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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제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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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호 310호 311호
괴원성회록 해동제국기 백자청화영빈이씨 묘지·명기 및 석함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10호
해동제국기
海東諸國紀
소재지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9 (용산동6가, 한글박물관)
분류 기록유산 / 전적류 / 전적류
수량 / 면적 2책
지정연도 2010년 10월 7일
제작시기 1471년( 성종 2년)
파일:해동제국기.jpg
<colbgcolor=#ae1932> 《해동제국기》

1. 개요2. 내용3. 일본에서의 영향4. 외부 링크5.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10호6.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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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성종 2년(1471)에 신숙주가 간행한 일본, 대마도, 류큐 왕국에 관한 역사서. 총 2책이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 중이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10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

세종 25년(1443)에 신숙주는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처음 대마도, 이키섬, 일본, 류큐 왕국 지역을 견문했다. 이후 세조시기에 영의정으로서 예조의 외교 정책을 전담하면서 당시 왕 세조의 명으로 과거 자신이 다녀온 각 지역의 사회, 풍속, 문화, 지리, 생활상, 정치·외교관계 등을 총체적으로 분류, 정리하여 성종 2년에 최종적으로 편찬한 책이다.

세종 25년(1443) 서장관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귀국한 뒤 세종에게 몇 장 안 되는 간략한 보고서로 제출하였을 때는 초주갑인자[1]로 인쇄하였는데, 이를 해동제국기 초조본이라 부른다. 이후 세조의 명으로 성종대에 완성한 해동제국기 최종본은 을해자체 목활자로 인쇄하였는데 을해자체 목활자란 세조 1년(1455 을해)에 세조가 주조한 금속활자인 을해자(乙亥字)와 글자체가 비슷한 나무활자를 말한다. 현재 초조본과 최종본 모두 현존한다.

해동제국총도(海東諸國總圖), 본국도(本國圖), 서해도구주도(西海道九州圖), 일기도도(壹岐島圖), 대마도도(對馬島圖), 유구국도(琉球國圖), 조선삼포도(朝鮮三浦圖) 등 여러 지역의 상세한 지도를 수록하였는데 앞서 조선에서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등에 비해 매우 세밀하고 정확하게 각 지역을 묘사했다. 특히 해동제국기에 수록된 일본 지도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일본 전도 중 가장 오래된 지도이다.

해양문화의 명장면 <20> 조선의 '해동제국기' 왜 대단한가 15세기 지리정보 결합된 조선 시대 '아틀라스'(지도집)에 의하면, 세조 2년(1456) 5월 당시 조선의 왕 세조에게 명을 받은 일본인 승려 수린이 세조의 명에 따라 조선으로부터 일본 혼슈의 북쪽을 따라 항해하는 '북해항로'를 최초로 항해하였고 이를 신숙주가 책에 삽입하였다. 이는 15세기 이전 한국과 일본의 주요 내부 해로를 자세하게 남긴 유일한 자료라고 한다. 그 외에도 현존하는 유일한 일본 무로마치 바쿠후 시대 일본 지도, 세계 최초의 인쇄지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집 등 가치가 있다고 한다.

그 내용이 매우 상세하고 체계적이어서 발간 이후 단순한 개인 기행문의 성격을 넘어 조선, 일본, 류큐 등 열국간의 외교 관례 지침서 역할을 했다. 15세기 일본 8도 66주와 대마도, 류큐국의 역사, 사회, 지리, 풍속, 정치, 역대 지배자, 언어, 각 지역의 지명, 외교관례, 왕래 연혁, 의복, 음식, 천황과 쇼군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 등을 상세히 수록하여 가치가 매우 높다. 이 책에 묘사된 15세기 일본의 풍속 중에는 일본의 전통문화뿐 아니라 오늘날과 유사한 점도 발견된다. 몇 가지 대목을 보자면 아래와 같다.
나라의 풍속은 천황의 아들은 그 친족과 혼인하고 국왕의 아들은 여러 대신과 혼인한다.
무기는 창과 칼 쓰기를 좋아한다.
음식할 적엔 칠기를 사용하며 높은 어른에게는 토기를 사용한다.
젓가락만 있고 숟가락은 없다. 남자는 머리털을 짤막하게 자르고 묶으며 사람마다 단검을 차고 다닌다. 부인은 눈썹을 뽑고 이마에 눈썹을 그렸으며 등에 머리털을 드리우고 다리로 이어 그 길이가 땅에까지 닿았다. 남녀가 얼굴을 꾸미는 자는 모두 그 이빨을 검게 물들였다.
집들은 나무판자로 지붕을 덮었는데 다만 천황과 국왕이 사는 곳과 사원에는 기와를 사용했다.
사람마다 차 마시기를 좋아해 길가에 다점을 두어 차를 팔게 되니 길가는 사람이 돈 1푼을 주고 차 한 주발을 마신다.
남녀를 논할 것 없이 모두 그 나라 문자를 익히며, 오직 승려만이 경서를 읽고 한자를 안다. 남녀의 의복은 모두 아롱진 무늬로 물들이며, 푸른 바탕에 흰 무늬로 한다. 남자의 상의는 무릎까지 내려오고 하의는 길어서 땅에 끌린다.
『해동제국기』 국속
쇼군을 국왕이라고 칭했는데, 신숙주가 일본을 방문한 시기는 무로마치 막부 제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 일본국왕으로 책봉된 시기로부터 채 반세기도 지나지 않았던 시기이므로, 임의로 붙인 명칭은 아니다. 나라의 실권이 덴노가 아니라 막부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도 있다. 또한, 국왕(쇼군)의 세계 부분에서 그 나라(일본)안에서는 (쇼군)을 감히 왕이라 부르지 못하고 어소라고 부르며, 명령하는 문서도 명교서라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정치와 외교에 천황이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였다.

정응태 무고사건 때에 명의 정응태가 만력제에게 "조선이 일본을 끌어들여 명을 치려고 했다"며 그 근거로 내세운 게 해동제국기[2]이기도 하다. 해동제국기에 일본이나 류큐의 풍속 및 교섭하는 절차 등을 상세히 수록한 것을 "조선 쟤네들이 원래 이렇게나 일본과 친하고 교역도 활발하게 하던 애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몰고 간 것이다. 조선측이 이를 반박할 때에도 해동제국기에 실린 조선의 왜구 금압이나 삼포의 왜인들에 대한 제재 및 단속, 충돌 사실들에 대한 기록을 내세워 "일본 쟤들은 우리하고 잘 지내는 척 교역하면서도 틈만 나면 이렇게 도발을 벌이던 것들이다"라고 명 조정에 진정했다.

3. 일본에서의 영향

이전부터 외교관계에서 간간히 사용되다가 에도 시대 이후 본격적으로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징비록, 동국통감 등의 여러 조선 서적과 함께 전국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특히 규슈 지역과 간사이 지방에서 주요 학술자료로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열풍을 불러일으키며 애용되었다.

아라이 하쿠세키, 후루타 타케히코 등 여러 에도 시대 학자들이 해동제국기를 자신의 주요 학술 사료로 삼았다. 근현대에도 스가노 히로노부 등 여러 학자들이 해동제국기를 15∼16세기 중세 일본어를 원형 그대로 담은 현존 유일의 문헌이고, 특히 류큐어를 기록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적이라며 높게 평가하였다. 소설가 시바 료타로 또한 해동제국기를 구해 읽은 후 내용이 부실하다며 비판하긴 했지만, 해동제국기가 16세기 이후 일본에 끼친 큰 영향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

4. 외부 링크

5.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10호

《해동제국기》는 1443년(세종 25)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申叔舟 : 1417~1475)가 1471년(성종 2) 왕명을 받아 그가 직접 관찰한 일본의 정치·외교관계·사회·풍속·지리 등을 종합적으로 정리, 기록한 책으로 15세기의 한일관계와 일본 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와 같은 사료적 가치 때문에 1933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영인 간행하였고, 1974년에도 민족문화추진회(오늘날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해행총재(海行摠載)》를 간행하면서 해동제국기를 영인 수록하였다.

현재 국내에서 공개되어 전하는《해동제국기》의 간본으로는 5장 분량의 초주갑인자본(국립중앙도서관 소장)과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초(선조말기) 훈련도감에서 목활자로 간행한 을해자체 목활자본, 그리고 근대에 들어와 1923년에 후손 신용휴가 간행한 목활자본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안숙자 소장본은 17세기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을해자체 목활자본이다.

《연산군일기》를 보면 1501년(연산군 7) 1월 22일자 기사에 해동제국기와 관련된 기록이 있는데, 병조판서 이계동이 "류큐(琉球)의 풍토·인물·세대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므로 성희안으로 하여금 상세하게 물어서《해동제국기》의 끝에 이를 써서 후일에 대비할 것"을 요청하자 왕이 이를 따랐다는 내용이다.

안숙자 소장본 제2책의 말미에도 "成化九年(1473년)九月初二日 啓"에 이어 류큐(琉球)의 지리와 풍속 등에 대한 내용과 어음번역(語音飜譯) 등이 5장에 걸쳐 추가되어 있다.

1933년에 조선사편수회에서 영인 간행한 《해동제국기》의 해설에 따르면 당시 "전하는 간본은 4종이 있었는데, 3종은 연산군 말년부터 중종초년까지, 곧 1506년경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일한 판본이었고, 나머지 한 종은 인조 초년(1623년)에 인쇄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3종의 동일한 판본의 간년을 1506년으로 추정한 근거는 "부록이 첨가된 연대와 내사기" 등이었다고 한다. 이 때 영인한 저본은 조선사편수회가 당시 소장하고 있던 것이었는데 목판본이 아니라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로 찍은 금속활자본으로 추정된다. 이 책 역시 권말에 "弘治十四年(1501년)四月二十二日/ 啓下承文院"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연월표시는 승문원에 알린 시기를 말한 것이지만 간행시기를 짐작하게 하는 기록이다.

그런데,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초(선조말기)에는 훈련도감에서 병사들이 새긴 목활자로 여러 책을 찍어내었는데 이 책 역시 훈련도감에서 만든 (을해자체) 목활자로 찍어 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권말에 있는 어음번역의 우리말 표기는 조선사편수회에서 간행한 초주갑인자본 영인본에 수록된 어음번역과 서로 동일하다.

이를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17세기 초기에 훈련도감에서 목활자(을해자체)로 이 책을 간행하면서 약 100년 전에 찍은 초주갑인자본의 내용과 동일하게 만든 것이다.

안숙자 소장본의 《해동제국기》는 17세기에 간행된 을해자체 목활자본이기는 하지만 완전한 초주갑인자본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현재 가장 오래된《해동제국기》판본이고, 또한 근대 이전 시기의 유일한 목활자본이며, 보존 상태도 온전하므로 문화재로 보존할 가치가 매우 크다.

6. 같이보기



[1] 세종 16년(1434 갑인)에 처음 주조한 금속활자 [2] 정응태는 '해동기략'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