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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0:22:30

김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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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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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한국갤럽이 창립 30주년을 맞이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알아보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조사 시리즈를 기획해 2004년부터 5년 주기로 발표하고 있다.
2004년
※ 2004년 한국갤럽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1위 공동 2위 4위 5위
이미자 나훈아 조용필 현철
6위 7위 8위 9위 10위
태진아 신승훈 송대관 김건모 설운도
2009년
※ 2009년 한국갤럽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장윤정 BIGBANG 태진아 이미자 소녀시대
{{{#!wiki style="margin: -16px -11px" 6위 7위 공동 8위 공동 10위
나훈아 조용필 현철 손담비 이승철 송대관 }}}
2014년
※ 2014년 한국갤럽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조용필 이선희 장윤정 아이유 태진아
6위 공동 7위 9위 10위
EXO 이승철 이미자 나훈아 소녀시대
2019년
※ 2019년 한국갤럽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방탄소년단 장윤정 나훈아 아이유 조용필
6위 공동 7위 9위 공동 10위
이선희 태진아 이미자 이승철 김연자
공동 10위 15위
이문세 홍진영 TWICE 박효신 남진
16위 17위 공동 18위
임창정 송가인 김건모 설운도 진성
21위 공동 22위
성시경 거미 BLACKPINK 잔나비
2024년
※ 2024년 한국갤럽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임영웅 아이유 방탄소년단 나훈아 NewJeans
6위 7위 8위 9위 10위
장윤정 진성 영탁 송가인 BLACKPINK
11위 12위 13위 공동 14위
이찬원 성시경 김연자 김호중 조용필
16위 17위 공동 18위 공동 20위
이효리 전유진 IVE 이문세
공동 20위
이미자 이승철 장민호
같이 보기: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좋아하는 스포츠선수, 좋아하는 소설가, 좋아하는 탤런트, 좋아하는 영화배우, 좋아하는 가수, 좋아하는 노래, 좋아하는 예능인, 좋아하는 유튜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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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자 박초롱 윤보미 김남주 오하영
진욱 홍지윤 김소연 황민우 황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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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00f><colcolor=#fff> 김연자
金蓮子|Kim Yonja[1] | キム・ヨンジャ
파일:20171128031309_1157346_2456_3680.jpg
출생 1959년 1월 25일 ([age(1959-01-25)]세)
전라남도 광주시 사직동
(現 광주광역시 남구 서동 145-21)[2][3]
거주지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54cm, 47kg, O형
학력 광주수창국민학교 (전학)
광주대성국민학교 (졸업)[4]
광주수피아여자중학교 (중퇴 / 명예졸업)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 (명예졸업)[5]
종교 개신교
데뷔 1974년 〈말을 해줘요〉
(데뷔일로부터 [age(1974-01-01)]주년)
가족 어머니 이옥순, 여동생 김수진
소속사 YJKcompany (일본)
초이크리에이티브랩 (국내)
온웨이즈 (유튜브 채널)
SNS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MBTI ISFJ

1. 개요2. 데뷔 전3. 활동4. NHK 홍백가합전 출전 경력5. 전 남편6. 여담7. 수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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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가수.

트로트의 전설로 불리고 있으며 조용필과 함께 원조 한류 스타라고 할 수 있는 거물급 가수이다. 일본에서는 1980~1990년대 엔카의 여왕으로 불리며 큰 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일본 내에서도 인지도가 제법 높은 한국인이다. 2010년대 이후는 국내 활동에 주력하고 있으며, 2016년 이후에는 아모르 파티가 국내에서 역주행하며 대히트를 쳐 젊은 세대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 데뷔 전

1959년 1월 25일 전라남도 광주시 사직동[6](現 광주광역시 남구 서동 145-21)에서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7] 큰집과 같이 살았는데, 할머니가 한 집에서 두 명이 태어나면 안 된다며 둘째인 김연자의 엄마에게 밖에서 낳으라고 해서 엄마는 마당에서 김연자를 출산했다. tv조선 마이웨이 83회

아버지가 이발소를 했는데 김연자가 5~6세 때부터 매일 손님 앞에서 노래를 시켰다고 한다. 단골 손님이 오면 아버지는 "연자야 노래 불러라"고 외쳤다고. 아버지는 이발소 영업이 끝난 후에 가게 안에서 1시간 동안 전축으로 이미자 노래를 틀고 김연자에게 연습하라고 한 뒤 나갔다고 한다.

국민학교 3학년 쯤 큰엄마가 내일 광주공원에서 열리는 노래자랑에 나가라며 참가금 2~3백 원을 줬는데, 당시 김연자의 용돈은 10원이었다. '어린 나이에 유행가 부르면 안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동요를 불렀는데, 떨어져서 참가상으로 소주 1병을 받았다고 한다. 참가금으로 큰 돈을 줬는데 상을 못 탔다고 큰엄마에게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

국민학교 4학년 때 가요교실 학원[8] 선생에게 돈이 없다고 말하니 무료로 다니게 해줘서 중학교 2학년 때까지 5년을 다녔다. 또래 친구들은 동요를 좋아했지만 김연자는 트로트를 불렀다고 한다.

국민학교 5학년 때 광주의 대표적인 노래 대회였던 <벚꽃 노래 자랑>에 친구 정우순과 함께 출전했다. 펄 시스터즈 등이 똑같은 옷을 입고 노래하니까 우리도 똑같은 옷을 입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엄마가 시계를 전당포에 맡긴 돈으로 옷을 맞춰줬고, 인기상을 탔다. <벚꽃 노래 자랑>은 생방송으로 진행됐던 프로그램이라 많은 광주시민들이 시청을 했고, 그 후 수피아여자중학교에 입학하니 노래자랑에 나왔던 김연자를 알아봤던 학우들이 있었다고 한다.

파일:김연자ㄴ 002.png
파일:19 김연자 가족.jpg

중학교 시절에는 오락 부장이었다. 선생들이 자주 교단에 불러내 노래를 시켰다고 한다. 1973년 14세였던 중학교 3학년[9] 2학기 때는 열흘 정도 공연장에 따라다니느라 학교에 나가지 못했다. 쇼를 다 보고 학교에 왔더니 수업 미달로 정학을 당했고, 아버지가 차라리 학교를 중퇴하고 서울 가서 가수를 하는게 어떻냐며 열차표를 직접 사줬고 한다. 엄한 아버지를 무서워했기에 거역을 하지 못하고 그렇게 김연자는 홀로 상경했다.

서울에 상경한 그녀는 미아리[10]의 작은아버지 집의 작은 방에서 작은아버지 내외, 사촌동생 4명과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허나 광주 바닥에서는 알아주는 가수 유망주였으나, 서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작은 아버지와 오디션을 보러 다녔는데 다 떨어졌다고 한다. 작은아버지가 '쇼에 가서 조카가 노래하니 써주지 않겠냐'고 물어보고 다녔지만 모두 탈락. 나훈아 콘서트에도 오디션을 보러 갔다가 문전박대 당했다고 한다.

후에 어머니와 동생들이 따라서 상경하여 단칸방 사글세 살이를 시작했는데, 옆집에 부유한 수양엄마[11] 집에서 매일 전축을 틀고 노래 연습을 하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계속 낙방하여 답답한 마음에 상경한 어머니를 따라 관악산 어느 절로 올라갔고, 그 절에 있던 스님이 '21세에 꽃가마를 탈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는 김연자가 출세하기 시작한 나이와 비슷하다.

동향 출신의 선배 가수 이영숙의 소개로 청계천에 있던 <오아시스 레코드[12]> 사장에게 오디션을 봤고, 이미자의 < 동백 아가씨>를 부른 것으로 기억한다는 김연자는 그 자리에서 드디어 합격한다. 하지만 말은 합격인데 가난한 집안에 수입이 없는 김연자의 처지를 안 사장은 데뷔가 아니라 회사 3층 공장에서 월급 2만 원에 카세트 테이프 만드는 일을 시킨다. 일하다가 1시간은 2층 연습실에서 연습하고 작곡가 김학송에게 노래를 배우며 지냈다.

어느 날, 오아시스레코드에서 한 평론가가 어느 카바레에 신인가수가 필요하다며 오디션을 권했다. 낮엔 일하고, 밤엔 나이를 18세로 속이고 비어홀, 카바레 등 3곳의 밤무대에서 월 6~7만 원을 받으며 노래생활을 시작했다. 손님이 많은 시간엔 유명 가수가 노래하고, 무명인 김연자는 한가할 때 노래를 했다. 당시엔 이미자와 목소리가 비슷해 '제2의 이미자'라고 내세웠다.

아버지가 경제적 지원은 없었고, 딸이 가수가 됐다며 학교를 못 다니게 했다고 한다. 남들은 공부하고 친구들하고 놀 때 자신은 서울에서 노래를 해야해서 아버지를 원망하고 미워했었다고 한다. 너무 빨리 사회인이 되어버려 학생의 청춘이 없었다고. 결국 김연자는 경제적 가장 역할을 하여 두 동생을 대학에 다닐 수 있게 한다. 물론 나중엔 가수가 되게 해준 아버지께 고마워한다고 한다.

3. 활동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연자/활동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NHK 홍백가합전 출전 경력

파일:NHK 홍백가합전 로고.png
연도 출장 횟수 곡명 출연 순서 상대
1989년 / 제40회 아침의 나라에서 07 / 20 알란 탐
1994년 / 제45회 2 川の流れのように
강물의 흐름처럼
23 / 25 타니무라 신지
2001년 / 제52회 3 림진강 22 / 27

5. 전 남편

6. 여담

7. 수상 기록


[1] 공식 사이트 등에서 Yonja라 표기하고 있다. [2] # [3] 도로명 주소로는 광주광역시 남구 서오층석탑2길 4-2 네이버지도 [4] 2018년 KBS광주 연말 콘서트 때 언급했다. # [5] 김연자는 중3때 중퇴를 하고 상경하여 가수 활동을 하느라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추후 수피아 측으로부터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 [6] 1959년 당시 광주에는 구제가 시행되지 않았던 때였다, 1973년에 광주에 구제가 시행되면서 동구와 서구가 각각 신설되었으며 1986년에 직할시로 승격되고 1995년에 광역시 승격과 동시에 남구가 서구에서 분구되었다. [7] 허나 김연자는 2020년 06월 21일, 1박 2일 방송 분에서 방문을 추천하는 지역으로 "제 고향 전남 영광"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영광에서 살았는지 모르지만 "전남"을 고향이라 말한 것일 수 있다. [8] 김연자의 소속사 대표이자 연인인 홍상기는 어릴 때 광주에서 김연자와 같은 음악 학원을 다니며 노래 연습했는데, 여기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엔 김연자는 홍상기를 몰랐다고 한다. 무료로 배운 김연자와 달리 홍상기는 논밭을 팔아 배워서 김연자를 알고 있었다. [9] 중학교 2학년 때 상경했다는 인터뷰도 있지만 여러 가지 정황상 중학교 3학년 때가 맞는 듯 하다. 또다른 인터뷰 기사에선 1974년 중학교 3학년 때 TBC '가요신인스타'를 우승한 후 가수가 되기 위해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광주에서 서울로 갔다고 하는데 #, 여러 자료를 취합해 보면 먼저 서울로 가서 생활하다가 '가요신인스타'에 출전한 게 맞는 듯 하다. [10] 그녀의 애창곡이 '단장의 미아리 고개'다. [11] 김연자는 2019년 'TV는 사랑을 싣고'를 통해 수양엄마와 재회했다. [12] 1952년 창업한 국내 최장수 음반사. 나훈아, 송대관이 속했었다. [13] 패티 김의 노래다. [14] 원래 수준급 가수들은 세밀한 마이크 컨트롤로 강약을 조절하는 경우가 많다. 정엽도 그런 과정에서 속칭 맷돌 창법으로 불리는 기교가 만들어진 것이다. 김연자는 이선희와도 비슷한 케이스로 보면 되는데, 옛날에는 스피커의 질이 조악해서 너무 큰 음량의 소리가 들어가면 클리핑이라 해서 사운드가 찢어지거나 갈라지는 것을 넘어서 스피커가 아예 고장이 나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선희 역시 옛날에 군부대에서 공연하던중 낡은 앰프가 이선희의 무지막지한 성량에서 나오는 큰 입력 신호를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 버린적이 있었다. [15] 계은숙은 이런 면에서 김연자보다 훨씬 더 쉽게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녀의 관능적인 분위기와 절제된 감정 표현, 독특하고 유일무이한 음색에 일본인은 유례없이 열광했다. [16] 김연자가 유튜브 채널 허스토리 올라온 동영상에서 한 말이다. 두번째로 일본에 왔을 때 자신의 창법이 너무 공격적이어서 사람들이 다가오기 꺼렸다고 했다. 당시의 김연자는 한국인으로써 일본에서 지기 싫다고 최대한 크고 세게 불렀다고 한다. 당연히 이러한 스타일은 일본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재일교포 2세 출신인 유명 엔카 가수인 미야코 하루미에게 태권도 파워라던지 김치 파워를 자제하라는 조언을 들었다고 밝혔다. 한편, 미야코 하루미는 김연자가 일본 두번째 진출 당시 아무 곡도 받지 못해서 무작정 찾아가자 암야항로라는 곡을 받을 수 있게 도왔다. 이러한 인연인지 일본의 불후의 명곡에 해당하는 프로그램에 나가서 김연자가 미야코 하루미의 노래를 펑펑 울으며 불렀다. [17] 공생원은 일본계 한국인 윤학자 선생이 세운 곳으로 한일 양국에서 활동하는 김연자에게 특히나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공생원은 그 밖에도 추성훈의 기부도 있었다. [18] 다만 당시의 매니저였던 전 남편이 돈을 받아가서 처리해서 정확히 얼마였는지는 본인도 모른다. [19] 해당 곡은 트롯신이 떴다에서 이미 한 번 부른 적이 있었다. [20] 일반인이 전라도 출신이라면 알아 챌수 있다. [21] 당시 진해성 가수 임수정도 있었다. [22] 존재 유무 불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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