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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사성( 大 司 成)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존재했던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3품 당상관직[1]으로 정원은 1명이다. 성균관은 유학 교육을 책임지던 기관이었던 만큼 대사성은 문과 급제자 위주로만 임명됐다. 대사성은 유생들을 지도하고, 성균관 내 행정 업무를 관리했으며, 관시(館試) 운영에 참여하였다. 또한 문묘에서 열리는 석전제를 준비하고 아헌관(亞獻官)[2]으로 참여하였다.2. 설치 목적 및 변천
조선이 건국된 뒤 성균관 직제가 『 경국대전』으로 법제화되기 전까지 그 명칭과 인원의 변화가 잦았던 데 비교해서 1466년( 세조 12) 원래 정3품이었던 관품이 정3품 당상관으로 승격된 이후 대사성은 큰 변화와 조정은 없었다.대사성은 성균관의 유학 교육을 담당했기 때문에 경학에 능통하고, 어질고 덕이 있으며, 나이와 경험이 많은 문과 급제자 출신인 관료만 임용되었다.[3] 대사성을 임명할 때에는 자격과 자질을 가진 관리를 뽑기 위해 ‘사유록(師儒錄)’이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여기에 등재된 인물 중 삼망(三望)[4]혹은 단망(單望)[5]으로 임명하거나 임금의 특지(特旨)를 통해 발탁하기도 하였다.
1658년( 효종 9)에 산림직으로 좨주가 정3품 당상관으로 설치되면서 대사성은 좨주와 함께 성균관 최고의 관직 지위를 공유하게 되었다. 좨주에 명망 있는 산림이 임용되었던 만큼 대사성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축소되었다.
대사성을 임명할 때 당시 국왕의 성향과 정치 세력의 동향에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이는 성균관이 예비 관료들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정치 세력 기반 확장에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대사성은 당상관이기 때문에 근무 일수를 채워서 승진하는 순자법(循資法)의 적용을 받지 않았다. 유능한 유생을 교육한다는 관직의 중요성 때문에 대사성의 오랫동안 재임해야 했으나(...)이는 그리 오래 유지되지 않았고,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심화되어서 한 달에만 대사성이 3명이나 임명되는 상황도 일어났다.
3. 임무와 직능
대사성은 성균관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그 임무는 유생들을 지도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학업과 관련하여서는 유생들을 가르치고 평가하는 업무를 수행하였고, 학업 이외에도 유생들의 생활과 관련하여 발생하는 여러 상황을 해결하였다.대사성은 성균관 내 행정 업무를 관리하는 일을 담당하여 유생들이 받는 원점(圓點) 명단(오늘날로 치면 출석 점수)을 검토하고, 관시(館試) 운영에 참여하여 해마다 한양과 지방에서 올라오는 유생들의 재능을 시험한 뒤 그들의 점수를 계산하여 식년시 문과 복시에 응시하도록 했다.
또한 사학(四學) 유생들에게 과제나 시험을 치게 하여 식년시 생원 · 진사시에 응시하도록 하였고, 사학합제[6]를 통해 인재를 뽑아 역시 소과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대사성은 성균관 관원들의 포폄(근무 성적을 평가하는 제도)을 시행하여 이를 담당 관서인 예조에 보고하는 업무도 담당하였다.
4. 역임한 인물
4.1. 태조 시기
- 유창 - 1392년 8월 20일
4.2. 태종 시기
4.3. 문종 시기
4.4. 세조 시기
- 유백순 - 1420년 11월 7일
4.5. 성종 시기
4.6. 중종 시기
4.7. 명종 시기
4.8. 선조 시기
4.9. 광해군 시기
- 정엽 - 1609년 8월 20일
4.10. 인조 시기
4.11. 효종 시기
- 이후원 - 1650년 7월 3일
4.12. 현종 시기
4.13. 숙종 시기
4.14. 경종 시기
- 오명항 - 1723년 4월 2일
4.15. 영조 시기
4.16. 정조 시기
4.17. 순조 시기
4.18. 헌종 시기
4.19. 철종 시기
- 이유원 - 1851년 12월 18일
- 김병국 - 1853년 1월 1일
- 김병학 - 1854년 6월 25일, 1854년 9월 22일
- 김병운 - 1852년 6월 27일
- 박규수 - 1861년 9월 18일
- 완림군 - 1863년 3월 26일
4.20. 고종 시기
- 조성하 - 1864년 1월 15일
- 흥친왕 - 1865년 4월 2일
- 민승호 - 1866년 11월 5일
- 신철구 - 1870년 4월 7일
- 조영하 - 1870년 4월 23일
- 신좌모 - 1870년 6월 15일
- 김성근 - 1872년 6월 21일
- 민겸호 -1872년 9월 16일
- 김석진 -1876년 2월 11일
- 완영군 - 1876년 7월 16일
- 윤용구 - 1877년 12월 11일
- 민영익 - 1878년 8월 11일
- 김영철 - 1880년 1월 30일
- 청안군 -1880년 4월 30일
- 김기수 - 1881년 12월 11일
- 박정양 - 1882년 2월 9일
- 민영환 - 1882년 2월 20일
- 민종묵 - 1882년 2월 25일
- 김병익 -1883년 5월 24일
- 민영소 - 1884년 7월 19일
- 민병석 - 1884년 9월 16일
- 신헌구 - 1884년 12월 25일
- 남정철 - 1885년 4월 19일
- 이도재 - 1885년 10월 9일
- 홍순형 - 1887년 4월 26일
- 김춘희 - 1888년 1월 14일
- 민종식 - 1888년 1월 27일
- 조민희 - 1890년 1월 27일
- 이완용 - 1891년 3월 29일
- 임선준 - 1892년 1월 1일
- 송병학 - 1893년 1월 29일
- 김사철 - 1893년 5월 8일
[1]
고려 시절에는 당상관 제도가 없었기에 조선과는 다르게 고려의 대사성은 정3품이었다.
[2]
종묘 제례 때에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일을 맡던 제관
[3]
대사성은 문관으로만 임명해야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4]
이조·
병조에서 각 품의 관인을 본인의 성명, 나이, 출신, 관력, 4대조(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를 기록한 관리의 신원대장을 참고하여 제수를 요하는 관직당 3명을 국왕에게 추천하면, 국왕이 이 중 1명을 제수자로 선정하는 제도다.
[5]
적임자로 생각되는 1명을 국왕에게 추천하는 제도다.
[6]
쉽게 이야기하자면 학교에서 치는 1,2학기
중간고사,
기말고사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A]
임명된 시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처음으로 등장하는 날짜를 기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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