도, 대표적으로 겐로쿠(元祿) 국회도 등에는 쓰시마 북단까지 포함되어 있다.
1790년 만들어진 서양의 고지도에 한국 해협 안에 한국과 같은 색으로 쓰시마섬이 칠해진 지도가 2013년에 제시되었다. #
3.4. 2020년대
2020년 7월 30일, 경상북도의회에 '대마도 회복 결의안'이 발의되었다. #2021년 1월 26일, 경상북도의회에 '대마도 회복운동 결의안'이 발의되었다. #
2021년 8월 20일, 충청남도 공주시의회에 '대마도 반환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발의되었다. #
2022년 5월 4일, 대마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기한 고지도가 발견되었다. 조선국도 무비지(朝鮮國圖 武備誌)라는 이름으로, 1785년 하야시 시헤이의 기법을 이용해 19세기에 제작한 것이며, 수 십절로 접힌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몸 속이나 옷가지 깊이 휴대하는 형태였다. #
4. 비판
현대에는 주로 독도 영유권 관련해서 문제가 불거질 때, 그에 대한 반발심으로 끌려나오는 주장에 가깝다. 상대의 잘못된 논리에 대해 똑같이 잘못된 논리로 맞서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일부 국수주의 성향 한국인들을 제외하면 보통 대중적인 지지를 받지는 못한다. 즉 다를 것이 없다.철저한 중앙집권제 국가였던 조선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쓰시마가 한국 영토라고 부를 만한 근거가 없다는 증거다.
이에 대한 반증이 바로 제주도로 고려 대까지만 해도 제주는 탐라성주가 별도로 다스리는 속국이었지만, 조선은 개국 직후에 탐라성주직을 폐지하고 제주도를 전라도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제주목사를 파견하는 등 직접 다스렸다. 쓰시마 영유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조선이 쓰시마에 왜 정식으로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못한다. 그리고 중앙집권화된 관료사회인 조선에서 지방호족인 도주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도 어폐가 있다. 만약 정말로 대마도를 직접통치했으면 도주직을 폐지하고 관리를 파견했을 것이다.
그리고 대마도주가 조선에 조공을 바치고 조선의 벼슬을 받았으니 한국 영토라는 논조는, 도리어 조선국왕이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다는 점을 근거로 조선의 직할령 편입을 주장했던 19세기 말 청 조정 및 조야의 일각과 흡사하다.[24]
그리고 상술했듯 고대부터 이어지는 일본의 전통적인 영토 인식인 야시마에도 쓰시마가 포함되었다. 따라서 쓰시마는 고대부터 일본어족 화자들의 영역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한국의 역사적 클레임을 더욱 약하게 만든다.
4.1. 고지도
1421년 4월, 대마도주가 조선에 항복하면서도 '역사적 근거가 없다'고 반발하는 내용의 편지가 있다.1420-1860 무렵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 양쪽에 번신을 자청했으므로, 이 시기 조선의 고지도들은 대마도를 당연히 표현한다.
- 1557년 "조선방역지도"
- 1756년 "대마여지도" - 막부의 공인을 받았다는 증거도 부재하고, 민간 지도였다. 저자인 모리 코안은 대마여지도를 일본지(日本志)의 이도부(二嶋部)에 수록하고 있다. 실제 에도막부 제작 국회도, 대표적으로 겐로쿠(元祿) 국회도 등에는 쓰시마 북단까지 포함되어 있다.
- 1786년 "해동지도" - '조선 국토는 대마도-탐라를 양발로 삼는다'는 문구도 있다.
버전별로 색칠이 다른 고지도를 증거로 삼는 것은 해외 지도 중 조선이 청조의 영토로 채색되어 있는 것도 있으니 조선이 청의 일부였다고 주장하는 거나 다름없다. 다음 지도들은 만주/조선/대만의 색도 같게 혼용되기도 한다. #1, #2
- 1786년~1832년 "삼국접양지도", "삼국총도"
17세기에 이르면 쓰시마 유학자들은 쓰시마주가 조선의 번신이라는 조선 조정의 레토릭을 부정하기 시작했고, 18-19세기를 거치면서 그 레토릭을 재해석해 고대(신화 시대)부터 일본 조정의 번병이라는 논리를 굳혀갔다는 점이다.[25] 이후 메이지 정부의 외교 개혁 과정에서 쓰시마도주는 대조선 관계가 번신의 예로서 굴욕이었다고 비판하면서, 1868년 국서 전달에 있어서는 조선이 번신으로 쓰시마를 대해온 오류를 바로잡고자 하였다.[26]
4.2. 광복 이후
그리고 포츠담 회담에서 쓰시마를 대한제국 영토라고 인정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허위이다. 애시당초 포츠담 회담에서 일본의 영토는 주요 의제도 아니었고, 일본 제국의 항복 후 영토 문제는 연합국의 점령지 분할 문제 때문에 상세하게 다뤄진데다 해당 문서들은 기밀이 해제되어 다 공개된지 이미 20년이 넘는다. 무엇보다 미국이 쓰시마섬을 한국의 고유 영토로 인식했으면 처음부터 쓰시마섬은 GHQ가 아니라 주한미군정청이 관할했어야 했다.이승만이 포츠담 선언에 의거하여 쓰시마를 반환할 것을 요청한 게 와전된 것으로 보이나, 미국은 일관되게 쓰시마를 1895년 이전의 영토인 " 혼슈, 시코쿠, 규슈, 홋카이도와 부속 열도"의 범위 안에 포함했다. 또 산맥이 쓰시마섬까지 이어진다는 것도 산줄기의 의미에서 주장한 것이지, 이걸 두고 영유권을 주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5. 가능성
한국이 쓰시마의 영유권을 주장한다고 해도, 대한민국이 대마도를 점령할 가능성은 없다고 보면 된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및 러시아의 동남부 우크라이나 병합에서 볼 수 있듯이, 군사적인 침공을 통한 영토 병합은 국제법상 엄연한 불법으로 인식되며 세계 각국으로부터 엄청난 저항과 제재를 받게 되기 때문에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국력 차이가 워낙 크기 때문에 러시아가 엉망진창으로나마 천천히 밀어붙이고는 있지만, 한국과 일본의 군사력은 서로 엇비슷한 상황이라 한국의 쓰시마 선제 침공은 실행 가능성이 없다.다만 일본이 독도 침공 시나리오와 같은 방식으로 독도나 다른 대한민국 영토를 선제 공격하거나, 혹은 동해 지역에서 우발적 충돌이 전쟁으로 번지는 경우 한국은 반격을 개시하는 과정에서 일본으로 가는 거점이 될 수 있는 쓰시마 섬을 우선적으로 점령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 이렇게 되면 전후 독도와 쓰시마를 다시 맞바꾸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6. 관련 문서
[1]
일례로 대마국, 일지국(
이키섬)과 노국(
후쿠오카)의 부관명으로 기록된 '비나모리(히나모리)'는 일본어로 해석하면 "외딴 곳을 지키는 자"가 되며, 실제로도 나라 시대 이후 일본에서 국경을 수비하는 군관의 직명으로 쓰였다. 이 세 나라 모두 야마타이국이 위치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긴키 일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대마국의 비나모리는 야마타이국 입장에서 임명한 감독관 성격의 관직일 가능성이 높다.
[2]
물론 일본서기는 악명 높은
임나일본부설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 사서인 만큼 프로파간다 성향이 짙어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겠지만, 가야와 달리 대마도는 동시대 한국 측 사서에서도 일본령이었음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나마 취신할 수 있는 것이다.
[3]
사서 원문에서는 쓰네시게의 법명 소케이(宗慶)를 반영해 숭종경(崇宗慶)이라고 기록했다.
[4]
태종은 1418년 세종에게 양위하였으나, 1422년 무렵까지 병권 등에서는 섭정하였다.
[5]
해석하자면, 본디 대마도는 조선의 영토가 아니다. 하지만 세종이 하는 거 봐서 맘에 들면 일본에서 독립해서 조선에 복속해 줄 의사도 있으니 처신 잘 해보라는 의미다. 조선 예조는 당연히 이 내용이 공손하지 않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6]
쓰시마를 속주로 편입하는 한편, 본도를 비우라던 류의 요구 등.
[7]
하우봉(2013), "전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 인식", 《동북아역사논총》 41.
[8]
하우봉(2013), "전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 인식", 《동북아역사논총》 41.
[9]
하우봉(2013), "전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 인식", 《동북아역사논총》 41, p.234.
[10]
막부 말기에 이르러 막부가 쓰시마의 대조선 외교권을 장악하고자 하였으나 혼란으로 시행되지 못 했다.
[11]
하우봉(2013), "전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 인식", 《동북아역사논총》 41, pp.239~240.
[12]
유불란(2018), "정한론, 혹은 방편으로서의 ‘조선’ - 幕末期 対馬藩의 경우를 중심으로 -", 《日本思想》 35, p.280~290.
[13]
유불란(2018), "정한론, 혹은 방편으로서의 ‘조선’ - 幕末期 対馬藩의 경우를 중심으로 -", 《日本思想》 35, p.296, 298.
[14]
하우봉(2013), "전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 인식", 《동북아역사논총》 41, pp.238~246; 유불란(2018), "정한론, 혹은 방편으로서의 ‘조선’ - 幕末期 対馬藩의 경우를 중심으로 -", 《日本思想》 35, p.296~297.
[15]
하우봉(2013), "전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 인식", 《동북아역사논총》 41, pp.238~246.
[16]
이 것이 십수차례 변경을 거쳐 최종안은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로 된다. 최종안에서 독도가 빠졌으므로 독도는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쓰이나, 그 이전인 1946년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SCAPIN) 제677호에서는 독도는 한국 영토로 규정했으므로 문제 없다는 반론이 있으며, 그러나 조사가 미흡했던 1946년의 각서 보다 1951년의 조약을 최종안으로 봐야하며, 일방적으로 하달된 사령관 각서는 법적 효력이 없고 국가간에 정식으로 체결된 조약이 법적 효력 있다, 또는 영토를 반환 받을 한국이 협상 당사자가 아니었으므로 애초에 협상이 무효라는 등 반론에 재반론이 이어져 왔다. 조약의 최종안의 문구가 왜 '제외한'에서 '비롯한(포함한)'으로 바뀌고 왜 독도가 빠졌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다.
[17]
Korea's Recent Claim to the Island of Tsushima (OIR Report No. 4900), Division of Research for Far East, Office of Intelligence Research, Department of State, 30 March 1950
[18]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19]
나포 과정에서 일본 어민이 총격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20]
해당 부분의 가사는 몇 차례 바뀐다.
독도는 우리땅 문서 참조.
[21]
실제로는 왼쪽에 획을 하나 더 덧대어놓았다.
[22]
당시 연합뉴스에 보도되었으나, DB에서는 10년 이전 검색이 불가하다.
[23]
이런 걸 '증거'로 삼는 것은 마치 해외 지도 중 조선이 청조의 영토로 채색되어 있는 걸 내세우는거나 다름없다. 실제로 쓰시마가 조선과 같은 색으로 채색되어있는데 조선이 청조의 일부로 그려진 지도도 있으니 말이다.
[24]
두 사례 모두 근대기에 접어들어 특정한
반주권적 정치체들에 대한 종주국의 위상을 영토주권의 형태로 이해하여 직할령 편입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후자의 경우 그러한 정책들이 실제 청조의 대조선 정책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물론 조선을 어디까지나 ‘반주지국’으로 묶어야 한다고 본
이홍장이 조야와 조정의 강경론을 억제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논의되지는 못했다.
[25]
松本智也(2019), "18~19세기 對馬 지식인들의 ‘藩屛’론 -역사서 편찬에 보이는 자아인식 형성-", 《韓日關係史硏究》 66.
[26]
하우봉(2013), "전근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 인식", 《동북아역사논총》 41, p.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