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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리투아니아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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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리투아니아

1. 개요2. 역사적 관계
2.1. 중세2.2. 근세2.3. 근대2.4. 20세기2.5. 21세기
3. 문화 교류4. 교통 교류5. 관련 문서

1. 개요

오늘날 독일 리투아니아 양국은 유럽연합, 나토에 가입되어 있고 교류도 많다. 리투아니아 전통 설화는 튜튼 기사단에게 리투아니아인이 멸망당할 뻔한 역사 때문에 독일인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다만 오늘날에는 러시아의 실질적인 위협이 더 크므로 리투아니아인은 과거사를 별로 따지지 않는 듯 하다.

2. 역사적 관계

전근대 역사 기준으로는 철천지 원수였다. 중세 튜튼 기사단 프루스인들을 학살하고 리투아니아를 계속 침략하면서 리투아니아 역시 프루스인들처럼 멸족할 뻔 했기 때문이다. 리투아니아인들이 현대 들어 반러친독 감정이 강해진 상황에서도 중세 비타우타스가 지휘한 타넨베르크 전투(잘기리스 전투)를 기념하는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2.1. 중세

독일 연대기에는 리투아니아 관련한 기록이 1009년도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리투아니아는 유럽에서 가장 기독교를 늦게 받아들인 지역으로, 독일 수도자들은 토속 신앙을 믿는 발트 부족들에 대한 선교 관련한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226년에 당시 기사단장이던 헤르만 폰 잘차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Konrad I Mazowiecki)의 프루스족들을 무찔러달라는 요청으로 헤움노(쿨름) 지역에 거점을 마련한 뒤, 이른바 <리미니의 금인칙서>를 위조하여 프로이센 지역의 소유권을 인정받고 콘라트와 함께 프로이센 원주민에 대한 북방 십자군 전쟁에 나섰다. 기사단은 이 지역의 이교도 원주민을 정복하고 독일 동부 농민들을 이주시켜 프로이센 일대에 독일 기사단국을 세웠다. 다른 한편 리투아니아 북부에서는 1200년대 또다른 독일계 십자군 기사단인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이 수립되어 라트비아의 여러 부족들을 병합하고 리투아니아를 공격하였다. 1236년 시울레 전투에서 리투아니아군에 크게 패하고 와해될 위기에 처한 리보니아 기사단은 튜튼 기사단에게 구원을 청하고 이듬해 1237년 튜튼 기사단은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을 흡수하여 리투아니아를 남북으로 공격하였다. 1260년에는 두르베 전투에서 사모기티아인 전사 4천여 명에게 리보니아 기사단 8천 명이 대패하면서 기사단장이 전사하는 치욕을 겪기도 하였다.

튜튼 기사단은 전열을 가다듬어 1291년에는 리투아니아 원정을 단행하여 오늘날의 클라이페다 일대에 해당하는 "소 리투아니아"[1] 지역과 리투아니아 북서부인 사모기티아 지역을 장악하였고, 14세기에 들어서 독일 기사단국 발트해 연안과 폴란드 북부, 독일 동부를 지배하는 동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리투아니아인들은 사모기티아에서 튜튼 기사단을 막아내는 한편 외교력을 발휘하여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일대로 영토를 급격히 팽창하기 시작했다.[2]

14세기 튜튼 기사단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 본토 전체가 위험해진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는 대공 요가일라가 폴란드 앙주 왕조의 야드비가 여왕과 결혼, 두 나라를 동군연합으로 합치고 그 힘으로 기사단 국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결국 기사단은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1.5배 규모의 폴란드-리투아니아군[3]을 상대로 나섰다가 대패하면서 많은 영토를 잃고 세력이 크게 축소되었다.

이 전투에서 튜튼 기사단의 고위 간부들이 상당수 전사해 버리는 사태가 발생했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이 기사단의 본부인 마리엔부르크 공략에는 실패하고 퇴각함으로써 그나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전투로 기사단의 군사력은 거의 붕괴되었고,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독일 기사단국은 1411년 제1차 토룬 조약을 맺고 기사단국이 영유하고 있던 즈무치 지역을 할양했다. 이후에도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은 튜튼 기사단을 여러번 공격했으며 결국 1454년~ 1466년 벌어진 13년 전쟁에서도 패배하여 제2차 토룬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결과 기사단은 왕령 프로이센이라고 불리는 서프로이센 지역과 동프로이센 서부 지역인 에름란트(Ermalnd)[4]를 할양하였으며 이후 기사단장은 폴란드 국왕의 봉신이 되었다.

2.2. 근세

독일 기사단국은 봉신국이 된 뒤에도 끊임없이 폴란드로부터 독립하려고 시도하였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기사단국의 독립 의지를 잠재우고 완전히 종속시키기 위해 1519년부터 1521년까지 2년 동안 기사단국과 전쟁을 벌였다. 기사단에 대한 신성 로마 제국의 무관심 속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에게 또다시 완패를 당한 기사단은 결국, 카를 5세 가톨릭에 회의감을 품고 있던 37대 기사단장인 알브레히트(Albrecht von Hohenzollern, Herzog von Preußen)가 1522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신교도들의 회의와 비텐베르크에서의 마르틴 루터와의 만남을 계기로 1525년 4월 가톨릭에서 루터교회로 개종, 리투아니아 대공이자 폴란드 국왕이었던 자신의 외숙부 지그문트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폴란드의 봉신국인 프로이센 공국을 수립하면서 세속화되었다. 이 시기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독일 기사단국 일대에도 한창 루터교회가 퍼져나가는 상황이었고 기사단원 중 상당수가 가톨릭에 회의감을 품고 루터교회로 개종한 상태였다. 덕분에 기사단국의 세속화 조치는 주민들이나 기사단원들의 별다른 반발없이 순조롭게 이어졌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소 리투아니아의 리투아니아인들 상당수가 루터교회로 개종하였다.

1569년 루블린 조약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 폴란드 왕국 폴란드-리투아니아라는 연방 형태로 통일된 이후에도 프로이센 공국은 한동안 폴란드 국왕의 봉신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17세기 보흐단 흐멜니츠키 봉기를 계기로 폴란드가 이른바 대홍수라는 내우외환을 겪는 와중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657년 브롬베르크-벨라우 조약으로 프로이센 공국에 대한 폴란드 국왕의 종주권을 청산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보흐단 흐멜니츠키 봉기와 이후 루스군의 침공 직후, 스웨덴 국왕 칼 10세 구스타브 바사 왕조의 계승 문제를 끝내버리기 위해 폴란드-리투아니아 루스 차르국의 침공으로 휘청이는 틈을 타 스웨덴군을 이끌고 대대적인 침공을 단행하였는데 당시 리투아니아 대귀족 야누시 라지비우는 스웨덴-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을 계획하며 스웨덴과 손을 잡고 리투아니아 대귀족들을 끌여들여 폴란드 왕국을 각지에서 공격하였다. 당시 프로이센 공국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동군연합 상태였고, 스웨덴군의 침공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위태해진 상황을 본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는 스웨덴을 도와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을 각지에서 공격하다가, 야누시 라지비우가 갑자기 죽은 후 전황이 다시 스웨덴에 불리해지자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도와서 스웨덴을 공격한 후 베리우 조약을 체결하고 봉신국 관계를 청산하였다.

2.3. 근대

18세기 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독일계 국가들인 프로이센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 그리고 러시아 제국 삼분할되어 멸망당했다. 리투아니아 본토에 해당하는 지역은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어, 중세 독일 기사단국의 영토에서 프로이센 왕국으로 이어져 온 소 리투아니아 지방과 마주보는 상황이 되었다. 19세기 당시 리투아니아에서는 반러 가톨릭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하였으나 당시 루터교회 신도였던 소 리투아니아 주민들은 반가톨릭 감정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과 제한적인 협조만 이어가는 상황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프로이센의 지배 하에서 동프로이센 지역의 리투아니아인 역시 독일인에게 2등시민 취급을 받을 때도 적지 않았으나 프로이센에서 상공업이 발달하고 세습 계급 대신에 보유 자산이 더 중요해지는 사회 분위기가 되면서 리투아니아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도 경감되었다. 상당수의 프로이센 리투아니아인은 사용하는 언어만 리투아니아어였지 (특히 루터교회 신도들의 경우) 사실상 독일인으로 동화되었고, 이들은 러시아 제국에서 독립하기 위해 분투하는 동쪽의 동포들을 불구경하는 태도로 바라보는 편이었다.

물론 소 리투아니아 주민들이 주머니에 손만 넣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데, 러시아 제국의 리투아니아인들은 러시아 정부의 탄압을 피해 몰래 동프로이센에서 인쇄된 책을 밀반입하여 가정에서 자체적으로 리투아니아어를 교육시켰고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는 리투아니아 문화 부흥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러시아 제국은 문해율이 낮은 편이었으나 리투아니아인은 예외였는데 1904년 통계 기준 러시아 제국 내 리투아니아인들은 문해율이 70%에 달했다.

2.4. 20세기

상술한 상황에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리투아니아가 독립하면서 리투아니아 본토와 별로 동질감이 없던 소 리투아니아 지역까지 신생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 영토에 편입되었다. 소 리투아니아의 루터교회 신도들과 리투아니아 본토의 가톨릭교도들 사이의 반목이 극심했는데, 1922년 통계에서 소 리투아니아의 리투아니아인들 루터교회 신도들 중 리투아니아 민족 학교에서 공부하길 원하는 경우는 2.2%에 불과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 동맹국으로 참전하고 러시아 제국은 협상국으로 참전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물자부족 문제로 폭동이 일어나면서 결국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전복되는데, 10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집권한 레닌의 소비에트 러시아는 전쟁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5]을 통해 독일 제국 측에 엄청난 양의 영토를 내어주었다. 그러나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고 리투아니아는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으로 독립하였으며, 패전국이 된 독일 영토 각지에는 프랑스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소 리투아니아 일대의 프랑스군이 1923년 철수하자 리투아니아 공화국이 군대를 보내 메멜란트 지역을 슬쩍 합병하면서 해당 지역은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의 영토로 넘어오게 되었다.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은 루터교도 주민들과의 갈등 외에도 폴란드 제2공화국 빌뉴스를 강점한 이유로 어수선한 상황이었고, 1940년 소련에 반강제로 합병당했다가 다시 나치 독일군이 진주하였다. 소 리투아니아에 잔류한 독일인들은 나치 독일 군대를 환영하였고, 나치 독일군에 의해 리투아니아에 거주하던 유대인 인구 90~91%가 홀로코스트로 희생되었다.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메멜란트의 독일인들은 메멜란트 내 루터교 리투아니아인들과 함께 서독으로 추방되었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독립국이 된 리투아니아는 1990년 재통일한 독일과 1992년부로 수교하였다.

2.5. 21세기

2000년대 이후 러시아와의 갈등에서 독일이 지속적으로 리투아니아를 지지하고 있어서 양국 관계는 상당히 협력적인 편이다. 또한 리투아니아인 청년층 중 독일로 노동이민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2004년 이후에 양국은 유럽연합의 회원국이 되었다. 이에 따라 교류, 협력이 늘고 있다.

2024년 4월 8일, 독일이 리투아니아에 상시 주둔군의 선발대를 파견했다. 이들은 상시 주둔할 ‘45기갑연대’가 사용할 기지 건설에 착수할 예정이며 45기갑연대는 2027년까지 병력을 약 5000명으로 늘린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

3. 문화 교류

소(小)리투아니아라고 부르는 프로이센 왕국 치하 클라이페다 일대의 리투아니아인들은 리투아니아어로 리에투비닝카이(Lietuvininkai)라고 불리며, 리투아니아어로 번역된 개신교 성경 및 여러 인쇄물들을 제작하였고 이는 러시아 제국 영토 내 리투아니아인 상류층들에게 밀수되어 리투아니아 민족주의 교재로도 활용되었다 한다. 독일인들로 메멜란트를 자주 방문하곤 했는데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 쿠로니아 모래톱에서 휴양을 자주 즐겼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1918년 리투아니아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리투아니아 공화국에서는 소리투아니아 주민들이 지나치게 많이 독일화되어 있다고 생각하여 이들에게 강압적인 동화 정책을 가하기도 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 동프로이센에 진주하면서 리투아니아계와 독일계를 구분하지 않고 현지 주민들을 모두 추방하면서 남은 소리투아니아 주민들은 대부분 독일로 이주하게 되었다.

1993년부로 빌뉴스에 괴테 학당이 세워졌다.

4. 교통 교류

양국을 잇는 항공노선, 도로가 존재한다. 소련 시절 건설된 리투아니아 철도는 독일 철도랑 연계가 되지 않아[6] 대신 고속 버스가 발달했다. 이 외에도 발트 3국의 대표적인 저가항공사 에어 발틱을 통해서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국제공항, 뮌헨 국제공항 등으로 이동 가능하다. 양국은 솅겐 협정에 가입했기 때문에 무비자로 상대국들을 입국할 수 있다.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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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일어: Kleinlitauen, 리투아니아어: Mažoji Lietuva. [2] 당시 키예프 루스가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하고 루테니아의 여러 공국들이 타타르에 조공을 바치던 상황이었는데, 킵차크 칸국이 서서히 몰락하자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이 지역에서 킵차크 세력을 몰아내고 영토를 다졌다 [3] 독일 기사단 2만 7천여 명, 폴란드-리투아니아군 3만 9천여 명 [4] 폴란드어 : 바르미아(Warmia) [5] 오늘날 벨라루스에 속한 브레스트라는 도시에서 체결된 조약으로, 프랑스, 독일에도 같은 이름을 지닌 도시가 있기 때문에 그냥 브레스트 조약이라 하지않고 리투아니아의(리토프스크) 브레스트에서 체결한 조약이라는 뜻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명명한다. 브레스트가 속한 벨라루스가 중세부터 근세까지 수백여 년간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였던 영향에다가 벨라루스라는 지명이 당시 독일인들에게 생소했던 이유도 있었다. [6]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광궤를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