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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19:35:19

디르크 노비츠키/선수 경력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디르크 노비츠키

1. DJK 뷔르츠부르크(1994~1998)2. 댈러스 매버릭스(1998~2019)
2.1. 2005-06 시즌 : 첫 파이널 진출2.2. 2006-07 시즌 : 정규시즌 MVP, 그러나...2.3. 2007-08 시즌 : 팀의 부진2.4. 2008-09 시즌2.5. 2009-10 시즌2.6. 2010-11 시즌 : NBA 파이널 진출, 그리고...2.7. 2011-12 시즌 이후
3.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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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JK 뷔르츠부르크(1994~1998)

파일:더크 노비츠키 독일 시절.jpg

1995-96 시즌에는 팀의 주전 포워드 매티 쿠시마와 함께 주전 포워드로서 매 경기 두 자릿수 득점을 하면서 활약한다. 독일 국가대표팀 코치인 더크 바우만은 "노비츠키는 훗날 10년 혹은 15년 안에 독일을 대표할 선수가 될 것."이라고 극찬했다. 노비츠키의 소속팀 DJK는 이때 2부 리그 2위로 시즌을 마쳤지만, 마지막 1부 리그 승격 결정전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1부 리그 진입에는 실패했다.

1996-97 시즌에는 쿠시마가 팀을 떠나면서 DJK의 확고한 주전 에이스가 되었다. 평균 19.4점을 기록하며 활약했고, DJK는 다시 정규리그 2위에 올랐지만 또 승격 결정전에서 패배해 승격에 실패했다. 1997-98 시즌에는 독일의 수능 시험으로 불리는 아비투어를 마쳤지만 이번에는 군복무 크리가 겹쳐 1997년 9월 1일부터 1998년 6월 30일까지 군복무를 해야 했다.

그 후 다시 팀에 복귀한 노비츠키는 2부 리그 득점왕에 올랐고, 드디어 팀을 1부 리그로 승격시키는데 성공한다. 그 해에 노비츠키는 올해의 독일 농구선수로 선정되었다. 그의 뛰어난 기량은 독일 밖으로도 알려져서 유럽 농구 명문팀인 FC 바르셀로나 바스케트가 그에게 영입을 제안했을 정도. 그러나 노비츠키는 이를 거절했다.

1년 후 노비츠키는 나이키가 주최하는 'Hoop Heros Tour'에 참가하게 되는데, 여기서 찰스 바클리 스카티 피펜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서 바클리가 극찬할 정도였다. 당시를 회고하는 바클리의 증언[1][2] 그리고 다시 나이키가 각 지역 유망주들을 불러모아 재능을 발휘하게 하는 Nike Hoop Summit에도 참가, 알 헤링턴과 라샤드 루이스 등 미국의 농구 유망주들을 압도했다. 당시 기록은 33득점 14리바운드 3스틸. 노비츠키의 순발력과 볼 핸들링, 그리고 뛰어난 슈팅 능력은 NBA 스카우터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2. 댈러스 매버릭스(1998~2019)

독일에서 웬만큼 이룰 것은 이뤘고, 군복무까지 마친 노비츠키는 이제 걸림돌이 없었다. 그는 1998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 신청을 하게 되고, 1라운드 9순위로 밀워키 벅스에 지명되었다가 드래프트 현장에서 댈러스 매버릭스가 지명한 로버트 트레일러와 트레이드되어 댈러스로 이적하게 된다.[3] 근데 하필이면 1998-99 시즌에 NBA가 파업 크리를 맞는 바람에 시즌 개최가 불투명했고, 노비츠키는 NBA 시즌이 개막되기를 바라면서 독일로 돌아가 원 소속팀에서 다시 뛰었다.

그 후 NBA와 선수 노조가 극적으로 타협을 해 단축 시즌으로 시즌을 치르기로 합의하면서 노비츠키도 NBA에 데뷔하게 된다. 47경기에 출전한 노비츠키는 평균 8.2득점. 3.4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러나 장기였던 슛 성공률은 최악이었다. 독일 리그와는 다른 NBA에서 노비츠키는 분전했지만 그는 아직 부족했다. 무엇보다 수비력이 약점으로 지적받으면서 그는 자신의 이름에 Defense가 빠진 irk라 불리며 조롱당했다.[4]

그러나 노비츠키는 2년차 시즌에는 자신의 장기를 마음껏 발휘하면서 기량을 향상시켜 나갔다. 평균 득점도 9점 가까이 상승했고, 대부분의 기록이 루키 시즌과 달리 수직 상승했다.[5] 팀도 인터넷 재벌이었던 마크 큐반이 새로운 구단주가 되고, 큐반이 댈러스를 위해 아낌없이 돈을 투자하면서 더욱 더 농구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6] 그리고 마이클 핀리와 미래의 백투백 MVP 스티브 내시[7]와 함께 빅3로서 팀을 이끌었다.[8][9]

3년차 시즌에는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서부의 강호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1승 4패로 탈락할 때까지 노비츠키는 팀의 플레이오프 득점 1위를 달리는 등 자신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 후 계속해서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으나 언제나 2%가 모자라는 모습을 보였다. 2003-04 시즌에는 팀이 앤트완 워커와 앤트완 재이미슨 등을 데려오면서 사기 라인업을 구축했으나 1라운드에서 광속 탈락하는 불운을 맛봤다. 그 와중에도 노비츠키는 플레이오프에서 더블더블 활약을 펼치며 이때부터 사기츠키의 모습을 보여준다.

2004-05 시즌 내시가 피닉스 선즈로 이적하고, 시즌 중에는 마이클 핀리가 부상으로 인해 기량이 하락하면서 자연스럽게 팀의 리더 자리도 그에게 넘어오게 되었다. 노비츠키는 혼신의 힘을 다해 경기에 임했다. 팀도 제이슨 테리, 제리 스택하우스, 키스 밴 혼 등 벤치 멤버를 영입하면서 노비츠키의 부담을 덜어주려 애썼다. 시즌 중에 감독 돈 넬슨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고 코치였던 에이버리 존슨이 감독으로 승격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도 있었지만 빠른 속도로 팀이 수습되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야오밍이 버티는 휴스턴 로키츠에게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치며 승리, 2라운드에 올라갔지만, 당시 돌풍의 핵이었던 피닉스 선즈에게 패배하면서 탈락하고 말았다. 이때 노비츠키는 팀을 이끌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했던지 실수를 한 테리를 험악한 인상으로 노려보거나[10] 에릭 뎀피어에게 화를 내는 등의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이런 모습에 팬들은 노비츠키의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비판했다.

2.1. 2005-06 시즌 : 첫 파이널 진출

05-06시즌. 노비츠키는 다시 절치부심하고 시즌에 임했다. 마이클 핀리도 우승을 위해서, 샌안토니오 스퍼스로 이적한 상황. 이제 명실상부한 팀의 리더였다. 60승 22패를 기록한 매버릭스는 플레이오프에서 멤피스 그리즐리스, 샌안토니오 스퍼스, 피닉스 선즈 등을 차례대로 격파하고 팀 역사상 처음으로 파이널에 오르게 된다.

특히 플레이오프 2라운드 샌안토니오 스퍼스와의 시리즈는 NBA 역사에 손꼽힐만한 명시리즈로, 팀 던컨과 노비츠키의 쇼다운이 매우 대단했다. 당시 매버릭스는 스퍼스를 상대로 아직 플레이오프에서 이겨본적이 없어서 이를 갈고 있었고, 시리즈를 3:1로 앞서가며 드디어 스퍼스를 잡나했지만 내리 5,6차전을 내주며 7차전 원정 경기를 떠나는 암담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댈러스는 계속 리드를 잡아나갔지만 스퍼스의 끈질긴 추격끝에 결국 경기종료 33초전 스코어는 동점인 가운데 마누 지노빌리의 클러치 3점 샷에 역전당하며 이번에도 안되나 했다. 그러나 남은 경기시간이 20여초밖에 안남았고 3점차인 암울한 상황에서도 노비츠키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클러치 3점샷을 성공시킨 지노빌리에게 바로 골밑에서 바스켓 카운트 앤드원을 얻어내는데 성공하며 승부를 연장전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연장전에서 댈러스가 끝끝내 승리를 거두며 드디어 샌안토니오를 플레이오프에서 넘었다.

그렇게 극적인 과정을 거쳐 올라온 파이널에서 만난 상대는 드웨인 웨이드 샤킬 오닐이 버티는 마이애미 히트. 첫 2승을 따내면서 우승에 거의 근접하나 싶었지만... 히트의 에이스인 드웨인 웨이드가 엄청난 집중력을 선보이고, 그러한 웨이드에게 날개를 달아준 사무국의 역대급 편파 판정으로 인해 결국 내리 4연패를 하고 말았다. 국내와 현지를 가리지 않고 역대 파이널 중 손꼽히는 편파 판정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정도로 파울콜 문제가 극심했던지라 매버릭스 팬들에겐 사실상 금지어나 마찬가지인 시리즈.[11]

보통은 편파판정이라고 해봐야 해당 경기 내에서 몇 포제션 억울한 장면이 나오는 정도인데, 2006 파이널은 댈러스가 첫 두 경기를 챙겨 압도적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남은 네경기 내내 웨이드가 스치기만 해도 파울이 불리는 상황이 이어졌던 만큼 마이애미&웨이드의 팬들 정도를 제외한 나머지는 현재까지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수준으로 팬들에게 각인되어 있다.[12] 노비츠키가 처음 기세 그대로 우승을 해냈다면 하킴 올라주원, 코비 브라이언트와 동률인 1시엠 2파엠으로 커리어를 끝마칠 여지가 높았기에 이러나 저러나 커리어 통틀어 가장 아쉬운 순간인 셈.

2.2. 2006-07 시즌 : 정규시즌 MVP, 그러나...

06-07시즌에 댈러스는 팀 창단 이래 최고성적을 거뒀다. 서부전체 1위. 1번시드를 거머쥐고 플레이오프에 올랐다. 노비츠키 본인 역시 NBA 사상 첫 번째 유럽 국적 선수로서의 정규시즌 MVP에 선정되는 등 개인적인 기쁨도 있었다.[13]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전에 같이 한솥밥을 먹은 돈 넬슨과 '배산적' 배런 데이비스가 이끄는 8번시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게 2승 4패, 황건적의 난이라고 회자되는 업셋의 희생양이 되어 탈락하고 노비츠키에게 택배 MVP라는 별명이 따라붙게 된다.

사실 진짜로 MVP 트로피를 택배로 보내준 건 아니고(…) MVP 수여는 플레이오프 경기를 치르며 경기장에서 이뤄지는게 관례였는데, 이게 매버릭스의 광탈로 MVP가 플옵에서 이미 탈락한 상황에서 상을 받는 희귀한 상황이 나와버린 것이다. 하여 팬들 사이에서 '광탈했으니 집에 돌아가 택배로 MVP 수여받겠네?' 라는 농담이 설득력있게 퍼진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이때 기자회견과 사진촬영을 곁들인 조촐한 수여식을 가졌으며, 당연히 nba 총재 데이빗 스턴과 감독 에이버리 존슨, 구단주 마크 큐반이 참가했다.[14] 그러나 통상적으로 mvp 시상식은 플옵 경기에서 홈팬들 앞에서 하고 시기상 우승의 가능성이 있는 2라운드 도중에 하기 때문에 분위기가 굉장히 좋은데, 노비츠키는 광탈당한데다 홈팬들 앞에서 한것도 아니니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단, 노비츠키가 역사상 최초의 MVP 광탈 사례는 아니다. 75-76시즌 LA 레이커스의 카림 압둘 자바는 40승 42패라는 팀성적으로 플옵 진출조차 실패하면서 "플옵 무대도 못 밟아본" MVP가 되었기 때문. 또한 노비츠키 이후에는 16-17 okc의 러셀 웨스트브룩이, 21-22 덴버의 니콜라 요키치가 MVP를 수상하고도 1라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06-07 매버릭스가 아직까지도 가장 임팩트있는 광탈 사례로 꼽히는 이유는 노비츠키 때문만은 아니다. 우선 위 세 팀의 경우 해당 시즌 MVP를 배출하긴 했지만 팀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플옵에 끼지도 못 한 레이커스야 말 할 것도 없고, 16-17 okc나 21-22 덴버 역시 에이스가 리그 바닥권의 전력을 이끌며 꾸역꾸역 6번 시드라도 먹은 경우라 1라운드에서 컨퍼런스 3위팀을 상대로 탈락하는 것 자체는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반면 06-07 매버릭스는 그 전년도에 헬서부를 뚫고 파이널에 진출했던 팀이고, 당 시즌에는 개막 후 첫 4경기를 내리 패했음에도 끝내 67승이라는 역사적인 승수를 기록한 1순위 컨텐더였다.

사실 워리어스의 업셋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당시 워리어스의 감독이었던 돈 넬슨은 긴 시간 매버릭스를 이끌었기에 리그의 그 누구보다도 매버릭스와 노비츠키의 파훼법을 알고 있었고, 이를 통해 매버릭스를 상대로 정규시즌 3전 전승을 거뒀기 때문. 해당 시즌 맵스를 상대로 전승을 가져간 팀은 워리어스가 유일했다. 물론 그럼에도 전체 1위 팀과의 전력차는 무시할 수 없기에 탑독은 명백히 매버릭스였지만, 넬슨 감독은 노비츠키를 야투율 40% 미만으로 묶으며 기어이 8번 시드의 기적을 해낸다. 즉, MVP의 1라 광탈도 희귀하고 1번 시드 팀의 1라운드 광탈도 희귀한데 그 두 가지가 모두 일어난 것이다.

2.3. 2007-08 시즌 : 팀의 부진

07-08시즌. 전 시즌의 업셋 후유증이었는지 매버릭스는 전 시즌보다 16승이나 하락한 저조한 성적을 내는데 그쳤다. 이 기간동안 팀은 유망주였던 데빈 해리스를 내주고 뉴저지에서 제이슨 키드를 받아오는 등 우승을 위해 발버둥을 쳤으나, 이번에도 07-08시즌 돌풍의 주역인 뉴올리언스 호네츠에게 관광당하면서 또 1라운드에 탈락하고 말았다. 발이 느려진 키드는 크리스 폴을 전혀 막지 못했고, 팀의 2옵션인 조쉬 하워드는 플레이오프에서 최악의 부진에 빠졌고, 팀이 지건 말건 성대한 생일파티를 열면서 비난을 받았다. 시즌 종료후에는 에이브리 존슨 감독이 마크 큐반 구단주와 설전을 벌이며, 해임되는 등 팀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2.4. 2008-09 시즌

오프시즌 새로운 감독으로 릭 칼라일을 영입했다. 그리고 알찬 선수보강을 바탕으로 댈러스는 강호의 모습을 어김없이 보여줬다. 노비츠키 역시 변함없는 활약으로 에이스 노릇을 톡톡히 했다. 1라운드에서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의외로 가볍게 물리치고 2라운드에 올랐으나 이번에도' 돌풍의 주역인 덴버 너겟츠에게 1승4패로 무기력하게 탈락했다.

2.5. 2009-10 시즌

09-10시즌에도 플레이오프에 오르긴 했으나,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1라운드에서 광속탈락했다. 허나 이번 시리즈에서는 감독인 릭 칼라일의 용병술이 비난의 대상이었다. 숀 메리언을 중용하지 않았고, 중요한 6차전때 캐런 버틀러의 출전시간도 납득할수 없을만큼 짧았고, 고집스럽게도 3가드 시스템을 사용했기 때문.

2.6. 2010-11 시즌 : NBA 파이널 진출, 그리고...

2010-11 시즌, 오프시즌 동안 댈러스는 그동안 거의 잉여 자원이나 다름없던 에릭 댐피어를 버리고 트레이드를 통해 타이슨 챈들러를 영입해 골밑을 강화한다. 시즌 중에도 팀 내 2옵션인 캐런 버틀러가 시즌 아웃을 당하면서 생긴 3번 라인업의 공백을 페자 스토야코비치와 코리 브루어를 영입해 해결했다. 이 덕분에 댈러스는 정규시즌 막판까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서부지구 2위 자리를 놓고 접전을 펼쳤지만 노비츠키의 부상, 버틀러의 시즌 아웃 등으로 서부 3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댈러스는 1라운드에서 제럴드 월러스의 가세로 상승세를 타고 브랜든 로이가 마지막으로 불타오른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를 상대해 4승 2패로 제압하고, 2라운드에서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디펜딩 챔피언 레이커스를 4전 전승으로 제압하며 5년 만에 서부 컨퍼런스 결승에 올랐다.[15]

이어지는 컨퍼런스 결승 1차전에서 노비츠키는 가공할 만한 필드골과 자유투 성공률을 바탕으로 오클라호마시티 썬더를 무력화시켰다. 1차전에서 40분간 무려 48득점 6리바운드 4블락 4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 15개의 슈팅 시도에 12개를 성공시켰고 특히 24개의 자유투를 얻어 모두 성공시키며 플레이오프 최다 자유투 성공이라는 신기록까지 새겼다.[16] 4차전에선 연장전 끝에 40득점 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112:105로 역전승을 거두고 3승 1패라는 전적으로 앞서며 사실상 시리즈를 접수했다. 그리고 댈러스는 5차전까지 잡아내며 결국 오클라호마시티를 4승 1패로 누르며 NBA 파이널에 진출했으며, 노비츠키는 다시 한 번 NBA 재패에 도전하게 되었다.
파이널 상대는 2006년 노비츠키에게 좌절을 준 드웨인 웨이드 마이애미 히트. 노비츠키의 실력 자체는 그때보다 물올랐고 댈러스도 그때보다 좋은 멤버를 꾸렸지만, 역시 더 강해진 웨이드, 그리고 그의 동료 르브론 제임스 크리스 보시의 마이애미보다 강하다고 말하기엔 뭔가 부족해 보였다. 당시 마이애미가 우승할 거란 여론이 90% 가까이 육박했을 정도. 다만 여론과는 별개로 과거 판정 문제로 인해 억하심정이 쌓여있던 댈러스로썬 또 다시 파이널에서 만난 마이애미에게 이를 갈고 있는 상황이었고, 안티 몰이의 정점이던 르브론으로 인해 당시 마이애미를 제외한 미국의 모든 주에선 댈러스의 우승을 바라는 분위기가 강하게 형성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1차전에서 노비츠키는 27득점으로 양 팀 내 최다 득점을 기록했지만 접전 끝에 패배, 설상가상으로 손가락 부상까지 당했다.[17] 이에 2차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댈러스의 상황과 분위기는 매우 좋지 않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시작된 2차전은 정말로 모든 게 댈러스에게 안 좋게 흘러갔다. 마이애미는 댈러스보다 더 좋은 경기력을 보였지만, 댈러스도 어떻게 고군분투한 끝에 엎치락 뒤치락하며 3쿼터 종료 당시만 해도 그래도 71:75로 댈러스가 단 4점 차로 마이애미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충분히 역전이 가능했던 상황. 그런데 4쿼터가 시작되자 마이애미의 득점력이 폭발하며 댈러스가 5분이라는 시간 동안 단 2득점을 하는 동안 마이애미는 13점을 득점했고 7분 14초가 남은 상황에서 마이애미가 점수 차를 15점 차까지 벌렸다. 모두가 오늘 경기는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할 만했다.[18] 그리고 기적은 시작되었다.

테리로 시작된 불꽃은 댈러스 팀 전체를 불타게 했으며, 그 기세에 마이애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종료 26초 전 노비츠키는 기습 3점 슛으로 93:90으로 역전에 성공했지만 찰머스가 3점 슛을 성공시키며 다시 승부는 원점이 되었다. 그리고 경기 종료 3초 전, 노비츠키는 리그에서 손꼽히는 강심장답게[19] 그림같은 돌파를 성공시켜 클러치 타임을 접수했고 결국 댈러스는 막판 무려 22:5 런으로 95:93으로 승리하며 소중한 홈 어드밴티지를 뺏어왔다.

허나 댈러스의 홈에서 펼쳐진 3연전 중 첫 번째 경기는 아쉽게 패배했다. 노비츠키는 31득점 11리바운드를 기록했지만 댈러스는 2점차 석패를 당했다. 더욱이 마지막 슈퍼 클러치 상황에서 노비츠키의 슛이 림에 맞고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다시 홈 어드밴티지를 뺏기면서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한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노비츠키는 독감까지 걸린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20] 그 여파로 4차전에서 노비츠키는 한눈에 봐도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었기에[21] 평상시보다 확실히 부진했지만 21득점 11리바운드로 팀 내 최다 득점을 기록, 4쿼터에만 10득점을 몰아치는 투혼을 보였다.[22] 그 외 팀원들의 활약, 마이애미의 자멸로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23]

5차전은 양 팀에게 가장 중요한 경기였다. 댈러스에게는 리드를 가져갈 수 있는 기회이자 마지막 홈경기였다. 여기서 지면 남은 마이애미 원정에서 남은 2경기를 모두 가져가야 한다는 엄청난 부담감에 억눌릴 것이 확실했고, 마이애미에게도 리드를 가지고 홈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였다. 그 때문에 경기는 역전의 역전을 반복했고, 스코어 100:100 상황[24]에서 댈러스가 노비츠키의 덩크로 역전에 성공, 결국 노비츠키, 테리, 키드의 연속적인 클러치 샷으로 5차전을 따냈다. 당시 노비츠키의 개인 기록은 29점 6리바운드로 역시 양 팀 내 최다 득점이었다. 이때 웨이드와 르브론의 'Mocking Dirk' 사건이 논란이 되면서 원래 안티가 많던 마이애미는 더 많은 욕을 먹게 되었고 모두가 댈러스의 우승을 바라는 상황이 되었다.

흐름과 분위기는 댈러스의 압도적 우세, 하지만 분위기가 우승을 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조롱의 주제였던 노비츠키는 사건에 대해 침착히 대응하며 남은 경기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결국 경기 종료 29.5초 전 결정적인 레이업으로 승부를 완전히 갈라버리며 꿈에 그리던 NBA 우승을 하게 되었다! 만장일치 파이널 MVP에 선정되어 기쁨은 두 배. 10여년간의 NBA 커리어 동안 미국 땅에서의 성공과 NBA 우승을 목표로 했던 이 독일 청년은 드디어 꿈을 이루었다. 파이널 6경기의 평균 기록은 26점 9.7리바운드. 자유투 성공률은 무려 97.8%였다.[25]

파일:external/a.espncdn.com/dm_110612_nba_dirk_interview.jpg

참고로 노비츠키의 고향 뷔르츠부르크 현지에서도 더크 아버지와 고향 사람들이 NBA 파이널을 시청했다. 그리고 댈러스의 우승이 결정되자 고향 땅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2.7. 2011-12 시즌 이후

파업 때문에 단축시즌으로 진행됐던 11-12 시즌, 댈러스는 우승멤버들이 해체되면서 대격변을 겪으며 지난해 우승팀이라고 믿어지지 않을정도로 전력이 약화됐다. 노비츠키는 애써 팀을 7위로 플레이오프 진출은 시켰으나 신흥 강팀인 오클라호마시티 썬더에게 스윕당했다. 이듬해에는 아예 무릎부상으로 전반기 경기 상당수를 날려먹었으며 댈러스는 2000년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다. 팀 상황이 워낙 부진해서 승률 5할 전까지는 면도를 하지 않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는데, 다같이 털보가 됐다가 시즌이 다끝나갈때야 면도에 성공했다.


간만에 면도하는 노비츠키.

2014년 4월 9일 유타 재즈전 이후 NBA 역대 통산득점 10위에 등극했다(이후 하킴 올라주원을 제치고 외국인 출신 NBA 선수 통산 최다 득점을 달성했다 통산 득점 9위). 2천점 가량 차이가 나는 6위 샤킬 오닐의 통산 득점 정도는 경신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그리고 현재 누적이 누적인만큼 2~3시즌 커리어를 더 이어간다면 윌트 체임벌린, 칼 말론, 카림 압둘자바 세 전설적인 빅맨이 기록했던 30000득점 10000리바운드 이상을 해낼수있을지에 관해 주목받고있다. 현재는 2015년 12월 25일 기준 현재 샤킬 오닐의 통산득점 기록을 뛰어 넘었다!

2014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샌안토니오와 만나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무릎을 꿇었다. 이후 2014년 오프시즌에 팀의 선수층을 두텁게 하기위해 댈러스와 3년 $25M이라는 싼값에 재계약을 한다.

2014-2015시즌 3월 25일 샌안토니오와의 경기에서 통산 25,000득점, 10,000리바운드, 1,000블록슛, 3점슛 1,000개이상을 달성한 역대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명예로운 훈장을 얻은 셈.

2015년 11월 12일 클리퍼스와의 경기에서 31득점 11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승리를 이끌었다 어느덧 노장이지만 클래스가 살아있다는것을 입증한경기.

2015년 12월 통산출전시간 14위에 등극했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2015-2016시즌에는 클러치마다 놀라운 활약을 보이고 있지만, 웨슬리 매튜스나 챈들러 파슨스같은 고액연봉자들이 골골대면서 말년에 고생하고 있다. 2~3월들어선 두선수의 컨디션이 궤도에 올라 한숨 돌리는중.

2016년 필라델피아와의 경기에서 통산 29000점을 넘겼다.

절친한 사이로 알려진 코비와의 맞대결은 아깝게도 코비의 건강탓에 불발되었는데 이날 노비츠키는 레이커스에게 클러치샷을 넣으며 승리했다. 그뒤에 바로 우정인증

노장의 나이에 3월평균 23.6득점을 기록하며 팀을 이끌고 있다. 아쉬운 것은 다른 팀원들이 기복을 보이며 영 부진한 가운데 홀로 선전중이며 팀 성적이 좋지 않다는 것. 21일 포틀랜드와의 경기에선 연장접전끝에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날 무려 40득점을 폭발시켰다.

2016년 4월 7일 플레이오프 경쟁팀인 휴스턴 로케츠와의 홈 경기에서 7득점 6리바운드 야투 2/8을 기록했지만 4쿼터 클러치 타임에서 돌파하는 제임스 하든의 공을 멋지게 스틸해내며 팀의 88-86 승리를 지켜냈다.

2016년 4월 12일 역시 플레이오프 경쟁팀인 유타 재즈와의 원정 경기에서 22득점 11리바운드 야투 7/12 3점4/7의 활약으로 팀의 101-92 승리와 플레이오프 진출 확정에 기여한다. 휴스턴과의 경기와 비슷한점이 있다면 이때 결정적인 블록슛이 팀승리에 보탬이되었다. 말년에 뽀록수비가 꽤 나온다.

2016년 4월 24일 윌트 체임벌린 엘진 베일러를 넘어 포스트시즌 득점랭킹 15위에 올라섰다.

2017년 2월 8일(한국시간 기준) 포틀랜드와의 대결(25점 3P 4개)에서 노장임에도 4쿼터 막판 중요한 순간 3점 하나, 경기종료 3초전 역전 3점[26], 10일 유타전(20점 7리바운드) 경기종료가 얼마 안남은 상황에 승부를 연장으로 이끈 동점샷으로 아직 클러치능력이 건재하다는걸 보였다.[27] 늙어도 사기치는 클라스...

2017년 2월 16일 기준 최근 5경기에서 평균 20.1득점 야투율 46% 3점 48% 자유투 94% 1.4스틸을 기록하며 노익장을 보이고 있다.

2017년 3월 6일(한국시간 기준) 오클라호마시티 썬더와 맞대결에서 18점 12리바운드를 기록하면서 통산 29,980득점이 되었다. 이제 20점만 더 추가하게 되면 통산 30,000득점의 고지를 밟게 된다.


결국 2017년 3월 8일(한국시간 기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28]와 맞대결에서 25득점 11리바운드(FG 9-13, 3P 3-4 FT 4/4)[29]를 기록하며 통산 30,000득점을 돌파하게 되었다.

경기 초반부터 쾌조의 슛감을 보였는데 1쿼터가 시작되자마자 8득점을 넣었으며(2점+2연속 3득점) 스텝이 꼬인 상황에서 앤드원을 만들어내는 사기 노련함을 보였다. 30000 고지를 밟는 득점은 노비츠키 답게도 페이더 웨이 슛에서 나왔는데 어시스트는 데빈 해리스였다[30] 경기를 중계하던 해설자는 이 장면으로 노비츠키의 동상이 세워질거라는 말을 남기기도.그의 기록 달성을 축하하는 많은 이들이 자리를 빛내주었는데 사정상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던 유명인들은 영상편지로 마음을 전했다.[31]기록이 달성되자마자의 경기장은 환호속에 휩쌓였고 그 다음에 바로 던진 먼거리 3점까지 들어가자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32] 가장 기뻐했던것은 당연히도 노비츠키의 평생의 은사인 게쉬바인더[33]와 영혼의 동반자인 구단주 마크 큐반이었다.[34]

댈러스에서 2년을 더 뛰기로 계약하면서 자연스레 코비에 이어 한 프랜차이즈에서 20년이상을 뛴 선수가 되었다.

1718시즌, 시즌 극초반엔 몸상태가 좋지 않아 고생했지만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폼이 올라와 노익장을 보여주고있다 12월 3일엔 3점을 5번 연속으로 성공시키기도 했는데 이게 노비츠키의 커리어하이라고 한다.

1819시즌엔 출전승수 6위(900승), 통산 출전경기수 4위로 올라섰고 한팀에서 가장 많은 시즌을 뛴 선수로 랭크 되었다.

2019년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엔 피차 영원한 숙적이었던 웨이드와 시즌 마지막 경기를 치르며 서로의 유니폼을 교환했다. 2006년부터 정말 많은 일[35]들이 있었고 서로 응어리가 많이 있었지만 이날엔 그 모든것을 내려놓고 옛 은원관계는 잊은채 서로의 커리어를 진심으로 축하해줬던 감동적인 날이었다. 그후 둘은 올스타전에 참가하여 나란히 포토타임을 가지기도

2019년 2월 26일엔 두경기 연속 10득점 이상을 오랜만에 기록했다. 이날 대단한 기록을 한가지 남겼는데 역대 1500경기 출전 클럽에 가입한것. 3위인 존 스탁턴과는 불과 4경기 차이, 그 위 2위와 1위는 카림 압둘 자바와 로버트 페리쉬이다. 현재 누적득점 순위는 6위인 윌트 채임벌린과 불과 79점 차이. 아직 은퇴에 대한 확답은 내놓지 않았지만[36] 노년에 유종의 미를 착실히 거두는 중이다 결국 3위인 존 스탁턴을 넘어섰다. 무서운 노익장


2019년 3월 19일. 대괴수 윌트 체임벌린의 기록을 넘어서면서 통산득점 6위로 올라섰다(!) 어시스트는 기념비 적이게도 그의 후계자 루카 돈치치였다. 많은 스타들이 그를 축하해주었는데 늘 노비츠키가 휴스턴을 갈때 칭찬을 아끼지 않던 하든도 sns로 레전드에게 존경을 표한다며 박수를 보냈고 같은 텍사스 지역의 정 마찬가지로 30000득점 당시엔 아예 자체적으로 찍은 영상을 올린 서로 은근히 친한 르브론 제임스 또한 이번에도 잊지 않고 축하메시지를 띄웠다


2019년 3월 24일엔 모처럼 20득점 이상을 올리며 팀의 승리에 공헌했다[37] 원정 12연패의 사슬을 끊은것도 호재. 이날은 매우 특별했던게 노비츠키로선 다소 아린 추억이 있는곳이지만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팬들이 뜨거운 박수갈채로 그의 커리어를 축하해주었고 오랜만에 절친인 스티브 내시와 마이클 핀리가 경기장을 찾아와 단란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38]

3. 은퇴

41. 21. 1.[39]


2019년 4월 10일 댈러스 마지막 홈경기에서 노비츠키는 한팀에서 가장 오래 뛴 선수, 올타임 3점슛 개수 11위, 그리고 최고령 30득점이란 기록을 남기고 은퇴를 선언했다. 우연히도 이 30득점은 그가 평생에 걸쳐 경쟁해온 드웨인 웨이드와 같은 날 기록한 동일한 점수였고 두 선수 모두 올 시즌을 끝으로 우리와 작별하게 되었다. 이날 마지막 홈경기를 보러 와준 레전드 들이 경기장에 나와 자리를 빛내주었는데 그의 유년시절부터의 우상이자 참 오래된 인연인 찰스 바클리[40][41] 스카티 피펜, 늘 비교대상이자 넘고싶은 산이었던 래리 버드[42], 그가 NBA에 오기전 토대를 닦은 전설적인 독일선수 데들렘프 슈렘프, 짐승형 파워포워드계의 조상님이라 볼수있는 숀 켐프등이 참석했다. 링크 바클리와 버드야 뭐 유명하지만 이 선수들 모두 노비츠키의 롤모델 이었다고.



자신의 영웅들과 친지 가족, 그리고 동료들과 팬... 많은 이들이 참석한 가운데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보인 노비츠키는 댈러스에서 짐을 푼 이래 항상 자신의 편이 되어준 최고의 동반자 큐반과도 진한 포옹을 나누었다. 은퇴식 연설 전문 번역


노비츠키의 멘트와 은퇴식에 참석한 레전드들의 멘트를 번역한 자막이 있는 유튜브 영상.

파일:더크 노비츠키 마지막 더블-더블 기록.jpg
이렇게 홈경기에서 영광의 은퇴식을 치른 뒤, 커리어 내내 치열하게 싸워온 텍사스 라이벌[43] 샌안토니오 스퍼스와의 마지막 원정경기에서 마지막을 책임지며 21득점, 10리바운드, 더블-더블[44]을 기록하였으나 94-105로 패배하면서 노비츠키의 명예로운 21년의 NBA 커리어가 끝났다. 이 날 샌안토니오 구단은 경기전 노비츠키 헌정영상을 틀어주며 자신들의 오랜 숙적에 대한 예우를 보였고, 노비츠키도 그에 감동한 듯 헌정영상을 틀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경기중 노비츠키가 자유투를 시도할때 스퍼스 홈팬들이 MVP 챈트를 보내는 진풍경이 벌어졌고, 경기 종료직전 노비츠키가 특유의 무브로 커리어 마지막 슈팅을 성공시킬때 스퍼스 팬들의 환호성과 함께 적장인 그렉 포포비치 감독도 박수를 보내는 훈훈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노비츠키는 이날 NBA 데뷔한 이래 1522경기를 마치고 평균 20점대를 찍은 두번째 선수가 되었다.[45]


레전드들이 말하는 노비츠키

이렇게 독일의 한 청년이 이역만리 텍사스에서 보낸 21시즌의 영광의 커리어가 마감되었다. 구단주와 지역팬들 모두가 사랑하고 있는 노비츠키이기에 선수 은퇴 이후에도 계속 팀을 위해 활동할 듯 하다.

노비츠키의 NBA 통산 누적 기록
시즌 경기수 시간 필드골 3점슛 자유투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락 턴오버 트루슈팅 PER
정규 1522 33.8 .471 .380 .879 20.7 7.5 2.4 0.8 0.8 1.6 .568 22.4
플옵 145 40.7 .462 .365 .892 25.3 10.0 2.5 1.0 0.9 2.3 .577 2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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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비츠키가 군복무 전이라 군대에 가야 한다고 말하자 "너 키가 7피트가 넘는데 군대는 무슨 군대냐? 은폐엄폐도 안 된다(...)"라며 나이키에 전화해서 이 독일 친구가 원하는 거 다 해주고 자기 모교인 오번 대학교에 보내라고 통화했다고 한다. [2] 노비츠키를 상대한 바클리는 당시 인터뷰에서 "이 소년은 천재다, 만일 그가 NBA에 오길 원한다면 그는 나를 상대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후에 노비츠키의 커리어가 바클리에 대등 혹은 그 이상으로 평가되는 걸 봤을 땐 대단한 선견지명이다. 여담으로 어렸을 적부터 노비츠키의 우상이 바클리였고, 노비츠키의 NBA 파이널 우승을 점친 사람도 바클리였으니 참 인연이 깊다고 볼 수 있다. [3] 이 과정에서 보스턴 셀틱스의 헤드코치였던 릭 피티노는 내심 노비츠키를 점찍어두고 있었는데, 선수 알아보는 눈과 트레이드 감각이 있던 돈 넬슨이 먼저 가로채 버렸다. 하지만 후에 보스턴이 뽑은 선수도 레전드 반열에 오르게 되었으니 지금 보면 아쉬울 결정은 아니었다. 물론 애초에 댈러스는 노비츠키에게 6번 픽을 쓰기 아까워 픽다운을 해 9번 픽으로 뽑았으니 지금 같은 레전드로 성장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럽 농구 명문인 동유럽 국가들도 아니고 유럽에선 농구 변방에 가까운 독일 리그 출신 19세 소년이 MVP로 성장할 거라고 정확히 예측하는 사람이 있으면 돗자리를 깔아야 한다. 과대평가의 아이콘 다르코 밀리시치는 농구 강국인 세르비아 출신에다가 레전설급인 워크아웃을 펼쳤고, 무엇보다 당시는 어린 장신 유럽 유망주들에 대한 과대평가가 극에 달한 시기였다. 반면 노비츠키 때는 유럽 출신 스타들이 많지 않았고 무엇보다 미국 교육을 받지 않고 독일 리그에서 직행한 선수는 없었다. [4] 후에 신인 시절 Jump shoot이 없다며 ason kidd라고 조롱받던 제이슨 키드가 자신의 첫 팀인 친정 댈러스에 돌아오면서 함께 우승을 일군 걸 생각하면 참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5] 아쉽게도 기량발전상은 수상하지 못했는데, 암묵적으로 통해지는 기량발전상의 저주라는 게 있어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하는 팬들도 있다. [6] 노비츠키가 얘기하길 완벽한 환경을 만들어주었기에 나가서 이기기만 하면 됐다고 한다. [7] 노비츠키의 대표적인 절친으로, 노비츠키는 내시와의 관계에 대해 슈퍼마켓에서 만났어도 친구가 됐을 거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로 매우 절친한 사이이다. 해외 생활에 있어 노비츠키가 많이 힘겨워할 때 내시가 많은 부분에서 도움울 주었다고 한다. [8] 파일:ujoXBxT.jpg 이 셋은 2015년 NBA 시즌이 끝난 뒤 야구 행사로 오랜만에 재회했는데, 여전히 절친한 모습을 보여 골수 댈러스 팬들에게 훈훈함을 전했다. [9] 당시 돈 넬슨은 패싱력도 좋은 노비츠키의 능력을 생각해 포인트 포워드로 활용하기도 했다. [10] 근데 이때 테리의 실수가 보통 실수가 아니긴 했다. 플레이오프 마지막 경기에서 3점차로 앞서고 있었는데, 경기 종료 10초 전 3점 라인 정면 지점에서 NBA 최고의 3점 슈터인 내시에게 밀착하지 않고 공간을 줬다가 사실상 시리즈를 결정지은 동점 3점 슛을 얻어맞았다. [11] 레전드 감독 필 잭슨은 "큐반이 너무 시끄럽게 굴어서 사무국으로부터 불이익을 받은 것 같다."라며 판정을 우회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12] 그렇다고 히트나 웨이드를 비난할 순 없는게, 판정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되는 분위기에서 이를 활용하지 않는 선수는 깔쌈하게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죄가 있다면, 킹스와 레이커스의 대결에서 추악한 판정으로 그렇게 욕을 먹고도 정신을 차리지 않은 심판들과 사무국에게 있는 셈. [13] 2023년까지 유럽인 NBA 정규시즌 MVP는 노비츠키와 야니스 안테토쿤포(2회) 그리고 니콜라 요키치(3회) 단 셋 뿐이다. [14] 상식적으로 nba와 같은 거대한 규모의 인기 리그가 그 시즌 최고의 스타인 mvp에게 트로피를 집으로 배송한다는게 말이나 되는가... 구글에 Dirk nowitzki mvp david stern을 치면 관련 사진을 확인할수 있다. [15] 당시 필 잭슨 감독이 이끌었던 레이커스는 2년 연속으로 NBA 파이널 우승을 거둔 뒤 잭슨의 커리어 네 번째 쓰리핏이란 대업에 도전하는 팀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충격적인 결과였다. 또한 4:0이라고 해서 순탄했던 건 아니었다. 1차전부터 16점 차라는 점수 차를 뒤엎고 어렵게 승리를 거두었으니... 그러나 2, 3, 4차전은 레이커스의 수비가 붕괴되어 쉽게 이겼다. 특히 4차전엔 3점 퍼레이드로 전반 종료 시 24점 차, 총 36점 차로 벌리며 쉽게 이겼다. 그리고 4차전은 레이커스 팀 전체가 멘탈이 나가서 오돔과 바이넘이 비매너 파울로 퇴장당하는 등 능욕의 끝을 보여주었다. [16] 참고로 이날 경기는 댈러스에게 있어 정말 뭘 해도 되는 날이었다. 오클라호마시티가 케빈 듀란트의 득점력과 세폴로샤-이바카-퍼킨스-콜리슨이라는 수비 라인업을 갖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주축 선수인 키드는 노장임에도 11어시스트를 차곡차곡 쌓았고, 제이슨 테리는 32분을 뛰며 24득점 3점 슛 4개, J.J. 바레아는 16분을 뛰며 21득점 3점 슛 2개를 기록했다. [17] 손가락이라서 실감이 잘 안 나겠지만 꽤 심각한 부상이었다. 힘줄이 아예 끊어진 상황이었었다고. 당시 기사로 이 사실을 알게 된 댈러스 팬들의 분위기는 완전히 절망 그 자체였다. [18] 설상가상으로 4쿼터 남은 시간 7분 14초에는 웨이드가 3점 슛을 성공시키며 15점을 벌렸던 상황에 댈러스가 작전 타임을 선언했는데, 이때 르브론과 웨이드는 마치 이겼다는 듯이 서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 정도로 경기의 기세는 마이애미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19] 당시 4쿼터에만 평균 8.2득점을 기록했었다. 노비츠키가 얼마나 고비와 중요한 순간에 강한지 알 수 있는 대목. [20] 실제로 현지 기자들은 이때 노비츠키의 독감 투혼을 조던의 플루 게임에 비교하기도 했었다. 단 조던이 플루 게임 당시 걸린 질병은 사실 독감이 아니라 원정 경기 전날 밤에 먹은 피자 때문에 생긴 식중독이었다. [21] 노비츠키의 은사인 게쉬바인더가 밝히기를 당시 세간에 알려진 증상보다 훨씬 심각했다고 한다. 사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컨디션이 최악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열이 39도까지 치솟았다고 하니 뻔한 거지만... [22] 참고로 시리즈 6경기 동안 노비츠키가 4쿼터에만 넣은 점수가 총 62점으로, 이는 상대팀의 웨이드와 르브론을 합친 수치와 같았다. [23] 2021년에 그때 당시 같은 팀 동료였던 J.J. 바레아가 J.J. 레딕의 팟캐스트에 출현해서 밝힌 바로는 웨이드와 르브론이 노비츠키의 기침을 따라하며 조롱한 것을 보고는 노비츠키가 그 둘을 엄청 싫어했었다고 한다. 심지어 보시와 마이애미 팀 자체에도 악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원기사 [24] 단순히 다득점 경기여서가 아니라 5차전은 NBA 팬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될 명승부로 기억된다. 내용은 팽팽하면서도 시원시원했고 질적으로도 매우 양질이었기 때문이다. [25] 45/46. 그 놓친 하나도 독감으로 고생한 4차전에서 놓친 것이었다. [26] 하지만 맥컬럼의 플로터로 경기는 패배했다. 쐐기샷이나 다름없다고 모두가 생각했으나 기어코 맥컬럼이 단 몇초안에 역전을 이끌어 냈던것(참고로 이날은 전 맞대결에서 패배한 포틀랜드의 복수전이었다). 끝까지 매우 아슬아슬했었던 경기. [27] 염용근 기자는 오늘의 NBA에서 "우리가 21세기 들어 수백 번도 더 목격했던 장면"이라는 말을 남겼다. [28] 공교롭게도 노비츠키가 통산 20000득점을 달성했던 날의 상대팀도 레이커스였다. [29] 1쿼터에만 18득점을 기록했다. [30] 경기 전에 30000득점의 어시스트는 자신의 손에서 나왔으면 한다고 밝혔는데 그전의 기록 또한 자신의 어시스트에서 나와 이번에도 꼭 보탬이 되고 싶었다고. [31] 가장 친한 친구로 알려진 스티브 내시, 팀의 우승공신 제이슨 키드, 영원한 파트너 제이슨 테리,핀리 등등. 그 외 농구와 관련없는 세계 각지의 인사들에게도 축하를 받았다. SNS로는 평소 절친한 사이였던 코비 브라이언트와 함께 스카티 피펜,매직 존슨등 많은 NBA 전설들의 축하가 잇따랐다. 아이제아 토마스는 영상통화 인터뷰로 축하를 직접 전했다. [32] 이때서야 타임아웃이 불려졌고 3분동안의 기념식이 거행되어 노비츠키는 동료들과 팬들의 축하를 만끽할수 있었다. [33] 우승 당시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셨었는데 이날 또한 온화한 미소와 함께 제자와 눈시울을 붉혔다. [34] 이때 큐반이 얼마나 흥분했는지 너무 미친듯이 날뛰다보니까 그날 큐반의 바로 옆자리에 있던 노비츠키의 부인인 제시카 올슨은 경기가 끝나고서야 카메라에 얼굴을 제대로 비출수 있었다... [35] 2006년 파이널에선 누가 봐도 극심했던 편파판정이 있어 감정의 골이 격해졌고 2011년엔 웨이드가 노비츠키의 독감투혼을 조롱하는 시늉을 하기도 했었다. 이 모든게 둘간의 일이었다. [36] 큐반 또한 은퇴와 관련된 발언들을 모두 철회 했다. 노비츠키가 더 남아주길 바라는듯 [37] 참고로 현재기준 20득점 이상기록한 경기 횟수 순위에서 859회로 역대 6위라고 한다. 1위부터 5위까지 칼 말론, 카림 압둘 자바, 르브론 제임스, 코비 브라이언트, 마이클 조던. [38] 참고로 스티브 내시는 현재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코치진으로 일을 하고있는데 원래도 핀리를 포함한 이 셋은 다른 이벤트 경기나 사적인 연락을 통해 자주자주 만나는 막역한 사이인듯 하다. 예전에 있던 한 야구 자선경기에서도 함께 자리를 빛났던걸 생각하면 아직도 가족처럼 지내는것 같다. [39] 여기서의 41은 노비츠키의 등번호를 의미하며 21은 그의 시즌 수(최장수 선수다) 그리고 1은 그가 원클럽맨이라는 뜻이다. [40] 이날 매우 감회가 깊었는지 다른 레전드들에 비해 포옹을 더 길게 나누었었다. 찰스 바클리 또한 노비츠키를 단순히 한 선수로 보는것이 아니라 후배이자 동생으로 생각하며 때론 쓴소리, 늘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진정한 선배이자 형님이었던 사람이다. [41] 바클리는 아직 학생이던 노비츠키를 만난 이후 어떻게든 자신의 모교로 데려오려고 노력했을 정도로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던 동시에, 2011년에 TNT 해설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댈러스 매버릭스의 우승을 예견한 사람이기도하다. 위풍당당한 예상이 대부분 빗나가면서 시청자들에게 유쾌한 웃음을 주고 있는 바클리가 우승팀을 정확하게 예상했던 몇 안되는 파이널이기도 했다. [42] 여담으로 버드는 노비츠키와 자신이 비슷한 점이 많다는 점을 인정하며, 그와 비교되는건 자신에게도 기분좋은 일이라고 말했던 바가 있다. 신랄하고 냉정하면서도 인정할건 쿨하게 인정하는 버드로써도 노비는 그만큼 인상깊은 선수였다는 소리 [43] 특히나 플레이오프에선 더 징했다(...) 마이애미 빅3와의 파이널에선 4-1로 손쉽게 승리했던 샌안토니오가 1라운드에서 만난 댈러스한테 고전하며 4-3으로 겨우 올라가질 않나. 양팀 다 전성기 시절 컨퍼런스 파이널에선 더더욱 치열했다 [44] 커리어의 411번째 더블더블이라고 한다 [45] 1위는 카림 압둘자바로 1560경기를 뛰었는데 평균 24.6득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