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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04:50:20

명 4대 암군

명나라 4대 암군에서 넘어옴
명나라 F4
파일:정덕제.jpg
파일:external/static.jstv.com/201510291446060232412_8.jpg 파일:만력제.png 파일:천계제.jpg
제10대 무종 정덕제 제11대 세종 가정제 제13대 신종 만력제 제15대 희종 천계제
1. 개요2. 망국의 장본인들3. 관련 문서

1. 개요

명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간 최악의 황제 4명. 꽃보다 남자가 유행할 때 디시인사이드 역사 갤러리[1]에서 이들을 명나라 F4라는 별명을 만들어 부르던 것에서 시작했다.
명나라 F4
묘호 행각 재위 기간
무종 정덕제(武宗 正德帝) 주후조(朱厚照) 아바타 놀이의 진수 16년
세종 가정제(世宗 嘉靖帝) 주후총(朱厚總) 사이비 종교 광신도 46년
신종 만력제(神宗 萬曆帝) 주익균(朱翊鈞) 파업 전문가, 고려 성애자 48년[2]
희종 천계제(熹宗 天啓帝) 주유교(朱由校) 마에스트로 7년
이들의 재위기간은 명나라 존재 기간의 절반 가까운[3] 117년이기 때문에 그냥 '명나라 후반기'라면 거의 이들의 시대다. 다른 12명의 황제는 총합 160년. 무종 즉위년부터 멸망까지로 따지면 139년으로, 절반을 넘는다. 당연히 나라는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다만 이들 중 정덕제는 황권 강화 등 적어도 확실한 목적들이 있었기에 의도는 좋았다고 평가받을 뿐더러 다른 암군들과 달리 업무를 소홀히 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암군이라고 하기엔 곤란하다.[4] 단순히 소홀히 하지 않은 것을 넘어 묘호인 무종답게 몽골 토벌 등 국방 측면에서는 꽤나 봐줄 만한 치적을 남겼고, 유근을 욕받이로 내세우다가 범죄 등 꼬투리가 잡히면 숙청하는 등 정치적 감각도 꽤나 좋은 편이었다. 사신단을 접견하면서 포르투갈과 교역을 시작하는 등 정화의 대원정같은 보여주기 식이 아닌 진짜배기 국제 교류도 정덕제 시기에 가장 활발했다. 살인사건을 덮으려는 것을 "내가 빙다리 진혜제로 보이냐, 이 새끼야?"라고 하면서 재조사를 통해 진상을 밝히기도 하는 등 통찰력있는 모습도 종종 보였다.[5] 명군까지는 아닐지라도 업무 능력이나 정치적, 외교적 감각이 최소한 평타 이상은 되는 황제다. 그런데 이 양반의 문제는 일을 안 하거나 무능한 게 아니라 표방을 만들고 엽색을 하거나, 제2의 이름을 만들고 아바타 놀이를 하는 등 오라질나게 잘 놀아대서 그런 거다. 심지어 죽은 이유도 놀다가 물에 빠져 병을 얻는 바람에 죽었다! 천계제는 할아버지인 만력제가 아버지인 태창제를 장남이긴 하지만 천한 출신의 어머니를 두었다고 싫어해 태자 책봉을 계속 늦추었기 때문에 타 황제들에 비해 배움이 짧았던 것과[6][7] 사실상 위충현의 꼭두각시 인형이나 다름없었던 점을 들어 이 둘은 다른 둘에 비해선 이해할 만한 여지가 있다. 문제는 다른 둘이 해악이든 재임기간이든 비교도 안 된다는 점일 것이다.(...)[8] 특히 만력제가 심각해서 청나라 때 집필한 명사에서 아예 ' 명나라 숭정제 때가 아니라 만력제 때 이미 망했던 거다.'라고 대놓고 깠을 정도다.

이렇게 정덕제에 대한 억까 문제로 인해 명 4대 암군 자체를 억지 밈 취급하거나, 4대 암군을 꼽더라도 정덕제를 빼고 외정에서만큼은 만력제를 능가하는 무능함을 보였던 숭정제를 집어넣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래서 심각한 순서대로 따지면 만력제가 1위, 가정제가 2위, 천계제가 3위, 정덕제가 4위 정도다.

2. 망국의 장본인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정덕제, 가정제, 만력제, 천계제 문서를 참고하자. 그 사이사이에 위치한 융경제, 태창제 숭정제 문서도 읽어보면 명은 어떻게 망국이 되었나 잘 알 수 있다.

지금에 와서야 평가가 좀 많이 후해진 폭군이나 암군이라기엔 일도 열심히 하고 놀기도 열심히 놀았던 플레이보이 정덕제, 사이비 종교에 빠져 나라를 망친 가정제, 무위의 도를 실천하느라 나라를 망친 만력제, 희대의 마에스트로 천계제 등 캐릭터도 참 가지각색이다. 그 사이에 낀 명말 3대 의안 같은 일 또한 쏠쏠하다. 다만 만력제는 한국에서는 임진왜란 원조 때문에 종종 "중국 입장에서나 암군이지 조선 입장에서는 도움이 된 황제이지 않느냐?"라는 옹호론이 나오거나 '암군이었지만 조선을 사랑했던 중국 황제' 정도로 미화하기도 하는데 사실 조선시대 이후 현대에 들어서까지 만력제를 칭송할 필요는 없는 것이, 당장 조선인들도 만력제에게 도움받은 것에 고마워한 것과는 별개로 만력제가 막장 황제인 점은 인지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었다.[9]

다만 이런 황제들이 연임하는 가운데에도 주변에 대대적으로 영향력을 떨치기도 했고 획기적인 기술적 혁신이 일어나기도 했다는 점으로 명나라의 관료체계가 얼마나 고도화했나를 증명하는 예시 혹은 홍무제가 얼마나 나라를 잘 만들어놨는지에 대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애초에 가정제와 만력제라는 희대의 종자들이 연임하는 와중에도 90년은 버틴 것도 앞선 80년간 홍무제를 시작으로 한 명군 라인들이 나라의 초석을 엄청나게 잘 닦아놨기 때문이다. 만력제 초기 명재상 장거정이 주도한 일조편법이라는 세제개혁으로 일시적인 중흥을 이루지만 그 이후 만력제가 파업하는 한편 만력 3대정으로 말끔하게 다 말아먹었다. 돈으로 비유하면 선덕제까지 쌓은 적금을 정덕제 때까진 어느정도 유지하다가 가정제 때부터 본격적으로 까먹기 시작하더니 만력제 초기에 어찌어찌 다시 조금씩이나마 쌓게 되었다가 순식간에 다 까먹었고 결국 천계제 때 남은 것까지 다 날린 셈. 그 결과 명나라는 밖으로는 청나라의 침공, 안으로는 농민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했다.

명나라의 이름을 떨친 홍무제~선덕제로 이어지는 명 초반 명군라인이 쌓은 위엄을 딱 90년 만에 까먹었단 점에서 다른 의미로 대단한 수준인데 아이러니한 건 이후 중국의 대세가 된 청나라 누르하치~ 건륭제로 이어지는[10] 명군라인으로 기반을 닦았다가 마찬가지로 도광제[11]를 시작으로 한 암군의 연임으로 나라가 망했다는 것이다. 물론 청나라는 내외적인 상황상 답이 없는 명 4대 암군보단 실드쳐줄 사유가 많다.[12]

3. 관련 문서


[1] 일뽕 성향으로 변질되기 이전의 역갤이다. [2] 참고로 만력제는 명 황제 중 가장 재위기간이 길었다. [3] 비율로는 42.4%. 반대로 청나라 최대 전성기였던 강건성세는 135년으로, 총 45.6%에 달한다. [4] 어느 정도냐면 정덕제에게 중종반정을 속이기 위해 조선에서 엄청난 거짓말을 했는데 하필 정덕제가 재위 1년차라서 정덕제를 속이려고 별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자세한 건 중종반정 항목 참조. [5] 참고로 진혜제는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바보 황제로, "곡식이 없으면 고기죽을 먹으면 되는 거 아님?"실제로 발언한 황제다. [6] 문맹 수준이었다. 일국의 황제가! 그나마 방계왕족 출신인데 어쩌다가 황제가 된 것이라면 모르겠는데 이 사람은 만력제의 장손이었다. 장손씩이나 되는 사람이 배움의 짧음이 글조차 모르는 수준이었다니 그 심각성을 짐작하게 해 준다. [7] 황족 및 왕족은 역모에 휘말리기 쉬워서 조선에선 아예 왕족 중엔 배움을 끊고 사는 사람도 많아 천계제처럼 문맹인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제안대군이 문맹이라 사촌형인 성종에게 올린 상소는 언문으로 작성되어 승정원에서 한문으로 번역해야 했다.(당시 조선에선 한자를 모르면 문맹 취급이었다. 언문을 알아도 한자를 모르면 문맹인 셈) [8] 가정제와 만력제만 합쳐도 약 34%정도나 된다! 즉, 두 명이 암군으로써 명나라 역사의 3분의 1을 차지한 셈이다. [9] "사리에 어두운 임금은 원망하지 않는 법이니, 천계(天啓)황제는 원망할 수 없는 임금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만력(萬曆)황제는 초년에 영매하고 호걸스럽던 임금이었는데도 사십 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신료들을 인접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경계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 [10] 다만 건륭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11] 그래도 가경제 때까지는 나라가 대놓고 기울진 않았다. [12] 정확히는 청 몰락의 시작은 건륭제 때였는데 이것도 건륭제 말기에 너무 오랜 재임기간이란 점이 터지면서 여러 문제가 연달아 터진 것에 가깝고 니오후루 허션이 엄청나게 해먹은 것도 한몫 한다. 거기에 이 시기 청나라는 서양의 접근으로 외부적으로 풍랑을 맞던 데다 도광제는 무능할지언정 황제치곤 상당히 검소하게 살던 인물이기도 했다. 이후 동치제, 광서제는 나름대로 개혁을 시도했지만 천계제처럼 서태후의 꼭두각시 인형이나 다름없었고 함풍제도 여러 악재가 겹쳐 결과가 최악으로만 나와서 그렇지 노력하려는 면은 있었다. 게다가 청나라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청나라는 만주족, 몽골족, 한족, 티베트족, 위구르족, 중앙아시아 유목민족 등이 묶여있는 사실상의 동군연합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명나라의 황제들과 통치 난이도부터 엄청난 차이가 난다. 오죽하면 역사학자들이 명나라의 명군들이 청나라에 오면 평범한 축에 들어가는 황제라고 할 정도다. 즉위할 당시에 본인의 나이가 너무 어렸을뿐더러 자신의 섭정을 맡은 아버지 순친왕과 양어머니 융유태후에게 서태후만큼의 강력한 권력과 카리스마가 없었고 청나라 자체도 사실상 멸망 직전에 가까웠던 선통제는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