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26 10:23:11

신집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한국사
,
,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정사(正史)
국가 공인 역사서
삼국사기 고려사
실록(實錄)
제왕의 일대기를 다룬 편년체 기록물
고려실록 조선왕조실록
절요(節要)
방대한 정사 기록을 요약한 기록물
고려사절요 삼국사절요
통감(通鑑)
통치에 도움이 되는 기록물
동국통감
강목(綱目)
강목체를 적용한 기록물
동사강목 동국통감제강 본조편년강목
여사제강 동사회강 대동사강
휘찬려사 국조정토록
사략(史略) 본조사략 동국사략
일기(日記)
국가 공문서
승정원일기 일성록 동궁일기
각사등록 비변사등록
역사시(歷史詩) 응제시주 제왕운기
기타 삼국유사 개황력 대사편년
대사기 속무정보감 국조통기
발해고 해동고승전 동국병감
단군세가 기자지 동사
해동명장전 단군고기 신라고기
백제고기 해동고기 본국고기
삼한고기 고려고기 연려실기술
동사보유 동국역대총목 동사세가
해동역사 열조통기 동사찬요
기타 실전(失傳) <colbgcolor=#fff,#191919>고구려 유기 신집
신라 국사 제왕연대력 화랑세기
백제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 서기
고려 구삼국사 가락국기 편년통록
왕대종족기 성원록 금경록
위서(僞書) 환단고기 규원사화 단기고사
부도지 화랑세기 박창화 필사본 격암유록
†: 실전(失傳)되어 현재는 존재하지 않음.
번외: 현대 역사서
한국사
}}}}}}}}}


{{{#!wiki style="margin:-10px" <tablebordercolor=#000> 파일:고구려 군기.svg 영양왕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000000,#2d2f34><colcolor=#fbe673,#f9d537> 생애 및 활동 <colbgcolor=#fff,#1f2023> 생애 | 고구려-수 전쟁
관련 문서 신집 | 강서대묘
연호 건흥
}}}}}}}}} ||

신집(新集)
1. 소개2. 삼국사기와의 관계

1. 소개

재위 11년(기원후 600년), 임금이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옛 역사를 요약하여 다섯 권의 『신집(新集)』을 만들도록 명령하였다. 건국 초기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했을 때 어떤 사람이 사적을 기록한 1백 권의 책을 쓰고 이것을 『 유기(留記)』라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이를 정리하고 수정하였다.
十一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詔 太學博士李文眞 約古史爲新集五卷 國初始用文字時 有人記事一百卷 名曰留記 至是刪修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11년
고구려 역사서. 4세기 후반 17대 소수림왕 때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 유기> 100권을 집약하여, 600년(26대 영양왕 11년) 영양왕의 명으로 태학 박사 이문진5권으로 편찬하였다.[1] 유기는 종래 구전되어 오던 신화, 전설 등이 섞인 고구려 건국 초반기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고구려가 수백년 이어짐에 따라 역사 인식이 높아지게 되어 건국 이후의 역사를 다시 한번 정리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기에 신집을 편찬한 듯하다.

2. 삼국사기와의 관계

학계에서는 삼국사기 13~17권에 해당하는 고구려본기 다섯 권[2] 삼한고기, 구삼국사, 고려고기, 본국고기, 해동고기 등에 인용된 신집의 내용들을 재인용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실제로 고구려본기를 보면 1대 동명성왕부터 15대 미천왕 사이의 기록은 등장하는 인명이나 인물들의 발언이 제법 세세하게 언급되며, 고구려 내부 사정도 잘 나오는 편이다. 파트 기록들의 전개 방식도 단순한 사실의 나열 수준이 아니라 각자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들이 많다. 반면 동시기 백제본기나 신라본기의 경우 분량이 고구려본기의 절반에 불과하다.

반면 그 후대인 16대 고국원왕대부턴 기록이 급감[3]하기 시작한다. 있는 기록도 어떤 일이 언제 있었다는 식의 간략한 사실에 대한 기록이 대부분이며, 그나마 상세한 기록들은 북제서, 수서, 구당서, 후당서, 자치통감을 비롯한 중국 기록에서 발췌해 수록해놓은 기록이거나 그나마 남은 상세한 자체 기록도 당대에 설화로서 남은 기록이나 종교적 기록이다. 당대 유물인 광개토대왕릉비에 적혀있는 신라 원병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삼국사기 편찬 당시에 광개토대왕릉비의 존재가 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19대 광개토대왕대까지는 다른 사료라도 좀 있었는지 (광개토대왕릉비에 적힌 독자적인 내용 정도를 빼면) 기록이 아예 없는건 아니라 삼국사기 자체기록도 상대적으로 풍부한 편이지만, 20대 장수왕대부터는 아마도 중국 측에서 기록한 단순 조공 기록이 다수를 차지할 정도로 고구려 자체 내정 기록이 줄어든다. 즉, 전자와 후자의 질 차이는 삼국사기를 편찬하던 고려시대 당시 참고한 옛 기록 원전이 다르다는 추정을 할 수 있는 배경이 된다.

대표적으로 영양왕 본기의 고구려-수 전쟁 기록이나 보장왕 본기의 고구려-당 전쟁 기록을 보면 거의 대부분을 중국사서 내용에서 옮겨온 수준이 되어 버린다. 연개소문은 아예 중국 사서의 피휘를 미처 감안하지 못하고[4] 천개소문으로 강제개명되는 수준(...)이며[5] 전투와 관련된 기록들도 대부분 중국 측 규모나 피해는 상세하나 고구려는 정확한 규모가 명시되지 않는다. 이는 영양왕 시절 신집을 편찬한 이후 고구려가 더 역사적인 연구에 몰두할 새도 없이, 통일된 중화제국과의 전쟁에 나라가 휘청거리다 결국 멸망했기 때문에 뭔가를 더 기록하거나 설령 기록했더라도 남아날 틈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학계에서도 신집의 기록이 고구려본기에 반영되었다고 보는 편인데, 이는 신집의 원사료인 유기가 소수림왕대에 편찬되었다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신집이 5권이라는 것과 고구려본기 초반 5권이 동명왕-미천왕 시기의 내용을 실었다는 사실로도 이는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다.


[1] 100권이 5권이 됐다는 것에 의문을 품기 마련인데, 유기는 목간, 즉 간독이고 신집은 종이책이 아니겠느냐라는 설이 있다. 게다가 '유기' 라는 것이 역사책이 아니라 한자 그대로 그냥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남겨진 기록'의 모음을 의미한다면, 이것저것 가지치기를 하고 중복되거나 모순되는 내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내용은 크게 줄어들었을 개연성도 있다. [2] 참고로 고구려본기는 총 10권이며, 이중 마지막 왕인 28대 보장왕 본기가 2권 분량이다. [3] 정확히는 미천왕 원년 10월부터 기록이 급감한다. [4] 당나라 시대 사서들은 자기들 황제 이연의 이름 연자를 피휘하다보니 천개소문으로 적었는데 당나라도 멸망하고 이 피휘를 지킬 필요가 없어진 고려시대의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옛날 당나라 사서를 참고하다가 이게 피휘로 바꿔적은 것인 줄 모르고 삼국사기에도 그냥 천개소문이라고 쓴 것이다. [5] 심지어 '연개소문'이라는 실제 이름이 밝혀진 것은 조선 후기에나 이르러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