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근대 이전: 명나라 - 포르투갈 무역항
1542년에 명나라가 포르투갈과 무역을 하기 위해 개항한 것으로 시작되었다.15세기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통해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카보베르데 서경 46도를 기준으로 스페인은 아메리카 신대륙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고, 포르투갈은 서아프리카 식민지들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를 넘어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적극 진출했고, 마카오에 오기 앞서 말레이반도의 말라카를 손쉽게 함락시켰다.
명나라가 포르투갈과 무역하기 위해 마카오를 개항한 것을 " 포르투갈인들이 해적을 퇴치한 공로를 명나라 황제에게 인정받아 마카오를 무역항으로 개항하여 명나라와 포르투갈의 무역이 시작됐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는데, 이건 18세기에 포르투갈인이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창작한 이야기다. 사실은 1553년에 포르투갈의 콘키스타도르인 호르헤 알바레스 일행이 "배의 화물이 젖어서 잠깐 말리고 싶다"는 구실로 명나라 군인과 장군, 관리에게 엄청난 금과 뇌물을 주어 체류하게 된 것이 이 도시의 시초이다. 당시 명나라의 황제로 도교빠라 불릴 정도로 신비주의에 탐닉한 가정제는 불로장생에 집착해 채향사(採香使)들을 시켜 방방곡곡에서 용연향을 구하게 했는데, 때마침 전 세계에 연락선이 있는 포르투갈 상인들은 용연향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어 황제와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한편 명나라는 언젠가 서양 국가들과도 교류를 하고 싶어했는데 이 기회에 포르투갈과 무역을 하기 위한 창구로 써먹을 생각으로 무역항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후 1572년부터는 명나라 조정에 포르투갈이 매년 500냥을 세금 명목으로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포르투갈인의 마카오 체류를 공식 허용하게 되었다. 당시 명나라는 연안에 왜구나 중국인 해적들이 들끓어 국가 재정손실이 심했는데, 이때의 마카오는 놔둬봐야 정부 입장에선 채산성 낮은 연안의 섬이라 포르투갈에서 바치는 여러 특산품과 뇌물들이 충분히 매력적이었다.[1] 그 이후 영구 임대안을 승인했으며 정식으로 임대된 후엔 뇌물이 아닌 정식 임대료, 즉 명나라 황제에 대해 세금을 지불하고 대신 마카오에서 장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당연하지만 이때만 해도 법적으로 포르투갈에 주권이 이양된 건 아니었다. 포르투갈은 국력의 한계[2] 때문에 명나라 본토 침공을 어설프게 시도했다가는 화기로 무장한 대군에게 포위되어 궤멸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는 마카오 내 중국인들의 처우에서도 드러나는데, 다른 지역 식민지에서는 원주민들을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고 징집하던 포르투갈인들은 마카오에서만큼은 이런 행동을 자제했다. 마카오의 역사를 다른 여러 문헌에서 지적하는 사실인데, 마카오에 체류하던 포르투갈인이 현지 중국인과 결혼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마카오에 체류하던 포르투갈 군인과 관료들은 당시 노예무역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구입한 일본인 여성을 현지처로 삼거나 아니면 고아(인도)나 믈라카 식민지에서 식민지인 출신 부인을 데려오는 경우가 많았다. 자세한 내용은 일본의 노예무역, 고안 카톨릭 및 위백 영어판 마카오인 문서 # 등등 참조.[3]
마카오의 전성기는 1580년에서 1640년 사이 스페인 왕실과 포르투갈 왕실이 동군연합을 이루었을 때였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마카오와 마닐라 사이의 무역을 윤허하였는데, 당시 마닐라는 갈레온 무역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스페인의 라틴아메리카 식민지 누에바에스파냐의 사카테카스 은광과 페루 부왕령의 포토시 은광에서 생산된 은 상당수가 갈레온을 타고 마닐라로 향했고 다시 중국인 보따리 상인들이 가지고 온 물건들의 대금으로 지불되었다. 마닐라를 오고가는 중국인 상인들은 천주, 월항(月港)[4] 광저우 이외에도 마카오를 거쳐서 중국과 무역하였다. 하지만 당시 마카오가 중국과 유럽의 무역 중심지였다는 식으로 과대평가는 곤란하다. 마카오에 체류하는 포르투갈 본토인 인구는 1583년에는 900명, 1640년에는 마카오 전체 인구 26,000명 중 12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포르투갈인들 입장에서는 마카오보다는 인도의 고아(인도)가 훨씬 더 중요한 식민 기지이기도 했다.[5] 그리고 어차피 마카오가 없어도 필리핀 도독령의 마닐라는 중국인 보따리 상인들을 통해서 중국과 무역이 충분히 가능했을뿐더러, 포르투갈 본국은 대항해시대 중국과 유럽의 무역을 전담하기에는 자본력이 매우 부족하였다.[6][7]
물론 당시 마카오는 포르투갈과 일본 사이의 무역 중계기지로서 포르투갈과 일본 양국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622년 마카오 점령을 시도했다. 전투가 벌어지던 당시 포르투갈 상인 상당수가 광저우로 무역하러 나가있던 상황이라 전투 당시 마카오에 체류하던 포르투갈인 성인 남성은 150명 정도였고, 네덜란드 공격군의 숫자는 일본인 용병 및 자바인 보조부대 등을 포함하여 800여 명에 달했다. 수학에 능통했던 예수회 수도자들이 계산하고 지휘한 포격이 네덜란드인들을 강타하면서 적의 수가 예상보다 많다고 착각한 네덜란드인들은 도망간다.[8] 중국 영토에서 벌어진 유럽 열강 사이의 전투는 포르투갈의 승리로 끝났으며 지금도 이 전쟁 당시 포격했던 몬테 요새(Fortaleza de Monte)가 마카오의 관광지로 남아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1637년부로 일본에서 포르투갈의 노예무역 및 가톨릭 선교를 문제삼아 교류를 제한하고 그동안 무역해오던 포르투갈 대신 네덜란드와 무역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포르투갈의 주요 식민 기지 중 하나였던 믈라카가 1641년부로 네덜란드인들의 손에 넘어가면서, 과거 유럽과 일본을 잇는 핵심 거점이던 마카오의 위상은 추락하기 시작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명나라가 멸망하고 뒤이어 중원의 패자가 된 청나라가 1685년부로 광저우시를 개항하였고, 그 결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미국 등이 광저우 시에 대사관을 지으면서 그동안 마카오가 누려왔던 특권이 유명무실화되었다.
2. 아편전쟁 이후~ 20세기 중반
근대 증기선이 등장하자 배들이 거대해지기 시작했는데 마카오는 수심이 얕아 대항해시대 초반의 스페인의 갤리온 등 범선을 이용한 무역은 가능했지만 근대 이후의 거대한 배들이 무역을 하러 정박하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포르투갈이 근대로 가면서 이웃 스페인, 프랑스, 영국 등에게 휘둘리며 이류 열강으로 떨어지며 무역도 쇠퇴하는 상황이었다. 결정적으로 스페인 식민지인 필리핀 도독령과 마카오 간 교역 역시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은 광산 채산성이 낮아지며 마카오의 중요성 역시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이 상황에서 마카오의 쇠퇴에 쐐기를 박는 사건이 일어난다.1840년 영국이 아편전쟁을 도발하였고 청은 완패했다. 서양 열강들이 청나라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해 수많은 이권을 받는다. 포르투갈도 이에 편승해 1851년과 1864년에 원래 마카오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았던 무인도인 타이파와 콜로안을 점거하고 1887년에 청나라와 베이징 조약을 맺어 마카오를 정식으로 포르투갈 영토로 삼았다. 그러나 이는 너무 늦었다. 이미 1841년에 포르투갈보다 훨씬 강한 나라였던 영국이 마카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홍콩 섬을 난징 조약으로 따내고 중국과 서양 국가들의 직접 무역 시대가 열리면서 영국령 홍콩이 급속히 성장한 것과 달리 쇠퇴하는 본국처럼 포르투갈령 마카오도 점차 쇠퇴한다.
이때의 역사적인 배경으로 마카오 하면 깔끔하고 금융업 위주의 선진국인 홍콩과 달리 도박장 천국 내진 무법천지 정도로 인식하는 어르신들도 적지는 않다. 이게 다 1990년대까지의 마카오에 대한 인식으로 홍콩 영화가 1970년대 및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까지 인기를 끌면서 홍콩은 선망의 대상임에 비해 마카오는 옆에 세트로 붙어있는 쩌리로 본 것도 있는데다 신상옥 감독도 마카오에서 납북당하는 바람에 납북당하기 좋은 곳이라는 선입견까지 생겼다.[9] 그리고 포르투갈의 친 중화인민공화국/ 소련 외교 및 동구 공산권과의 화해정책 때문에 영국이 반북/반소 성향인 것과 달리 포르투갈은 북한 및 구소련에 우호적이었고 자연히 북한인도 마카오에 많이 거주했기 때문에 자연히 마카오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낮은 편이었다. 무엇보다 홍콩과는 달리 대놓고 활개치는 북한사람들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 게 컸다.[10]
이렇게 19세기~ 20세기 중후반까지의 마카오는 창구로서의 기능은 완전히 홍콩에 밀리고 도박과 매춘으로 생계를 잇는 퇴락한 도시였다. 중국으로 관문은 대놓고 홍콩이 그 지위를 가져갔으며 마카오가 할 건 결국 유흥/오락/관광뿐이었다. 1847년 도박을 합법화하자마자 200개가 넘는 도박장이 들어섰고 지금은 관광지가 된 펠리시다데 거리는 중국 대륙 전역에서 매춘부들이 모여든 거대한 홍등가였다. 마카오가 얼마나 이미지가 나빠졌는지 보여주는 단편이다. 이때 생계형 범죄도 크게 늘어 마카오의 치안을 불안하게 했다.
골때리는 건 1975년 카네이션 혁명 후 사회주의 성향의 새 포르투갈 정부가 마카오에 주둔하는 포르투갈군을 모두 철수시켜서 마카오는 이 때 방위를 담당할 군대도 없는 상태였다.
다만 사회주의 성향이라서 친공적 행태를 보인건 아니고 그냥 모든 식민지를 포기하는 결단이었을 뿐이다. 아무리 중국과 포르투갈이 우호 관계라고는 하지만 유사시 내부 치안유지까지 가능한 주둔군이 없단 건 너무 뼈아픈 손실이었다. 삼합회가 이 기회를 틈타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식민지 마카오를 담당하던 포르투갈 경찰은 수장들부터 광동어도 모르는 포르투갈인 백인이 들어와 총수라고 앉아있었고 중국인 경찰관들은 하나같이 부패해서 삼합회와 유착은 기본이었으며 역량이 이웃의 홍콩 경찰과는 비교도 안 되게 후달렸다. 마카오가 반환 전까지 무법천지가 된 건 포르투갈 경찰의 부패와 주둔군의 부재가 맞물린 결과였다.
3.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연합국에 속한 영국과 달리 포르투갈이 일단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홍콩과 광저우가 일본군에 점령되었을 때도 마카오는 무사했는데 이때 그쪽 지역의 피난민이 몰려와 인구가 잠깐 증가하기도 했다.당시 포르투갈은 살라자르 정부 하에서 일본에 우호적인 편이었기에 마카오를 통해 일본에 석유를 약간 팔기도 했었고, 이 때문에 미군의 폭격을 받은 일도 있었다. 일제도 중화민국을 압박하기 위해 마카오 영사관을 설치하고 중국의 항일 활동을 감시했고, 물론 중국인들의 일제 인사에 대한 습격도 있었다.[11]
4.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1949년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었으나 서방과의 정면 대결을 바라지는 않던 중국의 새 주인 중화인민공화국은 이곳을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포르투갈의 영유권을 존중했다. 홍콩의 경우도 일부 공산당 강경파들은 '해방'시키자고 주장했으나, 새로 들어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서방의 승인을 빨리 얻기 위해 영국의 홍콩 영유, 포르투갈의 마카오 영유를 묵인하여 당시 중국국민당 정부가 피난해 있던 광저우시로 남진하던 부대들은 선전시에서 진격을 멈추었다. 아무튼 그 때문에 영국은 서방국가 최초로 1949년에 베이징시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승인했다.[12]1966년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홍위병들이 야금야금 들어와 점령을 시도한 관갑사건도 있었으나 포르투갈이 아무리 약체화되었어도 이딴 오합지졸 폭도들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어서 주둔군 및 국경경찰을 동원해 방어에 성공한다. 인도 고아에서는 영국제 무기로 무장한 쪽수 많은 인도군에 패퇴해 구축함인 알폰소 데 알부케르케급[13] 함정까지 1척 잃는 굴욕까지 겪었으나 이 쪽은 상대가 정규군도 아닌 죽창 든 오합지졸 홍위병 민간인들이었으며 이 정도는 포르투갈 경찰이 거뜬히 때려잡았다. 관갑사건이라 불리는 사건인데 이후 중국 정부는 홍위병들이 괜히 남의 나라와의 전쟁을 유도하는 황당한 상황을 막고자 이들을 제지하기 시작한다. 현재의 대국굴기니 패권주의니 하는 G2 중국과 달리 이때 중국은 형편없는 나라로 뭘 하고 싶어도 힘이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카오 주민들 역시 대부분은 본질적으로 한족 중국인이기에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영향을 받아 마카오에서도 마오주의를 가르치는 학교들이 늘어나고 중국공산당을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당시 반공주의가 강렬했던 군부 치하 포르투갈의 영향으로 포르투갈령 마카오 정부 역시 반공주의적 입장을 취하며 이들을 탄압하다가 1966년의 12.3 사건같은 중국계 주민들의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때 포르투갈령 마카오 총독부는 폭동을 강경 진압했으나, 마카오인의 민심 이반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폭동 세력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었다. 이 폭동으로 굴욕을 당한 포르투갈령 마카오 정부는 반공색채를 누그러뜨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던 본국의 방침도 무시하고 마카오의 친대륙 중국인들을 정계에 들이고 중화인민공화국과 교류하며 중국국민당의 활동을 금지하는 등 친중공 성향을 보였다.
5. 중국 반환
포르투갈 군부 정권이 1975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붕괴되었다. 긴 식민 전쟁에 지친 포르투갈은 모든 식민지들을 빠르게 포기하려고 했고 마카오도 예외는 아니었다. 포르투갈은 이 시기에 아예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고 중화민국과는 단교했고, 중화민국 대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 밀착하면서 마카오 반환을 제안했다. 하지만 포르투갈 정부가 먼저 마카오 반환을 제안해도 중국 정부는 반환에 미온적이었다.중국이 1970년대 마카오 반환에 미온적이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중국 입장에서는 마카오보다 홍콩을 돌려받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사실 1970년대 당시는 아직 많은 자본주의 국가들이[14]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대만의 중화민국을 유일한 정통 중국으로 승인하던 상황이었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죽의 장막 건너로 얼마 없는 서방과의 협상창구 마카오를 일단 놔두고 활용하는 게 나았다. 그리고 영국이 홍콩 전체의 반환을 거부하고 신계 외곽만 반환한다고 했기 때문에 이래저래 협상이 길어졌고, 중국은 이 문제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중국에게는 홍콩이 당연히 더 중요했다.
두번째는 카네이션 혁명 이후부터 마카오 식민 정부가 이미 중국 공산당에 유화적인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마카오는 1975년 이후 마카오 내 중국계를 정치 요직에 기용하는 등 사실상 반환되었다고 할 정도로 포르투갈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고 중국의 영향력이 점차 강해졌다.[15] 중국은 이에 재빨리 마카오의 재벌인 스탠리 호와 접촉, 그를 구워삶아서 친중 인사로 만드는 데 성공했으며 이후 스탠리 호 그룹이 카지노 운영을 독점하자 여기서 재미를 좀 본다. 마카오의 중국화는 이렇게 뿌리가 깊었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화의 과정에서 마카오인들도 중국을 모국/형제국가로 인식하게 된다.[16]
하지만 이 때 포르투갈과 중국은 마카오를 '중국 땅이지만 포르투갈 정부가 행정권을 행사하는 곳'으로 해석하는 데 합의하여[17] 언젠가 반환이 이뤄져야 하는 데는 양국이 입장의 일치를 보였고, 포르투갈 정부도 이에 근거해 1976년부터 마카오 정부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이양했다.
그리고 영국이 전향적으로 홍콩 전체를 반환하고 중국이 특별 행정구역으로 관리하기로 결정한 1984년 중영공동선언 이후 포르투갈 정부는 1987년에 또 다시 반환 의사를 표명하였는데 이번에는 중국이 받아들임으로써 1987년 3월 26일에 홍콩과 유사한 일국양제의 논리로 마카오를 중국에 반환함을 규정한 중국-포르투갈 공동선언을 체결한다. 이에 따라 마카오는 1999년 12월 20일에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되었다.
홍콩과 마찬가지의 일국양제 원칙이라서 경제적 자유가 전면 보장되고 사회주의 체제는 적용되지 않는다. 즉 홍콩처럼 마카오도 사실상 중국본토와 같은 사회주의 체제가 영구 적용되지 않는다. 이를 어기면 포르투갈 정부가 합법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됐다. 물론 현대까지도 그럭저럭 강대국인 영국과 달리 유럽에서도 소국인 포르투갈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중국에 직접 압력을 가할 수단이 거의 없는 만큼, 그 방법은 마카오 거주자 및 자본의 일괄 철수와 같은 형식이 될 것으로 보이며, 실질적으로 마카오는 홍콩과 달리 중국이 포르투갈령 시절부터 이미 이것저것 많이 영향력을 뻗쳐놓아서 포르투갈이 굳이 압력을 가할 구실도 없다.
그리고 홍콩 및 광둥성 정부와 공동으로 마카오 옆 주하이시의 일부인 헝친다오를 개발하고 있다. 마카오 대학의 캠퍼스를 주하이시가 임대 형식으로 떼어줬는데 실질적으로 영구 임대로 보면 되며 점진적으로 마카오의 확장에 헝친다오를 적극 이용할 계획이다. 그리고 2018년 강주아오 대교가 개통돼 홍콩에서도 이 헝친다오를 차량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은 이미 사회주의 체제 내 경제특구인 선전시나 주하이시, 산터우시, 하이난성 같은 곳들보다 별도 국가처럼 취급되는 자본주의 특별행정구들인 홍콩과 마카오가 더 돈이 되는 것을 알고 있으며[18], 따라서 이는 중국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땅 일부를 떼어 내 사회주의 체제가 적용되지 않는 곳으로 만든 최초의 사례라 볼 수 있다. 물론 자치나 민주주의와는 별 상관 없는 별도 관세구역 및 자본주의 경제체제 전면 적용지역[19]인데 하는 김에 사실상의 자치를 허용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상 자치가 중앙에서 직접 특별행정구를 운영하는 것보다는 더 효율적이다.
포르투갈 정부는 옛 식민지에 이미 합법적으로 거주하던 주민 및 그 후손 전원에게 포르투갈 국적을 부여하였다. 특히 포르투갈 국적법이 개정된 1981년 11월 19일 이전에 포르투갈령 마카오에서 태어났음을 증명할 수 있다면 혈통과 상관없이 포르투갈 국적을 인정하고 있다. 유럽연합 소속국인 포르투갈 국적이 있으면 사실상 유럽 어디서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만큼 이는 상당한 특혜를 부여한 것이다. 포르투갈이 마카오인 모두에게 국적을 부여한 이유에 관한 설 중 하나는 마카오보다 앞서 1970년대 카네이션 혁명 이후 아프리카 식민지들이 독립할 당시, 3대 이내 포르투갈 본토 태생의 선조가 있는 이를 제외한 나머지 아프리카인들에게는 포르투갈 국적을 부여하지 않았는데, 문제는 식민지 전쟁 당시 포르투갈군의 과반 이상을 차지했던 식민지 태생 주민들이 독립 후 내전이 발발하면서 반역자로 몰려 대거 숙청당하는 학살극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경험 때문에 포르투갈 정부는 마카오 주민들에게 국적을 주는 방향으로 선회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 이후 오랜 세월동안 역사적으로 심각한 인구 부족에 시달렸는데[20] 경제력이나 시민의식이 매우 낙후된 아프리카 식민지들과 달리 본국 못지않게 시민 의식이 높고 경제력이 있는데다 포르투갈 본국과 문화적 연대가 있는 마카오인들은 잠재적으로 상당히 매력적인 이민자가 될 수 있었던 측면이 있다. 지금도 유럽 연합 역내에서 부유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투자이민을 가장 많이 받아주는 나라가 포르투갈이다. 어쨌든 이에 따라 반환 이전 마카오에 합법적으로 거주하던 43만 명[21]은 반환 이후에도 포르투갈 국적을 유지할 수 있게 했는데 이는 영국이 홍콩 주민들에게 BNO라는 제한적 국적만을 부여한 것과 비교되는 처사로 평가되고 있다.[22]
마카오 반환식 영상이다.[23] 2년 전 홍콩에서도 유사한 의식을 거행했다.
15세기 포르투갈인들은 브라질에서부터 일본까지 세계 각지를 항해하며 세계 제국을 이루었지만, 1999년 12월 20일 최후의 식민지였던 마카오를 중국에 반환하면서 포르투갈 제국, 더 나아가 유럽 국가의 아시아 식민지 역사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됐다. 이 영상은 인류 최초의 근대적 식민제국이자 최후의 식민제국이었던 포르투갈 제국의 퇴장, 향후 G2가 되는 신흥 강대국 중국의 등장을 상징한다. 반환식 뒤의 조명 역시 푸른 바다에서 온 포르투갈 제국과 푸른 깃발의 포르투갈령 마카오 깃발을 떠올리게 하는 파란색에서 떠오르는 사회주의 신흥 강대국 중화인민공화국의 상징인 붉은 색으로 바뀌는 등등 2년 전 반환식과는 다르게 시각적으로도 신경을 썼음을 보여준다.
중국 반환 이후, 중국 중앙정부가 인근 도시 주하이시에 인민해방군을 주둔시키고, 포르투갈령 마카오 시대에 막장 치안으로 악명높았던 마카오에서 범죄 타파에 나섰고, 현재 치안은 매우 안정되어 있다. 물론 카지노로 슬슬 이름을 날리면서 고객 끌어모으려고 마카오 주민들 스스로 치안을 정리한 점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새로 조직된 마카오 경찰 덕분이다. 기존 포르투갈 경찰로부터 인원 및 장비를 이어받아 새로 조직된 마카오 치안경찰이 치안향상을 위해 많이 노력했고, 그 결과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 이미지 반전에 성공했다.
또한 배후의 경제특별구인 광둥성 주하이와 연계해 카지노 산업과 관광업 중심에서 조금씩 벗어나 여러 제조업, 금융업도 육성되고 있다. 시진핑이 반부패 척결을 내세우면서 마카오 카지노들의 숨통을 억죄는 판국에 카지노만 고집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유력산업은 여전히 카지노인데 대상이 영미권 관광객이나 동남아시아 화교 등으로 바뀌었다. 나무위키에서 자주 시진핑을 언급하지만 시진핑은 카지노 자체를 금지하는게 아닌 고위공직자들의 기강을 잡는데 주력하며 일반인 인민들이 자기 돈으로 도박해서 가산을 탕진하는 건 굳이 간섭하지 않는다. 중국 공산당 고위층이 암암리에 마카오에서 도박을 즐기다 거액을 날려 문제가 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눈부신 경제발전과 산업 다각화로 2006년 홍콩을 처음 1인당 GDP에서 추월하였으며[24], 현재는 관광객 수조차 동등한 수준까지 올리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2014년에는 스위스를 따돌리고 1인당 소득 세계 4위를 차지했다. 현재 마카오의 1인당 GDP가 한화 1억원 정도니 말 다 했다. 삶의 질이나 기타 소프트웨어는 홍콩이 비교할 수 없게 앞서지만 마카오가 실질적 소득은 더 앞서며 빈부격차도 이쪽이 더 적은 편이다. 당장 집부터 마카오 쪽이 더 넓고 쾌적하다.
[1]
당시 유럽이 극동에 제국주의적 침략을 진행하기 전이라, 안보상의 문제도 그다지 없었다.
[2]
대항해시대 당시 포르투갈의 인구는 100만여 명 정도로 그렇다고 이탈리아 북부나 플랑드르처럼 엄청 부유한 것도 아니라서, 유럽 기준으로 엄연히 약소국에 속했다.
[3]
애초에 대항해시대 당시 포르투갈은 종교 근본주의 국가였는데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은 식민지 현지인과 함부로 결혼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명나라의 눈치를 대놓고 생까고 현지 중국인들을 강제로 개종시켰다가는 말썽만 커질 뿐이었다.
[4]
오늘날의
샤먼시 근처
[5]
마카오는 19세기 중반까지 고아를 중심으로 한
포르투갈령 인도에 속해있었다. 즉 전성기에도 고아보다 위상이 낮았다.
[6]
비교하자면 근대 아편 무역 이전 영국이 청나라와의 무역에서 심각한 무역 적자를 보았던 것을 생각하면 된다.
[7]
대항해시대 라틴아메리카에서 채굴된 은 중에서 유럽으로 간 것보다 중국으로 간 게 더 많다. 비교하자면 대항해시대 라틴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유입된 은으로 당시 유럽이 보유하던 은이 7배 정도 증가해서 은화의 가치가 대폭 하락하면서 유럽 및 지중해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 상당한 수준의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는데, 같은 시대 그것보다도 더 많은 양의 은이 중국으로 흘러갔다.
[8]
예수회나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이 다
포르투갈인들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보다는
가톨릭 교조주의 국가였던
포르투갈에 더 호의적이었다.
[9]
하지만 이러한 부정적 인식은
포르투갈 식민지였을 때 얘기고 중국으로 반환된 뒤로는 마카오 경찰도 중국 공안부의 지도로 새로 조직되고 중국은 주하이에
인민해방군 해군이 육전대까지 주둔시키며 여차하면 군대로 쓸어버리겠다고 엄포를 놔서 삼합회가 GG쳐서 치안이 상당히 좋은 편에 속한다.
[10]
2017년 이후 대북제재로 북한인은 전부 귀국해 철수하고 북한식당들도 사라진 지 오래다. 포르투갈 식민지 시절 이야기이다.
[11]
당시 일본은 마카오도 포르투갈의 아시아 식민지였던
동티모르을 점령했던 것처럼 무력으로 점령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티모르에는 연합군(
호주군,
네덜란드군,
영국군)이 들어와 있었기에 명분이 섰지만 마카오에는 연합군이 없었다.
[12]
수교는 한참 뒤에 이루어졌고 이땐 아직 승인 단계였다. 어쨌든 영사관계는 열려서 홍콩은 별 문제가 없었다.
[13]
아이러니하게 이 배의 이름인 알폰소 데 알부케르케는 마르스 내진 동양의 카이사르가 별명인 정복자로 인도와 중동 곳곳을 쑥대밭으로 만든 사람이었다.
[14]
참고로
영국,
프랑스,
노르웨이 등의 국가는 이미
1950년대~
1960년대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고 중화민국과 단교하였다. 영국은 홍콩 영유권 문제 때문에 그랬고 프랑스와 노르웨이는 공산권과도 친분을 맺어서
소련과도 밀접하게 외교를 전개했다.
[15]
비교하자면 영국령 홍콩은 1967년 중국의 개입으로 발생한
67폭동도 자체 경찰력으로 진압했고, 이에 중국이 반발했지만 영국의 통제를 약화시킬 수는 없었다. 이후 1980년대 영국이 강대해진 중국을 의식해 1997년 홍콩 반환을 약속하지만, 1992년까지 장관급에 중국계를 기용하지 않을 정도로 영국이 통제를 완전히 놓지 않았다. 그 뒤로는 장관급에 중국계를 기용했지만 이것은 반환을 대비한 것에 불과하다.
[16]
영국이 마지막 순간까지 통제를 놓지 않았던 홍콩의 경우 반환 후에도 일국 양제와 민주주의를 두고 우산 혁명이나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 등의 반정부 시위를 벌여왔지만, 마카오인들은 대체로 홍콩인들의 시위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다. 이는 홍콩에 건너온 마카오인들도 똑같아서
2019년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 당시 마카오 출신들은 시위를 반대했고 질서 유지를 강조했다. 홍콩에 국가보안법이
2020년 발효되었으나 마카오는 진작 발효되어
2009년에 국가보안법 및 반국가분열법 마카오 부문도 발효되고 애국주의 교육도 진작 실시된 지 오래라서
포르투갈어를 쓰는 국제학교도 중국
오성홍기를 게양하고 조회 때 의용군행진곡을 제창한다. 마카오는 진작 민주파가 나가리되어 정치적으로 조용한 편이다.
[17]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당시부터
포르투갈령 마카오와
영국령 홍콩에 대해 "중국 땅(주권)이지만 영국/포르투갈이 행정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주권과 치권은 불가분이므로 반드시 반환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포르투갈은
1974년에 중국의 이러한 입장을 인정한 것이다.
[18]
이들 지역들도 결국엔 사회주의 체제가 적용되며 따라서 중국본토 내에 적용되는 모든 규제에 발이 묶여버렸다. 이는 국제 비즈니스에 치명적이다.
[19]
이리 되면 중국 본토 내의 사회주의 규제들이 완전히 적용되지도 않고 페이스북, 유튜브, 트위터 등 다국적 기업들의 마케팅에 꼭 필요하지만 중국본토 내에서는 막혀있는 SNS의 사용도 가능하며 이래저래 장점이 많다. 경제자유지수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20]
남자들이 툭하면 배 타고 멀리
아프리카고
남아메리카고 호르무즈고
인도고 다 나가버려 다 죽어버린 까닭에 짝 없는 여자들도 많았다.
[21]
대부분 19세기 이전부터 살아온
중국인들인 마카오인(마카이엔사, 마카니즈)들이다. 20세기가 되어 대륙에서 유입된
광동인들은 포르투갈 국적을 못 받았다. 이들은
포르투갈어도 못 한다. 이 사람들은 반환 이후 중국(마카오) 국적을 받았다.
[22]
영국은 홍콩인들을
북아일랜드로 이주시키는 방안도 검토했지만 기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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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반환식에 참석한 당시 포르투갈 총리는 이후
UN 사무총장이 되는
안토니우 구테흐스이다.
[24]
물론 삶의 질은 아직까지 홍콩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