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 토론토 세계선수권과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무려 5명의 대학선수들이 뽑혔고, 1차/2차 연맹전은 이 선수들이 참가하지 못한채 열렸는데, 주전-비주전간의 격차가 컸던 연세대가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고려대:
현주엽(1년,F,195cm),
전희철(3년,C,198cm)
연세대:
서장훈(2년,C,207cm),
이상민(4년,G,183cm)
중앙대:
김영만(4년,F,193cm)
전희철,
현주엽의 공백은 고려대 전력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기존의 Best 5 중
신기성-
김병철-
양희승이 건재했고 여기에 후보 빅맨진도
박훈근(2년,F,195cm)-
박재헌(2년,C,200cm)-박준영(3년,F,195cm)으로 탄탄해 무난히 7전 전승으로 우승하며 시즌 2관왕에 올랐다.
1994 토론토 세계선수권 및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고려대 전희철, 현주엽, 연세대 서장훈, 이상민, 중앙대 김영만이 차출되어 이번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2) 조별 예선
순위
A조
B조
C조
1
중앙대
3 - 0
한양대
3 - 0
고려대
3 - 0
2
홍익대
2 - 1
건국대
2 - 1
경희대
2 - 1
3
단국대
1 - 2
연세대
1 - 2
명지대
1 - 2
4
국민대
0 - 3
동국대
0 - 3
성균관대
1 - 2
대학최강으로 꼽히던 연세대가 졸전끝에 예선탈락했다.
서장훈,
이상민이 국가대표팀에 차출되긴 했지만
우지원,
김훈 쌍포가 건재했고
김택훈, 구본근 등 좋은 신입생을 영입해 1차대회 우승팀 고려대를 견제할 유일한 팀으로 꼽혔으나, 이상민의 백업을 맡아야할 청소년 대표출신 가드 2학년 이종호(대경상고 졸)가 출전 기회부족에 불만을 품고 팀을 이탈했고, 우지원이 건국대 전 도중 발목부상을 당해 빠지면서 전력이 수직으로 추락, 건국대, 한양대에 연패하면서 예선탈락했고, 심지어 예선 마지막 한양대 전에서 무려 21점차로 대패하는 굴욕을 맛본다. 사실 이미 아이돌 그룹 수준의 팬덤을 누리던 연세대로선 CF촬영, 친선경기 출전, 팬사인회 등의 스케줄에 끌려다니며 팀훈련이 부족한 상태였고, 최희암 감독까지 신생팀 감독으로의 하마평에 오르내리며 하계훈련기간 동안 미국 연수를 다녀오는등 농구팀으로서의 준비상태는 최악인 수준이었다. 이후 10월에 열린 정기 연고전에서도 5년간의 연승행진을 마무리하며 고려대에 패배하고 만다.[6]
"추승균의 한양대"가 돌풍을 일으키며 1988년 MBC배 우승 이후 실로 6년만에 우승타이틀을 가져갔다. 청소년대표 출신 동갑내기 쌍포 추승균(2년,F,190cm)-이상영(2년,F,188cm)이 4학년 김동철(G,180cm)과 함께 연일 외곽포를 뿜어댔고, 키만 큰 센터로 평가받던 이흥섭(3년,C,200cm)[8]도 오랜만에 제몫을 다하면서 결선리그에서 최강 고려대를 격파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마지막 중앙대전까지 이겼으면 단독 우승이었으나, 중앙대
김희선(3년,G,186cm),
양경민(4년,F,193cm)을 막지 못하고 패배, 고려대와 공동우승에 만족했다.
이상민-김훈-우지원-서장훈 등 주전 Big 4와 나머지 선수들(김성헌,
김택훈,
석주일, 구본근 등)간의 간극이 컸던 연세대에 비해, 꾸준한 중복스카웃(;;)으로 두터운 선수층을 자랑했던 고려대는 후보 빅맨진에
박재헌,
박훈근, 박준영 등을 보유하고 있어 전희철, 현주엽의 국대차출 공백을 거의 느낄수 없었다. [9]
12월에 열리는 농구대잔치에는 대학팀들을 위한 단 6장의 티켓만 있었다. 이는 연간 대학농구대회 성적 전체를 합산하여 상위 6팀에게만 주어지는데, MBC배, 1차/2차 연맹전까지의 결과를 토대로 집계한 시즌 점수는 1)고려대 2)한양대 3)경희대 4)중앙대 5)건국대 6)명지대 7)연세대의 순이었다.
MBC배에서 준우승했으나 1차 연맹전 불참, 2차연맹전에서 예선탈락한 연세대로서는 이번 3차대회에서 명지대보다 3단계 이상 순위가 높아야만 점수차를 극복하고 6위로 농구대잔치에 나갈수 있었다. (명지대로선 3위만 하면 연세대가 우승을 해도 연세대보다 점수가 앞선다.)
연세대가 명지대를 극적으로 제치고 농구대잔치 진출권을 따냈다. 마지막 경기에서 명지대는 에이스
조성훈의 침묵속에 경희대에 대패하며 최종순위 5위에 그친 반면, 연세대는
이상민-
서장훈 콤비의 맹활약 속에 라이벌 고려대를 65:40, 무려 25점차로 대파하며 우승!! 6번째 농구대잔치 티켓을 가져갔다.
4월 MBC배 이후 라이벌 연세대에 시즌 두번째, 그것도 대패를 당한 고려대는 선수단 전원, 심지어 코칭 스태프까지 삭발했고(해도 티 안나는
박한 감독은 제외;;;) 뒤이어 열리는
1994-95 농구대잔치를 위한 와신상담을 시작하였다.
선수시절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통통한 편이었고,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샤프한 슈터였다. 프로 2년차때, 선배의 차를 얻어타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났고 이때 오른팔을 크게 다쳐 아쉽게 조기 은퇴. 이후, 코리아텐더 주무 등을 거쳐 2005년부터 선배인 김승환 감독의 후임으로 부임해 지금까지 무려 13년째 모교 건국대 감독을 맡고 있으며,
허일영,
변기훈,
최부경 등을 좋은 선수들을 키워냈다.
허일영이 있던 2008년 건국대를 농구대잔치 결승까지 올려놓기도 했으며, 현재에도 건국대를 대학 강호 중 하나로 유지시키고 있다.
현대전자 데뷔시절 잘생긴 외모로 깜짝 주목을 받았다. 이지승, 위성우 등과 함께 현대전자 암흑기[18]를 보낸 마지막 세대였으며, KBL 원년 시즌 이후 농구협회와 KBL의 불화로 인해
국군체육부대 입대가 좌절되면서 현역으로 최전방에서 복무했고, 거기서 부상을 입는 바람에 제대하자마자 은퇴했다. 은퇴 후 안양KT&G, 인천전자랜드 코치를 거쳐 WKBL
부천 KEB하나은행 감독을 역임했다. 현대전자 시절, 같은 현대계열의 여자농구팀 현대산업개발(現
인천 신한은행 에스버드의 전신)에서 뛰던 권은정[19]과 결혼하여 현대家 선수커플이 되었다.
초고교급 스타
김영만과 마산고 동기로, 2학년이던 1989년 협회장기 우승 당시 멤버였던 포워드 겸 센터. 김영만의 중앙대 입학 당시, 연고대 스카웃을 마다하고 마산고 동기 6명을 모두 받아주는 중앙대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때 중앙대로 가지 않은 동기가 바로 김성환이다.[20] 농구특기생 모집이 중단된 국민대 골밑에서 4년간 고군분투한 김성환은 졸업 후 세대 교체 중이던 현대전자에 동기 이환우와 함께 입단하게 된다. 군 제대 후 98-99 시즌을 앞두고 부산기아로 트레이드된 김성환은, 고교 동창
김영만의 백업포워드는 물론,
클리프 리드,
제이슨 윌리포드 등 빅맨진의 부상 공백까지 메우며 전천후로 활약한다. 다음 시즌 선수 부족을 겪던
여수 골드뱅크로 현금트레이드 되지만
현주엽의 존재로 인해 출장 기회를 거의 잡지 못했고 시즌 종료 후 안양 SBS로 이적, 한 시즌을 더 보낸 뒤 은퇴한다.
대학 졸업 후 신생팀 대우증권에 입단,
조성훈 등의 백업 가드로 활약했고, KBL 출범 후 원년 시즌에 총 18게임을 출장했다. 두번째 시즌(97-98)에는 한 게임도 뛰지 못했음에도 불구, 시즌 종료 후
김병철,
김희선 등 올스타급 멤버들만 가는
국군체육부대 입단에 성공한다. 제대 후 원소속팀에 복귀했지만
유재학 감독의 눈에 들지 못하면서 00-01시즌 단 한 게임도 뛰지 못한 채 은퇴했다. 현재 개인 사업체(양말 공장)를 운영 중이다.
기사
힘이 좋고 골밑 기술도 뛰어나 고교시절 국대 유망주로도 꼽혔던 빅맨이었으나, 장신군단 중앙대로 진학하면서
정경호,
조동기 등 선배들에 밀려 저학년 때 출장 기회를 많이 얻지 못했고, 4학년에 이르러 겨우 주전 센터가 되었다. 이때쯤부터 중앙대의 팀컬러가 강압수비와 속공위주로 바뀌면서 거의 홀로 골밑을 사수해야만 했는데, 작은 신장에도 리바운드를 잘 잡아내며 중앙대 속공의 출발점 역할을 하였다. SBS 입단 후엔
정재근-표필상의 백업 빅맨으로 주로 뛰었고, KBL 출범 후 다른 토종 빅맨들과 마찬가지로 외인센터들에 밀려난데다 부상까지 겹치면서 3시즌만에 은퇴했다. 현재
안양 KGC인삼공사 유소년 농구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선수 시절
김희선과 함께 중앙대의 유이한 얼굴마담으로 유명했다. 선배
홍사붕,
조동기나 동기
김영만,
양경민은 오빠 부대랑은 좀 거리가 있었고, 90년대 초반 당시 중앙대는 고려대와 마찬가지로 남성팬이 대다수였다.
김동철(4학년,G,186cm): 송도고 졸. 한국은행.
송도고 시절 최호, 안병익과 함께 팀을 동국대총장기 준우승으로 이끌었던 외곽슛이 매우 좋았던 가드. 한양대 진학 후 1학년부터 4년 동안 팀의 주 득점원이었고, 1994년 2차 연맹전 공동 우승 당시 2년 후배
추승균과 함께 맹활약했다. 졸업 후 중앙대 이진원과 함께 한국은행 농구팀의 마지막 신입 선수로 입단,
1995-96 농구대잔치에서
김상준, 김재득과 함께 팀의 공격을 이끌었고, KBL 출범직전 팀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나래이동통신에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군 입대로 불발, 전역 후 일반 은행원으로 남았다.[21]
신입생이던
1991년 MBC배 대회 예선 2회전에서 22점을 터뜨리며
정인교가 이끌던 고려대를 제압하는 이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졸업 후 삼성전자에 입단, 주로 전문 수비수로 활약하며
김현준이 은퇴한 뒤 전력이 약화된 팀에서 로테이션 멤버로 뛰었고,[22] KBL 출범 후에도 군 복무기간 제외하고도 총 3시즌간 활약했다. 은퇴 후 중국으로 이민을 선택,
칭다오시에서 한국식 고깃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정환(2학년,C,195cm)
[1]
고려대 전희철, 현주엽, 중앙대 김영만이 국가대표팀에 차출되어 7월 타이완 존스컵에 참가하였다.
[2]
연세대가 선수부족을 이유로 불참
[3]
공동 우승
[4]
고려대 전희철, 현주엽, 연세대 서장훈, 이상민, 중앙대 김영만이 국가대표팀에 차출되어 1994 토론토 세계선수권에 참가하였다.
[5]
예선에서의 상대 전적을 무시하고 재대결했다.
[6]
이때도 양팀의 국가대표 선수들은 빠진상태였다.
[7]
예선에서의 상대 전적을 무시하고 재대결했다.
[8]
前 서울 삼성 썬더스 포워드인 이규섭의 형이다. 현재 원주 동부 프로미 매니저를 맡고있다.
[9]
후보 빅맨들인
박훈근-
박재헌 만으로도 서장훈이 있는 연세대만 빼면 다 씹어먹을수 있었다. 졸업할때까지 4년내내 후보였던
박훈근이 당시 중앙대 센터 안병익(4년,C,195cm)이나 경희대
윤영필(1년,C,193cm)보다 위라는 평을 받았다.
[10]
예선에서의 전적을 가지고 올라갔다.
[11]
플레이오프 종료까지 전체 MVP는 허재.
[12]
총 14팀 참가
[13]
연세대 3학년이던 1993년 자카르타 ABC부터 2005 도하 ABC까지 14년간 선발되었다.
[14]
중앙대 3학년이던 1993 자카르타 ABC부터 1999 후쿠오카 ABC까지 선발되었으며, 부상으로 빠진 적이 많았다.
[15]
상무 제대 직후 수원삼성-원주TG간 2:2 트레이드(김승기,양경민 ↔ 주희정,강병수)에 포함되어 이적하면서 KBL 데뷔를 원주TG에서 했다.
[16]
상무시절인 1997 리야드 ABC에 첫 선발된 후, 1998 그리스 세계선수권, 2001 상하이 ABC에 출전하였다.
[17]
충분히 KBL에 갈만한 기량이었으나 일반 은행원(한국은행!!)으로 남았다. 그깟 공놀이!!
[18]
이충희 은퇴~이상민 합류 사이의 시기로, 유도훈-김지홍-임근배-최병식-정경호 주전에 이영주, 김광은 등이 주로 뛰었다. 세대교체 실패와 대학팀 돌풍이 맞물리던 시절로, 그나마 조성원이 신인이던
1994-95 농구대잔치에 8강까지는 갔었고, 그 이후부터 라이벌 삼성전자와 함께 대학팀들의 동네북 신세가 되었다.
[19]
애틀란타 올림픽 국가대표 출신의 슈터였다.
서울은행 여자 농구단에서 뛰다가 외환 위기 와중에 팀이 해체되면서 현대산업개발로 옮겨서 뛰었다. 2017년 11월 조성원의 후임으로 수원대학교 여자 농구부 감독을 맡게 됐다.
[20]
당시 중앙대엔
표필상,
정경호,
조동기 등 빅맨이 너무 많아, 아마도 갔으면 경쟁을 이겨내기 어려웠을 듯. 실제로 중앙대에 진학한 마산고 동기들은 김영만을 빼고 모두 졸업 전에 선수 생활을 접었다.
[21]
당시 산업은행을 인수하여 창단한 나래이동통신은 한국은행 선수들도 받아들이고자 했으나, 신이 내린 직장(?)인 한국은행의 특성상
김상준,
김영래, 이승학의 3명을 제외하곤 모두 선수 생활을 은퇴, 일반 은행원으로 전환하였다.
[22]
문경은,
김승기가
상무에 입대한 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