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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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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조선 양녕대군의 첩에 대한 문서입니다. 2011년부터 방영한 한국과 말레이시아의 합작 어린이 애니메이션 및 해당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어리'에 대한 내용은 어리 이야기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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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자녀4. 대중매체에서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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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於里(어리)

조선 양녕대군. 양녕대군과의 사이에서 외동딸이 1명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자색이 있었다"고 기록될 만큼 뛰어난 미녀였다고 한다.[1]

2. 생애

원래 그녀는 중추원 부사 곽선(郭璇)의 첩이었으나, 왕세자 이제의 눈에 들어 세자의 첩이 된다. 안 그래도 양녕대군은 어리 이전에도 기생 출신 첩을 들이고 공부는 나몰라라 하고 매 사냥을 즐기고 있었는데, 아무리 신분이 낮고 첩이라도 엄연히 유부녀인 어리를 첩으로 들였기 때문에 태종은 양녕대군을 크게 꾸짖었다. 양녕대군이 어리를 자기 정실부인인 숙빈 김씨[2]의 친정에 숨기고 어리가 양녕대군의 임신한 것까지 드러나 태종이 대노하여 질책하자, 양녕대군은 "아바마마도 이 많으면서, 왜 내가 축첩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까?"라며 반박하는 내용의 수서(手書)를 올려 태종을 당황케 한 일도 있다. 태종은 답답했는지,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에게 수서를 보여주며, "세자를 어쩌면 좋냐"며 한탄했다. 그 외에도 양녕대군은 기생들과 놀고, 사냥을 즐기며, 꾀병을 부려 서연(書筵)[3]을 피하는 등, 온갖 말썽이란 말썽은 다 부렸다.

계속해서 큰 사고를 치는 바람에 양녕은 결국 폐세자가 되었고, 그를 대신하여 훗날 세종대왕이 되는 충녕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셋째 동생인 충녕대군에게 왕세자 자리가 넘어간 이후 양녕대군의 출궁을 청하는 상소가 거듭되어 태종은 하는 수 없이 출궁을 명하였고, 태종은 양녕대군을 유배 보내면서도 동궁전에서 쓰던 기물들도 모두 딸려 보내고, 수발을 들 노비들, 생활비까지 줘 가며 사는 데 부족함이 없게 해 주었다. 이때 신하들은 어리를 참수하라고 닦달했으나 태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어리까지 함께 경기도 광주로 같이 보내주었다.

그러나 양녕대군은 태종이 상왕이 된 후에도 계속 사고를 쳐서, 견디다 못한 상왕 태종이 그를 가두다시피 하고 철저히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양녕대군이 갑자기 사라진다. 태종 원경왕후 내외는 빨리 양녕대군을 찾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양녕대군의 장인인 김한로의 첩과 양녕대군의 유모는 어리에게 쳐들어가서 "대체 언제까지 우리 나으리의 신세를 망칠 거냐!"며 어리를 구타했다. 어차피 양녕대군은 이미 어리를 만나기 전부터 행실이 나쁘기로 악명이 높았고, 오히려 어리는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양녕대군에게 걸려 인생을 망친 피해자였던 것이 실상이다.[4]

그러나 그렇다고 양녕대군에게 직접 뭐라 할 순 없으니 대신 만만한 어리에게 분풀이한 것으로 보인다. 어리는 자신의 신세에 대한 한탄 때문인지 그 날로 목을 매어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가출한 양녕은 고작 이튿날 다시 나타났다. 태종은 양녕대군을 꾸짖으며 크게 한탄하는데, 이 때의 모습을 보면 철혈 군주의 위엄은 어디가고 말썽꾸러기 아들 때문에 속터지는 평범한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네가 도망했을 적에, 주상이 듣고 음식을 전폐하며 서러운 눈물이 그치지 아니했다. 너는 어찌 이 모양이냐. 너의 소행이 너무도 패악하나 나는 특히 부자의 정으로써 가련하게 여기는 것이다."고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1년(1419년) 2월 1일

그리고 양녕대군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한때 그렇게 총애하던 어리의 비참한 말로를 듣고도 유유히 악기 연주나 했다고 한다.

3. 자녀

어리와 양녕대군의 사이에서 태어난 현주(縣主)[5]가 1명 있는데, 그녀는 상장 공주 이씨(公州 李氏) 이종경(李宗慶)과 혼인했다.

4. 대중매체에서

5. 관련 문서



[1] 외모 평가가 거의 없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미녀는 별로 없다. 어리를 제외하고 실록에 미인으로 기록된 여인들은 강혜장숙여비 한씨(태종실록), 한영정의 막내딸이자 강혜장숙여비 한씨의 누이인 한계란(세종실록), 순빈 봉씨(세종실록), 안평대군 이용의 계집종인 귀비(성종실록), 승평부대부인 박씨(연산군일기), 정난정(명종실록), 소원 신씨와 소용 임씨(광해군일기), 옥례와 장희빈(숙종실록) 정도가 있다. 장녹수는 의외로 미인은 아니었다고. [2] 당시에는 양녕대군이 왕세자였기에 아내 김씨는 왕세자빈이었으나, 당시에 세자빈은 별도의 봉호를 부여받았다. [3] 왕세자에게 경서를 강론하던 자리. [4] 양녕대군은 어리 전에도 기생들을 첩으로 들였다. 첩들 중 유부녀인 건 어리뿐이니 양녕대군의 폐위를 앞당긴 건 유부녀인 어리의 존재가 결정적이긴 했지만, 어차피 양녕대군의 평소 행실을 생각하면 시간 문제였을 것이다. 어리가 양녕대군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기록에 없지만 당시 시대상 어리가 양녕대군의 첩이 된 것은 어리의 의지가 아닌 양녕대군의 의지뿐이었을 것이다 [5] 세자의 서녀는 정 3품 현주고, 적녀는 군주다. [6] 남편인 곽선이 비록 나이가 많아 제대로 된 사랑을 나눌 수는 없었지만, 지체 높고 부유한 양반이었기 때문에 그 첩으로서 생계를 걱정할 필요 없이 편히 살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었다. [7] 정확히는 양녕에게 편지를 남기고 스스로 강에 들어갔다. [8] 동북공정&역사 왜곡 논란으로 드라마가 2화 만에 폐지되었다. [9] 어리의 남편 곽선의 아들이 어떻게든 서모를 지키려고 했으나 양녕대군과 그 일행의 협박에 굴복한다. [10] 나머지는 , 왕비, 왕세자, 효령대군, 충녕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